rewr2024-12-09 08:09:24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법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늘 시사회는 그대로 진행됩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니, 오셔서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면, 12월 4일 오전 9시 49분에 발송된 문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초현실적인 내란 획책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지금 ‘영화 따위’가 문제냐며 퇴근 후 곧바로 어느 집회 현장이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문자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언젠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가 떠올랐다. 참사 후 가수들이 예정대로 콘서트를 진행하자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때, 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다. ‘그럴 거면 앞으로 음악으로 위로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우리는 지금 예술이 ‘하찮아지는’ 시국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이 예술을 초월하는 기막힌 상황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에서 이 시국을 헤쳐 나갈 용기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며, 나는 내란범과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에 맞설 ‘사소한’ 방법 중 하나를 떠올렸고, 되새겼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펄롱의 걷는 장면이다. 그의 걷는 모습을 비추거나, 그가 걸으면서 마주했을 법한 풍경을 비추는 장면 말이다. 펄롱이 일상적으로 걸으며 마주하는 그 모든 사람과 풍경에서, 그는 정동 소외자다. 펄롱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대로 느끼지 못한다. 펄롱은 학대당한 가난한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동전을 건넨다. 수녀원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학대당한다는 낌새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펄롱을 나무란다. 퍽퍽하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현재의 안온한 삶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그들에게서 마음을 끊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펄롱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펄롱은 종종 그 길을 오르며 헉헉거린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석탄을 배달하는 펄롱은 거친 솔로 손가락과 손톱 구석구석에 낀 석탄 가루를 닦아낸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흔적도 없이 닦아내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펄롱은 헷갈린다. 수녀원에서 본 소녀들에게서 사랑하는 딸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펄롱은 그들에게서 고아인 그를 조건 없는 선의로 돌봐준 어른들 덕분에 번듯하게 성장한 그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본다.

이제 펄롱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솔직할 것인가, 모두의 요청에 따라 막강한 영향력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에 눈감을 것인가. 펄롱은 이 문제를 거창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수녀원에서 마주한 소녀 세라와 함께 걸으며, 수녀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걸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펄롱은 수녀원에 갇힌 ‘사고 치는 여자’와 ‘사랑스러운 딸’ 사이에 놓인 임의의, 우연적인, 불분명한 구분선을 지워낸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감각, 감정과 정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펄롱은 그저 세라의 손을 잡고 길을 걸음으로써 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아일랜드 수녀원에서 대규모로 자행된 소녀들의 노동력 착취 및 감금, 학대 사건에서 출발한다. 원작 소설을 쓴 클레어 키건에 따르면, 1996년에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기 전까지 수녀원에 감금당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소녀의 숫자는 최소 만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한다. 9천 명의 소녀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금의 명분은 ‘타락한 여성’의 수용이었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가?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질문해보면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고 맞서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압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펄롱처럼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변화와 저항을 모색할 수 있다. 자기 감각과 경험을 믿는 것이 출발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감각과 경험이 누군가의 삶과 생명, 개별 인간들의 관계성,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규칙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짓밟는 것으로 지향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내란범들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과 감각이 중요할 것이다. 불완전하고 문제투성이일지라도, 우리 일상의 토대를 이루는 연결망을 어떻게 더 확대할 것인지가 기준이어야 한다.
담담한 소박함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각자와 서로의 삶을 꾸려온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말하는 듯하다. 내면에 침잠해 세상을 짊어진 펄롱의 용기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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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홀한 세계관만으로도 충분히 한 몫하는
스튜디오 지브리는 일본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독자적인 세계관과 매력을 겸비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이다.
그래서 흔히 어떤 작품을 설명할 때 "지브리 애니메이션 같다" 라고 부르는 이들도 존재할 정도이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사슴의 왕>은 실제로 감독과 스태프가 지브리 스튜디오 출신이므로 이 말에 충분히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스타일도 말이다.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안도 마사시, 미야지 마사유키 공동 감독 작품으로 두 감독 모두 스튜디오 지브리 출신으로 유명하다.
또한 스태프들도 스튜디오 지브리 출신이라 실제로 본 영화의 스타일을 보면 지브리 느낌이 많이 나는 편이다.
소수민족의 전사부대 외뿔의 단장 반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국의 소금 광산에서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광산에 검은 맹수들이 습격해오고, 늑대에게 물리는 상처를 입었지만 버려진 여자 아이를 구해내게 된다.
한편 검은 맹수들로부터 퍼지는 전염병이 제국에 퍼지게 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여러 여정의 이야기.
제작사는 그동안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프로덕션 I.G.인데다가 두 명의 감독 또한 지브리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확실히 영상미와 연출은 더할나위없이 훌륭하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디자인과 세계관을 살려내는 영상미는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장황한 소설을 2시간 조금 안되는 러닝타임에 담는것은 역시 무리였는지, 원작의 고유 명사에 대한 설명의 미흡이라던가 일부 장면들의 인물 감정 묘사가 급진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TVA 연계 극장판과는 다른게 원작을 안 본 관객도 즐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앞에 서술한 영상미와 연출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애니메이션임은 부정할 수 없다.영상미와 세계관의 시청각적 미(美) 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애니메이션.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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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스마트폰 속에 있지 않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실렸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음악교과서에 빅뱅이 나온다는데...
다시 청춘. 청춘이라는 말은 때때로 면죄부가 된다. 조금 서툴러도 그러려니 해 주는 시기가 청춘이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기는 참으로 냉혹하다. 그러려니 해주면서도 봐주는 법이 없다. '네가 애냐'에서부터 '어린 놈의 자식이'까지. 그렇게 주변인인 채로 시간이 흐른다.
청춘시련. 청춘에 겪는 흔하고 공감되는 시련에 관해 말할 것만 같다. 누구나 지난한 청춘을 보내왔고, 저마다 자랑할 만한 어려운 시기들을 넘겼으리. 시기는 다를지언정 청춘은 개인의 것을 넘어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 이 청춘은 다르다. 청춘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고 붙여서도 안 되며, 청춘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청춘보다는 '시련'에 집중해야 하는데, 고난과 몹시 어려운 수행 같은 시련이 아니라 弒戀, 죽일 시에 그리워할 련이다. 연인할 때 연. 그리하여 영제는 Terrorizers.
유팡의 집에 같이 사는 밍량. 어느 날 남자친구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그 복면 쓴 강도는 참으로 허술한데, 대낮에 장검을 휘두르고도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을까?
밍량은 VR로 혼자 검술을 연습했다. 검술이라고 하면 너무 고상하고, 평소 죽어라 하던 게임에서 캐릭터들을 칼로 찌르던 것에 과몰입했다고 보면 되겠다.
'찐따'라는 단어가 썩 좋진 않은데 그 단어를 대체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밍량은 찐따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하는 건 핸드폰 게임과 av영상 보면서 자위하기 뿐이다.
그가 보는 av영상의 주인공은 모니카. 모니카는 돈 때문에 성인물을 찍게 된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모니카에게 준 것들을 다 뺏었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유팡의 연극 극단 동료라, 집에서 하루를 머문다. 밍량은 문틈 사이로 그들을 훔쳐본다.
밍량은 식당도 같은 곳만 간다. 그곳에는 선원요리사였지만 이제 땅에 터를 내리고 싶은 둥링이 있고, 식당 딸 키키는 코스프레에 완전히 과몰입한 오타쿠다.
키키는 게임 외에는 무신경한 밍량을 방으로 초대한다. 애니메이션 코스튬을 입고 밍량의 앞에서 코스프레를 하는데, 밍량은 키키를 덮치려든다.
'이런 옷을 입었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밍량은 술취한 마사지사를 가게에 데려다준 인연으로 마사지사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마사지사는 밍량의 말을 다 들어주고 믿어주는, 사실상 유일한 현실 인물이다. 마사지사에게 밍량은 "썸녀"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밍량은 한 남자를 습격한다. 하지만 실력이 썩 좋지는 못하여 밍량도 팔에 부상을 입는다. 어쩌다 다쳤냐는 마사지사의 말에 밍량은 대답한다. 썸녀의 전남친에게 복수를 해줬다고.
밍량은 썸녀가 살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간다. 썸녀의 아파트에는 썸녀와 유팡이 함께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제 헤어져야 한다. 밍량은 그들을 '불법촬영'한다.
그리고 출국하는 모니카의 뒤를 쫓다가, 갑자기 다가가 사랑한다느니, 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느니, 지켜주겠다느니. 모니카가 싫다고 하니 이제 한국에서 뻔한 레퍼토리가 나온다. "왜 안 만나주냐"는 거.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감히 네가 말 왜 안 만나주냐는.
경찰들에게 저지당한 밍량은 모니카의 아파트로 또 찾아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은 키키와 그의 친구가 촬영을 왔고, 촬영이라는 근사한 말 대신 우리나라의 경우 음란게시물 같은, 트위터의 노출 계정 비슷한 그런 일을 한다. 촬영자 역시 키키의 연기를 보고 키키를 덮치려 한다.
밍량이 하필 거기에 있으니 키키를 구해주긴 하는데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팡과 둥링의 쓰임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정치인의 딸, 이혼가정에서 버려진 자녀, 그래서 늘 애정을 갈구하는 역할. 그 애정의 방향이 둥링과 모니카에게 향하는데, 이야기는 모니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둥링의 존재감도 미미하다. 이 영화는 밍량만을 생각하는 것도 머리가 아프다. 청춘이라는 주제에 관한 고민보다는 오타쿠 문화나 동성애 같은 나름대로 핫한 소재에만 집중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왜 안 만나줘'를 이유로 폭력을 행하는 뉴스 기사들을 너무 많이 봐서 넌더리가 나는데, 대만에서는 이런 일이 청춘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란 말인가. 찐따 오타쿠남이 음침함과 망상으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 왜 안 만나주냐는 이유로 그 집에 사는 세 모녀를 살인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이다.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젊어서 할 수 있는 열정과 뜨거운 사랑과 방황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로, 매너있게 하자. 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은 가져야 하지만 우리는 리얼리스트여야 하지 않겠나.
청춘시련(Terrorizers)
감독 : 호위딩
출연 : 임백굉, 이목, 진정니, 요애녕
상영시간 : 127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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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주어진 환경 속에서 운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다
박혁지 감독의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기대를 했던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 영화 <행복의 속도>라는 작품을 통해서 처음 알게된 감독이었는데 그 때 잔잔한 감동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줘서 꽤 여운이 오래갔었다. 이번 작품이 자연을 소재로 한 테마는 아니지만 또 다른 결의 여운을 선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폐막일에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 시놉시스
산속에 사는 할머니 경원과 손녀 수진은 무당이다. 아침마다 신에게 정화수를 바치는 것이 이들의 중요한 일상이다. 고3 시절, 무당이 되기 싫어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한 수진은 결국 대학에 합격하지만 대학 생활의 재미에 빠져 주말이 바빠지자 할머니와 갈등한다. 4학년이 된 수진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결국 평일에도 일하는 전업 무당이 된다.
* 이 이후로는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통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특징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카메라가 눈앞에 보이는데 과연 자신을 꾸며내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었다. 이제까지 봐왔던 다큐멘터리는 한 직업을 소개하거나 한 시대를 담아내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주로 봐왔던 탓에 무언가 사람의 감정적인 부분을 다루는 작품들은 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에서는 무당의 길을 택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보니, 그 과정에서 충돌하는 감정적인 부분도 굉장히 리얼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할머니와 수진이 다투는 리얼한 장면을 보면서 저 장면에서는 카메라만 두고 나간 것일까...? 과연 촬영감독도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출연자와 얼마나 서스름없이 친해졌기에 이런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큐멘터티를 찍는 과정에 있어서 출연자와 제작진의 감정적 유대 관계가 잘 느껴진 순간이었다.
불확실에 대한 불안감
사실 심심하거나 불안할 때 유튜브 들어가서 타로를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조금이나마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진다. 우리가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미래에 확신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불안함을 덜어보고자 하는 욕망. 이 욕망을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무당협회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만 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미래를 점치고 과거의 액운을 물리쳐주는 무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당하는 게 심리적으로 타격감이 적을뿐더러 다양한 비용을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망 속에서 존재하는 무당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
과연 내가 만약 무당이 될 팔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희노애락이 모두 담긴 작품을 보면서 과연 내가 만약 저 상황이라면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수진은 결국 자신이 무당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면서 무당으로서 긍정적인 부분을 보며 살아간다.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 일수도 있고, 그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그래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그들이 이 힘든 세상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에 만족한다는 모습을 보면서 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담담할까 싶었습니다. 같은 20대로서 하고 싶은 것도 많을텐데, 자신의 운명과 선택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르 던져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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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풍 | 모두까기가 실현할 초인이라는 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통령 '장일준'(김홍파)과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의 정경유착 비리 혐의를 포착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그는 정권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자기 진영이 배출한 대통령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자신의 정치적 멘토이지만, 자기가 믿는 신념에 대통령이 배치된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통령과 부총리는 재벌에게서 받은 막대한 자본, 검찰과 법원까지도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 민주 항쟁 시절부터 다져온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인맥 네트워크를 활용해 반격한다. 오히려 검찰 수사를 받고 정치적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한 박동호. 이에 그는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 정치권의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하기로 결심한다.
새 시대를 촉구하는 정치 스릴러
사실상 양당제에 가까운 한국 정치권은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한쪽에 산업화 유산을 물려받은 우파가, 반대쪽에는 민주화 시대를 일궈낸 좌파가 있다. 양 진영의 공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 세력 모두 과거의 영광만 붙잡고 있다는 비판도 피할 수는 없다. 개헌을 통해 87년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는 게 그 방증이다.
권력 3부작을 집필한 박경수 작가와 넷플릭스가 처음으로 협업한 작품 <돌풍>은 바로 이 문제의식을 구현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남한이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는데도 여전히 태극기 부대에 매달리는 우파 정치인도, 아직도 민주 항쟁 시대를 살아간다고 착각하며 자기 기득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좌파 정치인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들과 상부상조하는 재벌과 검찰 역시 비판의 칼날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두 진영의 비리나 부패를 1차원적으로 비난하거나 단순한 정쟁으로 묘사하지 않아서 더욱 인상적이다. <돌풍>은 자칫 추잡하기만 할 수 있는 정쟁을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 곧 초인이 되지 못한 이와 초인으로 거듭난 이의 갈등으로 풀어낸다. 그 덕분에 <돌풍>은 몇몇 기술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패를 진영의 실패로 확장시키고, 새 시대와 미래를 향한 갈망과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무언의 경계를 넘어서다
그간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정치극은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수년간 비슷한 선악 구도와 메시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실화 기반 작품은 대체로 민주화 이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민주 항쟁이나 군부 쿠데타 사건을 소재로 삼아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이들의 숭고함과 희생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서울의 봄>이 그랬고, 그 이전에 <1987> 같은 작품도 다르지 않았다.
허구의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검찰과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역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정재의 <보좌관>이나 조승우의 <비밀의 숲>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주인공은 <60일, 지정생존자>처럼 재벌, 검찰, 군부 같은 전통적인 기득권층에 저항하고 개혁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이른바 시민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많았다.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 대통령을 연상시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돌풍>은 다르다. 그간 많이 다루지 않은 2000년대 이후의 현대 정치사를 관통한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의 굵직한 정치 이벤트를 쪼개고 비틀어서 대체역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장일준 대통령만 보더라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점, 아들을 비롯한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은 점, 이후 소속 정당과 검찰 간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을 보면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을 섞은 캐릭터인 게 분명해 보인다.초인이 되지 못한 낙타와 사자
이 대체역사의 핵심은 초인이다. 진영 구분 없이 초인이 되지 못했고, 초인이 되겠다는 초심을 잊어버린 정치인의 모순과 폐부를 찌른다. 니체는 사람을 낙타, 사람,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한다. 낙타는 그저 세태를 따르기만 하는 인간이다. 사자는 당대의 권력과 강압에 저항할 줄 아는 인물이다. 사자가 저항의 고통과 허무함을 하나의 놀이처럼 긍정하고 수용하면 어린아이, 곧 초인으로 거듭난다.
이때 초인은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종교, 도덕, 이념의 영역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자극 삼아 새롭게 삶을 개척한다. 기존의 선악 같은 지배적 가치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만의 신념과 목표, 사명을 만들어 실천에 옮긴다. 그러다가 몰락하더라도 그조차 수용하고 사랑할 줄 안다. 즉, 가혹한 삶까지도 마주 볼 수 있는 용기로써 매번 자신을 쇄신하는 사람이 바로 초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돌풍> 속 인물은 대부분 낙타 혹은 사자다. 우파 대표이자 태극기부대의 정신적 지주인 '조상천'(장광)은 낙타다. 납북된 아버지가 전향자로 대우받으며 잘 지내자, 아버지와의 인연을 철저히 부정하고 누구보다 악랄한 공안검사가 됐다. 반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며 그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는 대신 순응했고, 자기 스스로 북한과 관련이 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이를 떨쳐낼 용기도 없다.
반면에 정수진은 사자다. 전대협 소속 대학생으로 학생 운동에 투신했고, 훗날 남편이 된 전대협 회장 '한민호'(이해영)를 지키려고 온갖 고문을 견뎌냈다. '민주주의 만세'라는 문구를 감방 벽에 새길만큼 강인한 의지를 지녔고, 끝내 군부 독재와 공안 검찰 세력을 쓰러뜨린 후 경제부총리까지 됐다. 장일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정수진의 멘토이고, 정경유착을 뿌리 뽑겠다는 일성을 내세워 대통령까지 당선된 민주 세력의 거두였다.
초인이 되지 못한 이들의 가짜 초인
이때 <돌풍>은 낙타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낙타가 초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조차 갖지 않는다. 대신 사자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대신 낙타로 퇴보한 모습을 비춘다. 더 나아가서는 낙타를 초인으로 가장하는 비열함을 비판한다. 성경이나 삼국지 같은 고전의 문구, 카이사르를 비롯한 역사적 인물의 사건을 인용한 비유 덕분에 비판의 칼날은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정수진과 장일준. 두 사자는 저항하는 삶에 지쳤고, 그 고통이 괴로워졌다. 그래서 고통에 굴복하고, 보상 심리에 빠져든다. 권력을 잡아 이루려던 신념은 잊고, 자기 기득권에 문제가 되는 동지는 거침없이 쳐낸다. 사모펀드를 이용해 불법 이익을 창출하고, 그토록 혐오하던 재벌과 검찰을 방패로 삼는다. 기득권 타파를 위해 젊은 날을 불태웠던 사자들은 이제 기득권에 안주하고, 젊은 시절을 보상받겠다는 낙타에 불과해진다.
둘만의 일탈도 아니다. 그들 진영의 전반적 경향이다. 정수진의 남편 한민호가 대표적이다. 전대협 의장까지 했던 이 인물은 불만으로 가득하다. 다른 선후배들이 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면서, 자기는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며 불법 투자를 이어간다. 정수진의 뇌물을 받은 후 그녀 요구대로 조합을 움직이는 노동조합 간부도 마찬가지다. 의기와 투지로 가득했던 사자들이 낙타로 퇴화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그들에게는 초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허상 뒤에 숨는다. 정수진은 비리 혐의를 받던 장일준이 사망하자 그를 성역화하며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한민호가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하자 그가 누구보다도 청렴 결백하다는 도덕적 허상을 만들어 그 뒤에 숨는다. 자기가 부패한 기득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대신, 가짜 영웅을 내세워서 그저 과거의 구호를 되풀이할 뿐이다.
진짜 초인을 꿈꾸다
<돌풍>은 가짜 초인 뒤에 숨은 사자들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허상을 파괴하고, 그들이 되지 못한 진짜 초인을 보여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바로 주인공 박동호와 그의 조력자들이 바로 그 초인이다. 그들은 국가의 영웅이 되겠다거나,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다만 자기가 믿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을 수용하고,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속한 조직과 진영으로부터 늘 버림받는다. 검사일 때도 검찰의 관습과 규범에 저항하다가 검찰에서 쫓겨났다. 자기를 영입한 장일준 대통령에게 직언을 멈추지 않고 그의 아들과 정수진의 비리를 파헤치다가 토사구팽 당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목숨을 내던져 정쟁에 임하고, 매번 돌파구를 찾아낸다. 대통령 시해 시도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이를 정적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탄핵 위기를 역이용해 정적의 비리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 끝에서는 정수진을 비롯해 부패한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정치 개혁을 일궈낸다. 이처럼 자기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크고 상대하는 적이 강할수록 오히려 발전하는 것 또한 초인다운 행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돌풍>은 어느 한쪽 진영만 비판하는 작품이 아니다. 박동호를 거울삼아 초인이 될 의지가 없는 양쪽 모두를 꼬집는다. 확고한 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양측이 정치적 거래를 하며 상부상조하는 구조도 같이 비판한다. 다만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다. 박동호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면, 낙타에 불과한 우파 진영과는 달리 한때 사자였던 좌파 진영이 초인을 배출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 듯하다.
단점마저 묻어버린 메시지
사실 <돌풍>은 완성도가 다소 부족하다. 박경수 작가의 이전 작은 경제, 금융, 법률에 대한 폭넓은 지식 뒷받침된 덕분에 권력 싸움을 더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었다. 반면에 <돌풍>은 대통령 시해, 대선 후보 교체 시도, 대선 직후 탄핵 결의, 대통령의 범죄 자백과 검찰의 대통령 수사 등 개연성이 부족한 사건이 많다. 반격과 재반격이 오가는 상황과 구도를 만들어 몰입도를 높이려는 시도가 후반부로 갈수록 무리수로 보일 정도다.
이에 더해 완급조절도 부족해서 피로감이 크다. 모든 에피소드를 강강강강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어떤 반전이 있어도 놀랍지 않다. 한 에피소드 내에서도 박동호와 정수진이 수 차례 엎치락뒤치락하기에 더욱 그렇다. 결국 두 주인공도 사건에 휘말려 떠내려 가는 듯한 느낌이 짙다. 그들의 심경이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지점이 많지는 않기 때문. 12부작보다 더 짧고 굵게 끝내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이유다.
그러나 단점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힘이 워낙 강해서 다소 투박한 만듦새마저 가려지기 때문. <돌풍>은 시청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 중에 어떤 단계로 살 거냐고. 정치인이 지시하는 대로 휩쓸리고 싶냐고 묻는다. 노재팬 팻말 일장기에 파란색을 덧칠해서 태극기 시위를 하거나, 이성과 논리가 대신 감성에만 호소하는 정치인을 종교 지도자처럼 따르며 굴종할 것이냐고.
<돌풍>은 정치인의 철학과 목표가 아니라 각자의 소신과 이익대로 권리를 행사하는 사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럴 때에만 타인의 잘못에 맞서고 자기 잘못에 대한 죗값을 받아들이는 그런 초인을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돌풍>은 정치적 지향이 어떻든,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자기 자신과 지지하는 진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초인이 되지 못한 낙타와 사자를 밟고 일어서는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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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버스라는 늪에서 악전고투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바네사를 되살리고 일상을 되찾은 '데드풀/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데드풀은 이제 어벤져스에 가입해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바네사'(모레나 바카린)와도 이별한 후 '피터'(롭 딜레이니)의 도움을 받아 중고차 딜러 일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온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과 함께 엑스맨 유니버스가 소멸될 상황이 되자, TVA에서 데드풀을 MCU의 일원으로 캐스팅한 것. 데드풀은 '마블의 예수'가 될 것이라 들뜨지만, 흥분도 잠시.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를 곧장 파괴하려는 '패러독스'(매튜 맥퍼딘)의 음모를 눈치채고, 자기 우주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모든 면에서 상극이고, 자기 우주를 구하는 데 실패한 또 다른 '울버린'과 함께.
MCU의 예수는 되지 못하다
2024 슈퍼볼에서 처음 공개된 <데드풀과 울버린>의 티저 예고편. 2분 남짓한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개 24시간 만에 3억 6,5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기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3억 5,550만 조회수를 뛰어넘었다. 특히 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바로 마블의 예수님이야"라는 데드풀의 대사는 MCU와 멀티버스 사가에 신선한 피가 수혈될 거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데드풀과 울버린>은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 못했다. 데드풀과 멀티버스 사가의 만남 자체는 인상적이다. 데드풀만의 특색과 입담을 살려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사가를 작품 내에서 풀어냈다. 엑스맨 버전 <노 웨이 홈>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엑스맨>,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블레이드>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과거 마블 캐릭터들에게 명예로운 엔딩을 안겨 주었다.
다만 MCU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멀티버스 캐릭터에게 내준 공간만큼 데드풀과 울버린의 자리가 줄었다. 그 결과 데드풀도, 울버린도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휴 잭맨이 복귀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을 정도다. 프로모션 과정 내내 강조한 데드풀과 울버린의 버디 무비라는 개성도 덩달아 옅어진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의 구세주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폭스의 <노 웨이 홈>
데드풀의 가장 큰 개성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작품 내외를 오가며 히어로 영화의 금기를 전부 다 깨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면서도 따로 노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MCU는 이를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의 가교로 삼았다. 데드풀의 입담과 액션을 활용해 작품 외적인 이유로 퇴장했던 캐릭터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주고, 세계관 자체는 멀티버스 속에 남겨두며 미래를 기약한다.
당장 기본적인 스토리부터가 현실의 은유다. 데드풀이 자기 우주를 파괴하려는 TVA에 맞서는 것은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종료된 엑스맨 유니버스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우주에서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울버린의 모습도 마치 엑스맨 유나버스의 종료를 막지 못한 현실의 울버린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과거 마블 영화 캐릭터를 지배하려는 카산드라 노바와 싸우는 것 또한 MCU에 병합돼야 할 엑스맨 유니버스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다시 못 볼 캐릭터로 가득하다. 촬영은 완료했으나 공개되지 못한 채닝 테이텀의 갬빗과 <로건> 속 로라를 비롯해 파이로, 토드, 아자젤, 저거너트 같은 조연이 재등장한다. 이에 더해 크리스 에반스의 휴먼 토치, 제니퍼 가너의 엘렉트라,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 등 과거의 영웅도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즉, <데드풀과 울버린>은 20세기 폭스 버전의 <노 웨이 홈>이다.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예전 마블 영화의 추억을 지키려는 메타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MCU 멀티버스 사가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일단 엑스맨 유니버스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판타스틱 포>, <블레이드>, <데어데블>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조차 알 수 없다. 또 <로키> 시즌 1을 보지 않으면 TVA, 보이드, 알리오스와 신성한 시간대 같은 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갬빗의 경우에는 디즈니-폭스 인수 사가와 관련된 뒷이야기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되지 못한 울버린
그러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완성도는 <노 웨이 홈>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 하나를 놓친 까닭이다. <노 웨이 홈>의 힘은 과거의 두 스파이더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의 원천이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가 그린 고블린을 치료하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가 추락하는 MJ를 구해내는 모습은 팬들의 상상과 염원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도 비슷한 방식으로 울버린을 활용하려 한다.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로건을 기존의 엑스맨 유니버스로 불러와서 그가 다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울버린이 지난 20여 년간 엑스맨 시리즈에서 활약한 울버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전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이번 울버린은 관객과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교류할 길이 없다.
불친절한 전개는 문제를 더 키운다. 멀티버스의 울버린이 좌절한 이유나 정황은 실감하기 어렵다.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대사로만 제시되기 때문. 그가 엑스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고, 로라가 멀티버스의 로건에게 그의 본성과 영웅성을 일깨우는 대화도 임팩트가 부족하다. <노 웨이 홈>에서 과거의 스파이더맨이 MCU의 스파이더맨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백하다.
이 괴리감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데드풀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로건>에서 묻힌 울버린의 무덤을 파헤친다. 그러고는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뼈를 이용해서 자신을 뒤쫓아온 TVA 요원들을 때려잡는다. 물론 분위기나 연출 자체는 데드풀답게 유쾌하고, 데드풀도 관객에게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기기 어렵고, 이번 울버린과의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울버린과 함께 무너지는 데드풀
이에 더해 <데드풀> 영화인데도 데드풀의 서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데드풀> 시리즈의 매력은 평범한 주제나 메시지를 데드풀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1편은 로맨스 영화를, 2편은 가족 영화를 B급 유머로 범벅해 흥미롭게 풀어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데드풀. 그는 MCU의 어벤져스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한 후 크게 좌절했고,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맸다. TVA에서는 마침내 MCU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그 꿈도 포기한다. 친구들과 그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인 울버린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는 울버린과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 결과 데드풀의 서사는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상황 설명 대사로 자주 대체된다. 일례로 데드풀의 우주가 위험하다는 상황 설명도 패러독스의 대사로만 언급되니 실감하기 어렵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의 끝에는 데드풀다운 유머만 남는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 내레이션 없이는 데드풀만의 서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드풀도, 울버린도 없는 버디 무비
전반적인 만듦새도 덩달아 미흡해진다. 두 주연 개개인의 서사가 부족하니 버디 무비인데도 둘의 호흡은 매끄럽지 않다. 예를 들어 울버린은 갈수록 데드풀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다. 새로운 울버린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가운데 시리즈 내내 데드풀을 봐온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꼭 보여줘야 할 멀티버스 이벤트를 먼저 설계한 뒤, 데드풀과 울버린의 행적을 짜 맞춘 듯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뒤바뀐 듯 보이기도 한다. 중반부 보이드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작중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러 돌연변이와 히어로들이 뒤엉켜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마치 <엑스맨: 최후의 전쟁> 속 알카트라즈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과거 시리즈와 캐릭터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기에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에 반해 데드풀과 울버린이 데드풀 군단을 마주하는 시퀀스는 임팩트가 부족하다. 물론 <올드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를 연상시키는 액션 자체의 쾌감은 나름 인상적이고, MCU의 멀티버스 설정을 비꼬는 대사는 유쾌하다. 하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단순한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퀀스를 들어내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악역의 존재감이 확실했다면 상술한 문제는 다소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는 능력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그녀는 '보이드'로 떨어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시간선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역의 클리셰를 비튼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개인사마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가 울버린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바꾸는 전개 또한 다소 급작스럽다.
MCU의 고질병이 또 도지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이 줄곧 노출한 문제점의 연장선이다. 이번에도 세계관 정리에는 성공했다. 꼬여버린 엑스맨 유니버스에게 깔끔한 엔딩을 선사하고, 이전 마블 영화와 MCU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후 MCU가 선보일 <엑스맨>과 <판타스틱 4>, <블레이드>, <데어데블> 등을 위한 길은 닦은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는 데드풀이나 울버린이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지반을 정리하고 기초 공사까지는 완료했지만, 정작 그 부지 위에 무슨 건물을 올릴지 조감도조차 못 보여줬다. 그러니 MCU의 구세주라고 부르기에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남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크다.
Acceptable 무난함
데드풀과 울버린도 빠져나오지 못한 멀티버스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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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원작 드라마 '마스크걸'
마스크걸
Netflix, 23.08.18 오픈
스릴러, 청소년 관람불가
한국, 7부작
원작: 네이버 웹툰 <마스크걸>
출연: 이한별, 나나, 고현정, 염혜란 등
무서운 거 못 보는 인간이
살인을 5~6번은 하는 '마스크걸'을 왜 보게 되었느냐...
이거 제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웹툰이거든요 ㅠㅠ
물론 오래돼서 웹툰 내용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드라마로 나온다고 했을 때부터 너무 기대 중이었어요!
근데 역시나,, 생각보다 더한 잔인함에
약 3~4일간 끊어서 본 것 같아요 후
미리 잔인함의 강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별 다섯 개 중 별 다섯 개입니다......
칼 총 유리 뭐 무기로 안 쓰는 게 없을 만큼,,,,,,
심지어 살인도 그냥 살인이 아닌 토막 살인일 만큼
굉장히 무섭고 끔찍해요
모두가 아시겠지만
성형 전 모미, 성형 후 모미, 중년 모미 배우가 모두 다르십니다
배우가 바뀐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없었고요
다만 7부작이라 그런가 전개가 훅훅 진행되더라구요
성형 전 2회, 성형 후 2~3회, 중년 2~3회 이렇게 꾸려져 있어서
모미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알긴 어려웠어요
마스크걸 모미 외에 다양한 캐릭터가 많이 나와요
마스크걸의 팬이자 모미의 정체를 아는 주오남,
주오남의 엄마 김경자, 모미의 딸 김미모,
모미의 첫 살인이 되었던 핸섬스님,
모미 회사 사람인 유상순, 이아름, 박기훈,
술집에서 일하다 만난 김춘애, 미모 딸 친구인 김예춘까지
웹툰은 150부작이었으니
다양한 캐릭터가 나와 전개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7부작으로 꾸리려면 인물을 좀 줄였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ㅠㅠ
회사 사람들, 주오남, 핸섬스님과 동시에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그 회차를 볼 때는 굉장히 짜임새가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뒤로 갈수록 그 캐릭터들은 거기에만 묶여 있고
모미 혼자 빠져나와 다른 에피소드를 진행하다 보니까
그들은 꼭 필요한 역할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부분의 캐릭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김경자와 김미모만 빼고요
마지막 에피소드를 담당하는 인물들이라 그런지
가장 파급력이 강한 캐릭터 둘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인지 중년의 모미는 주인공이란 생각도 안 들었어요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김미모라는 생각이......
+) 주오남을 죽인 김모미를 죽이려다 실패한 김경자가
그녀의 딸 김미모를 죽이려고 하는데요
가해자와 피해자로 엮인 관계라
안쓰럽기도 하면서 또 맞말이다 싶고......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아니다 어찌 보면 주인공은 김경자일지도 몰라요
아들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약 20년간,, 모미를 쫓아다니는 인물이거든요
죽을 위기가 4번은 있었던 것 같은데 불사신마냥 계속 살아돌아와요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
한두 번 살아오는 건 와 대박이다 싶은데
그게 4~5번 반복되면 그냥 어이없고 웃겨지거든요
'마스크걸'은 시간 구성을 특이하게 만들었어요
2009년이었다가 2023년이었다가
회차마다 2~3번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요
매번 자막에 적어 주니까 불편한 점은 없었는데
성형 후 모미의 감옥 생활은 왜 흑백 처리 했나 궁금해요
캐릭터의 감정선을 따라 흑백 처리한 거였다면
핸섬스님을 죽였을 때부터 흑백이었어야 하지 않나 싶고
과거 얘기를 하느라 흑백 처리를 하는 거였으면
2009년은 더 과거 아닌가 싶고... 설정 오류일까요
반전 요소가 많은 것도 좋았습니다
김경자에게 걸린 김춘애가
김모미는 X년이다, 내 인생의 걸림돌이다 얘기하지만
사실은 김모미와 친한 친구 관계였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김경자가 10년이 넘도록 미모에게 가스라이팅 했다는 것도
신선하고 신박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수많은 캐릭터들의 서사를 모두 보여 주지 못하니까
나레이션 처리하는 것도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어요
암튼 뭐,, 연기 잘하는 배우들 많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고현정 염혜란 안재홍 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나 님도 연기를 이렇게 잘하셨나 싶을 만큼 대단했고
신인인 이한별 님과 신예서 님도 완전 연기 천재시더라고요
특히 나나 님 춤추는 장면에서 반한 사람 한둘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역시... 애프터스쿨....................
저 사람이 까탈레나를 추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개예쁨
*스토리: 4/5점
*연출: 5/5점
*영상미: 4/5점
*연기: 5/5점
*OST: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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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 제작한 해적 애니매이션 영화 [영화리뷰/결말포함]
#해적영화#조니댑#스피븐스필버그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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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리뷰!! 절대 상어에게 문어지지마!!!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나의 문어 선생님을 K-문어 선생님과 리뷰 했습니다!
씨네마사지
? 황보랑 영화 보고 싶은 사람 모여라~?? ♀
거리두기 해제 기념 씨네마사지에서 첫 번째 이벤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
다가오는 5월 18일에 개봉하는 범죄도시2를 황보와 함께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신청해주세요 ↓↓
https://forms.gle/sAATgsdoStRCPH7v8
*신청 마감 5월 6일 금요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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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탑> 메인 예고편
중년의 영화감독이 오랜만에 만난 그의 딸과 함께 인테리어 디자인하는 여자의 건물을 찾는다. 딸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해서 그녀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디자이너는 직접 고친 그 4층 건물의 소유주이고, 자기가 어떻게 고쳤는지 보여주고 싶어 한 층씩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간다. 각층의 방을 다 열고 들어가 보는 세 사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시 밑에서부터 한 층씩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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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끼리와 나비> 메인 예고편
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앙투안은 얼떨결에 옛 애인의 딸 엘사를 보호하게 된다.
천사 같은 미소, 심장을 녹이는 애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5살 소녀가 낯설지 않다.
엘사도 앙투안에게 고백한다. "비밀이 있어요, 아저씨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서로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면, 그건 우리가 특별한 사이이기 때문일 거야.
존재조차 몰랐던 우리,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