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2-09 08:09:24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법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늘 시사회는 그대로 진행됩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니, 오셔서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면, 12월 4일 오전 9시 49분에 발송된 문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초현실적인 내란 획책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지금 ‘영화 따위’가 문제냐며 퇴근 후 곧바로 어느 집회 현장이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문자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언젠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가 떠올랐다. 참사 후 가수들이 예정대로 콘서트를 진행하자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때, 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다. ‘그럴 거면 앞으로 음악으로 위로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우리는 지금 예술이 ‘하찮아지는’ 시국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이 예술을 초월하는 기막힌 상황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에서 이 시국을 헤쳐 나갈 용기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며, 나는 내란범과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에 맞설 ‘사소한’ 방법 중 하나를 떠올렸고, 되새겼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펄롱의 걷는 장면이다. 그의 걷는 모습을 비추거나, 그가 걸으면서 마주했을 법한 풍경을 비추는 장면 말이다. 펄롱이 일상적으로 걸으며 마주하는 그 모든 사람과 풍경에서, 그는 정동 소외자다. 펄롱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대로 느끼지 못한다. 펄롱은 학대당한 가난한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동전을 건넨다. 수녀원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학대당한다는 낌새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펄롱을 나무란다. 퍽퍽하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현재의 안온한 삶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그들에게서 마음을 끊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펄롱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펄롱은 종종 그 길을 오르며 헉헉거린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석탄을 배달하는 펄롱은 거친 솔로 손가락과 손톱 구석구석에 낀 석탄 가루를 닦아낸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흔적도 없이 닦아내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펄롱은 헷갈린다. 수녀원에서 본 소녀들에게서 사랑하는 딸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펄롱은 그들에게서 고아인 그를 조건 없는 선의로 돌봐준 어른들 덕분에 번듯하게 성장한 그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본다.

이제 펄롱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솔직할 것인가, 모두의 요청에 따라 막강한 영향력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에 눈감을 것인가. 펄롱은 이 문제를 거창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수녀원에서 마주한 소녀 세라와 함께 걸으며, 수녀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걸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펄롱은 수녀원에 갇힌 ‘사고 치는 여자’와 ‘사랑스러운 딸’ 사이에 놓인 임의의, 우연적인, 불분명한 구분선을 지워낸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감각, 감정과 정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펄롱은 그저 세라의 손을 잡고 길을 걸음으로써 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아일랜드 수녀원에서 대규모로 자행된 소녀들의 노동력 착취 및 감금, 학대 사건에서 출발한다. 원작 소설을 쓴 클레어 키건에 따르면, 1996년에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기 전까지 수녀원에 감금당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소녀의 숫자는 최소 만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한다. 9천 명의 소녀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금의 명분은 ‘타락한 여성’의 수용이었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가?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질문해보면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고 맞서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압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펄롱처럼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변화와 저항을 모색할 수 있다. 자기 감각과 경험을 믿는 것이 출발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감각과 경험이 누군가의 삶과 생명, 개별 인간들의 관계성,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규칙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짓밟는 것으로 지향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내란범들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과 감각이 중요할 것이다. 불완전하고 문제투성이일지라도, 우리 일상의 토대를 이루는 연결망을 어떻게 더 확대할 것인지가 기준이어야 한다.
담담한 소박함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각자와 서로의 삶을 꾸려온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말하는 듯하다. 내면에 침잠해 세상을 짊어진 펄롱의 용기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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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새로운 캡틴과 함께 돌아온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국내 누적 관객 수 79만 명,
북미 누적 수익 약 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국내와 북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왕좌에 올랐습니다.
다만, 최근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첫 주 1위를 기록한 후, 빠르게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 로튼 토마토에서 평균 51%의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이번 신작이 과연 이 순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국내 박스오피스 2위는 누적 관객 수 71만 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인 8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리메이크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차지하였고, 누적 관객 수 246만 명을 돌파한 <히트맨2>가 3위입니다.
한편, 북미에서는 국내보다 한 주 앞서 개봉한 <패딩턴: 페루에 가다>가 2위를 기록하였고,
밸런타인데이를 겨냥한 슬래셔 무비인 <하트 아이즈>가 3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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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과 공포, 부유하는 시선들
** 본 리뷰에는 영화 <공포분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분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점차 얽혀들어가며 파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고정된 카메라에 시간을 담아 묵묵하한 시선으로 일상이 흔들리는 공포를 포착한다.
이립중과 그의 아내, 그리고 젊은 사진작가와 가출 소녀는 병렬적인 구조를 취한다. 아내는 이립중을 버리고 심씨에게로 떠난다. 사진작가는 소녀에게 빠져 여자친구와 헤어진다. 아내는 본인의 심경을 은연중에 소설로 드러내며, 사진작가는 사진을 통해 소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두 인물의 태도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아내에게 있어서 소녀로부터 걸려온 장난 전화, 그로 인해 발생한 잠깐의 의심은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할 구실이 된다. 아내는 이 상황을 소설에 담으며 죄책감을 떨쳐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며 내재된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사진에 대한 젊은 소년의 태도는 조금 더 순수하다. 그는 사진을 통해 사랑에 빠지고,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본다. 마침내 그의 암실, 창작의 장소에 사진의 주인공인 소녀가 찾아온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이 사진을 통해 본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잠시 소년의 사랑에 응해주는 듯하지만 이내 소년의 카메라를 훔쳐 달아난다. 소녀가 떠난 뒤 암실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소년이 조각조각 모아 붙여놓은 소녀의 사진은 바람에 흔들리며 해체된다. 이 장면은 소년이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반투명 커튼이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흔들린다. 커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만 커튼은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공간을 나눈다. 소설도, 사진도, 그리고 영화도 커튼과 같은 모호한 경계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본 시선이 전부 진실일 수도 없다. 시선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부유한다. 이는 고스란히 영화라는 더 큰 시선을 통해 제시된다.
영화는 여러 이미지를 끊임없이 중첩한다. 소강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도박장에서의 총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이립중의 아내와는 관련없는 장소인 도박장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독백은 말하는 주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내가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에서, 창문을 열자 창밖에 매달린 청소부가 겹쳐 보인다. 영화는 붉은빛이 비치는 소년의 암실에 이어서 붉은 조명의 화장실에 서있는 이립중을 비춘다. 겹겹이 쌓이며 이미지들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진다. 현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 사이 느슨하고도 교묘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 삶은 방향을 잃는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아내의 독백이 등장한다. 봄은 그저 계절의 반복일 뿐, 그걸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는 두 가지 결말이 중첩된다. 그리고 아내는 헛구역질을 한다. 총을 난사하는 이립중의 모습은 영락없는 테러리스트, 공포분자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는 어떤가. 또 소년과 소녀는 어떠한가. 아내의 헛구역질은 이립중을 향할지도, 혹은 어쩌면 공포분자일지도 모르는 스스로를 향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이립중의 죽음과 동시에 염원하던 임신의 전조가 나타난 것일수도 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공포분자>는 모호한 시선으로, 공존과 동시에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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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 주고 싶은 마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영화는 얼마 없어서 이 참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하여 글을 남기고 싶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짧은 장면들만 기억나는 영화였고 어떤 주제를 가진 영화인지는 잘 몰랐던 영화였다. 솔직히 지브리가 특유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색채와 분위기를 보는 재미이고, 특별한 주제를 찾으려고 보는 장르는 아니지만 그래도 '왜 그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가?'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틸컷
전쟁
영화에서 등장하는 시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시대이다. 분위기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시기와 비슷한 건축양식과 고풍이 느껴지지만, 그들의 무기는 현대 무기보다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각종 무기들과 하울과 같은 마법사들까지 전쟁에 참전하여 화려해 보이는 도시들 사이로 하루하루 폭발 소리와 거친 잔해들이 난무한다. 영화 제목에서 알다시피 하울의 심장으로 만든 악마 켈시퍼가 조종하는 움직이는 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성은 고철들과 잡동사니 물건들로 덕지덕지 붙여 만든 성의 모습이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 이재민을 의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전투 비행정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는 성의 장면, 특정한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은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에 붙어있는 고철은 전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철이다. 이런 철로 성을 만들었다는 점은 그만큼 전쟁의 참담으로 곳곳에 철이 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사랑과 심장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울과 소피, 황야의 마녀의 삼각관계가 이루어진다.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을 얻으려고 하울을 찾는다. 이는 하울의 마음을 얻기 위한 그녀의 행동이다. 하지만 하울은 소피를 좋아하고 소피 역시 하울을 좋아한다. 하울이 소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녀가 성 안에 들어온 뒤부터일 것이다. 하울의 성을 고철과 잡동사니로 뭉쳐진 외관처럼 내부도 먼지투성이와 잡동사니로 더러운 환경이었다. 그리고 소피는 그 내부를 청소하고 관리하며 성 내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하울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켈시퍼가 성을 만든 것이니 즉, 하울의 마음을 소피가 치유해주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황야의 마녀가 켈시퍼을 갖고 있다가 소피한테 뺏겼을 때 황야의 마녀는 울면서 "소피가 또 마음을 뺏으려 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하울의 마음과 하울의 마음으로 만든 켈시퍼까지 소피가 가져갔다는 사실에 질투의 눈물이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감정을 심장이나 성 내부 등으로 물체화로 표현한다.
동심(童心)
영화를 보면 동심을 지켜주고 싶고, 기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등장인물들은 성숙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소피는 장녀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으려고 하는 듬직함과 성숙함이 느껴지지만 그녀도 눈물이 많고 내면에 순수함이 있다. 하울은 전쟁도구의 수단으로 지쳐 보이고, 항상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설리번을 만나기 두려워하는 장면이나 그가 노랑머리를 고집하며 외모에 신경 쓰는 장면은 사춘기 시절 소년의 모습이 보이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겉으로 나이 들어 보이고 성숙해 보이기 때문에 마음까지 그렇게 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을 한 번쯤 보고 하울의 더러운 내부를 소피가 청소하여 말끔하게 차려놓은 듯 우리의 마음도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의 청소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어쩌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이들한테 순수한 동심(童心)을 보여주고 어른들한테는 동심(童心)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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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하는 모든 다큐들에게.
N년차 OTT 구독자로서, 넷플릭스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제일 좋아하는데, 항상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를 볼 때 어딘가 아쉬운 몇 % 의 부분들을 마저 채워주는 느낌이다. 그동안 봐왔던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겠다.
1. 섹스토피아(2017)
원제_Liberated: The New Sexual Revolution
미국 대학생들의 성에 대한 인식과 문화의 민낯을 확실히 알려준 다큐. 감독이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나와서 대학교 봄방학을 즐기는 모습을 촬영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성에 대해 다소 개방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에 사실 좀 많이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랑'의 개념과는 많이 멀어진, 그저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하루를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보내는 것이 다반사 된 그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사람을 한 인격이 있는 개체로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보는 비정상적인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SNS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에서 비추는 고정적인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게 되고, 소외되지 않기 위해 평소에는 하지 않을 법한 행동들을 하는 그들을 보면서 어딘가 씁쓸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바닷가에서 페스티벌을 즐기는 내내 그들은 남자들의 무차별적인 접촉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하고, 너무 대놓고 이상한 행동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맞서 대항하고, 당황해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이란 외적으로 무언가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치와 몸을 되찾고 심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런 실상을 촬영하고 있던 시기, 해당 구역에서 집단 강간 사건이 일어나 큰 파장을 일으킨다. 오히려 피해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 그 상황을 촬영하고 방관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크게 분노한다. 정말 점점 미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최근에 봤던 다큐멘터리 중에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은 작품이다.
2. 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2019)
원제_Fyre
FYRE, 이 축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용두사미이다. 셀럽 모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제껏 경험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축제인 양 홍보를 해놓고, 막상 초대받은 인플루언서들이 도착했을 때는 기본적인 주거시설조차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음악 페스티벌 하나를 준비하는데 드는 사람들의 노력과 수많은 비용을 한 사람의 무지와 우매함으로 인해 물거품으로 만든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최근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고, 처음 균열을 발견했을 때에도 그저 강압적으로 축제만 진행하면 된다는 식으로 마구 밀어붙인 대표의 태도에 말을 잃게 된다.
직장인으로서 개인적으로 사건의 흐름보다는 이 페스티벌을 담당하게 된 수많은 직원들이 겪는 심적인 고통과 스트레스에 나도 모르게 이입하면서 보게 되었다. 마치 마감일이 다가왔는데도 기본적인 틀조차 무시한 채 그저 마무리만 하면 된다는 상사에게 시달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심지어 급여 문제도 있어서 기존에 받기로 했던 금액조차도 받지 못하고 일을 진행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 사건이 끝난 후 지금까지 트라우마와 심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 축제에 초대받은 인플루언서들에게는 정말 인생에 몇 없을 비극적인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최고급 숙박을 제공한다는 것과 엄청난 게스트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한껏 기대하고 도착한 곳은, 왠 짓다 만 텐트였던 것이다. 심지어 방수시설도 되어 있지 않아 물이 새고,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었다고 한다. 대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기꾼인 게 분명하다. 제일 화가 나는 포인트는 이 모든 사건에 대한 판결 이후이다. 결국 이 대표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고, 지금은 또 다른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제2의 Fyre 사기극을 준비할지도 모르는 법이다. 오히려 핵심 사건보다 그 이후의 근황을 보는 게 더 힘 빠지는 일인 것 같다.
3. 슈퍼맨 각성제(2018)
원제_Take Your Pills
각성제라고 불리는 '애더럴'을 포함한 약물들의 남용 사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 또한 고등학교 입시 생활을 할 때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적은 있지만, 각성제를 주기적으로 먹어본 기억은 없다. 이미 지나치게 경쟁을 하고 있지만, 일종의 부스터로 각성제라는 옵션을 추가하게 된 사회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런 것에서도 사회 구조가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고소득층의 자녀들은 여러 가지 과외를 받으면서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가 비교적 많아지는데, 소득이 낮은 부모의 자녀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성적을 감당해내야 한다. 좋은 점수는 받고 싶은데, 자신이 없을 때에는 이런 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아이들의 인터뷰가 놀라웠다. 이 또한 어떻게 보면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ADHD가 있는 아이들이 애더럴을 섭취하게 되면 집중력이 좀 더 좋아진다고 믿는 부모들도 있다. 한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이 약을 통해서 더 잘 발현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약을 먹어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거의 10년간 약을 먹어왔는데, 실제로 이렇게 약에 의존하는 아이들의 수가 상당하다고 한다. 너무 어릴 때부터 약에 길들여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보다는, 순간의 완화 효과 때문에 득을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제법 많은 것 같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애더럴은 필수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증권사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먹는 약들 중 하나라고 한다. 대체 경쟁에서 이기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길래 다들 이렇게까지 하는지, 경각심까지 들게 한다. 심지어 어떤 제약회사에서는 업무 효율을 증가시켜주는 약을 개발 중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약으로까지 경쟁하는 시대라니, 다음엔 뭐가 될지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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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연성이 없다 욕해도 누구나 자신의 도어락을 다시 살펴볼 영화
영화 <도어락>의 시놉시스를 보면서 도대체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몰래 들어와 산다는 설정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기고 하면서 왜 저렇게까지 여심히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살려고 하는지 이해가 아되기도 하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 <도어락> 시놉시스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경민. 퇴근 후 집에 돌아온 경민은 원룸의 도어락 덮개가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한 마음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변경해보지만 그날 밤, 잠들기 전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 '삐-삐-삐-삐- 잘못 누르셨습니다'
공포감에 휩싸인 경민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그들은 경민의 잦은 신고를 귀찮아 할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얼마 뒤, 경민의 원룸에서 낯선 사람의 침입 흔적과 함께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자신도 안전하지 않음을 직감한 경민은 직접 사건의 실체를 쫓게 된다.열려 있는 도어락 덮개, 지문으로 뒤덮인 키패드, 현관 앞 담배꽁초, 혼자 사는 원룸, 이곳에 누군가 숨어있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도어락>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현실감 있는 공포를 그리다
대부분의 주거공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어락. 보편적인 소재를 가지고 스릴러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영화를 보는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영화를 보고 며칠 후 토익시험을 보러 아침에 나가려고 하는데 문이 열려 있어가지고 누가 들어와서 숨은 건 아닌지,, 집안에서의 동선을 되짚어보기도 했었다. 물론 내가 잠금설정을 까먹고 안해놓은 것이었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누가 현관문을 쿵쿵쿵 두드리는 걸 함께 경험한 적도 있었고, 야밤에 술드시고 집 위치를 잘못 찾아서 내 집 도어락에서 비밀번호를 계속 누르다가 안 열린다고 화를 낸 이웃 주민 분도 계셨고,,, 그 당시에는 뭐야? 왜 저래?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때 만약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였다면 엄청 무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장면들 중 일부는 한 번씩은 경험해 본 일이다보니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와서 그 공포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혼자 범인을 쫓을까?
굉장히 현실적인 공포를 잘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캐릭터가 굉장히 고전적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왜 영화 속에 나오는 피해자들은 항상 공권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며 혼자 고난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항상 이런 영화에서 경찰들은 무의미하게 능력이 없는 존재로 나오는 것일까?
그러한 캐릭터 설정이 이곳저곳에 아주 많이 봐왔기에 너무나도 익숙한 설정이어서 머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3초 스포가 진행되면서 분위기는 공포공포 스릴러스릴러 이긴 한데 머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저 집 비밀번호 공효진 네 집 비밀번호랑 똑같겠다”, “꼭 이럴 때 친구는 전화를 안 받지”, “지금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줘야지” 생각대로 이뤄지는 요술램프도 아니고 생각한 그대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을 봐야할까?
영화 리뷰를 올리려고 검색을 하다보니 영화 <도어락>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었다. 스페인 영화 <슬립타이트>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데 이 영화는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가해를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 영화로 재창작되면서 시점도 변화하고 캐릭터 설정도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영화 <도어락>은 전형적으로 한국 영화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 문법을 벗어나지 못해서 개연성 부족이라는 평을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연성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생활에서 한번쯤은 겪을 법한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서 꽤나 공포감을 선사한 것은 사실이었다. 스토리 전개가 엉망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이 영화가 끝나면 집을 한 번 둘러보고 비밀번호도 다시 한 번 체크해보지 않을까 싶다.
영화 <도어락>은 현실의 공포를 잘 풀어냈지만 개연성 부분에서는 아쉬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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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 리뷰
<라우더 댄 밤즈(2015)>, <델마(2017)> 등으로 이미 몇 차례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노르웨이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신작으로 찾아온다. 나는 감상한 적 없으나 이번 영화는 그가 감독한 오슬로 3부작을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라 한다.
제74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겠지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여성 주인공이 빛나는 작품이다. 요아킴 트리에는 미래와 사랑과 그 밖의 많은 외부적 요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여성의 성장 서사를 스크린을 통해 근사하게 보여준다. 어떤 면에선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2012)>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 혹은 자아를 모색하는 방식이 완전히 닮아 있지는 않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더라도 삶에 있어 ‘무용’이라는 최소한의 방향성을 쥐고 있던 27살 프란시스와 달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속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조차 힘들다고 토로하는 스물아홉 살 청춘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일러 주의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고전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글쎄, 이젠 고전이 된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로는 무엇을 떠올려 볼 수 있을까?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로마의 휴일(1953)>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 정도라면 충분한 걸까? 궁금하긴 하지만, 이 질문에 너무 많은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엔 우리가 모두 아는 클리셰, 그러니까 보장된 플롯이 존재하니까. 영화 초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남녀는 서로가 남극과 북극에서 온 사람처럼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온갖 사건을 통해 놀라우리만큼 가까워지고, 말미엔 완벽한 한 쌍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정석’이지 않나.
그런데 트리에 감독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다르다. 영화엔 분명 로맨스가 등장하고, 상당 부분의 서사가 주인공의 연애에 치중한 듯 보이나 그저 그뿐이다. 그 어느 누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율리에가 사랑을 쟁취하는 순간을 꼽겠는가. 감독은 망망대해 같은 인생의 한 지점, 로맨스라는 거대한 파도를 만난 율리에가 부단히 헤엄치는 모습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낭만적인 마술을 부리긴커녕, 시니컬한 태도로 로맨틱 코미디가 선사하는 장르적 환상을 걷어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율리에가 동거하던 남자 친구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꺼내는 순간 악셀은 율리에의 거주 문제를 꺼내고, 율리에와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가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합의한 기저에는 전 지구적 환경 문제가 얽혀 있다. 그래, 오로지 사랑에 기대어 모든 현실을 헤쳐 나가기엔 참으로 세상이 버겁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20세기를 살던 청춘에게도 미래가 그저 황금빛이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사랑이 무용하다 말하기보단, 차라리 율리에의 세계가 너무나 연약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보다 옳으리라. 그는 진로를 결정할 때조차 자신을 탐구하다기보단 성적에 기대어 의학도가 되었다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또다시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표면을 부유하다 사진을 배우게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선택을 용감하다 하였으나 서점에서 일하며 때때로 글을 쓰는 율리에는 여전히 자신에게 확신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맨날 이거 했다가, 싫으면 저거 했다가, 끝까지 해내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율리에가 찾은 해결책은 자기의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언뜻 그의 시도는 성공적인 듯 보인다. 악셀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에이빈드와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던 그가 이렇게 고백한다. “너와 있을 때 완전한 내가 되는 것 같아”. 그러나 이 말은 더없이 공허하다. 스스로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헛된 것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므로.
물론 이것이 개인의 성장에 있어 로맨스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율리에는 연인과 함께하던 순간에도 변화했고, 이별 후 자신에게 남겨진 옛사랑의 흔적을 통해서도 성장한다. 기실 영화는 악셀과 율리에가 사랑을 하던 순간보다, 사랑이 끝난 이후의 지점에 많은 공을 들였다. 율리에의 남자 친구 혹은 만화가로서의 악셀을 반기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네가 얼마큼 대단한 사람인지 믿게 해주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하는 그에게 애틋함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악셀은 시한부 선고까지 받는다. 소울메이트라 불러도 괜찮을 만큼 끈끈한 관계가 된 악셀과 율리에 사이에 남은 시간은 너무도 적다. 이별하던 날, 나중에 재결합을 할지도 모르지 않겠냐고 했던 율리에의 말은 그리하여 가정법으로만 머문다. 감독은 특별히 두 사람의 끝을 쓰라리게 그려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미화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초가을의 밤공기처럼 건조하다. 악셀과의 만남 이후, 에이빈드의 아이를 잃게 되는 율리에의 감정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 삶이 끝난다는 것을, 다가온 삶의 한 국면을 예비하고자 애쓴다 해도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채 가능성이 소멸할 수 있음을 배우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하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로맨틱한 정서는 굉장히 다면적이다. 마냥 행복하다고 말하는 대신 율리에에게 로맨스는 생명수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었다고 의심할 법한 무엇으로 다가온다. 어찌 보자면, 자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의 사랑이란 우리 문화의 기대처럼 삶 전체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대단할 수 없음을 꼬집는 듯도 하다. 더불어 결말부에서 감독은 율리에를 어떤 남성과도 맺어지지 않도록 설정하여 할리우드 특유의 로맨틱한 마법 장막이 오슬로에 드리워지지 못하도록 막았다.
단 한 번뿐인 미지의 삶
이렇듯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기꺼이 탈피한다. 영원한 사랑의 지속을 속삭이는 대신 오히려 매 선택이 불가역적이라는 지점을 강조한다. 율리에는 악셀과 헤어지기 전으로도 에이빈드를 만나기 전으로도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로맨스가 아닌 한 인물의 성장 서사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노르웨이라는 지구 반대편 국가, '2022 세계 행복 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에서 8위를 차지한 나라에선 인생을 배회하는 청춘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열두 개 챕터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갖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 친절하게 영화의 구성을 예고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 영화는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표지와 목차를 읽은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니, 영화관에 앉아있더라도 관객은 이 영화가 지금 이야기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아무리 각 챕터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들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혹은 소설- 속 주인공인 율리에는 자신이 현재 인생의 어떠한 지점에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언젠가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막연한 예감과, 지금 이 상황보다는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만을 품은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선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넘어야 한다. 유명하디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만큼, 이 과정은 당연히 평탄할 수 없다. 개인의 자아는 치열하게 고민한 후 비로소 이룩할 수 있는 것이지 손쉽게 구매하거나 덧씌울 수 있는 페르소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학생으로서의 율리에만 연기해도 문제가 없었던 학업과 달리, 연애를 통해 율리에는 부딪히고 때로는 도망가며 많은 것을 경험한다. 자신이 남자 친구 악셀에 비해 어리고,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기도 하고 위트있는 대화를 이어나가거나 춤을 추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갈등을 목격하기도 한다. 에이빈드를 만나 바람을 피우고 환각제를 흡입하며 회피하기도 하지만, 끝내 발붙인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율리에는 자신의 가장 빈곤한 부분을 몇 번이고 마주한다. 이윽고 선택의 무게를 깨닫게 된 그는 느리게 자기 파괴적 상태에서 벗어난다. 거대한 산처럼 보였던 사람을 비로소 친밀했던 한 명의 인간으로 동등하게 여길 수 있게 됨으로써 미지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선택의 폭이 지극히 좁아 고민의 여지없이 아이를 낳고, 낳고, 낳았던 조상들로부터 21세기 서른 살 여성에게까지 이어진 어떤 굴레는 더 이상 율리에를 옥죌 수 없다. 분명히.
영화 속에 몇 번쯤 등장하였던 타이밍이 잘못되었을 뿐이라는 말은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변명처럼, 혹은 상대방을 위한 위로처럼 몇 번쯤 사용되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로든 옳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아닐 것이다. 인생에 있어 올바른 타이밍과 잘못된 타이밍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리만큼 중립적인 순간들의 총합일 뿐이니. 그러니 그렇게 미사여구를 붙이며 상실한 기회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괜찮다. 일회성 삶 속 실패는 한낱 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저무는 여름에 새로이 섞여있을 웃음과 눈물과 설렘의 찰나만을 기억하자. 이것은 온전히 율리에와 당신, 그리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이다.
한국에서는 <사랑할 때는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번역되었지만, 이 영화의 원제는 <세계 최악의 인간(Verdens verste menneske)>이다. 흥미롭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한 제목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최악의 인간일 수밖에 없으므로. 어쩌겠는가.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을. 타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무대 뒤편의 모습까지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는, 드러내지 않는 속내까지 모조리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상 위의 유일한 인간이 나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부득이하게 잘못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하니 스스로를 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너무 스스로에게 무자비해지지는 말자. 우리는 우리를 가장, 최선을 다해 경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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