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2-09 08:09:24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법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늘 시사회는 그대로 진행됩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니, 오셔서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면, 12월 4일 오전 9시 49분에 발송된 문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초현실적인 내란 획책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지금 ‘영화 따위’가 문제냐며 퇴근 후 곧바로 어느 집회 현장이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문자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언젠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가 떠올랐다. 참사 후 가수들이 예정대로 콘서트를 진행하자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때, 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다. ‘그럴 거면 앞으로 음악으로 위로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우리는 지금 예술이 ‘하찮아지는’ 시국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이 예술을 초월하는 기막힌 상황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에서 이 시국을 헤쳐 나갈 용기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며, 나는 내란범과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에 맞설 ‘사소한’ 방법 중 하나를 떠올렸고, 되새겼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펄롱의 걷는 장면이다. 그의 걷는 모습을 비추거나, 그가 걸으면서 마주했을 법한 풍경을 비추는 장면 말이다. 펄롱이 일상적으로 걸으며 마주하는 그 모든 사람과 풍경에서, 그는 정동 소외자다. 펄롱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대로 느끼지 못한다. 펄롱은 학대당한 가난한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동전을 건넨다. 수녀원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학대당한다는 낌새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펄롱을 나무란다. 퍽퍽하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현재의 안온한 삶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그들에게서 마음을 끊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펄롱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펄롱은 종종 그 길을 오르며 헉헉거린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석탄을 배달하는 펄롱은 거친 솔로 손가락과 손톱 구석구석에 낀 석탄 가루를 닦아낸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흔적도 없이 닦아내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펄롱은 헷갈린다. 수녀원에서 본 소녀들에게서 사랑하는 딸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펄롱은 그들에게서 고아인 그를 조건 없는 선의로 돌봐준 어른들 덕분에 번듯하게 성장한 그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본다.

이제 펄롱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솔직할 것인가, 모두의 요청에 따라 막강한 영향력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에 눈감을 것인가. 펄롱은 이 문제를 거창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수녀원에서 마주한 소녀 세라와 함께 걸으며, 수녀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걸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펄롱은 수녀원에 갇힌 ‘사고 치는 여자’와 ‘사랑스러운 딸’ 사이에 놓인 임의의, 우연적인, 불분명한 구분선을 지워낸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감각, 감정과 정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펄롱은 그저 세라의 손을 잡고 길을 걸음으로써 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아일랜드 수녀원에서 대규모로 자행된 소녀들의 노동력 착취 및 감금, 학대 사건에서 출발한다. 원작 소설을 쓴 클레어 키건에 따르면, 1996년에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기 전까지 수녀원에 감금당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소녀의 숫자는 최소 만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한다. 9천 명의 소녀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금의 명분은 ‘타락한 여성’의 수용이었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가?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질문해보면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고 맞서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압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펄롱처럼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변화와 저항을 모색할 수 있다. 자기 감각과 경험을 믿는 것이 출발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감각과 경험이 누군가의 삶과 생명, 개별 인간들의 관계성,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규칙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짓밟는 것으로 지향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내란범들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과 감각이 중요할 것이다. 불완전하고 문제투성이일지라도, 우리 일상의 토대를 이루는 연결망을 어떻게 더 확대할 것인지가 기준이어야 한다.
담담한 소박함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각자와 서로의 삶을 꾸려온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말하는 듯하다. 내면에 침잠해 세상을 짊어진 펄롱의 용기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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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노래했던 카나리아
이 글은 영화 [엘비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설적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던 특유의 몸짓과, 노래실력으로 단숨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간 그였지만. 모든 아이콘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만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영화 [엘비스]는 그 전설의 시작에서부터 쓸쓸한 마지막 모습까지를 세 시간에 걸친 이야기로 풀어낸다. 음악 영화라는 틀에 갖혀 노래에 치중된 영화이기보다는, 가수가 아닌 엘비스의 모습과 그의 인생에 존재했던 고뇌들에 대해서도 함께 하고 있어. 드라마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신예 오스틴 버틀러의 싱크로율 높은 연기와 톰 행크스의 안정적인 연기가 합해져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으며, 다양한 화면 전환 또한 늘어질 법한 분위기를 반등시키는데 한 몫 한다.
핑크 캐딜락과 지팡이;꿈과 현실을 색으로 표현하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엘비스의 어머니가 늘 꿈에 그리던 것은 핑크 캐딜락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품은 아니기에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인생에 자괴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가끔 꺼내 보면 온 마음에 들어찬 퀴퀴한 현실을 한 번씩 쓸어내릴 수 있을 만큼 강한 바람 정도는 되어주는 것.
파커 대령(톰 행크스)을 만나기 전까지. 엘비스의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을 견뎌내며 걸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지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을 향해 아주 더디지만 확실한 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
대령은 이미 작은 캐딜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비스를 처음 본 순간 이제는 새로운 버전의 차를 몰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엘비스는 그에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되는 지팡이었다. 그것도 절대 부러져서도. 그렇다고 늘어나는 대령의 탐욕이 무거워 버티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 고분고분한 지팡이여야만 했다.
그에 반해 늘 지팡이 같은 존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엘비스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둘씩 자신과 멀어져 갔다. 캐딜락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번지르르하다못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삶이었지만. 마음의 근간을 하나씩 잃은 엘비스의 삶은 점점 무너져내린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의 삶을 살지만. 오히려 단조로운 현실에 겨우 발맞출 수 있었던 예전의 삶보다 색을 잃어 흑백으로, 혹은 빛바래지는 후반부의 엘비스를 보고 있으면. 그 반짝거림으로 자신의 초라하고 비어가는 마음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파커가 미켈란젤로가 될 수 없었던 이유;원석과 보석 사이의 딜레마
사진출처:다음 영화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원본이 개정본, 혹은 복제본 보다 가치 있다고들 말하지만. 반대가 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원석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빵 뜬 연예인들에게 이제서야 발굴된 보석이라거나. 이런 원석이 대체 여태 어디에 숨어 있었냐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원석과 보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파커 대령은 원석에 가까웠던 엘비스를 발굴해냈고. 그 원석이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세공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신경증 정도로 치부되어도 별말 할 수 없었을 다리(혹은 하반신)를 떠는 것조차도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로 만들어 냈다. 그렇다. 파커가 Nobody를 Somebody로 만들어준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파커는 세공 방법에 대한 지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허락된 빛(Light)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마치 엘비스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암흑 속에 영원히 갇혀 있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엘비스의 고삐를 틀어쥔 그가. 모든 것을 무대에 쏟아낸 채 커튼 뒤에서 기진 맥진한 엘비스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상을 만들 때. 돌 속에 숨겨진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던. 이미 돌 안에는 완성된 무언가가 있었고. 자신은 그저 불필요한 것을 없애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세기의 예술가 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대령이 스스로가 그저 협잡꾼에 불과함을 깨달아서 울길 바랐다. 그렇게 유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채 무릎을 꿇은 저 엘비스를 사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원래 완성된 상태로 그저 현실에 가려진 상태였음을 느꼈기 때문에 울었기를 바랐다.
시대의 카나리아;노래로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지금은 모두 센서로 대체되었지만. 예전에는 석탄을 캘 때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가스 탐지기처럼 이용했다.
투명한 새장 속의 카나리아가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작업을 멈추었다. 물론 이렇게 죽어가는 카나리아의 비용과 그 죽음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나중에는 새가 활기를 잃으면 공기를 주입해 되살리는 시스템까지 갖추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말은 다가오는 위험을 먼저 알려주는 존재를 뜻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다.
시대의 모든 변화 앞에 서 있었던 엘비스를 보며. 마치 그 시대의 카나리아 같다는 생각이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쓰러져서는 안 되는 존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각종 약물을 투여하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어차피 모든 위험. 혹은 비난은 엘비스가 감수할 테니. 엘비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늘 극한까지 등 떠밀어댔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모든 위험을 피부 하나로 다 느껴야 했을 엘비스는 그저 그 두려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노래로 하는 것 외에 자신이 가진 수단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실제 엘비스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공연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이제 한계까지 왔다고 퍼덕이면서. 환호의 박수가 아닌 애처로움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이런 나의 감상도 어떻게 보면 이미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같잖은 위로 같기만 했다. 만약 나 역시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의 절규에 그저 잘한다며 손뼉을 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마지막 공연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치면서
빠른 전개와 눈을 사로 잡는 화면들. 그리고 엘비스가 음악이라는 것에 빠져드는 것을 묘사하는 초반 10분 시퀀스는 그 누구의 마음도 뺏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또한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런닝 타임도 잘 분배하고 조절해서 그다지 지겹다거나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물리적 시간이 주는 괴로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마치 [나이트 메어 앨리]를 보는 것 처럼 환각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엘비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황제의 뒤안길이 쓸쓸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프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 글의 TMI]
1.독일어..갑자기 너무 어려워졌어요...
2. 하지만 포기하는건 부끄러워서 못하겠음.ㅠㅠ
3.그래서 엉엉 울면서 매일 하고 있는데.
4.근데 이제 거기 복숭아랑 망고를 잔뜩 끼얹은 공부를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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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희, 침투의 미학
영화사가 시작되고 인간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무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거 기술적 한계로 지구란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던 이야기는 VFX의 발달로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우주로 향해갔다. 기술적으로 우주에 대한 표현은 정교해졌지만 크리스토퍼 놀란급의 과학적 열정 없이는 소소한 오류들이 발견되곤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설명이 충분하다면 개의치 않고 영화를 즐겁게 관람한다. 사실 현실에 가까운 우주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다. 우리는 실제에 기반한 다큐보단 누군가에 의해 재창조된 우주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인간에게 적절한 방향성을 지닌 영화의 파급력은 빅뱅급의 위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폭발적인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고 우리는 그곳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조성희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관이란 어떤 것일까?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일반적이진 않을지라도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이들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삶에 더 이질적인 존재들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서서히 꼬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사건건 발생하는 침투를 관대하게 용인하는 것이 조성희 감독이 추구하는 궁극의 미학이며, 이는 작품 속에서 훌륭하게 작동한다.
당연하게도 외부로부터의 침투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상황이지만 조성희 감독은 특유의 접근법을 통해 부드럽지만 폭력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제스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노자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도는 없지만 때로는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부드러움이란 천진난만한 아이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남매의 집>을 시작으로 그가 연출한 모든 작품 속에 아이들이 나오는다는 것은 가족을 강조하는 감독의 고집과 등장만으로 마음의 무장이 해제되는 마법 같은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잠복근무>에선 범인을 검거하는 살 얼음 판 위에서 철부지 아이 같은 친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아이들은 일반적인 것과 결이 다른 인물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리고 대게 그들의 천진함이 수많은 사건들을 야기하는 방아쇠가 되며, 이는 자칫 관객에게조차 불편한 존재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조성희 감독은 아이들을 고집한다. 아이들의 천진함을 무기로 그의 세계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의 세계에 끊임없이 침투를 강행한다. 대게 침투를 받는 이들은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성희 감독은 아이들을 통해 경각심 가득한 메시지를 보낸다.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에겐 미래란 없다. 단지 과거에 갇혀 스스로 정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룰 때까지 아등바등거릴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송두리째 뽑으려는 시도조차 불사한다. 쉴 틈 없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침투를 통해 미래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그 순간부터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귀찮아 대답조차 않던 이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곱씹기 시작하면서 인물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태호는 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수양딸 순이의 죽음이 부족한 돈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호의 집착은 결국 돈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지만 세상을 이루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꽃님이를 잃고 만다. 드디어 순이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태호는 죽은 딸의 노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페이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행복이란 돈이 아닌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과거에 갇혀있던 태호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꽃님이란 미래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의 변화는 아이들이란 미래를 지키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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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사랑과 우정을 다 지켰는데, 천국에 못 갈 리가!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No Heaven, But Love
Korea/2023/77min/한국경쟁
1999년. 18살의 주영은 한 여고의 태권도부 소속이다. 여러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제법 재능이 있는 학생인 주영.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대회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이 태산인데 코치의 차별과 승부조작, 폭력적인 문화 등을 함께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영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태권도를 그만둔다. 이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 김주영’이라는 미래는 없다. 그러나 태권도가 주영에게 남긴 게 있다. 주영의 엄마는 상심한 주영에게 왜 네게 태권도를 가르쳤는지를 차근히 설명한다. 방어운동인 태권도를 잘 배우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이유였다. 그리고 엄마의 기대는 현실이 된다. 비록 태권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말이다.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주영의 엄마는 어느 날 예지를 집으로 데려온다. ‘가정 프로젝트’, 즉 소년원 수감 청소년들을 집에서 돌보는 일의 일환이다. 이미 안면을 튼 적이 있는 주영과 예지는 금세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향한 애정이 우정 이상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나 둘이 발 디딘 현실의 토대 사이에는 꽤나 큰 격차가 존재한다. 주영과 예지가 모두 여자라는 점도 문제다. 둘이 사랑을 이어가려면 주영이 태권도를 하며 배운 능력, 즉 스스로를 구하는 능력을 예지에게까지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영의 친구 주희도 있다. 주영과 절친한 주희는 태권도부 에이스로 국가대표 선발전 통과가 유력한 상태다. 그러나 가족의 압박과 코치와의 문제로 남모르게 고통받으며 속을 썩인다. 주희는 자신의 문제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지만, 주영은 이번에도 스스로를 구하는 능력을 친구에게로 확장해 주희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자 한다.
주영, 예지, 주희 그리고 김현목 배우가 연기한 남성 캐릭터까지. 네 명의 친구/연인이 만들어내는 영화 전반부의 질감은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세기가 바뀌기 전 종말론이 유행했던 1999년, 세상의 규칙과 금기가 자신들을 짓누르는 세상에서 살아감에도 이들이 밝은 얼굴로 숨 쉴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웰메이드 청춘물에서만 가능한 기분 좋은 설렘을 전한다.
그러나 주영, 예지, 주희의 갈등과 위기가 고조되는 후반부가 다소 작위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영화 전반부가 청춘물과 배우들의 강점을 편안하게 펼쳐낸다면, 후반부는 빡빡한 전개 속에 이들을 몰아넣음으로써 전반부의 장점을 깎아 먹는다. 이들이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극화하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숨 가쁘게 몰아치는 사건사고는 오히려 영화가 전반부에서 쌓아온 에너지를 소진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게 주영, 예지, 주희가 ‘천국에 갈 수 없는’ 이유일 수는 없다. 자신이 배운 것으로 사랑과 우정 모두를 지켜내는 주영은 이미 현실에서 천국을 살아내고 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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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의 밤> 잔인하지만 서정적이고 낯선 누아르
1. '양도수(박호산)' 사장의 명령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북성파를 제치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던 '박태구(엄태구)'는 돌연 비보를 접한다. 누나와 조카가 모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북성파가 작업에 들어온 것으로 의심한 태구는 즉시 그들의 보스를 공격하고, 북성파의 2인자인 '마상길(차승원)' 이사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러시아로 가기 전 잠시 들린 제주도에서 태구는 묘한 분위기의 '재연(전여빈)'을 만난다. 사격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는 등 걷잡을 수 없는 그녀로부터 그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끼며 조금씩 편안함을 되찾지만, 태구를 향한 복수의 칼날은 이내 제주도로 들이닥친다.
영화학자 토마스 슈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영화 장르의 변화를 네 단계로 나눴다. 실험 단계에서는 특정한 장르로 부를 수 있을 공통된 움직임이 포착된다. 고전 단계에서 공통의 움직임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가 공유며 하나의 장르를 규정하는 특정한 이야기 전개의 공식과 도상(볼거리) 같은 관습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장르 영화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는 불균질한 요소들이 더해지는 세련화 단계를 지나 기존에 확립된 장르의 전통을 파괴하는 마지막 바로크 단계에 다다른다. 비록 모든 영화 장르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장르의 흐름을 이해하는 기준으로서 위의 과정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2. 이러한 장르의 변화라는 맥락 안에서 볼 때 박정훈 감독의 누아르 영화 <낙원의 밤>은 분명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준 <신세계>(고전)를 거쳐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마녀>(세련화)로 이어진 박훈정 표 누아르가 한 단계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낙원의 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외피와 이야기의 발단이 한국형 누아르의 도상과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비해, 중반부에 숨겨둔 진짜 이야기는 장르의 관습에서 탈피하고 있다.
실제로 <낙원의 밤>의 연출, 도입부, 스타일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구가 북성파 두목을 죽이거나 조폭들이 회동을 하는 장소로 한국의 누아르, 범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우나와 중국집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액션씬 역시 감독의 전작에서 여러 차례 명장면을 남긴 바 있다. <신세계>에서는 엘리베이터 안, <브이아이피>에서는 중국의 한 아파트 복도와 방이 그 장소였다면 이번에는 차 안, 차와 차가 맞붙은 좁은 공간, 문이 잠긴 식당에서 액션이 펼쳐진다.
이야기의 발단도 마찬가지다. 양 사장의 행동대장인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누나와 조카가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북성파가 자신의 가족을 죽였다고 판단한 그는 복수를 위해 북성파 두목을 살해하고, 필연적으로 뒤따를 복수의 굴레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이러한 태구의 이야기는 냉혹하고 음울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박훈정 감독의 특유의 연출과 스타일을 만나 또 한 번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펼쳐 보이려는 듯 보인다.
3. 그러나 제주도로 장소를 옮긴 후 <낙원의 밤>은 예상된 경로를 벗어난다. 당장 결말부터 각 인물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발단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태구, 양 사장, 마상길은 모두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태구는 완전히 도망치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원한을 진짜 범인에게 갚아주지도 못한다. 마상길과 양 사장은 그들의 거래와 계획을 깔끔히 끝맺는데 실패한다. 대신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이고 하드코어한 결말을 통해 오직 재연만 복수에 성공한다. 이는 마치 <마녀>에서 누아르 영화의 남성 주인공의 자리가 여성에게 넘어간 것을 연상시키는 마무리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방향성이 기존의 장르 관습적 선로에서 벗어나는 분기점은 공항에서 태구와 재연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부터 영화는 그저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새로이 관계를 만드는 데 주목할 뿐이다.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과 '이자성'(이정재)의 굳건한 관계가 형성되어 유지될지 혹은 파괴될지가 관건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의리와 정, 피의 복수를 되새기는 사나이들을 강조하는 누아르의 관습을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복수의 칼날을 가는 마상길이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것을 빼면 영화는 중반부부터 누아르라는 사실마저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일반적인 누아르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태구와 재연의 드라마를 유려한 앙상블에 담아낸 두 주연 배우, 엄태구와 전여빈의 퍼포먼스가 유달리 인상 깊은 이유기도 하다.
4. 이때 두 주인공의 관계 맺기의 중심에는 각자의 트라우마가 위치한다. 마치 거울 치료를 하듯이 서로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 보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재연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죽을 날이 정해진 누나를 떠올리고,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자신과 그녀가 동병상련임을 깨닫는다. 재연의 삼촌이 총을 밀수하면서 마련한 선물을 끝내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볼 때는 끝내 생일 선물을 열지 못한 본인의 조카와 재연을 겹쳐 본다.
한편 재연은 온 가족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삼촌의 모습을 제주도로 도망쳐온 태구에게서 본다. 또 가족이 죽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래서 복수심을 버릴 수 없는 그녀는 가족의 복수를 한(혹은 했다고 생각한) 태구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이처럼 회한과 트라우마가 뒤섞이면서 물회를 사이에 두고 애틋해지는 둘의 관계는 묘한 동질감으로 인해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 간의 정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성 간의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굳이 이들의 관계를 정의 내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구체적인 설명 대신 아름다운 영상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태구와 재연은 차가운 필터에 포착된 제주도의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둘이 서로를 온전히 알아가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불운했던 그들의 삶에 마침내 치유와 평화를 얻고 오래간만에 행복해지는 순간,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마침내 낙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담배 연기처럼 금세 사라진다. 아름다운 낙원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듯이 그들은 이내 마상길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매섭게 쫓아오는 섬뜩한 복수의 굴레에 다시 빠져든다. 이처럼 태구와 재연의 관계성을 불명확한 경계 안에 담아낸 결과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완성한다.
5. 다만 <낙원의 밤>이 거둔 독특한 성과는 결코 매끄럽지 않은 완성도로 인해 빛이 바랜다. 우선 플롯의 치밀함보다는 감정선과 정서를 담아내는 미장센에 힘을 준 결과물은 좋게 말하면 영화를 곱씹어 볼 기회를 주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명확하지 않은 두 인물의 관계성, 그로 인한 예상외의 전개는 창고와 식당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에 처연함과 잔인함이 맞부딪히는 충격을 가득 불어넣거나 그저 영문을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만을 남기면서 명확한 호불호를 유발한다.
또한 몇몇 한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설픈 유머, 임팩트를 주기 위해 잔뜩 힘을 준 인위적인 명대사들은 개성적인 캐릭터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보인다. 무자비한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자신의 말과 약속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마상길, 소시민적인 듯하면서도 비열함을 숨기지 못하는 박 과장과 양 사장처럼 극에 강력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물들도 끝내 영화의 전반적인 톤에서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낙원의 밤>은 새로운 시도의 성취에 온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 끝내 낯섦을 새로움으로 바꾸지는 못한 한국형 누아르 영화에 머문다.
A(Acceptable, 무난함)
불완전한 영화적 시도가 담은 서늘하게 슬픈 청춘들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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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두 단어는 '로맨틱'과 '코미디'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받은 시사회 초대장에 근거해 작성했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지루한 일상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핀란드 어느 곳에 사는 평범한 여성 안사다. 매일같이 일만 해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안사.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노숙인들에게 폐기해야 할 샌드위치를 줬고, 관리자가 이를 이유로 그녀를 해고했다. 쓸쓸한 안사. 이미 지친 안사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일을 만들기 위해 아는 언니와 펍으로 향한다.
영화의 시점이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남자 홀라파는 공장 여기저기를 다니는 노동자다. 공장 안에 있는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홀라파. 어느 날 같이 일하는 형이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여자 만나러 펍에 갈래? 노래도 부르고 하는 거지.” “상남자는 노래 안 합니다.” 일단 튕기고 보는 홀라파. 하지만 자연스레 홀라파는 펍에 도착했다. 일행이었던 형이 어떤 여자에게 작업 거는 걸 옆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동시에 홀라파의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사를 보고 반한 홀라파. 두 사람의 사랑이 낙엽을 타기 시작한다!
로맨틱하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단어는 ‘낭만’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낭만으로 가득하다. 이 영화가 상정한 낭만은 사랑의 힘이다. 영화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본적인 설정부터 평범한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의 모든 미덕이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이 재벌 3세쯤 됐다면 관객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돈이 많았으면 서로에게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인맥이 좁아서 서로 다 알았을 것 같다. 또 그만큼 인물이 고를 선택지가 넓어지기 때문에 플롯에서 이것들을 다뤄야 할 당위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노동자 둘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게끔 이야기를 설정한다. 그런데 또 생략하고 싶은 것들은 아예 빼버렸다. 인스타그램/페이스북? 없다. 뉴스를 들을 때 어떻게 들을까? 라디오다. 심지어 두 주인공은 마블 영화같이 CG가 많이 들어간 작품들 안 본다. 짐 자무쉬 영화 본다. 이런 것들은 감독이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고 가는 온정을 보여주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통일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 영화가 '영화'라는 예술을 사용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영화의 의미를 현실을 잊고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도피하는 탈출구로 보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짐 자무쉬의 이 영화를 틀고 나서 어떤 인물이 내보이는 반응이 그 근거다. 좀비와 누벨바그 거장은 멀리 떨어져 있어 거리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 인물은 나름대로 영화를 즐겼을 것이다. 단지 누구보다 잘 즐기는 방식 중 하나로 허세 부리기를 선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감상을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것도 예술이 있는 이유다. 작품을 통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이다. 영화는 예술의 이 단면을 포착해서 이야기 안으로 집어넣었다. 예술이 가진 온기를 직접 관객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가 가진 다른 특이한 점은 시간적 배경이다. 사실 어떤 관객들은 2024년이라는 배경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가 명시하는 구체적인 시점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이야기 안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목적 중 하나는 지친 현실을 겪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가?를 형상화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현실과 예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세태의 관객들에게 이 라디오 뉴스는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구분선이 되기 충분하다. 영화가 두 가치를 대조하기 위해 시간적 배경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 시간적 배경과 인물들의 리액션을 우화처럼 읽는 것을 추천드린다. 이거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내 사랑스러워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를 시/청각적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선 시각적인 측면이다. 이 영화는 빛이 바랜 것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령 제목에서도 읽을 수 있는 낙엽이라는 소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해도 무방하다. 보통 낙엽이 진다는 건 가을에서 겨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시기의 끝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낙엽을 반대로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담배꽁초 역시 마찬가지다. 담배꽁초도 누가 다 쓴 것이라는 점에서 소멸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야기에서 들어간 방식은 정반대다. 이런 사소한 의미부여가 별 것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영화의 낭만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필수적이다. 감독이 자그마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처럼
미장센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영화는 강박적으로 대칭을 고수하고 있다. 색감을 활용하는 방식도 동화 같다. 이런 연출법을 고수한 이유는 관객을 몰입시킴과 동시에 동화 같은 분위기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화면이 나타나야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영화가 인위적으로 조형됐다는 걸 강조하면서 시각적인 집중도를 높이는 게 최선일 것이다. 영화는 이런 목적으로 강박적인 미장센을 고수하고 있다. 부드러운 색감, 안정적인 대칭 등 눈을 편안하게 만드는 장면 연출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글쓴이는 특히 시각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방식에 대해 더 강조하고 싶다. 강아지와 대화하는 장면, 홀라파와 안사가 데이트하는 장면 등 별 것 아닌 거 같으면서도 재미있는 감독의 센스가 돋보였다.
이 영화의 톤을 유지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삽입곡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연기한다. 어떻게 보면 고전 멜로 영화에서 봤던 연기가 이 작품에서도 오롯이 나타난다. 이는 이 영화의 코미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뚱한 표정과 뭔가 뚝딱거리는 동선으로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인물들은 시종일관 내내 말장난을 하며 관객을 웃기려고 한다. 이 둘이 묘한 불협화음을 내는데, 이것에서 풍기는 매력이 영화의 원동력이 된다. 아, 이 영화의 번역가분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내셨다. 올해의 번역상 드린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삽입곡들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이 영화는 배경음악으로 클래식을 삽입하며 고전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장면에선 가사로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단편소설 하나 본 듯
이 영화의 단점은 딱히 없다. 굳이 뽑자면 이야기 전개다. 상대적으로 잔잔하기도 하고 우연에 의존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전개가 영화 보는데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원래 감독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에겐 목적이란 게 있지 않나. 이 영화는 이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감독이 여러 요소들을 끌여들였다. 하지만 탄탄한 연출력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들이 한 가지의 맥락에서 빛을 발하면서 좋은 우화를 관객들에게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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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을 이용한 쇼 비즈니스의 진짜 모습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우리는 뭔가 보는 것을 즐긴다. 영화,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같은 것을 관람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이야기와 음악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건 일종의 대리만족일 수도 있고 그저 그것이 만들어주는 심리적인 안정감과 쾌감으로 자신의 마음속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일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공연들은 있어왔고 조금씩 변화해 왔다.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공연들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무언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이런 춤이나 노래의 공연들이 같이 진행되었다. 아마도 인류가 시작된 이후에 이런 공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전달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쇼를 보고 만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남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이 주는 만족감에 도취된 사람들은 계속 다양한 시도를 계속했고 다른 형태의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카메라라는 기기에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카메라 안에는 점점 자극적인 것이 담기기 시작했고, 그 자극이 커질 때마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만족감은 더 커졌다. 그들은 그것에 어떤 사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에 열광했고 그건 그걸 찍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도취감을 만들어줬다.
외계 물체의 등장 이후 기이한 일들을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
영화 <놉>의 중심인물인 OJ(다니엘 칼루유야)는 아버지와 목장을 운영하는데 목장에서 기르는 말들은 주로 영화 촬영에 활용된다.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가 기이한 현상에 의해 죽게 되면서 목장으로 다시 돌아온 동생 에메랄드(케케 팔머)와 OJ가 겪는 기이한 일이 영화에 담긴다. 외계 비행체처럼 보이는 물체가 상공에 나타난 이후, 그 물체는 주기적으로 말을 납치해가고 그 존재의 영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OJ와 에메랄드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에는 이야기의 시점보다 과거에 벌어졌던 방송이 나온다. 고디라는 침팬지가 출연하는 TV쇼에서 갑자기 돌변한 고디가 출연자들에게 끔찍한 일을 한 이후의 모습이 보인다. OJ와 고디의 일은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이야기의 접점이 만들어진다. 고디가 출연하는 TV쇼에서 끔찍한 현장을 모두 목격한 리키(스티븐 연)는 OJ의 근처에서 주피터 파크라는 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침팬지의 쇼를 이용해 과거 쇼 비즈니스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경험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주피터 파크도 말을 이용한 쇼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OJ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말을 이용한 영화 촬영에 참여하려고 하지만 갑작스러운 말의 행동으로 촬영에서 배제되는 인물이다. 꽤 과묵한 성향을 가진 그는 쇼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멀고 한 편으로는 말이 그런 촬영에 소비되는 것이 못마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 여동생 에메랄드는 무척 적극적이고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쇼 비즈니스에 편입되어 자신의 존재감이 높아지는 것을 원한다. 완전히 다른 성향의 남매인 이들은 외계 물체를 보고 하려는 목적이 다르다. OJ는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에메랄드는 그 증거를 찍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큰돈을 벌려고 한다. 영화는 이 둘의 성향 차이과 목적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구성하여 이야기의 흥미를 높인다.
쇼 비즈니스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다른 인식과 목적
남매와 말 거래를 위해 만나는 리키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주피터 파크에서 말을 이용한 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미 어린 시절 동물인 침팬지가 착취당하는 과정과 갑작스럽게 과격하게 행동하는 동물을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동물인 말을 이용해 쇼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카메라 촬영이 없을 뿐 그는 관객 앞에 서서 말을 희생시키는 쇼를 보여준다. 그의 행동에는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끔찍한 일에 대한 경험은 그에게는 훈장 같은 일이다. 그가 OJ와 에메랄드에게 자신의 과거의 일과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가 하고 있는 쇼 비즈니스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계 물체는 영화의 중반 이후 OJ에 의해 진 재킷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진 재킷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관점도 모두 다르다. OJ와 에메랄드는 일단 진 재킷이 실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두 사람의 목적이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마트 직원인 엔젤(브랜든 페레아)과 함께 그것을 영상에 담기 위해 애쓴다. 반면 뒤늦게 합류하는 전문 촬영 감독 앤틀러스(마이클 윈콧)는 촬영에는 도가 튼 인물이다. 그래서 좀 더 어렵고 현장감 있지만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화면을 담으려 애쓴다. 그는 수동 필름 카메라를 이용해서 진 재킷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이 촬영은 과거에 해본 적 없는 불가능한 촬영에 대한 도전이다.
여기서 가장 동떨어져 있는 리키는 진 재킷을 자신의 쇼 비즈니스에 활용한다. 그는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착취적인 사람일 것이다. 수많은 말들 뿐만 아니라 외계 물체는 진 재킷까지 자신의 쇼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이미지는 내내 자신만만하지만 그의 쇼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영화 후반부 그가 진 재킷과 말을 이용해 벌이는 쇼는 무척 경쾌하게 시작해 이상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끝이 난다. TV 쇼 비즈니스의 최정점을 경험한 인물이 자신만의 공연을 만들고 결국 그것 때문에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쇼 비즈니스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인다.
쇼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리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흥미로운 이야기
영화 <놉>은 외계 존재를 조금씩 화면에 비추다가 후반부에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과정은 무척 천천히 진행되지만 전반적으로 점점 속도가 빨라져 후반부에는 그 속도가 절정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영화들의 특성처럼 후반부의 진 재킷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러내며 이 이야기를 절정으로 몰고 간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쇼 비즈니스의 하나이며, 그 안의 다양한 인물들은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진 재킷을 이용한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진 재킷이라는 존재는 이 쇼 비즈니스에 훌륭한 서스펜스를 제공하고 주인공들을 위한 무언가를 해낸다.
<겟 아웃>, <어스>를 연출한 조던 필 감독의 신작 <놉>은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특히 전반부에 동물을 이용한 쇼 비즈니스의 참혹한 모습으로 운을 띄운 이후,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쇼 비즈니스에 대한 인식을 전달하고 있다. 진 재킷의 존재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촬영감독 앤틀러스나 동물을 이용한 쇼를 전문으로 하는 리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을 붙일 수 있다. 영화 <놉>은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과 구도를 통해 관객들이 관람 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는 영화다.
마냥 어렵기만 한 영화는 아니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이야기는 단순해졌고 속도감은 무척 커졌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깊이는 꽤 깊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외계 물체인 진 재킷으로 부터 만들어지는 공포감과 서스펜스도 굉장히 압도적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는 후반부는 꽤나 흥미진진하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적 메시지들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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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9월 1주 신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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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 마블이 자신의 후회를 만회할 수 있을까
?Rabbitgumi 입니다!
지난 주 영화 더 마블스가 개봉했습니다.
마블의 새로운 영화인데요.
사실 마블 팬들이라면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분위기는 이 영화가 개봉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개봉 후에도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설명없이 쉽게쉽게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소개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더욱 더 불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캡틴 마블의 후회되는 점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그마저도 공감할만한 요소가 없었어요.
박서준은 정말 지못미 입니다!! ㅠ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업데이트하고 있는 영화 에세이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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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미소리> 메인 예고편
여기 소리에 울고 웃는 부녀가 있다 매미소리만 들으면 곡소리를 내는 딸, '수남' 곡소리 나는 초상집만 다니면 신명이 나는 아버지, '덕배'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려는 딸과 최고의 죽음을 찾으려는 아버지 진도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20년 만에 마주친 부녀의 듣그러운 불협화음 한 판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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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설강화> 4차 티저 예고편
내가 만약 평범한 젊은이었다면, 그날 종이비행기를 줍지 않았더라면 우린.. 정해인 x 지수 의 [설강화 : snowdrop]이 12월 19일, 디즈니+에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