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5-06 20:01:06
[JIFF 데일리] 사랑과 우정을 다 지켰는데, 천국에 못 갈 리가!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No Heaven, But Love
Korea/2023/77min/한국경쟁
1999년. 18살의 주영은 한 여고의 태권도부 소속이다. 여러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제법 재능이 있는 학생인 주영.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대회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이 태산인데 코치의 차별과 승부조작, 폭력적인 문화 등을 함께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영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태권도를 그만둔다. 이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 김주영’이라는 미래는 없다. 그러나 태권도가 주영에게 남긴 게 있다. 주영의 엄마는 상심한 주영에게 왜 네게 태권도를 가르쳤는지를 차근히 설명한다. 방어운동인 태권도를 잘 배우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이유였다. 그리고 엄마의 기대는 현실이 된다. 비록 태권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말이다.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주영의 엄마는 어느 날 예지를 집으로 데려온다. ‘가정 프로젝트’, 즉 소년원 수감 청소년들을 집에서 돌보는 일의 일환이다. 이미 안면을 튼 적이 있는 주영과 예지는 금세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향한 애정이 우정 이상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나 둘이 발 디딘 현실의 토대 사이에는 꽤나 큰 격차가 존재한다. 주영과 예지가 모두 여자라는 점도 문제다. 둘이 사랑을 이어가려면 주영이 태권도를 하며 배운 능력, 즉 스스로를 구하는 능력을 예지에게까지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영의 친구 주희도 있다. 주영과 절친한 주희는 태권도부 에이스로 국가대표 선발전 통과가 유력한 상태다. 그러나 가족의 압박과 코치와의 문제로 남모르게 고통받으며 속을 썩인다. 주희는 자신의 문제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지만, 주영은 이번에도 스스로를 구하는 능력을 친구에게로 확장해 주희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자 한다.
주영, 예지, 주희 그리고 김현목 배우가 연기한 남성 캐릭터까지. 네 명의 친구/연인이 만들어내는 영화 전반부의 질감은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세기가 바뀌기 전 종말론이 유행했던 1999년, 세상의 규칙과 금기가 자신들을 짓누르는 세상에서 살아감에도 이들이 밝은 얼굴로 숨 쉴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웰메이드 청춘물에서만 가능한 기분 좋은 설렘을 전한다.

그러나 주영, 예지, 주희의 갈등과 위기가 고조되는 후반부가 다소 작위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영화 전반부가 청춘물과 배우들의 강점을 편안하게 펼쳐낸다면, 후반부는 빡빡한 전개 속에 이들을 몰아넣음으로써 전반부의 장점을 깎아 먹는다. 이들이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극화하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숨 가쁘게 몰아치는 사건사고는 오히려 영화가 전반부에서 쌓아온 에너지를 소진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게 주영, 예지, 주희가 ‘천국에 갈 수 없는’ 이유일 수는 없다. 자신이 배운 것으로 사랑과 우정 모두를 지켜내는 주영은 이미 현실에서 천국을 살아내고 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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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과 낭만의 공생
도쿄에서 북쪽으로 150km 가면 오제 국립공원이 있다고 한다. 산에 둘러싸인 습지인데,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나무 널판으로 좁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계절이 유독 선명한 곳, 그래서 다채로운 생태계를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겨울이 오면 장설이 인간의 접근을 막는 곳이다. 다시 봄이 오면 관광객들은 꽃이나 새, 작은 동물들을 구경하며 습지를 걸어 오제 깊이 들어가고, 별빛 날리는 밤을 그곳의 산장에서 보낸다.
산장에 필요한 식자재와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봇카라 부른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그 봇카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남들은 여행지로 방문하는, 그들 눈에는 더없이 낭만적으로 보일 공간. 거기 사는 이들의 어깨에 오롯이 내려앉은 현실의 무게. 그러니까 그런 영화일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삶을 생각하게 하는, 내 어깨에 얹힌 것들의 은유로 그 짐을 보게 하는. 고개를 숙이고 팔을 모으고 마치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쩌면 고행자나 수도승처럼 걸어가는 이들이 고스란히 묻어난 포스터를 보면 더욱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슴슴한 맛을 기대하고 들어선 영화관에서 깊은 감칠맛을 주는 건 역시나 독립 다큐의 묘미다. <행복의 속도>는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의 손으로 삶의 본질을 가리킨다. 삶의 본질, 이렇게나 무거운 단어를 저렇게나 담백하고 담담하게.
70kg가 넘는 짐을 묵묵히 인력으로 나르는 봇카. '미래에 사라질 직업 10'에 그들이 꼽히지 않은 이유는 단지 10위권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마이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다소 중세적인, 잘 쳐줘도 근대 이후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직업이다. 언제부턴가 육체의 유희는 칭송할지언정 육체의 노동은 경시하다 못해 멸시하기 시작한 현대 사회에서 봇카는 분명 환하게 빛나기보다 초라하게 평가되기 쉬운 직업이다. 심지어 그나마도 겨울이 오면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검박한 삶은 아름답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이자 경력이 20년도 더 된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 부부는 오래 전의 풍속화에 가져다 놔도 그렇게 살았을 것 같은 필치로 연신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 모습은 자연스럽다 못해 초연하다. 짐을 나르고, 무를 씻고, 콩을 심고, 식탁을 차리고, 아이의 웃음을 제때 바라보며 함께 걷는 것. 인간에게는 자연의 사이클이 필요하다.
삶의 고민은 영화에 담긴 이상으로 이들을 덮쳐 오겠지만, 이들의 대화는 무해하다 못해 말갛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흰밥과 가재미와 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를 바라보고, 번데기의 안위를 궁금해하고, 별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눈을 꼭 감고 숫자를 세며 눈을 어둠에 적응시키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친다. 일상에 놓치기 너무 쉬운 것들을 이들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다. 스스로 모를 수도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오제의 나무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은,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나는 이러고 있지?'라는 질문을 한 번쯤 품어본 모든 이들의 삶과 닮았다.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건 어렵다. 현실은 늘 우리를 옥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지 않겠다는 선택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이가라시 부부는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자연스럽게. 영화는 그 자리를 정확히 포착한다. 고요한 전원생활로 신격화하지도, 팍팍한 일상생활로 거칠게 담지도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두 사람의 초연함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가 아들과 나누는 대화는 우격다짐으로 교훈을 주려는 일방적 흐름이 아니라, 두 인격체 사이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서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 손을 뻗어 해하려 하지 않는 것. 어쩌면 오제라는 곳 자체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모래를 덮어 습지를 메우고 휘황찬란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대신, 겨울 눈과 바람을 전신으로 막아내느라 조금씩 낡아 가는 산장과 나무 길을 묵묵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다른 한 축, 이시타카 부부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현대사회 가까이에 있다. 이시타카는 봇카라는 직업을 조직하고, 현대화하고, 홍보하려고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가라시처럼 초연하지도 못하고, 술잔을 내밀며 봇카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처럼 '속세'에 속하지도 못했다. 아이는 계속 자랄 텐데, 4대 보험이 되는 것도 아닌데...로 시작되는 다양한 걱정의 말을 들으면 얼굴에 먹구름이 낀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봇카의 길을 묵묵히 간다. 과거는 잃어버린 것 같고 미래에는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이런 이시타카와 비슷한 길 위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이가라시처럼 초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아주 혼자도 아니다. 눈이 덮여 길이 보이지 않는 어느 날, 습지로 들어간 후배가 돌아올 길뿐 아니라 발 디딜 때의 마음까지 헤아려 삽으로 눈을 툭툭 치워 길을 밝혀주는 선배. 앞날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런 선배도 있으니, 따라 하면서 나아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당당하게 반문하는 후배. '아빠가 쉬는 자리'라고 하니 '아빠와 아저씨들이 쉬는 자리'라고 힘주어 정정하는 아이. 누구나 1인분의 짐을 지고 각자의 길을 갈 뿐이지만, 꽃과 바람과 새만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각자의 방법대로 그 직업 본연의 역할에 애정을 갖고, 그 삶을 계속 살아가기를 담담하게 선택하고 있다는 점만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어떤 영화감독과 어떤 사무직 직장인의 공통점일 수도, 어떤 중학생과 어떤 뮤지션의 공통점일 수도, 어떤 운동선수와 어떤 주부의 공통점일 수도 있다. 요컨대 각자 다른 색깔과 채도로 빛나는 우리는, 남들의 삶에서 보이는 어떤 면을 안정이라 믿으며 이따금 부러워하는 우리는, 괴롭게 발버둥 치는 것으로 우리의 평형을 유지한다. 남들은 그 모습을 안정이라 부른다.
예전에 <고양이 집사>라는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고양이 나만 없어'를 외치며 고양이를 예뻐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지만, 자기 옆의 한 마리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들에게는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일 수 있다. 밖에서 보기엔 '남들 다 고양이 좋아하니까...' 싶어 손이 넉넉해 보이지만, 언제나 돕는 손, 쌓는 손, 지키는 손은 가까이에서 보면 다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 사실에 충격받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결국 한 마리 고양이를 지키는 일은 그의 몫이 된다.
그때 나는 좀 울컥했다. '고양이' 정도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오만하게 또 쉽게도 하던 즈음이었다. 나는 '고양이'가 아닌 그 어떤 것, 굳이 따지자면 이구아나의 발톱이나 타란툴라 거미의 털끝 정도라고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저렇게 온 세상이 좋아하는 곳에서는 풍요롭겠지. 따스하겠지. 남의 세상은 다 그래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러나 아무리 풍요로워 보이는 곳에서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몰랐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면, 봇카나 독립 다큐멘터리처럼 소위 '마이너'하다고 분류되는 직업의 세계를 걸어가는 이들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소설 <GV빌런 고태경>의 한 구절처럼, 정말 "재개발되고 있는 풍경들 사이에서 내가 멸종된 공룡처럼" 느껴지고, "유튜브 브이로그 시대에 두 계절 동안 돈 한 푼 벌 수 없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일을 다 빼앗아갈 것 같은 기계의 굉음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 일을 하러 가자."라고 말하며 다시 발걸음을 떼는 사람의 마음.
그 끝에 대단한 꿈은 없을지 모른다. 사당오락 칠전팔기 대기만성 인간승리 이런 거 말고. 그렇게 버틴 끝에 끝끝내 뭔가 거대한 걸 이루어 전설처럼 회자될 사람들의 이야기 말고. 이 길 끝에 아무 후일담 남기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오늘 이 길을 걸어갈 보통의 우리들의 방향. 낭만의 바다에서 서핑을 할 수도, 일상의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할 수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들의 속력. 소소한 일상에서 낭만을 찾고, 그 작은 낭만에서 힘을 얻어 일상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속도. 어쩌면 그것을 행복의 속도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속도로 걷다 보면 일상과 낭만은 등 맞댄 반대말이 아니라 손 잡고 발맞추어 공생하는 짝임을 깨닫게 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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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의 차원을 넘어서라
인간은 몇 차원에 살고 있을까? 또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얼만한 크기일까? 인간은 우주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받은 류츠신의 <삼체>. 요새는 SF소재를 단순하게 미래에 대한 상상력, 혹은 판타지 수준에서 채용하는 소설과 영화들이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차원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주고, 1,2,3부로 이어지면서 그 차원의 세계는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무한히 위로 올라가 버린다. 차원의 깊이가 우주만큼 깊고 넓어, 책을 다 읽고 다시 지구의 작은 집에 앉아있는 나를 인식하면 한없이 작아진 나를 느끼게 된다. <삼체>는 '삼체문제' 그 자체보다, 우주의 다차원을 다루며 차원과 차원사이에 일어나는 일, 고차원과 저차원의 인식, 차원끼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삼체문제'는 그저 다차원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면 <삼체>에서 보여주는 '삼체문제'란 무엇이며, 차원이란 무엇인가?
삼체문제
삼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 물체를 말한다. '삼체문제'라는 것은 세 물체 간에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세 물체는 어떤 궤도운동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삼체문제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즉 이체에 가까운 세상인 지구에 살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이 압도적인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궤도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각각 행성의 위성들도 모성과 질량차이가 커서, 대부분 안정적으로 돌고 있다. 다만 지구의 위성인 달이 일반적인 위성보다 비정상적으로 커서 둘 궤도의 중심점이 지구 중심에서 좀 많이 비켜나 있기는 한데, 역시나 안정적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평면적인 공전궤도면을 따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사는 태양계의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크기 두 개인 쌍태양이라면, 행성들의 움직임은 이보다 더 복잡한 면을 그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태양이 쌍성이 아니라 세 개여서 삼체가 된다면, 그 세 태양의 움직임은 계산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 이체세상에 살고 있다면, 삼체세상은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인 셈이다. 더군다나 4체, 5체, 다체로 가게 되면 아예 궤도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양성자와 전자 한 개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원자인 수소 말고, 전자가 하나 더 늘어난 그 이후 원자부터는 궤도모델을 만들 수 없는 것도 그 이유다.
<삼체>에 나오는 삼체인들의 항성은 지구에서 대략 4광년 떨어진, 가장 가까운 항성들인 센타우르스의 알파성을 모티브로 했다. 알파성은 하나의 별인 줄 알았지만 관측결과 2개의 항성으로 된 쌍성계이고, 조금 더 태양과 가까운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적색왜성이다. 이 세별은 서로 중력의 영향을 받는 삼연성계이다. 이 삼연성계에 생물이 사는 행성이 있다면, 거기에 사는 생명의 우주관은 우리와 아주 다를 것이다.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일정하게 도는 달과 태양 때문에 하늘을 평면적인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하는 '천구'개념이 있었지만, 삼체운동을 하는 항성들이 하늘을 돌고 있다면 하늘을 처음부터 3차원 입체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구의 인간은 독특한 음양론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태양과 달의 크기가 우연히도 정확히 같아 보이기 때문에 생긴 철학이다. 이런 행성은 아마 삼체성계만큼 엄청나게 드물 것이다.
삼체의 궤도를 표현한 애니메이션. 너무 불규칙한 데다 항상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삼체문제가 아예 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상황에서의 해는 밝혀졌다. 위는 동일한 질량, 각운동량이 없는 상황에서의 해 중 하나인 8자 모양의 해.
인식의 한계차원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입체. 우리는 흔히 인간은 3차원, 시간까지 더해서 4차원을 우리의 차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크기에 대한 제한적 차원이다. 우리는 인간세상이 입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적인 위치에서 보면 거대한 지구라는 행성표면에 붙어살고 있는 2차원 생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차원을 진정한 3차원으로 한 단계 높여주는 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지구를 넘어서서 태양계도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점도 벗어나지 못하는 0차원의 존재인 셈이다.
인간보다 거대한 차원이 아니라 작은 차원은 어떨까? '그래핀'은 탄소원자 한 겹의 배열로 이루어진 2차원 물질이다. 인간이 볼 때 그것은 2차원이다. 하지만 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원자 속 에는 양성자와 전자가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그보다 더 작게 들어가면 초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11차원이라고 하고, 여분의 차원은 작게 말려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작은 차원들, 혹은 더 큰 차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지구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일 뿐이다.
차원에 대한 소설은 1884년 에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2차원 정사각형이 1차원과 3차원으로 갈 때의 묘사가 훌륭하다. <플랫 랜드>에 나온 바에 의하면, 2차원 생물은 상대방을 위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선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중간에 3차원 구가 나타나면, 선이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는 구의 단면만을 인식한다. 이 흥미로운 차원 간 세계의 설정은 <삼체> 전체에 깔려있다.
또한 인간이 지동설이 검증하는 과정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해 큰 교훈을 준다. 처음 지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에서는 무작정 천동설을 믿고 탄압한 게 아니다. 당시 신부들은 가장 머리가 좋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돈다면, 반대편에 있을 때 별들의 위치가 달라져서 연주시차가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인간의 관측기술로는 연주시차를 측정할 수 없었고, 별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결국 지동설이 연주시차로 검증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망원경과 천체관측기구가 발달하고 나서다. 위에서 언급한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계여서 연주시차가 가장 큰 센타우르스의 알파성 연주시차는 2/10000도이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전혀 관측할 수 없다.
최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한 가장 큰 과학적 성과는 중력파의 검증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은 공간의 휘게 만드는데, 이것이 곧 중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량에 변화가 생기면 그 시공간의 휘어짐이 빛의 속도로 파동처럼 전달되는데, 그것이 중력파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휘어짐은 중력 변화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서, 이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한 장치 LIGO를 만들기 전까지 측정한다는 것은 꿈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시로 중력파를 검출하고 있고, 소설 <삼체>에는 나중에 중력파를 통신기술로 이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중력파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우리가 우주를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 한 차원 높은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주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른다. 우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으며, 인간이 관측한 100년 남짓한 데이터로 우주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과학들이 밑바닥부터 모두 허물어진다면, 우주의 별이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스크린이어서 마음대로 깜빡일 수 있다면, 오늘부터 1+1이 2가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벌레처럼 주저앉게 될 것이다. <삼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vs 소설
소설 <삼체>는 나왔을 때부터, 영상 매체로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다른 대하소설처럼 물량이 많고 이야기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글로 풀어서 썼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에 비하면 진행이 느리고 묘사가 많은 데다, 많은 부분을 이미 만들어진 클리셰를 거부하고 작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미래 세계를 새로 구축해 나간다. 요즘 SF작법으로 비유하자면 글 쓸 때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만들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이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가 있긴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1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중국인 위주로 흘러가는 1,2,3권의 주인공들을 '옥스퍼드 동기 과학자들'로 모두 한 곳에 모아놨다. 그중에도 주요 인물들은 중국인으로 유지하고, 3권의 주요 캐릭터인 토마스 웨이드가 다른 캐릭터들과 합쳐진 모습으로 등장해 매력을 뽐낸다. 게다가 소설대로 진행했으면 조금 느리고 지루할 수 있는 흐름을, 1,2,3부의 내용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빠른 전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은 많이 간략화했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쉽고, 전개가 빠르며, 거기에 '영국 이민자들의 서사'를 추가로 부여해 더 글로벌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축약해 버려서, 인류 전체가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나 캐릭터의 서사들은 많이 없어졌다. 특히 소설 2권의 주인공인 '뤄지'를 대체한 사울은 나중에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가벼운 캐릭터가 많이 아쉽다. 원래 사울의 역할은 우주 사회학 교수로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고, 상상력과 내면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그런 서사가 시즌 1 동안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설 3권의 주인공을 대체하는 진 청과 윌리엄 다우니의 서사만큼 쌓았으면 좋으련만.
드라마가 아직 시즌1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개나 주제, 철학까지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등장하는 몇 가지 과학기술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입자 가속기/카미오칸데
베라 예는 옥스퍼드 입자가속기에서 일하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뒤돌아 나가는데 금색 구슬이 가득 있는 거대한 구 모양의 공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이건 여러모로 전혀 맞지 않는 연출인데, 베라 예가 떨어져 죽는 곳은 카미오칸데라고 하는 일본의 중성미자 검출장치이기 때문이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고속으로 운동하게 만들어서 충돌시켜 중성미자 등 다양한 입자들을 검출해 연구하는 곳인데, 거대한 도넛처럼 생겼다. 카미오칸데는 일본에 있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다. 그냥 두 개가 같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중성미자를 만드는 장치와 우주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가 같이 있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그건 지하철 옆에 지진계를 설치한 것처럼 이상한 짓이다. 아마 제작진이 그냥 멋으로 넣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 입자물리연구소-세른이 나오는데 정문에 파괴의 신인 시바신 동상이 있는 것은 진짜다. 실제로는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때문에 입자가속기가 블랙홀을 만들어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유럽의 강입자가속기 CERN에 있는 시바신
입자 가속기는 입자를 충돌시켜 연구하는 곳인데, 유럽의 CERN처럼 도시만 한 것도 있지만 정말 다양한 크기의 입자가속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병원에도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원형 입자가속기가 한국 최초의 입자 가속기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입자로 PET촬영을 했었다. 입자가속기로 다양한 입자의 성질과 발견을 해왔고 쿼크나 힉스입자의 발견 등 아주 중요한 연구와 발견을 하는 장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실험결과가 누가 장난친 것처럼 모두 틀어진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헛된 것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마치,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는 주인을 본 칠면조가 지금까지의 논리로 '이 시간에 먹이를 주러 오는 사람'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했는데, 어느 날 먹이를 주는 줄 알았던 주인이 칠면조를 잡아 죽였고 그날은 추수감사절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자(智子, Sophon)
위에서 언급했듯, 초끈이론-M이론에서는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다른 차원들은 작게 말려있다. 그 차원을 2차원으로 모두 펼친 다음, 그곳을 컴퓨터로 만들어 넣고 다시 차원을 말아 넣어 양성자로 만든 것이 지자이다. 전자, 양성자와 같은 소립자가 지혜를 가졌다 해서 智(지혜 지) 자를 붙여 지자(智子)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영어이름인 sophon도 지혜를 뜻하는 sophia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고차원을 저차원에 펼치면 전개도가 되는데, 차원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 전개도의 모양도 아주 복잡해지며 펼쳤을 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만들어진 소립자 컴퓨터다. 이런 저차원 펼침, 고차원 말림, 차원과 차원이 만나는 것, 고차원이 저차원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삼체>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주요 소재다. 특히 지자가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고 다시 펼쳐졌던 양성자를 축소시키는데 그건 칼라비-야우 다양체의 모습이다. 칼라비-야우 다양체란 M이론의 대가인 에드워드 위튼이 말한 여분의 6차원을 시각화 한 형상이다.
6차원을 말아서 구현한 칼라비-야우 다양체
또한 지자는 쌍으로 만들어져, 양자 얽힘을 이용해 거리에 관계없이 4광년이나 떨어진 삼체 본대와 소통할 수 있다고 나온다. 이 부분이 과학 매니아들에게서도 오해받는 부분인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자 얽힘으로는 빛보다 빠른 통신을 할 수 없다. 얽혀있는 양자의 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얽힌 다른 양자의 상태가 반대로 나오는 것이 양자 얽힘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양자의 상태를 바꾼다고 해서 나머지가 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관찰을 시작할 때의 상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 양자 얽힘으로 무언가 통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진 작가의 상상력이다.
어떻게 이 지자는 사람의 눈에 카운트다운을 새기고, 별을 깜빡이게 만들고, 전 세계의 통신을 장악할 수 있을까? 지자는 양성자의 크기이므로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즉 어느 한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며 질량이 0에 가까우므로 광속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인간의 망막에서 별빛을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고, 카운트다운을 망막에 새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지금까진 전기로 하는 통신장치(스피커)가 필요하다.
혹여나 양자역학이 현대 물리학을 깨는 게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뿐이지, 수학적으로는 너무도 명확한 현대물리학이다. 현대 과학은 이미 양자역학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 때, 전자를 공유하는데 그것도 양자역학이다.
나노 섬유
나노 섬유는 나노미터 굵기의 섬유를 말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온 분야로, 지금은 탄소나 아라미드, 금속 등 다양한 소재로 나노 섬유를 만들고 연구하고 있다. 나노미터가 얼마나 가는 것인가 하면, DNA가 3 나노미터의 굵기이고 탄소 나노튜브는 1 나노미터이다. 현재 개발된 탄소 나노튜브등은 철의 100배의 강도를 가졌지만, 원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무언가를 자르기보단 전기전달효율이 높고 작은 곳에 배치해 만들 수 있어서 초소형 회로나 가볍고 강한 섬유를 만드는데 주력하는 물질이다. 강도가 강하면 다이아몬드도 자를 수 있지만, 잘 휘어지지 않아 끊어지기가 쉽다. 또 드라마 <삼체>의 하이라이트인 '나노 섬유로 적들을 동강내기'에 나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다. 배가 잘릴 것인지 섬유를 묶은 기둥이 먼저 잘릴 것인지도 여러 계산과 연구가 필요하다.
탄소 나노튜브는 2차원 물질인 그래핀을 말아서 만든다.
이 부분은 나노 섬유에 대한 과학도 과학이지만, 1차원 물질에 가까운 나노 섬유가 3차원 물질과 닿아서 파괴해 버리는 '차원의 맞닿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3차원 생물을 4차원의 생물이 들여다본다면, 3차원 생물이 2차원 생물을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지구인보다 고차원의 세상 - 삼체성계를 가진 곳에서 더 높은 차원의 과학을 가진 삼체인이 보기에, 비록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벌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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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체>는 소설의 긴 흐름을 흥미 있게 각색해 연출했지만, 그래도 시즌1이 다 가도록 외계인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아 의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지구가 멸망하려면 400년이나 남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삼체>의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다른 여타 이야기가 인간끼리 벌이던 함대전쟁을 빗대어 '외계인과의 전쟁'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동양에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순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우주가 팽창했다 수축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예원제는 그저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억하심정으로 삼체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삼체인 들은 자신들의 항성계를 떠나 지구에 살려고 오는 것이지만,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은 선이 아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아직까지는 꽤나 잘 각색했다 생각하고,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 않게, 동양철학을 놓치지 않고 다음 시즌을 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좌의 게임> OST를 만들었던 라민 자와디의 <삼체> 메인 테마를 들으며 삼체인들을 기다려볼까. <삼체> 답게 3박자에 화음을 엇갈리게 넣어놔서 삼체성계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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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번역할 때, 영어로 3-body라고 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인 Santi를 그대로 썼다. 단체를 만든 예원제가 중국인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공교롭게도 Santi는 산타클로스의 애칭인 santy와 발음이 같다. <삼체> 드라마에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비유로 중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한다.
*지자가 동양인에 사무라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智子이기 때문이다. 智子는 토모코라는 일본 여자이름이기도 하다. (영어로도 Sophia는 여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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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만에 엄마의 첫사랑에게서 편지가 왔다
요즘 날씨를 보면 곧 봄이 올 것 같습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올 겨울의 끝에 눈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를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모’의 임 대형 감독이 한국과 일본 오타루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 ‘윤희에게’입니다
영화 ‘윤희에게’에서 윤희 역을 맡은 배우 김희애.
이야기는 윤희(김희애 분)의 집으로 온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시작됩니다. 이 편지는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 분) 이 먼저 발견 하 죠.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라고 시작되는 이 편지에 새봄은 별안간 엄마가 궁금해졌습니다. 사진관을 하는 삼촌과 이제는 이혼해 따로 사는 아빠에게 차례차례 엄마에 관해 묻죠. 엄마와의 이혼 사유를 묻는 딸에게 아빠는 “너희 엄마는 사람을 참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라고 알 수 없는 대답을 합니다.
한편 윤희는 사내 식당에서 일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견디며 사는 듯 삶에 지쳐버린 중년 여성인데요. 그런 자신에게 날아든 편지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졌죠. 직장 상사에게 밀린 휴가 좀 쓰겠다며 넌지시 묻었지만 책임감 운운하며 못 기다려준다는 말에 그만둬 버립니다.
극 중 윤희의 딸로 등장하는 새봄 역의 김소혜 배우(왼쪽)와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 역의 성유빈 배우(오른쪽).
윤희는 딸 새봄과 함께 일본 오타루로 향합니다. 이는 편지를 먼저 읽어본 새봄의 계획된 여행이었는데요.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분)를 대동하고 엄마 몰래 개인 미션을 수행합니다.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 쥰(나카무라 유코 분)을 찾기로 하죠. 편지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간 새봄은 경수의 도움으로 쥰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 분)가 하는 카페까지 알아내는데요. 새봄은 마사코에게 쥰을 직접 만나보겠다는 의사를 전
다음날 카페에서 쥰을 만난 새봄은 그녀에게 같이 저녁 먹자는 제안을 하는데요. 동시에 엄마에게도 저녁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죠. 오작교가 된 새봄 덕에 만나게 된 윤희와 쥰.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던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요.
새봄이의 계략으로 20년 만에 만나게 된 쥰(나카무라 유코 분)과 윤희.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윤희 역의 김희애 배우는 감독이 이 영화 대본을 쓸 때부터 생각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엄마 이야기보다는 독립된 개인으로서 윤희만의 개성과 취향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김희애 배우가 표현한 윤희는 윤희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초반 윤희의 삶이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면 쥰을 만나고 온 뒤 달라진 그녀의 상반된 모습을 잘 담아냈습니다.
아이돌 그룹 IOI 출신인 새봄 역의 김소혜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시니컬 하면서도 통통 튀는 모습을 매력적으로 잘 살렸습니다. 영화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서 사실 그녀에 대해 찾아보지 않았으면 그냥 연기 잘하는 신인 배우가 나타났다 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윤희의 첫사랑으로 등장하는 쥰 역의 배우 나카무라 유코
좋았던 장면은 너무 많아서 그냥 이 영화 전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중에서도 윤희와 새봄이 노천탕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눈싸움을 하는 장면. 윤희가 새봄에게 불을 빌려달라 하고 새봄은 윤희에게 담배 한 개만 달라는 장면 등 엄마와 딸의 케미가 돋보인 소소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다른 힐링 포인트라 한다면 사람 키만큼 쌓인 눈 사이를 걷는 소리나 눈의 도시라 불리는 오타루 곳곳을 화면을 통해 둘러보는 것도 대신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오랜 시간 동안 꺼내볼 수 없었던 윤희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고 싶으시다면 이 영 화를 추 천해 드 립니다.
추신. 이 영화를 볼 예정이시라면 팁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실내온도를 약간 서늘하게 맞춰주세요. 좋아하는 커피를 내려 무릎 담요와 함께 플레이 버튼을 누르신다면 최상의 상태로 영화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수리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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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다 막시모프가 내 시간을 없애버렸어
그토록 기다리던 디즈니플러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팔콘 앤 윈터 솔저>나 <로키>가 한창 방영중일 때 국제적으로 들려오는 평판만 확인할 정도였는데 실제로 볼 수 있게 됐으니 완전히 감개무량이다. 나는 사실 이 <완다비전>이 너무 궁금해서 나무위키로 슬쩍 읽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개봉했던 영화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이나 <블랙 위도우>와는 다르게 인물의 깊은 내면묘사가 이뤄져 알고 봐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아마 직접 보면 알 것이다. 내면묘사가 단순히 인물의 양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드라마가 꼭 가져야 할 연출 지점과 어우러져 신기했다. 과연 <오징어 게임>과 자웅을 겨루는 글로벌 드라마답다.
주연은 두 명이다. 아이언 맨이 만든 똑똑한 AI 비전과 하이드라가 만들어낸 초능력자 완다(스칼렛 위치)다. 이 둘은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가 만든 커플로 깊은 사랑에 빠졌다. 배우 둘이 워낙 연기를 잘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올슨과 폴 베타니는 MCU의 히어로들 중에서 제일 몰입이 필요한 역할일 텐데 이번에도 무난하게 각자의 롤을 잘 소화해냈다. 나는 초능력자가 된다던가 AI가 된다던가 하는 생각을 단 1분도 해본 적이 없다. 근데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 답게 어떻게든 하는 걸 보면 역시 프로는 다른가보다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또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엘리자베스 올슨 진짜 예쁜 것 같다. 같이 나오는 캣 데닝스도 물론 예쁘다. 근데 엘리자베스 올슨은 고상하게 아름답다. 심지어 연기까지 잘한다.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랑스러움부터 연이은 좌절로 인한 어두운 내면까지 깔끔하게 소화해낸다. 내가 배우면 이렇게 멋있게 연출해놓은 판 안에서 연기할 맛 날 것 같다. 또 폴 베타니 목소리 너무 섹시하다. 얼굴도 잘생겼다. AI 의상에선 몰랐는데 과거 미국에서 유행했던 코디를 입혀놓으니 '와 진짜 멋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튼 드라마는 배우들의 호연과 깔끔한 색감, 또 과거 미국 드라마들에 대한 오마주까지 아다리가 맞아떨어지는 삼박자 연출로 깔끔하게 잘 뽑혔다. 나는 이 장점들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드라마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단순히 마블 팬이라서 재미있는 작품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1. MCU 정주행, 필요한가요?
네!!!!!!!!!!!!!!!!!!!!!!!!!!!!!!!!!!!!!!!!!!!!!!!!!!!!!!!!!!!!!!!!!!!!!!!!!!!!!!!!!!!!!!!!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
- 이 이하부터 <어벤저스 : 엔드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 보신 분들, MCU 정주행하고 옵시다 -
2. 앞으로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작품인가요?
일단 이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할 정도라면 인류 반이 날아갔었다는 극의 설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타노스는 생명체 반을 날리기 위한 준비물을 모두 구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인피니티 워>에서 그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비전이 갖고 있던 마인드 스톤이 뽑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가 죽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벤저스는 타노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완다 역시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멘토 스티브 로저스와 나타샤 로마노프까지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이다. 가족, 친구, 사랑 모든 걸 다 잃은 완다. 그녀에게 기댈 곳이라곤 단 1도 없다. 그런데 드라마 1화부터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비전이 살아서 완다와 함께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아니, 비전 죽은 거 아냐? 와 아니, 갑자기 느닷없이 평범한 시트콤이 되어버린다고? 다. 이 두 가지가 이 드라마의 기본 설정이다. 작품은 이 두 가지의 미스터리에 대해 설명해주며 왜 주인공 둘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완다에게 비전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이는 곧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 <로키>와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에서 다룰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렸던 개연성을 보여준다. - 아, 이것을 설명해주는 건 스포일러가 아니다. 왜냐면 케빈 파이기가 완다비전이 멀티버스랑 관련 있다고 오피셜을 내렸기 때문이다. - 또한 새로운 히어로가 등장하는 듯한 암시도 있었으니 MCU의 팬이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셈이다. 아, 포스터에도 나오듯 완다 막시모프라는 인물이 '히어로냐 빌런이냐'의 양자택일 안에서 어떤 선택을 고르는 지도 굉장히 중요하니 새로운 안티 히어로의 등장을 지켜본다는 점에서도 볼 이유가 분명하다. 아, <앤트맨>에서 나왔던 지미 우와 <캡틴 마블>에서의 모니카 램보, <토르 : 천둥의 신>에서의 달시 루이스, <엑스맨>의 피에트로도 나오니 마블의 팬들은 즐겁게 보기 좋을 것 같다.
3. '빌런 혹은 히어로'? 갑자기?
'완다가 빌런이냐 히어로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라고 포스터를 보고 의문점이 들 수 있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아니 한번 히어로면 영원한 히어로지 빌런이 된다고? 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 의문점은 내가 지극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완다비전>까지 오기 전, 그녀의 처지를 살펴보자. 주인공이 사랑했던 인물들이 자기 의사랑 상관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럴 땐 누군가의 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막상 아무도 없으니 그녀가 감당하기엔 슬픔은 너무 컸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그녀의 처지를 복기해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데 드라마는 그녀의 섬세한 내면묘사를 바탕으로 이 인물의 선택이 어디로 향할지 공감하게 만든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히어로로 남을지. 강한 내면을 되찾음으로써 그녀의 자아를 다른 쪽으로 비틀지, 드라마는 철저한 미스터리로 우리들의 시간을 없애버린다. 결국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인물의 양면성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4. 이야기의 완성도는 어떤가요?
일단 1회독을 끝낸 지금 생각해 보니 딱히 구멍은 없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색감이 은근히 좋아서 이야기에 몰입하기 좋다. 또 도입 3화까지 살짝 지루한 구석이 있을 것 같긴 하다. 근데 그게 플롯의 누수때문이 아니라 천천히 내용을 만들어 가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5번에서도 썼지만 빌런에게 읭? 싶은 구석이 있긴 하다. 근데 보기에 페널티가 있고 이런 건 아니다.
5. 빌런의 묘사는 어떠한가요?
기존에 마블의 빌런들을 돌이켜 봤을 때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았다.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에서의 만다린,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서의 벌처가 생각난다. 전자는 담당 배우의 엄청난 카리스마가 만든 느낌이 강하고 후자는 생활밀착형 빌런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쉬웠다. 이 <완다비전>에서의 빌런은 이들과 살짝 다른 맥락이다. 이 빌런(들)은 엄브릿지형으로 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가 없다. 또한 밑도 끝도 없는데 인물의 성격 자체가 그럴 법해서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의 지모 대령의 정확히 반대 기능을 하는 악역인 셈이다. 현실에 저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거나 직장상사거나 후배면 진심으로 싫을 것 같다. 이런 가까이 가기 싫은 캐릭터를 잘 묘사해 나름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6. 다른 히어로의 탄생? 무슨 뜻인가요?
이는 3번의 질문과도 이어진다. 완다는 앞으로 히어로가 될지 빌런이 될지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이 인물이 후의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가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을 꼼꼼히 지켜보면 알 수 있다. MCU의 방향성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새로운 능력자와 함께 지켜보도록 하자.
7. 고전 미국 시트콤을 오마주 했다던데?
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어떤 드라마를 본떠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시트콤에 대한 오마주가 이 극에서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무조건. 오마주를 위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을 위한 오마주가 된 것이다. 또한 이런 연출 방식이 드라마의 호러, 스릴러 향 첨가에 도움을 준다. 기존에 장르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다른 재미요소가 될 것이다. MCU의 작품이 평단에서 호평받았던 경우가 드문 걸로 아는데 이 작품은 이 지점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오징어 게임>과 자웅을 겨뤄볼 만하다.
8. 액션 맛집 마블, 이번에도 닉값 하나요?
액션이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한 화에만 나오는 정도? 두 주인공 폴 베타니와 엘리자베스 올슨이 워낙 연기를 잘했고 CG도 매끄럽게 잘 뽑아서 극을 이끄는 흡입력이 좋다. 굳이 액션이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액션의 퀄리티가 별로냐? 난 좋았다. 등장인물의 특색들을 잘 살렸다.
4.5/5.0
강력추천!
디즈니 플러스를 처음 구독한 분들이라면 부담없이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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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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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학대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여러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집에서 가족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들은 그 학대의 흔적을 지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그래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흔적을 꼭꼭 숨기려 해도 조금씩은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사소한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 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 학대의 모습들을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심한 관심은 학대를 막거나 멈출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세심히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건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많은 복지단체, 복지사, 경찰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의 관심으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런 이들은 일반인에 비해 학대받는 아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학대를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집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경우, 아이의 부모에게서 아이를 완전히 떨어뜨려 놓기는 힘들다. 제도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막으려 하지만 그 힘이 닿지 않을 때도 많다. 얼마 전에 있었던 창녕 아동학대 사건이나, 인천 의붓아들 학대 사망사건 등 최근까지도 이런 학대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복지 제도권 안에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멈춰지지는 않았다. 그런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 내 학대를 다루는 영화 <고백>
영화 <고백>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에 대한 영화다.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신입 경찰 지원(하윤경)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불안하게 앉아있는 오순(박하선)을 발견한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지원은 뛰어가다 속도를 멈추고 오순의 옆에 앉게 되어 대화를 나눈다. 그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진다. 영화는 우순과 지원의 불안하고 찜찜한 얼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가정 학대를 받고 있는 보라(감소현)를 등장시켜 그 주변에서 어떤 반응과 일들이 있는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뉴스에서는 누군가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납치범은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국민 일인당 천 원씩 1억 모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같은 날 시작된 주인공들의 만남과 납치범의 인질극은 영화 중간중간 묘하게 겹치며 긴장을 만든다.
영화 속 오순은 사회복지사다. 여느 사회복지사가 그렇듯 어려운 일을 돕는데 특히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와 그의 동료 미연(서영화)이 학대받는 아이를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연이 차분하게 제도 안에서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는 인물이라면,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는 합리적으로 차분히 아이를 돕는 미연에게 동감하게 되지만, 실제로 학대를 받고 맞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면 관객은 점점 오순의 행동에 동감하게 된다. 미연의 도움은 제도권 안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벌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원인을 차단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아이 학대 신고로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보더라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은 앞선 도움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학대받는 아이 보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직접 보라 아빠와 각을 세우기도 하고, 소리치고, 몸싸움도 벌인다. 그렇게 영화는 보라가 아빠에게 학대당하는 모습과 그것이 아이의 일상생활을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를 오순의 눈과 귀를 통해 보여준다. 집에서 보라는 늘 겁에 질려있고,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자신이 선생님의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느낄 때 다른 친구에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많은 학대 아동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학교 생활을 이어나가겠지만, 그것은 의외의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선생님의 말처럼 그런 아이의 모습은 섬뜩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그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회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 세심한 관심
영화 속에 신입 경찰 지원은 주변을 아주 세심히 관찰하는 인물이다. 가정 폭력을 받는 여자를 도우려 한다거나 그런 폭력적인 낌새를 눈치채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 역시 경찰이라는 사회제도적 울타리에서 행동한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경찰에 대한 교육을 할 때 그는 경찰은 주변을 잘 관찰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처럼 경찰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이상한 것이 있는지를 발견해 내야 한다. 보통 가정 폭력 피해자들은 보복 때문에 그것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워한다. 영화는 지원의 그런 세심한 관찰을 보여주며 실제로 가까운 사람의 폭력을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도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보라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주는 오순을 만나며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라는 오순과 보낸 짧은 시간을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미소 짓는 순간은 영화의 분위기도 밝게 만든다. 그동안 공포에 질려 보낸 집,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학교에서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거나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아빠에게 별 이유 없이 맞고 잘못했다고 우는 모습은 계속 지켜보기 괴롭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도 아빠라는 이유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멍이나 여러 가지 학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빠가 때렸는지 증명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경찰의 이야기는 과연 지금의 제도가 가정 학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에 또 다른 이야기로 등장하는 유괴사건은 그 실체를 명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누가 그 모금을 위한 편지를 보냈는지 왜 모금 계좌를 복지재단으로 했는지 등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납치 사건과 오순, 보라 그리고 지원이라는 세 인물에게 벌어지는 일을 대비시킴으로써 가정 폭력의 가해자와 납치범 각각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교하면서 관객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주인공 오순역을 맡은 박하선 배우는 가정 학대를 한 부모에게는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으로, 다른 한 편으로 피해 아동에게는 차분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오순을 잘 표현해낸다. 그 자신도 학대를 받았던 오순이 아직도 그냥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오열하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원 역을 맡은 하윤경 배우도 따뜻한 시선의 좋은 연기로 영화의 사실감을 더한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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