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4-12-12 01:33:55
사소하지 않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스크린 밖의 상황과 안의 상황이 겹쳐 보이면서 영화가 성큼 다가올 때가 있다.
간밤에 아주 짧은 잠을 자고 모인 극장에서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공감하고 용기를 준다.
‘사소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사소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지탱하는 과거와 기억, 읽은 책, 받았던 선물, 충격과 후회가 바로 그것이다. 정의롭고 용기있는 행동은 어떤 대의나 대단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모른 척 하지 않고 행동하게 되는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변 사람들은 행동을 만류한다.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현재의 평화를 유지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 중 하나인, 밤에 잠 못들게 하는 질문 사이에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이 끼어든다. 그리고 나서 내린 결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사람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만큼 커다란 정의로 거듭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안내는 관객들을 기꺼이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클레어 키건이 써내려간 강력한 이야기, 주인공의 충돌하는 내면과 혼란을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경험은 그녀의 글을 두번, 세번 읽는 것 만큼이나 큰 울림을 준다. 관객을 붙들어 두는 이런 힘은 문학과 영화가 연결될 때 발생하는 신비한 효과이기도 하다. 극장을 나서며 더 많은 사람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용기를 전해 받기를 원하게 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BIFF 데일리] 17년, 차마 잊히지 못한 부조리를 외치기까지의 시간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기자단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정지영
<출연진>
설경구, 진경, 염혜란, 유준상, 허성태 외
<시놉시스>
1999년 시골 소읍의 한 슈퍼마켓에 강도 치사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은 세 명의 소년들을 진범으로 지목, 빠르게 수사를 종결한다. 얼마 뒤 새로 부임한 황준철(설경구) 반장은 경찰 고위직 최우성(유준상)과 무리들이 성과를 앞세워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특유의 끈질기고 강직한 수사력으로 재수사와 재심을 시도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년들>은 실화와 허구 사이에서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 내기로 유명한 정지영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장르적 재미를 높이는 동시에 약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소영웅 서사를 펼쳐낸다. 설경구, 유준상, 진경, 허성태, 염혜란 등 호화 캐스팅도 돋보인다. (정한석)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___
살아가다보면 억울할 일이 많다. 동생이 잘못했는데 내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혼났다든가, 감나무 밑에서 갓끈을 맸는데 감도둑이라 욕 들어먹는다든가 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사소한 일로만 억울하면 그나마 서럽지나 않을텐데, 우리 사는 사회는 마냥 합리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그보다 더한 일을 겪을 때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는 불합리와 부조리는, 인간의 아주 내밀한 이기심이 배려심 없는 욕망을 양분 삼아 자라난 것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때론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조리를, 이 부조리에서 기인한 무기력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에 맞설 수 있을까?
영화 <소년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맞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1. 무엇이 부조리를 만드는가?
영화는 2000년과 2016년을 오가며 <우리슈퍼 강도 살인 사건>을 조명한다.
때는 1999년 어느 밤, '우리 슈퍼'에 세 명의 강도가 침입해 할머니를 죽이고 금품과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 범인으로는 그 이웃인 소년 셋이 지목되었고, 그들은 한 달도 안되는 시간 동안 살인죄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부터 1년 후, 황준철은 우연한 계기로 이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된 소년들을 위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그 당시 소년들을 수사한 경찰들이 저희들의 승진을 위해 소년들에게 거짓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재수사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는 황준철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협조적이지 않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아주 사소한 이기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무성 일당은 저희가 폭력을 앞세워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소년들을 범인으로 잘못 지목한 윤미숙은 어머니가 강도살인 당한 충격에 휩싸여 그 당시에 대해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고, 진범은 죄로부터 도망가고자 했으며, 소년들은 강압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끔찍한 트라우마를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준철 반장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바로 그러한 이기심이 모이고 모여 부조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으므로.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는 변명들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망쳤다.
그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권력을 쥔 이들의 구둣발 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2. 17년, 정의를 되찾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2016년. 황 반장의 재수사가 있고부터 16년의 세월이 흐른다. 조직의 비리를 캐내던 황 반장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보직에서 제외되고 내내 변방의 섬에서 좌천 당한 채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은퇴를 1년 남은 어느 초라한 말년, 답답한 속을 그저 술로만 달래던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느 소식을 듣는다.
소년들과 그들을 거두어들인 미숙이, 17년 전 그 <우리 슈퍼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거대한 부조리에 굴복한 바가 있는 황 반장은 주저한다. 어차피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었다. 진범은 이미 잡아들일 수도 없고, 이미 옥살이를 한 소년들의 인생을 되돌릴 수도 없다.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을 다시 시도하며 무기력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한 의미 없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주변 사람들이 다시금 다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심에 협조하기로 한다. 기꺼이 사표를 내고, 그 모든 부조리에 다시금 맞선다. 그는 그 현장의 부조리를 직접 목도한 가장 확실한 증인이었으므로. 그는 얼마든지 증인석에 오를 권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황준철은, 윤미숙은, 소년들은, 왜 이제 와서 부조리에 맞선 것일까?
짐작건대, 그것은 어쩌면, 그날의 그 사건이 17년이 지나도록 그들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리라. 소년들의 꽁무니에는 언제나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남았고, 윤미숙은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억울한 삶을 살게 한 것에 가책을 느꼈으며, 황준철은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매일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강도 살인을 저지른 진범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평생토록 도망치며 살았다. 마음의 밑바닥에 짐처럼 가라앉은 오랜 옛날의 부조리가 오래도록 그들 모두를 괴롭혀 온 것이다. 이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이로부터 더는 도망치지 않고 맞서는 일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지난날의 부끄러움과 실수를 바로잡고자 하는 용기를 동력으로 삼아 다시금 진실을 밝히고자 했고, 마침내, 세상에 그들의 목소리가 닿게 했다.
영화는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가장 억울했을 사람들이 응당 그들이 누려야 할 삶을 되찾았다. 그리고 어떤 싸움은, 가장 사소한 것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법이다.
우리 주변에도 부조리한 일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인다면, 어쩌면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아주 사소한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 자신과 주변에는 어떤 억울한 일들이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무엇이든 시작해보자.
3. 관람 포인트
일반적인 수사물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들이 많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이 영화는 16년이라는 긴 시간의 장벽 하나를 두고 2000년과 2016년을 넘나든다. 이 각기 다른 시간이 어떻게 연출되었는지, 배우들은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GV에서 설경구 배우가 말하길, 효과적인 연출을 위해 일주일 동안 나흘이나 굶었다고 한다..!)
둘째, 무거운 소재의 영화임에도 곳곳에 숨어있는 유머가 돋보인다. 특히 조연배우들의 재치가 인상 깊었는데, 허성태와 염혜란 배우의 생활감 넘치면서 익살스러운 연기가 일품이었다!
셋째,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실제 사건을 살펴보며 어떤 일이 있었고, 영화에서는 이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2022.10.06. 부산국제영화제 10.05~10.14 15:00 하늘연극장
-
- 극우라는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8★/10★
〈올파의 딸들〉은 재현과 정치적 호명의 문제에 관한 놀랍고 적확한 통찰과 질문을 남긴다. 튀니지에 사는 올파에게는 네 딸이 있다. 그중 두 딸이 IS에 가담했다. 자발적으로. 첫째는 IS의 수장과 결혼해 딸을 낳았고, 미군의 공습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는 15년 형을 받고 동생과 함께 수감 중이다. 모든 게 실화다. 도대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들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영화는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까.
〈올파의 딸들〉의 카메라는 두 가지 일을 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극영화다. 감독은 올파와 남은 두 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기로 한다. 그들은 직접 배우가 되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연기한다. IS로 떠난 두 딸 역에는 배우를 섭외한다. 올파가 감정이 너무 격해져 촬영이 어려울 때는 그를 대신하는 배우가 연기한다. 올파와 남은 두 딸은 진짜 가족과 배우가 연기하는 가족 사이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대면하고, 상처를 마주한다. 세 가족과 세 배우는 수시로 모여 대화하며 서로가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고 생각을 나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그 결과물을 재현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 사용법은 그 자체로 영화적 효과를 낸다. 올파와 남은 두 딸은 영화 촬영 과정을 통해 자기 객관화의 계기를 마주한다. 과거를 복기하고, 연기를 통해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혼자 삭히고 슬퍼할 때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성찰이 샘솟는다. 이 성찰은 집단적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올파와 네 딸이 겪은 고난은 개별 고통이 아닌 집단적 기억으로 재탄생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을 몰아붙인 권력관계의 구체적 양상이 드러난다. 부당한 권력의 희생자인데도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한 가족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의 층위 역시 조금씩 구체화된다. 올파와 두 딸, 그리고 세 명의 배우는 여성으로서, 가족으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관계를 다지고 개별성을 말살하지 않는 집단으로 도드라진다. 눈부신 유대, 연대가 피어오른다.
이 모든 것들을 매개로, 영화는 올파 가족 상처의 근원에 다다른다. 원치 않는 결혼 이후 폭력적으로 굴던 남편과 힘겨운 결혼 생활을 하던 올파는 자신의 네 딸에게 엄격하게 군다. 지배적 규범하에서 고초를 겪은 사람이 되레 이를 사랑하는 주변인에게 강요하는 건 흔한 일이다. 상처 많은 과거에 근거해,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파의 훈육은 딸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갈등은 점차 깊어져 폭발 직전에 이른다.
가족 내에는 좆을 만한 규범이 부재하고, 사회는 혼란스럽다. 이 소란과 혼란 속에서, IS의 영향력이 올파네 집에 스며든다. IS는 니캅(눈을 빼고 모든 곳을 가리는 종교 복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항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머리를 파랗게 염색해 올파에게 두드려 맞은 첫째 딸이 엄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IS에 호응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규범을 상실한 채 보잘것없는 현실에 방황하던 그녀는 IS의 부름에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되찾는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꿈꿀 만한 미래도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IS의 극단적 이념은 아주 간단한 실천만으로 네가 다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위무를 건넨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애정을 갖고 호명하지 않았을 때, 극우의 이념만이 네가 전사가 될 수 있다고 북돋는다. 올파의 두 딸은 그렇게 IS로 건너가 범죄자가 되었다.
아랍권 국가에서 정치적 주체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올파의 딸들〉은 몇몇 다른 아랍 영화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모하메드 코르도파니의 영화 〈굿바이 줄리아〉에서, 부유한 북부인에게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남수단 청년은 더 ‘우월’한 사회문화적 조건을 갖춘 북부인에게 대항하는 군사 조직에 묘한 동경심을 품는다. 세계적 감독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알리 아바시는 〈성스러운 거미〉에서 성노동자 연쇄 살인범 아버지 재판 과정에서 안티페미니즘에 기반한 극단적 세력이 자기 아버지를 추앙하는 걸 보며 정치적 흥분에 젖는다. 무엇보다 〈올파의 딸들〉을 연출한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전작 〈피부를 판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난민이 된 남자가 상품 논리를 거슬러 자유를 찾는 과정을 남성성 회복의 서사와 연계해 펼쳐낸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특정한 결핍을 겪다 특정 담론과 만나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다. 〈올파의 딸들〉은 극우 정치가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지닌다.
길잃은 자들이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아랍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동시대적 현상이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 한국이 그렇다. 지금처럼 정치적 주체화의 방향성이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면, 올파네의 비극은 세계 곳곳에서 반복될 것이다. 올파 가족의 이야기는 가장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혼란스러운 시대, 정치적 주체를 주조하는 대안적 호명이 절실하다.
-
- 브로커는 결국 누구인가? 그리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 브로커. 이 작품의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호불호를 굉장히 많이 타는 감독이라고 해서 걱정을 하며 영화관을 향했다. 전체적인 감상평은 불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호의 작품도 아니었던 그저 그런 작품이었다.
영화 <브로커> 시놉시스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늘 빚에 시달리는 상현과 베이비 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보육원 출신의 동수. 거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그들은 베이비 박스에 놓인 한 아기를 몰래 데려간다. 하지만 이튿날, 생각지 못하게 엄마 소영이 아기 우성을 찾으러 돌아온다.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안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솔직하게 털어놓는 두 사람. 우성이를 잘 키울 적임자를 찾아 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변명이 기가 막히지만 소영은 우성이의 새 부모를 찾는 여정에 상현, 동수와 함께하기로 한다. 한편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형사 수진과 후배 이형사. 이들을 현행범으로 잡고 반 년째 이어온 수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조용히 뒤를 쫓는다. 베이비 박스,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만난 이들의 예기치 못한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브로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과연 누가 브로커인가?
영화 <브로커>를 보기 전 예고편만 봤을 때는 브로커 일을 하는 상현과 동수가 소영을 만나면서 브로커 일을 그만두고 그들끼리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영화 제목 브로커가 가리키는 대상이 상현과 동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과연 누가 브로커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그저 돈만 바라고 아이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찾으면서 돈에 집착하는 일반적인 브로커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비춰진다. 오히려 이들을 쫓는 형사들이 브로커의 모습을 띤다. 아이를 팔려하는 현장을 덮치기 위해 사람을 매수해서 그 현장을 꾸미고, 아이를 팔기만을 기다리는 수진과 이형사의 모습을 보면서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결과주의의 모습에 진짜 브로커는 오히려 형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 아이를 팔려고 한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의 잘못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잡기 위해 즉, 악을 잡기 위해 똑같이 악의 모습으로 그들을 잡는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보육원에서 멀어져야 하는 삶
영화 <브로커>를 보면서 가장 가슴을 쳤던 대사가 있었다. “형은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돼. 우리의 희망이잖아.”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보육원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동수가 브로커 일을 하며 새로운 부모를 찾기 위해 잠시 들른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동생에게 들은 말이다.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 다시는 보육원을 돌아오지 않아야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사여서 굉장히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들이 힘들 때 그들을 품어줄 수 있는 안식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의 이상을 그대로 표현하다
영화 <브로커>는 가족이라는 구성에 대해서 굉장히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고정관념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유복한 가정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족의 구성이라는 것이 엄마와 아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어서 사실 좀 껄끄러웠다. 요새 다른 작품들에서 기존의 존재를 대체할 필요가 없고 가족 구성원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러한 작품들을 많이 보다보니 이 작품이 원하는 고전적인 가족구성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굳이 그래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능력있는 아버지와 따스한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이 원하는 가족의 이상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브로커>는 작품 자체의 지향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었다.
-
-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차이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차이
: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
1. 들어가며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와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2017)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다. 약 40년 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나, 개봉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후속작에서 다루는 소재는 모두 현대적 관점으로 보아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논하기 전에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7-18세기의 근대 혁명은 근대적인 개인과 사회를 탄생시켰고, 이로 인해 개인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인 휴머니즘이 태동한다.[1] 포스트휴머니즘은 역사적으로 휴머니즘 이후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이고 휴머니즘의 핵심 전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2]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21세기도, 현재 인간이 몸담은 2020년에도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무시해서는 안 될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탈경계화는 다방면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나 인간과 기계로 대표되는 인간-비인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현대 사회는 포스트휴먼과 관련한 사안들이 대두되는 사상적 전환기이자 과도기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휴먼은 말 그대로 인간 이후 등장하게 된 존재이다. 생물학적으로 정립된 전통적 개념의 인간이 아닌, 기존 인간을 대체하게 될 존재이고 인공지능이나 유전적 변이를 통해 새로운 성질을 갖게 되는 미래적 인류인 셈이다.[3]
두 편의 영화에는 ‘레플리컨트(Replicant)’가 등장한다. 이들은 단순한 로봇이 아닌, 유전적 기반이 인간과 동일한 복제 인간이다. 이 글에서 다룰 두 영화는 이 레플리컨트와 인간 사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데는 다른 접근 양상을 보인다. 두 영화의 서사적 설정은 모두 비인간이 인간의 영역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로부터 촉발된 근대적 인간 중심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이때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 중심 사고에서 탈피하려는 해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을 최우선으로 하여 휴머니즘을 재생산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결국, 이 글은 유사한 소재와 주제 의식을 공통적으로 내포한 두 영화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풀어내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2.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2.1 <블레이드 러너>: 인간 중심 사고에서의 탈피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복제 인간 레플리컨트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1984), <엑스 마키나(Ex Machina)>(2014), <조(Zoe)>(2018) 등 많은 영화에서 다뤄왔던 인간형 로봇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외연은 인간과 같거나 비슷하지만 신체 내부를 기계로 채운 로봇들과 다르게,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는 DNA 염기 서열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인간처럼 혈액과 근육 등을 지닌 유기체이다. 레플리컨트는 포스트휴먼으로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행위를 통해 관객은 ‘인간다움’에 관해 고찰할 수 있고, 인간이라는 관념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제 <블레이드 러너>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나는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려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영화가 제작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하여 극중 주요 인물인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통해 구체화된다.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와 당대 유행하는 SF 영화들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F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기계 등의 미래 기술과의 대립을 주 소재로 삼는다. 이때 ‘비인간적 존재가 구현하는 인간다움의 궁극적 승리’라는 아이러니로 수렴시키는 전략[4]을 사용하여 인간 중심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이 선호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비인간의 갈등을 드러내지만, 두 세계를 동시에 점유하는 데커드가 극을 이끌어 가는 영화다. 즉, 대립 구도의 강화보다는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다.
데커드는 그 존재를 규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인물이다. 데커드는 불법으로 지구에 들어와 있는 레플리컨트를 처단하는 일종의 형사 같은 존재(블레이드 러너)다. 그가 만약 자신이 인간인 줄 알고 있는 레플리컨트라면 동족을 살해하는 존재인 셈이고, 인간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데커드를 끊임없이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두 영역을 동시에 점유하도록 유도한다. 데커드는 레플리컨트와 싸울 때 대등하게 겨루지 못하고 인간처럼 연약해 보일 때도 있지만, 화면 속 단서를 찾을 때는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이중적으로 표현되는 데커드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척도와 기준을 재검토하고 인간 중심적인 편향된 사고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전통적인 인간-비인간의 관계를 해체하는 포스트휴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커드는 포스트휴머니즘 시각으로 볼 때 중요 임무를 맡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2.2. <블레이드 러너 2049>: 인간 중심 주의의 재생산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와는 다소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30년이 지난 세계에서는 인간과 레플리컨트가 표면적으로는 공존하고 있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가. 이 세계의 블레이드 러너 레플리컨트 K(라이언 고슬링)는 각성을 통해 새롭게 자아를 확립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K는 전작의 데커드나 베티(룻거 하우어)와 다소 다른 속성을 내포한 존재이다.
전작의 베티는 수명이 다 되어 뒤틀리는 손에 주변에 있던 대못을 꽂아 발작을 진정시킨다. 이후 스스로의 죽음을 온전히 수용하는 그의 모습과 비둘기와 같은 상징적 요소들까지 종합하여 고려한다면 영화에서 그는 마치 예수처럼 묘사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새로운 접근이 아니라 기존 담론에서 충분히 도출되어 온 텍스트이다. 비인간인 베티를 예수로 읽어낸다는 말은, 기독교 교리로 점철된 서구 문명의 근간을 뒤흔드는 시도이다. 초월적 존재가 포스트휴먼 격인 베티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가. 데커드는 포스트휴먼으로서 인간의 존재적 정체성을 뒤흔드는 존재로 그려지고, 베티는 서구권의 인간 중심 사고와 그 근간을 파고드는 표상으로 자리매김한다.
K는 사실 지극히 평범한 신모델 레플리컨트였으나, 우연한 계기로 인간-비인간으로 이분화된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가 된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마치 베티와 같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 데커드를 살리고 그의 딸을 지켜내는 K의 행동은 이분화된 세계의 논리에 균열을 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단지 본인이 생각했을 때 더 인간적인 방식이 적합할 것이라고 여겨 실천에 옮긴 것이 아닌가. 오히려 K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는 가족성의 회복과 인간을 최상층의 존재로 전제하는 휴머니즘의 재생산이다. 데커드와 레이첼(숀 영)의 딸인 스텔린(카를라 유리)은 레플리컨트에게서 태어났다. 스텔린은 인간-비인간의 대립 상황에서 비인간의 지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존재이다. 생식이 가능한 레플리컨트를 통해 생명의 탄생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인간이 보유한 근본적인 시스템과 동일하다. 즉, 비인간이 인간의 메커니즘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포스트휴머니즘을 비인간이 인간화를 겪은 뒤 전개되는 새로운 인간 중심의 근간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기초하여 바라본다. 레플리컨트 K의 각성은 두 세계를 동시에 꿰뚫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기존의 논리 속에서 확장 및 변주를 통한 휴머니즘의 새로운 재생산을 유도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베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스텔린
3. 나가며
이 글은 두 편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다루는 소재나 설정,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두 영화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두 영화는 동일한 세계관과 인물 설정에서 비롯된 공통적인 주제 의식을 담고 있지만 영화 속 텍스트를 포스트휴머니즘적 시선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 명확하게 포착된다. 그 차이를 이 글에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베티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스텔린의 사례를 통해 구체화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나 베티는 포스트휴머니즘적으로 보면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배제하려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영화의 서사적 방향성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를 맞이한 현실 속 인류에게 일종의 판단적 준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것처럼 문화적, 정치적, 윤리적 행위의 원동력을 비인간도 인간과 동일한 수태(受胎) 능력을 갖게 된다는 데서 찾는 서사적 가정은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자못 퇴행적으로 보인다.[5] 결국, 전작과 다르게 이 작품은 기존의 인간 중심적 관념 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를 유지한 채로, 여전히 인간의 지위를 우선하여 담론을 형성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 속 레플리컨트는 포스트휴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이들을 통해 인간은 휴머니즘의 구조화된 틀 속에 머물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하여, 21세기에 들어서는 관련 논의들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는 이러한 변화의 동향과 더불어 심도 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는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1] 강미정 외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머니즘』, 이중원 엮음, ㈜이학사, 2020, p.5.
[2] HORIZON, https://horizon.kias.re.kr/12989/ (검색일자: 2020년 12월 18일)
[3] 강미정 외, op. cit., p.133.
[4] 김소연, 「포스트휴머니즘 영화에서 (탈)육체성과 기술-환상의 문제설정: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중심으로」, 『씨네포럼』 제33호,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9, p.18.
[5] Ibid.
이미지 출처: IMDb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 7월 2주차 개봉예정작
제임스건의 <슈퍼맨>의 🍅로튼토마토 지수는?
안녕하세요, 씨네픽지기입니다 🐥
🎫 7월 2주차 개봉기대작 골라왔습니다!
제임스건의 <슈퍼맨>의 로튼토마토 지수가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엠바고 전 공개된 부정적인 리뷰로 우려도 있었지만 91%로 시작해서 현재는 87%로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DC유니버스가 이번엔 성공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공식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무용을 했던 한예리 배우와 김설진 배우는 무려 23년 지기라고 하네요
독립영화부터 블록버스터, 프랑스·대만 영화까지…
한 주가 꽉 찬 영화 라인업으로 가득하네요! 🍿✨
여러분은 추천작 중 어떤 영화 가장 먼저 보러가실 예정인가요?🤔
🎬 7월 2주차 PICK!
►<봄밤>
►<슈퍼맨>
►<여름이 지나가면>
►<델마와 루이스>
►<우리들의 교복시절>
►<괴기열차>
►<발코니의 여자들>
-
-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스포가 있습니다.
*
나에게 은선이라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한 명이 개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명밖에 없다. 나는 은선이들을 볼 때마다 실버라이닝을 생각했다.
구름에 가려진 햇빛이 만들어내는 가느다란 은색 선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곧 갤 거라는 희망이다.
보통 이름에 쓰는 '은'자는 은혜 은(恩)자가 많을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레이스 라이닝이든 실버 라이닝이든, 아무튼 실제로 아직까지 은선이인 은선이는 먹구름 뒤 실버라이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조금 다른 아이였다. 다르다고 말하니 나에게 무척 관대한 기분이 든다.대학생활을 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취업 준비나 스펙 쌓기 같은 유익한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사랑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때 은선이가 있었다.
팻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다. 아내와 불륜 관계였던 학교 선생을 시원하게 패버리고 아내인 니키에게 접근금지 및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병원에서 긍정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 하면 한 가지 빛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으니 긍정의 힘을 믿으며 다시 아내와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그에게 아내를 만나게 해줄 리가 없다. 불륜도 폭력도 문제이니 어느 쪽 편도 들기 어렵지만.
친구 로니의 저녁식사에 초대된 팻. 친구의 처제 티파니도 그곳에서 만난다.
(로니의 아내 베로니카 역으로 나오는 줄리아 스타일즈의 모습과 목소리가 반갑다.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본 캣의 얼굴 그대로에, 나이만 들었다. 매력적인 배우다)
식사 중 언니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티파니, 집에 데려다준 팻에게 나한테 마음 있는 거 다 안다, 같이 자자고 하지만 팻은 거절한다.
팻의 뺨을 후려치는 티파니의 감정기복을 보통 사람들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사람 제법 봤다.
영화여서 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별 생각 없고 뜻도 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자는 사람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욕 먹기 쉽고, 욕 하기도 쉬운 사람들이다.
티파니도 자신을 "미친 과부 걸레"라 부른다.
그 말을 들은 남자, "나중에 술 한잔 할래요?"라는 말은 한번 자보겠다는 거다. 티파니는 아마 왕왕 그랬을 터.
그들의 기저에는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있다. 그 전에는 손에 쥐면 부서질까 두려울 만큼 소중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외부적 요인으로 깨지는 순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랑이 이렇게 가치없는 것임을 증명해야만 덜 상처받는다.
아무튼 티파니도 남편과 사별했다. 팻은 굳이 티파니에게 남편이 죽은 이야기를 계속 한다.
팻은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티파니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비닐봉지를 덮어 쓰고 달리기를 하는 또라이지만 아내를 향한 사랑은 일관적이다.
이 또한 일반적인 사랑은 아니다. 아내는 이미 떠났고, 그는 아내와 떨어져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형태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내를 마냥 기다리고 사랑하는 팻. 집착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옛날 집과 직장을 찾아갔다가 경찰이 오기도 하고, 아직도 결혼식 음악이나 아내와 관련된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결혼식 비디오가 없어졌다고 새벽 3시에 온 집을 뒤지고 난리를 치며, 아내는 이용당한 거라고 피해망상에 빠진다.
난리를 치고는 또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것까지 너무나 핍진하다.
여기서 이웃 사는 남자애는 진짜 끔찍한데, 과제를 한다며 조울증 환자를 인터뷰하려고 하고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를 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반응 중 하나다. 동정, 공포, 호기심 등등.
그런 팻에게 티파니가 불쑥 나타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지 않아도 감정을 통제하고 흥분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울증이나 감정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변수를 통제하기 어려워한다.
티파니도 오기가 생긴다. 다른 남자들은 자자고 꼬시면 오케이였는데, 이 남자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
결국 이 남자의 트리거인 아내에 포인트를 맞춘다.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조건이 있다. 자신과 함께 댄스 대회에 나가는 것.
자기를 아내 니키라고 생각하고 춤추라는 티파니, 춤이라고는 춰 본 적도 없는 팻.
처음부터 스텝이 엉키지만 둘은 감정의 교감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춤을 맞추어 나간다.
한편, 강박증 환자인 팻의 아버지는 팻이 있어야만 풋볼팀 이글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스에 배팅을 하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다.
겨우 팻을 설득해서 직관을 가지만 팻은 결국 거기서 도발하는 상대팀 팬을 또 시원하게 패버린다.
우리의 팻. 팰 때는 가차없다. 정신을 놓고 팬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중에 제대로 열받은 티파니까지 찾아온다.
팻은 티파니와 만나기로 해놓고 말도 없이 약속을 어겼다.
티파니는 그의 탓을 하는 팻의 아버지에게 미신과 징크스에 대해 조곤조곤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름쟁이 팻 아버지의 돈을 다 따간 영감에게 '묻고 더블로' 배팅을 하자고 한다.
풋볼 대회에다가 댄스대회 점수까지. 10점 만점에 5점을 받으면 팻 아버지의 승리다.
누구라도 이기기만 하면 대박날 이중 배팅이다.
12월 28일, 댄스대회에 출전한 두 사람. 예상했듯이 그 대회에 팻의 전부인 니키도 온다.
팻과 티파니는 무대에서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인다.
심사위원 의점수는 정확히 5.0. 이글스도 이긴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과 티파니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팻은 니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니키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티파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티파니를 쫓아 나간 팻은 티파니에게 편지를 건넨다.
팻은 지금까지 니키가 쓴 답장이라고 줬던 편지들을 다 티파니가 썼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피해망상의 구름 위에서 현실로 무사히 착륙했다.
*
영화에서는 팻이 니키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티파니가 나를 이렇게 멋지게 바꾸어주었다"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우울증은 흔한 병이다. 누구든 상처를 받으면 마음을 다칠 수 있다. 상처를 안 받아도 기질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우울증이 있거나 우울증이 있는 가족이 주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팻의 주치의 말처럼 약을 꾸준히 먹고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우울증은 일부 유전적인 면도 있다.
문제가정처럼 비치지 않아도 도박중독에 강박증(아마도 도박 중독으로 인한 강박증이겠지만) 아버지, 영화 내내 수동적인, 겁먹은 듯한 어머니 아래에서 팻이 감정적으로 조금 미숙할 수도 있다.
가정에서부터 우울증의 토대가 깔린 시나리오였다면 가정을 조금 더 극적으로 보여주었겠지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환자에 집중한 영화이다.
악화일로였던 팻과 티파니의 상처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극복된다.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일 필요는 없을 테고,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이라는 영화 <마미>의 대사가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쉽게 많이 사랑해버릇하고 쉽게 다치고 상처받는 내 사랑도 이제는 특기라고 말하겠다.
-
- 황정민 염정아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크로스" 후기 / 호불호는 갈리는 듯 / 안방에서 편히 보는 첩보 액션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크로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하나 있네요.
-
-
- 영화 <플립> 30초 예고편 ?
새로 이사 온 미소년 브라이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직감한 7살 소녀 줄리.
솔직하고 용감한 줄리는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브라이스는 그런 줄리가 마냥 부담스럽다.
줄리의 러브빔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를 6년!
브라이스는 줄리에게 받은 달걀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들키고,
화가 난 줄리는 그날부터 브라이스를 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가신 그녀가 사라지자 브라이스는 오히려 전 같지 않게 줄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데…
-
- 넷플릭스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이터널> 공식 예고편
새로운 달이 태양을 가리고 지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악의 세력.
각자의 꿈을 좇던 세일러 전사들이 세상의 빛을 되찾으려 이제 다시 힘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