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4-12-12 01:33:55
사소하지 않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스크린 밖의 상황과 안의 상황이 겹쳐 보이면서 영화가 성큼 다가올 때가 있다.
간밤에 아주 짧은 잠을 자고 모인 극장에서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공감하고 용기를 준다.
‘사소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사소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지탱하는 과거와 기억, 읽은 책, 받았던 선물, 충격과 후회가 바로 그것이다. 정의롭고 용기있는 행동은 어떤 대의나 대단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모른 척 하지 않고 행동하게 되는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변 사람들은 행동을 만류한다.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현재의 평화를 유지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 중 하나인, 밤에 잠 못들게 하는 질문 사이에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이 끼어든다. 그리고 나서 내린 결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사람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만큼 커다란 정의로 거듭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안내는 관객들을 기꺼이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클레어 키건이 써내려간 강력한 이야기, 주인공의 충돌하는 내면과 혼란을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경험은 그녀의 글을 두번, 세번 읽는 것 만큼이나 큰 울림을 준다. 관객을 붙들어 두는 이런 힘은 문학과 영화가 연결될 때 발생하는 신비한 효과이기도 하다. 극장을 나서며 더 많은 사람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용기를 전해 받기를 원하게 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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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노래했던 카나리아
이 글은 영화 [엘비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설적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던 특유의 몸짓과, 노래실력으로 단숨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간 그였지만. 모든 아이콘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만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영화 [엘비스]는 그 전설의 시작에서부터 쓸쓸한 마지막 모습까지를 세 시간에 걸친 이야기로 풀어낸다. 음악 영화라는 틀에 갖혀 노래에 치중된 영화이기보다는, 가수가 아닌 엘비스의 모습과 그의 인생에 존재했던 고뇌들에 대해서도 함께 하고 있어. 드라마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신예 오스틴 버틀러의 싱크로율 높은 연기와 톰 행크스의 안정적인 연기가 합해져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으며, 다양한 화면 전환 또한 늘어질 법한 분위기를 반등시키는데 한 몫 한다.
핑크 캐딜락과 지팡이;꿈과 현실을 색으로 표현하기.
사진출처:다음 영화엘비스의 어머니가 늘 꿈에 그리던 것은 핑크 캐딜락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품은 아니기에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인생에 자괴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가끔 꺼내 보면 온 마음에 들어찬 퀴퀴한 현실을 한 번씩 쓸어내릴 수 있을 만큼 강한 바람 정도는 되어주는 것.
파커 대령(톰 행크스)을 만나기 전까지. 엘비스의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을 견뎌내며 걸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지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을 향해 아주 더디지만 확실한 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
대령은 이미 작은 캐딜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비스를 처음 본 순간 이제는 새로운 버전의 차를 몰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엘비스는 그에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되는 지팡이었다. 그것도 절대 부러져서도. 그렇다고 늘어나는 대령의 탐욕이 무거워 버티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 고분고분한 지팡이여야만 했다.
그에 반해 늘 지팡이 같은 존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엘비스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둘씩 자신과 멀어져 갔다. 캐딜락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번지르르하다못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삶이었지만. 마음의 근간을 하나씩 잃은 엘비스의 삶은 점점 무너져내린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의 삶을 살지만. 오히려 단조로운 현실에 겨우 발맞출 수 있었던 예전의 삶보다 색을 잃어 흑백으로, 혹은 빛바래지는 후반부의 엘비스를 보고 있으면. 그 반짝거림으로 자신의 초라하고 비어가는 마음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파커가 미켈란젤로가 될 수 없었던 이유;원석과 보석 사이의 딜레마
사진출처:다음 영화세상 거의 모든 것은 원본이 개정본, 혹은 복제본 보다 가치 있다고들 말하지만. 반대가 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원석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빵 뜬 연예인들에게 이제서야 발굴된 보석이라거나. 이런 원석이 대체 여태 어디에 숨어 있었냐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원석과 보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파커 대령은 원석에 가까웠던 엘비스를 발굴해냈고. 그 원석이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세공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신경증 정도로 치부되어도 별말 할 수 없었을 다리(혹은 하반신)를 떠는 것조차도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로 만들어 냈다. 그렇다. 파커가 Nobody를 Somebody로 만들어준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파커는 세공 방법에 대한 지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허락된 빛(Light)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마치 엘비스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암흑 속에 영원히 갇혀 있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엘비스의 고삐를 틀어쥔 그가. 모든 것을 무대에 쏟아낸 채 커튼 뒤에서 기진 맥진한 엘비스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상을 만들 때. 돌 속에 숨겨진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던. 이미 돌 안에는 완성된 무언가가 있었고. 자신은 그저 불필요한 것을 없애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세기의 예술가 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대령이 스스로가 그저 협잡꾼에 불과함을 깨달아서 울길 바랐다. 그렇게 유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채 무릎을 꿇은 저 엘비스를 사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원래 완성된 상태로 그저 현실에 가려진 상태였음을 느꼈기 때문에 울었기를 바랐다.
시대의 카나리아;노래로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지금은 모두 센서로 대체되었지만. 예전에는 석탄을 캘 때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가스 탐지기처럼 이용했다.
투명한 새장 속의 카나리아가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작업을 멈추었다. 물론 이렇게 죽어가는 카나리아의 비용과 그 죽음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나중에는 새가 활기를 잃으면 공기를 주입해 되살리는 시스템까지 갖추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말은 다가오는 위험을 먼저 알려주는 존재를 뜻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다.
시대의 모든 변화 앞에 서 있었던 엘비스를 보며. 마치 그 시대의 카나리아 같다는 생각이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쓰러져서는 안 되는 존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각종 약물을 투여하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어차피 모든 위험. 혹은 비난은 엘비스가 감수할 테니. 엘비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늘 극한까지 등 떠밀어댔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모든 위험을 피부 하나로 다 느껴야 했을 엘비스는 그저 그 두려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노래로 하는 것 외에 자신이 가진 수단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실제 엘비스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공연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이제 한계까지 왔다고 퍼덕이면서. 환호의 박수가 아닌 애처로움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이런 나의 감상도 어떻게 보면 이미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같잖은 위로 같기만 했다. 만약 나 역시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의 절규에 그저 잘한다며 손뼉을 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마지막 공연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치면서
빠른 전개와 눈을 사로 잡는 화면들. 그리고 엘비스가 음악이라는 것에 빠져드는 것을 묘사하는 초반 10분 시퀀스는 그 누구의 마음도 뺏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또한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런닝 타임도 잘 분배하고 조절해서 그다지 지겹다거나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물리적 시간이 주는 괴로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마치 [나이트 메어 앨리]를 보는 것 처럼 환각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엘비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황제의 뒤안길이 쓸쓸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프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 글의 TMI]
1.독일어..갑자기 너무 어려워졌어요...
2. 하지만 포기하는건 부끄러워서 못하겠음.ㅠㅠ
3.그래서 엉엉 울면서 매일 하고 있는데.
4.근데 이제 거기 복숭아랑 망고를 잔뜩 끼얹은 공부를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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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단하되 느린 '용들의 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후 마침내 내전 '용들의 춤'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라에니라 타르가르옌'(에마 다시). 하지만 그녀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남편 '다에몬'(맷 스미스)의 독단으로 인해 칠왕국의 비난이 그녀에게 쏠려 버린 것. 심지어 흑색파 가신들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통치력과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라에니라는 점점 곤경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전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타르가르옌 가문의 큰 어른인 '라에니스 타르가르옌'(이브 베스트)이 녹색파 최강의 드래곤 바가르와 그 기수 '아에몬드 타르가르옌'(이완 미첼)에게 공격당해 사망한 것. 이에 라에니라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타르가르옌 가문의 모든 서자를 불러 모은다. 주인이 없는 드래곤에게 새 주인을 찾아주고, 단기간에 전력을 강화해 전세를 뒤바꾸기 위해서.
저조한 흥행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기획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1의 흥행은 놀라웠다. 첫 회부터 10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기록했고, 평균 시청률도 회당 약 1,000만 명 이상을 유지했다. 시청률만 높은 것도 아니었다. 제8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도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2년 만에 돌아온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두 번째 시즌은 실망스럽다. 당장 수치가 시즌 1에 못 미친다. 시즌 2의 첫 회는 약 78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시즌 1 첫 방영 당시의 시청자 수보다 약 22% 감소한 수치다. 평균 시청률도 낮아졌다. 시즌 1의 마지막 화 시청률은 930만 명에 달했는데,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는 890만 명에 그쳤다.
재미와 완성도도 시즌 1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 시즌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기획의 한계가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번 시즌은 기존 인물들의 갈등을 일단락하고,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다가올 내전, '용들의 춤'을 위해 판을 까는 데 집중했다. 그 대가는 컸다. 캐릭터가 많다 보니 응집력이 약해졌고, 기승전결도 명확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시즌 1이 키운 기대감을 미처 이어가지 못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물론 <하오스 오브 드래곤> 제작진의 선택도 일견 이해는 된다. <왕좌의 게임> 본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이었기 때문. <왕좌의 게임>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혹평받았다. 캐릭터의 붕괴가 핵심 원인이었다. 외견상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이나, 그 본질은 정치극 혹은 군상극에 가까웠다. 즉, 수많은 캐릭터가 자기 목표를 위해 이합집산하며 펼쳐지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재미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 후반부는 스케일을 키우다가 각 캐릭터의 매력을 놓쳤다. 칠왕국의 내전, 밤의 왕과의 전쟁에만 초점을 맞출 뿐 각 캐릭터의 행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 시즌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붕괴됐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는 불과 한 회만에 타락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했고, 예언 속 영웅인 '약속된 왕자'로 꾸준히 암시된 '존 스노우'(킷 해링턴)도 본인 역할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본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애쓴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각 인물의 서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다. 그 중심에는 흑색파의 리더인 라에니라와 녹색파의 기둥인 '알리센트'(올리비아 쿡)가 있다. 시즌 1에서 그들은 모성애라는 같은 이유 때문에 충돌했지만, 시즌 2에서는 같은 문제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로 남거나, 여왕으로 거듭나거나
자기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왕좌를 노렸지만, 전쟁만은 피하려던 알리센트와 라에니라. 내전이 시작된 후에도 두 여성은 비슷한 곤경에 처한다. 전례가 없는 여성 정치인의 통치에 자꾸 분란이 생기니까. 알리센트는 왕대비로서 정국을 주도하려다가 오히려 두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라에니라도 휘하 영주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전쟁에 나선 적도, 칼을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여왕의 지시에 그들이 끊임없이 반기를 들기 때문.
그러나 난관을 뚫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알리센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어머니다. 그래서 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다. 권력을 빼앗기고, 녹색파 내부의 갈등이 커져도 알리센트는 모성애와 가족애에 호소한다. 일례로 장남이자 왕인 '아에곤 2세'(톰 글린카니)와 차남이자 섭정인 아에몬드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 그녀는 정치적 거래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로서 두 아들의 싸움을 말리려 한다.
반면에 라에니라는 점차 여왕으로 거듭난다. 자기 권위와 권력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장녀라는 점에서 비롯함을 돌파구로 삼는다. 특히 타르가르옌 가문이 드래곤 혈통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가문의 서자들, '드래곤의 씨'를 적극 활용한다. 장남 '자캐리스'(해리 콜렛)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드래곤을 길들인 이들을 선별해 전력을 강화한다. 또 자신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도구로도 이용한다.
이 차이점은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성들이 현실의 역경에 맞서는 여러 방법과 겹쳐 보인다. 라에니라는 조금 더 현대적이고, 알리센트는 비교적 전통적인 여성이니까. 작품 내적으로는 그들의 선택을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어서 더욱 흥미롭다. 원작에서 두 여성은 자기 가치관과 반대되는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 라에니라는 승전하고도 여왕이 되지 못하고, 알리센트는 모든 자식을 잃을 운명이니까.
확실한 교통정리
두 여성이 정해진 비극으로 나아갈 것이 정해졌듯이,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도 전면전을 앞두고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일례로 녹색파의 이합집산이 본격화된다. 특히 아에곤 2세와 아에몬드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섭정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아에몬드는 형을 죽여서라도 왕좌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한 아에곤은 수도인 킹스랜딩을 떠날 준비를 하며 다음 시즌에서 녹색파가 처할 위기를 암시한다.
독보적인 사고뭉치인 다에몬의 서사도 마침내 정리가 된다. 그는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형이자 왕인 '비세리스 1세'의(패디 콘시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시즌 2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왕이자 아내인 라에니라의 장악력이 흔들리자 왕이 되겠다는 야욕을 곧바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욕망덩어리인 그가 어떻게 욕심을 버리고, 라에니라를 여왕으로 인정했는지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인다.
특히 이 부분은 본편과의 연결고리라서 더욱 눈에 띈다. 다에몬은 여러 환상과 암시를 본다. 본인은 물론 '용들의 춤'에 관여된 모두가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서사시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라에니라가 왕좌에 올라야 이 서사시가 비로소 이어질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는 <왕좌의 게임>이 '티리온'(피터 딘클리지)의 입을 빌려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야기의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 또한 인상적이다. 시즌 1이 궁중 암투였다면, 시즌 2는 그 암투가 평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같이 탐구한다. 그 중심에는 드래곤의 씨 세 명, '휴 해머'(키에론 존 뷰), '울프 화이트'(톰 베넷), '아담 벨라리온'(클린턴 리버티)이 있다. 그들은 전쟁 준비와 식량난 때문에 고통받느니 죽을 각오로 드래곤을 길들이는 데 도전한다. 이는 단순한 권력 투쟁처럼 보이던 '용들의 춤'에 현실감을 더한다.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아
문제는 캐릭터가 너무 많은 나머지 구심점이 약하다는 것. 전개 속도를 고의적으로 늦추면서 캐릭터를 깊이 개발하고 긴장감을 구축했지만, 녹색파와 흑색파 모두 사분오열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난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음 시즌을 앞두고 가지치기는 확실히 했는데,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다 보니 나무가 좀처럼 깔끔해지지 않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방점을 찍어줄 클라이맥스의 부재가 아쉽다. 물론 중간중간 등장한 드래곤들의 전투는 분명 놀라운 스펙터클이다. 본편에서는 드래곤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학살하는 묘사가 대다수였고, 드래곤끼리 싸우는 장면은 마지막 시즌 한 에피소드에서만 잠시 등장했다. 그에 반해 이번 시즌은 거대한 드래곤 세 마리가 뒤엉키면서 싸우는, 그 자체로 전율이 이는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전투가 중반부에만 등장하다 보니 시즌을 끝맺었다는 느낌은 덜하다. 여러 캐릭터의 서사가 전쟁이라는 종착점으로 모였음을 시각적으로 각인시켜 주는 장면이 부족한 것. <왕좌의 게임>이 매 시즌 후반부마다 결정적인 전투 시퀀스를 배치해 시즌을 명확히 끝맺은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차라리 마지막 화에 전투씬을 짧게라도 보여주면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게 어땠을까 싶다.
어쩌면 드라마 기획의 근본적인 한계와 과욕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원작 소설의 형식이 한계로 작용한 듯하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근본적으로 더하기의 미덕이 빛나야 하는 작품이다. 원작 자체가 역사서 형태로 쓰였기 때문에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이야기를 삽입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각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려다가 군살이 다소 과하게 붙은 인상이다.
종합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단단하고 풍성한 이야기로 무장한 기초 공사, 시즌 3의 전초전에 그친다.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시즌 1로 인해 높아진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못한 속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향후 두 시즌의 만듦새에 따라 더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어벤져스>를 위해 완성도를 희생한 <아이언맨 2>와 유사한 위치인 셈이다.
Acceptable 무난함
드래곤보다는 사람에게 주목한 '용들의 춤' 기초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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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 귀를 기울이면의 닮은 점?
안녕하세요! 두번째 영화 리뷰로 돌아온 파노라마 이가애 에디터입니다. 이번에는 이번년도 여름에 개봉한 루카 입니다!
픽사의 신작 루카를 보고 왔다! 전부터 루카를 기대해오던 디즈니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써, 이번 루카도 관람하게 되었다.
루카 영화는 주인공 루카와, 알베르토 바다괴물들이 육지로 올라와 스쿠터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내용이다. 내용도 별로 어렵지 않고 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영화도 아니어서 정말 웃으면서 볼 수 있었다. 루카의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정말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우연하고 신기하게도, 루카를 보기전날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보고 영화관에 가게 되었는데, 감독님이 지브리 영화 중 이 영화에서 많이 영향을 받은게 티가 나서 신기했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 과 "루카" 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로, 고양이의 등장이다.
루카가 개봉하기 바로 전작인 소울에서도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소울의 고양이와 루카의 고양이의 모습이 다르다! 소울의 고양이는 픽사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면 알 수 있는 딱 픽사 느낌의 고양이이다. 하지만 루카의 고양이는 귀를 기울이면의 고양이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지브리의 2d를 3d로 옮겨놓으면 딱 이렇게 생길 것 같은 모습이다. 정말 비슷해서 되게 이스터 에그를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귀를 기울이면의 고양이
루카의 고양이
두번째로, 중간중간 나오는 상상의 세계이다.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주인공인 시즈쿠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루카에서도 루카가 상상하는 세계들이 등장하며 꽃밭을 노니는 모습이나, 물고기 달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꽃밭 장면은 영상미도 그렇고 영화관에서 보는데 정말 너무 좋았다.
명대사
산타 모짜렐라!
전체적으로 짧은 러닝타임에 이야기가 급하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다고 듣고 영화를 봤지만, 급전개가 엄청 느껴지진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픽사가 만든 여름의 색들을 보고 싶다면 정말 추천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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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출 수 없는 마음 속 ‘둠둠’
- 우리나라에 다섯 군데뿐인 돌비 시네마관에서, 듣는 경험이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돌비 시네마는 돌비 비전 HDR 영상과 돌비 애트모스 음향을 사용하는 돌비(Dolby) 사의 상영관입니다. 색다른 극장 경험을 제공하는 이곳에서 디제잉을 소재로 한 영화 <둠둠>을 만났습니다.<둠둠>은 ‘디제잉'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사운드가 러닝타임 내내 귓가에 울리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토해내듯 터져 나오는 사운드와 달리,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하염없이 말을 삼킵니다. 여타 음악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가 맴도는 <둠둠>.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9월 6일(화)에 진행된 <둠둠>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둠둠>은 2022년 9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둠둠Doom Doom<둠둠>은 DJ 출신 미혼모 ‘이나'가 엄마 ‘신애'에게서 벗어나 음악을 향한 열정과 자신의 아기를 되찾는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나'에게 엄마 ‘신애'는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음악 같은 존재입니다.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안전 염려증 환자 ‘신애'는 밤낮 가리지 않고 타카질을 하며 벙커를 만듭니다. ‘이나'는 동네 주민의 원성에도 으름장을 놓아버리는 엄마가 답답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이나'는 끝없이 걸려 오는 안전 염려증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는 미혼모 ‘이나'의 아기를 입양 보내고 음악을 그만둘 것을 강요합니다. 이때도 ‘이나’는 어찌하지 못합니다. 결국 음악을 관두고 상담원으로 일하며, 엄마 몰래 위탁 가정에서 아기를 돌보죠. 그렇게 엄마를 견뎌오던 ‘이나’는 마지막으로 디제잉 대회에 도전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엄마'라는 음악을 꺼버리고, 음악과 아기를 되찾으려 합니다.<둠둠> 속 모녀 관계는 얼마 전에 감상한 <경아의 딸> 속 모녀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딸의 비극을 딸의 탓으로 몰아세우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딸. <경아의 딸>의 딸은 갑갑한 엄마와의 연을 끊어버렸지만, <둠둠>의 딸은 엄마를 견뎌냅니다. 웃어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주죠. 생각해보면 엄마의 막말에 상식적인 대응을 한 건 <경아의 딸> 속 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엔 엄마의 막말을 견디며 살아가는 <둠둠> 속 ‘이나’ 같은 딸들이 더 많습니다. 엄마 ‘신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말을 삼키는 ‘이나’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딸 ‘이나'와 엄마 ‘신애'의 뿌리 깊은 갈등은 의외로 한순간에 해소됩니다. 엄마 ‘신애'의 팔에 못이 박히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말이죠. 태국에 있는 딸을 데려와 준다는 교회 사람들의 사탕발림에 ‘신애'의 집에서 하녀처럼 부림 당하던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이주 노동자 여성에게 엄마의 부정을 전한 '이나'는 엄마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신애'는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로 말미암아 딸과 함께할 수 없는 ‘이나'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이나’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엄마를 조금씩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음악을 만들며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죠.영화를 보면서 러닝타임 내내 고통을 겪은 ‘이나'가 너무 갑작스럽게 엄마를 용서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야기더군요. '애증'으로 묘사되는 모녀의 싸움은 언제나 그렇듯 칼로 물 베기니까요.⊙ ⊙ ⊙무릇 힘든 일은 한꺼번에 찾아오곤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죠. 주인공 ‘이나'도 그런 상황에 부닥친 인물입니다. 딸을 데려오지 못하는 미혼모, 안전 염려증에 사로잡힌 엄마, 엄마로 인해 음악을 그만둔 DJ, 좋아하는 테크노 장르보다 화려한 EDM 장르가 인기인 시대, 자신의 오리지널 곡을 빼앗은 옛 동료, 귓가에 맺히는 이명. 이 모든 것이 <둠둠>의 주인공이 겪는 시련입니다.이러한 역경들은 ‘이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피어나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EDM의 시대에 비주류 음악인 테크노를 한다는 설정은 미혼모 '이나'의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시련을 부여하는 바람에, 음악과 아기를 되찾는 ‘이나'의 여정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옛 동료와의 갈등과 갑작스러운 이명은 ‘이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장면들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죠.영화 말미, 온갖 시련을 무릅쓴 ‘이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현실로부터, 편견으로부터, 그리고 엄마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요. 교회에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신애’와 교회 신도들을 앞에 두고 디제잉을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나'의 모든 시련과 제 아쉬움이 한 방에 해소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종교가 없는 저는 이게 교회에서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질 만한 갖은 역경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득 담은 영화의 결말이 과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종교인 친구는 개방적인 교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팩트 체킹을 해주었답니다.)⊙ ⊙ ⊙<둠둠>은 듣는 매력이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둠둠거리는 비트가 고막을 자극하죠. 하지만 ‘둠둠’은 단순히 강렬한 사운드만을 묘사하는 말은 아닙니다.‘둠둠’은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음악을 향한 ‘이나'의 열망,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아려오는 엄마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몇몇 장면에서 둠둠거리는 비트와 엄마 ‘신애'의 타카질 소리가 교차되어 들려오기도 하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둠둠'을 더는 감내하지 않는 ‘이나'의 여정은 사운드 그 이상의 울림을 전합니다.Summary자신에게 집착하는 엄마 때문에 전부였던 음악을 놓아버린 DJ '이나'. 길을 걷다 우연히 들려온 비트에 디제잉을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에 갈 수 있는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두려워도 도망치진 않을 거야" (출처: 씨네21)Cast감독: 정원희출연: 김용지, 윤유선, 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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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램덩크' 원작 잘 모르는데 이 영화 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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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바로 지금
영화의 카메라는 북산고와 산왕고의 토너먼트로 향한다. 땀냄새나는 코트. 10명의 선수들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 전력적 열세인 북산고. 그렇지만 이번 경기에서 모든 걸 다 걸어야만 한다.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다섯 명의 학생들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전국제패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전력 차를 극복하는 것 같다. 경기 초반, 비등하지만 앞서 나가고 있는 북산고. 의외로 별로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이대로만 가면 되겠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산왕고가 아니다. 산왕고의 벤치가 뭔가 심상치 않다. 전략을 바꾸는 산왕고. 전략을 새롭게 도입하며 경기의 흐름을 바꾸려고 한다. 고전하는 북산고. 특히 강백호와 송태섭은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다. 특히 태섭의 얼굴 표정에는 비장함이 서려있다.
무언가 놓고 온 게 있었나. 다른 선수는 안 그랬나 싶지만 유독 태섭이 승리를 원했던 이유는 색다르다. 태섭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다. 가장이 없어진 집안. 남은 것이라곤 형 송준섭과 동생 송태섭, 그리고 여동생과 어머니다. 농구선수였던 형 준섭. 준섭이는 농구를 놓을 수 없다. 농구선수로서의 출세를 꿈꾸던 준섭.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어선을 탔다. 태섭은 눈물을 흘린다. "나랑 같이 농구 한 판 하기로 했잖아!" 배를 타기 전에 형의 손을 잡을 수 있었지만 화가 난 마음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준섭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혼자 남은 태섭. 형이 남기고 간 농구공을 잡아, 새로운 무언가를 향한 도전을 꿈꾸려고 한다. 이제 태섭이가 코트에 우뚝 설 일만 남았다. 영화는 태섭의 이야기와 산왕전을 엇갈리게 제시하며 그가 왜 절실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원작 보고 가야 되나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보고 가는 것이 좋다. 시간이 없다면 인물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다'다. 글쓴이는 영화 중반부까지는 잘 집중이 됐다. 그러나 중후반부 즈음에 살짝 졸아서 밖에 나갔다 왔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흥미롭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산왕전의 결과가 궁금했다. 송태섭을 처음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 서사와 산왕전이 엇갈리는 영화의 형식이 가끔 흐름을 깬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송태섭 서사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봤던 것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소담한 감성이 중심이긴 하다. 이런 연출 방식을 좋아하는 분들은 송태섭 서사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걸 잔잔하게 받아들인다면, '특정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템포를 확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영화에서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중후반부 이야기 전개를 통해 '왜 이렇게 영화를 보여줬는지' 다 설명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불친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글쓴이는 사실 원작을 보고 가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채치수, 송태섭, 안 선생님이 누구인지, 산왕고는 극 중 어떤 위치인지 정도는 무조건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글쓴이는 90년대생 중에 슬램덩크 짤 단 한 번도 안 본 사람 1만 명도 안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살짝의 배경지식은 다들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원작을 봤던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받아들일 부분이 많다. 만화에서, 영화 주인공인 송태섭은 존재감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인물의 특성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원작을 많이 봤던 팬들이라면 송태섭이 다른 북산고 멤버들과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를 테니 이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강백호와 서태웅이라는 슬램덩크 시그니쳐들과는 다른 이미지에서 극을 시작한다는 점이 아는 이야기를 좀 더 다르게 전달할 수 있다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또 원작 이야기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영화가 살짝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팬들 입장에서야 송태섭 서사가 신선하지 모르는 관객들 입장에선 그냥 다 똑같은 농구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이 송태섭 이야기로 만든 가족드라마와 스포츠 영화는 기존에도 있었다. 글쓴이는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아도 <스텐바이, 웬디>와 <족구왕>이 생각난다. 이뿐인가? 이 두 작품 외에도 이와 유사한 영화들은 수도 없이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슷한 서사가 많다고 해서 이야기 흐름을 바꾸기엔 위험부담이 있다. 자기가 만든 만화를 뒤엎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전개에 있어 좀 다른 방식으로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주인공을 바꾸는 게 제격이다. 같은 일을 받아들이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질감과 운동
영화 전반적으로 '참 따뜻하다' 싶었던 것은 극의 색감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무조건적으로 화사하진 않지만 따뜻한 색감을 잘 활용했다. 가령 이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시퀀스는 태섭이 형 준섭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처음부터 감정적으로 센 장면을 배치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를 보다 보면 '왜 태섭의 이야기를 영화에서 엇갈리게 제시했을까' 의문이 든다. 초반에 이 인물이 이것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의미부여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바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뭔가 따로 노는듯한 송태섭의 서사를 고립되어 있는 공간감과 살짝 탁한 색감으로 소화한다. 러닝타임동안 태섭에게 이 상실의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데, 이를 연출로 잘 보여준 셈이다. 혼자 있어 외롭고, 어두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관점을 영화언어로 보여준 것이다. 이는 극후반부 엔딩과 대비된다. 글쓴이는 엔딩 신과 초반부의 장면 색감이 좀 차이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첫 장면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입장 변화를 색감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 송태섭 서사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산왕전이다. 살짝 잔잔한 톤으로 전개되는 송태섭 서사와는 반대로 산왕전은 인물들의 농구경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중요성과는 반대로 산왕전의 초반부를 볼 때 뭔가 어색하다고 느껴졌다. 약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보는 느낌? 그런데 초중반부를 넘어가면 극 이해에 큰 문제가 없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운동능력에 대한 큰 동선을 잘 잡았다. 스포츠에 정답은 없다. 공 갖고 하는 운동이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와도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간다. 당연히 농구에서도 리바운드나 덩크슛 같은 상황이 매번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 잘 이해하듯 영화 내적인 이야기에서 인물들의 상황에 맞게 움직임을 잘 짰다. 이 덕에 농구경기라는 영화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생동감이 생긴 것이다. 그중 제일 좋았던 운동 묘사는 산왕고의 전략 변경이다. 산왕고가 경기를 다르게 운영함으로써 북산고 멤버들이 어떻게 느낄지를 잘 표현해서 영화의 생동감을 살렸다.
영화여야만 해
글쓴이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또래들이 좋아하는 <원피스>나 <나루토>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았다. 당연히 이 <슬램덩크> 시리즈 역시 보지 않았다. '불꽃남자 정대만' '강백호'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하나도 성장하지 않았어'같은 유행어들은 알았지만 그게 슬램덩크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이 하도 좋아서 표 예매하기 20분 전에 부랴부랴 인물들에 대해 읽어본 게 전부다. 영화 보기 전에 생각했던 것이 '이거 좀 전형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금세 티켓값 10000원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원래 계획대로 안 보는 게 나았나?
글쓴이는 영화를 보기 잘했다고 느낀다. 이유는 이 영화는 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원작의 연장선상? 만화를 본 분들이라면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핵심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어떤 대사를 한다. 질문의 형식이다.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작품 형식에서 이 문장에 힘을 빡 주는 연출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 작품 자체의 오리지널리티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가 갖고 있는 다른 핵심 소재는 용서와 화해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분노/혐오를 조금씩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강백호나 정대만도 양아치였던 시절이 있고, 서태웅과 강백호는 라이벌이다. 이런 식으로 각자가 마음속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다. 이 마음속의 응어리를 농구경기를 통해 해소한다는 점에서 '왜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가'에 대한 답변이 된다고 생각한다. 왠지 모르게 영화의 엔딩을 보고 나서 내가 농구경기를 다 뛴 느낌이 들었다. 후반부에 많은 분들이 언급하는 '그 청각효과'때도 마찬가지다. 극장이 고요한 느낌이 <드라이브 마이 카> 이후 오랜만이었다.
물론 원작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만큼 행복한 기억이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 이제 '톰스파'가 아닌 다른 두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제 스포일러가 아니다. 이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짧은 기간에 3명의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탑건 : 메버릭>이 36년 만의 후속작을 낸 것과는 대비된다. 이렇게 짧은 기간으로 인물들을 찍어냈기 때문에 시리즈 내적으로 다른 스파이더맨과의 차이점을 만들어야 한다. 이 차이점은 관객에게 하여금 '이 스파이더맨을 볼 때 내가 어떤 상태였지'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영화는 이렇게 추억팔이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채치수 등 주요 인물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 농구공을 건네는 듯하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던 그 때에서 시작해 그동안 잘 지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자, 원작 만화와 영화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긴 시간 동안 품어온 여러분의 미련은 무엇일까? 태섭이가 질문하고 있다. 답할 준비가 됐다면 코트로 달려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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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만나게 될 수많은 '이균'
최근 방영된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에 출연한 '에드워드 리' 셰프가 화제였죠.
"나에게는 한국 이름도 있어요.
우리 부모가 지어준 이름, 나의 한국 이름은 '균'입니다.
그래서 이 요리는 이 균이 만들었어요"
에드워드 리 그리고 이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미쳐 몰랐던 수많은 '이 균'을 이제는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나 문화적 집단이 원래의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사는 현상을 말합니다.
과거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의 문화를 지켜온 유대인의 삶을 지칭하였으나,
현재는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집단을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한 디아스포라 영화로는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있습니다.
그럼 또 다른 '이 균'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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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부모 밑에서 자란 귀여운 천재소녀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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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공식 예고편
새로운 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캡틴🔥 2025년, 모든 것이 새로워진 세계를 확인하라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2025년 2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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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웃브레이크> 메인 예고편
사상 초유의 바이러스 발생!
숨쉬는 순간, 당신 가족의 목숨마저 앗아간다!유례 없는 최악의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팬데믹 사태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다.
이에, 감염병 전문의이자 보건 응급연구소 소장 ‘앤 마리’는
바이러스 감염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