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2-12 11:03:31
시간 너머의 당신에게, 마음을 담아
영화 <시월애> 리뷰
기적을 바라는 마음
매년 연말,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새해의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지친 일상에 나를 설레게 할 무언가가 찾아오기를, 전과는 다른 기적 같은 일상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세기말, 새로운 천년의 해가 뜨는 때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지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 남긴 힘듦을 지우고자 하는 마음, 새로움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뉴 밀레니엄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기적을 바라며,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기적이란 무엇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기적은 별다른 것이 아닌 듯이 느껴진다. 시간을 넘어 전달된 편지는 기적이라 불릴 만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해프닝으로 지날 수 있는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상한 일로 치부해 버리고 돌아서면 그만인 해프닝. 그렇기에 성현과 은주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일상과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기적을 만드는 힘이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나와 꼭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나의 고민을 위로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이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드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상처를 위로하는 일
‘우편함’이라는 뒤틀린 시공간이 전달해 준 편지 한 통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을 연결해 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통해 그들이 나눈 마음은 진짜 ‘기적’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상처를 안았다. 성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성현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를 떠났다. 건축가인 아버지와 같이 ‘건축’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는 학교도 휴학해 버리고 토목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한다. 일마레에 건축가로서의 성현을 가둔 채 말이다. 그리고 은주는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았다. 은주의 남자 친구는 은주의 꿈이던 성우를 포기하고 함께 유학을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그는 은주를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혼자서 밀레니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편지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편지는 이상한 용기를 준다. 누구인지도 모를 편지 너머의 사람을 믿는 것은 퍽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미묘한 거리감은 으레 서로의 친한 친구에게도 전하지 못하는 말을 기꺼이 할 수 있게 만든다. 두 사람은 역시 그 거리에 기대 서로가 받은 상처를 공유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는 본인을 위로하는 듯하다. 상처를 극복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상처를 마주하는 것부터라고들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상처는 달랐지만 사랑에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렇기에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과 서로를 위로하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소한 행복을 공유하는 일
‘우울할 땐 요리를 하세요.’
성현은 은주에게 파스타를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자신만의 기분 전환하는 방법을 공유하며, 다른 시간 속 같은 행위를 통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편지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를 만날 방법을 찾는다. 과거와 미래의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로를 마주칠 방법을 찾은 두 사람은 우편함을 통해 녹음기를, 손 장갑을, 선물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연결한다. 그리고 일상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함께 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선 편의점에 들어가세요.’ / ’보문리로 가는 버스를 타세요.’
무료하고 외로운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일상을 벗어나 전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일이면 충분할지 모른다. 은주는 성현에게 놀이동산을 즐기는 법을 알려준다. 성현은 전에 라면 시도해 보지 않았을 방법으로 일상을 채운다. 성현 역시 은주에게 산책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려준다. 처음 가보는 공간에서 은주는 과거의 성현이 전한 와인을 마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시공간의 서로와 함께한다.
고독으로 채워진 두 사람의 삶에 새로운 빛이 들기 시작한다. 안개 덮인 일마레를 벗어나 하나둘 쌓는 둘만의 추억은 서로를 따사로운 햇살 아래로 이끈다. 상처를 보듬고 일상을 회복하는 것, 더 나아가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픔은 두고 좋은 기억만 담아 미래로 나아가는 것
영화는 그렇게 만든 일상을 쌓아 미래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성현은 과거에 있는 사람이다. 미래에 있는 은주에게 이끌려 미래로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은주는 성현과 반대로 계속해서 과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녀를 발목 잡는 아픈 상처들이 모두 그곳에 있음에도. 그래서일까 은주는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선택을 바꾸려고 한다. 과거를 변화시키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남자 친구와 헤어진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현에게 남자 친구와 헤어지지 않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 은주는 자신의 부탁으로 성현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는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지 않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성현이 사고를 당한 것은 은주에게 먼 과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이기도 했다. 혹시나, 그리고 아직은 닿을 수 있는 편지 한 통이 남아있는 성현의 미래. 그렇게 은주는 성현의 미래를 바꿨다. 이는 은주의 미래를 바꾼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성현은 바뀐 미래에서 은주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고자 한다.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과거가 나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줬든 간에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은주의 절박함이 성현에게 닿았듯, 우리가 간절히 바란다면,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 줄 것이다.
영화가 로맨스를 앞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지난날의 후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새천년의 미래를 앞둔 성현과, 지난 과거에 마음을 둔 은주가 편지를 통해, 서로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이 그러하다. 우리는 두 사람을 통해 과거를 과거에 두어야 한다는 것,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일마레는 때로는 사람을 너무 외롭게 만들어요.”
일마레의 뜻은 바다다. 모래사장 한가운데 지어진 집은 아름답지만, 얼핏 고독 보인다. 바다의 한가운데 지어져 마치 외딴섬처럼 보인다. 성현과 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에 상처받은 그들은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치고, 스스로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잘못 전달된 ‘편지’ 한 통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지난 발자국의 흔적을 지우는 파도처럼 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에 출렁였다. 그렇게 새로운 모래를 덧입혀 그들의 상처를 덮었다.
성현과 은주는 사랑에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 가슴에 상처를 내는 일인 거 같아요.”라고 은주가 편지에 적었던 것처럼 연인과의 사랑에서, 부모와의 사랑에서 스스로를 달래지 못하고 하염없이 고독한 사람이었다. 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닿은 편지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고, 일상을 나누며 행복을 쌓았다.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성현은 믿기지 않을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은주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우리는 안다.
서로에게 닿아 변화시킨 일상의 기적을, 미래를 변화시키고자 한 마음이 닿은 기적을.
나 역시 과거는 과거의 일로 남겨 놓은 채, 내 앞에 놓인 미래를 변화시킬 일상을 기대하며,
2000년에서 보내온 영화를 통해, 2025년을 기대해 본다.
Editor. H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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