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03 07:46:50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
영화 〈은빛살구〉

정서는 아파트 청약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아파트에 투영된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야 할까? 아니면 정서가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뱀파이어 웹툰을 그리는 데서 우리 시대의 불합리한 계급 구조와 자아실현의 관계에 질문을 던져야 할까? 정서가 외도로 이혼해 다른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재회해 가까워지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질긴 혈연의 의미를 곱씹어야 할까?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문득 마음에 들어오는 이복동생과의 관계에서는 자매애의 새로운 토대를 발견해야 할까?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와의 사랑이 아파트 계약 성사 여부에 오락가락한다는 데서는 사랑의 조건을 질문해야 하는 걸까?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정서와 맺는 관계는 또 어떤가? 아니면 무엇보다 이 거대한 여정을 모두 거친 후 주인공이 맞이하게 될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은빛살구〉를 보며 도무지 이야기의 결을 종잡기가 힘들었다. 결혼을 앞둔 정서는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웹툰을 그린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지만 계약금이 없다. 어머니는 정서에게 오래전에 외도로 가정을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이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대신 받아 계약금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재혼해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 운영하는 횟집도 문전성시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딸이 반가운 기색이다. 이복동생도 은근히 정서를 따르며 살갑게 군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른 속셈과 비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동생과의 해프닝 등등이 겹치며 정서의 계획은 꼬여만 간다. 계약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정서는 점점 초조해지지만 남자 친구는 속도 모르고 엉뚱한 짓만 반복해 그녀를 화나게 한다. 하필 그때 옛 연인이 등장해 정서의 마음이 흔들린다.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된 여정 후, 회사에서는 ‘정규직 계약’을 빌미로 정서를 못살게 군다. 결국 정서는 은근히 혹은 대놓고 자신을 옥죄어 오던 것들과 단절하고 자신의 웹툰 속 최상위 포식자 ‘뱀파이어’가 되어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 걸어간다.


결과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중구난방이다. 초점이 없다. 사건 전개가 유기적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채 이어지는 듯한 인상이고, 여러 갈래로 흩뿌려진 이야기 갈래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 의식을 찾기도 어렵다. 어느새 우리는 내내 짜증이 나 있는 정서의 감정에 물들고야 만다.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연쇄 속에서 정서의 감정은 관객의 감정이 된다.
배우들의 호연을 고려했을 때 아쉬운 일이다. 정서를 비롯해 그녀의 아버지와 이복동생 등 영화에는 생기와 개성을 갖춘 캐릭터들이 꽤 있다.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엇갈렸다면 어땠을까.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고군분투가 못내 아쉽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한국경쟁 배우상).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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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판과 고질라 그 무엇들보다 <커튼콜>
*영화추천*
<커튼콜> Curtain Call, 2016
감독: 류훈
빨판과 고질라, 그 무엇들보다
출처: 영화 <커튼콜> 스틸컷(네이버)그는 한때 셰익스피어를 쪽쪽 빨아먹는 빨판이라 불렸다.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기대주이자 모든 동료의 눈과 입에 요란하게 걸릴 인재이기도 했다. 그의 친구는 맛깔난 애드리브로 연극판을 씹어먹는 고질라였다. 빨판과 고질라, 민기와 철구, 두 친구는 자칭, 타칭 천재 연출가와 배우, 그보다 더한 수식어가 따라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예술가’가 될 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섭고 서글프다. 빨판은 ‘하느냐, 마느냐’에 철학을 욱여넣은 삼류 에로 극단 ‘민기’의 연출가가, 고질라는 식대 영수증만 보면 애드리브가 폭발하는 프로듀서가 됐다.
꼭 꿈과 현실 중 하나를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착각이다. 두 친구는 셰익스피어와 에로 중간에 서서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극단에 소속된 단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속사정이 무대 위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걸 알지만, 굳이 치우려 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절망이 때론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걸 알고 있고, 무엇보다 무대에 올라간 ‘내가’ 그것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커튼콜> 스틸컷(네이버)
물론 극단 민기의 햄릿은 엉망진창이다. 정말 배꼽 빠지게 웃긴다. 단원들의 숨 막히는 실수는 끊이질 않고, 우리가 알던 햄릿은 점점 요상해지지만, 실없거나 우습지 않다. 오히려 놀랍다. 한없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햄릿이 순식간에 수백 개의 질문을 머금고 원래 제 무게를 찾는 순간, 우린 <커튼콜>이 대극장에 오른 연극이었음을 깨닫는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했던가. 아니다, 진짜 일류는 어쩔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음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다. 세상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은 날려버리고 무작정 끝을 보는 자, 언제든 절망을 희망으로 읽을 수 있는 자, 갑자기 ‘죽느냐, 사느냐’가 ‘하느냐, 마느냐’로 들려도 전혀 개의치 않는 자, 바로 ‘민기’ 같은 사람들이다.
출처: 영화 <커튼콜> 스틸컷(네이버)
위로든 힐링이든 힘이 든 뭐든 다 좋다. 빨판과 고질라 같은 것들이 주는 위세보다 더 강렬하고 곧은 나만의 심지를 확인했으면 한다. 그런 커튼콜이라면 몇 번이고 반복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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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The Lovers data-on The Bridge)
개봉일 : 1992.04.18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나에게 <퐁네프의 연인들>은 명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왠지 ‘그날의 기분’에 끌리지 않아 밀려버렸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한 개봉작이 아닌 이상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영화를 본 당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단 다가올 상실을 걱정하며 스스로 길거리에 나앉은 미셸과 길거리를 내 집 삼아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가는 노숙자 알렉스. 두 사람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만난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 다리 위.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미셸을 발견한다. 미셸은 알렉스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길거리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멀어버리기 전, 제대로 알렉스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수 중인 불완전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결핍으로 가득 찬 알렉스와 미셸. 두 사람은 가진 게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처지인 두 사람에게 남은 게 있겠는가. 돈도 직업도 지금 당장 만날 인연도 없는 (미셸은 자발적으로 버리고 나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니. 또 다른 노숙자 한스는 알렉스에게 묻는다. “네 주제에 사랑을?”
현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애, 즉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나를 가꿀 시간도 모자라서, 나를 건사하기도 벅차서. ‘가진 게 없어 연애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빠르게 포기하는데,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을 한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한다. 내가 상상하던 완전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분명 강렬한 빛깔의 로맨스였다. 퐁네프 다리 위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을, 알렉스의 물음에 미셸이 답을 내리던 그 순간을, 사랑을 잃을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퐁네프의 연인들 시놉시스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내 삶을 선택할 거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알렉스의 삶은 퐁네프 다리 위에 있다. 알렉스가 언제부터 그 다리 위에서 살아온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다듬은지 오랜 기간 지난듯한 몸. 그리고 자연스러운 절도 행위. 알렉스는 퐁네프 다리가 보수작업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다친 발을 이끌고 다시 다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성 미셸. 그녀는 육군 대령의 딸이다. 꽤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왔을 걸로 예상되는 그녀는 그림 작가였지만, 헤어진 연인 줄리앙에게서 받은 상처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떠밀려 길거리를 떠돈다.
미셸은 총과 함께 줄리앙에 대한 미련을 품고 퐁네프 다리에 누워있다. 그녀는 역사에서 우연히 줄리앙의 첼로 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뒤를 뒤쫓는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이 미셸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미셸의 뒤에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남자 알렉스가 있었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총과 함께 미련을 버린다. 7발은 미셸이 7발은 알렉스가.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의 행운을 위해. 알렉스와 미셸은 음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번갈아 총성을 울리며 함께 미련을 지워버린다. 그 날밤, 두 사람은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내일 아침 네가 날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은 세상. 온 도시가 잠든 후에 시작되는 둘만의 시간. 불면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팔. 이런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바람 부는 다리여도 상관없었고, 모래가 가득한 바닥은 포근한 매트리스가 되어 두 사람을 넉넉히 감싼다.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랑을 한다. 마치 갓 세상에 태어난 동물들이 첫 발걸음을 떼는, 본능을 따라가는 그 순간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엇도 알렉스와 미셸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
알렉스는 미셸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간절함은 지하철 역사를 헐떡이며 뛰게 만들었고 끝내 포스터가 들어있는 차와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 한 명을 불태우기에 이르지만, 미셸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이 갖고 있던 라디오는 선이 끊긴 채 방치되었고 알렉스는 미셸 몰래 숨겨뒀던 총으로 왼손 약지를 쏜다. 보통의 연인들은 왼손 약지에 껴둔 반지를 빼며 이별을 실감하는데, 알렉스는 커플링 대신 자신의 손을 쏘며 이별을 맞이한다.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였다면 의미 있는 물건 하나쯤은 남을만한데, 가진 것 없이 이뤄진 둘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방화와 과실치사로 복역하게 되고 2년쯤이 지난 후 미셸은 알렉스를 찾아온다. 시력을 회복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라, 잃었던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미셸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은 순간이 아닌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음을 그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했던 순간이, 모두가 잠든 후에 마음껏 도시를 누리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알렉스와 미셸은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퐁네프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두 사람을 받아준 화물선 위에서 다리 위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두 사람이 만일 다른 시간대에, 퐁네프 다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미셸이 절망감에 휩싸여 퐁네프 다리에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등을 뉠 수 있었던 퐁네프 다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겠지. 퐁네프에서 만난, 퐁네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퐁네프의 연인이 어쩌면 이 두 사람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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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리뷰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가 개봉했다. 개봉일에 곧바로 달려가진 못했으나 개봉 첫 주 안에 달려가 영화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쩐지 이전 작품을 보고 싶어졌다. 여전히 지브리의 작품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번 작품 역시 만족스러웠는데 말이다. 아마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내에 지브리의 타 작품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많아 내 안의 어떠한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그중에서 이번 11월, 내가 돌아간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1986)>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이지 멋쩍을 만큼 없다. 그저 내가 주기적으로 열어볼 만도 한데, 자주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틀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바라보는 '비행'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하늘을 난다는 건 오랜 역사 내내 인류의 꿈이었고 낭만이었다. 마치 그곳엔 지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꿈이라도 있을 것만 같다는 환상을 품으며 천사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상상 속 신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푸른 하늘을 떠도는 천공의 섬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건 퍽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극장에 걸리는 그들의 만화는 그야말로 가공된 상상 그 자체이지 않은가. 그런데 떠올려보면, 이 애니메이션, 굉장히 이상하다. 하늘을 떠도는 섬을 제목으로 삼았음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끝없는 상승을 거부한다. 대뜸 주인공의 추락으로 이야기를 열더니만, '비행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돌은 소녀와 소년을 안전히 착륙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대지의 가장 깊숙한 구석에서 수런대는 돌을 가공한 결과물이라는 게 밝혀진다. 심지어 천공의 성 라퓨타의 부활을 열망하는 이는 빌런으로 설정된 무스카밖에 없다.
등장인물들이 이미 오래전 멸망하여 전설에 가까워진 왕국으로 향하기야 한다만 관심사는 각자 다르다. 주인공인 파즈가 라퓨타에 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는 불명예스러웠던 아버지의 최후 때문이니 그가 실질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버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해적 도라 역시 라퓨타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그는 '해적'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라퓨타에 숨겨져 있을 고대의 보석에 관심이 있는 것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라퓨타를 인도할 수 있는, 적법한 후계자인 주인공 시타는 어떤가? 그는 이름과 비행석, 약간의 마법을 알고 있으나 그게 전부이다. 아이는 희미해진 고대의 지식에 목매지 않으며, 조상이 가졌을 절대권력에도 무관심하다. 허황된 상상을 할 법도 한데 시타는 자연에 가까운 소박한 삶을 추구할 뿐이다. 그가 라퓨타를 향한 여정에 동참하게 된 건 순전히 무스카가 그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고작 그 정도 이유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라퓨타가 하나의 맥거핀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등장인물들이 끝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사실이다. 비행선을 타야 하기에, 추락했기에 자신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서, 감방을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라퓨타를 찾아야 하기에. 실로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이유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브리 스튜디오가 정말 전하고 싶어 하는 건 땅 -평범함의 가치-이다. 라퓨타의 공주인 시타는 자신의 마을 곤도아를, 야크를 키우며 보냈던 평범한 나날을 그리워하며 무스카에게 땅을 떠나 살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광부 마을 출신 소년 파즈는 시타를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주요 조력자이며, 그가 살던 곳의 마을 사람들은 쫓기는 둘을 군말 없이 도우며 끈끈한 애정과 선의를 과시한다. 더군다나 라퓨타 성이 지나갈 때면, 지하의 비행석은 감응하며 수군댔다. 도라 해적단은 '해적'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했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시타와 파즈에겐 그들과의 모험조차 순간의 접점일 뿐이다.
어쩌면 간단히 이런 도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비행과 하늘이 꿈이라면 땅은 현실이라고. 그렇기에 애니메이션 속 소녀는 떨어지고 땅에 도착한 후, 파즈와 관객을 자신의 불안정한 세상으로 초대하며, 우리를 몰입하게 만들고, 라퓨타에서 미련 없이 대지를 위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지브리의 다른 애니메이션처럼 라퓨타가 전하는 다정은 이런 곳에 있는 듯하다; 영영 인간이 찾을 수 없도록 라퓨타를 행성 밖으로 보내며 자유를 선사하고선 소녀와 소년을 땅으로 돌아오게끔 안전히 바래다주는 것. 심장 뛰는 거대한 모험 한 두 개가 아니라 자그마한 일상의 연속만으로 너, 나, 우리는 충분하다는 메시지. 배제 없이 따뜻해지는 순간과, 그리고 라퓨타를 띄운 게 비행석이었던 것처럼 꿈의 뿌리는 언제나 지하에 닿는다는 사실.
80년대 작품이라 한들, 꿈을 선물하는 애니메이션의 다정함과 순수함은 유통기간이 없는 게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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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말 대중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제목을 봤을 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을 각색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흥부전이 창작된 배경을 설명한 작품이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이 창궐하는 상황 속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조금 더 살기 좋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탄생했다. 이러한 기회 의도 좋았지만 초반 흥미로운 진행에 비해 영화의 부제와 딱히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이 전개되어서 고개가 갸우뚱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시놉시스
아무도 몰랐던 형제, 흥부와 놀부. 양반들의 권력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 가던 조선 헌종 14년.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작가 ‘흥부’는 어릴 적 홍경래의 난으로 헤어진 형 ‘놀부’를 찾기 위해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모두가 알고 있는 형제, 조혁와 조항리. 수소문 끝에 형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조혁’을 만나게 된 ‘흥부’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백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 받는 ‘조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백성을 생각하는 동생 ‘조혁’과 달리 권세에 눈이 먼 형 ‘조항리’의 야욕을 목격한 ‘흥부’는 전혀 다른 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흥부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를 지켜보던 ‘조항리’는 그를 이용해 조선을 삼킬 음모를 계획한다.
대중 문화의 힘을 엿보다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를 초반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 문화의 힘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남녀의 치정 소설을 쓰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흥부와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이 형성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민중들의 힘을 깨달은 양반들은 연흥부를 이용해 <정감록 외전>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한다. 자신들의 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민심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양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흥부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형제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을 딴 흥부전으로 탄생시키면서 양반들을 풍자한다.
흥부전을 접한 양반들은 격노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무마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양반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민심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 민심의 힘을 대중 문화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캐릭터들은 왜 갑자기 죽을까?초반 조선시대의 대중 문화를 보여주면서 흥미를 이끌었지만 급격히 그 집중도가 떨어지게 된 계기는 캐릭터들이 너무 갑자기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선출이가 납치되고, 조혁이 붙잡혀 오고, 그리고 1분이 채 되지 않아서 조항리에 의해 단칼에 죽는다.
어떠한 설명 없이 훅훅 죽어나가서 당황스러웠다. 그저 기존 영화의 난폭한 양반 컨셉을 잡고 갑자기 이성을 잃은 조항리가 자신의 동생과 선출이를 왕의 명령도 없이 본인 손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린다. 물론 해당 장면에서 왕이 존재하지만 그 왕 위에 있는 조항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상태로 왕이 있는 상태에서 왕을 제압하고 군졸들에게 죽이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그 느낌을 잘 자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영화에서 표현된 방식은 그저 본인 화에 못이겨서 갑자기 사람들을 죽인 생뚱맞은 장면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영화의 부제와 후반부 내용이 연결되는 것일까?이 작품의 부제는 영어가 훨씬 더 와닿다는 느낌이다. 한국어 부제는 글로 세상을 바꾼 자이고, 영어로는 The revolutionist 혁명가 이다.
부제가 글로 세상을 바꾼자 였다면 결말이 그렇게 나면 안되는 것일 아닐까? 결말에서의 모습은 글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 영화의 내용 부제대로 글의 힘을 잘 보여준 전개였다. 하지만 후반부의 흐름은 글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대중 봉기에 불과했다.
물론 흥부전 2탄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조항리를 제압하는 내용이었지만 이는 글의 힘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글이 부각되지 않아서 차자리 영어 부제처럼 혁명가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는 후반 전개와 개연성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다소 많은 편이었지만 흥부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조선시대 말기의 대중 문화가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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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없는 포장지 속에 담긴 깊은 사랑
정신없는 포장지 속에 담긴 깊은 사랑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시놉시스]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시사회 초청을 받았지만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아서 보러가지 못했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 시간이 지나도 입소문을 타면서 꽤 오랜 시간동안 영화가 내려가지 않기에 이건 봐야하는 작품이구나 하고 영화관으로 향하게 만들었던 영화였다.
불친절한 설명 속 빠져드는 영화의 이해
지금까지 경험한 멀티버스 중 가장 정산만한 작품이었지만 이렇게나 이해가 잘됐던 작품은 드물었다. 멀티버스라는 소재가 사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이를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 조금은 어렵게 진행될 수도 있고, 기존의 마블에서는 마블이라는 세계관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멀티버스라는 세계를 이해하기엔 진입장벽이 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기존의 다 멀티버스 작품과는 다르게 가벼우면서도 그 멀티버스만의 매력을 굉장히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에블린 양자경에게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려준 남편 웨이몬드 키 호이 콴이 아닐었을까 싶다. 웨이몬드는 에블린에게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굉장히 압축적인 시간 내에 랩을 하듯이 빠르게 전달한다. 그 세계의 기술 상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 역시 에블린과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움 속에서 이 영화의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 영화에 더욱 집중하면서 간간히 전달되는 정보를 조합해서 양자경과 함께 이 난해하고도 정신없는 멀티버스를 점차 이해해나간다. 어쩌면 이렇게도 불친절한 멀티버스라는 배경 설명 덕분에 관객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를 이해하려 집중을 하고, 빠져들면서 멀티버스를 경험할 수 있었던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순간 나는 널 구할꺼야
정신없이 영화가 진행되며 B급 감성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순간 속에서도 이 작품에 대해 환호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주제를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에웡 올 앳 원스>는 엄마가 자녀를 이해하고 구하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뻔하고도 교훈적인 이야기여서 영화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이 작품이 왜 이렇게 명작이라고 평가받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뻔한 이야기를 B급 감성으로 풀어내면서 완력 조절을 제대로한 S급 영화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바르게 자라기만을 바라는 엄마와 엄마의 평범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은 딸 이라는 현 시대의 캐릭터를 다른 멀티버스에서는 모든 세계를 없애버리려는 거대악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으로 등장시키면서 딸과 엄마와의 갈등을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 연결시킨다. 그저 개인적인 한 가정의 이야길 풀어내지 않는다. 엄마는 이런 거대악이 된 다른 차원의 딸과 싸우면서 자신이 어떤 편견에 쌓여 있었고, 자신이 결국 원하는 것은 딸 행복과 같이 함께 하는 것을 깨닫고, 거대악와 딸을 향해 외친다. "모든 순간 나는 널 구할거야."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정말 이러한 코미디와 B급 정서의 작품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멀티버스를 통해 탄탄하게 쌓아올린 엄마의 사랑이 가슴이 와닿아 감정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정신없고 혼란한 포장지 속에 엄마의 사랑이라는 선물이 담겨 있었던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새롭게 풀어낸 사랑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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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은 어째서 기생충을 선택했을까?
개봉 직전 칸의 선택을 받은 영화 <기생충>. 우리나라의 첫 황금종려상 수상작품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고, 그 기대만큼 사람들의 환호도 넘쳐났다. 그래서 나 역시 기생충에 대한 기대감을 안은 채 봤지만 볼수록 의문덩어리였던 작품이었다.
영화 <기생충> 시놉시스“폐 끼치고 싶진 않았어요”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 가족. 장남 기우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사회적 계층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
<기생충>이라는 작품이 빈부 격차가 드러나는 영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교묘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현실을 더 크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지하와 대저택이라니,, 유치원생이 봐도 부자와 가난한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이 돼서 너무 흑백논리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을 받을만큼 역작이었나?
칸이 선택한 작품이라기에 기대했지만 굉장히 평범했던 작품이었다. 빈부격차 속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려 기존의 사람을 없애고 자신들이 그 자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모습은 한 번쯤 영화 속에서 봤던 장면들이니 말이다. 근데 그것이 가족 전체라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일까?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만큼 과연 작품들이 뛰어난 영화였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금 당황스러웠다. 칸의 저명한 영화 관계자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한국영화를 많이 보고 자란 내 눈에는 내용이 뻔했고, 예상이 가능해서 보는 내내 이게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인가? 의심스러웠던 영화였다.
그래도 연기력은 좋았던 작품
의심을 하면서 영화를 봤지만 영화를 중간이 끊지 않고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그 합이 너무나도 찰떡같았기 때문이다. 송강호와 최우식, 박소담 그리고 장혜진까지 진짜 가족을 보는 것처럼 연기가 너무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이질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실제 가족을 직접 보는 느낌이랄까? 어떻게 찰떡같이 캐스팅을 했는지캐스팅 디렉터의 안목이 빛났던 작품이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뻔했지만 그들의 연기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던 작품이지 않았나 싶다.
영화 <기생충>은 개인적으로 상을 왜 받았을까?하는 의문이 든 작품이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력만큼은 정말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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