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06 11:27:00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하얼빈>, 개봉 2주 차에도 흔들림 없는 선두!

개봉 첫 주에 누적 관객 수 230만 명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던 <하얼빈>이 2주 차에도 여전히 선두를 지켰습니다. <하얼빈>은 12월 24일 개봉한 후, 단 하루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하얼빈>은 라트비아, 몽골 등지를 아리 알렉사 65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이맥스 포맷으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관객들의 기대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음악에 참여하였고, 과거 비틀스가 녹음했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작업하여 사운드의 퀄리티를 높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소 높은 손익분기점 약 650만 명이라는 벽을 넘어설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편, 봉준호 감독, 최동훈 감독 등 다양한 인사들이 “고결한 인격의 사람들을 품격 넘치는 촬영과 연출로 영접하게 해주신 제작진과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영화”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국내 주말 관객 수 2위는 깜짝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소방관>이 누적 관객 수 350만 명을 기록하며 차지했습니다. <하얼빈>에 이어 또다른 국내 영화 대작이라고 기대받았던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3위를 기록하였으나, 개봉 첫 주 누적 관객 수 32만 명으로 다소 아쉬운 성적을 보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1위의 자리는 <무파사: 라이온 킹>에게 돌아갔습니다. 2,383만 달러의 수익을 추가한 <무파사: 라이온 킹>은 북미 누적 1억 6,800만 달러, 전 세계 4억 7,6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나, 제작비가 2억 달러를 초과한 만큼 새해에도 꾸준한 흥행이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 비해 이르게 개봉했던 <수퍼 소닉3>는 2,120만 달러로 2위를 기록했으며 현재까지 북미 1억 8,750만 달러, 전 세계 3억 3,60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해당 프랜차이즈의 총수익은 10억 달러를 넘어서 프랜차이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3위는 <더 위치>, <라이트하우스>를 연출해 믿고 보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페라투>가 차지했습니다. F.W. 무르나우 감독이 만든 역사적인 공포영화 <노스페라투>를 원작으로 하여 릴리 로즈 뎁, 니콜라스 홀트, 빌 스카스가드 등이 출연하는 새로운 <노스페라투>는 북미 누적 수익 6,940만 달러, 전 세계 1억 달러를 돌파하며 인디 영화로서는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 중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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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만 같았던 9월의 아름다운 추억
*스포주의*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 <로봇 드림>은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그와 로봇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굳이 '개'가 아니라 '도그'라고 칭하는 이유는 사실 도그가 사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물들은 사람을 동물로 표현한 것뿐이다. 거대한 도시, 뉴욕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물로 바꾸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불 꺼진 방 안에서 TV를 보며 맥 앤치즈를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도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생기 없는 눈동자와 축 처진 입꼬리. 얼마나 돌려먹었을지 모르는 냉동 맥 앤치즈와 혼자서 하는 2인용 게임. 풍요 속의 빈곤이랬던가.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도 도그는 혼자다.
도그의 일상은 도시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외로움에 익숙해진, 현대인들.
그런 도그에게 찾아온 운명 같은 단짝이 바로 로봇이다. 감상 포인트에서 언급한 'september'라는 노래는 둘이 함께 센트럴 파크에 가서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처음으로 흘러나온다. 둘은 흥겹게 춤을 추며 주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다. 노래 가사처럼 즐겁고 행복한 9월이다.
그러나 문제는 해수욕장에 갔다가 일어난다. 로봇의 배터리가 다 되어버린 것. 사람이 텅 빌 때까지 잠들었던 둘은, 도움을 청할 길이 없다. 도그 혼자 끌어보려고 해도 로봇이 너무 무거워 데려갈 수 없는 상황. 하는 수없이 홀로 집에 갔다가 다음 날 찾아가 보지만, 해수욕장은 문을 닫는다. 다음 시즌에나 열린다는 말에도 도그는 포기하지 않고 로봇을 구하려고 하지만... 결국 경찰서까지 다녀오고 나서야 집으로 간다.
여기서부터 제목인 <로봇 드림>의 의미를 알게 된다. 로봇은 혼자 해수욕장에 누워 있으면서 끊임없이 도그에게 찾아가는 상상을 한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도와준다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도그에게 걸어가는 꿈을 꾸는 로봇의 표정은 늘 밝다.
로봇은 도그가 알려준 것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만, 현실에는 도그가 보여준 좋은 면만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누워있는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기도 하고, 누군가는 고물상에 팔아넘기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집어던진다.
늘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던 로봇의 꿈은 점차 도그에게 버려지는 악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한편, 도그는 로봇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컸는지 실감한다. 노래처럼 '구름 한 점 없던' 9월의 추억만으로 도그는 겨울을 난다. 마치 자신이 모았던 햇빛을 쥐에게 나눠주는 '프레드릭'처럼 말이다. 로봇은 도그에게 외로운 겨울을 보내게 해줄 추억의 힘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뿐, 친구의 온기를 느꼈던 도그는 더욱 외로워진다.
고물상에 버려져 산산조각 났던 로봇은 너구리 아저씨로 인해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이미 망가져버린 부품 대신 너구리는 거대한 붐박스(카세트 플레이어)를 몸으로 개조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사람과 만난 로봇. 이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차 너구리와 친근해지며, 여름이 찾아온다.
해수욕장이 문을 열자마자 입장한 도그. 땅을 아무리 파헤쳐 봐도 나오는 건 로봇이 잃어버린 다리 한 쪽뿐이다. 로봇을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도그가 찾은 곳은 로봇 가게다. 다리로 하소연해 보지만 직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결국 방법은 새로운 로봇을 사는 것뿐이다.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던 너구리와 로봇. 로봇은 냉장고에 케첩을 가지러 갔다가 창밖으로 도그와 새로운 친구, 로봇을 보게 된다. 충격에 빠진 로봇은 그대로 길가에 뛰쳐나가 도그를 붙잡는다. 도그와 로봇의 뜨거운 포옹. 하지만 그건 로봇의 또 다른 상상이었을 뿐이다. 로봇은 이대로 자신이 도그를 만난다 하더라도 너무나 바뀌어버린 몸과 이제는 자신의 친구가 된 너구리, 도그의 새 친구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망설인다.
결국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붐박스의 볼륨을 올려 도그와 자주 듣던 'september'를 트는 것뿐.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에 도그는 자기도 모르게 리듬을 탄다. 로봇과 도그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을 때의 춤을 추며 하나가 되고. 둘이 함께 쌓았던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둘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한때의 추억, 지금의 나를 만든 상대방. 지난 9월이 눈부시게 찬란했음을 기억하며 지금 옆에 있는 새로운 친구의 손을 잡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앞으로는 또 다른, 새로운 9월이 펼쳐질 것을 암시하며.
영화가 끝난 직후에는 아쉬움이 더 크다. 왜 한 번 더 붙잡지 않았을까, 로봇과 도그가 다시 만날 순 없었을까? 하지만 곱씹다 보면 이해가 된다. 지나가버린 상대와 다시 시작하기엔, 지금 내 곁에 너무 많은 것이 있기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너무 나이를 먹어버린 어른의 씁쓸함이 먼저 찾아온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제목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옛 친구,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찾아가는 로봇의 상상을 말한다. 그러면 제목이 내포하는 것이 '로봇 드림 어 도그'로도 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로봇은 도그를 찾아가는 꿈을 꾼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그러니까,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일어날 리 없는 꿈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다르게 보자면 '한때의 행복한 꿈'이라고도 보인다. 이건 도그와 로봇 모두에게 해당된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9월의 하늘 아래에서 흥겹게 추던 춤처럼, 함께한 시간들이 꿈처럼 아름다웠다는 의미인 것이다. 첫 번째 의미보다는 훨씬 따뜻한 느낌이라, 나는 이쪽의 의미가 더 좋다.
영원히 일어날 수 없는 꿈이라는 건 너무 슬프니까. 우리 모두 꿈처럼 아름다웠던 추억이 하나쯤은 다 있으니까.
인간은, 그 아름다웠던 한때의 조각으로 살아가니까.
*이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초청받은 시사회를 보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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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듀얼>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히 찾아야 할 진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우자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범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크는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죄를 고발한다. 한때 자크와 친우이자 전우였지만 세금 징수, 영지 소유권, 호칭과 계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장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요구하며 그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대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가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마르그리트의 재판은 장과 자크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결투 재판으로 결정되고, 마르그리트는 장이 패배할 경우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인다.
2-3 년에 한 편씩 신작을 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 비주얼리스트로도 유명한 그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시리즈, <마션> 같은 SF 작품부터 전쟁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 여성 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극이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은 과거의 사건과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보이는 화려한 볼거리에는 늘 자유의 평등의 가치,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처럼 도발적일 수도 있는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에릭 재거의 원작을 영상화한 <라스트 듀얼>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섬세하게 다루며 하나로 답을 단정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이라면 역시 그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내 시점을 과거로 되돌렸다가 후반부에 다시 결투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때 과거 시점에서는 한때 절친이었던 두 남자가 왜 결투 재판까지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이 총 세 명의 시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경험한 진실을 말한다. 1장인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은 장의 입장에서 자크와의 불화가 어떻게 마르그리트의 강간으로 이어졌는지를, 2장인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강간을 저지른 것을 마음 한 켠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리화하는 자크의 입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복기한다.
이때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부제목이 나온 후 글자가 사라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진실"만이 잠시 남는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중 마르그리트가 영주의 부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축을 돌보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구조적 한계마저 극복하며 자신의 권리와 명예, 그 목소리까지도 마침내 되찾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경우 <라스트 듀얼>은 중세의 사건을 통해 근 몇 년간 주목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미투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투가 끝난 직후 마르그리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이 작품 속 진정한 승리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했데도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데다가 허무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째서일까? <라스트 듀얼>이 엄연히 사극이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명예와 충성심을 고집하는 존 스노우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작중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그 언행이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듯이,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물들의 행동은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부당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역시 반드시 현실이 아닐 수 있고, 장과 자크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실로서 현실의 한 파편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녀의 표정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가 강간을 당한 직후 장이 "마지막으로 정을 통한 남자가 외간 남자이게 둘 순 없지"라고 말하며 잠자리를 강요한 것이 단적인 예시다.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장의 행동은 명백한 강간이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장의 행동은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임신한다면, 장은 그녀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기사인 그는 마르그리트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그리트와 잠자리를 가졌기에 그는 훗날 태어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명예와 진실을 지킬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령 그것이 보호할 의도였다고 해도, 본래 무뚝뚝한 성정인 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던 장의 잠자리 요구는 엄연히 강간이다. 설령 보호라 해도 당사자인 마르그리트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 셈이다. 이에 더해 재판을 열기 위해 일부러 강간과 관련해 소문을 내는 것 역시 현시점에서 보면 명백한 2차 가해지만, 봉건제가 유지되던 중세 프랑스에서는 최선이자 동시에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이나 다름없다. 이는 부부가 그날 밤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그리트가 장의 영지를 돌보는 장면들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반드시 현실과 등치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일견 장의 어설픈 영지 경영을 현명하고 유능한 마르그리트가 잘 챙겨주는 장면 같다. 하지만 중세 시대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르그리트는 씨암말의 씨를 가려 받으려는 장의 명을 어긴 하인에게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도 된다는, 남편의 말과 반대되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중세의 말이 품종, 용도에 따라 급격한 가격차이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정해진 용도에 따라 말을 키우려는 장의 선택을 무시한 마르그리트의 선택은 오히려 큰 손실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다. 전쟁에 나선 남편 대신 세금을 거두는 장면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은 몇 달간 전쟁에 나가 금화 300닢을 받아오는데, 이는 작중 마르그리트가 살림을 가꾸어 늘린 재정을 상회하는 수치다.
영화는 이처럼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현실과 어긋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마르그리트는 중세의 재판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 채 고발에 나섰다. 자신의 재판이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결투로 이루어지는 것 외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분명 영리하고 지혜롭지만, 그녀의 현실 역시 그녀의 주관대로 구성되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마치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듯했던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조차도 온전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3장의 도입부 연출은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별개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 따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순간 그저 무기력할 뿐인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알지 못했던 현실의 충돌로 인한 충격에 압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피해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더 나아가 현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를 시대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시대적, 사회적, 구조적 한계를 마주한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모든 사람의 진실은 왜곡될 수 있기에 사건의 전모가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이는 세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작중 그 어떤 사건도 동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결투 재판 시퀀스는 이처럼 보다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라스트 듀얼>이 첫 번째 해석대로만 이루어지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이 마지막 결투를 스펙터클로써 보여주는 태도는 꽤나 어색해 보인다. 물론 프랑스 왕의 태도에서도 보이듯 결투 재판이 당시 시대에 유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의 용기를 지지하는 것만이 영화의 주제였다면, 결투를 펼치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현장감을 살리며 박진감 있게 연출하는 대신, 마르그리트의 시점을 중심으로 결투를 건조하게 다루는 것이 더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투 장면은 마르그리트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 결투에 임하는 두 남성의 시선, 그중에서도 특히 장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이는 결투 재판의 처절함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충실히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락적으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누구의 시선과 진실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채 세 주인공의 시선을 공존시킨다는 측면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라스트 듀얼>의 함의는 제작 비하인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제작 및 각본에는 리들리 스콧 감독 외에도 맷 데이먼, 벤 에플랙, 그리고 여성 감독이자 각본가로도 활동 중인 니콜 홀로프세너가 참여했다. 맷 데이먼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데이먼과 애플렉이 남성의 시선을, 홀로프세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담당해 각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각과 관점, 심정과 그들의 변화를 다채롭게 녹여낼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미투 운동과 성추문 관련 이슈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협업이 큰 역할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에 개봉했던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초라한 흥행을 기록했었다. 이 작품이 지닌 품격과 가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극장에서의 흥행은 참패했지만, 다행히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었으니 OTT를 통해서라도 노장의 시선과 사유가 담긴 <라스트 듀얼>이 온전히 공유되고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를 넘나드는 거장의 통찰력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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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인 차별? 엿 먹으라 그래
6★/10★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로, 전 세계에서 큰 수익을 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압권은 도입부다. 돈이 썩어 나는 아시아인이 호텔 안내 직원의 인종 차별적 모욕에 그 자리에서 호텔을 사 버리는 장면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욕을 되갚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너보다 경제력이 월등함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를 인종 차별적 모욕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영화는 이후에도 서로 다른 계급의 두 아시안 남녀의 사랑을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으로 담아낸다. 소모되다 사라져버리는 아시아인이 등장하지 않는, 무려 아시아인이 슈퍼 리치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적잖은 쾌감을 제공했다.
〈조이 라이드〉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아〉의 각본을 쓴 아델 림의 첫 연출작이다. 이번에도 아시아인이 주인공이고, 도입부부터 통쾌한 장면을 선보인다. 한 아시아계 부부가 주민 대다수가 백인인 마을로 이사를 온다. 그런 그들에게 한 백인 부부가 다가온다. 그들은 아시아계 부부의 딸 롤로와 자신의 딸이 함께 놀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때 백인 부부 뒤에서 숨어 있던 아이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백인 부부의 아시아계 입양아 오드리다. 롤로와 오드리는 곧바로 놀이터로 향하고, 롤로는 “칭챙총”거리는 백인 아이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오드리는 완벽한 모범생으로 성장해 촉망받는 변호사가 되었고, 롤로는 성적인 것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예술가를 지망하지만 실은 사고뭉치에 가까운 어른으로 성장했다. 물론 둘은 여전히 가까운 친구다. 그러던 중 오드리가 사업차 중국으로 가게 되어 롤로와 그녀의 사촌 데드아이가 통역을 핑계로 오드리와 동참한다. 중국에서는 오드리의 대학 시절 룸메이트이자 인기 배우인 캣도 합류한다.
넷은 오드리의 파트너 승진이 걸린 일생일대의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에 참석한다. 그런데 계약 당사자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한다. 중국에서는 그 사람의 가족을 보고 상대를 파악한다며 며칠 후에 있을 파티에 그녀의 친모를 데려오라고 요구한 것. 오드리에게는 청천벽력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중국에서 입양되었다는 것과 생모의 사진 한 장 말고는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원급 승진이 걸린 일인데 포기할 수는 없다.
네 사람이 오드리의 생모를 찾아 떠나는 과정은 내내 아시아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관한 유쾌하고 도발적인 물음으로 가득하다. 더불어, 이들은 모두 섹스와 K-팝 등 자기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자기 욕망의 방향을 아는 아시아 여성. 이들이 서로 복작거리며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한 웃음은 그 자체로도 즐길 만하지만 지금껏 할리우드에서 주변화되고, 제한된 채 고정된 역할만 수행해오던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과격하게 비튼다는 점에서도 쾌감을 자아낸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출발점을 향한 오드리와 그 친구들의 여정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개성 강한 서로 다른 네 친구의 서사는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다채롭게 만든다. 여러 모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코미디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물론, 영화의 형식 측면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아〉가 그랬듯, 〈조이 라이드〉 역시 장르 문법의 전형성에는 손대지 않기 때문이다. 〈조이 라이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여정이라는 코미디/버디 무비의 일반적 구조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오드리의 진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과 개별 주인공의 매력과 이들의 어우러짐에 대한 묘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오드리가 자신이 부정해왔던 아시아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조이 라이드〉는 가족주의, 아름다운 자연 등 서양이 동양을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재현해온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오드리의 정체성 탐색 과정을 채운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가 아시아/인을 재현해온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서양이 상상적으로 구성해온 동양의 이미지 배치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하나의 영화에 너무 많은 기대를 투영할 필요는 없다. 〈조이 라이드〉에게 아시아/인과 할리우드가 맺어온 불평등한 관계 모두를 뒤집으라고 요구하는 건 과도하다는 소리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 범주 내에서 아시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즐길 만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균열은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좋은데 아시아/인 재현은 엉망이어서 양가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의 성공은 그 자체로 변화를 촉구한다. 들러리가 아닌, 행복과 고뇌를 동시에 느끼는 복합적 주체로서의 아시아인이 등장하는, ‘아시아인 차별? 엿 먹으라 그래!’라고 당차게 말하는 더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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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시간
사라진 시간
정진영 배우의 첫 감독 연출작품. 그가 배우를 하기 전에 연출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배우보다 감독이 되고 싶었고, 30여 년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연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정진영의 첫 작품은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은, 신선한 시도였다.
이 영화를 두고 장자의 '호접몽'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꿈을 꾸는 나와 꿈속의 나,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나에 관한 설정을 다룬 영화는 여럿 있다. 이 영화는 꿈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정체성'에 관한 영화로 읽는 것이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최고의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자기가 거대한 벌레로 변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족 모두 그레고르의 변신에 충격을 받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레고르 역시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하지만, 벌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변신'이라는 형태적 변화를 통해 개인의 '존재'와 '정체성'을 묻고 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인간'이 아닌, 가족에 기생하는 '벌레'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벌레'는 사회에서 도태한 한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사라진 시간'의 주인공 '형구'는 자기가 인식하는 자아와 타인이 인식하는 자아가 다르다는 점에서 분열적 존재다. 그레고리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벌레로 변신하기 이전의 자신과 벌레로 변신한 이후의 자신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걸 분명 알고 있다. 육체가 벌레로 변했어도, 그레고리 잠자는 변하지 않는 자아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아'에는 분열이 없지만, 가족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은 분열적이라는 점에서 '사라진 시간'의 형구와 큰 차이가 있다.
형구는 자기가 생각하는 정체성이 '형사'지만, 현실(?)의 모습은 '선생'이다. 형사였을 때의 형구는 가난하지만 결혼했고, 아들이 둘인 아버지이자 가장이다. 수사를 하던 중, 마을 주민이 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들었다 깬 형구는 학교 선생님이다. 그는 자신이 학교 선생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아직 미혼이고, 자기가 수사하던 불탄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물론 불이 났던 집은 흔적조차 없고, 모든 것은 정상이다. 불이 났던 것은 상상일까, 불이 날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교사 부부는 환상일까.
형구는 자기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았던 아파트를 찾아가고,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도 간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자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자기가 살게 된(불이 났던 집) 집에서 발견한 것은 형구가 교사가 되기 위한 증거들로 넘쳐난다. 그 서류가 조작이라고 믿는다면 거대한 음모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누가, 왜 형구의 삶을 분리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일까. 오히려 형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합리적 의심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정체성은 그 모든 세계를 의심할 만큼 견고하다. 자기부정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게 되고, 자아의 분열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만은 그것이 옳다고 주장할 때,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 틀렸다.
형구는 자신이 형사였을 때, 학부모 해균이 초등학교 동창 여자와 모텔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구가 선생의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울 때, 해균에게 초등학교 동창 여자와 모텔에 가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해균이 놀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형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일종의 '키'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형구가 해균의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해서 만난 경찰서장의 부인이 바로 자기의 아내-형사였을 때-라는 설정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도치되었음을 말한다. 즉 형구는 이미 이 동창모임이 있기 전에 경찰서장 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형구가 형사로 등장하기 전이며, 그때 이미 형구는 학교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영화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앞부분, 교사 부부가 살고 있고, 수혁의 아내 이영이 밤만 되면 다른 사람으로 빙의한다는 것, 이 부부 교사가 결국 집에 갇혀 불에 타 죽게 된다는 내용은 형구의 꿈이거나 상상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이영은 읍내에 있는 주민자치센터에서 뜨개질을 배우는데, 형구가 온천에서 우연히 만난 초희(뜨개질 강사)에게서 형구가 뜨개질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데, 이영과 형구는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형구와 초희는 우연히 온천에서 만나는데,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꽤 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초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밤만 되면 누군가의 모습으로 빙의한다는 사실을. 형구는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돋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야기는 순환한다. 형구는 초희와 결혼해 함께 살게 되고, 초희는 밤마다 누군가로 빙의한다. 이 사실을 마을주민 해균이 우연히 알게 되고, 이장에게 전달하며, 이장은 마을 주민에게 알리고,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을 주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된다. 마을 주민들은 밤마다 빙의한다는 초희를 무서워하고, 형구에게 밤에는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철창을 설치하기를 권한다.
이 모든 과정은 형구의 상상이지만, 형구는 이 일련의 상황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형구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어느 날 마을 잔치에서 독한 술을 잔뜩 마시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에 빠진다. 그리고 꿈을 꾼다. 상당한 미인이었던 경찰서장의 부인이 자기 아내가 되고, 자신은 형사가 되어 자신의 분열된 자아 - 교사 수혁과 이영 -가 행복하지만 결국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보게 된다. 형사인 형구는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욕망을 실현 - 미인인 아내와 결혼하고 두 아이를 얻는 것 -하고, 불안한 욕망 - 뜨개질 강사를 좋아하지만 그녀가 드러낸 비밀(빙의) - 을 제거하기 위해 집이 불탄다. 형구는 뜨개질 강사 초희에게서 들은 빙의의 비밀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꿈속에서 교사가 아닌, 형사로 빙의한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 형구는 빙의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는 열린 구조로 되어 있어서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관객은 감독의 불친절한 결말에 불평할 수는 있지만,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어서 서사가 풍부해지는 장점이 있다. 단지 꿈에 관한 이야기일지, 평행우주에 관한 이야기일지, 장자의 호접몽을 말하는 것인지, 카프카의 벌레에 관한 이야기인지 관객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신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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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두 맛집인데 뒷맛이 이상해요
어디선가 먹어본 익숙한 만둣국 맛이다. 조금 더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추가돼 신선함도 있다. 그런데 계속 곱씹다 보면 이상한 맛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저것 많은 요소들을 '가족'이라는 만두피로 몽땅 담아내 영화로 빚어서다. 양우석 감독의 신작 '대가족'에 대한 간략 평이다.
'대가족'은 스님이 된 아들 함문석(이승기) 때문에 대가 끊긴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에게 세상 본 적 없던 귀여운 손주들이 찾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기막힌 동거 생활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호인'과 '강철비' 시리즈 등 휴머니즘 성격이 강하고 묵직한 소재를 담은 작품을 선보여왔던 양우석 감독은 '대가족'을 통해 코미디 드라마 장르에 문을 두드렸다. 초반에 코미디, 후반에는 휴먼 드라마를 배치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한국적인 휴먼 코미디 콘셉트로 구성했다.
과거 한 사건을 계기로 서먹하게 지내는 무옥-문석 부자 앞에 짠한 아이들 민국(김시우)-민서(윤채나) 남매가 짠하고 나타난다. 문석의 생물학적 자식이라고 밝히자, 행복을 되찾은 아버지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아들 극과 극 반응을 보인다. 비슷한 장르와 스토리라인으로 흥행했던 영화 '과속스캔들'이나 일일 드라마에서 볼법한 전개다.
다소 뻔해 보이는 스토리라인에 신선함을 곁들여 줄 킥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바로 민국-민서 남매의 '출생의 비밀'. 알고 보니 함문석이 대학 시절 하게 된 정자기증으로 탄생한 아이들인 것. 심지어 함문석의 정자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이 400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숨에 '정자왕'으로 등극해 웃음을 유발한다. '대가족'은 이 황당무계한 사연을 코미디에 녹여내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저격한다.
정자기증을 무기 삼아 영화는 문석의 생물학적 자녀 찾기를 비롯해 함씨 부자간 이야기,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 엉킨 실타래들을 천천히 풀어간다. 그러면서 양우석 감독은 후반부에 '가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저출산 문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 대안 가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영화 제목인 '대가족'의 '대'가 큰 대(大)가 아닌 대할 대(對)를 쓰는 것이고, 영화 영어 제목을 'About Family'로 작명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화법이 장벽이다. 화두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 만큼 세련되게 풀어내야 하는데 투박하고, 후반부에는 너무 교훈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 예로, 함문석과 큰스님(이순재)이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간이나 보는 이들에 따라 교조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자기증을 활용한 코미디로 에너지를 올렸더니, 올드한 감성을 담은 신파로 맥을 끊는다. 지나친 플래시백과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2000년에 개봉한 영화들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니 빚은 만두의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후반부 구성과 연출이 호불호 갈리긴 하나, 배우들의 역량만큼은 인정할 부분이다. '한국판 스크루지 영감' 함무옥을 연기한 김윤석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주며 웃음을 전한다. 동시에 자타공인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핏줄에 집착하는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김성령, 박수영은 '대가족'에서 뻔한 맛을 진하고 깊은 맛으로 우려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민국-민서 남매로 분한 아역배우 김시우, 윤채나는 힐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치트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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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면?
‘시리’부터 ‘챗지피티’까지, 이제는 인공지능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요즘이죠.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그녀>가 개봉했던 2014년만 해도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2025년에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면?” 같은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들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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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넷플릭스 10개국 1위 전세계를 휩쓴 영화 길복순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길복순 넷플릭스에서 바로 시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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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키드> 예고편
장르: 뮤지컬 영화 출연: 신시아 에리보, 아리아나 그란데, 미셸 여, 제프 골드브럼, 조나단 베일리, 에단 슬레이터, 마리사 보데가, 보웬 양, 브론윈 제임스, 케알라 세틀 감독: 존 추 각본: 윈니 홀즈만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소설 원작, 작곡 작사 스티븐 슈워르츠, 윈니 홀즈만이 각본을 맡은 뮤지컬 위키드를 원작으로 한다. 제작: 데이비드 닉세이, 스티븐 슈워르츠, 자레드 르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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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돌풍> 공식 예고편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 6월 2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