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5-01-17 22:24:45
빛과 어둠의 마에스트로: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리뷰
씨네랩의 시사회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감상했다. 영화는 바로크 시대를 여는 화가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을 흡인력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인간적인 결함이 빚어내는 삶의 극적인 대비는 영화의 핵심 주제로, 카라바조의 명암대비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이태리 감독인 미켈레 플라치도는 카라바조의 대표적 화풍인 명암대비 기법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섬세한 연출로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의 개인적인 삶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빛과 어둠의 상징적 대비로 표현했다. 이는 관객들에게 영화전개에 따라 카라바조의 걸작을 하나씩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는 역사적 인물 카라바조의 생애를 다루면서도 허구적 요소를 결합해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그림자’ 캐릭터는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속에서 어둠과 빛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매개체다.
그림자 역을 맡은 루이 가렐은 표정과 눈빛으로 캐릭터의 신비로움을 유지하면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리카르도 스카마르초(카라바조 역)는 천재적 예술가의 예민함과 격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에게 그의 고뇌와 열정, 분노, 아픔을 생생히 전달한다. 루이 가렐의 차가운 시선과 존재감은 카라바조의 열정적인 저항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며 스토리를 전개한다.
카라바조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상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교회 통치하의 르네상스 화풍에 도전하며, 현실 속 인간의 고통과 소외를 작품에 담아내었다. 영화 속 카라바조는 권위와 관습에 도전하며, 교회의 제단에 걸릴 성화(聖畵)를 그리면서 거지, 불량배, 매춘부와 같은 사회의 하층민을 모델로 삼았다. 이런 선택은 엄청난 도발이었으나 거리의 매춘부가 그림 속 성모 마리아로 승화하는 일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신성함을 발견한 예술적 통찰이었다.
카라바조가 말한 "내 죄를 사해 달라고 요청했소만… 내 그림은 사면이 필요 없소."는 예술이란 도덕적 판단이나 종교적 사면을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카라바조의 이 대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날도 종종 정치적, 종교적, 혹은 사회적 기준에 의해 예술이 검열되거나 제한되는 상황이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는 카라바조의 말처럼,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예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이라면, 혹은 카라바조를 더 알고 싶은 이라면, 이 영화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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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억 2천만불짜리 특색없는 SF 가족영화
굿 한 번 해야 하나!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와 궁합이 너무 안 좋다. 전작 <그레이 맨>도, 이번 작품인 <일렉트릭 스테이트>도 하나같이 이들이 연출한게 맞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특히 3억 2천만불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번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1990년대 미국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남과 북이냐고? 인간 vs 로봇이다. 인간을 위해 봉사하던 로봇이 자유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것. 하지만 전쟁의 승자는 인간이 되고, 패한 로봇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추방 구역 ‘일렉트릭 스테이트’에 모여 산다. 한편, 교통사고로 부모와 남동생을 잃은 미셸(밀리 보비 브라운)은 목적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동그란 얼굴의 노란 로봇 ‘코즈모’가 그녀를 찾아온다. 인간 세계에서 로봇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법범행위. 본의 아니게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행하게 되고, 괴짜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로봇 동료 허먼과 함께 일렉트릭 스테이트로 들어가게 된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시몬 스톨렌하그의 동명의 그래픽노블을 영상화 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이버펑크 장르인 원작의 세계관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우울하고 공허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작은 로봇과의 여정을 통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건 첨단 기술 사회가 무너진 황폐한 모습이다. 전쟁 이후 방치된 로봇 잔해, TV 대신 가상현실 기술인 뉴로캐스터에 의존하는 사람들 등 어쩌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될 지 모르는 모습을 그린다.
루소 형제에게 이 원작 세계관은 흥미로웠을 터. 감독은 기본 원형과 주요 소재는 가져오되, 영화적 재미를 위해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들을 대거 투입한다. 무엇보다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를 살짝 업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하는데, CG와 모션캡쳐로 구현한 다양한 종류의 로봇들과 흡사 만담군처럼 보이는 키츠와 허먼 콤비가 그 요소다.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레트로 로봇들의 향연 그 자체로 시선을 모으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통해 증명한 크리스 프랫의 실없는 농담은 어느 정도 들을만 하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극 중 세계관은 매력적이지만 새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SF 장르 영화에서 숱하게 봤던 요소들이 자꾸 겹치는 건 물론, 인간 캐릭터들의 매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미셸과 키츠는 물론 빌런 들도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 너무나 예상 가능한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들의 연기 문제라기 보다는 가족 타깃 취향에 맞추다 보니 생긴 문제로 보인다. 액션 수위 조절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캐릭터와 로봇들의 이야기와 매력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예상 가능한 지점까지만 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후반부 대규모 액션도 그렇고 적절히 순화하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온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제작비의 향방만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극 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영화는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연결과 접촉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 장애물이 뉴로캐스터로 나오는데, 영화 속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이 장비에 의존한채 살아간다. 두려움에 휩싸여 전자 기기에 의존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은 더 외롭고 고립되어 가는데, 이는 SNS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판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더불어 로봇과 인간의 대결은 흑인과 백인, 이민자와 미국인의 대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영화 취향에 너무 맞춘 탓일지 이런 현실적인 메시지는 너무 가볍게만 담긴다.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의 협업은 잠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제작비를 최대한 적절히 배치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제작비는 너무 과해보인다. 부족한 완성도가 계속 눈에 밟힌다.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2.0 / 5.0
한줄평: 너무 과한 제작비, 너무 부족한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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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어쩌면, 아주 흔한 이야기
그런 때가 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자연히 하게 되는 때. 뭐, 무언가에 쫓기듯 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나의 경우엔 그게 말이었고, 그 말을 듣는 엄마에겐 꽤나 청천벽력처럼 느껴졌을 거다.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겠지. 엄마 딸이 여자랑 사귀었다는 것, 그것도 친구인 줄 알았던 애랑.
엄마는 별말 없이 손에 쥔 화장품을 얼굴에 차분히 발랐지만, 제법 눈썰미 있는 딸에게 숨길만큼 천역덕스럽진 못했다. 침묵은 무거웠다. 엄마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긴장되는 분위기였지만 무섭거나 두려움은 없었다. 일단 나는 헤어짐에 잔뜩 취해있었으니까.
드디어 엄마는 손을 멈췄고 툭,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네가 동성애를 했다는 거니?
응, 맞아. 짤막한 대답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 엄마의 반응은 전형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몇 년이 흐른 지금, 엄마는 여전하다. 가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남자친구랑 있느냐고 묻고,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웃는다. 말해봐야 피차 입만 아프다. 그냥 한 번 데려와서 진득하게 사는 거 보여주는 게 낫겠다.
<딸에 대하여> 속 '엄마' 딸, '그린'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물론 별 수 없는 상황이 겹쳐졌을 테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아예 없을 것 같진 않다. 앞으로 이어 쓸 이야기는 영화 스포일러가 넘칠 테니, 주의하길 바란다.
SYNOPSIS
요양보호사인 엄마는 딸로부터 목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가진 거라곤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인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다. 엄마 편의 대출도 어렵게 되자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 딸. 두 사람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엄마는 요양원의 어르신을 돌보는 데 몰두해 보지만, 홀로 곤궁하게 늙어가는 어르신에게서 자신과 딸의 모습을 겹쳐 본다.
한 창작자가 만드는 작품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공통된 주제의식이 또렷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김혜진 작가도 그렇다. 그는 언제나 삶 속의 노동을 말했고, 노동이란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그가 지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에 사랑, 퀴어, 가족 이전에 노동자, 그러니까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소재로 둔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다. 늙은 육신을 돌보고, 달래고, 먹이고, 재우고, 살피는 일. 나와 전혀 연고 없는 타인을 정성으로 돌본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이 돌보는 어르신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일터에서 생기 넘치던 모습은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에선 온데간데없다. 한 손에는 묵직한 수박을, 다른 한 손에는 생활품을 잔뜩 든 채 걷는 그.
티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반 가른 수박을 퍼먹는 것. 풍족하면서 고독하다. 밤. 잠을 청하려 누워있는데 현관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리고 누군가와 다정하게 통화하는 딸 애의 목소리까지. 사실, 그 누군가가 어떤 존재인지 엄마는, 그러니까 '나'는 안다. 닫힌 문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질끈 감으며, 그렇게 모르는 척.
엄마가 딸의 한 면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사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마치 놀리는 것 같다. 코앞에 보이는 존재를, 정말로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할 수 있느냐고. 잠결에 이불을 다 걷어차는 딸아이가, 누군가의 옆에서 살결을 맞대며 곤히 잠든 모습을. 누가 봐도 커플 신발로 보이는 운동화 두 켤레를.
집에서는 불편한 동거가, 일터에서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진다. 엄마가 돌보던 어르신이 센터에서 짐짝 취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많은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사회의 본보기가 된 그가 먹고 자고 싸는 일에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그를 기억하고 현재의 그를 외면하기에, 찬란한 시절을 어떻게든 현재와 연결 지으려고 수작질을 부린다.
하지만 지난 것은 이미 지나간 것.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갖춰진 옷을 입히고 곱게 화장을 해도 지금 코앞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제 몸 가누기가 어려운 노인이다. 달달한 알사탕에 위로를 받고, 과거의 영광을 가방 보따리로 기억하는, 그런 사람.
'나'는 모르지 않는다. 아무 연고 없는 생판 남에게 품는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왜 그렇게까지 마음이 가는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하지만 사람의 아집을 꺾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딸아이의 연인, '레인'이 제 나름껏 예의를 지키며 다가섰다가 눈치껏 빠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에도 엄마의 태도는 늘 비슷하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딸아이와 딸아이의 연인은 서로를 낯선 이름으로 부른다. '그린'과 '레인'. 닉네임 같은 이 호칭에는 어떤 선입견도 개입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자. '그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좋아할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을까? 막연한 질문 대신 좀 더 노골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몇 살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직업은 뭘까?
추측이 난무할 뿐 어느 하나 치우친 가능성이 없다. '레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 '윤지'라는 사람은 어떨까? 단박에 여자를 상상할 것이다. 주변에 아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고 말이다. 버젓이 존재하되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게 만드는 명칭. 일상에서 벗어난 이름이 주는 안정감. 둘은 그것에 기대어 7년을 지냈다.
대학교 시간 강사와 주방 직원, 여자 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따위의 환경을 그린과 레인으로 바꾸어.
둘이 짊어진 무게 자체는 무겁지만, 막상 들어보니 무겁지만은 않다. 수박은 함께 들 수 있고, 일방적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티비 소리가 아닌 둘의 이야기가, 대충 가른 수박을 퍼먹는 작은 소리 대신 웃음소리를 나눈다. 중간에 너무 무겁다면 짐을 바꿔 들 수도 있겠지. 쉬어가도 좋고.
물론 연인 간의 사랑이 언제나 능사라는 건 아니다. 7년을 만나고도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 다만, 헤어짐의 이유는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맞다. 외부의 개입으로 피하듯 깨어지는 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충분하다.
이것 말고도 딸아이, 그러니까 그린의 삶은 충분히 녹록지 않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교수를 강단에서 쫓아낸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위에 동참하는 중이다. 열과 성을 다하는 그 모습은 레인을 처음 엄마 집에 데려왔을 때의 당돌함과 닮았다.
공부 열심히 하던 딸 애가 제 밥벌이 생각은 않고 생판 모르는 남 일에 시위까지 나선다니. 이 광경을 본 엄마는 딸아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생긴다. 여기저기 상처 난 모습을 보아하니 마음이 쓰라리고, 그만큼 화가 난다. 너는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사람은 때로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해서 바라본다. 특히 엄마-딸처럼 양육자와 자식의 관계에서 흔하다.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주겠노라고, 혹은 당신이 경험해 보니 별로인 것을 내 아이에겐 절대 주지 않겠노라며. 그런데 우리네 삶은 아무리 달라봐야 크게 다르지 못하다. 오히려 닮은 만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 아닌가.
어쩌면, 너무 닮아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슷했다가는 내 삶에 이르게 될까 봐. 젊어서 다 가졌던 어르신이 노년엔 가족 하나 없이 외로운 삶을 마무리했다는 것 또한. 사실 엄마는 어르신에게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노동할 수 있었을 때 아무리 많이 가져도 훗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심 일종의 담보처럼 정상 가족을 꾸렸으면 하는 마음.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추측도 썩 논리적이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동전 던지기를 해서 이번에 앞면이 나왔으면 다음엔 뒷면이 나올 거라는 '예감'을 논리로 둔갑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그 예감은 평소 본인이 하던 사고의 흐름과 같은 결이고 말이다.
삶은 지나기 전엔 모른다. 고로, 그린의 훗날은 알 수 없다. 레인과 여전히 함께일 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만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좋은 것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 그린의 현재엔 레인이 있고, 레인의 현재엔 그린이 있다. 둘은 각자 노동하며 삶을 영위하고,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러하듯.
그럼 뭐가 그렇게 다르고, 뭐를 더 이해해야 하는가.
이해를 구할 것도 이해를 할 것도 없다.
너희의 존재를 티비 소리로 애써 지우다가 잠 못 이루던 밤.
그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까무룩 잠들던 밤.
이제는 또 다른 그린과 레인을 알아보고, 존재를 존재로서 인정한 어느 낮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였고, 너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였다.
* 씨네랩에서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 후 남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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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스트카우 / First Cow
퍼스트카우 / First Cow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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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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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이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관객을 사로잡는다.
긴 선박 한 대가 1.37 : 1 비율의 화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인위적인 배경음과 효과도 없이, 화면에는 오로지 자연과 배 그리고 자연그대로의 소리들만이 나온다.
관객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긴 선박이 오른쪽끝에 맞닿을때까지 숨죽이고 보게 된다.
이러한 오프닝은 이 영화의 배경인 '자연'을 극대화시키고, 오프닝과 엔딩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메타포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배가 등장한 후, 소녀의 강아지가 두구의 유해를 발견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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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핵심은 줄거리에 나와 있듯이, 서부개척시대, 우연한 만남으로 인연을 맺게 된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이다.
이 우정에서 주목해 볼 점은, 쿠키와 킹 루의 성격차이다.
쿠키는 친절하고, 여리고, 감성적인 타입의 사람이고,
킹 루는 쿠키보다 조금더 와일드하고, 쿠키보다 조금 더 이성적인 타입의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묘한 성격차이가, 그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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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당연 그들의 우정도 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자연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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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오프닝과 수미상관 되는 엔딩.
그리고 쿠키가 퍼스트카우를 소 주인인 영국인 집에서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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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가 나한테 이 영화 줄거리가 뭔데?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할 만한 대단한 줄거리는 없지만,
그런 잔잔한 환경 속 그들의 삶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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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박한 환경 속 가장 따뜻한 것들 "
이게 내 한 줄 평이다.
10점 만점에 6.8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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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이라는 의미
간만에 자극적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진짜 모자란 사람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본다면, 꼭 이 질문에 답을 해보길 바란다. 내가 정한 답은 이거다. 진실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내가 경험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보이는 것이라는 것. 인간은 사회적으로 비교를 하게끔 태어났다. 내가 저 남자보다 돈이 더 많고, 집도 더 좋은 곳에 산다. 고로 난 저 남자보다 더 나은 인간일까? 외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더 절대적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이 영화는 눈으로 보는 외적인 모습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시각적인 편견 너머의 세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주인공 양순호는 민변 출신의 국내 최고 로펌 회사에 취직하지만 세상 풍파에 찌들어 오로지 빚을 갚는 데에 인생이 저당잡혀 삶의 의욕 따위 밥 말아먹은지 오래된 인물이다. 실력있는 변호사인 그는 회사 사장에게 제대로 잘 보인 덕에 정부의 하수인이라는 회사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대표 변호사로 선택받는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걷나 했더니, 그가 자폐아 여고생이 증인으로 선정된 한 재판에 휘말리면서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생긴다. 장애인의 증언은 법정에서 그리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는 증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폐아 임지우를 쫓아다녔던 양순호의 행동은 그에게 있어서 단지 재판을 위해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의 행동의 전제에는 지우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그래봤자 장애인인데, 그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불신의 편견과 자신이 지우보다 좀 더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간만에 자극적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진짜 모자란 사람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본다면, 꼭 이 질문에 답을 해보길 바란다. 내가 정한 답은 이거다. 진실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내가 경험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보이는 것이라는 것. 인간은 사회적으로 비교를 하게끔 태어났다. 내가 저 남자보다 돈이 더 많고, 집도 더 좋은 곳에 산다. 고로 난 저 남자보다 더 나은 인간일까? 외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더 절대적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이 영화는 눈으로 보는 외적인 모습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시각적인 편견 너머의 세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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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무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대를 모른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실제 군대 모습을 잘 투영했다고 말하면 나는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첫 학기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발표주제로 이 영화를 정해주셨다. 첫 대학 수업이었고, 잘 하고 싶은 수업이었고, 팀플에 대한 기대가 있기도 했다. 대학생활에도 짬이 있다면 나의 짬은 없었다. 짬 많은 고학번들의 'PPT를 다룰 줄 몰라요' 같은 속 보이는 거짓말을 보고도 정말 그 말을 믿는 사람처럼 그러시구나, 하며 나 좋자고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영화 자체로는, 당시에는 진지하게 봤지만 시간이 지나니 많은 것이 사라졌다. 우습게도 나는 어리버리한 후임을 가르치는 태정의 웃음 섞인 '교육' 씬만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보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될까' 정도의 생각이 남았다. 살을 부딪히듯 닿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젯밤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감겨오던 눈이 어느새 잠에서 완전히 깨버렸다. 결국 다 보고 잘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여전히 나는 군대를 모르는데도, 대립되는 영화 속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랑 같구나. 내 생활과 같구나. 분명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구나.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이 차갑게 맑아졌다. 나는 태정과 승영 사이에 있었고, 지훈이처럼 감정에 휩쓸려 있었다. 누군가 말해준 적 있었다. 직장은 군대보다 좀 더 할 만한 버전이라고. 직장도 힘들긴 한데 여러모로 군대보단 나으니까 할 만하다고. 나는 그 말을 이제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태정과 승영, 지훈, 모두 같은 부대의 선후임 사이다. 셋 모두 서로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는 사이. 태정과 승영은 중학교 동창이었고, 늘 후임을 잡기로 유명하던 태정 역시 승영에게는 마음이 쓰이는 만큼 관대할 수 밖에 없었다. 태정의 성격일 수도 있지만 승영에게 좀 더 마음이 약했던 것 같기도 하다. 군대라는 시스템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승영은 사사건건 부대원들과 부딪힌다. 그에겐 비장하고도 원대한 꿈이 있다. 이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문화를 바꾸고 말거라는, 나만큼은 다른 선임과 다르게 '좋은 선임'이 되겠다고. 승영은 어찌보면 태정의 그늘 아래서 원하던대로 지훈에게 '좋은 선임'이 되는 듯 했다.
군대의 시스템을 긍정하는 사람은 영화 속에 아무도 없다. 문제야 많다. 많은데, 다만 지금 이대로가 편하고, 둘쑤셔봐야 힘들기만 할 뿐이라는게 중론이다. 바꾸는 거, 말은 쉽지.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울 것 같냐? 라는 태정의 말이 영화를 찌르고 있다. 누구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군생활 내내 선임한테 힘들게 깨지다가 고참되서 대우 좀 받아보자는 모습. 더 다치고 문제가 커질까봐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를 달고 사는 모습. 나는 달라야지 하다가도 결국은 맞춰줄 건 맞춰주자며 이 시스템에 순응하는 모습. 적응하지 못하고 벌어지는 상처에 허덕이는 모습. 사랑하는 이가 서로 필요할 때 함께 하지 못해서 어긋나고 부서지는 모습. 외롭고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상대를 한없이 추락시키고 희롱하는 모습. 마음 한 구석엔 죄책감과 후회감을 안고 사는 모습.
이들 전부가 잘못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시스템으로 모든 걸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곳에 대사 하나 없이도 모두를 움직이는 존재는 바로 군대의 시스템이다. 군대라는 말로 모든 논리는 불필요해진다. 절대적인 고유명사다. 여전히 그런 곳이 있다. 표현만으로 부조리가 생각보다 쉬이 용인되는 곳. 등장인물은 군대라는 감독이자 무대 앞에서 연기한다. 어리버리한 일병을, 위아래로 까이는 상병을, 걸음걸이부터 자신감넘치는 병장을. 같은 사람이 계급이 변하면 연기의 결이 새로워진다. 소심하게 구석에 쳐박혀 맞던 이는 언제 그랬냐는듯 배를 내밀고 거만하게 걸어다닌다. 이들은 누군가에겐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을 수 있다. 동시에 이 모든 걸 유지시켜주는 일원이었다.
자존심이, 내 생각이 대수냐 싶을 때가 있다. 진심이 아닌 바에야 그냥 죄송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할 때가 있다. 아주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는 좀 맞춰주고 비위도 맞추고, 그래야 나도 편한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문득 멈칫한다. 이러다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 이렇게 하나씩 바꾸다 보면 미래의 내가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 승영처럼 흔들리다 누군가에게 절절하게 매달리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태정처럼 슬픔은 슬픔대로, 적당히 타협하다가도 밥을 입에 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감옥에 갇혀있다는 느낌. 나와 나의 친구들의 갇혔다는 느낌은 영원히 다를 것이다. 그들에겐 누구보다 힘들고 고생스러웠을 이야기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들에겐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군대 밖에서도 이어진다. 끝나지 않고 사회에서도 변주된다. 군대생활이 사회생활, 직장생활로 이름만 수정했을 뿐이다.
태정과 승영, 지훈 모두 스스로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다. 용서를 구할 존재는 따로 있는데 용서를 받지 못하는 존재만 늘어간다. 힘들어서 다른 이에게 또 다시 상처를 주고, 남들도 다 하는 거라서 상처를 준다, 그 땐 어떻게 그랬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잘 적응하려고 후임을 괴롭히고도 미안해서 담배를 주거나 먹을 것을 챙겨주던 태정. 눈엣가시처럼 삐딱선을 타다가 이내 순응하고, 그러면서도 후회하는 승영.마음의 상처까지도 어리버리함으로 묻혀서 홀로 화장실로 들어가야했던 지훈. 정말 모든 추억이 미화되는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묻어두고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닌가. 용서를 구해야 할 군대의 시스템은, 이런 시스템의 군대를 있게 한 이유는 말없이 그 자리에 있다. 이제는 너무 오래 되어서 당연한 것처럼. 그래서 원칙이 되어버린 것처럼. 새로운 반역자가 들어오면 한 마디 하겠지.
"야, 군대 잘 돌아간다. 너 같은 애들은 예전에도 있었지. 걔네들 다 어떻게 됐는지 알아? 관록이란 건 그렇게 무너지기 쉬운게 아니란다. 시대가 변했으니 조금은 바뀔 순 있지만, 사라질 순 없어."
속으로 웃어넘기면서 용서의 무덤으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누구 하나 선뜻 잘못했다 진심으로 입을 열 수는 없는 곳. 크고 작은 잘못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 자기 자신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등 뒤에 줄 세워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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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게임을 영화에 그대로 옮긴 액션 영화
좀비 게임인 <레지던트 이블>에 빠져있던 시기가 있었다. 중학교 때 <새벽의 저주> 원작을 처음 접했고 꽤 공포스러웠던 그 느낌 때문에 이후 좀비 장르를 종종 챙겨봤다. 19금이었지만 비디오 사장님과의 친분 덕에 그 당시 어렵게 볼 수 있었지만 매번 내가 보고 싶었던 공포영화를 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런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게임이 바로 <레지던트 이블>이었고, 시리즈의 3편이었다. 3편의 주인공은 질 밸런타인인데, 실제 영화화된 <레지던트 이블 2>에 처음 등장한다.
즐겨하던 게임이 영화로 나왔을 때 그 기대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2002년 <레지던트 이블> 1편이 개봉했을 때 바로 극장의 표를 예매하고 관람했다. 비록 원작 게인에 등장하지 않던 앨리스(밀라 요보비치)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극의 중심이 되었지만 게임의 분위기만큼은 그대로 옮겨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와 변이 된 괴물들이 멋진 액션과 함께 연출되어 굉장히 만족스럽게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이후 DVD 가 출시되었을 때 구입을 하였고 여전히 지금 집의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
폴 WS 앤더슨 감독이 잘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임 원작을 경험해본 플레이어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의 데뷔작은 <모탈컴뱃>(1995)이다. 이 영화도 아케이드 액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그리고 그때부터 CG를 활용한 액션 연출에 흥미가 있던 감독이고 그건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를 자신이 6편까지 연출함으로써 마무리하고 원작이 없는 영화들을 찍어왔지만 사실 그중에서 성공한 영화가 거의 없다. <데스 레이스>는 그나마 좋은 반응이 있었지만 <삼총사 3D>, <폼페이:최후의 날> 등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진 지 오래다.
그래서 그가 다시 게임을 원작으로 한 <몬스터 헌터>를 연출한 것도 그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장르를 하려고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스토리 라인을 거의 없애버렸다. 주인공이 특수한 세계에 빠져 몬스터를 피해 탈출하려고 싸운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액션으로 채웠다. 대사도 거의 없다. 마치 게임 인트로를 보는 듯하고 보는 재미는 있지만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을 리 없다. 아마도 예전처럼 원작 게임을 했다면 느낌이 다를 수 있겠지만, 서사 자체가 없는 영화에 감흥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실제 부부인 배우 밀라 요보비치와 폴 앤더슨은 계속 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같이 찍은 영화들은 제목만 바뀌었을 뿐,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이들을 부부 사기단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그만큼 영화가 사람들의 기대에서 많이 빗겨 나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고 챙겨보던 감독의 영화들을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것 같다. 앤더슨 감독이 <몬스터 헌터>의 속편을 연출한다고 해도 더 이상 내 마음을 흔들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몬스터 헌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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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당? 미리 본 소대원들? 라떼극장 EP.0死 R?
영화 흥신소 -(아이스)라떼극장 EP.04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공포영화를 보며 무더위를 날려버리자
정체불명의 무전을 받고 실종자 수색에 나선 소대원들
점점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시공을 초월한 택배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영화 '알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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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니키리라고도 알려진> 메인 예고편
‘프로젝트(Projects)’, ‘파츠(Parts)’ 시리즈의 주인공, 사진 작가 ‘니키 투(Nikki Two)’.
그리고 그녀의 정체성을 파헤치고자 하는 ‘진짜’ 니키, ‘니키 원(Nikki One)’.
‘니키 원(Nikki One)’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속 등장하는 ‘니키 투(Nikki Two)’가 허구이고,
자신이 ‘진짜’ 니키 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니키가 진짜 니키일까?
당신이 알고 싶었던 ‘니키 리’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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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칼의 데이트> 공식 예고편
?: 아빠, 데이트가 뭐예요? ?: 그게... 나가서 노는 거야 바로 내일! [엘리멘탈]과 함께 단편 [칼의 데이트]를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엘리멘탈] 6월 14일 극장 대개봉 지금 바로 티켓 예매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