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21 20:46:53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리뷰
SYNOPSIS.
[성모의 죽음], [메두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세례 요한의 참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카라바조’
살해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로마 교외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않는다
한편, 교황청은 그런 그의 사면 자격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림자’를 파견해 뒤를 쫓는데…
POINT.
✔️ 카라바조를 아시나요? 바로크 회화 거장. 렘브란트, 루벤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등이 영향을 받은 사람. 이전까지 없던 강렬한 화풍을 가진 독특한 화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
✔️ 카라바조 역할을 맡은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의 든든한 존재감 뒤로, 이자벨 위페르 & 루이 가렐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뽐내는 작품. 둘 다 프랑스 배우라 그런지 더빙을 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얼굴로 에너지를 다 드러냅니다.
✔️ 사랑과 예술이 함께하는 길. 종교로 대표된 권력에 맞서 인간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카라바조 캐릭터의 매력을 볼 수 있어요.
✔️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침 진행 중인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2025년 3월 27일)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그가 5살쯤 되었을 때에 흑사병이 터졌다. 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병으로 혼란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견습 생활을 거쳐 화가로 자라난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엄청난 능력치, 다른 의미로 폭발적인... 술과 폭력과 염문으로 절여진 사생활로 숱하게 화제가 된다. 결국 말다툼이 번진 결투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로마를 벗어나 몰타로 도피했으나... 몰타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나폴리로 또 도피하게 된다. 도망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 마치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거칠고 어두운 화풍을 남긴다. 혹자는 피살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풍토병이라고도 하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카라바조라는 화가에 대해 알려진 개략적 사실이다.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사실들을 크게 비틀지 않으면서도, 카라바조라는 인물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입힌다는 점이다.
'까'와 '빠'를 다 미치게 만들어야 슈퍼스타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카라바조는 당대의 슈퍼스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그를 극도로 좋아하거나 혹은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반응들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쉽게 재현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나와 거리감이 있는 시공간에서 익숙한 구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알 것 같다. 왜 나는 사랑-예술 사이에 인력이 있고, 사랑-권력 사이에 척력이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는지를.

사랑과 예술의 대척점에, 권력
천상의 이야기와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대. 성모 마리아 그림은 반드시 특정한 구도와 정물 등 계산된 방식대로만 그려져야 했고,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서도 안되었다. 하물며 길거리의 매춘부를 모델로 하다니 당시의 '높으신 분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봤을 때는 마음을 정돈하기에 도움이 되었던 성모화가, 모델이 매춘부임을 알고 나니 더없이 거슬리는 것이 되었다.
카라바조의 천재적 재능은 '천상의 이야기'를 지상에 전하기에 적합했지만, 그가 펼치는 예술의 방식은 신성모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그 조사관(루이 가렐)이 '그림자'처럼 어두운 데 몸을 두고,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좇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증언을 하고, 카라바조의 삶은 모자이크화처럼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카라바조를 싫어하는 사람들 축에, 온갖 권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솔직할 수 없기에 뒤틀린다.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솔직하게 경탄할 수 없어, 권위를 내세운 말들로 그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아카데미의 화가들을 통해, 예술의 진실성이 빛을 잃는다. (그림 뿐 아니라 비평도 함께.)
마찬가지의 양상을 종교 지도자들도 보여준다. (종교) 권력의 속성을 체화해 보여주는 캐릭터, '그림자' 조사관을 맡은 루이 가렐은 직선적인 눈빛으로 위압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기다란 막대봉을 땅에 내리꽂으며, 사람들을 협박하다시피 강압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묻고 정보를 뜯어낸다. 상대의 양쪽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이는 루이 가렐의 모습은 (진짜 너무 잘생겼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악마적이다. 종교를 수호한다는 캐릭터가 가장 악마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게, 종교의 진실성 또한 빛을 잃는다.

권력은 막대봉처럼 오직 파괴적이고 직선적인 방식으로만 내리꽂힌다. 사실 예술가들처럼 당대의 종교인들 또한 카라바조에게 사랑을 보았고 내심 끌렸지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온 모양과 다른 그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의 속성은 반-권력인가, 생각하다 문장을 바꿨다. 권력의 속성은 반-사랑이구나. 종교가 권력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서 본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에 사랑이 머물 곳은 없다. 그 자리에선 예술도 거짓될 수밖에 없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예술
반대로 예술과 사랑이 빛나는 카라바조의 삶은 자동으로 반-권력적이 된다. 그의 예술은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매춘부든 사형수든, 그가 이름을 묻는 방식은 마치 존재를 알아봐 주는 듯한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직접 서술하게 한다. "당신 대역죄인이오?" 물어 상대가 아니라고 자기 서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한 예술은 우리에게 1인칭 언어를 피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질문들이 인상 깊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밤을 뜯기며 시달리던 창부는 카라바조 앞에서 혼곤한 잠에 들고, 두려움과 용기를 구분 못하겠다며 마지막 밤을 회피하던 사형수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심지어 두려움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외친다. 카라바조는 사랑의 눈빛과 질문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끌어내고, 거기서 본 얼굴을 그려낸다. 권력이 끌어낼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 끌어낸다. 예술가가 탄생하는 지점은 공교한 기술 이전에 시각의 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아직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발명되기 전이었던 시대, 거리의 약자들은 철저하게 타자화되었다. 상처에 술을 부어주는 신부의 너털웃음, 그가 베푸는 음식과 약품 정도가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었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도, "만지게 두었다고" 즉결 심판으로 채찍질을 당하는 시대.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사랑은 홀로 빛난다. 비록 창부를 표현한 장면들이 다소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를 위한 대상화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와중에도, 카라바조의 사랑은 난봉이나 염문이라기보다 인류애로 느껴진다. 삶에 진심인 사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이나 상처를 쉽게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카라바조의 캐릭터에 부여해 드러낸다.
이는 카라바조를 경멸한 종교의 속성을 생각할 때 더욱 흥미롭다. 죽음 뒤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종교가 미세한 의심의 자국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오히려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사랑과 예술은 재갈에 물려 피를 흘리고 두려움을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리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는 미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훗날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자가 될 사실을 모른 채, 연필로 꾹꾹 이 문장을 눌러 썼던 여덟 살 아이의 마음. 거기 고여 있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랑이 없을 것 같지만 놓인 곳. 반대로 있어야 하지만 없는 곳. 그 구도를 소실점처럼 현실로 끌어와 본다. 그리고 묻는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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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K-스포츠 영화는 가라
오래간만에 볼만한 K-스포츠 영화가 등장했다. 그동안 선보여왔던 K-스포츠 영화들의 뻔한 공식 및 단점을 보완하며 재미를 더한 영화 '1승'이 그 주인공이다.
4일 개봉하는 영화 '1승'은 전직 배구 선수 출신 감독 김우진(송강호)이 해체 위기를 맞은 여자 배구팀 핑크스톰 구단주 강정원(박정민)에게 딱 한 번만 이기면 된다는 제안을 받고 선수들과 1승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다. 신연식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디즈니플러스 '삼식이 삼촌'보다 먼저 함께 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제야 개봉하게 됐다.
'1승'의 이야기는 '언더독'의 반란을 보여주는 기존 K-스포츠 영화들과 비슷하다. 주목받은 적 없는 선수 출신 감독은 주전들이 대거 이탈하여 후보 선수들만 남은 팀에 관심 없고, 보장된 대학 팀 자리에 가기만 기다리는 상황. 핵심이 빠져나간 팀에 남은 선수들은 오합지졸에 삐걱거렸다. 게다가 관종력이 넘치는 구단주는 감독과 선수들의 스토리를 이용해 시즌권 완판에 목을 매었다. 이른바 전형적인 '안 되는 집' 스포츠 구단이다.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곧바로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지난 시즌 3위를 기록했던 팀은 단숨에 꼴찌로 떨어져 밑바닥을 찍고, 비웃음과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는 가운데, 김우진과 핑크스톰은 하나의 계기를 통해 '원 팀'으로 단합하기 시작하고 결국 자신들이 목표하는 바로 달려나가게 된다.
다른 한국 스포츠 영화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1승'은 앞서 언급했던 스토리들을 구구절절하게 늘여놓지 않고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동안 봐왔던 영화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을 초반부 내내 설명하는 데에 할애한다면, '1승'은 생략과 편집을 통해 상당 부분 줄였다. 그래서 속공 플레이처럼 속도감이 느껴지고, 영화 시작 30여 분만에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던 배구 경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1승'은 역동감과 정교함, 그리고 속도가 강점인 배구 종목의 매력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360도를 커버하는 VR 버추얼리얼리티 기법을 비롯해 스카이 워커(사축 와이어캠), 초고속 카메라 등 다양한 기술과 장비를 활용해 쫄깃한 경기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기술력으로 완성한 '메가 랠리'는 '1승'의 명장면이라 해도 좋다. 그 외 전력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상대팀 선수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맞춰 전술을 짜는 장면 등은 '머니볼'이나 '스토브리그'에 비견되는 현실성이며, 스포츠 팬들이 좋아할 요소다.
'1승'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또한 영화의 매력포인트다. 저마다 부족한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 단계씩 밟고 나아가는 과정이 강정원의 말을 빌어 "스토리가 있다". 이 스토리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감정 과잉이나 강제로 눈물착즙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적당한 유머도 곁든다. K-신파 알러지가 있는 관객들이라면,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너무 속도감 있게 진행되다 보니 인물들의 변화가 납득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김우진을 포함하여 핑크스톰 선수들이 각성하고 감정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섬세하지 못하다.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변모해서 생뚱맞게 느껴진다.
'1승'에서 기성 배우들과 신인 배우들의 시너지를 느낄 수 있다. 주연을 맡은 송강호는 툭하면 조소 섞인 비난을 쏟아내는 20세기 화법이나 김우진의 트라우마 등을 자신처럼 표현하며 "역시 송강호!"라는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박정민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재벌 2세 구단주 강정원 캐릭터를 맛깔나게 소화했고, 일본에서 온 리베로 유키 역을 소화한 이민지는 신스틸러로 활약했다. 그 외 신윤주, 시은미, 차수민, 장수임 등 뉴페이스들 또한 풋풋함 매력을 발산한다.
그 외 여자배구 슈퍼스타 성유라를 연기한 여자배구계 레전드 한유미도 눈에 띄었다. 대사는 많지 않으나, 한유미의 아우라 덕분에 실제 배구경기로 착각하게 만든다. 한유미와 함께 깜짝 출연하는 김연경도 킬포인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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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먼지임을 인정하지 않고 '나대는' 인간의 이야기
이 영화의 배경은 비교적 간단하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고, 그 세력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지만 돈에 쫓겨 우주로 도망온 한 남자가 있다. 그저 사채업자에게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설명서를 읽지도 않고 매일 같이 죽는 선택을 하게 되는 미키, 여기서부터 그의 삶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죽음으로서 새로이 시작한다는 아이러니, 그를 보고 있자면 0이라는 숫자는 없다는 뜻도 될 수 있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키는 제로베이스의 인간의 표본 같았다. 그의 제로베이스 인생은 그의 제로에 가까운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삶을 이렇게 생각없이 사는 인간도 있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1.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
미키가 자신의 생명을 팔아 도망간 우주 행성을 가는 과정도 참 험난했다. 행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수많은 마루타 실험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쳇바퀴같은 죽음을 통해 그는 매일 새로이 태어난다. 그는 관념적 인간의 삶으로서는 죽은 것이 맞지만 과학기술이 너무 발전하다 못해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그의 정신은 죽었지만 육체는 복사할 수 있게 되어 복사한 육체에 데이터화된 정신을 주입시켜 하나의 멀쩡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메모리와 같은 것이고, 몸은 프린터기에 복사되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그런 개념으로 인간을 다시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다시 태어날 것이기에 죽음이 더 이상 슬프지 만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당장 내가 차에 치여 죽더라도 내일이면 나의 삶은 다시 시작될 것이기에, 하루하루 삶도 대단히 소중해지지도 않고, 매일 매일이 가지는 의미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유한성이다. 세상의 시간은 무한하지만 인간의 삶 속의 시간은 유한하다. 나의 육신이 다할 때까지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키처럼 내일 죽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아니면 안되는 일 같은 건 없어진다. 삶에 대한 간절함과 기한이 사라지니 삶을 사는 낙이 없어질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무형의 가치들이 의미가 없어진다면, 인간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저 존재로서 의미가 있지 않고, 미키처럼 도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에 미키를 보면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한다. 애초에 미키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뜻인데, 인간성이 상실해가는 인간의 세상에서는 상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케네스 마샬과도 같은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겠지. 선동과 옐로우 저널리즘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연극적인 설정, 하지만 그래서 더 명확한, 하지만 그래서 더 진부할 수도 있는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나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상 속 캐릭터들은 굉장히 단면적이다. 생각보다 입체적인 심리를 그리는 작품을 하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모든 인물이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 못해 단편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데, 항상 그 지점을 인지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중에도 내가 그걸 단점이라고 인지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미치자, 왜 그럴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본다면, 그의 영화는 일종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아서, 캐릭터들의 깊은 심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서사 안에서 역할이 가진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 빌런은 처음부터 끝까지 빌런으로 남고, 주인공은 자신의 퀘스트를 깨는 것에 집중한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잘 짜여진 정말 각본 그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선인은 선인으로서 존재하고, 악인은 악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답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사 서사의 이유가 깔끔하니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감정이입을 하면 되는 타이밍에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소위 어렵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특화되어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항상 그의 영화에 흥미를 느껴왔었고 진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공식이 따로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방식이 반복되다 보니, 분명히 재밌게 잘 보고 나왔고, 후련한데 뭔가 아쉬운 느낌이 남는 것은 이런 감독의 공식이 내 머릿속에 박혔기 때문일까. 이건 확실히 관점의 차이인 것 같다. 분명히 재밌게 보고 나왔음에도 한 켠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감독의 스타일을 간파하게 되었다는 나의 오만 때문일까. 이 생각을 하는 내가 오만하긴 한 것 같지만서도 어딘가 아쉬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총평
인간이 가장 악한 이유가 이 영화에 다 있다. 어딜가든 인간이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행성에 가서도 침입자인 주제에 원주민을 더럽게 생각하는 그 오만, 하층민은 다이어트시키면서도 상류층은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계급주의 가스라이팅의 향연, 이걸 보면 인간은 이렇게 모두가 종잡을 수가 없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면 인간이 종교에 빠지는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정성을 해소해줄 절대자를 언제나 찾아왔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불안정성을 해소시켜준 사람 혹은 이전에 해소시켜줬다는 전해지는 사람 등의 말을 잘 믿어버리고 이들이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절대자의 말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구원할 수 밖에 없는 건 본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며 그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모두 사이비종교에 홀린 사람들 같았고 그 중 미키의 여자친구와 같은 반란세력은 그 종교의 허점을 알고 비로소 자신을 삶을 주체적으로 보기 시작한 세력 같았다. 마치 사이비종교의 실체를 알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다만, 이들의 경우 우주선은 타버렸고 지구도 별반 희망을 걸 게 없으니 지도자는 몰아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몇 가지 키워드가 생각나는데 하나가 해학이다. 그의 작품은 사회현상을 해학적으로, 재치 있게 다룬다. 이번 영화도 그랬다. 그래서 다음 영화도 개봉하면 보러는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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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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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여름의 끝자락, 동심을 붙잡다
[SICFF] 여름의 끝자락, 동심을 붙잡다
영화 <숀더쉽 더 무비 : 꼬마 외계인 룰라!> 리뷰
감독] 윌 베처, 리처드 펠런
출연] 저스틴 플레쳐, 아멜리아 비테일
시놉시스] 먼 우주에서 길을 잃고 지구에 오게 된 꼬마 외계인 ‘룰라’! 우연히 양떼목장의 비글비글 사고뭉치들 ‘숀’과 친구들을 만난다. 달콤한 젤리와 초콜릿이 가득한 지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 ‘룰라’를 위해 집을 찾아 주기로 하는 ‘숀’과 친구들! 우주에 가기 위해 ‘룰라’가 잃어버린 UFO를 찾아 나서고 한편 수상한 비밀요원 ‘에이전트 레드’ 일당이 ‘룰라’를 추적한다. 과연, ‘룰라’는 무사히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스포일러 유의#
대사가 없는 영화는 20년 만에 처음
숀더쉽 더 무비 : 꼬마 외계인 룰라!가 애니메이션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방문한터라 당연히 대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단한 착각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5분이 지나도록 효과음, bgm이 다 나오는데 대사가 없어서 친구와 함께 ‘왜 말들은 안해,,, 대사가 없는건가? 말이 없음 어떻게 내용을 이해하나~’라고 얘기를 나눌 정도였다. 너무 어른의 사고방식이었다. 대사가 한마디도 없고, 심지어 등장 캐릭터들이 다 동물이어서 표정이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엄청난 내용전달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텔레파시를 통해 대본을 내 머리 속에 주입시키는 느낌이었달까? 영화의 모든 내용이 쏙쏙 들어오는 이 경험이 20년만에 처음 느끼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신선했다.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대부분의 시청각자료에서는 ‘음성’이 가장 많은 정보를 주곤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본이 8할은 먹고들어간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숀더쉽 더 무비 : 꼬마 외계인 룰라!는 히히히히, 룰라룰라, 메헤헤헤 온갖 의성어만 난무할 뿐 대사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는 하나도 없다. 캐릭터들의 몸짓, 발짓을 통해 그리고 주어진 상황들을 통해서 각 캐릭터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관계를 파악한다. 게다가 이를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서로 다른 세대를 동시에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 표현이 어려웠을텐데 이 작품은 아이와 어른의 공감을 모두 이끌어냈다. 정말 룰라 우주선이 망가지고,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도 없어졌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눈물이 다 날 뻔했다. 대사 한마디 없이도 이렇게 집중해서 본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관계의 변화를 그리다
영화 속 외계인 룰라는 우주 저멀리 다른 행성에서 엄마와 아빠가 자고 있던 사이 우주왕복선 키를 만지작 거리다가 지구에 불시착한다. 이미 여기서부터 사고뭉치라는 가장 느낌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피자의 맛있는 냄새에 홀려서 숀을 만나게 되고, 숀가 양들과 함께 재밌게 지내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우주선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숀은 양들 내에서 사고뭉치였지만 자신보다 레벨이 다른 사고뭉치를 만나면서 룰라의 보호자가 되어 문제가 되는 상황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하고, 집으로 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처음 불시착한 장소를 찾아낸 룰라와 숀. 하지만 그곳을 기어코 찾아낸 양치기 개 비처. 그들의 앞에 레드요원들이 등장해 우주왕복선을 통째로 기지로 옮겨버린다.
숀과 비처는 항상 앙숙같은 관계였지만 일단 이 기지를 빠져나가기 위해 합심을 하고 룰라와 숀, 비처는 무사히 기지를 찰출해 룰라의 고향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룰라 앞에서는 의젓했던 숀이 비처가 등장하면서 비처가 조작기를 이리저리 누르는 사이 배가 고프다며 스위치를 누르다가 결국 다시 우주선의 방향이 바뀌고, 지구로 불시착하게 된다. 그 충격으로 우주선은 그만 불타고 만다. 룰라의 엄마와 아빠가 담긴 사진도 날아가고, 우주선도 다 타버리고, 룰라의 능력마저 제대로 못쓰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룰라는 좌절하고, 숀은 이 상황이 꼭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 양들의 도움을 받아 룰라의 집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파마겟돈의 연극이 한창 진행되던 시점 숀과 룰라, 그리고 비치와 양들은 힘을 모아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송신기를 위로 올려보내고, 레드요원의 방해에도 결국 송신에 송공하면서 룰라의 엄마아빠가 룰라를 구하러 지구로 날아오는데 성공한다. 룰라는 지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숀과 룰라, 그리고 비처의 관계를 보면서 어린아이들의 관계에서 항상 고정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 보였다. 한없이 철이 없을 것 같던 숀도 자신보다 미성숙한 룰라에게는 어른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비처가 나타나면 다시 천방지축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학교를 전학가거나, 이사를 가는 등 새로운 곳으로 이동을 할 때도, 그 이동을 지켜보는 경우도 생길텐데 한 곳에서 좋은 친구와 좋은 추억을 만들고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자연스러운 이별의 모습도 담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영화 숀더쉽 더 무비 : 꼬마 외계인 룰라!는 여름의 끝자락, 야외에서 잠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상영시간표>
2024. 9. 7.(토) 20:00 롯데몰 9층 잔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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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야 | 범죄도시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지진이 발생한 후 폐허가 된 서울. 심지어 비도 좀처럼 내리지 않으면서 생존자들은 극심한 물부족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남산'(마동석)은 돌아다니는 동물을 사냥하며 남동생 같은 '최지완'(이준영), 딸 같은 '한수나'(노정의)와 함께 생계를 꾸며 나간다.
어느 날, 수나 앞에 '선생님'(장영남)이 나타난다. 그녀는 물과 먹을 게 풍족한 아파트에서 수나처럼 어린아이를 특별히 보호하는 기관이 있다면서 수나에게 이주를 권한다. 망설임 끝에 선생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수나. 그러나 그녀는 이내 광기로 가득한 과학자 '양기수'(이희준)의 음모에 빠지고, 남산과 지완은 또 다른 조력자 '이은호'(안지혜)와 함께 수나를 구하러 아파트로 향한다.
<황야>, 한국 시리즈물의 암(暗)
한국 영화 시장에서 시리즈물은 2010년대를 지나며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전까지는 속편 제작도 많지 않았다. 단적인 예시로 2017년까지 한국 천만 영화 16편 중 속편은 단 한편도 없었다. 설령 속편을 제작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름만 속편일 뿐, 주인공도 내용도 전편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2>, <친구 2>, <강철비 2>처럼.
<신과 함께> 시리즈와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 이후 기류가 바뀌었다. <명량>, <한산>, <노량> 삼부작이나 <베테랑 2>처럼 흥행작의 속편을 기획하는 경우가 늘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여러 편을 계획하는 시리즈물도 많아졌다. 웹소설 원작을 영화화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은 5부작,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 <호프>는 3부작 예정으로 알려졌다.
다만 부작용도 늘었다. 일례로 <범죄도시>의 경우 빌런 배우만 바꾸고 전편 내용을 되풀이한 결과, 세 번째 시리즈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객이 늘었다. 최동훈 감독의 야심작 <외계+인> 시리즈의 경우 배급사 CJ에게 수백억 대 적자를 안겼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마동석 주연의 <황야>는 또 다른 형태의 부작용을 보여줬다. 시리즈물의 핵심, 포지셔닝을 간과했다. <황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그 대가로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에서 표류한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일원으로서도 인정받기 애매하고, 독립적인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로서도 부족함을 노출하기 때문.
다채로워진 마동석표 액션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야>의 가장 큰 매력은 마동석의 액션이다. <범죄도시> 시리즈 무술 감독이자 <범죄도시 4> 연출을 맡은 허명행 감독과 합을 맞춰서인지 마동석의 괴력을 강조하는 액션은 이번에도 통쾌하다. <범죄도시>에서 관람등급 때문에 아껴둔 힘을 푼 것 같기도 하다. 디스토피아 장르고, 인간이 아닌 괴물과 싸우다 보니 목이나 팔을 절단하는 유혈 묘사도 망설이지 않는다.
<범죄도시>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도 있다. <범죄도시>의 '마석도'(마동석) 활용법은 단순했다. 긴장감이 없었다. 빌런이 누구여도 마석도가 이긴다는 사실을 관객 모두가 올고 있다는 핸디캡을 없애지 못했다. <황야>는 다르다. 치유 능력을 지닌 군인, 악어나 도마뱀처럼 움직이는 좀비로 변한 괴물을 남산의 상대로 내세웠다. 비록 액션의 끝은 비슷해도,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이나마 긴장감을 올리려 노력한 듯 보인다.
다양함도 더했다. <범죄도시>에서는 액션 캐릭터가 마석도 하나였기에 단조롭다는 인상이 짙었다. 반면에 <황야>는 세 캐릭터가 액션 분량은 나눠 가지면서 보는 재미를 늘렸다. 최지완은 원거리에서는 활을 쓰고, 근접전에서는 화살촉을 활용하며 칼을 주로 쓰는 남산과 차별화했다. 이은호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 하체나 발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또 다른 스타일의 액션을 보여줬다.
애정이냐, 집착이냐
단순한 플롯도 <황야>의 매력이다. 확실한 대립 구도 덕분에 뚝심 있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핵심은 부성애다. 남산과 양기수는 둘 다 딸을 잃은 아버지다.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지를 지녔다. 영화는 두 아버지가 각자의 상실감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대조한다.
남산은 상실감을 사랑으로 승화한다. 딸을 똑 닮은 아이 수나를 딸처럼 돌본다. 사냥에 성공하면 수나 몫을 항상 따로 챙기는 식으로. 수나가 시설 좋은 아파트로 가게 되자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수나와 수나 할머니가 위험해지자 고민 없이 구하러 간다.
반면에 양기수는 상실감을 집착으로 왜곡한다. 그는 딸 소연이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 자기가 개발한 약물 덕분에 소연이를 되살렸다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부모들의 애정을 악용해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다 허상이었다. 심장만 뛸 뿐, 소연은 절반 이상의 신체와 의식은 잃었다. 그녀는 살지도 죽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열하는 양기수가 약간 짠하면서도 몹시 불쾌하고, 그를 처리하는 남산의 모습은 통쾌하다. 진정한 사랑과 집착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덕분에 <황야>가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방치된 '콘크리트 유니버스'
보통의 액션, 디스토피아 영화라면 <황야>는 위의 두 장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황야>에게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대지진'의 발생, 황궁아파트 103동의 등장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연결점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반부에 아파트에서 갑작스레 쏟아져 나온 물을 <황야>에서는 식수와 그 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황야>를 '콘크리트 유니버스' 일원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황야>는 배경과 디자인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별개의 설정과 이야기를 펼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대지진 직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곧바로 아파트를 통제했다. 반면에 본작에서는 대지진 발생 첫날부터 군부대가 아파트를 장악한다. 다른 차이점도 있다. 전자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와의 사투가 강조된 반면, 후자에서는 유독 가뭄과 물의 부재에 주목한다.
심지어 <황야>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간대 순서를 알려주는 장치나 연결고리가 없다. 두 작품 간의 차이를 명확히 제시하는 대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 영화의 세계관이 별개고, <황야>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이 아니라는 허명행 감독의 주장에도 힘이 안 실린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 외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매한 포지셔닝의 나비효과
결국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최대 장점은 심리와 인간군상의 묘사였다. 아파트 내부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다양한 갈등을 보여줬다. '영탁'(이병헌), '민성'(박서준), '명화'(박보영), '금애'(김선영) 등 주요 인물의 입장이 제각기 달라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캐릭터의 서사와 감정선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서스펜스를 마지막 순간 일제히 터뜨리며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그에 비하면 <황야>의 전개는 우악스럽다. 특히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층 간 갈등, 인간성 상실을 다루는 대목이 어색하다. 일례로 아이를 못 만나게 하는 방침에 부모가 항의할 때, 양기수와 군인들의 대처가 너무 안일하다. 그전까지는 그 어떤 부모도 항의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수나가 도착하기 전에도 외부에서 아파트에 들어온 아이와 부모들이 더 있다는 걸 고려하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인들이 양기수의 비인간적인 실험에 동조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양기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이유도 정확히 짚어주지 않는다. 선생님에게 불치병이 있고, 이를 양기수가 악용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수나가 실험을 위해 제조한 물을 제대로 마셨는지 양기수가 확인조차 않는 대목도 반전을 위한 장치라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부실함과 기시감
포지셔닝도 애매한 가운데, 독립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미흡하다. 몇몇 장면에서는 기본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아파트 내부에서 지완과 은호가 각기 군인과 한창 싸우는 중인데, 남산의 유머가 갑자기 중간에 난입하고, 다시 싸움으로 되돌아가면서 템포를 끊는 식이다.
간단한 플롯과 명확한 갈등 구조를 위해 캐릭터를 희생하기도 했다. 남산은 마동석 그 자체이고, 지완과 수나 역시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린 남녀 커플 클리셰를 반복한다. 특히 빌런 양기수는 아파트 주민과 군인을 좌지우지하는 빌런 치고는 뻔한 음모와 계략을 반복한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캐릭터의 전형을 답습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영탁과 비교해 보면 존재감, 무게감, 입체감의 차이가 확실하다.
이에 더해 마동석표 유머도 남발한다. 이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꿀 기회를 놓치는 듯 보여서 유독 아쉽다. 마동석이 등장하거나 제작한 영화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제목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장르와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이때 <황야>가 마동석 색깔을 빼고 진한 장르물 분위기를 선보였다면 고정된 이미지를 다소 탈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황야>가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한 결정은 신의 한 수일 수도 있다.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황야>는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평범한 마동석 영화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Poor 형편없음
다시 한번 증명된 명제. 유니버스 활용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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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 ‘있는’ 드라마, 1승하는 법을 아르켜줄게~
오합지졸 팀을 이끌고 단 1승을 위해 노력하는 언더독 이야기. 배구라는 스포츠를 선택해 영화로 옮긴 <1승>은 새로움보단 익숙한 스포츠 소재 영화의 서사를 밟는다. 성공보단 실패가 더 많았던 이들이 모여, 서로 부딪히고, 싸우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다 마침내 한계를 넘어 승리를 거둔다는 이야기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배구 풀세트 접전보다는 세트스코어 3:0으로 마무리 짓는 셧아웃 승리처럼 보인다. 마치 깔끔하게 스포츠 전작들이 닦아 놓은 루트대로 가겠다는 의지처럼, 영화는 후반부 보장된 감동의 스파이크를 날린다.
이런 전형적인 서사에 변주를 가하는 건 인물들이다. 특히 선수가 아닌 감독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펼치는 건 새롭다. <슈퍼스타 감사용>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유명한 국내 스포츠 영화는 모두 선수들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승>은 김우진의 성장을 중심축으로 가져간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실패를 팀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아 과거 자신의 장점을 남들이 알아봐 주지 않았던 것을 반복하지 않고, 선수들의 강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장점화 시킨다. 이런 노력은 경기력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 자체로 성장 서사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 좋은 말로 하면 전형적이지 않고, 나쁜 말로 하면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마케팅을 하는 구단주 또한 감독과 팀을 자기 방식대로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이렇듯 선수들에 포커싱을 맞추지 않은 영화는 기존 스포츠 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카타르시스, 자칫 신파로 비칠 수 있는 눈물 젖은 감동은 과감하게 컷한다. 마치 <1승>이 추구하는 성장 서사는 이런 게 아니라는 것처럼 신파로 매몰되려는 순간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장단이 있는데, 신파로 인한 감정의 질척거림은 덜한 대신, 가슴을 울리는 여운의 시간은 짧다. 쉴 새 없이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세트를 가져가야 이기는 배구 특성을 오롯이 옮긴 듯한 영화는 단점을 장점화 시키며 1승을 향한 담금질을 계속한다. 이게 우리 영화의 성격이라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기대했던 코미디 부분은 절묘한 티키타카가 이뤄져 웃음을 전하기 보다는 주전 공격수인 송강호, 박정민에게 의존하는 패턴을 고수한다. 역시 에이스라 말할 수 있는 송강호의 능청스러움, 여기에 틀을 마구마구 깨버리는 박정민의 돌파 능력은 웃음을 전하기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패턴이 읽혀 새로움은 덜하다. 여기에 감독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임에도 선수들의 고른 서사 소개가 나오지 않는 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1승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부분이다. 극중 강정원은 영화 <록키>를 예로 들며, 모두들 록키가 챔피언 아폴로를 이기고 챔피언이 되는 줄 아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승리가 목적이 아닌 성장 서사를 더 좋아한다고, 우리는 그 단 1승을 하는 서사를 만들거라고 덧붙인다.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은 강정원을 통해 ‘각본 있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한다. 영화는 강정원의 각본대로 감독과 선수들이 각자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고 성장해 1승을 향해 뛴다. 한 번도 인생이란 게임에서 승리를 해보지 못한 실패자들이 의기투합해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은 담담하게 그렸음에도 울림은 크다. 록키의 승리처럼 이들의 1승을 자축하듯 <록키>의 OST ‘고잉 더 디스턴스(Going the Distance)’가 흐르는데, 이 장면은 그 자체로 빛을 낸다.
스포츠 영화, 특히 배구 영화라는 지점에서 팬이든 팬이 아니던 간에 얼마나 리얼하게 배구 경기 장면을 구현했는지 궁금해질터. CG의 도움을 받았지만 생각보다 배구 경기의 특성과 재미를 잘 살린다. 전 배구선수인 한유미, 시은미는 물론, 이민지, 차수민, 신윤주, 장수임 등 배우들의 놀라운 실력도 리얼리티를 살린다. 특히 다양한 카메라 기술로 구현한 랠리 장면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장식한다. 여기에 몸보다 말로 승부하는 조정석은 물론, 상대 팀 감독으로 나오는 신진식, 김세진, 해설자로 등장하는 이숙자,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김연경은 보는 재미를 더한다. 배구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말 선물이다.
“나만의 1승을 위해 투쟁하는 영화다” <1승>의 기자간담회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딱 한 번 승리의 쾌감을 얻기까지 힘겨움을 겪었거나 그 과정을 겪고 있다면, 이 영화는 올해를 버틴 이들에게 큰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저마다 각본 없는 인생 경기를 찍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작은 힘을 얻길 바란다. 누구나 1승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인생이란 코트로 달려가자!사진 제공: ㈜아티스트유나이티드
평점: 3.0 / 5.0
한줄평: 역시 스포츠영화는 눈물이 필요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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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곳의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낀 점
#한예종졸업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졸업영화제 #단편영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직접 인사 드리는 영화등대입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제 근황과 제가 다녀왔던 영화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화리뷰를 기대하셨던분들에게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근래에 제가 영화들을 보며,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껴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는 영화관계자가 아닌, 오로지 팬의 입장에서 느껴졌던 감정을 이야기해볼테니, 제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달라는것도 객관적이다는것도 아니다는 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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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굿 보스> 1차 예고편
우수기업상 최종 후보에 오른 '블랑코 스케일즈'는
골칫거리 직원들 때문에 수상이 물 건너갈 판이다.
사장 ‘블랑코’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지만
그가 개입할수록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게 되고
겉 보기에 완벽했던 ‘굿 보스’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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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소시스트 : 믿는 자> 1차 예고편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 가 선사하는 공포의 바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