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1-28 12:27:10
로히림의 전쟁 | '반지의 제왕'이라서 눈감는 안일함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로한의 공주 '헤라'(가이아 와이즈). 어느 날, 그녀는 소꿈친구이자 웨스트마크 영주 '프레카'(숀 둘리)의 아들 '울프'(루크 파스콸리노)의 구혼을 받는다. 그러나 곤도르와 혼약을 맺은 로한의 왕 '헬름'(브라이언 콕스)도, 연심이 없었던 헤라도 구혼을 일언지하로 거절한다. 헬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프레카는 결투를 청하고, 헬름은 결투 중 예기치 못하게 프레카를 죽이고 만다.
이에 격분하며 복수를 다짐하며 자취를 감췄던 울프. 그는 수년 뒤 로한의 적인 던랜드인을 이끌고 나타나 로한의 수도 에도라스를 습격한다. 헬름과 두 아들 ‘할레스’(벤자민 웨인라이트)와 ‘하마’(야즈단 카푸리)는 기마대 로히림과 함께 전투에 나서지만, 내부의 배신이 겹치면서 대패한다. 두 왕자를 모두 잃은 헬름과 헤라는 울프의 군세에 밀려 나팔 산성에 그대로 고립되고,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방도를 찾기 시작한다.
높고도 험한 <반지의 제왕>이라는 벽
영화팬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말이 있다. 20년 전 <반지의 제왕> 포스터가 과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팩트였더라. 아직까지도 '21세기 최고의 판타지 영화'라는 마케팅 문구는 <반지의 제왕> 몫이기 때문. 피터 잭슨 본인이 만든 <호빗> 삼부작도, 아마존 프라임이 심혈을 기울인 <힘의 반지> 드라마도 10억 달러 흥행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동시에 달성한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는 비견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판타지 영화 팬들은 <반지의 제왕>을 늘 그리워한다. 이 시리즈를 처음 본 전율을 언제 다시 느껴볼까 궁금해하면서. 이는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이하 <로히림의 전쟁>)이 낯선 외양에도 불구하고 특히 궁금한 이유였다. '반지 전쟁' 250여 년 전 로한의 왕 헬름과 그의 딸 헤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피터 잭슨과 앤디 서키스가 제작할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 사냥>에 앞서서 팬들을 가운데땅으로 초청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약 한 달 늦게 공개된 결과물은 다소 실망스럽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던 주인공 '헤라'의 서사는 평범하고, 그녀의 활약상을 보각한 각색은 부자연스럽다. 카미야마 켄지가 맡은 애니메이션 작화도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판타지와 <반지의 제왕>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로히림의 전쟁>을 싫어할 수 없다. 곳곳에 삽입된 <반지의 제왕>과의 연결고리를 찾다 보면 아쉬움이 절로 잊히기 때문이다.
에오윈을 넘지 못한 헤라
<로히림의 전쟁>의 성패는 헤라에게 달려 있었다. 애초에 원작에 없는 인물의 재조명이 기획 의도니까. 그런데 정작 헤라는 새로울 게 없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길 꿈꾼다. 공주로 태어났기에 다른 왕족과의 혼인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헤라는 모든 구혼을 거절한다. 대신 그저 말을 달리며 모험을 떠나는 삶을 꿈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접한 말괄량이 공주가 바로 헤라다.
문제는 헤라와 똑같은 캐릭터가 이미 20년 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했다는 것. 로한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오덴의 조카딸이자, 제3왕조의 첫 번째 왕 에오메르의 동생인 '에오윈'(미란다 오토)이 주인공이다. <로히림의 전쟁>에서 내레이션도 맡은 그녀는 전투에 나선 남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를 답답해하며 남몰래 무술을 연마했다. 심지어 왕명을 어긴 채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 나서서 마술사왕까지 죽였다.
그런데 두 캐릭터가 겹쳐 보일수록 헤라는 에오윈에 비해 매력이 부족하다. 에오윈과 달리 헤라는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 에오윈은 공주에서 전사로 변모해 가는 인물이었고, 관객도 그녀의 좌절과 성장을 함께 겪으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헤라는 이미 완성된 전사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의 감정선에 이입하기 어렵고, 그저 활약상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헤라에게서 에오윈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반지의 제왕 2> 다시 보기
그 결과 <로히림의 전쟁>에서는 프리퀄 겸 스핀오프만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의 한계가 명확하다. 사건의 전개나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이하 <반지의 제왕 2>을 반복하기 때문. 아이센가드의 적, 수적 열세 상황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 주인공, 그 순간 헬름 협곡 위에서 등장하는 로히림 등.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적군이 오크가 아닌 인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헤라는 이처럼 <반지의 제왕 2>의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원작 소설은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니까. 그저 헬름에게 딸이 있었고, 그녀를 향한 울프의 구혼을 거절했다는 내용만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라를 어떤 캐릭터로 묘사하고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붙여주느냐에 따라 <로히림의 전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 중 헤라는 기존 캐릭터들의 조각모음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저 세오덴처럼 농성하고, 아라고른처럼 최후의 돌격을 결심하고, 레골라스처럼 숱한 적군을 무찌르고, 간달프처럼 지원군을 끌고 온다. 기존에 못 본 역할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여러 캐릭터가 맡았던 역할을 혼자 해낼 뿐이다. 결국 <로히림의 전쟁>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반지의 제왕 2>를 일본풍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실수는 반복된다
오히려 헤라의 존재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구간도 적지 않다. 기존 서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헤라의 활약상을 부각하려다가 전개가 꼬이기 시작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헤라의 활약상을 덧댄 흔적이 가려지지 않은 셈이다. 이는 <호빗> 3부작에서 소설에 없던 오리지널 캐릭터, '타우리엘'이 중심이 된 로맨스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흐름이 끊겼던 문제점과도 유사하다.
특히 헤라가 등장할 때마다 전투 시퀀스의 흐름이 꼬이는 경우가 잦다. 아이센 여울목에서 펼쳐진 전투와 수도 에도라스의 함락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시퀀스에서는 크게 세 주체가 등장한다. 헬름과 군대는 전투를 펼치고, 울프와 그의 본대는 헬름의 군을 우회해 수도 에도라스로 진격하고, 헤라는 울프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수도를 방어한다.
그런데 전투가 진행될수록, 특히 헤라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시점부터 세 주체의 행적은 꼬이기 시작한다. 분명 여울목에서 부왕 옆에서 전투 중이었던 헬라스가 에도라스로 먼저 진군한 울프를 갑자기 앞지르는 식이다. 본편에서 엘프인 레골라스가 간신히 대적한 무마킬을 헤라가 혼자 죽이는 과장된 묘사도 시리즈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헬름 협곡에서 헤라와 그녀의 시녀 올윈이 숱한 적군을 대적하는 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의아하다.
프리퀄을 지탱하는 각색과 작화
안일하게 전편의 영광에 기댄 것 같은 헤라 캐릭터의 만듦새는 군데군데 몰입도를 높인 장점과 대조되기에 더욱 아쉽다. 각색한 울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원작에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 헬름을 향한 복수심 때문에 로한을 침략한다. 반면에 영화는 울프의 동기를 더 구체화한다. 그가 헤라에게 품은 연심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덕분에 승전하기 직전 그가 헤라를 놓지 못해서 패배하는 전개도 그저 허망하지는 않다.
헬름의 아들 하마의 최후를 변경한 각색도 인상적이다. 원작에 그는 나팔 산성 앞에 주둔한 울프의 군대를 기습하다가 사망한 반면, 영화에서는 울프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헬름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이는 헬름의 좌절감, 광증, 복수심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헬름 협곡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처럼 <로히림의 전쟁>은 원작이 간략히 다룬 감성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든다.
각색 외에는 작화가 놀랍다. 카미야마 켄지가 본래 배경을 그리는 미술 스태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경에서 보여주는 가운데땅 풍경은 그림인지 실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밀하다. 일례로 오프닝의 경우 평원에서 말을 타는 헤라와 그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순간적으로 실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나팔 산성의 전경을 비추는 순간도 실사 영화 부럽지 않은 장엄함이 느껴진다.
다만 전투 시퀀스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로히림의 전쟁'이라는 부제만 보면 실사영화 속 로한의 기병대의 웅장한 돌격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림만으로 실사영화 수준의 장대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나마 보름달을 배경으로 프레알라프가 이끌고 온 지원군이 울프의 군대를 공격하는 장면만큼은 명장면으로 뽑기에 손색없다.
가운데땅은 여전히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히림의 전쟁>에는 <반지의 제왕> 팬이라면 아쉬운 대목이 눈에 밟혀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포인트가 적지 않다. 사루만의 재등장 때는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호빗> 촬영 당시 더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헤라가 반지만 찾는 모르도르의 오크들을 만나고, 그 순간을 궁금해하는 간달프와 헤라가 연락을 취하는 대목 또한 '반지 전쟁'과의 연결고리를 암시하기에 흥미롭다.
전반적으로는 <호빗: 다섯 군대 전투>와 유사하다. <반지의 제왕>에 못 미치는 완성도가 아쉽지만, 아라고른과 레골라스의 우정을 암시하는 대목이나 노년의 빌보 배긴스를 연기한 이안 홈이 출연한 순간에 결국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뉴라인 시네마 로고가 등장하고 로한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올 때부터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반지의 제왕' 향이 소량 첨가된 판타지 애니메이션
Relative contents
-
- 레 미제라블 (2019)
* 이 리뷰는 영화 <레 미제라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 정보
감독: 래지 리
출연: 다니엥 보나드, 알렉시스 마넨티, 제브릴 종가 등
장르: 범죄, 드라마
러닝타임: 104분
수상: 201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개봉일: 2021.04.15 (한국 개봉일)
<LES MISERABLES>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영화 제목에 그대로 반영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2019년에 개봉한 본 작품은 직접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해당 소설과 일정 부분 연결고리를 갖는다. 우선 극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의 몽페르메유는 200년 전 '빅토르 위고'가 소설 <레 미제라블>을 쓰기 전 영감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모습과는 달리 여전히 작가의 소설 속 등장한 혁명의 모습처럼 분노와 폭력이 들끓고 긴장과 불안이 도사린다. 맥락은 다르지만, '장발장'을 대입시킬 수 있는 소년 캐릭터도 한 명 등장한다. 이 소년 역시 아주 사소한 것을 훔쳤다는 이유로 경찰의 과잉 대응과 폭력적 진압에 희생되며 훗날 혁명의 주동자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 속 주인공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렇다면, 200년 전 소설 속 프랑스의 모습은 2018년의 시점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일까.
뿌리깊은 불신과 폭력, 터질 수밖에 없던 폭탄
영화는 프랑스가 최종 우승을 차지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거리 응원을 하며 프랑스인들이 하나로 화합된 평화의 장면들을 그린다. 하지만, 곧바로 장면 전환이 이어지며 그 화합의 순간은 잠깐이었을 뿐 프랑스의 허상을 비춰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월드컵 응원 시퀀스가 끝나고, 주인공 '스테판 루이즈'가 등장해 몽페르메유의 경찰서로 전입한다. 그는 '크리스'와 '그와다'가 이끄는 강력반에 합류하게 되는데, 흑인 하층민들을 상대로 강압 수사를 펼치고 함부로 대하는 두 명의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과는 성향이 딴판인 경찰이다. 세 사람은 함께 몽페르메유 구석구석을 순찰하는데, 서커스단을 이끄는 집시와 시장을 주름쥐고 있는 흑인들 간의 싸움을 목격한다. 누군가가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쳐간 것. 아기사자를 훔쳐간 범인은 '이사'라는 동네 사고뭉치 소년이었는데, 아이를 쫓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이성을 잃은 그와다가 이사의 얼굴에 고무탄을 쏴버린다. 이 상황이 '뷔즈'라는 소년의 드론에 찍히면서 갈등은 극화되고, 이 사건은 결국 관계의 깊은 골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어버린다.
불친절한 전개, 외부인의 시점에서 방관
<레 미제라블>은 보통의 영화에 비해 극의 전개가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인물 개개인의 서사와 캐릭터 간의 관계를 조명하지 않고 관객이 철저하게 제 3자의 입장에서 극을 바라보게끔 한다. 여러 개의 파편처럼 나뉘어져 있는 스토리의 구조는 사건이 심화되고, 갈등이 극에 달할수록 빌드업이 되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던 분쟁의 촉발을 이해시킨다. 전개상 주인공 위치에 놓인 '스테판 루이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스테판을 일반적인 영화 속 주인공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어디까지나 극중 배경에 갓 입성한 외부인이다. 외부인으로서 이 지역의 잔재된 뿌리깊은 갈등의 구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는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는 관객을 대변한다.
이러한 관점은 극에서 인물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뷔즈'의 등장 이유를 설명해준다. 뷔즈가 등장하는 초반부의 장면들은 영화의 내용과 굉장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드론을 사용하여 몽페르메유의 곳곳을 풀샷으로 조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뷔즈는 스테판과 달리 내부인이지만, 역할의 기능으로서는 외부인의 포지션에 놓여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뷔즈와 스테판의 기능이 아예 동일하지는 않다. 뷔즈는 폭동의 주동자가 되는 '이사'를 비롯한 아이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함께 무자비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저항 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의 편에 서서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뷔즈는 폭력과 분노가 오가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상황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지켜만 보는 방관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관객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방관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터져버린 폭력의 씨앗, 누구의 잘못인가
<레 미제라블>을 보며 작년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떠올랐다. 이 역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것으로 인해 혁명의 움직임이 발생했던 것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10대 흑인 아이들이 분노한 것은 고작 새끼사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얼굴에 고무탄을 맞고, 폭력적인 행위와 겁박에 노출되었던 '이사'의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시켰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더 이상 이러한 사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리고 훗날 자신들이 이사처럼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 것이다. 크리스를 비롯한 경찰들이 극중 시종일관 취하는 태도들을 보면, 지역 경찰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오랫동안 쌓여왔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잉 진압한 경찰에게 무조건적인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이 또한 무리가 있는 관점이다. 크리스의 비인간적인 태도와 그와다의 과잉 진압은 분명 잘못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무리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흑인 아이들이 경찰에게 먼저 폭력을 행했기 때문에 경찰로서 진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관객 개인의 입장에서도 크리스의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경찰로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다가 벌어진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명의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아이들의 폭동에 무자비하게 공격당한다. 이사의 사건이 안타까운 건 맞지만, 경찰을 두고 집단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누구의 편을 들기도 어렵다. 흑인 사회와 공권력의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무엇이며, 이 모든 서스펜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결과는 참혹하게 벌어지고 말았다. 극중 프랑스 사회 계층의 구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극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화약탄을 든 이사와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스테판이 대치한다. 그리고, 집 문을 열어 경찰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는 뷔즈의 시선도 함께 그려진다. 대치 상황의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세 사람 중 누군가는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그 어떠한 경우의 수에도 긍정적인 결말은 없다는 것. 영화는 그렇게 붕괴된 사회의 시스템을 생생하게 전달만 해준 채 갈 곳 잃은 관객의 사고에 찝찝한 불편함을 심어준다.
-
- 하나씩 네 거 만들면 돼
씨름. 이 얼마나 낯선 운동인가. 영화 관람 전, 그런 생각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종목인데 다큐멘터리로 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알고 계시는지 영화 상영 전, 감독님이 짤막한 코멘트를 덧붙이셨다. 운동 종목으로 보면 낯선 스포츠일지언정 그 단어는 우리 일상 깊은 곳에 뿌리내렸다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 '문제와 씨름한다'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힘이 아주 센 사람에게 '천하장사' 수식어를 붙인다. 우습게도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이토록 작고 사소한 지점이다. 우리네 삶이 어찌나 평탄치 못한가. 몇 번이고 머릿속이나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단어의 뿌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반가웠다.
그렇게 씨름, 특히나 여자씨름을 했었고, 하고, 앞으로도 할 사람들의 이야기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소재 특성상 특별한 스포일러는 없다지만, 영화 내용 상당 부분을 담았다.
영화의 첫 장면을 명확히 기억하긴 어렵지만, 도입부는 떠오른다. '씨름'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이미지들. 그리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인터뷰 형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같이 한 선수의 실력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탄하고 존경하는 모습이었다. 여자천하장사 타이틀을 최초로 걸고, 2대, 5대, 6대, 7대, 13대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선수, 임수정. 일반인이 보기에도 대단한 횟수인데 같은 선수가 보기엔 또 얼마나 대단할까.
그의 초대 수상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화면이 무척 조악한 화질을 갖고 있어서, 눈으로도 체감했다. 모자이크 처리한 것처럼 무척 깨지던 화질부터 기술의 발전으로 해상도가 훨씬 큰 화면에 닿을 때까지 같은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을. 무언가 한 가지 일을 오래도록 해온 사람도 신기하지만, 최정상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건 더욱이 놀라울 일이다.
임수정 선수의 일대기만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쌓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의 재미나 가치는 훨씬 덜했을 것 같다. 씨름은 본디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스포츠 아닌가. 씨름판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무릎을 꿇고, 샅바를 붙든 채 한 사람이 먼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반대편 사람도 뒤따라 몸을 일으킨다. 상대를 자신의 품에 들이는 자세이니만큼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만치 가깝다.
나의 숨소리가 상대의 귓가를 울리고, 상대가 내 귓가에 숨을 쉬고 뱉는다. 숨과 땀, 그리고 힘을 서로의 귓가에서 나누는 스포츠는 처음 보았기에 퍽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선수들의 관계도 자매처럼 비친 것 같다. 투닥대는 말투나 장난기 넘치는 표정은 2000년대의 생활형 예능처럼 소박하고도 자연스러웠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만큼 인물이 중요한 장르는 없다고 본다. 사람들을 들여다보며 기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만들어지기에 진솔한 모습을 속속들이 담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물이 자신의 자취를 좇는 카메라를 어려워하거나 숨기려 드는 순간, 그가 풍기는 거부감이 일순 화면 너머로도 전해진다. 그 흔적이 보일수록 몰입은 어려워지고 만다.
<모래바람>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던 건 이 영화에 담긴 사람들이 유쾌해서다. 그들 각자가 그러하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그러하다. 쉽게 말해 케미가 있다. 어찌 보면 물 흐르듯 넘치는 자연스러움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하루종일 시간을 함께 하고, 쉬는 날에도 함께 놀러 다니다 보면 눈빛만 봐도 척척 알아듣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우리가 가족과 척하면 척하고 서로의 선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쌓인 관계에서 나오는 일종의 노하우다. 하물며 훨씬 머리가 커진 때에 이토록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건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한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오래 씨름을 해왔단 의미이다.
운동하고, 시합 준비하고, 시합하고, 피드백을 주고받고, 다시 운동하고. 매일을 켜켜이 쌓는 작업을 고작 몇 시간 혹은 몇 분 안에 담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묻어 나오는 그 자연스러움을 통해 착실히 쌓아온 매일을 얼핏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엇비슷한 방향을 똑같이 걷는 듯해도 종래엔 자신의 길을 개척하러 가는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다. 여자씨름팀 '콜핑'을 주축으로 선수들이 자라나다가 또 다른 도전을 할 곳을 찾아 떠나는 게 정해진 수순으로 보일 정도로.
그들이 그려간 궤적은 우리네 삶을 엿보는 듯했다.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서, 내가 걷는 길을 함께할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그들 각자만의 길로 갈라진다. 앞서 말했듯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므로.
이게 맞는 길인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리송한 순간은 언제든 한 번씩 찾아온다. 순간이 길어지면 시기가 된다. 그 시기엔 몇 가지 이름표가 있고 말이다. 슬럼프 혹은 번아웃. 어딘가 구렁텅이에 빠졌거나 홀로 걸음을 멈춘 상태라는 예감이 들 테지만, 그런 이에게 주저 없이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길이 맞다. 당신이 선택해서 걷고 있으므로. 과정에서 확신은 없어도 좋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채로 그저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가면 된다. 결코 외롭진 않을 거다. 함께, 각자, 때로는 같이할 사람들이 언제든 있기 마련이니까. 물리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종목에 상관없이 스포츠 경기를 볼 때면 종종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응원으로서 건넨다.
괜찮아, 네 거 해.
하나씩 네 거 만들면 돼.어느 판에, 어느 길에 들어섰듯 내가 가진 걸 믿고 하나씩 해나가기. 과정으로서 완성하기. 씨름하는 우리 모두의 한판 승부를 응원하며, 글을 마쳐본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 후 작성한 후기입니다.
-
- 절대무패 9단계의 최고 단계가 어쩌면 '패배하기'는 아니었을까?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 필자가 다소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토마스 에디슨의 본 명언을 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실패가 너무 무섭다. 작다면 작은 실패와 고난을 반복해가며 만들어진 두려움은 당분간 도전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은 필자에게 있어 '흥. 웃기고 있네'라는 멸시의 대상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나보다 많은 것들을 먼저 경험한 분들의 말씀, '지금 너가 겪은 것들은 모두 예고편에 불과해'와 같은 직언은 닥쳐올 실패들을 앞서서 걱정하게 해,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낸 그분들을, 역경들을 떨쳐내고 성공을 해 명언을 남긴 토마스 에디슨을 존경하게 한다. 본 작품을 모두 관람한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실패를 하고 있는 난 패배자이고, 토마스 에디슨은 승리자인가? 토마스 에디슨이 과연 전구를 발명하고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까지도 늘 그는 승리자였는가? 명언을 깨닫고, 내뱉기 전까지는 그도 어쩌면 수 많은 패배자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이루어진 이분법의 재판장에서 패배자의 손을 들어 세상 모든 패배자들을 위로하고 따스히 안아준다. 재밌는 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연 그 구분이 실재하는 것인가 묻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중반부, 주인공 가족인 후버 가족의 가장 별종, "드웨인"의 절규가 이어졌던 배경 속 뒤 표지판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뭉치면 산다.' 군대나 전쟁과 어울릴 법한 구절이 가족 오락 드라마에 사용된 데엔 어쩌면 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내포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산개와 화합의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를 주 배경이 되는 장소의 구분을 통해 표현한다.
우린 흔히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 공동체'를 '가족' 내지는 '가정'이라고 부르는데, 두 단어의 앞 글자가 모두 '집 가(家)'라는 데엔 '가족=집'이라는 걸 의미하는 지 모른다. 가족의 정신과 마음이 모두 담긴 집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영화의 초반부 씬을 보면 화합과 결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화가 긴밀히 오가는 식사 씬에선 쇼트와 역쇼트를 빈번히 사용하여 영화의 호흡을 빠르게 가져가지만 인물들이 집의 복도 내지는 공간을 누비는 장면에선 롱테이크로 촬영한 점이 인상적이다. 대화 씬의 속도와 걷는 씬의 속도가 다른 데엔 빠른 대사와 박자감을 통해 갈등의 흥미진진한 진행을 표현하고자 함과 상대적으로 천천히 이동함으로서 집 안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가족 간 미묘한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와중 불안과 불합치만이 존재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주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인 막내 "올리버"의 '미스 리틀 선샤인' 진출을 위한 캘리포니아 행 여행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바로 여행 중 차량 클러치가 고장 나 모두가 차를 밀면서 한 명씩 탑승하는 장면이다. 본 씬과 영화의 전 후 서사를 비교해보면, 본 씬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등이 변하게 됨을 눈치 챌 수 있다. 공군 사관학교에 가고자 했던, 니체를 극심하게 믿어 침묵의 서약을 했던 아들 "드웨인"의 늘 무표정이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해 절규도 하고 웃기도 했으며 작품의 진 주인공으로 보여지는 삼촌이자 잘 나가는 학자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몰락해버린 "프랭크"가 무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웃고, 떠들고, 위로하고, 도전하기 시작한 계기도 바로 본 장면을 기준으로 한 후였다. 영화의 종반부 이러한 행동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은 본 씬의 중요도를 영화가 의도적으로 일러주는 것 같으면서 인물들의 행동이 워낙 재밌다 보니 중반부 이후 차를 출발시키려는 씬들이 등장할 때면 이번엔 어떻게 가려나 하는 흥미로운 생각마저 하게 해 영화에 크나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운, 신, 미스 리틀 선샤인. 본 작품을 본 분들이라면 모두 인상깊다고 생각할 만한 영화의 소재들이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행복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사물과 존재들에게 아이러니를 더한 대사와 연출들을 보여준다. 이런 아이러니함의 중심엔 항상 아빠 주인공인 "리처드"가 서 있다. 달달한 맛과 시원한 온도감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겐 '미인대회에서 떨어지기 위해 먹는 패배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칭호를 딸 앞에서 서슴치 않게 씌웠고, 삼촌 "프랭크"가 "올리버"에게 운을 빈다고 했을 때 "운 따위는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의지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운을 비운의 존재로 전락시켰다. 인상깊은 점은 바로 이런 "리처드"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 도착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장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딸을 만류하기 위해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너의 운을 빌어."라는 것이다.
패배자와 승리자를 항상 구분 짓고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잣대로 비교하던 "리처드"의 영화 속 삶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는 승리자였느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고, 이는 아이러니함의 시작점이다.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학설을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강연하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아이러니, 몰락한 학자인 "프랭크"를 패배자라고 멸시하지만 본인도 다른 사람의 확실치 않은 말 한마디에 설레발치며 사업을 확장시켜 결국 파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리처드"를 마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과 같은 역설로 보이게 한다.
작품의 재밌는 지점은 운과 아이스크림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등장 타이밍과 미스 리틀 선샤인의 존재에도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속 'GOD'이라는 단어가 실제 대사로서 등장하는 때를 생각해본다면 할아버지가 마약 하는 씬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리처드"가 이상함을 느끼던 때이다. 물론 영어 대사나 영문화권 사람들의 평상시 말에도 GOD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고, 관용어와 같이 각종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단어의 뜻과 같이 실제 신의 은총이나 신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장면에서 유독 'GOD'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단어와 대사를 통해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미국의 최고 미인을 선정하는 대회인 미스 아메리카 그리고 아동계의 미스 아메리카인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영화가 연출한 방법도 이러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본 관람객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선 영화가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에 선정된 인물이나 출연한 인물들 심지어 행사 자체를 그리 아름답게 담지도, 좋은 의미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겨놓은 것처럼 보여졌다.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 어쩌면 모두 승리자를 뽑기 위한 행사이고, 선발된 인원들 또한 모두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가 승리자를 예찬하고, 승리자를 위한 작품이었다면 두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모든 루저들, 모든 패배자들을 위하는 영화이다. 스스로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기 싫은 가정이 승리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그 끝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패배자들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그렸을까? 승리자라고 스스로를 추대했던 초반부의 처연한 분위기와 패배자임을 인정하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행위마저 모두 의미 없음을 드러낸 종반부의 행복한 분위기의 차이는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모두 패배자이고 그저 인정만 하면 된다고 단정 짓는 작품일까? 물론 그렇지도 않다. 영화 속 승리자로 보여지는 사람들의 외양, 이미지, 풍기는 분위기 모두에서 과연 그들이 어떠한 면에서 승리자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오히려 패배자로 보여지는 후버 가족의 이미지와 풍겨지는 분위기를 더욱 빛내는 것처럼 연출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패배자를 낙담시키지도 그렇다고 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이자 승리자임을,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지어 평가하는 게 모두 덧 없음을,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바로 화합 그리고 사랑이란 걸 강조한다.
-
- 담백하게 그려낸 우정의 곡선
퍼스트 카우 (First Cow, 2019)
개봉일 : 2021.11.04. (한국 기준)
감독 : 켈리 라이카트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린 어벌조노이스, 토비 존스
담백하게 그려낸 우정의 곡선
최근엔 역동적이거나 무게감 영화를 주로 접하며 감정과 체력을 쭈욱 소모해왔는데, 오랜만에 정말 고요하고 부드러운 영화, <퍼스트 카우>를 만났다.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 남성의 순도 높은 우정을 그린 영화다. 처음 영화 정보를 접했을 때,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가 배경이라기에 나는, 당연하게도 카우보이와 총, 사나이들의 대결, 무법자들. 그리고 <장고:분노의 추격자> 같은 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내가 서부 영화를 잘 모르는 탓도 있겠지만, 보통 서부영화라 하면 이런 느낌을 떠올리지 않나?..
근데, <퍼스트 카우>는 진득한 발차기로 내 예상을 저~멀리 걷어냈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일부인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겐 우정을”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을 아주 진하고 담백하게 담아낸다.
퍼스트 카우 시놉시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 중 첫 번째
<퍼스트 카우>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 작품 중, 국내에 정식 개봉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사실 처음 <퍼스트 카우>라는 영화에 눈길이 가게 된 건,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제작사로 유명한 A24가 제작한 신작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감독의 이름은 다소 낯설었지만, 소위 ‘영화 보는 눈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제작사에서 나온 영화라 하니 일단은 기대가 됐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의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었다. 무해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든 생각인데,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작품도 연이어 더 많이 수입되었으면 좋겠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타.여.초>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후, <워터 릴리스>, <톰보이>, <걸후드>가 연이어 개봉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석진 곳까지 훑어내는 꼼꼼하고 따뜻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시선이 참 좋아서, 그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현재 네이버를 통해 구매가 가능한 작품도 2편 있던데.. 올해 안에 꼭 보는 걸로.
새로운 서부영화의 매력
서부영화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총과 인물들의 대결구도, 액션 요소들을 깔끔하게 털어낸 <퍼스트 카우>는 서부 영화라기보단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우정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4:3의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화면과 움직임 없는 카메라. 그 안을 가득 채우는 푸릇한 자연의 풍경과 인물들의 숨소리. 영화가 끝났을 때 옆좌석 어딘가에선 “이거 완전 자연 다큐멘터리다.”라는 감상평이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영화의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고 또 아름답다.
<퍼스트 카우>는 아슬아슬한 사건과 신경 써 만들어낸 리듬감 같은 것에 힘을 주지 않는다. 작품 밖의 인물이 앞서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기보단,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특정한 배경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두 주인공은 아주 천천히 극을 이끌어가고, 나는 서서히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척박한 개척지에서 피어난 우정과 신뢰
이제 막 새로운 개척지가 생겨나고, 내가 살아갈 자리 하나를 꿰차는 게 모두의 목표였던 '서부 개척 시대'. 친구와 우정 같은 것을 챙길 틈 없이 부지런히 내 이득을 주워 담고 다녀야 했던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난 쿠키와 킹 루는 서로에게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고, 요란하진 않지만 깊은 우정을 나눈다.
결과를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고 투자하는 킹 루와 한 수 앞을 더 대비해야 한다며 신중을 기하는 쿠키. 중국 출신으로 그 당시 오리건 주 근방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전이었던 킹 루와 가족의 부재를 딛고 성공하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쿠키. 킹 루와 쿠키는 사회적으로 큰 파워를 갖지 못하는 출신을 가졌지만, 꼭 성공해 호텔과 빵집, 농장을 갖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킹 루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우연히 짧은 만남을 갖게 된 두 사람은 차후 새로운 정착지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둘은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고, 아주 각별한 친구 사이가 된다. 쿠키와 킹 루 사이에 많은 말이 오가진 않지만, 그들의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서, 불안함 없이 고정되어 있는 눈빛에서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두 사람 중 누구든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우정은 내 예상보다 두터웠다.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변치 않는 우정
이야기는 천천히 흘러가고 인물들은 감정을 나눈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과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그 사이 킹 루와 쿠키는 도망쳐온 과거를 터놓고, 함께 이뤄나갈 미래를 이야기한다. 과거엔 사회적 약자이자 쫓기는 처지였지만, 각박한 사회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해 줄 친구를 만난 쿠키와 킹 루는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 한다.
마을 유일의 소는 두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위험한 도박이었다. 성공이, 새로운 개척지로의 출발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순간, 팩터 일행에게 쫓기던 두 사람은 절벽 앞에서 탈출의 갈림길을 마주한다. 의외였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는데, 그들은 다시 함께 살았던 오두막으로 돌아와 어깨를 맞대고 새로운 길로 향한다.
꿈을 이루는 것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도 해내지 못했지만, 품고 있던 꿈만큼이나 빛나는 우정을 가슴에 품고 두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든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은 변치 않고, 아주 먼 훗날까지 남아 꽃과 함께 아름답게 장식된다.
서로를 향했던 조용한 시선, 뚝뚝한듯하지만 배려가 담겼던 손길, 친구의 지친 어깨를 끌어올려 주던 팔, 맞잡은 손. 우정을 표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잔잔하게 빛나던, 따뜻한 영화였다.
-
- [Watcha Exclusive]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 - 관객들도 속이려는 야심찬 작품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의 포스터
2016년에 국내에 개봉한 <아가씨>는 4,288,750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도 꽤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미술상"은 유력한 후보였으며, "외국어 영화상"도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는 않을까 예측들도 오갔습니다.
하지만 정작,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놀라운 것은 국내보다는 해외 팬들이 이에 대해서 크게 반발했다는 것이죠. (물론, 시카고와 LA 비평가에서 "외국어 영화상", 영국에서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점을 찍은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다음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습니다.
그것도 "존 르 카레"의 원작을 가지고 왔으니 이들의 협업에 궁금했습니다.
총성과 화려한 모습과 다르게, "존 르 카레"의 작품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으로 알 수 있듯이 고요하니까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본작품은 갑작스러운 폭탄 테러로 아이를 잃은 피해자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는 남자는 자신을 "마티"로 소개하며, 이번 일이 일어난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 일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쫓아다녔던 그가 있음을 알게 된 "마티"는 팀원들을 꾸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일에 참여하는 "찰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녀는 정보국에 일하는 요원도 아닌 일반인으로 "배우"로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되는데....
“
"존 르 카레"를 잘 보시나요?
1. 심리를 잘 읽어야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의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미,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본 관람을 택하거나 포기할 텐데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은 <007>의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화려한 액션은 둘째치고, 예쁜 여성들과의 접점은 없고, "파티션"으로 내 책상을 구분하여 종이만 붙잡는 것이 그의 영화입니다.
이에 익숙지 않는 분들은 <리틀 드러머 걸>은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도대체, 어떤 재미를 보는 건지 혼동도 오실 텐데 그만큼 이 작품에 특화된 것이 있습니다.
“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바로, 심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해당 작품은 각 캐릭터들을 얼굴들을 "클로즈업"을 하여 감정을 보다 많이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정보"의 격차로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재미도 격차가 있듯이 이런 장르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어내느냐에 흥미도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각 캐릭터들의 심리를 반영한듯한 색깔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빨강"이 돌고 있는 피를 뜻하는 것처럼 활기를 띠는 감정을 의미한다면 "초록"은 썩어버린 물처럼 멈춰진 감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황과 노랑은 "신호등"에서 빨강과 초록 사이에 있는 것처럼 "중립"에 서있는 "찰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처럼 각 주인공들이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들의 심리를 읽어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2. 작품의 벽을 깨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본 작품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화에서 보여줍니다.
해당 작품을 살펴보면, 쓰이는 갈등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임을 넌지시 밝혀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 "왜, 작품은 처음부터 이를 정확하게 소개해 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이런 이유에는 관객들의 편향된 해석을 방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소개한다면, 작품 외적의 정보로 해당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달리 왜곡되거나 해석되니 변질될 테니까요.
그러니 해당 작품은 과감한 생략을 하여 극의 신비함까지 챙기는 똑똑한 전개를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성공합니다.
“
다양한 해석도 좋지만, 과대 해석은 안돼!
무엇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찰리"는 이를 보는 시청자들과 동일하게 가져오는데요.
극에서 해당 배역에 충실하려는 인물인데, 이는 이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를 겪어가면서 "왜, 싸우는가?"에 대한 동기와 이유를 알면서 점차, 감정에 노출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이를 통해서, 관객들도 "찰리"에 점점 이입되어 이야기에 몰입되고 작품 외적의 정보는 전혀 개입되지 않으니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고 한들 쉽게 느껴질 겁니다.
이는 이 작품이 가면 갈수록 몸이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3. 알고서 입장에 서실래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신념도 없이 역할에만 충실했다"라는 말은 "찰리"뿐만 아니라 "찰리"에 빙의된 시청자들에게 비수로 꽂히고 맙니다.
이런 이유에는 최근 특정 누군가를 비난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출소한 "조두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조두순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거나 그를 보호하는 경찰이나 이를 재판한 당시 판사, 그리고 그 일대를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시도로 뒤따라오는 무수한 펭귄들처럼 이에 편승하여 너도 나도 이를 따라 하는 요즘의 트렌드를 역사적 갈등으로 빗대어 말합니다.
“
혹시, 나도 너도?
재밌는 것은 해당 작품은 지난 5화 동안 단, 한 번의 총성도 들려주지 않다가 마지막 6화 그것도 마지막 부분에 다다라서야 총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는 캐릭터들 사이로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더 잡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리틀 드러머 걸>의 목적은 단순히, "테러리스트"를 잡아 "선과 악"을 가려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인데 그 누구도 이번 일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있어서 오늘날의 결과가 있는 것인데, 애써 외면하려는 그 시작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작품 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어느 누가 욕망만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담대하게 담아낼 수 있는가
우린 흔히 사랑을 양 당사자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뤄지는 경우를 생각하기에 단 방향성 감정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는다. 짝사랑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 욕망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대개 욕망이라는 단어를 불쾌하거나 불건전한 경우에 많이 사용하지만, 사랑만큼이나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이다. 수많은 영화가 감정에 대해 다루고, 그 감정들에 욕망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어떤 영화도 사람에 대한 욕망을 다른 감정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악한 인물이 가진 가치관 내지는 악한 정서 정도로 치부한다. 행복, 슬픔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수많은 영화가 다룬 만큼 욕망도 영화적으로 다루어질 차례가 되었다. 어쩌면 영화 <미세리코르디아>가 이를 해낸 것은 아닐까.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욕망에 대해 섬세하고도 담대하게 다룬다. 어떤 장면에서는 그 욕망으로 인해 웃기기도, 끔찍하기도 또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욕망이라는 하나의 감정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감독이 이토록 치밀하게 설계한 욕망을 관객에게 교훈이랍시고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저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그게 본인이 생각한 욕망의 의의를 본인답게 답하려는 듯 자기만의 독보적인 길을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대단하게 선보인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대도시에서 잠시 고향으로 온 제레미가 일련의 일들을 겪다 그만 고향 친구였던 뱅상을 몸다툼 끝에 죽이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재밌는 건 영화는 이 엄청난 일을 담담하게 연출했다는 점이다. '살인답게' 섬뜩한 음악을 깐다든지 피가 낭자한 상황을 연출한다든지 하는 것이 보통의 접근이다. 그러나 영화는 성인 간의 치열한 액션이 아닌 하찮은 소위 개싸움을 보여주며 끝내 벌어진 우발적 살인을 제시한다. 이후 해당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는 경찰들의 움직임과 뱅상의 어머니이자 제레미가 묵는 집의 주인인 마르틴의 움직임 등이 이어짐에도 이 또한 담담히 연출된다. 영화는 오히려 남겨진 이들의 욕망을 건드려가며 그 욕망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관찰한다. 하나의 사건, 제레미가 뱅상을 죽인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해 보이던 영화의 이야기가 범죄 스릴러 그리고 감정의 고찰까지 장르의 범위를 넓혀간다. 이와 같은 영화의 서사 구조는 인물 구조와도 닮아있다.
모든 이야기는 작중 주인공 제레미를 중심으로 치러진다. 인트로 또한 제레미가 짝사랑했던 남성이자 마을에서 명망 있던 제빵사의 장례식을 제레미가 방문으로 꾸며진다. 제레미는 동성애자로 추정되는데 제빵사였던 장피에르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친구였던 왈테르에게까지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제레미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욕망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레미는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욕망의 객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마을의 목사인 필리프는 눈치껏 뱅상을 죽인 범인이 제레미인 것을 알면서도 제레미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범행 사실을 묵인, 급기야 시체 유기까지 돕는다. 또한 마르틴도 제레미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는 인물이다.
나아가 배경도 구조의 궤를 같이한다. 영화의 주 배경을 구역별로 나눈다면 마르틴과 성당이 있는 한 구역과 숲 그리고 왈테르가 사는 구역, 총 3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제레미는 왈테르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듯 마르틴의 집에서 숲을 갔다가 왈테르의 집으로 향한다. 돌아올 때면 다시 숲을 지나쳐 마르틴의 집으로 향한다. 뱅상을 죽인 일마저 앞선 경로와 같으며 뱅상을 묻은 곳 역시 숲에서 영화의 극 후반 성당 근처 무덤으로 옮겨진다. 숲이라는 하나의 이동 공간이자 사건의 주 발생지이기도 한 배경을 중심으로 인물의 이동을 보여주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게 한다.
영화는 이처럼 하나의 인물, 하나의 중심 사건, 하나의 주 배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복잡하고도 체계적인 관계성을 풀어나가는데, 주목할 점은 이 모두 순환된다는 점이다. 욕망의 주체와 대상 또한 모두 단 방향성으로 뻗어있지 않다. 제레미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목사가 있다면 그때의 제레미는 그 대상에서 벗어나려 왈테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후 사건에서는 그 관계가 반전이 되기도 하는 등의 사건들이 벌어지며 순환의 구조를 취한다. 더불어 서사 또한 제빵사 장피에르를 관에 묻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면 그 끝은 그의 아들이었던 뱅상이 땅에 묻히는 것으로 일종의 수미상관 식 구조를 갖는다.
작품의 대표적인 식재료로 버섯이 등장한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도 그렇듯 실제 버섯은 유기물의 사체 혹은 썩은 무언가 위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와 숲속 버섯을 캐는 게 취미던 제레미는 뱅상을 묻은 자리 위로 피어난 버섯들을 황급히 따낸다. 영화 속 버섯은 영화가 가진 순환이라는 개념에 대한 표상이 아니었을까. 인물, 사건, 배경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순환이라면 그 인간이 만들어진 순환은 결국 죽음과 욕망으로 인해 탄생한 순환이 아닐까. 이와 대비되는 자연 순환의 표상인 버섯은 죽음으로 인해 탄생했지만, 욕망의 표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주 배경인 마을과 집 내부만큼이나 누군가의 차 내부 및 차창 밖 정경이 영화 속에 빈번히 등장한다. 영화는 오픈 크레딧과 함께 차창 밖 정경을 비추며 시작하는데 보통의 영화들보다 훨씬 길게 보여준다. 이후 해당 장면 속 시점이 제3자의 관점이 아닌 주인공 제레미의 관점이었음을 일러준다. 영화는 이후 차 내부 씬들에서도 그렇듯 차창 밖 정경을 보여주고 난 후 그 시점이 누구의 시점인지를 드러낸다. 그 예시로 제레미와 뱅상이 숲속으로 차를 타며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제레미를 혼쭐 내주려 한 뱅상의 관점은 요동을 치지 살인을 저지른 후 은폐를 위해 운전한 제레미의 관점은 되려 안정적인 것이 흥미롭다.
더불어 영화는 차 속 인물들의 각각의 감정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 함께한 인원들의 공통적인 감정까지도 담아낸다. 이때의 주 감정이 욕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의 방향성이 무조건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레미와 목사가 차량에 함께 탄 씬에서 카메라는 뒤에서 제레미의 어깨와 목사의 어깨 모두를 담아낸다. 제레미와 목사 모두 욕망을 가진 인물이지만 해당 장면 속 제레미는 시체 처리를 욕망하는 반면 목사는 제레미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드러낸다.
목사의 동성애, 유년기 고향 동성 친구에 대한 일방적 유혹, 죽은 아들의 살인마일지 모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감정. 모두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욕망의 표출이다. 보통의 시각 속 욕망은 옳지 못한 감정으로 그 엔딩은 욕망의 표출로 인한 인간의 말로(末路)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궤를 달리한다. 분명 저 멀리 삽으로 무언가 푸는 소리가 들림에도 마르틴은 제레미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고, 제레미는 같이 잘 수 있는지 그녀에게 묻는다. 뱅상이 제레미를 쫓고 헤치려 한 이유도 제레미가 마르틴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마르틴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듯 뱅상의 의혹을 제레미는 모두 부정하지만, 종반부에서 제레미가 먼저 마르틴에게 동침을 제안했고, 선뜻 스킨십했다. 영화는 마르틴과 제레미가 한 침대에서 손을 잡은 채 잠을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제레미의 알 수 없는 표정과 욕망의 방향으로 인해 보통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의 욕망은 불건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런 욕망마저도 사랑이었다. 마찬가지 사랑 때문에 목사는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눈감으며 시체 유기에는 버선발을 내던졌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레미라는 인물이 정말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양성애자인지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 속 그 누구도 말이나 행동으로 감정을 직접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린 영화 속 그들의 행동이 정말 사랑의 표현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욕망의 구분 점을 둔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원초적이면서도 모호한 그 감정을 욕망이라 정의한다. 쉽사리 이해하기 쉽지 않던 영화의 엔딩마저 욕망의 불확실성에 따른 마무리가 아니었을까.
-
-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만원을 쥐어주던데 [단편영화] Official short film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영화를 좋아해서 결국...!! 영화를 찍어버린 씨네마사지!
오래전 수많은 사람들에게 레전드로 기억되는 썰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만원을 쥐어주던데'를 본격 단편영화화!
제작 씨네마사지
원작 김봉철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
출연
황보 김동영 오유나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돈 만원을 쥐어주던데
그다음엔 목욕탕 가라고 또 만원 주고
목욕 다 하고 탕 앞에서 바나나 우유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굴 뽀얘져 가지고 막 빨간 볼 하고 나오면서 바나나 우유 두개 들고오다
나 먼저 먹고있는거 보고 뒤로 감추고
상설매장가서 옷 깔끔한거 사주고 막 맞춰보면서 잘어울린다고 좋아해주고
나 수줍어하니까 귀엽다면서 막 웃고
집에 데려다 주는 길 집 앞에서
이제 깔끔해지고 말쑥해지고 멋있어졌으니까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이게 마지막 사겼던 애랑 마지막 날 했던 일인데
내가 다시 연애같은걸 해볼 수 있을까
-
- 에르큘 포와로의 살인범 찾기! 모두가 용의자다!
명탐정 포와로가 돌아왔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후속영화인 나일 강의 죽음이 개봉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도 포와로의 활약이 돋보이는데요.
호화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부유한 상속녀 리넷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보여지게 되는데요.
진정으로 리넷을 위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것도 포와로가 할 일이 되겠네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제 Rabbitgumi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ug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
- 영화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메인 예고편
"보여줘, 우리가 누구인지." 11월, 다시 시작될 '와칸다'의 위대한 여정 마블의 2022년 피날레를 장식할 압도적인 블록버스터!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메인 예고편 최초 공개
-
- 영화 <리볼버> 메인 예고편
제이슨 스타뎀 X 가이 리치 감독 돌아온 '캐시트럭' 콤비의 NEW 복수 질주! 불법 도박의 누명을 쓰고 7년 동안 독방에서 출소의 그 날 만을 기다리며 치밀한 복수의 계획을 세운 '제이크 그린'(제이슨 스타뎀) 그를 감옥으로 보낸 '도로시'(레이 리오타) 역시 '제이크'의 석방만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잡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그들 앞에는 예상치 못한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복수를 위해 오늘만 기다려온 남자의 멈출 수 없는 질주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