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5-01-31 10:48:26
가족이 돈으로 엮일 때
<은빛살구> 리뷰
극장에서 <멋진 하루>(2008)를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돈으로 엮이는 사랑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구나.’ 헤어진 남자 친구 병운(하정우)에게 떼인 350만 원을 받기 위해 그와 오롯이 하루를 함께 하는 희수(전도연)를 마주했을 때 (영화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현실 속 사랑은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는 희수의 해방을 보기는 했지만, 그 연결고리가 ‘돈’이라는 건 한편으로 씁쓸했다. <은빛살구>를 봤을 때, 17년 전 느꼈던 이유 모를 씁쓸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청약이 당첨되어도 걱정이다. 일생일대 결혼을 앞두고 최고의 행운을 얻은 정서(나애진)는 계약금 마련을 위해 엄마 미영(박현숙)을 찾아가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대신 미영은 과거 이혼한 아빠 영주(안석환)가 직접 쓴 차용증이 붙어 있는 색소폰을 건넨다. 하는 수 없이 떼인 돈을 받기 위해 고향 동해에 간 정서는 아빠와 아빠의 가족과 조우한다. 그곳에서 떼인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이복동생 정해(김진영)와 유대하고, 예비 신랑인 봉성(박경현)을 동해로 불러들인다.
<은빛살구>는 보통의 가족영화와는 다르다. 콩가루 집안을 그리거나(<고령화 가족>)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면했던 가족의 내홍을 들춰내거나(<장손>) 하는 다수의 가족 영화와 그 궤를 달리한다. 이 작품은 온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의 신세를 져야 하는 청년 세대의 현 상황을 소개하면서 혈연이 아닌 돈으로 엮인 가족이란 공동체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정서가 부모의 이혼 후 고향인 동해를 찾아간 건 오로지 아버지에게 떼인 돈을 받기 위해서다. 이 낯선 조우에 딸도 아빠도 그리고 아빠의 새 식구도 불편하기 짝이 없을 터. 오랜만에 딸을 본 아빠는 혈육임에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애증의 관계에 놓은 이들이라도 가족이라 하기엔 냉기가 철철 흐른다.
딸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아버지는 그 돈을 맨 입으로 주지 않기 위해 본의 아니게 날을 세운다. 정서를 괴롭히는 건 아버지만이 아니다. 정해 또한 이복 언니인 정서를 통해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받아내려 하고, 봉성도 청약 아파트를 얻기 위해 알게 모르게 정서를 압박한다. 정서의 엄마 또한 딸을 시켜 돈을 받아오게 시켰으니, 뭐 이 집안은 피가 아닌 돈으로 엮인 게 맞다.
물론, 정해와 친자매처럼 지내고, 봉성이 동해로 내려와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노력하고, 가까운 관광지로 가족 여행을 가는 등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을 겪는 정서는 잠시나마 아버지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과거의 순간을 잊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가족들의 안위보다 자신의 욕망에만 한없이 투명한 아버지의 냄새를 맡는다. 가까이하기도 싫은 그 냄새를 말이다.
극 중 떼인 돈 받아내기 프로젝트는 결국, 아버지, 가족 관계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아직도 옭아매진 그 혈연이란 족쇄를 끊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특히 이 부분에서 영화는 가족을 뛰어넘어 사회 제도로서 그 영역을 확장, 정서를 통해 돈과 평온한 삶을 위해 불온한 일을 넘길 것인지, 아니면 힘든 상황에 놓일지언정 떳떳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결단을 내린다. 매번 아버지(또는 가족)에게 흡혈 당한 정서가 도리어 흡혈하는 대상으로 역전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통쾌함과 시원함을 안긴다. 후반부 자신은 아버지처럼 냄새를 풍겨가며 안온한 삶을 살아가기 싫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정서의 모습은 임팩트 있게 다가온다.
가족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돈’이란 소재와 결부시켜 표현하려는 의도는 새로움을 전한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도리어 영화를 낯설게 받아들이는 요인으로도 작용하는데, 특히 가족이나 사회에서 정해진 제도를 타파하는 것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상쇄하는 건 배우들의 힘이다. 극을 이끌어 가는 나애진은 불안함으로 점철된 정서를 입체감 있게 그려내는데, 아버지와 가족, 세상을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는 반골 기질과 서늘한 표정이 압권이다. 왜 이 작품으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배우상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버금가는 안석환의 연기는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묘한 매력으로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호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싸늘한 시선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착하게 살면 맛이 없지. 건강해라” 정서와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내뱉는 이 대사는 꼭 눈여겨보길 바란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첫 장편을 내놓은 장만민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서울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정서가 우연히 꺼낸 가족사진에 묻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는 마음에 대해 관객분들도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영화를 설명했다. 사랑보다 돈으로 엮인 이 가족사, 그리고 이 관계를 타파해 가며 진정한 해방일지를 적어 내려간 정서를 보면서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란다. 그 먼지의 맛이 볼품없어도.
사진 제공: ㈜마노엔터테인먼트
평점: 3.5 / 5.0
한줄평: 가족의 목덜미를 물어야 비로소 가능한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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