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11-15 07:52:27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앵그리 애니〉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앵그리 애니〉
아래로6★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벤느망〉에서 주인공 안은 두 번의 임신중지를 시도한다. 뜨개질바늘을 사용해 혼자서 한 번, 불법 시술소에서 또 한 번. 〈레벤느망〉은 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안의 거친 호흡과 고통스러운 신음, 날카로운 시술 도구가 안의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불법’이라는 추상적 규범이 초래하는 위험과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수치심을 고발한다.
〈레벤느망〉의 배경은 1963년의 프랑스다. 〈앵그리 애니〉는 그로부터 10년 후의 일을 다룬다. 두 아이가 있는 엄마 애니는 임신중지가 가능한 곳을 수소문해 한 서점을 찾는다. 서점 직원은 찾는 책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혹시 모임에 온 것이라면 커튼 뒤쪽으로 가 보라고 말한다. 커튼 뒤에는 ‘불법이지만 비밀은 아닌’ 일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임신중지가 필요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려 깊은 태도로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임신중지에 어떤 도구를 활용할지 하나하나 일러주고, 모든 궁금증에 상냥히 응대한다. 겁에 질려 그곳을 찾은 여성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그들은 MLAC, 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가다.

이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시작된다. 애니는 임신중지를 위해 침대에 눕는다. 의사 한 명과 활동가 둘이 애니 곁에 있다. 그들은 애니에게 거울로 자궁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자기 몸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기 위함이다. 의사는 애니가 불편함을 느끼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활동가는 애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내내 곁을 지킨다.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끝났다고요?” 임신중지가 마무리되자 애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애니에게는 이토록 쉽고 간단하고 안전하게, 심지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임신중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레벤느망〉의 임신중지 장면과 달리, 〈앵그리 애니〉의 임신중지 장면은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두 영화가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는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이 어떤 환경과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극적으로 대비한다.
MLAC 덕에 공포가 안도로 바뀐 애니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경험에 계속 잊히지 않는다. MLAC의 도움으로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안전하고 믿음직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기부금 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면 됐다. 그들의 활동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커다란 평온에 감명받은 애니는 순수한 호기심이 인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불법 행위를, 심지어 비밀리에 진행하지도 않는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데, 애니는 그런 그들에게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던 중 애니에게도 각성의 순간이 온다. MLAC 조직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긴 했어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모든 여성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여전히 많은 여성이 위험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애니의 이웃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는 본격적으로 MLAC 활동을 시작한다. 활동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조금씩 수정해나가고, ‘생명 파괴’ ‘문란함’ 등의 낙인 때문에 여성들이 임신중지에 얼마나 큰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도 직접 대면한다.
애니가 MLAC 활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영화의 질문은 확장된다. 〈앵그리 애니〉는 그저 임신중지의 합법화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더 크고 깊은 질문이 담겼다. MLAC를 찾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활동가, 의사만으로는 모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이에 오랫동안 단체에서 의사를 돕던 활동가들이 직접 임신중지 시술을 집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주로 남성으로 구성된 MLAC의 의사들이 반발한다. 자칫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전문가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의사 없이 임신중지보다 훨씬 더 위험한 출산을 인류의 탄생 때부터 서로 도우며 해왔고, 시술법이 발전한 덕에 임신중지의 절차가 비교적 간단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MLAC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들의 느끼는 공포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국가/전문가 집단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애니는 화를 내는데(‘앵그리 애니’), 그 이유도 이 때문이다. MLAC의 활동이 큰 이슈가 되어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으나 합법화가 의료 기관이 그 권한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MLAC에서 가능했던 여성들 간의 연대, 여성 경험의 가시화 등은 배제된 채(즉 MLAC에서 여성들이 쌓아 온 역량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채) 여성이 다시금 남성/국가/전문가의 수동적 객체로 위치지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애니는 화가 난다.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후 병원에서의 임신중지는 위험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여성을 다시금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MLAC 활동을 하며 애니가 가족에 ‘소홀해지는’ 과정과 이로 인한 가족 내 갈등을 통해서는 여성이 가사노동의 책무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제약을 받는 상황을 짚기도 한다. 〈앵그리 애니〉는 단순히 낙태죄 폐지가 진보·정답이 아님을, 여기에는 이를 초과하는 다양한 결의 질문과 고민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인다. 임신중지에 관한 단편적 이해와 서사를 넘어, 여기에 무수히 많은 이슈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이는 이 영화는 낙태죄가 페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런 후속 입법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임신중지 이슈에 관한 필람작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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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 Whiplash, 2014
시간은 저의 나이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10살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음식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자리에 끝까지 이를 다 먹도록 했습니다.
그게 안된다면, 당사자를 향해서 의자를 던지는 등 위협도 불사했습니다.
사건은 "된장국"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고, "된장국" 역시 이에 속했습니다.
담임과 "이를 먹느냐, 마느냐"로 신경전을 펼쳤으며, 담임은 '자기가 보는 눈앞에 먹어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숟가락을 떠먹고선 당당히, "오바이트(?)"를 했습니다.
영화 <위플래시>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2007>에서 괴팍한 편집장 "J.K. 시몬스"를 "플레처"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으로 공식적인 결과까지 이어졌고요.)
무엇보다 개봉 당시 군 복무로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쳐 아쉬웠는데, 이번 재개봉이 저에게는 운 좋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올라간 링크에도 있듯이 마지막 곡이 "업스윙윙"과 "카라반"인데도 "이 플래시"로 적어놓는 실수가 있어 이를 바꿀 기회도 겸사겸사 극장에서의 관람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2번째이지만 극장에서는 처음 보는 영화 <위플래시>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뉴욕 최고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한 "앤드류"를 보여줍니다.
그는 학교 최고이자 최악의 지휘자 "플레처"의 눈에 들며, 그의 밴드에 들어가 단숨에 메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날로 실력이 늘어나는 "앤드류"이지만, 점점 여자친구와 가족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며 그의 삶을 바꿀 사건이 일어나는데...
관객들의 눈에 플래시가 터진다!
1. 음악영화의 클리셰가 깨졌다?
영화 <위플래시>를 보기에 앞서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2016>에서 "재즈"에 익숙지 않는 "미아"를 위해 "세바스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재즈는 싸움이고, 주도권이 쉴 새 없이 바뀌며 매일매일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건넵니다.
이런 시점에서 보는 영화 <위플래시>는 애당초 "플레처"의 일방적인 싸움으로 전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줄기차게 내뱉는 대사 'Not quite my tempo'는 악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상 그가 통제하는 리듬을 의미합니다.
발버둥 쳐봤자 손바닥 안?
그도 그럴 것이 "앤드류"가 그토록 미쳐가는 자리는 사실 "플레처"가 통제하는 밴드 안에서 일어나는데요.
그가 그토록 원하는 "메인"은 "플레처"의 밴드에서 "플레처"의 말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가 손에 피가 튈 정도로 두들긴 이유 또한 "플레처"의 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앤드류"는 자신이 되고픈 "찰리 파커" 혹은 자신의 리듬이 아닌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노래"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매개체임을 고려하면, 영화 <위플래시>는 "클리셰"를 깨부순 영화인 것입니다.
2. 스릴러 같은 음악영화
이외에도 영화 <위플래시>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보면, "공포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블룸 하우스"에서 제작된 영화입니다.
물론 "드라마"로 소개되지만 "스릴러"가 더 어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제작한 그 어떤 공포 영화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상황들을 전개하는데요.
바로, 관객들의 입에서 "어떡해?"가 나오며 절로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만들게 합니다.
극 중 누군가가 실수를 해 이를 밝히는 장면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눈을 감고서 손만 들라는 교실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큰소리로 다그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학교를 다녀보았으면 겪어볼 만할 상황들을 장면으로 꺼내 관객들의 공감을 일으키는데요.
이야기가 "공감"을 넘어서서 "이입"이 되는 것이먈로 가장 좋은 상황임을 본다면, 영화에서 "플레처"는 이야기를 가장 좋게 만드는 매개체입니다.
"블룸하우스"의 어떤 공포보다 무서운데?
여기에 영화 <위플래시>의 음악은 장면을 보다 풍성하게 만듭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음악은 자고로, 가사가 있어야 하는 주의인데 본 영화의 음악은 가사가 없어도 제목이 머리에 쉽게 쉽게 남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해당 음악들이 극 중 "플레처"와 "앤드류"의 사이에서 소비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으로 혼이 나는 장면에서는 "위플래시"를, 경쟁을 부추기는 장면에서는 "카라반"이 쓰이며 가사들이 없어도 관객들의 머리에 크게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는 완곡하지 못한 "업스윙윙"까지 아직 기억에 남는 건 영화가 이를 잘 활용했다는 것이고요.
3.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이 쏟아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하는데요.
이는 마지막에서도 일어나고 맙니다.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보였던 "플레처"와 "앤드류"는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지지만 예상에 없던 "업스윙윙"이 나오며,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한방을 먹습니다.
이에 자리를 비우는 "앤드류"이지만, 이내 돌아오며 곧장 "카라반"을 치는데요.
여기서, 더 이상 "플레쳐"의 지휘가 아닌 "앤드류"의 연주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동안 영화가 "플레처"의 손으로 연주가 이어지고 중단된 것과 다르게, 이번 연주는 "플레처"도 함부로 중단하지도 못합니다.
1:1, 승패를 결정지을 "위플래시"는 누구에게?
결국, 영화는 "위플래시"를 관객들에게 이 대결의 승패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직, 소리로만 들려주고는 누구의 템포로 시작했는지의 모습은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아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업스윙윙"이 "플레처"의 승리였고, "카라반"이 "앤드류"의 승리로 동률을 만들었으니 이들의 승패가 결정지을 "위플래시"의 결과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위플래시>가 결말을 지었듯이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된장국 결과도 말해야겠죠.
"된장국"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는 음식은 아닙니다. 결국, 저는 된장국을 선생님 보는 앞에서 밥 말아먹었습니다.
식판을 들며 국물까지 싹싹 긁어서 먹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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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박사의 그늘은 매력적이지만...
누구나 마음속의 그늘이 있다. 그걸 조금씩 드러내 놓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완전히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감추고 살아도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 그늘의 영향을 시종일관받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평생을 그렇게 벗어나고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그늘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인에게는 극복할 목표를 주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면서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주인공 천박사(강동원)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천박사는 가짜 퇴마사역할을 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그는 퇴마를 하는 회사를 만들고 민배(이동휘)를 직원으로 고용해 함께 퇴마활동을 한다. 그 퇴마활동에는 여러 첨단 기기들이 동원된다. 즉, 천박사가 하는 퇴마 행위에는 진짜 귀신이 등장하지 않고, 심리학을 전공한 천박사의 심리적인 해결방법으로 의뢰자들을 설득해 나간다.
천박사의 숨겨진 그늘
그저 가볍게 보이는 천박사와 민배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천박사의 모습은 꽤 진지하고 심지어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의 과거가 이야기되면서 드러나는 천박사 복수는 그가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천박사의 그늘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는 과거에 할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되었고 그 일에 관여된 악당을 찾고 있었다. 그 과정은 꽤 길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고 괴짜처럼 보이는 그는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아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악귀와 대결에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가 가진 내면의 힘과 능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악귀와 싸우면서 크게 다치지 않고 대등하게 대결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천박사가 유경(이솜)의 의뢰를 받은 이후 악귀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천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수십 명이 천박사와 동료를 공격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천박사의 그늘이 공개되면서 천박사의 유머는 힘을 잃고, 옆에 있는 민배만이 망가지며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도, 액션도 힘이 떨어진다.
천박사가 본인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진지하게 악귀의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그의 슬픔을 해소할 수 있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점점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 없이 악귀 우두머리인 범천(허준호)과 대등하게 대결을 벌인다. 영화에서는 그 대결을 마지막에 넣어 두었지만 천박사의 강력한 힘과 그가 가진 무기의 절대적인 힘이 마지막 두 인물의 싸움을 시시하게 만든다.
천박사를 제외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천박사 역을 맡은 강동원은 과거에 <전우치>나 <군도>에 등장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도술을 쓰는 존재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과거의 작품들처럼 이번 <천박사 퇴마 연구소>에서도 가벼우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에 비해 천박사라는 캐릭터는 꽤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천박사는 밝지만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천박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배는 유머 캐릭터로 소비되고 있고, 황사장(김종수)은 천박서의 퇴마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잔소리 꾼으로 남는다. 의뢰인 유경 역의 이솜은 유일하게 유머가 없는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이지만 특별히 매력적인 역할로 등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의 빌런인 범천의 카리스마는 눈에 띄지만 그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할 다른 빌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범천을 따르는 부하들은 너무 약하고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린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는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과거 <헤어질 결심>,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생충>의 조감독 출신인 그는 좋은 배우와 깔끔한 화면으로 퇴마활극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98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에도 이 영화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강동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더욱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영화다. <빙의>라는 원작 웹툰이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흥미가 떨어진다. 이어지는 웹툰의 후속 시리즈가 있기 때문에 이번 첫 번째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하느냐에 따라 연작 시리즈가 될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천박사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고 주변인물들이 이야기를 맴돌고 있다. 무엇보다 악귀가 등장할 때도 특별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후반부로 갈수로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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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어 아이즈 텔> 감성 장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오감을 일깨우는 눈부신 로맨스!
<유어 아이즈 텔> 감성 장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오감을 일깨우는 눈부신 로맨스!
출처 : 더쿱/리틀빅픽쳐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보이는 사랑 <유어 아이즈 텔>로 일본 최고의 감성 장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이 돌아와 다시금 극장가에 감성 로맨스 신드롬을 일으킬 것을 예고한다. 영화 <유어 아이즈 텔>은 마음을 닫아버린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자가 그리는 아름답고 눈부신 로맨스.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감독이자 최고의 감성 장인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자랑하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유수 영화제를 휩쓸며 실력을 입증한 그는 뮤직비디오, 광고,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2005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재팬에서 베스트 비디오 상을 받는 등 일본 최고의 비주얼 아티스트임을 증명했다. 2010년, 동명의 일본 대표 청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소라닌>을 통해 성공적으로 장편 영화 데뷔 신고식을 치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이후 요시타카 유리코와 첫 호흡을 맞췄던 <우리들이 있었다> 전편과 후편을 비롯해 <양지의 그녀>, <입술에 노래를>,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나다> 등을 선보이며 일본을 넘어 전 세계를 휘어잡는 최고의 감성 로맨스 장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번 <유어 아이즈 텔>은 감각적인 영상미를 만들어내는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집약된 작품으로, 단연 필모그래피 최고의 작품으로 등극할 예정이다. 송일곤 감독, 소지섭, 한효주 주연의 <오직 그대만>이 입증한 탄탄한 멜로 드라마에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풍부한 예술성이 결합해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로 탄생한 <유어 아이즈 텔>은 원작의 명성을 뛰어넘는 올봄 최고의 감성 로맨스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관객들이 시각적인 것 이상의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라며 “영화는 보는 것이지만, 영화 속 내용을 만지거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랬다”라고 사고로 시력을 잃어가는 ‘아카리’(요시타카 유리코)가 주인공인 만큼 영화로 다양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또한, “이 영화는 단순히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궁극적으로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라며 보다 성숙한 사랑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감독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전했다.
한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3월 최고의 데이트 무비로 등극할 <유어 아이즈 텔>에 이어 ‘체리마호’ 신드롬의 주역 아카소 에이지가 출연한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를 통해서도 국내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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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할 할리우드를 추앙하라!
8★/10★
1926년. 할리우드 인근의 고즈넉한 저택에서 비밀스러운 파티가 열린다. 파티의 분위기는 저택이 풍기는 느낌과는 정반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화려하고 소란스러우며 원초적 쾌락을 탐닉하는 광란의 유흥이 펼쳐진다. 그리고 세 명의 손님. 첫 번째는 잭 콘래드. 그는 할리우드 무성영화의 영웅으로, 별 볼 일 없는 배우라는 직업을 모두가 동경하는 스타의 지위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두 번째는 넬리 라로이.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가 ‘스타’로 태어났다고 확신하며 기회를 모색한다. 마지막은 멕시코 출신의 제임스 맥케이. 그는 영화 일을 하고 싶으나 지금은 영화계 거물이 주최한 파티에서 서빙을 할 뿐이다. 정상에 있는 인물 하나, 영화판에서 상승하고자 하는 인물 둘. 서로 다른 욕망과 위치를 가지고 할리우드에 걸친 세 사람이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조우하고, 이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할리우드는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 무엇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만이 업계에서 살아남았다. 파티에서 우연히 잭의 눈에 들어 그의 로드 매니저가 된 매니가 마주한 도전을 보자. 매니는 임금 투쟁을 벌이는 엑스트라 출연자들의 무리와 전쟁 장면을 촬영하다 실제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장에 넋이 나간다. 설상가상으로 촬영 중 카메라가 망가져 해가 지기 전까지 새로운 카메라를 구해오라는 임무도 떠맡는다. 그러나 매니는 우격다짐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한다. 과정은 필요 없다. 결과만 좋으면 만사가 오케이다. 그것이 1920년대의 할리우드였다. 매니는 빠르게 잭의 신임을 얻고, 영화판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넬리 역시 기회를 얻는다. 한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할 예정이었던 여성이 마약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넬리가 얼결에 기회를 얻는다. 자신이 타고난 스타라는 넬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집, 가족, 과거를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녀는 촬영장에 투입되자마자 놀라운 감정연기로 두각을 나타내고, 감독의 눈에 들어 여러 영화에 연달아 출연한다. 매니가 그러하듯, 넬리 역시 빠르게 자신이 동경하던 자리인 ‘스타’에 도달한다.
매니와 넬리만 치열한 것은 아니다. 이미 스타인 잭 역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한다. 영화가 수많은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장르라는 데, 자신이 그런 영화를 일으켰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 잭은 영화가 새로운 예술적 실험으로 나날이 진일보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영화와 자신의 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즉, 그는 영화의 변환기에서 스타 배우로서의 자기 입지가 여전히 탄탄하기를 소망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셋 모두를 휩쓸며 소용돌이친다. 한 장르의 거대한 흐름이 바뀔 때는 많은 변화가 생긴다. 익숙한 방식으로 작업하던 수많은 사람이 나가떨어지지만, 새로운 장르에 적합한 수많은 사람이 금세 그 자리를 메운다. 새로 치고 올라온 자들이 뿜어대는 빛은 낙오된 자들을 잠시나마 추모하는 일조차 사치라 여겨질 정도로 밝고 환하다. 그리고 〈바빌론〉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어 드라마적 요소를 만들어낸다.
〈바빌론〉은 영화판의 변화에 휩쓸려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나지 않기 위한 세 인물의 투쟁을 스펙터클하고 격정적인 드라마로 펼쳐낸다. 그리하여 끝내 도달한 자리는 어디인가? 〈바빌론〉은 단호하고도 냉정하게 말한다. 영화라는 장르는 개개인의 흥망성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고.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던 평론가는 고작 ‘가십 칼럼니스트’라는 부고만을 남기고, 어렵게 기회를 얻은 흑인 뮤지션은 좌절한 후 다시 밴드로 돌아온다. 넋이 나갈 정도로 치열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잭, 매니, 넬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곧 나’라는 자칫 오만해 보이는 자부심을 현실로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들이지만, 영화는 스러진 개인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영원히 이어진다. 심지어 위대하게. ‘네가 아무리 영화를 사랑하고 헌신했더라도, 영화는 너 같은 것 하나 없어진다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영화는 이토록 '비윤리적'이다.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이 엄혹한 진실 역시 사랑해야만 한다.
〈바빌론〉은 영화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대중이 매체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뀔 때마다 기존 매체는 '위기'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영화는 수많은 위기를 넘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쇼트 콘텐츠의 유행, OTT 플랫폼의 대중화라는 동시대의 경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바빌론〉에는 자극적인 콘텐츠와 이를 소비하는 방식을 다소 적나라하게 비난하는 장면(폭력배 맥케이의 동굴)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장면은 어딘가 튀는 느낌을 자아내 영화의 질감을 해친다. 그러나 '영화 예찬'이라는 맥락에서 이 장면은 필요하다. 영화가 그 어떤 도전과 위기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감독의 확신이 담겨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버리고 떠난다 해도, 영화는 영원히 이어진다.' 그러니 망할 할리우드를 추앙하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뻔뻔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바빌론〉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덧. 1952년작 〈사랑은 비를 타고〉를 함께 보면 〈바빌론〉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캐릭터 설정부터 오마주,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영화인들이 마주한 도전까지, 〈바빌론〉에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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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와 과거의 다정한 조우
작년 가을. 회사에서 일하다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주섬주섬 상황을 알리고, 며칠 자리를 비울 준비를 했다. 장례식 기간 특별 휴가, 장례식이 끝나면 부모님 댁으로 같이 가기 위해 하루 연차를 더… 자리 비우는 동안 일은 이렇게 저렇게 대신 부탁드려요.
침착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화장실 칸에 들어가 아주 잠깐이나마 혼자가 된 순간 목에서 울음이 솟구쳤다. 어떤 울음은 구토처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구나. 아직은 안 돼, 아직 울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울음을 다시 집어넣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핸드폰으로 각종 예매와 약속을 취소하면서.
그때 취소한 예매 내역에 <쁘띠 마망>이 있었다.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을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었지만, 개봉하고 한참이 지나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극장엔 나뿐이었고, 더욱 공교롭게도 영화의 주인공 '넬리'가 처한 상황이 나와 거의 비슷했다. 비로소 울음을 참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주인공 넬리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넬리는 할머니가 계셨던 병원의 노인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성실하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떠난다. 넬리의 엄마 마리옹은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넬리를 데리고 할머니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넬리는 인사성이 밝다. 할머니가 계셨던 병원을 떠나면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 맞추어 인사하는 모양새로 보아, 일상적인 인사를 제법 성실하게 채워온 것 같다. 넬리는 사려 깊은 아이처럼 보인다. 운전하는 엄마의 입에 과자를 넣어준 후 주스 빨대도 물려줄 만큼.
그럼에도 넬리는 결정적인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의 마지막 배려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최선을 다해도 모든 순간을 다 거머쥘 수는 없다. 사실 마지막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지막은 늘 처음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므로. 이별은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으니까.
우리는 이별 후에야 그 평범했던 행위들, 무심코 지나치는 게 당연했던 모든 순간을 안타까워한다.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로 남는 후회의 문장들. 인사를 할걸. 화를 내지 말걸. 손을 잡아줄걸. 전화를 할걸. 가슴 치게 만드는 것들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일들이다. 빈 병실에서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막 떠나보낸 마리옹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넬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인지, 숲의 마법인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간 속에서 한 채의 집을 두 채로 이어 붙여, 못다 한 작별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은 기적, 어쩌면 꿈, 염원이다. 넬리와 ‘쁘띠’ 마리옹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영화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기적이란 원래 그렇게 설명할 수 없이 일어나는 거니까.
기적과 이별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이리라. 예고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찾아온다는 것. 그 뒤에 붙는 모든 해석은 다 어떻게든 수용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 실은 그저 닥쳐온 일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
이 기적은 모든 순간 위로가 된다. 훗날 자신에게 탄생을 줄 이의 생일을 친구로서 같이 축하하며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 촛불을 부는 것도. 숲속의 집을 같이 지어 올리고, 보트의 노를 같이 저어 가고, 소꿉놀이 같은 연극을 같이 하고, 앞으로 자신을 먹일 어떤 이와 함께 핫케이크를 만드는 일도.
정작 현실에서 못다 하고 왔던 인사는 이곳에서도 스치듯 건네게 된다. 그렇지만 괜찮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고 인지한 채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 깨닫게 될 테니까. 사실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뒤에 붙는 ‘~했을 텐데’의 말은 큰 의미가 없었다는 걸. 다시 돌아가도 우리는 케이크 촛불을 불고, 같이 집을 짓고, 같이 보트의 노를 젓고, 그렇게 일상적 행위들로 시간을 살뜰히 채울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그 말 뒤에 붙는 모든 말들은 사실 어떤 행위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는,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랐다는 솔직한 마음이다.
너무 가까워서 불러보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엄마의 이름처럼. 이 영화는 시간을 이어 붙이는 마법으로 그 이름들을 조명한다. 할머니는 넬리의 이름에서 증조할머니를 떠올리고, 넬리는 엄마의 이름을 마리옹이라고 불러 본다.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구나. 아주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래와 과거는 그렇게 다정하게 조우한다. 미래가 과거를 닮는 것 같지만 과거도 미래를 닮는다. 이 영화 이후 “안녕 Au revoir”라는 인사는 한층 더 따스하게 기억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신석정의 시 <푸른 침실>을 떠올렸다. 실제로 영화 속 침실들이 죄 푸른색이기도 했고. 두 아이, 미래와 과거가 함께 있는 모습이 꼭 항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림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배를 잡아타고
또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 <푸른 침실> 부분)시인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쓴 시와 함께, 이 영화가 반짝반짝 부려 놓은 마법을 끌어안고, 나 또한 어떤 작별을 되새김질했다.
가끔 삶의 어딘가, 균질하던 순간이 툭 깨지고 그 자리에 마음이 툭 걸리는 순간이 있다. 니트의 올이 어딘가에 훅 걸려 풀어지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도 분명 그런 순간일 것이다. 아무리 잘한 사람이라도 후회가 남는, 그런 순간.
그렇게 멈춘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다시 이별의 자리에 돌아가, 나의 모든 순간을 되새김질하여 소화하고 내일로 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는 이 영화를 보며, 셀린 시아마의 마법을, 또 그 영화에서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될 수많은 이들을 생각한다.
이별 후 눈물 혹은 한숨으로 잠 못 이루는 어떤 이의 베갯잇에 이야기 하나를 고이 수놓아줄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종이배처럼 접어 푸른 항해를 내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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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뮤지컬 영화 두 편 - 라라랜드, 로켓맨
라라랜드 - 2016년 최고의 로맨스 뮤지컬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세바스찬 와일더와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배우를 지망하는 미아 돌런은 어느 날,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난 것을 시작으로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데이트도 하고, 함께 생활을 하는 등 화목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점차 둘의 관계가 비틀어지기 시작하고 끝내 이를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성장하려는 과정을 그린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뮤지컬 영화다.
일단 확실히 재미있게 봤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만큼 강렬하거나, 폭발적인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름의 성장과 이야기를 지닌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뮤지컬 영화답게 노래가 정말 훌륭하다. 세바스찬이 혼자 독백하며 부르는 'City Of Stars'이라든가, 영화 도입부에 펼쳐지는 뮤지컬 장면은 정말 소름의 연속이었다. 특히 배우들의 춤선이 너무 아름답게 짜여져 있어서 뮤지컬 영화를 나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그러나 뮤지컬 음악이 나오지 않은 '일상 장면'들 중 대부분이 다소 평범하게 연출되었다는 건 상당히 아쉬웠다. 대표적으로 세바스찬과 미아가 식탁에서 파티하다가 싸우는 장면 같은 경우에는 현실적이긴 한데 한국 막장 드라마에서 주구장창 봐왔던 거라 다소 거부감이 있었고(영화의 잘못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위플래쉬] 같은 쾌감이 없었던 것도 조금은 아쉽게 다가왔다.
그래도 훌륭한 영화라는 것에는 100% 동의한다. 확실히 재미있는 영화고, 스토리와 연출, 연기와 각본 모두 평균 이상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봐도 만족스러울 만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이 위에 문제들은 그냥 개인적인 아쉬움일 뿐이고, 모든 면에선 거의 완벽에 가깝기 때문에 2016년 최고의 영화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히 그중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뭐니 뭐니 해도 감독의 연출이다. 일단 이 부분은 [위플래쉬]를 봤을 때도 느꼈던 강점인데, 셔젤 감독은 장면 하나하나를 지나갈 때마다 그 상황 당시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포착해서 스크린으로 펼쳐놓는 능력이 굉장히 탁월하다. 물론 [퍼스트맨]에선 오로지 주인공의 겁먹은 표정 외에 다른 것들을 전부 다 놓치고 있긴 했지만 뭐 [라라랜드]까지는 이러한 장점이 살아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어쨌든 주말에 보기 딱 좋은 영화니 강추!
평점: 9/10로켓맨 - 잘 만든 음악 전기 영화의 대명사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엘튼 존은 자신만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의상들, 그리고 끝내주는 음악들로 인해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매니저인 존 리드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점점 꼬이기 시작하고, 이에 뒤따른 온갖 마약과 술에 찌들어 폐인이 되고 만다. 결국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지만 이를 전부 극복하고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엘튼 존의 이야기를 다룬 덱스터 플레처의 뮤지컬 영화다.
일단 정말 재미있게 봤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들 중 가장 좋았고, 재미의 측면에선 [라라랜드]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화의 감정선이 매우 뛰어나다. 엘튼 존이 마약과 술에 빠져 피폐해져가는 과정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몰입을 유도했고, 끝내 이를 극복하는 모습까지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엘튼 존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깔끔하고 완성도 있게 보여주었다. 특히 음악 전기 영화라는 점에서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로켓맨]이 더 뛰어난 영화라는 것은 팩트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프레디의 외로운 면만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그 외에 것들은 전부 다 설렁 설정 넘겨버려서 필자를 정말 짜증 나게 했지만, [로켓맨]은 이에 정확히 반대되는 작품이라 개인적으로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단점이 아예 없는 영화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로켓맨]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로켓맨'이라는 곡이 이 영화의 별다른 쟁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제목이 '로켓맨'인 것은 바로 엘튼 존의 별명에서 따왔다고 하면 크게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엘튼의 상징과도 같은 곡인데, 겨우 이런 식으로 낭비하는 건 좀 별로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로켓맨'이라는 곡이 한 건 수영장에서 익사할 뻔한 걸 구한 게 전부고, 이 곡이 나온 이후에도 마약을 하고 술을 퍼먹는 등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거기다 마약과 술을 하는 장면을 워낙 사실적으로 연출했다 보니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는 점에서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켓맨]은 필자에게 매우 재미있는 영화였고, 앞으로도 잘 만든 음악 전기 영화의 대명사로 쓰일 듯하다.
평점: 8/10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콩까기의 종이씹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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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란 투리스모 > 메인 예고편
3,2,1 GO? 게이머에서 레이서로, 목숨을 건 스피드 액션 블록버스터!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덕업일치 성공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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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림자꽃> 메인 예고편
일종의 사고였다. 2011년, 평양시민 김련희 씨는 지병인 간 치료 차 중국의 친척집을 방문했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병원비로 식당 일을 하던 중 남한에 가서 돈을 벌라는 브로커 말에 속아 북한 여권을 빼앗겼다.
탈북하지 않겠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남한에 들어오자마자 북송을 요청했지만 국가보안법은 억지로 남한시민으로 만들었다.
국가정보원은 김련희 씨를 간첩으로 기소했고 법무부는 보호관찰 대상자로 가둬 출국금지로 묶어놨다.
베트남대사관에 망명 신청도 해보고, 북한선수단에 사정도 해봤다. 새 정권으로 희망을 가져봤다.
번번히 실패해도 매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행복을 꿈꾼다. “그런 날이 오겠죠, 우리 함께 대동강변에서 꽃이 되는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