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07 11:25:56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영화 9선
연출 차력쇼란 바로 이런 것!

단조로운 공간 활용의 단점을 극복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영화 9편을 준비했습니다.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들로 준비했으니, 영화와 함께 금요일 저녁을 즐겨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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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A to Z를 알아보자
-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으로밖에 즐길 수 없었던 영화인들의 축제가 다시 오프라인으로 그 장소를 옮깁니다. 2022년 4월 28일(목) 개막하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말이죠. 사회적 거리두기 없는, 영화제다운 영화제가 열리는 것이 이로써 3년 만입니다. 오랜만의 영화 축제 소식에 개막식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 소식을 알렸습니다. 전주에 모일 영화인과 관객, 두 집단의 행복한 교감을 앞두고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볼거리, 즐길거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름하여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A to Z입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 프레스로 참석합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2022년 4월 28일(목)부터 5월 7일(토)까지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에서 개최합니다.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JEONJU International Film FestivalAfter Yang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으로 축제의 포문을 엽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애프터 양>은 아시아계 청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양'과 그를 소유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파친코>를 연출하며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코고나다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죠.Book전주국제영화제는 책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를 잡지 형식으로 엮은 <J 매거진>, 이창동 감독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를 추모하는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 등 6종의 출판물을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굿즈샵과 각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합니다. 영화제 기간에는 전주 시내 서점과 카페에서도 구입 가능하답니다.Cinema, dam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질 야외무대에서는 영화인과 관객이 만나는 '시네마, 담' 이벤트가 열립니다. 전주라운지에 위치한 토크스테이지에서 4월 29일(금)부터 사흘간 무료로 영화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정은 배우 주연의 <오마주>를 시작으로 전 상영 회차가 초고속 매진된 <윤시내가 사라졌다>까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놓치지 마세요.Dome전주 돔이 3년 만에 문을 엽니다. 전주 돔은 2017년부터 영화제의 마스코트로서 주요 행사들을 담당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두 번의 영화제에서 운영되지 않았는데요. 전주국제영화제는 3년 만에 전주 돔의 문을 연 만큼, 개・폐막식 외에도 다양한 전주 돔 이벤트를 구성하며 축제다운 축제를 개최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습니다.E-screening전주에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염려 마세요. 팬데믹 이후, 국내 영화제 최초 온라인 상영을 도입한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도 온라인 상영을 이어갑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은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영화제 전용 온라인 플랫폼 온피프엔(ONFIFN)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요. 이곳에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의 절반이 넘는 112편(해외 69편, 국내 43편)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Frontline급진적인 주제, 파격적인 도전정신을 담은 작품을 소개하는 ‘프론트라인’ 세션이야말로 진정 ‘영화제스러운’ 세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 ‘프론트라인’ 세션에서는 작년보다 2편 늘어난 12편의 도발적인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의 믿을 수 없는 기록을 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그들이 서 있던 곳에서>부터 공상 세계의 전자 폐기물 쓰레기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해왕성 로맨스>까지, ‘프론트라인’ 세션의 작품들을 흥미롭게 감상해보세요.Guest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게스트로 참여합니다. 국내에서는 임권택 감독, 이창동 감독, 공승연 배우, 권해효 배우, 나문희 배우, 송새벽 배우 등이 참석하고, 해외에서도 약 60명의 게스트가 내한해 축제를 빛낼 예정입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이벤트별 게스트 참석 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Have A Nice Day공연기획사 민트페이퍼와 전주국제영화제가 손을 잡고 5월 5일(목)부터 이틀간 음악 페스티벌 ‘Have A Nice Day’를 엽니다. 5월 5일(목)에는 10CM, 소란, 스텔라 장 등이, 5월 6일(금)에는 김필, 선우정아, 홍이삭 등의 가수가 무대에 섭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현장에서 뜨거운 공연의 열기를 즐겨보세요.Identity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색다른 아트 디자인의 페스티벌 아이덴티티를 선보이는데요. 올해의 아이덴티티는 과감한 색상과 도형 표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전주의 알파벳 ‘J’와 개최 횟수인 ‘23’을 다방면의 삼각형으로 형상화했죠. 김광철 아트디렉터에 따르면, "삼각 도형은 영화 장치인 영사기가 공간에 투사하는 빛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전주 영화의거리에서 이 포스터를 만나면 반갑게 기념사진 한 장 어떠신가요?Judge심사위원들이 오프라인으로 심사를 진행하는 것도 3년 만입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는 아시아, 유럽, 남아메리카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영화 전문가들이 선정됐습니다. 국내에서는 박하선 배우, 주진숙 중앙대 명예교수 등이, 해외에서는 안드레이 터너세스쿠 빌뉴스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클라리사 나바스 감독 등이 자리합니다.K-sound한국영화의 음향을 책임지는 사운드 마스터들도 전주를 찾습니다. 사운드 마스터가 선정한 영화를 관람한 후, 관객에게 영화 음향에 관한 노하우와 경험들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4월 30일(금)에는 <2차 송환> 상영 후 포용수 사운드 슈퍼바이저의 클래스가, 5월 1일(토)에는 <스윙키즈> 상영 후 김준석 음악 감독의 클래스가 진행됩니다.Lee Chang-dong이창동 감독의 삶과 영화를 돌아보는 특별전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세션 중 하나입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오아시스>를 포함한 이창동 감독 영화 8편이 상영되며,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으로 생생함을 더한 <박하사탕>이 4K 화질로 공개됩니다.Movie이번 영화제에서 감상 가능한 상영작은 총 217편입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모든 상영작을 검색해보세요.New4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신작 <심장소리>가 전 세계 최초로 전주에서 상영됩니다. <심장소리>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작에 참여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한데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보세요.Opening화려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4월 28일(목) 오후 5시부터 진행되는 개막식은 유려한 말솜씨의 장현성 배우와 유인나 배우의 사회로 막을 엽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오랜만에 문을 연 전주 돔에서 다양한 즐길거리를 갖춘 재미있는 개막식을 만들겠다고 예고했는데요. 개막식 티켓이 너무 빨리 매진돼 슬프시다고요? 개막식은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될 뿐만 아니라, 개막식 티켓이 없어도 전주 돔 외부에서 레드카펫 행사를 지켜볼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Posters2015년부터 진행된 전주국제영화제의 포스터 페스티벌이 올해도 어김없이 열립니다. 포스터 페스티벌은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를 100팀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포스터로 재해석해 전시하는 이벤트인데요. 영화제 내내 팔복예술공장 이팝나무홀에서 볼 수 있으며, 온라인 전시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Quarantine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어도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인과 관객의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주시 보건소, 호흡기 내과 전문의 등의 도움을 받아 자체 방역 자문단을 신설한 전주국제영화제는 자문단 회의 결과를 토대로 철저한 방역 계획을 수립했는데요. 즐거우면서도 안전한 축제를 위한 노력이 엿보입니다.Rights축제 기간 중 맞이하는 어린이날을 기념해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아동권리영화제 수상작인 단편영화 4편을 감상하는 특별한 자리도 마련됩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기념해 1996년작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4K 화질로 무료 상영하기도 한답니다. 부모와 아이 모두 특별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마세요.Slogan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계속된다'입니다. 팬데믹이 잠시 관객을 주춤하게 했지만, 이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Theater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18개 상영관, 7만 5천 여석의 좌석에 관객을 맞이합니다. 전주 돔을 포함해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CGV전주고사, 씨네Q, 그리고 카페 비오브에서 상영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Ukraine day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영화제 이튿날인 4월 30일(금)을 우크라이나 데이로 지정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데이에는 세르히 로즈니챠 감독의 <미스터 란즈베르기스>, 카테리나 호르노스타이 감독의 <스톱-젬리아> 등 우크라이나 감독의 작품을 연이어 상영합니다.Virtual영화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실천적 논의를 위해 2021년 출범한 전주컨퍼런스가 올해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을 통칭하는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을 주제로 개최됩니다. 전주컨퍼런스 2022는 5월 2일부터 이틀간 라한호텔 전주 온고을홀에서 펼쳐집니다.World cinema전주국제영화제의 중추라고 불리는 '월드시네마' 세션에서는 총 23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게시한 글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메디 메클라’의 실화를 소재로 한 <아르튀르 람보>부터 이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아낸 <길 위의 가족>까지, 전 세계 각국의 매력적인 영화를 전주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X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다고 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코로나19 예방 수칙과 상영관 운영 수칙을 철저히 따르며 매너 있게 축제를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꼭 지켜야 할 사항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항을 꼼꼼히 확인해보세요.Yeon Sang-ho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영화인 한 명이 직접 상영작을 고르는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세션. 올해의 프로그래머는 연상호 감독입니다. <부산행>, <돼지의 왕> 등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를 넘나들며 관객을 사로잡은 연상호 감독은 요즘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장르 영화를 3편을 상영작으로 골랐습니다.Zombie치명적인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국회의사당에서 나 홀로 살아남은 경비원의 이야기를 담은 <겟 더 헬 아웃>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됩니다. 이 작품을 포함해 <그레타 툰베리>,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애플> 등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7편의 작품은 넷플릭스, 왓챠 등의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OTT)에서 지금 바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비록 전주국제영화제의 현장감은 즐길 수 없겠지만, 상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을 방 안에서 감상하는 재미를 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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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몰락과 사소한 구원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대 받아 작성한 영화 시사회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 주의
누구나 한번쯤은 처절한 비참을 경험한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비극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밑바닥이 없는 것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우울한 날들을. 나 자신의 다른 이름이 패배자, 실패자인 것만 같은 그런 순간들. 그 내용은 제각기 다를 테지만, 어쨌든 '밑바닥을 찍는다'는 것은 꽤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몰락'의 한복판에 있을 때, 우울의 파도는 사람을 집어 삼키고 그는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더 나아질 길은 요원할 것만 같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 비참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는 않는다. 밀물이 왔다면 썰물이 가는 법이며 고통스러운 우울이 지난 길에는 환희가 싹트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이 우리에게 짊어지우는 과업들은 적지 않은 경우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설령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버거운 비극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서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게 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응달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도움을 받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설 힘이 있음을 속삭여 줄, 아주 사소한 구원자로부터.
1. 어느 평범한 몰락
영화 <레슬리에게>의 주인공, 레슬리는 복권 당첨자다. 한순간에 일확천금을 얻었고 친구들과 메스컴은 이제 '팔자 펼' 일만 남았다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레슬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막대한 돈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게를 내겠다는 소박한 꿈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짜릿한 행복 뿐일 것이라고.
그러나 손쉽게 얻은 돈은 손쉽게 떠났다. 술과 도박이 그를 장악했고, 그 손쉬운 쾌락을 쫒는 사이, 레슬리는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들마저 저버리고 말았다. 촌구석에서 난 '행운아'는 상종하기 힘든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2. 구제 불능 알콜 중독자의 방랑
레슬리는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사람도, 그 자신을 지탱하는 어떤 힘조차도. 현실은 비참했다. 술을 마시면 잠시라도 그 비참을 잊었고, 레슬리는 더더욱 그것에 매달렸다. 그것이 그를 망가트린다는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을테지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 지 오래였으리라. 술을 끊겠다는 숱한 다짐은 그 자신의 충동으로 인해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갈 곳이 없고, 잘 곳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들과의 추억을 담은 작은 분홍 가방 하나 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장성한 아들을 찾지만,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기여코 고향으로 돌려보내진다. 그의 행운과 불행이 싹텄던 가장 원점으로.
3. 갈 곳 잃은 자를 구한 사소한 관심
고향 사람들은 레슬리의 몰락을 모두 알았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잘나가는 젊은이였는지를 아는 만큼,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벗이요, 엄마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소위 '막나가는' 알콜 중독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 뿐이다. 레슬리도 나아지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정신 차리고 보면 술을 사 마셨다. 얼큰하게 취하고 나면 그가 조금이나마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쳇바퀴 돌듯이.
고향 땅에서조차 부랑자 신세를 면치 못한 레슬리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면식도 없던 남자, 스위니였다. 친구와 함께 변변찮은 모텔을 운영하던 그는 충동적으로 레슬리에게 제안하고 만다.
"좋아요, 당신을 채용하겠어요. 일당은 7달러, 숙식도 제공하는 조건으로요."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알콜 중독자에 부랑자이기까지 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채용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스위니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레슬리를 채용했다. 차마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어쩌면 그건, 스위니가 '자기도 모르게' 레슬리의 결함 너머에 있는 어떤 진실됨을 발견하고 말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 레슬리의 홀로서기
알콜 중독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타인의 호의에만 기대는 습관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슬리는 온갖 실수와 만행을 반복했다. 스위니는 그런 여자를 채용한 것을 수없이 후회했다. 둘 사이는 삐걱거렸다. 스위니의 구원은 얼마든지 무색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레슬리는 변하고자 했고 스위니는 그런 그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었다. 레슬리는 아들 제임스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연료 삼아 오래도록 벗했던 술과 결별하고 소위 '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여전히 그를 둘러싼 시선들은 따갑고 매섭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그 지독스러운 술에 다시금 입 댈 뻔 했지만, 레슬리는 그럼에도 그 가시밭길을 나아갔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들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그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는 스위니의 평범한 관심이었다. 레슬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구했다.
레슬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글쎄,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이제 막 지옥으로부터 걸어나왔고 인생에는 언제나 부침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레슬리는 그것을 이겨낼 것만 같다. 그는 이제,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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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에게>는 마냥 우울하게 치달을 수도 있는 '알콜 중독자'의 이야기를 때론 덤덤하게, 때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주 입체적이다. 완전한 악역도, 완전한 선역도 없는 그 세계는 우리의 세계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인물들은 선을 베풀면서도 고뇌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사이 그들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어떤 형식으로든 변한다. 카메라는 그런 사람들의 성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누군가가 나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평범한 관심의 한 조각과, 그 관심으로 말미암아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 용기란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재기는 더욱 눈부시다는 것. 이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교훈일 것이다.
혹시라도 당신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면, 이 사실을 꼭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다. 눈가리개를 풀고 당신 안을 들여다보라.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그 안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걸 싹틔우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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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 표류기> - ‘고립된 세상에서 희망 찾기’
김씨 표류기 (Castaway On The Moon, 2009)
개봉일 : 2009.05.14
감독 : 이해준
출연 : 정재영, 정려원, 박영서, 구교환
‘고립된 세상에서 희망 찾기’
세상을 살아가는 건 만만치 않다. 어른은 사회에서 어른 1인분의 양을 해내야 한다. 눈에 띄지 않는 격식 있거나 평범한 옷을 차려입고, 순식간에 불어나는 여러 빚들을 모르는체하며 바쁜 발걸음의 사람들 사이에 섞일 것. 이게 바로 어른의 일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인생은 외롭고, 벅차고, 두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왜 이리 작고 하찮은 건지, 아무리 열심히 팔을 휘저어봐도 하루하루 더 깊은 물속으로 잠길 뿐이다. 차라리 고립되거나 사라져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얼마 남지 않은 용기마저 쥐어짜기 힘들 때가 있다.
<김씨 표류기>는 이런 어른의 삶을 살다가 지친 나머지 끝내 자살을 선택한 주인공이 운수 좋게도 살아남아 도심 속 무인도(밤섬)에 고립되어 표류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포스터와 분위기가 다른 영화’, ‘포스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한 영화.’라는 주제로 이야기할 때 <지구를 지켜라>와 함께 항상 언급되는, 한국판 <캐스트 어웨이>라는 이 영화. 이러한 소문을 듣기 전인 학생 시절, 포스터 때문에 코미디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내용과 분위기가 퍽 달라 살짝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모가디슈>를 보고 구교환 배우님에게 더 강하게 스며드는 바람에.. 그의 주연작 외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던 필모그래피를 찾던 중 딱! 운명적으로 <김씨 표류기>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번 봐야지 싶었던 영화인데, 거기에 그의 뽀짝한 시절을 아주 잠깐이나마 볼 수 있는 영화라니. 오늘은 이거다 싶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현재에 만족한다고 해서 그것이 탄탄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김씨 표류기>의 주인공 김씨들이 마주한 현실도 딱 그렇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 김씨는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가 부도나고, 당장 살아가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새로운 희망과 돈을 끌어썼지만 남는 건 곱절로 불어난 빚과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뭐 했냐”는 사회의 질책뿐이다. 김씨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한강으로 뛰어드는데 자살시도마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화려한 도시 서울의 한가운데, 시간이 아주 느긋하게 흐르고 있는 유일한 대자연이자 또 다른 세계의 품에 안긴 김씨는 ‘어차피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죽는 것은 미뤄두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다. 단, 원래 살던 세계에서가 아닌 서울의 룰을 벗어난 무인도라는, 그를 쫓는 것들이 없는 세계에서 말이다.
또 다른 주인공 여자 김씨는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 속에서 홀로 멈춘 시간을 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닌 지나간 오늘을 착실히 삭제해가는 인물이다. 쓰레기가 가득한 어두운 방안, 그것도 모자라 그 방 안에서 가장 비좁은 옷장 안에서 어떻게든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뽁뽁이를 가득 채워 넣고 겨우겨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자 김씨. 그는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고 스스로 고립된 세상을 만들게 된다. 인터넷 너머로만 소통을 이어가며 형체 없는 삶을 계획해가던 그녀는 어느 날 발견하게 된 남자 김씨의 흔적을 보고 조금씩 커튼을 열어간다. 무인도에서,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보이지 않는 타인의 온기와 날카로운 외로움을 느끼며 또 새로운 하루를 표류해가는 김씨 둘의 이야기가 가끔은 발랄하게, 가끔은 잔잔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김씨 표류기 시놉시스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한강의 밤섬에 불시착한 남자. 죽는 것도 쉽지 않자 일단 섬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모래사장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고 무인도 야생의 삶도 살아볼 만하다고 느낄 무렵.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을 발견하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이 온 지구이자 세상인 여자. 홈피 관리, 하루 만보 달리기… 그녀만의 생활리듬도 있다. 유일한 취미인 달 사진 찍기에 열중하던 어느 날. 저 멀리 한강의 섬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하는 그녀. 3년 만에 자신의 방을 벗어나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7천만 원이 2억으로 늘어나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대부업 앞에서 삶의 희망을 잃은 남자 김씨(이하 김승근)는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으로 향한다. 승근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엔 ‘희망’이 없다.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쳐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 무인도에 떨어졌다며 구조 전화를 걸어도 119 구급 대원과 수정이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고, 쓸모없는 상담전화는 그의 마지막 생명줄인 휴대폰 배터리를 끝까지 털어먹는다. 다급해 죽겠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는 상담사의 목소리와 전기도 없는데 자비 없이 밥을 달라며 졸라대는 휴대폰 음성이 야속하기만 하다.
승근은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원래 살던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이 공간에서 다시 살아남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야속한 도시를 향해 “진짜로 안 들리냐!!”며 소리치지만 도시는 여전히 승근에게 관심이 없다. 승근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한다. 그는 혼자였다. 여자 김씨(이하 김정연)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두운 밤, 섬에서 소리치고 있는 승근을 바라보고 있는 단 한 사람, 정연. 그 또한 사회에서 고립되어 자기 방안에만 갇혀있는 인물이다. 왕따에 의한 트라우마로 세상에 나설 용기를 잃은 그는 미니홈피를 만들어 나만의 가짜 세상을 만든다. 미니홈피 안에 있는 건 당연하게도 모두 가짜. 용기도 희망도 없는 어두운 방안이지만 정연은 아직도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좁은 옷장 안으로 들어가 뽁뽁이를 잔뜩 휘감고 잠에든다. 나대신 충격을 흡수해 줄, 나를 감싸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걸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두터운 외로움과 두려움은 쉽게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바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승근은 버려진 오리 배를 줍고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며 섬 생활을 나름대로 잘 버텨나간다. 정연은 승근을 보며 동질감과 흥미를 느낀다. 정연은 승근을 외계인 같다고 말한다. 정말 단어의 뜻대로 ‘외계인’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모두가 바쁜 도시에서 특이하게도 혼자 멈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외계인’에는 정연 본인도 포함된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두 사람은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희망 따윈 바라지 않았던 승근은 짜파게티 분말 스프와 봉지에 있는 희망이란 단어를 보며 다시 희망과 미래(짜파게티를 먹을..)를 꿈꿔보는데, 시간이 흘러 도착한 정연의 편지와 밭에 난 작은 새싹은 승근에게 새로운 동력이 된다.
HELLO- 습관적으로 외쳤던 이 인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느끼던 외로움의 절반, 아니 8-90%쯤이 날아간 기분이다. 무겁게 비치진 않지만 승근은 외로운 사람이다. 한강에 뛰어들기 전에는 따스하게 그의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고 섬에 들어와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허수아비와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랜다.
정연의 경우엔 과거에 동급생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의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어 사진을 도용하고, 가짜 세계를 꾸미면서 다른 이들이 달아주는 댓글을 통해 외로움과 의미 없는 오늘 하루를 지워간다. 작은 세계 안에 갇혀 두터운 외로움을 느끼던 두 김씨는 서로의 존재를 벗 삼아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낸다.
김씨들에게 서로의 존재와 짜파게티는 ‘희망’이다. 승근은 짜파게티를 먹겠다는 희망을 갖고 밭을 가꾸고 섬에서의 생활을 더욱 열정적으로 꾸려나간다. 정연은 승근에게 쉽게 얻을 수 있는 희망인 짜장면을 배달하지만 승근은 그를 거절하고 끝내 자신의 손으로 이뤄낸 희망을 한 그릇 완성한다. 승근의 희망인 짜장면을 되돌려받은 정연은 그가 보내온 거대한 희망 한 그릇을 삼키며 옷장에서 벗어나 방바닥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다.
“요만큼도 허락이 안 되는 거야?”
현실은 이들에게 왜 이렇게 매정한걸까. 승근이 짜장면 한 그릇을 완성하고 정연이 옥수수를 키우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자마자 그들의 세상은 다시 무너진다. 정연의 미니홈피는 거짓인 게 탄로 나고 승근의 섬은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된다. 홍수가 끝나고 한강 정화작업을 하러 온 공익 요원들은 승근을 노숙자로 보고 그를 섬에서 쫓아내려 한다. 처음 내 손으로 만든 나의 세상이 전부 쓸려내려가고 이렇게 허무한 현실이 다가온다.
사실 승근은 자신이 무인도에 완전하게 고립되었다고, 뭘 해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분리되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보트만 한번 타면 접근할 수 있는 도시와 가까운 섬. 매일같이 지나가는 유람선에 매번 손을 흔들거나 불을 피웠다면 반년쯤 되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발견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짜장면 배달원과 함께 오리 배를 타고 나갈 수도 있었다. (매일 잠을 자던 승근의 오리배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유람선을 피했고, 반년이 되는 시간 동안 섬을 탈출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와 못한다 그 중간 어딘가에 걸쳐있다. 나가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승근은 자신을 끌어내려는 공익 요원들에게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라고 애원한다. 그에겐 아무도 없는 외롭고 불편한 섬 생활보다 다시 도시 속에서 살아갈 팍팍한 삶이 더 두렵다.
“1년에 2번,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내 세상을 만나는 시간.”
섬에서는 짜장면과 가끔씩 도착하는 누군가의 편지가 희망이었는데, 섬을 벗어나고 나니 승근이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죽기’뿐이다. 그는 흙이 가득한 지갑을 버스 단말기에 대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고 확실하게 죽기 위해 63빌딩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뒤로 정연이 따라 달린다. 타이밍 좋게 울린 민방위 훈련 경보 덕분에 두 김씨를 서로 잘 알지 못했던 희망과 만나게 된다.
정연은 1년에 2번 있는 민방위 훈련이 온전한 ‘내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멈춘 시간을 살아가는 그 순간. 내가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순간. 정연은 봄에 만난 내 세상에 들어온 승근을 가을에 만난 내 세상에서 다시 마주하고, 이번엔 마냥 지켜보는 게 아닌 용기를 내서 악수를 청한다.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멈춘 순간, 작은 세계에 갇혀있던 김씨 둘이 눈을 맞춘다. 그리고 훈련 경보가 끝나고 다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멈춘 시간 속, 고립된 나만의 세상에서 홀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순간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외로움과 불안감 속에서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잃어가고 있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용기를 내 세상으로 나온 정연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My Name Is 김정연.” 그리고 묻는다. “Who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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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이 주는 쾌감
케이팝이 주는 쾌감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영화 리뷰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쾌감이 느껴지는 순간
이런 영화를 기다렸다. 재밌고, 멋지고, 훌륭하다. 한국의 문화가 이처럼 멋지게 스며든 케이팝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다. 과거 무당에서부터 한국의 대중음악 역사, 그리고 케이팝을 엮어 만들어낸 세계관과 이를 스타일리시하게 표현한 연출은 한국인으로서 보면 쾌감이 장난 아니다. 처음 이름만 듣고 걱정하고, 유치할 거라 생각한 그 순간이 부끄럽다. 영화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재밌고, 완성도 있게 이런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처음이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도 한국이 담겨 있다. 한국의 정체성을 지닌 배우와 성우들을 활용한 선택은 이 영화를 더 소중하게 만들었다. 이런 방향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악귀라도 되어 오래오래 보고 싶다.
완성도 높은 노래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 시작 후 노래가 나오는 순간 감탄했다. "명색의 케이팝 애니메이션인데 노래가 별로면 어쩌지" 하던 고민은 다 날아갔다. 그 빈 공간은 영화가 끝나면 플레이리스트에 노래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단순히 좋다를 넘어서 적절했다. 헌트릭스의 케이팝 그룹으로서의 이미지와 혼문을 지키는 전사로서의 이미지가 담긴 노래는 파워풀하고 강한 느낌이었다. 그런 노래에서는 3D 애니메이션과 연출이 합쳐지면서 K/DA가 생각이 났다. 유사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노래로 그룹의 컨셉과 방향성을 알 수 있게 만들 정도로 노래를 잘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골든은 정말 정점에 선 아이돌이 낼만한 노래였다. 가사마저 그랬다. 사자보이즈도 마찬가지다 진짜로 막 데뷔해서 상큼한 노래를 하는 신인 남자 아이돌이 할 만한 노래를 가져왔다. 단순히 좋은 노래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서사와 캐릭터를 고려한 선택이라는 점이 완성도를 높였다.
이 영화의 메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3D 애니메이션은 한눈에 봐도 좋다. 아쉬움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 캐릭터의 모션과 연출 그리고 옷이나 소품 하나까지 섬세하고, 멋지다. 그리고 한국적인 고증이 깨알같이 들어가 있어서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친숙하고 소중한 요소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멋지게 나타나는 걸 보는 것만으로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걸 말해보자면 헌트릭스의 의상과 작호도를 모티브로 한 더피와 서씨였다. 헌트릭스의 의상은 정말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연말 무대에서 입는 한복의 상처럼 만들어졌다. 한복을 살리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더해 아이돌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노리개와 같은 디테일이 재밌었다. 멤버 캐릭터에 따라 의상을 조금씩 다르게 만든 부분도 좋았다. 작호도를 모티브로 한 더피와 서씨는 영화의 마스코트처럼 활용되면서 한국 판타지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특히 더피는 작호도에서 튀어나온듯한 모습으로 귀엽고 조금 바보 같기도 해 안 좋을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이렇게 한국적인 것을 멋있고 귀엽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감탄했다.
팬을 얕보지 말기
케이팝을 주제로 한 작품의 고질적인 문제는 케이팝 문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작품을 만드니 팬들에게는 화만 불러올 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케이팝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알고 만들었다. 바로 '팬'이다. 케이팝 문화를 소비하는 것은 케이팝 가수가 아니다. 케이팝 팬이 소비한다. 그런데 정작 케이팝을 내세운 작품에서는 가수가 주인공이 그 주인공들이 상당히 팬에 무심하다. 심지어 무심하다 못해 민폐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연출을 어떤 팬이 좋다고 보겠는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팬'이다. 혼문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헌트릭스는 언제나 팬을 소중히 여긴다. 최선을 다하고, 최고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주인공들의 모습은 케이팝 문화를 소비하는 팬들에게 호감으로 느껴졌고, 뭘 좀 아는 영화로 만들었다. 그만큼 케이팝 문화의 중심인 X에서 언급이 많은 상황이라 생각한다.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이 영화의 케이팝과 달라 웃긴 부분들이 언급되며, 소비되었다. '팬'이 중요한 점을 적용하니 좀 다른 부분은 비호감이기 보다 소소하게 재밌는 포인트로 작용된 것이다. 공동 팬사인회 장면이 특히 화제였다. ( 제작 비하인드에서 밝혀진 점은 이 부분이 원래 아이돌 육상 대회를 참고해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제작사가 이해하지 못해 이런 공동 팬사인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아쉬운 스토리
너무나 재밌는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스토리다. 짧은 시간으로 많은 내용을 보여줘야 했던 건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캐릭터들의 스토리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반부로 들어갈수록 개연성이 부족하고, 급하다. 세계관 설명과 헌트릭스의 캐릭터, 루미의 고민이 나타나는 초반부는 흥미로웠다. 거기에 사자보이즈의 등장까지 코믹하고 강력했다. 그런데 루미의 흔들림과 진우의 과거사와 엮인 문제들이 나타나다가 둘이 연결되는 이야기가 너무 압축되었다. 루미와 진우가 애틋해지는 과정이 다소 당황스럽다. 언제 이렇게까지 애틋해진 건지 의문이 든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고 재밌게 보았지만 아쉬웠다. 진우의 과거사는 회상으로만 짧게 나타나고, 악귀와의 계약도 짧게 나타나서 아까웠다. 그 외에도 사자보이즈 멤버들이 거의 일반 악귀들이랑 차이가 안날 정도로 이야기를 안 한 점, 극 후반부 진우의 선택 전에 이야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점, 더피와 서씨의 이야기 등 없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재밌다는 감각
스토리에서 이렇게나 아쉬운 점이 많은데 재밌었다. 한국 문화를 활용한 세계관과 케이팝이라는 문화를 섞어서 완성도 높은 노래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쾌감이 그 빈틈을 다 채운다.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누가 재밌나고 물어보면 재밌으니까 꼭 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함께 보는 걸 추천한다.
한 줄 코멘트
한국, 케이팝, 음악, 애니메이션
이 모든 것들이 주는 상쾌한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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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의 환희와 청춘의 질감에 관한 인상적인 스케치
술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가 난다. 땀 냄새가 난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 냄새가 난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정액 냄새도 문득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다. 시끄럽다. 클럽 음악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내내 쿵쾅거린다. 싸우는 소리가 난다. 불평하는 소리가 난다. 서로를 원망하는 소리가 난다. 홀로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가 난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난다. 저주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 청춘의 냄새, 청춘의 소리다. 이 지독한 냄새와 소리 속에서, 여성 청년 비키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
2001년의 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비키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 동거 중이다. 하오하오는 ‘예술적 퇴폐’를 지향하는 남성이 갖고 있는 쓰레기 같은 전형성을 고루 갖추었다. 돈을 벌지 않고 여성의 노동에 의존한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 경찰 조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직접 노동하는 법은 없다. 하오하오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의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비키를 의심한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망상이다. 자신이 노동하면 비키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하오하오는 이런 가능성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하오하오는 클럽 음악을 만들고 친구들과 술 마실 때만 생기가 돈다. 가끔 욕구가 일어 다짜고짜 비키에게 관계를 요구할 때만 다정해진다. 자기 신세의 비참함에 심취해 마약을 하고 이를 말리는 비키를 경멸한다. 그렇다. 하오하오는 자신의 자발적, 의도적 비루함을 예술가의 고난으로 오독한다. 비키의 몸과 돌봄, 노동에 극단적으로 기생하면서도 그녀에게 군림하려 든다. 치가 떨릴 만큼 익숙한 인물이다(이상의 〈날개〉를 떠올려보라).
소란 끝에 비키는 하오하오를 떨쳐낸다. 그러고는 클럽 관리자 격인 잭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잭은 책임감이 있고 점잖다. 하오하오가 갖추지 못한 것을 가졌다. 그는 비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떠난다. 비키는 그가 남긴 흔적을 쫓아 일본에 따라간다. 잭은 그녀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었고, 편지를 남겼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비키는 끝내 잭의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 채 혼자 남는다. 잭에게는 비키와의 관계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지의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두 남자가 떠나간 후, 비키는 그제야 홀로 선다.
비키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도대체 왜 저런 남자들이랑 붙어 있냐’라는 책망은 그 욕망의 소유자도 적당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우리 모두는 종종 알 수 없는 동기로 이해 못 할 선택을 내린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혼란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다. 욕망과 충동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 후과를 알맞게 갈무리하는 것이 성인의 자격이다.
불쾌한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 찬 비키의 2001년은 지극한 성장통의 시기였다. 하오하오는 비키가 자신을 떠나려 할 때마다 애원하며 그녀를 붙든다. 그는 자신이 쓰레기인 것을 안다. 만에 하나 ‘예술가’로 성공하면 미련 없이 비키를 버리겠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도래하기까지는 기생할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자신을 품어줄 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하오하오는 그래서 비키에게 더더욱 매달린다. 비키는 이를 관계의 특별함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하오하오의 곁에 머물렀다. 잭은 상대적으로 비키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녀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비키는 잭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닌 친밀한 타자일 뿐이다.
세상의 떠들썩한 환호와 함께 맞이한 새로운 밀레니엄은 비키에게 지리멸렬한 현실의 연장에 불과했다. 오히려 모두가 희망적인 미래만을 말했기에 비키가 살아가는 현재의 형편없음이 더욱 극화되었다. 2001년 겨울, 비키는 하오하오와 잭을 거친 후에야 자신만의 뒤늦은 밀레니엄을 마주한다.
영화는 내내 명멸하듯 깜빡거리는 불빛과 뿌옇게 번진 빛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카메라에 담긴 대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것을 뒤엉켜 보이게 하는 이 이미지들은 청춘의 열악한 삶을 환기하는 시청각적, 후각적 자극과 맞물려 비키가 살아가는 현실의 혼탁함을 구체화한다. 비키가 문제적 남성들을 떨쳐내고 하얗게 눈 덮인 일본의 한 마을에서 마침내 혼자가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 쌓인 하얀 눈은 어둡고 음습한 방의 뿌옇고 경계가 불분명한 혼탁한 이미지들을 단번에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적 장소에서의 이탈은 종종 시공간의 감각을 새로이 배열하여 기존의 감각을 성찰할 자원이 되어주고는 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두 남자에게 연루되어 고통받던 비키는 이 극명한 빛의 대비와 일상적 시공간에서의 이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할 계기를 마련한다. 두 남자로 상징되는 벗어날 수 없는 폭력적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밀레니엄의 환희에 뒤늦게나마 동참하는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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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 리뷰
- 다니엘 콴 &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없는 시간을 쥐어짜며 두 차례나 볼 만큼 좋았고, 처음 울었던 것과 똑같은 부분에서 눈물을 흘린 영화인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추천하지 못했다. 물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곳곳에 등장한 매니악한 개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 엄청난 영화를 고작 몇 마디의 말로 응축시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더글라스 애덤스 식으로 요약하자면 '42'에 대한 영화라고 하겠지만.). 플롯을 설명하려 시도할 때마다 나는 항상 대단한 벽에 부딪혔다. 이 영화는 선형적이지도, 순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끝나지 않는 하나의 그물망과 같은 영화이므로. 설명하자니 고난 그 자체이지만, 도무지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나는 오늘 감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 콴(양자경)은 일상에 지친 중년 여성이다. 남편 웨이먼드 콴(키 호이 콴)은 다정다감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은 영 떨어지고, 하나뿐인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대학교를 중퇴한 후 동성 연인 베키(탤리 메델)와 함께 집을 나가 산다. 에블린의 아버지(제임스 홍)는 자신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에블린을 조금쯤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이는데, 콴 부부는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며 능력을 증명하긴커녕 세무조사로 인해 운영하는 코인세탁소마저 가압류 명령을 받을지도 모를 만큼 위태롭다. 설령 실망으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에블린 자신이 거듭 선택하고 판단한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녹록지 않은 일상 속에서 피어날 듯 말 듯 한 상상력조차 에블린은 스스로 차단하며 삶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다른 우주를 살던 알파 웨이먼드가 나타나 이렇게 속삭인 것이다. 거대한 악, 조부 투파키를 막아야만 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이미지 출처: IMDb가까운 사이가 친밀한 사이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건 이미 영화 <레이디 버드(2017)>가 짚었더랬다. 사랑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색한 모녀, 그저 딸이 최고의 모습으로 살길 바라는 엄마 마리온(로리 멧칼프)을 떠올려보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에블린 역시 비슷한(그리고 한국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캐릭터다. 메인 우주 속 에블린은 딸의 동성 연인을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소개하지 않고, 이미 상처 입어 뛰쳐나가는 딸에게 살쪘다는 말을 거침없이 꺼내는 부류의 엄마다. 그렇다면 에블린이 성공한 과학자였던 알파 우주에선 어땠을까? 그는 다중 우주를 넘나들 방법을 개발하던 도중 딸 조이의 정신을 산산이 조각낸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딸은 그렇게 모든 장소에, 모든 것을 경험하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 ‘조부 투파키’가 되었다. 그러니 사건의 진원지는 알파 우주가 틀림없다. 그런데 영화는 에블린이 성공한 과학자였던 알파 우주를 주요 무대로 삼지도 않고, 조부 투파키의 역사를 구구절절 풀지도 않는다. 알파 우주는 순전히 뒷전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누군가의 파멸을 낱낱이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파멸처럼 보이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기실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세계의 조이를 조부 투파키가 깃들 수 있는 그릇으로 보지 않고 제 딸로만 바라보는 에블린이 있는 한 낙관적인 희망은 유효하다. 지금까지 에블린이 딸을 사랑한 방식이 지극히도 좁은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 조이를 계속 상처입혔을지라도.흥미로운 건 알파 웨이먼드가 묘사한 조부 투파키와 실제 조부 투파키 사이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다. 알파 웨이먼드는 조부가 목적도 욕망도 없이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부 투파키가 행하고자 한 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악의에 가득 찬 시도가 아니었다. 조부 투파키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에블린을 찾고 있다고. 그렇다. 다중 우주라는 특수한 무대가 설정되어 있지만 에블린과 조이는 지상에 발붙인 다른 흔한 모녀와 같이, 정체성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의 흉터에서 발을 구르는 퍽 평범한 사람들이었다.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야 했다지만, 에블린과 조이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세대는 물론이요, 사용하는 모국어나 성장한 문화적 환경 역시 판이하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에블린과 조이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두 사람은 부모 앞에서 실패한 딸이라는 속성을 공유하고, 이 씨앗은 두 사람의 심연에 항시 똬리를 틀고 있다. 생각해보자. 알파 우주에서 조이가 분열된 까닭은 에블린이 진행한 실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의 인정욕구를 간절히 바랐던 조이의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나. 하지만 두 사람의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 알파 에블린은 목숨을 잃고 알파 조이는 조부 투파키로 각성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을 뿐 모녀 사이의 교착상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러 우주를 전전하지만 조부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실패한다. 자신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음에도 상대는 변하지 않고 자신은 거부당한다는 결과패만 바라보게 된다. 실망은 축적되고 절망은 베이글을 통한 자기 파멸로 체현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그러나, 조부는 여전히 에블린에게로 향한다. 어째서일까.이미지 출처: NY Times여기서 잠시 조부가 구현해낸 새카만 베이글에 관해 이야기 해 보자. 사실 베이글이 아니라 도넛이었어도 상관없다. 그 형태가 어떻든 조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변함없을 테니. 모든 것을 올려놓자 새카맣게 타버렸다는 베이글은 새하얗게 스러진 공허를 둘러싼 검은 한계이다. 조부가 외치는 것은 에블린과 함께 자신이 존속함으로써 계속되는 무의미한 세계를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기대, 새카맣게 타버린 가능성이자 한계를 없애달라는 절박한 요청이었을 것이다.박종천(2020)은 논문을 통해 현상적 불화의 한계에 갇힌 개인이 비가시적인 사랑과 배려를 통해 구원받는 영화적 양상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는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조이-에블린의 관계가 제법 유사해 보인다. 방금 언급한 조부의 베이글은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연출되는데, 이는 알파 우주의 조이가 조부 투파키가 되던 순간 잃어버린 눈을 대체하는 듯하다. 하지만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고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선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조이의 여정은 자신이 잃어버린 남은 눈을 찾아 다니는 것일 테다. 영화는 조이가 잃어버린 다른 하나의 눈을 제시한다. 바로 에블린이 이마에 붙인 인형 눈이 그 해답이다. 에블린이 갖게 된 제3의 눈은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므로.알파 웨이먼드는 여러 우주를 넘나들고, 이 우주의 에블린을 각성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유능한 남자지만 조이를 이해하는 데엔 철저히 실패했었다. 하지만 여러 실망과 실패가 이끌었다는 우주의 웨이먼드는 조이를 아낌없이 포용한다. 그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Be Kind. 유약해 보였던 웨이먼드의 굳건한 강령은 에블린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우주를 넘나드는 싸움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던 교착상태는 웨이먼드 식의 다정함으로 무너진다(사실 이 영화가 불교적 연기론을 상당수 차용한 듯 보이기에 웨이먼드의 대사는 자비를 보이라는 말에 가까우리라 보인다). 갈등이 커지기 직전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추자 세무관인 디어드리 보베어드라(제이미 리 커티스)를 포함한 많은 문제가 싱거우리만큼 부드럽게 해결된다.게다가 Be Kind라는 강령은 비단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충분히 적용된다. 무수한 우주를 유영한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비를 실천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이는 너무도 어린 청년인 조이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이 남긴 자산이다-. 자신이 열망한 이상향에선 오히려 세탁소를 운영하며 징그러울만큼 아등바등한 삶을 꿈꾸기도 하고, 시력을 잃는 끔찍한 사고는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등,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에블린의 시야가 확장되자 그가 평생 품고 살았던 한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윽고 확장된 ‘모든 곳의 에블린이 가진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으로 집중된다. 놀라우리만큼 파괴적인 가능성을 찰나에 집중시키자 에블린이 발견하는 건 단 한 가지다. 가장 순수한 감정. 그러하므로, 한 줌의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길 거라는 에블린의 고백은 시간을 초월하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이런 제목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너와 여기서, 언제나.이미지 출처: Daily Sabah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가 집필한 책 제목,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처럼, 친절은 우주를 막론하고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을 꺼낸 건 우주를 한 번도 건넌 적 없는 웨이먼드였다. 그러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가 얼마나 낙관적인 영화인지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된다. 각자가 가진 단일한 정체성을 유동적인 정체성으로 변환하는 힘, 피를 나눈 모녀관계라 한들 완벽과 거리가 먼 미완의 관계로 남을 수 있음을 성숙한 자세로 선언하는 힘, 전 우주를 구하는 힘은 버스 점프를 익히지 못한 당신 역시 실천이 가능한 '친절, 다정, 자비, 그리고 공감'이란 테제다. 설령 우스꽝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해도(핫도그 손을 가진 인류 진화 단계에 들어선 건 아닐 테니!)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가치이지 않은가. 아주, 아주 약간의 따뜻함만 있다면, 문제투성이인 삶조차 충분히 긍정함으로써 모두는 우주를 나를 그리고 당신을 구할 수 있다.<참고문헌>박종천 "불화와 화해의 영화적 변주곡" 국학연구 41 pp.493-535 (2020) : 493.양대종 "허무주의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 - 니체 철학을 중심으로" 철학탐구 35 pp.131-161 (2014) :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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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스토리 전개 / 인간들은 계획이 다 있구나 / 짝 시저 프록시무스 등장 / 새로운 리더 노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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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메인 예고편
- 시를 엮은 책을 만드는 유쾌하고 솔직한 ‘그레이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조용하고 신중한 ‘에드워드’
그리고 감정 표현이 서툰 하나뿐인 아들 ‘제이미’
성격은 다 다르지만 평범하게 29년을 함께 한 가족.
어느 날, ‘에드워드’가 아내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레이스’는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한편 멀어져가는 부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미’는
각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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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그 여자의 집 건너편 창가에 웬 소녀가 있다> 공식 예고편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자 애나. 애나에겐 매일이 똑같다. 와인에 취해 하릴없이 창문 밖의 삶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 그런 그년의 삶에도 드디어 볕 들 날이 찾아오는 걸까? 길 건녀편에 잘 생긴 남자가 귀여운 딸과 함께 이사를 왔다. 그러나 애나의 희망은 잔혹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는 살인사건. 애나는 과연 무엇을 목격한 걸까? <그 여자의 집 건너 편 창가에 웬 소녀가 있다>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