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2-11 15:36:50
중증외상센터 | 키치함으로도 가리지 못한 자조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동 각지의 전쟁 지역을 누비며 외상 경력을 쌓아 온 천재 외상 외과 전문의 '백강혁'(주지훈). 보건복지부 장관 '강명희'(김선영)는 공석이 된 한국대 외상외과 교수직에 백강혁을 추천하기로 결정한다. 취임 당시 공약도 지킬 겸, 백강혁의 능력을 활용해 정치적 입지도 넓힐 겸. 백강혁도 주저 없이 교수직을 수락한다. 자기 꿈이었던 중증외상센터를 만들어 보기 위해서.
백강혁은 항문외과 펠로우 '양재원'(추영우), 외상외과 간호사 '천장미'(하영), 마취과 레지던트 '박경원'(정쟁광)와 함께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만,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대학병원 중증외상팀은 환자를 살릴수록 적자를 늘리는 눈엣가시이니까. 백강혁의 성과가 커질수록 병원장 '최조은'(김의성), 기획조정실장 '홍재훈'(김원해), 대장항문외과장 '한유림'(윤경호)과 병원 경영진도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중증외상센터>의 두 대들보
한국 넷플릭스에는 전통 아닌 전통이 하나 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마다 히트작을 하나씩 배출한다는 것. <오징어 게임>, <수리남>, <살인자ㅇ난감> 등이 이 계보에 속한다. 물론 전통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2025년 설날에는 이 계보에 한 작품이 추가된 듯 보인다. 동명의 웹소설을 영상화한 <중증외상센터>가 예상치 못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 설 연휴에 공개된 <중증외상센터>는 그 이후로 넷플릭스 시리즈 부문 국내 1위를 유지했고, 1월 5주 차에는 비영어 TV쇼 부문 1위까지 기록했다. 철저히 한국을 배경으로 한 메디컬 드라마라는 점, 주지훈을 제외하면 두드러지는 유명 배우가 없다는 핸디캡을 극복했기에 더욱 놀라운 성과다.
<중증외상센터>가 사랑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익숙한 메디컬 드라마에 웹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불어넣었다는 것. 원작을 먼저 접한 시청자도, 드라마로 처음 접한 시청자도 만족하는 중간선을 찾은 덕분에 <중증외상센터>는 뻔하지만 키치하다. 특히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유쾌함이 눈길을 끈다. 그 뒤로 애써 숨겨둔 한국 의료계에 대한 자조 덕분에 <중증외상센터>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각인되기 때문이다.
뻔하디 뻔하다
사실 <중증외상센터>는 게으른 작품처럼 보일 여지도 충분하다. 한국 메디컬 드라마의 클리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강혁의 설정은 <태양의 후예>를 연상시킨다. 중동 지역 용병과의 인연 덕분에 손쉽게 위기를 탈출하는 전개나, 군인 못지않은 신체적 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을 보면 '유시진'(송중기)과 '강모연'(송혜교)을 하나로 합쳤을 때 백강혁이라는 인물이 탄생한 것처럼도 보인다.
주인공과 병원 경영진 간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기업 시점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경영진과 의료 관점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인의 시각 차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기에 언제나 흥미로운 대립이다. 병원이 환자 치료를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는 당위는 원론적으로 옳지만,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원이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 외의 스토리라인도 수 차례 접한 내용의 연속이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의사가 오히려 부상을 당하는 전개는 어러 메디컬 드라마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위기다. 특별한 수술 실력을 지닌 교수가 자기 뜻에 맞는 전문의나 전공의를 찾아내고, 그들을 키워나가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플롯은 <낭만닥터 김사부>,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 바 있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물론 <중증외상센터>는 익숙함에 기대기만 한 드라마가 아니다. 색다른 지점도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으로는 로맨스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백강혁은 병원 내 그 어떤 인물과도 로맨스를 펼치지 않는다. 악연에서 인연이 될 것처럼 보이던 천장미 간호사와도 철저히 동료로 남는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얼핏 애틋한 감정을 지닌 관계성을 보여주는 순간이 종종 있지만, 그들의 감정선이 로맨스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신파를 최소화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사실 백강혁이 의사가 된 계기는 눈물 가득하게 풀어낼 수 있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병원장을 보고 감동받아서 그처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하지만 드라마에서 백강혁은 신파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는다. 양재원을 외상외과로 꼬시기 위해 '휴머니즘'적으로 접근하거나, 마지막으로 병원장을 설득할 때 활용할 뿐이다.
환자들을 보여주는 방식도 기존 메디컬 드라마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중증외상센터>에서 환자는 한순간도 극을 주도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들이 새로운 지식을 배우거나 수술법을 익혀야 할 케이스 혹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역경의 기능을 맡을 뿐이다. 각 환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들의 과거사가 얼마나 불운하거나 안타까운지에 대해서 드라마는 일절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가리지 않고 강조하기
<중증외상센터>의 특징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암시하기에 더욱 흥미롭다. 웹소설을 어떻게 영상화해야 하는지 일종의 교보재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웹소설 원작을 안일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소설이나 시나리오와는 문법 자체가 다른 웹소설의 특징을 살리기보다는 기존의 틀에 맞게 각색하여 웹소설만의 분위기를 가급적 지워왔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대표적이다. 회귀물을 한국형 아침 드라마 틀에 끼워 맞춘 나머지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미래를 안다는 이점을 활용해서 회장과 대적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대신, 단순히 상속 유산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재벌 가족극의 일원으로 묘사해 버렸으니까. 장단점을 떠나서 웹소설만의 매력을 거세한 셈이다. 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기존 틀로 웹소설을 해석하다가 중심을 잃는 경우는 결코 낯설지 않다.
<중증외상센터>는 다르다. 원작의 장르적 쾌감까지도 드라마라는 매체에서 구현하려 애쓴다. 일례로 한 에피소드 안에 여러 환자와 사건을 쏟아내면서 일시정지할 틈을 안 준다. 환자가 한 번 등장하면 여러 회차에 걸쳐 그의 서사를 보여주는 기존 드라마 작법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는 대화 중심으로 사건을 간략히 서술하면서 기승전결을 짧은 분량 내에 끝내는 웹소설 작법을 드라마 작법으로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는 사례다.
웹소설에 충실해도 충분하다
이에 더해 대리만족 서사의 비중이 큰 웹소설의 특성도 놓치지 않았다. 남성 독자가 많은 웹소설은 주인공의 사회적 성공을 통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크다. 여러 이해관계가 뒤엉켜 복잡한 현실과는 달리 웹소설 속 주인공은 거의 즉각적으로 성장하고, 악역에게 복수하며, 사회적인 추앙을 시원하게 쟁취한다. 이러한 사이다 행보로부터 독자들은 즉각적인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드라마 속 백강혁은 거의 완전무결한 만화적 캐릭터다. 그는 남들이 온갖 장비를 동원해도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환자의 부상 정도를 눈과 귀만으로도 알아낸다. 민간군사기업 소속 요원들에 버금가는 신체적 능력도 지녔다. 그러다 보니 역경을 겪는 상황이 많지 않다. 혼자 힘으로도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계략을 손쉽게 타파할 수 있으니까. 그나마 드라마 말미에 화재 현장에서 당한 부상이 가장 큰 위기인 정도다.
사이다 같은 웹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톤을 영상 매체에서도 고스란히 재현해 냈기에 <중증외상센터>는 기존의 한국 메디컬 드라마와는 차별화된다. 다른 드라마, 넷플리스 오리지널 시리와는 다른 특유의 키치함이 느껴지는 지점인 셈이다. 일종의 이정표라고 할 수도 있다. 웹소설 고유의 감성과 톤을 약화하지 않고 강조하더라도 시청자를 매료할 수 있다는, 가장 대중적인 방증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쾌함 속 자조, 단맛 뒤 씁쓸함
다만 <중증외상센터>의 키치함이 마냥 달지는 않다. 단맛 다음에 찾아오는 씁쓸한 여운이 유달리 길다. 한국 사회의 현실이 유달리 쓴 탓이다. 사실 환자의 생명보다 수익을 우선시하는 병원 경영진이나 정치권을 비판하는 장면은 한국 메디컬 드라마에서 숱하게 등장했다. 세 시즌에 걸쳐서 중증외상센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호소한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한국 의료계는 여전히 그림자가 짙다. 아덴만 여명 작전을 계기로 이국종 교수가 각광받은 15여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중증외상이나 필수과 의료 현장 여건이 개선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악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강혁이라는 슈퍼 히어로를 꿈꾸는 <중증외상센터>의 유쾌함은 자조의 다른 얼굴처럼 보인다. 백마 탄 초인 외에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반어법인 셈이다.
요컨대 <중증외상센터>는 진통제다. 아픔이나 염증의 원인을 알고도 해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 굳이 들여다보는 대신 백강혁이라는 초인을 내세운 메디컬 판타지로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셈이다. 이에 더해 진통제 효력이 다하는 순간에는 환상과 현실의 간극을 극대화하면서 직설적인 비판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유쾌함 속 자조, 단맛 뒤 찾아올 씁쓸함이 곧 <중증외상센터>만의 소구력이 아닌가 싶은 이유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매체의 경계를 넘나든 키치함 가득한 메디컬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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