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2-15 15:15:10
흉터는 과연 훈장인가.
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이 글은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하게 나쁜 놈들이고, 나는 복잡하게 착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지.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냉정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글귀였다.
그리고 보통의 영화에서는 단순하게 나쁜 놈과 단순하게 착한 놈이 나와서 지지고 볶다가 어느 한쪽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지며 승부가 결정지어진다. 그 끝이 감상하는 사람의 선호도와는 다를 수는 있을지언정. 그 끝에는 언제나 확실함이 보장되어 있기에. 영화의 결말은 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세 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괴롭혔던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기회비용이라도 받아내려는 것처럼 더욱더 기다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루탈리스트의 결말에는 요즘의 우리가 선호하는 "사이다"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대체 누가 승기를 거머쥔 것인지에 대해서도 쉽사리 답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 그저 사람이, 그리고 인물이 살아온 인생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즐로 토스(에드리언 브로디) 개인의 허물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다. 하지만 타인도 복잡하게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들여다보다 보니. 단 하나의 물음만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과연 흉터라는 것은 훈장이 될 수 있을까.
예전의 나였다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흉터는 남았지만. 새 살이 돋아 났으니 그것이 살아남은 승리자의 징표이며 더 강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상처를 매번 마주해야 하는 사람의 의견 또한 그럴지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영화 속 라즐로는 그가 가진 재주 덕에 건축물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세월을 간직할 수 있다. 그 건축물을 볼 때마다 자신이 설계도를 그리던 순간부터 시작해 공사가 끝나던 생각이 나는 것은 물론. 영화에서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휘몰아쳐 생각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자, 크고 작은 상처이며 흉터이자 동시에 훈장이 될 건물의 공개 순간을 보며.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뭉텅이 속에서 조금이라도 우세한 감정은 과연 무엇일 될지. 궁금했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이제는 명민함이라는 화로의 불도 곧 꺼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을 담고 올려 세운 결과들을 보면서. 당신은 대체 어떻게 느끼고 있냐고. 그 희미하고 복잡한 미소 외에 내던지고 싶은 말은 없느냐고.
라즐로는 내가 세워야 할 건물의 주춧돌을 덩그러니 남긴 채 나를 떠났다.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이 모든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 했으나. 어째서인지 자꾸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도 나만의 건물은 완성이 될 것이다.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인생을 오롯이 담아서,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린 다음에야.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가 질문한 물음에 대한 답을. 혹은 답에 준하는 근사치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들이 훈장에 가깝기를 바란다.
그의 힘들었던 삶을 기리는 공로상 같은 훈장이 아닌. 여태껏 해온 자신의 업적을 인정하는 심플한 훈장이 되기를. 그 이외에 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훈장이길 바란다. 부디.
마치면서
어떤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개인 SNS에 올라오는 "끝장 해석" 류의 콘텐츠를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물론 맞는 방향이나 해석이 있기는 하겠지만. 감상의 영역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결국 개인이라는 렌즈를 통해 관찰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무언가와 결합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될 테니까.
두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만큼 무자비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무수히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어떤 부분을 붙잡고 늘어져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살까 말까.
2. 말린 고구마 친구가 줬는데 혼자 1톤 먹을 기세
3. 청소하기 싫다.
#브루탈리스트 #최신영화 #영화리뷰 #에드리언브로디 #영화리뷰어 #munalogi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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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 진짜 바다 괴물을 찾아가는 성장담 <루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다 밖 세상을 궁금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바다괴물 소년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우연히 만난 친구 ‘알베르토(잭 딜런 그레이저)’를 따라 물 밖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인간세상 전문가를 자칭하는 알베르토에게 걷는 법 등을 배우며 이탈리아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을 구경하는 루카는 잔뜩 흥분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물에 닿아 인간의 모습에서 바다괴물로 돌아갈까 걱정하며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러던 중 새로운 친구 ‘줄리아(엠마 버만)’를 만나 수영, 사이클, 파스타 빨리 먹기 3종 대회에 참가하게 된 루카와 알베르토. 그들은 우승 상금으로 꿈에서도 바라던 스쿠터를 사서 자유롭게 멀리 여행할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루카>에서는 여러 영화들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당장 루카가 지상 마을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장면이나 지상과 수중 사람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기본 구도인 것은 제임스 완 감독의 <아쿠아맨>을 떠올리게 한다. 바다 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이한 태도를 묘사하는 점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와도 유사점이 있다.
다만 <루카>의 중심 플롯이 결국 한 소년의 성장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루카>는 티모시 샬라메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 특히 닮았다. 단지 두 소년이 자전거를 타면서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탈리아의 오후를 즐기는 공통의 장면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한 소년이 다른 소년, 소녀와 사랑과 우정을 쌓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 속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성장담을 다루는 점이 같아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는 마르치아와 올리버 둘 모두와 사랑에 빠진다. 그와 마르치아의 사랑은 청소년기에 접어든 소년만이 느낄 수 있는 달콤한 첫사랑이다. 한 소년이 성인으로 발돋움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깨닫게 되는 상징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와 올리버의 사랑은 달콤함 사이에 감춰져 있는 씁쓸한 맛의 사랑이다. 특히 성적인 긴장감이 도드라지는 그들의 사랑은 첫사랑의 상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한 소년이 넓어진 세상 안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영화 속에서는 동성애라는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루카>에서 루카와 알베르토, 루카와 줄리아의 우정은 엘리오, 마르치아, 올리버 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마르치아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올리버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엘리오처럼, 루카도 알베르토와 지상 세계를 경험하고 줄리아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당장 알베르토는 루카를 바다 밖으로 이끌어 준 첫 친구이고, 그래서 루카는 세상을 알베르토의 시선을 공유한다. 엘리오와 마르치아의 사랑이 호기심 왕성한 십 대의 사랑인 것처럼 루카의 마음속은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 탐험가의 흥분으로 가득해진다. 한편 루카에게 줄리아는 올리버와 같은 존재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올리버처럼 줄리아는 바다 괴물과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충돌로 괴로워하던 루카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준다. 그녀는 바다괴물이 갈 수 있는 학교로 그를 초대하면서 두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려주며 그의 성장을 돕는다. 이러한 주인공 삼인방의 관계성 덕분에 <루카>는 특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루카>는 디테일한 측면에서 애니메이션다운 시각적 상상력을 뽐내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그림자를 벗어난다.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줄 때 이 영화는 주인공의 외적 변화 혹은 깊은 상실감이나 아픔이 담긴 표정 등을 비추지 않는다. 대신 매 순간마다 주인공의 세계 그 자체가 확대되는 모습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와 함께 오토바이로 세계를 여행하는 루카의 상상은 오토바이와 인간 사회에 대한 정보가 늘어갈수록 세부 묘사가 조금씩 달라진다. 루카가 표현하는 밤하늘과 우주가 달라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알베르토와 만난 직후 루카의 하늘에는 별과 달 대신 물고기가 떠 있지만, 줄리아에게 우주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그의 밤하늘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특히 루카의 세계가 변하는 과정은 성장담에 독특한 시각적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보여주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루카의 상상과 밤하늘의 변화는 그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그는 만나고 느끼고 배우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에 접목시키면서 인식을 확장시킬 줄 안다. 그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것,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경계나 두려움보다 그것들을 알아가려는 의지와 배웠을 때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루카의 세계가 확장되는 첫 발걸음을 이끌어 주지만 정작 본인은 분리된 두 세계를 연결하려는 의지가 약한 알베르토, 바다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에꼴레의 모습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더 나아가 바다괴물 본래의 모습을 한 채 제노바에 있는 학교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감동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 어떤 장벽, 경계, 장애물도 없는 루카의 태도와 세계는 <루카>가 괴물 영화의 기존 문법을 뒤엎는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많은 괴물 영화는 인간의 시점에서 낯선 존재인 괴물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정의에 따라 괴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주된 내용이자 캐릭터들의 목적으로 삼는다. 앞서 언급한 <셰이프 오브 워터>만 하더라도 양서류 인간이 여주인공인 엘라이자에게는 사랑의 대상이고, 미국 정부에게는 탐구의 대상이자, 그를 연구하는 스트릭랜드 박사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비추어지며,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갈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괴물 영화의 공통된 태도의 뿌리는 리처드 커니가 쓴 <이방인 신 괴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인간 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괴물과 같은 존재는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분열되는지 말해준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한 경험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대신, 주로 그들을 배제하고 아웃사이더로 치부하며 거부해왔다고도 덧붙인다. 야만인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βάρβαρος(barbaros)'가 그리스어를 쓰지 않아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인 이방인으로부터 유래했듯이. 그 결과 어떠한 정의로도 붙잡히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규범들에 도전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의 한계에서 탄생하는 존재인 괴물은 여러 신화와 이야기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살아 숨 쉴 수 있다.
<루카>는 이러한 괴물 영화의 오래된 기제를 뒤집는다. 인어와 용을 닮은 바다괴물을 주역으로 삼고 인간을 이방인으로 만들면서 친숙함과 낯섦, 같은 것과 다른 것,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뒤바꾼다. 이렇게 괴물과 인간이 서로의 자리를 맞바꾼 상황에서 주인공 루카의 행보는 긴 시간 동안 인간이 낯섦과 다름을 대한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위험한 괴물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알려진 인간이지만, 루카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파스타를 먹으면서 인간을 탐구하며 그들의 세계에 적응해 나가고 줄리아와 줄리아의 아빠를 도와주면서 공존할 수 있는 공감의 대상으로까지 인식한다.
이러한 루카의 개방성 및 포용성은 괴물, 곧 타자와 이방인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에꼴레와 같은 일반 사람들의 고정관념, 편견 및 자기중심적 태도와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들마저 낯부끄럽게 한다. 또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고 내쫓으려 하는 이들이야말로 바다괴물인 것은 아닌지를 성찰하게 만들면서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메시지에도 힘을 싣는다. 커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카>는 바다 괴물을 통해 "우리 안의 지옥을 끄집어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영화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 외부의 시점으로 인간 세계를 관찰하는 작업은 사실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낯설지 않다. 픽사는 괴물들의 회사,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 사람의 기분을 조종하는 감정들, 사후 세계의 영혼들, 천방지축 물고기, 요리하는 쥐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일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개봉했던 <소울>만 하더라도 일상적인 삶의 의미를 무너뜨리면서 진짜 삶의 목표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준 바 있다.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 스스로의 일상과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적 메시지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모두 매혹시키는 픽사만의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픽사의 전작들과 비해 <루카>의 완성도는 더러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루카가 인간과 지상 세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기발하고 세심하게 묘사한 것에 비해 그의 주변 인물들이 인식을 바꾸는 과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철인 3종 경기를 기점으로 루카의 가족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데, 이 과정은 픽사가 흔히 보여주는 반전 없이 예상대로 평이하게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애니메이션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결말에서 맥이 풀리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또한 통상적으로 픽사 영화 속 주인공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펼치는 것과 달리 주인공이 특정 장소에 적응하는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느낌이 짙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루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힘과 감동에 비하면 연출이나 스토리텔링 상의 아쉬움은 그리 크지도 않고, 길게 남지도 않는다. 모든 장벽과 경계 없이 다양함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루카의 성장담과 엔리코 카라로사 감독의 전작, 단편 애니메이션 <라 루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아름다운 영상미는 모든 단점을 가리고도 남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셰이프 오브 워터>가 픽사스럽게 만난 9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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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틱 코미디, 그런데 기후위기를 곁들인
두 사람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모든 영화에는 인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타이타닉〉에서는 귀족과 하층민이라는 신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앙숙 가문,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성격,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는 선량한 시민과 범죄자라는 시민적 지위 등등이 그렇다. 이들 영화는 서로의 세계를 살아보지 못한, 그래서 상대방과 그가 속한 세계가 너무나 낯선 주인공이 상대를 알아가며 조금씩 자신이 기존에 속한 세계를 허물고 나와 상대의 세계에 진입하고, 종국에는 두 사람의 세계를 결합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로 나아간다. 물론 꼭 사랑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맥락에 따른,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하지만 사랑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이 차이를 더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디피컬트〉가 그러하듯이.
코미디, 로맨스를 아우르는 영화 〈디피컬트〉의 배경은 파리다. 주인공은 알베르와 발렌틴. 알베르는 채무에 시달리며 주거도 일정하지 않은 가난한 하층민 남성이고, 발렌틴은 급진적인 기후 활동가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블랙 프라이데이를 앞둔 어느 쇼핑몰. 알베르는 TV를 싸게 구입해 비싸게 팔 목적으로, 발렌틴은 지구를 망치는 무의미한 소비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일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이다.
다시는 만날 일 없을 듯한 두 사람은 뜻밖의 장소에서 재회한다. 알베르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 브루노의 손에 이끌려 무료로 맥주와 음식을 나눠주는 곳에 간다. 발렌틴과 활동가 동료들이 친목과 결의를 다지고 다음 활동을 계획하는 모임의 장소였다. 알베르는 자기 입장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진지한 표정으로 도모하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거리기를 멈출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함께하면 먹을 것이 나오고 그들이 재활용을 위해 수집한 물품을 몰래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재미도 쏠쏠하기에 브루노와 함께 슬쩍 발렌틴의 활동에 동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느덧 솟구친 발렌틴을 향한 알베르의 호감이 가장 큰 동기다. 알베르는 발렌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활동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활동의 다음 단계가 곧 로맨스의 다음 단계와 맞물리며, 영화는 전개된다. 쇼핑몰, 패션쇼, 농장, 박물관, 심지어 은행까지. 기후정의를 촉구하는 이들의 시위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시위 장면을 온라인 생중계를 위해 참가자들이 핸드폰으로 촬영한 불안정하고 흔들리지만 바로 그 이유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장면과 화면 밖 카메라가 주인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와이드숏을 교차하며 보여주어, 시위 현장의 박진감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는 자연히 시위와 연계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무르익는 과정과도 맞물리며 극의 감정선과 재미를 더욱 고조한다.
위기도 있다. 알베르와 발렌틴의 관계를 질투한 또 다른 활동가가 알베르가 실은 단체 물품을 장물로 팔아넘기는 등 운동에서 개인 잇속을 챙겨왔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기후 우울증으로 감정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대한 동력을 잃었으나 조금씩 알베르에게 마음을 열던 발렌틴은 이후 알베르에게서 완전히 멀어진다.
당연하게도 둘은 결국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위기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뻔한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영화가 두 사람의 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캐릭터, 서사 설정이다. 〈디피컬트〉에서 누군가 기후위기를 얼마만큼 심각하게 인식하는지는 〈타이타닉〉의 신분,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문, 〈엽기적인 그녀〉의 성격, 〈베이비 드라이버〉의 시민적 지위만큼이나 커다란 차이다. 즉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의 차이가 귀족과 하층민이 살아가는 세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코미디와 로맨스를 버무린 영화라기보다는 동시대에 기후위기에 대한 감각‧인식의 지형이 어떻게 구획되어 있는지를 질문하는 영화로 볼 때 더 재미있다. 만약 당신이 기후 음모론자라면, 푼돈을 벌어 하루하루 근근이 사는 남자와 기후 우울증 때문에 감정적으로 파산한 여자가 사랑과 연대로 그들 개인뿐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세상까지 더 좋게 만든다는 이 영화의 서사가 한없이 지루하고 허황되게 느껴질 것이다. 〈디피컬트〉의 서사 구조는 2022년에 열린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서 상영된 2021년작 프랑스 영화 〈지평선〉과 유사한데, 두 영화를 유럽에서(혹은 적어도 프랑스에서) 기후 시민이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큼 분명하게 가시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 해석해도 무방해 보인다.
같은 징후를 포착한 한국의 상업영화를 나는 알지 못한다. 즉, 한국에서 기후 시민은 아직 하나의 분명한 시민적 정체성으로 부상하지 않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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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 Lars and the Real Girl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 Lars and the Real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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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남에 대한 배려가 깊고 착한 심성의 ‘라스’(라이언 고슬링). 결혼한 형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그는 너무나도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다. 직장에서 관심을 보이는 여자 동료의 호의도 모른척하고, 매번 식사에 초대하는 형수도 부담스러워 어떻게든 피하는 데에만 급급한 대표 소심남.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여자친구를 소개하겠다고 하자 외롭게 사는 그가 안쓰럽기만 했던 형과 형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라스와 여자친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그런데 숫기 없는 그가 조심스럽게 소개한 여자친구 ‘비앙카’는 다름 아닌 리얼 돌(Real doll)!!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형 부부에게 첫 여자친구 소개를 무사히(?) 마친 라스는 그 날 이후 비앙카를 교회와 직장 파티에 데려가고, 어릴 적 즐겨 놀던 호숫가에도 함께 가는 등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하지만 라스에게만은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비앙카’. 과연 엉뚱 기발한 라스의 첫 연애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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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딱히 없고 그냥 끌려서 보게 된 영화다.
그러다 보니 별 기대도 없었고, 줄거리에 '리얼돌'을 여자친구라고 데리고 온 주인공의 이야기라길래 오타쿠같은 주인공의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주인공 라스에게 리얼돌 비앙카는 단순한 연애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앙카는 라스에게 있어서 소통창구인 것 같았다.
라스는 비앙카를 중간매개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그가 사람들한테하고 싶었던 말들을 비앙카의 일인것처럼 말하며 본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들어내는 점을 보면, (이건 나의 생각)
어쩌면 라스에게 있어서 비앙카는 소통창구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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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온전히 받아주고, 자신을 온전히 들어낼 수 있는 존재
그동안 이런 존재가 라스에게 부재했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항상 우울하셨던 돌아가신 아버지,
이런 집안이 싫어 성인되자마자 집을 나가버린 형,
그리고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라스.
이후 형의 결혼으로 결국 차고에서 생활하게 된 라스.
라스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것도 없었다.
다들 그의 곁을 떠나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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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는 자신의 곁에 '영원히' 있어 줄 비앙카를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상처를 하나하나 치유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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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를 외면한 줄만 알았는데,
사실 다들 나를 너무 사랑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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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는 라스도 라스지만,
이웃사람들의 태도도 정말 인상깊다.
특히, 카린.
자신의 친남동생도 아닌 자신의 남편의 남동생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항상 자신을 거부하는데도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라스의 모든 일들에 같이 슬퍼해주고, 같이 기뻐해주는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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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잊을 수 가 없다.
왜, 라이언 고슬링 하면 떠오르는 영화에 이 영화가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라이언 고슬링의 영화들 중 가장 인상깊은 영화였고,
가장 인상깊은 연기였다.
다른 배우가 대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라이언 고슬링은 라스에 정말 잘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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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은 씬
1) 라스가 비앙카보고 죽지말라고 울부짖는 씬
2) 라스가 마고의 곰인형한테 CPR해주는 씬
(심지어 이 씬은 라이언 고슬링의 애드리브였다고..정말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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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동안은 누가 나한테 영화 추천해달라 하면 이 영화를 추천해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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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키즈크리에이티브3
- 희라의 순간해당 행위가 나쁜 짓인지의 여부보다는 비싼 물건을 가지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나이기에 남우는 절도를 한다. 동경하던 친구가 사실은 도둑질을 손쉽게 하고, 자랑하던 것들은 죄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희라의 작은 우주는 무너진다. 하루아침에 우주를 잃은 희라는 괜히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기도 하고, 충동적인 행위들을 저지른다. 마음 속 우주가 붕괴되는 장면은 누구나 겪어 봤을 경험들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온 어린날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충족이 필요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이들의 일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둘의 조우는 가난을 통한 연대라기보다는 같은 비밀을 가진 어린이들 간의 공감대 형성이 적절해 보인다. 단순한 해피엔딩, 구원서사가 아닌, 나쁜 행위를 통한 연대감을 이루어내는 결말로써 오직 둘만이 서로를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남우와 희라가 내일을 기약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교환일기굳게 맹세했던 영원은 이별을 마주하기 마련이고, 내 전부라 생각했던 존재는 사실 드넓은 세상의 일부였음을 알지 못하던 때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미숙했던 그때, 서로를 채워 주는 것은 마찬가지로 미숙했던 친구였고, 단짝이었고, 그것만이 추억의 총체가 된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으로 해소할 수 있다지만, 이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위로가 아닌, 아픈 경험이다. 상실감으로 인해 찾은 놀이터에서 우연한 기회에 새 친구를 사귀게 됨으로써 공백의 채움이 일어나게 되고, 헤어짐을 새로운 만남으로 해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물을 많이 줄 필요가 없는, 물을 많이 주면 죽어버리는 선인장에 '내 생각이 날 때만 가끔' 물을 주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떠나간 친구를 마냥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슬픔 없는 매일을 살되 지나간 인연을 잊지 말고 가끔 떠올려 달라는 바람이 드러난다. 소중했던 인연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물을 자주 줄 필요는 없지만 아예 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선인장처럼, 가끔은 먼 여행을 떠난 존재들에 애정 어린 그리움이 필요하다.새벽 바다 노을관객은 영화의 막바지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새벽과 바다가 친남매가 아님을 알게 된다. 배다른 남매인 둘은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지만, 어른들은 새벽과 바다를 다르게 대한다. 어린이들의 세상은 평화롭고, 놀이를 통해 끈끈해지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어린이들의 다툼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날이 서 있다. 이런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새벽이 유일하다. 세 아이 중 홀로 정신적, 육체적 성숙을 경험한 새벽만이 어른들의 대화 주제가 얼마나 민감한 것이고, 다툼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 노을에게 빨리 집에 가라며 부추긴다. 새벽은 어른들이 싸우는 장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 생리대를 갈지 못해 결국은 생리혈이 새고 만다. 가혹한 어른들의 세계에 더 큰 균열을 내어 이 싸움을 끝내고 싶은 어린이들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어른의 눈으로 마주한 순수한 어린이들의 세계가 너무도 천진해서 아프다.자전거 도둑전체적인 스토리가 고전 영화 <자전거 도둑>과 유사한 구조로 흘러간다. 다만 자전거는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시장에 나가게 된 것이었고,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자전거가 엄마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며 본인 대신 대회에 나가게 된 친구를 진심으로 응원해준다. 어린이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돈보다는 우정이 앞서는 때묻지 않은 마음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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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파라다이스를 만드는 것은 누구일까?
파라다이스 Paradise
Director
프라사나 비타나게 Prasanna VITHANAGE
Cast
Roshan MATHEW, Darshana RAJENDRAN
Program Note
인도의 영화프로듀서 케사브와 블로거 암리사 부부는 고대 인도의 힌두교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유적들을 여행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도착한다. 첫날 여행 중 넷플릭스의 투자 소식을 들은 케사브는 하루빨리 인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그날 밤, 호텔에 괴한들이 습격하여 모바일폰, 노트북, 카메라 등을 모두 훔쳐 간다. 이튿날 경찰서로 간 부부는 마을의 실업 상태 젊은이들 중 누가 괴한이었는지를 지목하도록 요청받는다. 2022년 4월 국가부도를 선언한 스리랑카의 현재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인도인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자신의 국가에서도 이등 시민 취급을 받으며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 시민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 권력에 대해 분노를 쌓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탄탄한 서사로 그려낸다. (박선영)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한 부부가 스리랑카로 결혼 5주년 기념 여행을 온다. 파라다이스 같은 아름 다운 풍경과 다르게, 차창 밖은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가득하다. 스리랑카가 국가부도를 선언한 지 2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름도 전기도 없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한 거리의 모습과는 대조되게, 부부가 탄 차는 안전하고 평온한 다른 세상이다.
넷플릭스가 작품 제작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소식을 접하고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차 있다. 이제 돈 벌 일만 남았다는 케사브는 스리랑카의 현실이나, 구걸하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핸드폰 속의 자신의 세상만 중요하다. 몸은 스리랑카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인도에 돌아가 제작을 시작하고 화려한 미래로 향해간다. 그에 비해 아내 암리사는 이 여행에 충실하다. 앤드루의 가이드를 귀 기울여 듣고, 창 밖을 본다. 관광객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다. 돈이 필요한 나라에 나는 외화를 쓰러 온 사람이니 대접받아야 한다는 케사브의 논리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스리랑카인 여행업 종사자를 서비스업종사자로 보기보다 하인을 대하는 듯 보이는 장면에서 돈으로 권력을 쥔 인간의 근성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내내 안타까웠던 사람은 이상하리 만치 평온한 이 세상과 저 현실에 중간에 서 있는 운전기사 앤드류였다. 이 세상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기도 하며, 저 현실의 생활자이기도 한 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동을 주시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고 장면을 하나씩 돌이켜 보면 막 숙소에 도착해 짐을 옮기며 ‘사슴 고기 있냐, 먹어보자’ 고 단순하게 말을 던진 케사브와 관광객을 모시기 위해 사슴사냥을 가는 지배인, 그리고 덤덤히 따라가는 앤드류, 사슴을 발견하고 쏘려고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만!” 하고 외침으로써 상황을 종료하는 암리사가 나오는 이 짧은 장면에서 모든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주제를 던져 주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하는 사슴, 폭력을 휘두르는 케사브, 권력자 옆에서 따르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끝낼 수 있는 사람.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아슬아슬한 이 사냥처럼 조용히 흘러가던 여행은 부부의 전자기기 도난 사건이 벌어진 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여행에서 도난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곳이 어디든(소위 말하는 선진국이든 혹은 후진국이든) 그 물건은 이미 내 물건이 아니다.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진술서를 쓰고 보험금을 청구하는 정도 일 것이다. 그런데 케사브는 경찰이 사건을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자, 고위층에 고발하겠다, 찾아오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며 협박을 하고, 경찰은 자기 살길을 위해 아무나 데리고 와 이 사람들이 맞냐며 묻는다. 케사브는 마치 분풀이를 할 대상을 찾는 것처럼, 그 수사에 동조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사슴사냥과 다르지 않다.이 폭력은 사망자를 만들어 내고, 스리랑카인들의 폭동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스리랑카인의 폭동은 관광객인 케사브를 향해 있지 않다. 폭력적인 경찰을 향한 시위지만, 경찰은 이 시위에 너를 보호하겠다며 관광객인 케사브를 자신의 안전에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격한 상황이 되니 인도인 부부는 거기에 따른다. 이제까지 영화 내내 경찰이 아무런 돈도(기름도), 도둑을 잡을 능력도, 대단한 권한도 없는 것처럼 묘사 되었는데, 결국은 그들이 폭동을 제압할 수 있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의지하게 되는 장면이 아이러니했다.
암리사의 앤드류가 힌두교의 대서사시 ‘라마야나’ 전설의 해석이 수십 개라고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처럼 마지막 열린 결말은 관객들 마다 각자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여행을 왔다 폭동에 남편을 잃은 슬픈 사랑이야기가 될지, 이 모든 폭력을 끝낸 여성의 이야기가 될지. 그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인과응보의 이야기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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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영화에서 스리랑카가 겪고 있는 연료나 전기 문제뿐만 아니라 소수민족문제를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경제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이런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 또한 삶의 의미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자신을 이해하려고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영화를 보며, 나의 인도여행과, 스리랑카 여행을 떠올렸다. 암리사처럼 아이들을 쳐다보았던 순간을 기억했다. 관심처럼 보이지만 안쓰러움을 담고 있던 그 눈빛이 아이들에게 폭력은 아니었을까? 때때로 여행자의 시선에서 서비스업 종사자를 혹시 낮게 본 적은, 혹혹은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던 적은 없었을까? 그 또한 ‘라마야나’ 전설처럼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해석이 될 테니, 아무렇지 않게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 상처나 폭력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곳이,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곳이 바로 ‘파라다이스’가 되는 게 아닐까?
Schedule
10월 7일 20:00 영화의전당시네마테크
10월 8일 20: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0월 10일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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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울어진 선을 찾아서
책에도 유행이 있다. 특히 신간 하나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릴 때, 사방에서 "그 책 읽었어? 그거 재미있더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여기서 더하면 그 책 제목은 하나의 밈처럼 소비된다. <82년생 김지영>을 변용한 온갖 'OO년생 OOO'처럼.
언제부턴가 'OO의 기쁨과 슬픔'이란 말이 무진장 눈에 띄었다. 주변 회사원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너무 궁금해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왔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차용한 제목이라지만, 소설 자체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 애매한 일의 현장을 생생하게 포착했디에 그 제목은 K-직장인들에게 찰떡 같이 달라붙었다.
영화 <굿 보스>를 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 대신 '관리자의 기쁨과 슬픔'이란 말이 떠오른다. 영화의 중심에 놓인 인물은 저울 회사 사장인 블랑코인데, 우수 기업상 최종 심사를 기다리느라 한껏 예민해져 있다. 회사의 모든 요소가 심사위원들 눈에 딱 들도록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며 판을 짜고, 설계하고, 공사를 뒤섞어 가며 직원들을 쥐락펴락하려 한다. 이건 그야말로 그 관리직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연기를 해도 그 자리에 30년쯤 존재해온 사람처럼 연기하는 하비에르 바르뎀은 여기서도 빤들빤들해진 중산층 사장의 얼굴을 소화해 낸다. (사장이 다 빤들빤들하다는 게 아니라,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그런 사장이라는 소리다.) 아버지가 창업한 공장을 물려받아 여태까지 운영해 왔으니 일에는 적당히 타성이 붙었고, 연설에 가까운 말 레퍼토리도 생겼다. 그는 "우리는 가족"이라는 반지르르한 말로 공과 사를 적당히 뒤섞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이 영화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느낌이다. 블랑코가 어떤 업주인지 때로는 직접 언급되고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며, 노동법부터 관습법까지 각종 법과 윤리의 위반 여부를 짚어보게 된다. 왜 회사 직원이 휴일에 블랑코의 집에서 뭔가 수리하고 있는 것인지. 왜 퇴직하는 여성 직원이 울먹거리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블랑코는 그에게 진정이라는 이름의 침묵을 종용하는지.
불안한 예감은 영화 속에 하나씩, 그러나 얼굴을 찌푸리기엔 너무 코웃음 칠 수밖에 없는 모양새로 펼쳐진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그렇게 심사위원이 방문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회사를 최적의 상태로 보이게끔 하고 싶어 하는 블랑코 앞에, '감점 요소'들이 나타난다.
부당 해고를 주장하며 회사로 찾아오다가 아예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앉아버린 (그리고 어쩐지 점점 차림새나 마인드가 힙합에 가까워 가는...) 직원 호세, 아버지 대부터 공장과 연을 맺었고 어린 시절도 함께 보낸 사이지만 일 솜씨가 심각한 직원 미랄레스, 그리고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턴 릴리아나...
블랑코는 얽히고설킨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호세를 회유하려고도 협박하려고도 해보고, 미랄레스를 따로 만나 식사하며 그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을 파악해 본다. 그러나 겉핥기 식 회유와 은근한 협박으로만 일 처리를 해온 그는, 여전히 미랄레스의 상황을 두루 살피거나 그의 진심을 알아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단편적으로 듣고, 아내에게 단편적으로 전하며, 단편적인 정보에서 아내가 끄집어낸 한마디 말을 낼름 받아들여 미랄레스의 사생활에 불쑥 뛰어든다.
블랑코는 직원들의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한다. 그 과정에서 미랄레스와 호세, 릴리아나 외에도 다양한 직원들과 마주치고 엮인다. 사생활에 간섭하여 이용하는 모습이 가히 파렴치하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대우만 내놓는 사람은 아니다. 인간은 다면적이니까. 때로는 "우리는 가족"이라던 블랑코의 말을 상기시키며 도움을 요청하는 직원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굿 보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애매하게 좋은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다. 스스로가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상사라고 믿고 있겠지만, 블랑코는 사실 직원들을 저울 위의 물체처럼 취급하고 있다. 가족 같은 존재의 관심이라는 미명 하에 직원들의 삶을 이루는 요소를 공사 할 것 없이 적절히 파악하고, 그 조건들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간다. 직원을 소중히 여긴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가 소중히 여긴 건 물체와 재산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설계는 본인만 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도 자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존재들이라는 것. 저울 위의 물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평형을 맞추는 일은 더욱 미묘하게 어려워져 간다는 것. 그 씨름 속에서 한 명의 건실했을 인간은 단지 말만 남은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
출근할 때마다 정문에 놓인 저울 조형물의 평형이 잘 맞는지 확인할 만큼, 블랑코는 공정과 노력처럼 보이는 것들을 입으로 강조한다. 기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평형이 아니라 평형처럼 보이는 상태다. 그게 진짜 평형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울어진 선이어도 직선처럼 보이면 그만이다.
<굿 보스>는 이따금씩 코웃음을 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블랙코미디 영화지만, 엔딩이 가까워 오면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영화에 켜켜이 쌓인 정서들이 너무 익숙해서다. 블랑코를 악덕 사장이라고 욕하고 돌아서기는 쉬워도, 그의 수완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블랑코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 또한 순진무구하게 당하기만 하거나, 의연하게 노동 운동을 벌이는 인물들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 해가며, 자기 욕망을 향해 움직이는 보통의 인간들이다.
그리고 직원들의 업무 공간보다 한 계단참 오른 곳에 붕 떠 있는 사무실에서 유리벽으로 그들을 내려다 보며, 블랑코는 자기가 설계한 판을 '그럴듯한' 명목으로 포장해 내놓는다. 삐뚤빼뚤한 선보다 기울어진 수직선이 더 교묘하게 평형인 척할 수 있다. 바른말 고운 말의 외피를 뒤집어쓸 때, 진심처럼 보이는 노력들이 섞일 때, 악은 최악이 된다.
저울 회사의 정문이 어쩐지 아우슈비츠 정문을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과도한 걸까? 그러나 "노동이 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문장 또한 아름다운 단어의 외피를 뒤집어썼기에 더 최악이었던 문장이었으니 아주 다른 얘기만도 아니긴 하다. 더불어 이 영화가 스페인이 아닌 한국에서 제작됐다면 한층 더 매운맛이었으리라는 상상은 또 다른 씁쓸함으로 이어진다. 여러 모로 블랙코미디였다.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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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회당 제작비 30억(!)의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프리뷰ㅣ스위트홈 웹툰ㅣ결말포함 스포주의ㅣ여진구?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
? '스위트홈(2020)' 넷플릭스 드라마 보기 전 필수 시청
스위트홈 웹툰 스토리 요약(*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외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2]#스위트홈 #스위트홈_웹툰 #스위트홈_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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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납작 엎드릴게요> 메인 예고편
오늘도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사찰 오피스 드라마 [더 납작 엎드릴게요]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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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재개봉 예고편
당신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가요?
어김없이 홀로 새해를 맞은 서른두 살 ‘브리짓’
그런 그녀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정반대의 두 매력남.
내 여자에게만 다정한 스윗남 ‘마크’와
사랑에 직진하는 ‘다니엘’ 사이에서
그녀의 다이어리는 행복한 상상으로 채워지는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첫 페이지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