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2-15 15:15:10
흉터는 과연 훈장인가.
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이 글은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하게 나쁜 놈들이고, 나는 복잡하게 착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지.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냉정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글귀였다.
그리고 보통의 영화에서는 단순하게 나쁜 놈과 단순하게 착한 놈이 나와서 지지고 볶다가 어느 한쪽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지며 승부가 결정지어진다. 그 끝이 감상하는 사람의 선호도와는 다를 수는 있을지언정. 그 끝에는 언제나 확실함이 보장되어 있기에. 영화의 결말은 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세 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괴롭혔던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기회비용이라도 받아내려는 것처럼 더욱더 기다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루탈리스트의 결말에는 요즘의 우리가 선호하는 "사이다"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대체 누가 승기를 거머쥔 것인지에 대해서도 쉽사리 답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 그저 사람이, 그리고 인물이 살아온 인생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즐로 토스(에드리언 브로디) 개인의 허물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다. 하지만 타인도 복잡하게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들여다보다 보니. 단 하나의 물음만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과연 흉터라는 것은 훈장이 될 수 있을까.
예전의 나였다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흉터는 남았지만. 새 살이 돋아 났으니 그것이 살아남은 승리자의 징표이며 더 강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상처를 매번 마주해야 하는 사람의 의견 또한 그럴지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영화 속 라즐로는 그가 가진 재주 덕에 건축물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세월을 간직할 수 있다. 그 건축물을 볼 때마다 자신이 설계도를 그리던 순간부터 시작해 공사가 끝나던 생각이 나는 것은 물론. 영화에서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휘몰아쳐 생각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자, 크고 작은 상처이며 흉터이자 동시에 훈장이 될 건물의 공개 순간을 보며.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뭉텅이 속에서 조금이라도 우세한 감정은 과연 무엇일 될지. 궁금했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이제는 명민함이라는 화로의 불도 곧 꺼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을 담고 올려 세운 결과들을 보면서. 당신은 대체 어떻게 느끼고 있냐고. 그 희미하고 복잡한 미소 외에 내던지고 싶은 말은 없느냐고.
라즐로는 내가 세워야 할 건물의 주춧돌을 덩그러니 남긴 채 나를 떠났다.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이 모든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 했으나. 어째서인지 자꾸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도 나만의 건물은 완성이 될 것이다.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인생을 오롯이 담아서,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린 다음에야.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가 질문한 물음에 대한 답을. 혹은 답에 준하는 근사치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들이 훈장에 가깝기를 바란다.
그의 힘들었던 삶을 기리는 공로상 같은 훈장이 아닌. 여태껏 해온 자신의 업적을 인정하는 심플한 훈장이 되기를. 그 이외에 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훈장이길 바란다. 부디.
마치면서
어떤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개인 SNS에 올라오는 "끝장 해석" 류의 콘텐츠를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물론 맞는 방향이나 해석이 있기는 하겠지만. 감상의 영역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결국 개인이라는 렌즈를 통해 관찰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무언가와 결합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될 테니까.
두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만큼 무자비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무수히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어떤 부분을 붙잡고 늘어져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살까 말까.
2. 말린 고구마 친구가 줬는데 혼자 1톤 먹을 기세
3. 청소하기 싫다.
#브루탈리스트 #최신영화 #영화리뷰 #에드리언브로디 #영화리뷰어 #munalogi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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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최연이 학교에 전학오고 하경과 지내면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다.
하경도 마찬가지로 최연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는데...
학창시절은 혼란스러운 시기다.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저렇게 사소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내가 성장한 것이 아닐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를 몰라서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포근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그런 순간에도 최연의 시선은 하경에게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신호등 장면이 제일 좋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 명이 인지하더라도 다른 한명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를 수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인지하는 순간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먼저 인지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인지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늦게 인지한다고 잘못은 아니다. 원래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는 건 쉽지 않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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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이 더 무서워할 봉인된 기억
*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가장 무서운 영화’! ‘롱레그스 신드롬’을 일으키며 북미를 점령한 <롱레그스>의 강력한 마케팅 문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영화는 완성도를 떠나 오롯이 미국 관객들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올 작품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잊고 지냈던 그 무언가의 봉인이 해제되어 이들의 심연에 자리 잡은 공포를 끄집어내는 느낌이랄까.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겠지만(혹은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다분히 정치적인 호러 영화로서도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남다른 직감으로 사건을 해결한 FBI 요원 리(마이카 먼로). 그의 능력을 알아차린 상사는 영원한 미제로 남은 뻔한 사건에 리를 투입한다. 그녀의 일은 30년간 계속되는 연쇄 가족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검거하는 것.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그동안 쌓인 사건 파일을 확인한 그녀는 피해자의 공통된 생일이 14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생일 또한 14일인 그녀는 지금껏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암호를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잊힌 기억을 떠올리며, 이 사건과 자신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길어 올리다!
<롱레그스>는 단서를 흩어 뿌리는 것처럼 영화 속 감춰진 공포심을 유발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중 하나가 1974년이다. 어린 시절의 리가 9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롱레그스(니콜라스 케이지)를 처음 만나는 시점이다. 감독은 하필 1974년으로 시간을 설정했을까?
미국인이라면, 미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1974년은 잊지 못할 역사적인 일이 떠오를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1972년 재선을 준비했던 닉슨이 민주당의 선거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하려고 했던 일이다. 이 진실이 밝혀진 건 1974년. 결국 닉슨은 대통령직을 내려놓는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유추하라는 듯, 극 중 리의 직업은 FBI다. 과거 사건 은폐를 위해 FBI 수사 방해 지시를 내린 닉슨을 저격하는 것처럼, 리는 집요한 추적을 벌여 끝내 진실에 닿는다. (참고로 닉슨 또한 FBI 출신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담대한 사기극을 벌인 닉슨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환한 감독은 과거 야만과 불신으로 점철된 1970년대 미국의 상황이 곧 기억 속에 잠자고 있는 공포라 규정짓는다. 그리고 언제든 그 공포는 스멀스멀 올라와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잠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긴다. 극 중 연쇄 살인이 일어나는 집 거실에 닉슨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롱레그스의 거처가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 위치한 것만 봐도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롱레그스>는 독일 근현대사를 알고 보면 더 다층적으로 볼 수 있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 냉전 시대의 막바지 시기였던 레이건 시대의 상황을 녹여낸 맷 리브스의 <렛 미 인>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미국의 과거를 잘 모르는 이들은 <롱레그스>를 조금 특색 있는 호러 영화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미국의 근원적 공포, 정치 상황까지 영역 확장
감독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넘어 미국인이 가진 근원적 두려움과 공포도 건든다. 바로 미국 역사에서 인종차별과 폭력의 상징인 KKK단이다. 롱레그스는 화이트에 집착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얼굴도, 옷도, 차도 모두 하얀색이다. 과거 어린 리에게 접근한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집에 비해 리의 집이 더 하얗게 빛났기 때문이다.
9살이 되는 아이들 모두 천사라 부르지만, 자신이 믿는 사탄을 위해 표적이 된 가족을 살육하는 그는 하얀 가면을 쓴 악마와도 같다. 이런 이유에서 기괴한 모습의 롱레그스를 본다면 백인우월주의로 똘똘 뭉쳐 유색인종은 물론,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KKK단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강한 스포일러라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롱레그스의 무서움은 사람의 가장 약한 마음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고, 이를 전염시킨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이단 종교를 향한 두려움과 맹신,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의 존재 등 미국 호러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호러 요소까지 믹스하면서 공포감을 증대한다.
<롱레그스>가 미국 역사 속 근원적 공포의 대상을 끄집어냈다는 점은 일본 귀신을 등장시킨 <파묘>를 떠올리게 한다. 결은 다르지만 두 영화는 현 시대적 상황(미국은 대선, 한국은 친일파 역사 왜곡)에서 개봉한 터라 정치적으로도 다가오기까지 한다. 특히 극 중 민주당 클린턴 시대임에도 조금씩 닉슨 시대를 위시한 그 시절 공화당의 잔재가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 독특한 미장센,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
앞서 소개한 근원적 공포를 모르더라도 범죄 스릴러와 오컬트 장르를 적절히 믹싱한 <롱레그스>는 그 자체로 무섭다. 총 3개의 챕터를 통해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는 사건 비밀 봉인이 풀리기까지 화면 비율이나 미장센, 음향, 그램록 사운드를 통해 조금씩 감춰진 수수께끼의 단서를 보여준다.
눈에 띄는 건 인물을 화면 정중앙에 배치하며 여백을 강조하는데, 때때로 명확하지 않은 피사체들의 움직임에 의해 불안감을 조성한다. 여기에 인물 머리 위로 클린턴 대통령에서 롱레그스의 얼굴을 전시하는 등 소름 끼치는 장면도 나온다. 회상 장면은 4:3 비율로 화면 구성을 달리하고 어린 리의 시점으로 구성해 정보를 제한적으로 전달하는 점도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영화의 극강 공포는 후반부 리의 과거 기억의 봉인이 풀린 후 비로소 시작하는데, 그 에너지가 엄청나다. 감독은 그동안 빌드업해 놓은 것을 한 번에 풀어버려 관객이 맥을 못 추게 한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가 순탄하지는 않다. 극 중 해독하기 힘든 암호처럼 사진, 기사, 통화 녹취록 등 정보량이 적은 단서들만 흩어 뿌려져, 리의 추리를 따라가기 쉽지 않고, 전개가 다소 느려 종종 긴장감이 와해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끝까지 보게 하는 건 롱레그스 역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의 존재감이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자의 기분 나쁜 여유(?)와 기운, 이 세상을 자신 믿고 있는 사탄의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그릇된 신념 등이 점철된 그의 표정은 공포 그 자체다. 적은 분량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탄 만세’를 외치며 강한 임팩트를 날리는 연기는 엄지척! 극을 이끄는 마이카 먼로 또한 강인함과 유약함을 번갈아 보여주며 차세대 호러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롱레그스>의 연출은 오스굿 퍼킨스로, 그 유명한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역을 맡은 앤서니 퍼킨스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감독은 단순히 비명을 지르는 공포가 아닌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공포의 근원을 가져와 조금씩 조금씩 관객을 옥죈다. 아마 아들의 솜씨를 본 아버지는 박수를 보냈을 터. 이제 그 솜씨는 스티븐 킹의 소설 원작 영화 <더 몽키>로 이어진다. 일단 창백한 긴 다리 아저씨의 공포부터 즐감하길 바란다.
사진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IMDB
평점: 3.0 / 5.0
한줄평: 미국인이 더 무서워할 봉인된 기억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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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킷> 로맨스, 액션, 정치 스릴러의 무색무취한 만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애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관광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 그는 숙소로 이동하던 중 졸음운전으로 인해 차가 전복되어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애인과는 달리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비탄에 잠긴 채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를 받고, 그리스 경찰에게 차가 추락한 주택 안에서 한 남자아이를 봤다고 진술한다. 그러자 친절하던 그리스 경찰들은 사건 현장을 찾은 그를 향해 느닷없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베킷은 공격을 피해 도망친다. 아테네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베킷은 나라를 가로지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그는 그리스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의 거미줄에 빠져든다.
13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베킷>은 평범한 미국인 베켓이 갑작스럽게 그리스 경찰에게 쫓기는 추격전을 크게 세 개의 플롯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다이아키>와 <안토니아>로 이름을 알린 페르디난도 시토 필로마리노 감독은 우선 베킷과 에이프릴의 로맨스로 문을 열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처럼 갑작스럽게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과 액션으로 노선을 선회한다. 이후 베킷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대한 단서를 맞춰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두 개의 플롯을 포괄하는 그리스 경제위기와 관련된 국내외적 정치 스릴러의 면모를 선보이고,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연상시키며 마무리된다.
문제는 <베킷>이 선보이는 세 개의 이야기가 전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다는 점이다. 각각의 플롯은 그 자체의 매력이 부재하며, 상호 간의 연결고리도 느슨하다. 즉, <베킷>은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려 했는지 의도는 어렴풋이 보일지언정,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는 영화다.
먼저 도입부를 장식하는 베킷의 사랑 이야기를 보자. 상대적으로 보다 주관적 감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배우 간의 호흡은 차치하더라도, 영화는 좀처럼 베킷의 심정에 빠져들어갈 계기나 동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 커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두 남녀가 그리스에 여행을 왔고, 시위로 혼란스러운 아테네를 떠나 비교적 한적한 관광지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베킷이 죄책감에 매우 고통스럽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영화는 이들의 현재와 상황을 제시할 뿐,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피 흘리는 와중에도 베킷을 끊임없이 뛰고 구르도록 만드는 동기 중 하나인 죄책감 혹은 상실감은 마치 타인의 부고 기사를 읽는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만약 둘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추억을 공유했으며,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강한 지를 알려줄 장면이 짧게나마 있었다면 이러한 감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위의 내용만 있어도 베킷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영화의 구조상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베킷이 유일한만큼, 주인공에게 공감할 여지를 주지 않는 로맨스는 도입부로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 역시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단 긴장감이 없다. 사실 한 남자가 갑자기 표적이 되고, 정신없이 쫓기는 와중에 자신을 죄어오는 올가미를 하나둘씩 알아챈다는 전개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클리셰다. 그렇기에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라는 상황만으로는 더 이상 서스펜스를 자아낼 수 없다.
따라서 <베킷>과 같은 영화는 주인공을 다양한 변칙적인 상황 속에 던져 놓아야 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베킷>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경찰에 의해 곤경에 처한 베킷이 그리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고, 이에 경찰들은 현지인들을 위협해 얻은 정보에 기반해 그를 다시 추격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암석으로 가득한 그리스의 산을 비롯해 좁은 공간 그 자체로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집 내부나 기차 칸 같은 다양한 환경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도 이들을 베켓의 추격전에 유의미한 변수로 작용시키지는 못한다. 단지 그리스어 대사에 해당하는 자막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중시키는 재치만이 잠시 빛날 뿐이다.
또한 중간중간 삽입되는 액션 역시 흥미를 돋우는 데 실패한다.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액션 시퀀스는 신선하지 않다. 단적인 예로 주차장 건물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시간대만 낮으로 다를 뿐,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처음 등장하는 주차장 장면과 유사하다. 유사한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도 한다. 액션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베킷의 능력 역시 몰입을 방해한다.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거나 건물 3층 높이에서 보어내려도 좀처럼 지치지 않고 고장 나지 않는, 슈퍼 히어로에 필적하는 그의 내구성과 신체적 능력은 영화의 개연성을 과하게 파괴한다. 특히 그리스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액션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베킷>은 이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유렵연합, 미국이 뒤얽힌 정치 스릴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 못했다. 영화는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 SYRIZA)이 정권을 잡고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를 시행한 2015년 전후를 배경으로 삼은 듯 보인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세 번째 구제금융의 대가로 유럽연합에서 제안한 긴축재정 시행을 두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진좌파연합은 그리스의 경제 주권을 침탈한다는 이유로 긴축안을 거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를 경험한 후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미국은 그리스가 유럽 연합 대신 러시아 혹은 중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나토의 방어체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를 걱정 중이었다.
문제는 영화의 불친절함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의 국내외 정치적 배경을 좀처럼 알아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철저히 베킷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그 결과 그리스의 정치 상황도 그저 외국인이자 관광객의 시점에서 묘사될 뿐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스,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가 얽히고설킨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미국 대사관에 걸린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에 모두 함축되어 암시되는 것이 그 예시다. 베킷이 그리스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미국 대사관과 좌익 활동가로부터 각각 입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베킷이 발견한 어린 남자아이의 중요성을 정반대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해석한 정보는 필연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고, 이는 베킷과 시청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그리스의 현실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경우, 영화의 흐름과 전개를 쫓는 것도 녹록지 않다.
그러다 보니 <베킷>의 주제의식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화는 미국 대사관의 도움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베킷과 자국민 보호라는 의무를 저버린 대사관 직원을 대비시키면서 국민의 보호라는 국가의 윤리적 의무와 현실적 이익의 충돌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이 작중 가상의 그리스 우익 정권을 미국 정부가 돕고, 미국 대사관 측에서 교통사고로부터 그리스 정치계를 뒤흔들 단서를 발견한 평범한 미국 시민을 제거하려는 동기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자국의 이익과 반대로 행동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캐릭터인 베킷,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의 변화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신뢰를 저버릴 때 초래할 나비효과를 상징한다. 잘못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으로 인해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메시지는 분명 의미심장하다. 단지 명료하게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베킷>의 실패는 영화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연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모습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베킷보다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침착한 톤을 유지하며, 주인공을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 빠트린다는 흐름 상의 유사점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킷이 <테넷> 속 '주도자'로 보인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베킷이라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극의 완성도가 높지 못했기에 영화의 얼굴인 주연 배우에게 다른 얼굴이 온전히 덧입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킷 혼자 나오면 무색무취하던 영화가 에이프릴과 레나가 등장할 때 잠시 생동감을 되찾는 것만 보더라도 <베킷>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Poor, 형편없음)
설렘 없는 로맨스, 지루한 추격전, 이해가 되지 않는 정치극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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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9월 셋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태풍의 영향으로 월요일은 전국적으로 흐리지만, 화요일부터는 맑아진다고 합니다.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9월 셋째 주 개봉주 주말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공조2: 인터내셔날> (-)▶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개봉한 <공조2: 인터내셔날>이 주말에 9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추세라면 500만 관객도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91만 6,37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73만 2,51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육사오(6/45)> (-)▶ 시사회를 시작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유지되고 있는 <육사오(6/45)>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현재 2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억지 신파를 최소화 했다는 점이 긍정적인 평을 받는데 한 몫한 것 같다.
주말 동안 (8월 26일~8월 28일) 관객 수 12만 1,99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83만 7,660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 (-)▶ 추석 연휴를 겨냥했던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은 추석 연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순위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TV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커진 스케일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38만 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3만 9,96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18회 예측 이벤트는 9월 셋째 주 주말 독립예술영화 순위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9월 3주 차 박스오피스 순위의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이번에는 씨네픽 유저분들의 예상과 다른 영화가 1,2,3위를 차지하면서 굉장히 낮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어짜다 공주, 닭냥이 왕자를 부탁해!>를 1위로 예상하신 유저 분들이 5%를 차지했고,
<오! 마이 고스트>를 2위로 예상한 유저 역시 5%를 차지했습니다.
<9명의 번역가>를 3위로 예상한 정답자 비율은 8%, 세 가지 중 가장 높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19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헌트> (▼1)▶ 9월 둘째 주에 3위를 차지했던 <헌트>가 한 단계 떨어진 4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관객 수 역시 둘째 주와 비교했을 때 약 3.5배 하락하였는데요.
개봉한 지 거의 6주차에 접어들었고, 새로운 기대작이 개봉하며 점점 낮은 관객 수를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 9월 18일) 관객 수 2만 4,69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32만 7,67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탑건: 매버릭> (▲1)▶ 9월 둘째 주 TOP5 안에 들어서지 못했던 <탑건:매버릭>이 9월 셋째 주에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올해 영화 중 가장 오랫동안 상위권을 차지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1만 4,65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815만 6,319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The Woman King>이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며, TOP 5 순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Top Gun: Maverick>이 순위권 밖으로 떨어졌으며, <Barbarian>도 순위가 떨어졌습니다.
주말 동안(9월 16일- 9월 18일) <The Woman King>의 매출액은 19,000,000 (한화 약 263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 역시 동일합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9월 16일 ~ 2022년 9월 18일)1. <더 우먼 킹> 1900만 달러 (누적 1900만 달러)2. <바바리안> 630만 달러 (누적 2,091만 달러)3. <Pearl> 312만 달러 (누적 312만 달러)4. <See How They Run> 310만 달러 (누적 310만 달러)5. <불릿 트레인> 250만 달러 (누적 9638만 달러)...씨네픽의 9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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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일의 밤> 불교 엑소시즘의 성취와 한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북산 암자의 ‘하정 스님(이얼)'은 부처가 봉인한 악귀 ‘붉은 눈’과 ‘검은 눈’ 중 '붉은 눈'이 풀려났고,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올 것임을 직감한다. 이에 그는 2년째 묵언수행 중인 제자 ‘청석(남다름)'을 귀신을 천도해야 한다는 숙명과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박진수’(이성민)에게 보낸다. 청석은 정체모를 소녀 ‘애란(김유정)'을 만나 '검은 눈'이 들어있는 사리함을 잃어버리는 등의 낭패 끝에 진수를 찾는 데 성공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진수는 애란이 ‘붉은 눈’이 거쳐야 할 7개의 징검다리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한편, 괴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일같이 발견되자 강력계 형사 ‘김호태’(박해준)와 후배 ‘박동진’(김동영)은 시체들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제8일의 밤>은 낯설다. 단지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라서가 아니다. 이미 <검은 사제들>을 필두로 <사바하>, <사자>, <변신>, <곡성> 등 많은 오컬트 작품들은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제8일의 밤>은 낯설다. 우선 십자가, 사제나 목사, 신과 악마, 라틴어 대신 염주와 도끼를 들고 산스크리트어를 외는 승려가 전면에 등장한 그림부터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낯선 것은 그간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배경이었던 기독교적 세계관 대신 불교적 주제의식에 근간을 둔 이야기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업(業)'과 '유식(唯識)'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의 존재와 퇴치 방식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퇴마록이 낯설다.
<제8일의 밤>의 불교적 세계관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여덟 번째 밤은 봉인에서 풀려난 ‘붉은 눈’이 자신의 반쪽, ‘검은 눈’을 찾아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해지는 날을 말한다. 이러한 제목은 불교에서 중생이 받는 고통과 수행해야 할 계율을 주로 8가지로 나눈다는 점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붉은 눈이 반드시 7개의 징검다리를 밟아야만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특히 흥미롭다. 이 설정이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원인에서 결과, 결과에서 또 다른 원인이 되며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업'을 시각화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악귀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한 여고생이 숱하게 가출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녀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결과 붉은 눈은 그녀를 손쉽게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영화를 지탱하는 두 쌍의 주인공들에게서도 서로의 행위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업보로 되돌아오는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등 뒤에 천도해야 할 영혼들이 가득한 진수와 사탕을 먹고 새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청석 간의 접점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불상사를 모두 알고 있는 진수는 청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사로잡힌다. 호태와 동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경찰로 일하기 힘들어 보이는 동진을 보면서 호태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동진은 부적을 자그마한 선물로 건넨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번민에 빠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주인공들이 자신의 업으로서 따라온 번뇌와 번민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들은 좀처럼 악귀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붉은 눈에게 농락당하고, 호태는 연이은 살인 사건의 실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각자의 행동이 틀렸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번민과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행위는 거듭 악을 돕고 만들어 낸다. 결국 <제8일의 밤>에서 악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며 그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가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시작할 때만 해도 단순한 악귀로 설명한 붉은 눈과 검은 눈에게 영화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각 번뇌와 번민이라고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다.
그래서 붉은 눈의 모습으로 나타낸 악귀를 퇴치하는 이야기로 보이던 <제8일의 밤>는 개개인의 업과 업보로써 악의 기원과 존재를 설명한 이상 진수와 호태가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우칠 도구로 '유식'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물리적 현상 세계는 상대적 관계인 연기에 의해서 잠시 생겨나고 보였다가 없어지는 세계이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객체라고 착각하는 것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주체이자 마음의 작용인 '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 작용, 마음에서 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살펴보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에 담긴 교훈이기도 하다.
식의 존재와 중요성은 똑같이 자신의 파트너를 쫓아 북산 암자로 향한 호태와 진수가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경찰로서 확실한 사실과 팩트, 변하지 않은 원인을 쫓던 호태는 연이은 살인사건 그 이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동진과 얽힌 과거사를 온전히 풀어내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퇴장한다. 반대로 진수는 자신과 청석의 가족 사이에 있었던 악연과 그로부터 비롯된 번뇌가 악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스스로와 청석을 결과적으로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진수는 애란을 죽여야만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이 오히려 악귀가 마지막 징검다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로부터 그가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맹신하는 대신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진정으로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악의 기원, 악과의 대면, 악과의 싸움과 퇴치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성하는 <제8일의 밤>의 시도는 귀를 맴도는 낯선 문구로 축약할 수도 있다. 진수는 악귀와 대치할 때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ṁgate bodhi svāhā)"라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을 반복해서 외운다. 한자로 음차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는 꽤 익숙한 문구가 되는 이 주문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영어로는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인 이 문구는 '이미 이 세상에 온, 세상에 있는 진리를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자'는 격려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악귀에게 저주를 걸거나 그를 옥죄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깨달음을 먼저 찾자고 외는 진수의 모습은 일반적인 퇴마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고, 그렇기에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한 데 요약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8일의 밤>은 기존의 한국 오컬트 영화들의 문법 대신 불교적 맥락 안에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구축했고, 이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이 과연 선택한 소재의 잠재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제8일의 밤>은 퇴마록, 엑소시즘의 구성을 빌려 결국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드라마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인식 및 기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당장 대승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 불교에서 붓다와 보살 같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이 악귀를 물리치면서 일반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 대목은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제압하는 부처가 등장하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처럼 불교적 세계관과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엑소시즘 영화의 장르적 지향, 관습을 일치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프닝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괴리감을 낳고 이는 강력한 호불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승려와 무당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것에 비해 불교와 무속 신앙의 관계와 그 안에 담긴 잠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무속 신앙에서 명당으로 여기는 장소마다 절을 세운 것, 그래서 유달리 승려가 용을 내쫓고 그 자리에 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많은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둘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작중 처녀 무당은 단지 주인공들의 숨겨진 과거를 줄줄이 늘어놓는 도구로 소비되는 데 그쳐 버린다. 그래서 나무에 방울과 깃발들을 달아두어 마치 소도를 연상케 하는 처녀 무당의 점집과 같은 장치 역시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사뭇 아쉬움이 남는다. 소도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성역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 권력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더 밀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소재를 담아내는 그릇을 잘못 만들었다는 문제도 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작중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 것이 대표적이다. 애란은 등장한 순간부터 나름의 반전을 위한 캐릭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청석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 전부 우연으로 가득하다 보니 아무리 불교적 교리를 차용한 전개라고 해도 그녀의 서사는 좀처럼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개를 비틀기 위해 등장시킨 동진이 호태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연성을 갖추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인물들의 과거사와 관계를 부각해 그들 중 누가 붉은 눈의 징검다리가 될지 여부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이유다.
그 외에도 8일로 나눠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구성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건의 발단을 알리는 첫째 날과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지는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면 남은 6일은 붉은 눈의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것 말고 사실상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도 악귀와 진수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연기와 북산 암자가 위치한 절벽의 모습 등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어색한 CG의 흔적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그 결과 신비로운 분위기 안에서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볼 메시지를 던지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제8일의 밤>은 결국 자신의 낯섦을 신선함과 새로움이 아닌 애매모호함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선구안이 좋다고 훌륭한 타자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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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 엘리트는 노동자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7★/10★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캉. 한 여성이 복지센터에 들어와 거칠게 항의한다. 서류 미비로 기초수급자 자격을 상실한 그는 잔뜩 화가 난 상태다. 직원들은 예약을 잡고 다시 오라고 달래지만 서류와 자격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그는 좀처럼 물러날 것 같지 않다. 그런 여자를 조용히 지켜보는 또 다른 여자가 있다. 이름은 마리안이다. 그는 장내가 정돈된 후 상담실로 들어가 자기 처지를 털어놓는다. 법대를 졸업했으나 결혼 후 23년 동안 가사노동만 했고, 취업 시장에서 통할 이렇다 할 경력은 없다. 남편이 외도로 떠난 후 직접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상담사는 마리안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정규직 청소 일밖에 없다고 말한다. 마리안은 그것도 좋다고 답한다. 마리안은 이내 일터로 투입되고 청소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그녀가 갑자기 수첩을 꺼내 들더니 무언가를 빠르게 적는다. 그러고는 누가 볼까 싶어 얼른 수첩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렇다. 마리안의 사연은 모두 가짜다. 그는 저명한 르포 작가로 직접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으로 책을 쓴다. 이번에 쓰려는 책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험난한 삶이다. 그래서 지인이 없는 도시로 왔고 사연을 꾸며내 상담받은 후 일자리까지 얻은 것이다.
마리안은 빠르게 일터에 적응한다. 동료들과도 가까워진다. 문제는 동료들이 마리안의 정체를 모른다는 점이다. 일을 마친 청소노동자들이 함께 볼링을 치는 장면을 보자. 술과 음료를 판매하는 볼링장이지만, 이들은 주차장으로 나와 직접 가져온 술을 마신다. 볼링장 안에서 파는 술은 비싸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 행위 동기를 안다면 수치스러울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수치심이야말로 마리안이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많이 담아낼수록 마리안 책의 가치도 높아질 것이기에.
마리안은 몇몇 동료 중 크리스텔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크리스텔은 마리안이 복지센터에서 상담을 기다릴 때 기초수급 자격을 잃었다며 소란을 일으킨 인물로, 현재 혼자 세 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중이다. 마리안은 크리스텔과 친구/취재원의 경계를 오가며 점차 깊은 관계를 맺는다. 크리스텔과의 인상적 대화를 기록하며 책 집필 방향을 잡는다. 크리스텔의 아이들과도 친해진다. 처음엔 팍팍한 삶에 불쑥 들어온 마리안을 경계하던 크리스텔 역시 마리안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다. 마리안이 계산적인 목적만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다. 마리안은 크리스텔이 마음에 들며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크리스텔은 마리안이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데서 동질감을 느낀다. 소득과 생활수준이 비슷하고, 노동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두 사람 유대의 핵심이다.
마침내 마리안의 정체가 폭로된다. 크리스텔은 큰 충격을 받는다. 마리안은 크리스텔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지만 거짓 위에서 정초된 관계에서 그의 진심은 오히려 상대의 화를 더욱 돋울 뿐이다. 둘이 진정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강조될수록, 크리스텔이 느끼는 배신감과 모독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얼마 뒤 책이 출간된다. 마리안의 책은 큰 관심을 받는다. 서점에서 진행한 출간 기념 행사에는 마찬가지로 마리안의 비밀을 몰랐던 또 다른 동료들이 참석해 마리안의 작업을 칭찬한다. 마리안이 자신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것이다. 즉, 마리안의 작업에는 그 의미를 확정적으로 재단하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는 엘리트보다는 잠깐이나마 비정규직의 삶을 ‘체험’하고 그를 세상에 알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엘리트가 확실히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를 갖고 한 일이 ‘좋은’ 결과를 낸다고 해서 모든 윤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안은 아직 크리스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마리안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크리스텔은 마리안을 불러낸다. 그리고 이전처럼 여객선 청소를 하자고 제안한다. ‘너’가 정체를 숨기고 하고자 한 일을 이룬 후에도 ‘나’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크리스텔은 단 한 번이라도 마리안이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마리안과 친구로 남을 의향이 있다. 마리안의 선택은? 눈물지으며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마리안은 근사한 옷을 청소복으로 갈아입지 않는다. 크리스텔은 그럴 줄 알았단 냉소적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곧바로 일터로 향한다. 좌파 엘리트는 노동자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논쟁적인 질문에 대한 이 영화의 답은 ‘아니오’다. 영화는 좌파 엘리트가 자신의 대의와 업적, 명예를 위해 노동자를 이용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가 어떤 효과를 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조지 오웰과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당장에 떠오르는 몇몇 반례(어쩌면 무수한 반례)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질문과 대답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 반례가 적절하지 않다고 정당하게 문제제기할 수도 있다. 토론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 논쟁적인 영화가 무척이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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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랜드 후기 / 미국 국립공원의 사계절 / 영직남 강추 초힐링 무비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랜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대자연, #힐링, #로빈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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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워닝 쇼트: 아이 엠 마더>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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