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2-17 18:04:44
9월 5일 | 언론이 놓친 미덕을 비극으로부터 찾아내다
<9월 5일: 위험한 특종>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현지 생중계 중이던 미국 ABC 방송국 스포츠팀. 어느 날 새벽, 올림픽 선수촌에 총성 여러 발이 울러 퍼진다.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대표팀 숙소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인 것.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ABC 스포츠 사장 '룬 알리지'(피터 사스가드)는 본사 국제부 대신 스포츠팀이 뉴스를 보도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스포츠 운영 총괄자 '마빈'(밴 채플린)은 타 방송국과 위성 시간대를 바꾸는 협상에 돌입하고, PD '제프리'(존 마가로)도 독일인 통역사 '마리안네'(레오니 베네쉬) 도움을 받아 인력과 카메라를 새로 배치한다. 갑자기 시작된 인질극 단독 생중계에는 시청자 9억 명이 몰리며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ABC 스포츠팀의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된 순간, 테러범들도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파헤치다
1972년 9월 5일. 뮌헨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올림픽 선수촌에 난입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서독 경찰에 의해 범인들은 모두 사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도 사망했다.
'뮌헨 올림픽 참사'의 원인으로는 여러 요소가 지목된다. 서독 경찰의 경우 대규모의 조직적 민간인 인질극을 예상하지 못한 나머지 테러 진압 작전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언론도 경찰 못지않게 비판받았다. 사건 당시 선수촌 상황이 TV로 생중계된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이 TV를 보면서 서독 경찰의 진압 작전을 실시간으로 파악한 후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언론 입장에서도 변명거리는 있다. 대규모 테러 인질극 보도는 전례가 없었기에 발생한 실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9월 5일: 위험한 특종> (이하 <9월 5일>)은 참사 당시 언론의 대응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며, 그보다는 언론 내부의 메커니즘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오류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9월 5일>의 건조한 비판은 살이 아리듯 날카롭다. 반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내부만 들여다보다
<9월 5일>의 가장 큰 특징은 선택과 집중이다. 영화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다루고 있지만, 직접 묘사하지는 않는다. 테러리스트가 작전 계획을 짜고, 선수촌 내부로 진입하고, 인질을 사로잡고, 경찰과 대치하는 식의 이미지는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카메라는 ABC 올림픽 스튜디오 외부 광경 자체를 안 비춘다. 테러리스트와 인질이 탄 헬리콥터를 보기 위해 주인공들이 밖으로 나가는 장면 정도가 몇 안 되는 예외다.
그 대신 간접적인 수단을 활용해 상황을 연출한다. 선수촌에 몰래 잠입한 현장 기자들의 전화나 무전, 선수촌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에 잡힌 장면, 도청한 서독 경찰의 무전 및 경찰의 공식발표가 적힌 팩스 등.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다준다. 우선 등장인물도, 관객도 외부 상황을 알 수 없기에 매 순간 서스펜스가 극대화된다. 한편으로는 이미 유명한 사건보다는 사건을 다루는 언론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9월 5일>이 묘사하는 언론의 모습은 다른 영화에 등장한 언론과는 다르다. 언론을 다루는 영화는 대체로 기자 개개인의 취재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이 가톨릭 사제 아동 성추행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취재원과 접촉하고, 과거 자료를 분석하는 모습을 따라가는 구성을 취했다.
<9월 5일>은 다르다. 이 작품은 기자들이 어떻게 취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로지 언론 내부의 의사결정 상황에 주목한다. 누가 선수촌으로 가고 앵커와 PD는 누가 맡을지, 경찰 소식은 어떻게 확인할 것이며, 스포츠팀이 테러 소식을 전할지 아니면 미국에 위치한 본사에서 이 뉴스를 담당할지 등. 뉴스 한 꼭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언론 내부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침착하게 따라간다.
신속함과 생생함이라는 허상
그 덕분에 <9월 5일>은 언론인을 혼란에 빠트리는 두 가지 딜레마를 포착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매번 선택을 내려야 하는 분기점마다 현장감과 윤리, 신속함과 정확성 사이에서 고뇌한다.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언론의 가치이지만, 양립하기는 어렵기 때문. 결국 그들은 윤리보다는 현장감, 정확성보다는 신속함을 우선순위로 두기로 결정한다.
이 선택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일례로 제프리는 ABC 스튜디오가 선수촌 바로 옆에 위치했다는 이점을 살리기로 결정한다. 스튜디오 카메라 두 대를 밖으로 빼서 선수촌을 생중계하여 가장 생생한 그림을 시청자에게 보여주겠다는 것. 하지만 이는 상술했듯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경찰의 선수촌 진입 작전을 테러리스트에게 일러바치는 꼴이 됐기 때문. 현장감을 살리려다가 뉴스 당사자들을 고려하지 못한 우를 범한 셈이다.
정확성보다 신속함을 우선순위에 둔 결과물도 처참하다. 경찰이 공항에서 테러범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프리는 이를 곧장 속보로 내보낸다. 다른 방송사나 언론사보다 늦을 경우 ABC의 신뢰성과 지위가 손상될 수 있다고 걱정하면서. 그 결과 오보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
두 장면 모두 저널리즘의 본질적 약점을 보여준다. 다른 방송사, 언론사와의 경쟁 때문에 필연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가치와 우선시되는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방송사보다 신속하게 생생한 현장을 보여줘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마빈처럼 현장감에 앞서서 윤리를, 신속함보다는 정확성을 고려하자는 의견은 최초, 단독, 속보라는 타이틀이 가장 중시되는 언론 생태 내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의 미덕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이 눈에 띈다. 바로 영화가 호흡을 고르는 컷들이다. <9월 5일>은 급박한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 번씩 템포를 늦추면서 템포를 조절한다. 인질로 잡힌 이스라엘 선수와 코칭스태프 사진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크기를 키우고, 생중계 화면에 자막을 삽입하기 위해 알파벳 모형을 재배치하며, 현장 기자가 찍은 영상 중 필요한 장면만 편집하는 모습을 비추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모든 작업은 아날로그로 이루어진다. 사진 크기를 키우려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재촬영한 뒤 인화해야 한다. 알파벳 모형도 담당자가 손으로 배치하고, 필요한 영상도 전체에서 직접 잘라내야 한다. 현재 방송사의 디지털화된 뉴스 제작 방식에 비하면 일견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품을 들이는 과정 덕분에 제프리와 그의 팀은 시청자에게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방법을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할 여유가 생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9월 5일>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아무리 급박해도 언론은 한 템포 끊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룬과 마빈은 생중계 도중 인질이 살해당할 경우 뉴스를 끊어야 할지를 두고 대립한다. 하지만 그들이 뉴스 스튜디오 밖에서 한 박자 쉬어가자 제프리의 입에서 둘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절충안이 튀어나온다.
그와 반대로 단독과 속보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제프리는 인질 구출 소식을 크로스체크해야 한다는 마빈의 의견을 묵살한다. 그 순간 ABC는 제프리가 한 템포만 끊고 현장에 나간 마리안네의 연락만 기다렸어도 막을 수 있었던 희대의 오보를 내보내고 만다. 이 두 장면의 대조는 한 번 쉬어갈 줄 아는 미덕과 여유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다.
반 세기 전 사건을 다시 보는 이유
이는 1972년에 발생한 사건을 2025년에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요즘 언론에게 신속한 정보 전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언론이 다루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SNS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이기 때문.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의 뼈아픈 실수를 조명하는 <9월 5일>의 함의는 분명하다. 지금은 속보, 단독 경쟁이 아니라 한 호흡 쉬어가는 여유를 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보도 형태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과연 언론이 변화할지는 <9월 5일>도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제프리는 자신이 오보를 책임지겠다며 자책한다. 하지만 룬은 다음 날을 위해 쉬라고 격려할 뿐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풀 죽은 제프리가 룬의 사무실을 나설 때, 다른 동료는 잔뜩 흥분한 채로 룬에게 새로운 아이템을 제안한다. 총격전이 발생한 공항에 헬기를 비롯한 잔해가 남아 있을 테니 가장 먼저 그 현장을 찍어서 보여주자고.
그 순간 제프리의 자책에서는 언론의 변화를 바라는 소망이, 다른 동료의 아이디어에서는 이전 관습을 되풀이하려는 언론에 대한 회의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희망과 의구심이 순간적으로 교차되는 <9월 5일>의 결말은 특히 인상적이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택권을 넘기면서 균형성과 공정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손수 실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물론 <9월 5일>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캐릭터가 단순히 도구에 머무른다. 각 주인공의 개인사가 일절 언급되지 않다 보니 관객은 그들과 교감할 방법이 없다. 그들이 자기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그 결과 때문에 좌절하더라도 감정적 동요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차분하고 침착한 수준을 넘어서서 건조해진다.
이는 비슷한 결의 작품인 <스포트라이트>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교회와 연이 있는 기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범죄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배신감, 회의감, 고뇌를 직간접적으로 녹여냈다. 이러한 감정선의 부재 때문에 <9월 5일> 마치 재연 다큐멘터리 같다. 언론 내부 사정에 관심이 없을 경우 급박한 상황 전개마저 지루하게 느껴질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서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세기의 차이를 뛰어 넘어서 언론의 본질, 가능성과 한계를 꿰뚫어 보는 <9월 5일>의 통찰력만큼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이 왜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제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제30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각본상, 편집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202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을 본격적으로 즐길 시작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반 세기가 지나도 여전한 한계와 반 세기가 지났기에 기대하는 가능성의 공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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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다 액션하는 말벌 아저씨 등장이요!
시원하다! 보이스피싱범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도 제이슨 스타뎀의 호쾌한 액션도. 극 중 양봉업자로 분한 제이슨 스타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꿀조차 사이다처럼 청량함이 느껴질 정도. <트랜스포터> 시리즈에서 느꼈던 그의 원초적 액션 매력을 다시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 7주 연속 1위, 글로벌 흥행수익 1억 5천만달러를 돌파하며 이미 속편 제작이 결정되었다. 역시 사람은 하던 걸 해야 하고, 자신이 잘하는 걸 해야 하는 건가. 단점도 상쇄하는 그의 발차기 위력은 대단하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일만 하는 애덤(제이슨 스타뎀)은 양봉업자다. 근육도 표정도 화가 단단히 난 상태에서 벌통을 옮기며 꿀을 만드는 그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이웃에 사는 엘로이즈(필리샤 라샤드)는 언제나 반가워하며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결국 자살을 한다. 자신이 누구든 따뜻하게 받아줬던 유일한 이가 세상을 떠나자 애덤은 복수를 계획, 보이스피싱범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적을 단숨에 제압하고 불까지 지른다. 과거 세계 정의와 균형을 지키는 비밀조직 ‘비키퍼’의 요원이었던 그에게 이 일은 껌에 불과하다. 성에 차지 않은 그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보이스피싱 사업 우두머리를 쫓고 관련 인물들을 하나씩 처리한다.
<비키퍼>의 정체성은 액션이다. 제이슨 스타뎀이 주연과 제작을, <수어사이드 스쿼드> <퓨리>의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이 연출을, <이퀼리브리엄> <솔트>의 커트 위머가 각본을 담당했다. 액션 영화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 손을 잡고 만든 이 작품은 액션으로 대동단결. 스토리보단 액션에 방점을 두고 봐야 하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비키퍼>는 오랜만에 장르 영화에서 느끼는 액션 아드레날린이 분출된다. 제이슨 스타뎀과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은 관객들이 원하는 바를 액션으로 실현시키는데, 적을 무력화시키는 스피드와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타격감이 보는 이를 흥분시킨다. 정제되어있지 않은 거친 액션의 맛을 살리기 위해 그 수위를 높이고, 빠른 극 전개를 통한 몰입감을 키우기 위해 애덤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게 한다.
액션의 주요 포인트는 애덤과 적의 멋진 대결이 아닌, 애덤이 얼마나 빠르고 강하게 적을 쓰러뜨리는지에 있다. 혈혈단신으로 적을 향한 도장 깨기를 하는 것처럼 그의 손과 발, 주변 사물을 활용한 다채로운 움직임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존 윅, 마석도 형사가 생각나는 등 신선함이 떨어지는 부분이지만, 먼치킨 액션 트렌드 흐름에 맞춰가면서도 제이슨 스타뎀이 가진 액션 본능을 잘 활용했다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제이슨 스타뎀의 발차기를 봐서 좋았다.
감독은 액션의 맛을 한층 더 살리고, 애덤의 액션 질주에 최소한의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보이스피싱이란 현실 소재를 가져온다. 더 나아가 벌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여왕벌을 죽이는 ‘비키퍼’처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애덤의 비현실적 설정은 괴리감보단 시원함을 안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는 고위층들의 행태에 치명타를 날리는 그를 누가 싫어할까. 단, 이런 소재 차용임에도 스토리의 전개 과정에서 빗어지는 빈약함은 감안해야 한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비키퍼>가 북미를 포함한 높은 글로벌 수익, 준수한 해외 평점(로튼토마토 신선도지수 71% 팝콘 지수 92%)을 받은 건 그만큼 대중들이 바라는 지점을 만족시켰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미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 점점 있는자들의 세상이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체념한 사람들의 울분이 이 영화를 통해 폭발한 느낌이다. 마치 여왕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비키퍼에게 꼭 처단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결은 다르지만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그 누구도 잡지 못하는 범죄자를 처단할 때의 카타르시스와 오버랩된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해갈했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제작진의 승리. 앞으로 나올 속편에서는 어떤 부분을 긁어주려나. 벌써부터 ‘윙윙’ 호쾌한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사진 제공: (주)바른손이앤에이
평점: 3.0 /5.0
한줄평: 호쾌한 먼치킨 영화 한 편 더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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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 여성 커플의 제자리 찾기
씨네랩의 초정 시사로 개봉 전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나무들이 나란히 길게 배열되어 있는 어떤 강가의 공원에 두 아이가 있다. 까마귀들이 연신 울어대는 한적한 그 공원에서 두 아이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한 아이가 어떤 나무 뒤에 숨고, 다른 아이는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 한 아이가 숨은 아이 근처로 가면 숨은 아이는 그를 피해 조금씩 자리를 옮긴다. 그렇게 한참 두 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숨은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찾던 아이는 숨은 아이가 보이지 않자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까마귀 소리다. 영화 <우리, 둘>의 오프닝 장면이다. 이 오프닝은 향후에 등장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와 그 관계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어 궁금증을 유발한다.
영화 <우리, 둘>은 여성 커플인 마도(마틴 슈발리에)와 니나(바바라 수코바)의 이야기다. 이들은 20여 년 전 로마에서 처음 만나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지만 주변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그 관계를 알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마도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아 길러냈다. 남편과는 사별했지만 아이들과는 여전히 교류 중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마도와 니나는 바로 앞 집에 살고 있어 매일 만나고 사랑을 나누지만, 마도의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알리지 못하고 있다. 니나는 마도에게 가족에게 비밀을 알리고 로마로 가서 남은 생을 보내자는 제안을 한다. 결과적으로 니나의 이 바램과 제안은 영화 내내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 버린다.
할머니가 된 20년 차 커플, 마도와 니나의 이야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조금은 불편하고 어려운 것을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서로의 관계에서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들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꽤 많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에 더해서 그 관계가 동일한 성이라고 했을 때 마음속의 장벽은 외부의 시선으로 인해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 <우리, 둘>의 주인공, 마도와 니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외부에 공개를 하려고 했다가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담겨 있다.
영화 속 두 사람이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비밀관계를 유지했는지, 아니면 마도가 결혼하고 남편과 사별한 이후 이 둘이 다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영화는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이 둘이 마음 깊숙이 서로를 사랑하고 원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영화 초반에 마도와 니나가 마도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느 연인처럼 그들은 스킨십을 하고 밥을 먹고 대화를 한다. 이제 할머니 나이가 된 그들의 외모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어떤 편견도 없이 사랑하는 일반적인 부부나 연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은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의 눈치를 보다 말을 하지 못한 마도는 그것을 알게 된 연인 니나의 짜증도 받아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그만 쓰러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이 니나에게 주는 영향은 크다. 공개되지 않은 관계인 탓에 공식적인 보호자가 될 수 없고, 니나가 마도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주변의 시선은 따갑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니나지만 그는 자신의 연인에게 다가가서 품어주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니나는 마도에게 다가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질 때마다 좀 더 과격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조금씩 과격해질 때마다 모든 것이 깨질 것 같은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영화의 템포를 빠르게 만든다.
마도의 뇌졸중 증상 이후 서서히 공개되는 그들의 관계
꽤 오랜 기간 동안 주변에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를 알리지 못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그들의 달콤한 사랑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느 로맨스 퀴어 영화들과는 다르게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나 사랑을 나누는 모습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의 관계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응과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영화에 중점적으로 담는다. 영화의 제목이 <우리, 둘> 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의 반응과 갑작스러운 질병 등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도와 니나가 서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끌어가는 건 그들 두 사람의 힘이다.
영화 맨 처음에 나왔던 두 아이는 마도와 니나라고 할 수 있다. 숨바꼭질을 하다 갑자기 사라진 아이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마도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는 니나로 보인다. 그 아이가 까마귀 목소리를 내면서까지 다른 아이를 부르는데 여전히 친구를 찾지 못한다. 실제로 니나는 마도를 다시 보기 위해 간병인을 이용하거나, 한밤중에 마도의 집에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가 마도를 보고 나온다. 그리고 어느 날은 마도의 딸 집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마치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이가 기이한 까마귀 소리를 내는 것처럼 니나는 상대방을 찾기 위해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지 않은 기이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중반 마도의 상상이지만, 마도가 물속에 빠진 아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고, 물속에 빠진 아이를 니나가 건져내는 장면은 서로의 관계를 복원한다는 일종의 영화적 암시다. 이런 은유적인 장면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여러 가지 시각으로 재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니나가 마도를 찾기 위해 점점 과격해지는 모습은 보는 입장에서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자신이 마도를 찾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이용하거나,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마도의 가족을 대하는 모습은 니나의 상실감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과도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사랑이 집착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마도와 니나의 노력
영화는 니나의 뒤를 따라가지만 마도의 반응도 놓치지 않는다. 뇌졸중 증상 이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주던 화면은 니나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변하게 된다. 특히 마도의 몸 전체를 화면에 잡기보다는 마도의 얼굴 중 두 눈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니나의 행동에 따라 나오게 되는 반응을 눈의 초점이나 눈이 여기저기를 바꿔가며 보려 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니나의 노력에 마도가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노력은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니나의 노력과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니나가 싸우는 것은 외부의 관계가 대부분이지만 마도는 자기 자신의 신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니나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노력이고, 마도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노력이다.
영화 속 마도의 딸 앤(레아 드루케)과 아들 프레드릭(제롬 바랑프랭)의 반응도 인상적이다. 이 둘은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된 자신의 엄마와 이웃 여성의 관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차단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어떤 가족에게 이 일이 벌어졌어도 반응은 모두 비슷할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관계를 부정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분노로 표출된다. 영화에선 그들의 반응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지만 그들이 마도와 니나의 관계를 인정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자녀와 가족들의 반응이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마도와 니나에게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은 이 영화가 첫 연출작이다. 2020년 제10회 서울 국제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퀴어영화 평론가상을 수상했고, 2021년 46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데뷔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두 여성이 겪는 답답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고 긴박한 시선으로 담은 영화 <우리, 둘>은 기존의 퀴어 영화들과 조금은 다른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우리, 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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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은 ‘성장’의 다른 이름
노르웨이 오슬로에 사는 율리에. 그녀는 뛰어난 성적으로 의대에 입학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는다. 의대 진학은 ‘최고’라는 인정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기에 금방 싫증이 난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가 외과가 아닌 정신‧심리에 있다고 결론 내린 그녀는 심리학을 전공하나 이 역시 금세 그만둔다. 그다음은 사진 촬영이다. 요컨대 율리에는 방황 중이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 방황하는 율리에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상대는 중년에 접어든 악셀이라는 남자로 풍자 만화 작가인 그는 지적이고 신중한 구석이 있다. 율리에는 그와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한다. 율리에와 악셀은 오랜 기간 만남을 이어가며 사랑을 키운다.
부유하던 율리에에게 안정감을 줄 최적의 남자였던 악셀. 그러나 율리에는 점차 자신이 악셀과의 관계에서 얻은 안정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혼란에 빠진다. 나이가 있는 악셀은 아이를 원하고 작가라는 직업 탓인지 모든 걸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그가 작품 창작에 몰두할 때면 율리에는 그의 뒤에서 외로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어느 날 말다툼 끝에 악셀이 “뭘 하고 싶은데?”라고 묻는다. 그러나 율리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율리에가 악셀과의 사랑을 통해 갈구하고 얻어낸 것이 사실은 공허한 것에 불과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율리에 마음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가는 건 당연하다.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남자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파티에서 만난 에이빈드는 악셀과는 많은 것이 다른 남자다. 다소 마른 체형에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악셀과 달리 에이빈드는 몸집이 크고 유쾌하며 다정하다. 율리에가 엑셀과의 관계에서 결핍을 느꼈던 감정, 관능의 교류도 훨씬 수월하다. 처음 만난 날 술에 취해 서로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고 같은 변기에 소변을 보며 즐거워하는 율리에의 표정에서 그녀 마음의 방향은 이미 결정된 듯 보인다.
율리에가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결핍’이 키워드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삶의 목표가 없어 혼란스러울 때 만난 안정감을 주는 악셀, 감정적 공허함을 느낄 때 이를 충족해주며 등장한 에이빈드는 모두 율리에의 실현되지 않은 욕구를 충족해주는 대상이다. 그리고 율리에는 두 남자와의 사랑으로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여러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즉 율리에는 사랑으로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완전한 나”, 즉 외부에 덜 의지하고 자신에게 말미암은 단단함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 ‘VERDENS VERSTE MENNESKE’와 영어 제목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는 모두 ‘세계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국어 제목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비슷한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율리에는 과연 ‘최악’일까? 악셀과 에이빈드와 사랑하고 이별한 후 성장한 율리에는 이기적인 여자일까?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는 여성이 늘 남성 주체의 확립 과정에서 소모되어왔다는 점 때문이다. 설령 율리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두 남자와의 사랑을 활용했다손 치더라도 멜로영화의 젠더 저울이 반대로 기울지는 않는단 소리다.
두 번째는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며, 이 욕구를 동반한 채 타자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간다. 문제는 타자와 윤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가 아니다.* 불완전하며 열려 있는 존재는 누구나 타자를 필요로 한다. 율리에와 마찬가지로 악셀과 에이빈드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학습하고 변화를 마주했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그들의 몫이다.
두 번의 사랑 끝에 마침내 어른이 된 율리에는 평온해 보였다. 청년의 방황, 사랑의 열정, 결별의 아픔을 거친 율리에를 인상적으로 연기한 레나테 레인스베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자격이 충분하다. 사랑하는 모두가 ‘최악’을 ‘성장’으로 전환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율리에의 평온에 다다를 수 있기를.
*이를테면 페미니즘은 타자와 평등하게 만나기 위한 방법론, 인식론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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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DIRECTOR.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CAST. 케일럽 랜드리 존스, 해리 멜링 외
PROGRAM NOTE.
짐 크레이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티나 라켈 창가리의 <하베스트>는 폐쇄 위기에 처한 이름 없는 마을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월터는 그의 젖 동무이자 마을 지주인 마스터 켄트와 함께 이 외딴 마을에 정착했으며, 배타적이고 미신에 집착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과 분별을 지닌 인물이다. 7일간에 걸쳐 마을은 화재를 겪고, 추수 잔치를 벌이며, 외지인들을 핍박하고, 새로운 지주를 맞이하더니 결국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된다. 감독은 하나의 마을이 서서히 몰락하는 모습과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종말, 그리고 삶의 방식이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35mm 필름에 담아낸다. 신(新)국수주의가 떠오르는 가운데, <하베스트>는 추방과 강제 이주로 이어지는 지독한 외국인 혐오와 불관용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강렬한 우화이다. (박가언)
디지털 기술이 계속 발전하지만, 필름 특유의 아름다움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 <하베스트>가 그렇다. 테두리가 거뭇거뭇하거나 불그스름한 흔적까지 고스란히 스크린에 올린 이 영화는, 필름을 통해 다소 중세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우화를 참 우화로 만드는 건 이런 검박해 보이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곡식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로 사람의 손이 올라온다. 이제 막 날개를 펴는 나비에게 후 숨을 불고, 까만 흙이 낀 손톱으로 이끼를 만지다 못해, 이끼를 베어 물고 나무 옹이에 혀를 넣기도 하다가 급기야 알몸으로 물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자연 속에 거하는, ‘인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흙 낀 손톱처럼 자연 그대로인 모습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들판에 산들거리는 꽃이나, 쓰임새를 하나하나 일러주는 나무와 풀들, 거기서 양털을 꺾고 노동요 부르며 농사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얼핏 옛 유럽 그림엽서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사건들은 등락(登落)의 폭이 매우 크고, 그 낙차마다 사람을 놀라게 한다.
외지인은 누구인가
이 영화에는 여러 차례 외지인이 등장한다. 그중 절대다수가 트레일러에 등장하는데, 형틀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오는 사람들이다. 마을 토박이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외지인을 믿지 않으며,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합리적 판단보다는 익숙한 사람인지 아닌지의 잣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합리적 판단을 할 만큼의 시간조차 두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남자이자 중간중간 서술자로서 내레이션을 하는 월터는 한편으로 주민들의 삶이 배부르고 취한 짐승들 같다고 자평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삶을 꾸려 가고 있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에 비해 외지인에 열려 있는 사람이 그다.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싶어하고, 이름을 묻고 싶어한다. 이 마음은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belong”은 주요하게 반복되는 단어다. 마을의 아이들은 동네의 경계를 따라 걷다가 경계를 알리는 돌에 머리를 찧음으로써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똑똑히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을 외지인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단한 소속감은 기반 논리가 깊지 않다. 외지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이들의 계급이나 상황이 계속해서 다양해짐에 따라,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도 자반 뒤집기 하듯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물론 외지인의 말 또한 정답은 아니다. 동네를 “개선”하겠다며 소득 증대의 꿈을 꾸는 새로운 주인, 조단의 말은 아마도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소득이 증가하고 모든 게 좋아질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조단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농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토박이 동네를 떠나야 한다.
전통은 무조건적인 혁신으로 깨부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문을 닫아걸고 타인을 거부한다고 순수하게 계승할 수도 없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으로 넉넉한 사회만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계속되는 외지인들의 등장 앞에 우왕좌왕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식민지로 물들었던 20세기 어떤 국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지도는 어떻게 생겼는가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식한다. 지도 제작자 얼이 개인적으로 작업한 동심원형 지도를 보여주었을 때 “최고의 지도”라고 반가워한 것도 그래서다. 둥근 동심원형은 사방으로 잔잔한 파동을 퍼뜨리며, 설령 영역이 조금 겹쳐도 서로에게 뾰족하거나 유해하지 않다. 넉넉하고 너그럽고 부드럽다. 그러나 동심원형 제도는 얼의 개인 작업일 뿐, 그에게 의뢰되는 작업은 격자 무늬형 지도다.
네모반듯하게 구획을 자른 그 지도상에는 사람이나 나무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 그 지도에서 중요한 건 대략의 위치와 구획당 키울 수 있는 양의 수 정도일 것이다. 월터가 반박하듯 그 땅의 물과 흙, 심지어 땅을 돌아다니는 소의 특성까지도 확실히 알고서 그리는 동심원형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월터는 단박에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건 우리를 납작하게(flatten) 만든다고. 동심원형을 강제로 격자 모양에 쑤셔 넣으려면, 원의 가장자리는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여백으로 밀려나는(marginalized) 사람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다. 항해용으로 유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아프리카가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데, 실제로는 아프리카보다 훨씬 작은 그린란드가 더 커 보일 정도이다. 나름의 장점이 있어 활용한 도법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영국 같은 국가들이 좀더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많이 사용한 측면도 있다.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지하는 사람이기에, 외지인을 받아들인다. 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들과도 닮은 측면이 있다. 격자식으로 잘려 나가는 세계에서 한 줌 흙을 놓치지 않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 손가락질이 심긴 곳에서 비극이 피어난 곳을 보고도 흙에 씨앗을 심는 마음. 격자식 지도에 너무 익숙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마음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극장에서 두 시간씩 앉아 영화를 본다. 씨앗을 심고 거두듯이.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나그네는 영원히 나그네이고, 토박이는 영원히 토박이인가. 자리는 쉽게 뒤집힌다. 어쩌면 저기 저 사람의 어제는 나의 오늘과 비슷했을 수 있다. 나의 내일이 저 사람의 오늘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격자식으로 횡과 종을 마구잡이로 갈라 서열화하는 지도를 떠나, 둥근 원형의 지도를 마음에 품어야 하는 이유다.
비록 월터가 그 동심원을 실행한 방법이 (이 또한 정말 너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 같은) 무위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걸음의 방향에만큼은 고개를 끄덕여 본다.
10/03 16:3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상영코드 066)
10/08 20:00 CGV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395)
10/09 14: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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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는 그릇은 예쁘지만 정작 음식은 상해있는 느낌
피할 수 없던 공 하나
유달리 말이 없었다. 이경의 고등학교 생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왠지 자세가 굽은 이경. 그녀가 뭔가 기가 죽은 듯한 느낌을 풍기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날아온 공. 땅만 보고 가던 습관이 원인이 됐다. 안경이 부서졌다. 후다닥 달려오는 수이. "괜찮아?" 수이는 운동을 꽤나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수이. 왠지 모르게 다가오는 듬직한 카리스마에 이경이의 마음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본 두 사람. 거짓말같이 두 주인공의 인연이 시작됐다.
미안했던 것일까. 수이는 이경이를 자주 찾아갔다. 딸기우유를 가져갔던 수이. 그렇게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간다. 뭔가 첫 만남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직관은 금세 사실이 됐다. 사랑에 빠진 둘. 2002년 월드컵 전후의 시간적 배경에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아슬아슬한 첫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 사실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수이는 실업팀 축구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고, 이경이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 다른 길로 들어선 두 사람. 과연 둘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을까?
소설 원작과 애니메이션
일단 영화의 가장 큰 특성 두 개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과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징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 이 영화는 ‘쇼코의 미소’의 원작자 최은영 작가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 전부를 읽어본 건 아니지만 ‘쇼코의 미소’는 기억난다. 섬세한 필체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동선을 형상화한 능력은 최은영만의 문장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영화 군데군데 이 최은영 작가의 시각화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영화의 각색이 이 인물 간의 내면묘사를 얼마나 잘 살렸는지는 별개로 두고, 이야기의 구성이 인물의 내면묘사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서사들이 전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섬세한 문장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몇 개 있었다. 또 최은영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피드백을 받았던 걸까? 아쉬운 이야기 전개와는 반대로 반짝이던 대사 몇 줄이 있었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장르적인 특성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직접 그린 작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있어 시각적 쾌감을 전달하는 데 있어 모자람은 없다. 특히 영화 초반부 두 사람이 싹트는 과정에서 학교를 묘사하는 방식은 대단했다. 여름의 풍광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로맨스적 특성이 계절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정도다. 대사의 문장력만큼이나 큰 영화의 강점이었다. 물론 후반부에 겨울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전체적인 색감을 활용하던 것이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좋았다고 뽑을 수 있다.
두 사람
사실 글쓴이는 소설 원작이라는 점과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특성을 활용한 시각적 쾌감 말고 영화의 강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장점으로 느꼈던 것 중 몇 안 되는 것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왜 두 사람이 좋아하고 뭐 딜레마가 있고 가타부타 설명하는 것보다 본론만 딱 보여주는 전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로맨스 장르 영화에서 여운을 남겨주기 위해 이 부분을 디테일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핵심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부분에 사족을 붙이면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 ‘소수자와 다양성’에 영향이 갈 수도 있다. 이야기의 응집력이 딱 안 붙는 것이다. 초반부 이후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별개로 두고 이 선택은 감독이 좋은 수를 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물 세팅에 대해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 영화는 퀴어 로맨스물이다. 퀴어 로맨스라는 장르적인 세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캐럴>이나 <해피 투게더> 같은 영화도 퀴어 장르로서 로맨스 걸작으로 우리의 곁에 남아있지 않나. 두 영화에서 퀴어 로맨스라는 인물 세팅이 강점을 가졌던 부분은 주인공들의 설정이다. <캐럴>에서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이 맡았던 역할은 입장차이를 보여주되 내적인 설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특정 이미지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 집중해서 인물을 보여줬던 느낌이었다. 특히 이 <캐럴>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하는 두 장면은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만 보여주고 이미지에 편승하지 않았다. <해피 투게더> 같은 경우는 보영이 약간 여성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후반부까지 가면 입장이 전복된다. 이는 영화의 핵심 소재인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소재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연출이었다.
이 <그 여름>은 좀 진부한 이미지들에 기대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원작이 그렇다? 원작이 그런 결이라고 해도 각본가에겐 각색이라는 것이 있어서 딱히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첫째. 수이는 운동선수다. 이경은 소심한 인물이다. 전형적으로 안경을 쓰고 더 패턴화 되어있듯이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경. 왠지 우리가 아는 로맨스물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쌓아가고 있다. 수이는 여성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던 스포츠 선수라는 점과 쇼트커트 헤어스타일로 남자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데 이경은 전형적으로 약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게 퀴어 로맨스에서 품을 수 있는 섬세함이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너무 대놓고 성격 특성을 강조해서 상투적으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성별만 여자로 설정하고 운동선수라는 세팅을 갖다 놓으면 여성성을 탈피하는 서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걸까?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보고 싶었던 관객이라면 이 부분을 아쉽게 생각할 만하다. 그리고 수이의 파트너 이경의 내면묘사 역시 평면적이라는 점이 아쉽다. 뭐랄까 이 영화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을 가질 수 있던 지점 중 하나는 이경의 감정선일 텐데 내내 영화 후반부까지 이 부분을 직접 설명하고 있어 느낌이 잘 안 산다. 이 내용도 문제지만 전달하는 방식도 아쉬웠던 것이다.
다 짜여 있는 듯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두 개는 수이와 이경의 사랑이야기이자 성소수자들에 대한 다양성 문제다. 이 중에서 영화에 배경처럼 깔려있는 연출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선이다. 영화는 이경이가 대학을 가는 시점을 기점으로 찍고 1,2부로 이어져 있다. 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소재들을 군데군데 넣어서 이야기에 종합시킨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서 인물들이 약간 희생된 감이 있다. 우선 1부. 어린 이경이가 누군가에게 폭언을 듣는 장면이다. 이때 이 시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 단어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알고 있냐?는 차치하고 나서라도 이 장면이 주는 전달력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작동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눈치’는 영화에서 소모적으로 툭 던져진 느낌이 강하다. 특히 수이의 경우 역시 이경처럼 전형적인 학교생활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많은 학생들 중에 그걸 다 짚어낼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높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2부로 넘어간다. 2부에서는 두 사람의 공간을 바꾼다. 공간을 바꿈에 따라 두 사람이 어떤 장소를 알게 된다. 여기서 연극이 벌어진다. 이 연극의 의미가 극 중에서 비중이 적지 않다. 나름 중요하게 보여주는데, 정작 여기서 제시되는 연극의 내용이 과연 영화의 핵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엔딩이 약간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작 이 연극 파트가 없다고 해도 엔딩까지 가는 전개에 아~무 지장이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연극에서 다루는 토픽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다. 왜 이 부분이 들어갔을까? 영화에서 다루고 싶었던 것이 과연 선택과 집중을 골라 만들어진 것일까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다. 후술 하겠지만 각본 상에서 어떤 인물이, 또 특정 사건이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소모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게 로맨스의 장르특성이랑 아~무 관련이 없으니 이런 이면에 깔려있는 창작자의 관점이 몰입이 안 되는 작위적인 느낌만 든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아마 많은 분들이 가장 큰 단점으로 뽑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글쓴이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배우들의 연기다. 목소리 톤이 다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같아지는 듯한 사운드 연출은 영화의 분위기가 축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경이와 관련된 목소리 연기는 안 그래도 평면적인 인물 연출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
빛을 잃어버린 이야기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다. 주인공 둘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품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글쓴이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이 부분이다. 과연 이 영화가 사랑 영화로서 뛰어난 인사이트를 보여주고 있을까?라는 점에서는 솔직히 전혀 이입되지 않았다. 영화의 엔딩부에 다다라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결론 때문이다. 2부의 이야기가 내팽개쳐져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인물의 행보를 동성애라는 소수자 코드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냥 변명에 가깝다. 이 영화가 성소주자들에 대한 존중과 로맨스라는 두 가지 코드 다 놓쳤다는 나의 의견도 여기서 온다. 사랑이 왔다가 떠나간 자리는 로맨스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되어 왔다.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장난과 관련된 시퀀스,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 삭제라는 소재, <팬텀 스레드>에서 습관과 사랑이라는 양면성, <박쥐>에서 ‘빨아먹어’야 이뤄지는 로맨스까지 이 부분이 로맨스 영화에서의 승부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61분이라는 러닝타임 때문인지 그렇게 둘이 행복했다는 몰입이 쉽게 이뤄이지 않는다. 러닝타임이 짧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군데군데 조악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우선 이경이의 외적 부분에서 남들과 다른 특성이 있다. 이거 로맨스에서 중요할까? 전~혀 중요하지 않는다. 감정선이 얕은 것이다. 오히려 이와 관련된 인물 설정이 조악하다고 느껴본 적은 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것이 이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책으로만 읽으면 유효타로 작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관련된 부분이 진부하다고 느껴진다. 또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공간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경이가 살던 곳이 어디인가? 에 대한 논의가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까지 보고 나서 이 장소에 대한 딜레마가 굳이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점은 아쉽다. 이 공간과 관련된 딜레마가 아니더라도 수이의 입장이 확 반전되는 사건이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의 리얼리티는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글쓴이 입장에선 약간 갸웃거리게 되는 장면이었다. 이 폭력적인 장면이 굳이 들어가야 했을까? 영화의 기본 세팅을 깰 정도로? 이런 식의 ‘여성성이 아닌 것’에 대해 태클을 거는 사회 묘사가 한 번이 아니었다는 점은 말하는 방식의 조악함이 느껴졌다.
시도'만'좋은 것
글쓴이는 이렇게 이 <그 여름>이 장점보다 단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이라고 봤다. 특히 참을 수 없었던 건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인 척한다는 셈이었다. 물론 이 영화가 전하려고 하는 말에 반대 입장을 펼치고 싶지 않다. 연극에서 다뤘던 소재는 한국에서 더 심화된 채로 논의될 필요가 있고, 성소수자라고 기본권이 파괴되는 일은 많이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여성성이라는 핑계로 사람의 역할이나 기댓값이 달라진다면 그 역시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영화가 아름다운 작화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미학적 가치가 올라가고 그럴 일은 없다. 영화는 로맨스영화로서의 귀결이 약하기 때문에 메세지적인 측면의 설득력에 영향을 끼쳤고, 반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로맨스물로서의 장르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완성도에 금이 갔다. 이 영화들 둘러싼 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은데, 글쓴이는 <해피 투게더>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캐롤> 같은 걸작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친밀도를 높여놓은다는 점에서 작품이 갖고 있는 한계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단순히 그림체만 예쁘고 아름다워서 좋은 영화가 아닌 이야기의 구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작품이 탄생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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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슬픔
올해 몇 편의 영화를 보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극장 개봉작 이외에도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극장과 OTT를 넘나 들며 다방면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하고 생각해보면 순서대로 떠오르는 영화들이 모두 극장에 찾아가서 본 것들이다. 분명 OTT오리지널도 좋은 영화들이 많았을텐데, 최고의 영화란 극장에서 본 것 중에서 정해야 한다고 나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려 버린 것인지 아니면 게으른 마음과 온갖 변명을 헤치고 나아가 기어코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영화들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일지 잘 모르겠다.
올해 내가 본 영화들은 굉장히 극단적이다. 너무 세고 자극적이거나,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세고 자극 적인 것들은 대부분 OTT에서 많이 보았고, 고요한 영화들은 극장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큰 스크린 가득 채워진 주인공의 상황에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미소지었다. 때로는 그들 처럼 멍하니 바다의 잔물결을 함께 바라 보기도 했다.
내가 네가 되어 보는 시간을 완벽히 선사 했던 것은 영화 <애프터썬>이었다. 서른 한 살 소피가 되어 열한 살 소피의 기억을 함께 더듬 더듬 짚어 나갔다.
“11살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영화는 아빠의 모습을 담은 캠코더에서 소피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소피와 아빠는 지금 여행중이다. 아빠는 언뜻 남매 처럼 보일만큼 젊은 아빠다. 소피의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이혼 후 런던으로 이주한 아빠와 방학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다. 트윈베드를 예약했지만, 더블베드로 배정이 나고, 리조트는 공사중이라 시끄럽다.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여행에 아빠는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이국적인 풍경 속 여름의 빛은 아름 답고 소피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생일을 맞아 다른 사람들과 이벤트를 준비하고 노래도 불러주는 등 휴가를 즐기는 소피와 다르게 아빠의 상황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열한 살 그때의 소피처럼 관객 역시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우울감과 아픔, 경제적인 어려움 여러가지가 뒤섞여 삶을 견뎌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겨내고 싶지만, 이겨내기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함께 있는 딸을 향해 웃고, 춤추고,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의 모습이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여 묵직하게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출국하러 가는 소피의 마지막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아빠. 소피가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캠코더를 내리고 소피가 들어간 곳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간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새드엔딩일것이라고 짐작한다. 서른한살 소피가 떠올린 이 여행은 소피의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늦은 밤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식탁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우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지만, 모른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들킬새라 다시 방으로 돌아갔던 기억.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는데, 아이둘을 이미 십대까지 키워놓았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가 되어서 어떤 시절을 지나 왔던 걸까? 나는 그때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을까?
열한 살 소피의 시선으로 서른한 살 캘럼을 바라보는 이 영화를 보며, 어릴 때는 알 수 없었던 어른들의 삶의 무게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 때는 몰랐고, 지금도 어렴풋이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슬픔. 끝도 없이 깊고 무거운 감정에 갇히지 말고, 부디 살아 남아 함께 위로하고 안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난 사람의 슬픔에 남은 사람의 슬픔이 더해져 무척이나 오랜동안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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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나이트 리뷰 - 구담을 비틀어 뒤틀린 판타지를 개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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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8월 5일 개봉한 작품 ‘그린 나이트’의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녹색 기사의 목을 잘라 명예를 지켜라˝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난 녹색 기사,
˝가장 용맹한 자, 나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와 재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1년 후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이 자신의 도끼날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도전에 응하고
마침내 1년 후, 5가지 고난의 관문을 거치는 여정을 시작하는데…
전설이 될 새로운 모험, 너의 목에 명예를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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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트래커> 메인 예고편
한계를 넘어선 액션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에서 갱단의 납치로 아내와 딸을 잃은 하칸슨. 10년 후 이탈리아 형사로부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곧장 이탈리아로 떠난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했던 형사는 이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시기에 그 도시의 형사로 새로 발령받은 안토니오는 이 사건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칸슨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갱단으로 침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