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3 23:17:57
[BIFF 데일리]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영화 <하베스트> 리뷰
DIRECTOR.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CAST. 케일럽 랜드리 존스, 해리 멜링 외
PROGRAM NOTE.
짐 크레이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티나 라켈 창가리의 <하베스트>는 폐쇄 위기에 처한 이름 없는 마을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월터는 그의 젖 동무이자 마을 지주인 마스터 켄트와 함께 이 외딴 마을에 정착했으며, 배타적이고 미신에 집착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과 분별을 지닌 인물이다. 7일간에 걸쳐 마을은 화재를 겪고, 추수 잔치를 벌이며, 외지인들을 핍박하고, 새로운 지주를 맞이하더니 결국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된다. 감독은 하나의 마을이 서서히 몰락하는 모습과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종말, 그리고 삶의 방식이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35mm 필름에 담아낸다. 신(新)국수주의가 떠오르는 가운데, <하베스트>는 추방과 강제 이주로 이어지는 지독한 외국인 혐오와 불관용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강렬한 우화이다. (박가언)

디지털 기술이 계속 발전하지만, 필름 특유의 아름다움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 <하베스트>가 그렇다. 테두리가 거뭇거뭇하거나 불그스름한 흔적까지 고스란히 스크린에 올린 이 영화는, 필름을 통해 다소 중세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우화를 참 우화로 만드는 건 이런 검박해 보이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곡식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로 사람의 손이 올라온다. 이제 막 날개를 펴는 나비에게 후 숨을 불고, 까만 흙이 낀 손톱으로 이끼를 만지다 못해, 이끼를 베어 물고 나무 옹이에 혀를 넣기도 하다가 급기야 알몸으로 물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자연 속에 거하는, ‘인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흙 낀 손톱처럼 자연 그대로인 모습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들판에 산들거리는 꽃이나, 쓰임새를 하나하나 일러주는 나무와 풀들, 거기서 양털을 꺾고 노동요 부르며 농사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얼핏 옛 유럽 그림엽서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사건들은 등락(登落)의 폭이 매우 크고, 그 낙차마다 사람을 놀라게 한다.

외지인은 누구인가
이 영화에는 여러 차례 외지인이 등장한다. 그중 절대다수가 트레일러에 등장하는데, 형틀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오는 사람들이다. 마을 토박이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외지인을 믿지 않으며,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합리적 판단보다는 익숙한 사람인지 아닌지의 잣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합리적 판단을 할 만큼의 시간조차 두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남자이자 중간중간 서술자로서 내레이션을 하는 월터는 한편으로 주민들의 삶이 배부르고 취한 짐승들 같다고 자평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삶을 꾸려 가고 있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에 비해 외지인에 열려 있는 사람이 그다.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싶어하고, 이름을 묻고 싶어한다. 이 마음은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belong”은 주요하게 반복되는 단어다. 마을의 아이들은 동네의 경계를 따라 걷다가 경계를 알리는 돌에 머리를 찧음으로써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똑똑히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을 외지인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단한 소속감은 기반 논리가 깊지 않다. 외지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이들의 계급이나 상황이 계속해서 다양해짐에 따라,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도 자반 뒤집기 하듯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물론 외지인의 말 또한 정답은 아니다. 동네를 “개선”하겠다며 소득 증대의 꿈을 꾸는 새로운 주인, 조단의 말은 아마도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소득이 증가하고 모든 게 좋아질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조단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농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토박이 동네를 떠나야 한다.
전통은 무조건적인 혁신으로 깨부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문을 닫아걸고 타인을 거부한다고 순수하게 계승할 수도 없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으로 넉넉한 사회만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계속되는 외지인들의 등장 앞에 우왕좌왕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식민지로 물들었던 20세기 어떤 국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지도는 어떻게 생겼는가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식한다. 지도 제작자 얼이 개인적으로 작업한 동심원형 지도를 보여주었을 때 “최고의 지도”라고 반가워한 것도 그래서다. 둥근 동심원형은 사방으로 잔잔한 파동을 퍼뜨리며, 설령 영역이 조금 겹쳐도 서로에게 뾰족하거나 유해하지 않다. 넉넉하고 너그럽고 부드럽다. 그러나 동심원형 제도는 얼의 개인 작업일 뿐, 그에게 의뢰되는 작업은 격자 무늬형 지도다.
네모반듯하게 구획을 자른 그 지도상에는 사람이나 나무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 그 지도에서 중요한 건 대략의 위치와 구획당 키울 수 있는 양의 수 정도일 것이다. 월터가 반박하듯 그 땅의 물과 흙, 심지어 땅을 돌아다니는 소의 특성까지도 확실히 알고서 그리는 동심원형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월터는 단박에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건 우리를 납작하게(flatten) 만든다고. 동심원형을 강제로 격자 모양에 쑤셔 넣으려면, 원의 가장자리는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여백으로 밀려나는(marginalized) 사람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다. 항해용으로 유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아프리카가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데, 실제로는 아프리카보다 훨씬 작은 그린란드가 더 커 보일 정도이다. 나름의 장점이 있어 활용한 도법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영국 같은 국가들이 좀더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많이 사용한 측면도 있다.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지하는 사람이기에, 외지인을 받아들인다. 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들과도 닮은 측면이 있다. 격자식으로 잘려 나가는 세계에서 한 줌 흙을 놓치지 않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 손가락질이 심긴 곳에서 비극이 피어난 곳을 보고도 흙에 씨앗을 심는 마음. 격자식 지도에 너무 익숙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마음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극장에서 두 시간씩 앉아 영화를 본다. 씨앗을 심고 거두듯이.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나그네는 영원히 나그네이고, 토박이는 영원히 토박이인가. 자리는 쉽게 뒤집힌다. 어쩌면 저기 저 사람의 어제는 나의 오늘과 비슷했을 수 있다. 나의 내일이 저 사람의 오늘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격자식으로 횡과 종을 마구잡이로 갈라 서열화하는 지도를 떠나, 둥근 원형의 지도를 마음에 품어야 하는 이유다.
비록 월터가 그 동심원을 실행한 방법이 (이 또한 정말 너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 같은) 무위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걸음의 방향에만큼은 고개를 끄덕여 본다.
10/03 16:3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상영코드 066)
10/08 20:00 CGV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395)
10/09 14: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433)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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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오브 더 월드> 뉴스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
남북전쟁 종전 5년 후, 참전용사인 '제퍼슨 카일 키드(톰 행크스)' 대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뉴스들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어느 날, 키드 대위는 키오와 부족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일원으로 자라난 10살 소녀 '조한나(헬레나 젱겔)'를 발견한다. 법에 따라 그녀를 친척들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정한 그. 그는 그녀와 함께 뉴스에 등장한 다양한 사건들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뚫고 텍사스의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무엇보다도 현장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날 것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시킬 줄 아는 핸드헬드 연출과 빠른 리듬감의 편집이다. 이는 그에게 <블러디 선데이>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 <캡틴 필립스>나 <7월 22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는 일부 추격전과 총격전 외에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그 자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서부를 가로지르는 주인공들을 향한 차분한 시선이 대신한다.
그 시선의 중심에는 제목대로 뉴스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키드 대위가 사람들에게 뉴스를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키드 대위의 여정이 시작되는 첫 장면과 여정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우선 뉴스를 읽는 장면의 조명이 다르다.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읽어 내려가는 데 비해 끝에서 키드 대위는 밝은 대낮에 글을 읽어나간다. 또한 그가 뉴스를 전달하는 태도도 판이하게 다르다. 허리를 숙인 채 신문 만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뉴스를 읽고 전달던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청중들과 소통하며 당당하게 뉴스를 읽어나간다.
심지어 뉴스의 내용도 다르다. 주로 전염병 발병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들과 정보들을 전달하는 데 그쳤던 첫 번째 뉴스와 달리 마지막에 낭독하는 뉴스들은 사람들이 공감을 사기 쉬운 해프닝이다. 키드 대위의 뉴스 낭독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묘사한 오프닝과 마무리는 그 안의 모든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는 키드의 대사로부터 알 수 있는 뉴스의 의미,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땅을 일구며 일해야 했던 이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잊기 위한 엔터테인먼트였던 뉴스가 키드의 여정이 끝난 후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잃은 한 아이를 가족의 품 안에 되돌려주는 키드 대위와 조한나가 함께 하는 여정은 다른 한 편으로 키드 대위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다양한 뉴스를 체감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드 대위가 과거 남부군과 시비가 붙어 총격전을 펼치는 장면은 남북전쟁 이 끝난 직후인 1860년대 후반 남부에서 실시된 북부의 군정기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 대목도 흑인 노예제의 폐지로 인한 대규모 농장의 해체, 그로 인한 남부인들의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고, 그의 청중들에게는 오락거리이고 정보 전달에 불과했던 뉴스가 갖는 진짜 의미를 깨우쳐 나간다. 그는 남부 사람들에게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북부의 탄광에서 사고를 당하고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상황은 달라도 자신들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공감한다. 그들의 극적인 생환에 환호하고, 그들처럼 힘겨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힘과 희망을 얻는다. 한 청년은 자신을 억압하던 주인을 죽이고 새 출발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키드 대위도 전쟁 중에 접한 아내의 죽음을 비로소 직접 마주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그는 뉴스 낭독을 위해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대신, 본래 집으로 되돌아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그는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해 주던 뉴스가 그 이상의 것임을,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는 조한나가 있고 없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의 또 다른,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인 이유다. 작중 조한나는 그 자체로 뉴스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나 정보 전달의 역할을 넘어서 공감을 통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로 이주한 독일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 충돌로 인해 본래 부모님을 잃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라난 조한나. 그녀는 미국 대륙횡단철도 공사 구역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감에 따라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당하거나 살육당하는 통에 양부모마저 잃고 키드 대위에 의해 백인 친척들에게 전해진다.
그런 그녀는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었는데도 약간의 독일어를 기억하는 등 서로 다른 인종과 종족,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제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한다. 또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던 키드 대위와 서로의 아픈 가정사를 공유하며,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한나를 구한 이가 나름대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키드 대위인 것, 그녀가 가장 먼저 배운 영어 단어가 '이야기 Story'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철도가 생기고 도로가 새롭게 놓아지더라도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결국 세계 각지에서 한 데 모인 이야기인 뉴스라는 사실을 곱씹어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각자의 가족을 잃은 이들이 새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뉴스가 단지 문자로 적힌 정보가 아니라 분명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들이 쏟아지고, 심지어 그 뉴스가 담고 있는 진실, 사실, 허구, 거짓의 구분도 쉽지 않은 현재의 휘발적 뉴스 소비 세태에서 자칫 잊히기 쉬운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가 미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뉴스가 성립되어 가던 1870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뿌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뉴스가 무엇인지 고찰하고 문제의 답을 내놓는 키드 대위의 여정에 무게감을 더한다.
다만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의도한 메시지나 감정선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다 보니 기존과는 다른 폴 그린그래스의 새로운 시도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뒤 장면들의 연결점, 카메라의 움직임과 포커스를 통해 그림의 일부만 조금씩 보여주며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과 이해에 맡긴다. 예를 들어 조한나가 문득 독일어로 말하자 키드 대위는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묻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문다. 이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추측과 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차분하고 잔잔한, 또 감성적인 드라마 장르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한계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도가 완벽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9.11 테러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 93>, 피의 일요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을 영상화 한 <7월 22일>과 같은 전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를 바라보는 폴 그린그래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은 몇 가지 단점과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매력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A(Acceptable, 무난함)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폴 그린그래스의 이름값을 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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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물방울로 그린 세월의 흔적들
이 모든 게 끝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끝이 있다는 말.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는 막연함은 참 답답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데 명확한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끝이 있다는 것.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라고 썼던 글 한 편이 생각난다. 좋은 것 맞나? 그렇게 마지막 날이 오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까? 일단 내가 '작가님' 소리 듣고 싶어 벌였던 오만 짓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회복무요원 생활 동안 왜 키보드를 놓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런 것들은 이해하고 말고 가 없다. 그냥 내가 그런 삶을 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벌이는 일이다.
문득 이런 나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띠리리링. "이 작가의 이상향은 이동진 평론가지만 현실은 그냥 한국의 씨네필 중 하나일 뿐입니다" 라는 문장을 내 마음 안에서 짓는다. 아니거든! 나 그래도 원고료도 받아보고 방송도 나와보고 조회수도 잘 나오거든! 시나리오 봐달라는 메일 온 적도 있거든! 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나는 이미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차피 남의 시선(들)중 하나 아닌가? 뭔가를 써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결국 중요했던 건 '나 자신이 왜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서는 못 베기나'에 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나도 모를 동기부여에 탐구하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여기 두 예술가가 영화로, 각자의 마음 안에 들어온 구멍 하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와 지난한 세월이라는 구멍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다.
전설적인 아티스트
1929년. 김창열 화백은 그 해에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치하. 어린 시절 서예를 비롯한 미술을 배우며 보냈던 유년기. 화백이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전공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랐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벗어났던 일제의 수탈을 뒤로하고, 한국전쟁까지 겪었다. 곯고 곯은 김 화백. 그렇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겪으며 방황하던 화백은 서울과 제주,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다. 동료 예술가 백남준과 시간을 보내다 캔버스 뒤편에 맺힌 물방울을 보게 된다.
그렇게 50여 년의 화가 인생을 물방울에 투영하는 김창열 화백. 197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데 도화선이 됐다. 백남준과 함께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트렌드세터가 된 김창열 화백. 예술가로서 입지전적인 명성을 얻은 그지만 그의 내면은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왜 물방울을 고집했는지, 노자를 신봉하면서도 예술가적인 명성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좋고 밝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아버지가 아닌 달마대사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인물이었는지 등등.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견뎌내야만 했던 삶의 지난함 들을 탐구해보고자 했다.
재미있는 영화
난 다큐멘터리를 별로 안 좋아했다. 어렸을 때 투니버스 볼 시간도 없는데 다큐멘터리 볼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런데 엄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종종 보곤 했었다. "엄마~ 돌리면 안 돼요?" 징징댔던 나. 그리고 거의 20여 년이 지난다. 20대 중반이 된 나. 역시 나이가 들면 취향은 바뀌는 것일까? 이제는 다큐멘터리에 무덤덤해졌다. 잔잔한 것들도 곧잘 봐서 그런가 싶었다. 나에게 여전히 다큐멘터리는 그냥 잔잔한 영화 장르에 가깝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잔잔하지 않다. 잔잔하지 않다고 느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시각효과 구성이 좋았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는 아들의 시각이다. 당연히 부친 김창열 화백이 화가니까 그의 작품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장르마다 변환에 효과를 부여한 시각적 쾌감이 대단하다. 어떤 시퀀스에 그림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굉장하다. 영화에서 제시된 그의 삶을 스르륵 돌아보면서, 굉장히 많은 물방울의 수가 지나간다. 그럼 아련해진다. 아버지가 지나왔던 삶에 아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물방울 그림을 다시 구조화시키는 방식은 굉장히 탁월한 리메이크 노래를 듣는 느낌이다. 한 장르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이와 살짝 다른 지점이지만 '왜 아버지(김창열 화백)는 물방울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을까?'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김 화백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과거를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거랑 관련이 있으니까. 감독은 어떤 장면과 나레이션으로 이를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에세이를 읽으면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이 시퀀스는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까지 다 계산한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 이유를 듣고 나면 김 화백의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적으로 아버지를 소재로 했지만 왜 김오안 감독의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시퀀스였다. 이는 김창열 화백의 자의식 탐구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영상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장르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잘 뽑아낸 셈이다.
두 번째. 장면마다 촬영을 잘했다. 김창열 화백 얼굴 나타나는 클로즈업. 눈 오는 설산. 화백이 자 그리고 선 찍 긋는 장면. 이런 장면 하나하나 구도도 잘 잡았고 색감도 예뻤다. 이 영화가 눈이 심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상미의 아름다움도 한몫했다. 이 영상미는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심오하게 들릴 수 있는 한 인물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딱딱 이해가게 배치한 좋은 연출 방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신기했던 것이, 과거의 뉴스 자료를 갖고 온 방식이었다. 아니 2022년에 보는 데도 어제 찍은 것 같은 동영상들이었다. 이런 거 어떻게 가져왔대? 또 앞 두 가지와는 좀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스릴러, 코미디 장르가 연상되는 장면도 영화 곳곳에 있으니 감독님이 영화를 많이 보신 것 같은 느낌이다.
깊은 자의식을 들여보다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두우면 작품이 쉽게 나온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일 것이다.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낀 건 '생각 많아서 짜증 나겠다'였다. 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 자기의 혼을 드러내는 거겠지. 비단 라스 폰 트리에뿐만 아니라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속할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 서투를 수밖에 없었던 것(<박쥐>), 모성애의 방향에 대한 탐구(<마더>) 둘 다 어두운 감정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 역시 어두운 내면을 소재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
예술가에게 있어 소재란 무궁무진하다. 온갖 것을 가지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면 예술가다. 영화는 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직업적 특징을 다뤘다. 아버지가 겪어온 어둠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아버지가 추구했던 즐거움이 무엇이었는지, 그 삶이 남기고 간 건 무엇인지 등등을 탐구하며 아버지가 예술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추론하며 제시한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앞에서도 썼듯 이것은 아들 김오안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에는 김오안이라는 예술가가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도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인 메타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영화가 전해주는 시각적 재미 중 하나가 여기에서도 온다고 생각한다. '엥? 이게 영화가 되네? 그리고 꽤 잘 만들었네?' 싶은 것이다. 이런 예술가적 창의성은 관객에게 영향을 주기 충분하다. 비단 내가 지금 쓰는 글도 한 종류의 예술이다. 이런 걸 좋아하고 한 30대가 되고 나서도 하고 싶은 나의 입장으로서도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법론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는 그래서 다른 분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상영관에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다음 주 금요일 14일에 VOD로 출시된다고 하는 것 같다. 뭔가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이 영화의 방법론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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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수없는비밀
《말할수없는비밀》은 시간의 비밀이 숨겨진 캠퍼스 연습실에서 김유준(도경수)과 유정아(원진아)가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되는, 기적 같은 마법의 순간을 담은 판타지 로맨스 영화다. 원작은 주걸륜의 2007년 동명의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영화를 보면서 든 느낌은, 음악 예능〈복면가왕〉 같은 데서 옛 노래를 요즘 가수들이 커버하는 경우가 떠올랐다. 키(음높이)를 낮추든 편곡(악기 편성, 조바꿈, 장르 전환)을 바꾸던 가수 본인에게 맞는 최적화를 조율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캐릭터, 시퀀스 구성은 원작과 동일하다. 차이점은 원작의 무대가 예술고등학교인데, 이 리메이크작은 음악대학으로 옮겼다. 원작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박인희(신예은)의 비중이 커졌다. 그 외에 ‘시크릿’곡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새롭게 작곡한 음악과,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등 기성곡으로 바꿨다.
고교생에서 대학생으로 옮긴 것은 정아가 수시로 강의에 빠지는 개연성을 보완해준다. 그러나 그 변형이 지불해야 하는 추가 비용이 벌생했다. 원작은 1999년을 현재로 설정했기에 복고적인 감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나 《말할수없는비밀》은 현재로 설정해 개연성이 일부 파손되었다. 또 미성년자라면 유준의 머뭇거림, 정아의 선택이 납득될 수 있으나 다 큰 성인이 저러고 있으니 답답하다.
우선 주변 인물의 역할이 어정쩡해졌다. 예를 들어 '남주의 아버지(배성우)` 같은 경우만 봐도 그렇다. 미성년인 아들을 돌보는 아빠 입장과 다 큰 성인을 다독거리는 아버지 역할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말할수없는비밀》은 원작에 충실한 나머지 뭔가 어색해지는 구간이 발생한다. 또한 원작의 과거시점인 1979년을 이번에 1999년으로 바꾼 것이 패착이다. 현재의 풍경이나 1999년의 캠퍼스가 크게 달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인 〈동감〉 리메이크 때도 2022년과 1999년을 대비하는 데 실패했었다.
현지화 전략에서 그나마 장점이랄 것은 남주 유준이 원작보다 훨씬 더 듬직해졌다는 점이다. 극의 에너지를 도경수 혼자 짊어진 것마냥 존재감이 상당하다. 반면에 원작의 계륜미보다 여주 정아(원진아)는 순진무구한 여인이지만 그 행보는 고구마처럼 답답해졌다. 연적인 인희는 최근 추세를 따른 것 같이 보다 쿨한 캐릭터를 분한다.
원작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결말 부분이 보완된 점은 좋았지만, 대만 영화 특유의 감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감정선이 대만 영화들보다는 2000년대 초반 한국 멜로 영화들이 떠올랐다. 특히 엇갈리는 남녀 사이를 묘사한 대목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에 한국 멜로영화에 자리 잡은 익숙한 애이불비(哀而不悲,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 슬픔을 나타내지 않음) 정서에 더 가까워졌다. 리메이크 현지화 전략에 따는 리스크라고 봐야할 것 같다.
클라이맥스 피아노 배틀 장면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솔로로 바꾸며, 공을 들였지만, 원작만큼 애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악보도 보지 못하는 도경수가 열심히 연기했음에도 카메라 구도나 CG 활용, 대사마저 원작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원인은 앞서 말했듯이 배경을 바꾸면서 디테일을 다듬지 못해서이다. 대학생다운 연애가 무엇일까를 더 고민했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원작을 해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풋풋한 미성년자와 성인 남녀의 연애 세포가 동일할 것이라고 봤다면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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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올드 오크 | 노장이 마지막으로 건네는 당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영국 북동쪽 폐광촌에 집단 이주를 한다. 마을 주민들은 난민을 전혀 환영하지 않는다. 탄광이 문을 닫은 후 경제 침체가 이어지고, 빈 집이 늘어나고, 부동산이 헐값에 팔려 나가며 분위기가 어둡기 때문. 자연히 난민과 주민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데이브 터너)는 사진작가를 꿈꾸는 '야라'(에블라 마리)를 만난다. TJ는 야라의 고장 난 카메라를 고쳐주고, 야라는 TJ의 슬픔을 위로하면서 우정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올드 오크’ 앞 길거리에는 어느덧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켄 로치 그 자체인 은퇴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가 거장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성과부터 압도적이다. 칸 영화제에만 14회 초청받았고, 황금종려상 2번과 심사위원상 3번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철학은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 미학적으로 독특하고 새로운 연출을 선보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슈에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지적도 때때로 받기 때문.
1997년 '키노' 기사만 봐도 그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인터뷰에서 그는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 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과거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덧붙이기도 했다.
은퇴작 <나의 올드 오크>에서도 켄 로치는 자기 신념을 또 한 번 스크린 위에 그려냈다. 잉글랜드 북부 폐광촌 주민의 아픔과 이민 및 난민 문제를 함께 다룬다. 실패한 과거를 반추해 새 미래를 만들자고 손을 내민다. 켄 로치의 이 제안은 거부하기 어렵다. 영화의 휴머니즘이 다소 나이브하고, 감상적으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거. 러닝타임 113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마법을 켄 로치가 부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라의 사진이 달라진 이유
<나의 올드 오크>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에서 잉글랜드까지 건너온 소녀 '야라'. 사진작가를 꿈꾸는 야라는 잉글랜드의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프닝 시퀀스는 그녀의 사진을 하나씩 보여주고, 배우들의 대사와 주변 소음을 사진에 더했다. 카메라에 담긴 거리와 사람은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다. 왜 허락 없이 사진을 찍냐고 항의하며 그녀의 카메라를 빼앗아 렌즈를 부술 정도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진은 정반대다. 동네 주민들은 한 데 모여 그간 야라가 찍은 사진을 같이 감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도 판이하다. 야라를 경계하던 눈길은 없다. 체육대회에서도, 미용실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고, 미소 짓는다. 그녀의 사진을 대하는 태도도 따뜻하고 친절하다. 멋진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말할 정도다. 야라는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나 다름없다.
이런 변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리는 없는 법. 영화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상이한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일은 TJ의 몫이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왜 어두웠는지, 왜 길거리에서 적대적이었는지, 또 그들의 마음이 바뀐 계기는 뭔지... TJ는 목격자, 증인, 당사자로서 그들의 입장을 담담히 대변한다. 그 중심에는 영국 북부의 가슴 아픈 현대사가 위치한다.
아픈 과거가 낳은 현재의 갈등
야라가 도착한 마을은 음울하다. 탄광이 폐쇄된 이후로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는 마을. 마을 집값은 나날이 떨어지고, 외국계 기업이 부동산을 싹쓸이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커진다. 시리아 난민에게는 정착을 도와줄 기부금과 물품이 전달되지만, 가난한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원도 없다. 주민들은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TJ의 술집 '올드 오크'에서 회포를 풀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나 난민이 점점 늘어나자 올드 오크도 선택의 기로에 선다. TJ의 친구 찰리는 술집 안쪽 빈 공간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과거 광부들의 파업을 기록한 사진만 걸린 채 안 쓰이고 있으니, 주민들이 난민들을 성토하고 대책을 세우는 공론장으로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한편 TJ와 새로 친구가 도니 야라도 같은 공간을 쓸 수 있냐고 물어온다. 주민과 난민 가리지 않고 함께 밥을 먹으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TJ는 누구의 편도 쉽게 들지 못한다. 야라와 난민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찰리와 주민들의 아픈 과거를 마음속 깊이 공유하기 때문. 한 때 삶의 의욕을 잃었던 TJ는 우연히 자기 목숨을 구해준 강아지에게 '마라(Marra)'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Marra'는 광부들이 사용하던,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뜻하는 단어다. 이처럼 강아지 이름만 봐도 TJ가 광부였던 아버지와 마을의 과거를 못 떠나보냈음을 알 수 있다.
증오를 빌려 희망을 전하다
하지만 마라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TJ는 달라진다. 마라는 시리아 난민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에게 공격당해 죽었다. 마라를 잃어 슬픔에 빠진 그의 옆에는 야라와 그녀의 어머니가 있다. 그들은 J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야라는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공유한다. TJ가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주며 그녀의 꿈을 응원했듯이, 야라도 TJ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에 힘입어 TJ는 술집 안쪽 공간을 주민과 난민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곳에서 과거 광부들이 파업할 때처럼 무료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추억을 쌓는다. 그렇게 시리아 난민들은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준 TJ의 선의와 올드 오크의 공간을 개방하자던 야라의 제안이 바꾼 풍경이다. 이처럼 <나의 올드 오크>는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솟아나는 인간애에 주목한다.
<나의 올드 오크>가 난민 증오의 양상을 생생히 표현하기에 TJ의 변화와 선택은 더 감동적이다. 영화는 잉글랜드 북부 사람들의 설움이 증오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춘다. 찰리가 대표적이다. 찰리는 TJ의 절친이다. 그의 약혼식에서 TJ가 축하 연설을 했을 정도다. 그랬던 그가 올드 오크를 테러한다. 자신과 지역 주민이 아닌 난민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에 더해 온라인상에서도 TJ에 대한 비난이 이어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TJ의 일침은 유달리 귀에 잘 꽂힌다. 그는 찰리에게 말한다.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 약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이 대사에서는 아픔을 증오로 배설하는 대신, 포용과 배려로 승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켄 로치는 마지막까지 시민 공동체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뜻하거나 감상적이거나
다만 비판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 소재의 심각성에 비해 영화의 태도가 다소 편의적인 인상이 남기 때문. <나의 올드 오크>는 일견 중립적이다. 지역 주민들의 소외감을 먼저 보여준 뒤, 그 반대편에서 난민에 대한 경계심과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을 대조한다.
그런데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은 다소 감상적이다. 극 중 주민들의 반발은 광산이 닫힌 이후 마을과 주민을 도외시한 영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한 데 뭉쳐서 튀어나오는 분노에 가깝다. 그런데 영화는 그들의 절규를 전혀 다른 윤리적, 도덕적 차원으로 끌어들이며 논점을 흐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영화는 야라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녀를 위로하는 사람들과 찰리와 뜻을 같이하는 주민을 대조한다. 이에 더해 영국과 유럽 내에서 발생하는 난민 범죄는 일절 보여주지 않는 반면, 찰리와 친구들의 범죄는 자세히 묘사한다. 자연히 전자는 선, 후자는 악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주민들의 분노 역시 막연한 증오와 혐오로 치환돼 인식되기 쉽다.
즉, <나의 올드 오크>는 사회적 갈등의 본질을 더 치열하게 추적하는 대신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한다. 또 감정적으로 원만하게, 봉합하는 데서 그친다. 그렇기에 인본주의적이고 따뜻한 결말도 시각에 따라서는 교묘하게 논의의 장을 뒤트는 시도처럼 보일 수 있다.
지극히 품격 있는 퇴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의 비범한 필모그래피의 끝을 장식하기에는 이보다 적절한 마무리를 떠올리기 어렵기도 하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고, 명성에 비해 아쉬운 지점도 존재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 때문.
특히 "당신이 민중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현재를 재조정할 수 있고 현재를 조정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하는 노장의 용기와 미덕을 마지막으로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이기에 <나의 올드 오크>는 분명 특별하다.
Acceptable 무난함
거장의 따뜻한 희망과 노장의 마지막 바람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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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 영화 추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스포일러 포함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23.09.27 개봉
판타지, 12세 관람가
한국, 98분
원작: 네이버 웹툰 <빙의>
출연: 강동원, 허준호 등
강동원 배우 용안 보는 영화로 유명해진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인배 역의 이동휘 배우가 여기저기서
어떻게 새벽 6시에도 저런 얼굴일 수 있냐며...
여기저기 퍼뜨린 덕에 저도 얼굴을 기대하고 갔는데
이번엔 벚꽃 날리는 효과 후광 효과 이런 건 없었지만
계속 저(카메라)를 쳐다봐서... 심장 아프더라고요
ㅋㅋ
아! 쿠키 한 개 있어요
엔딩 크레딧 1~2분쯤 나오고 쿠키 보여 주니까 나가지 마세요
뭔가 시즌 2가 나와도 될 법한 내용의 쿠키라서...
시즌 2도 기대해 보겠습니당
시놉시스부터 너무너무 재미있어 보여요
귀신을 믿지 않는 가짜 퇴마사, 근데 당주무당집 장손
결국 귀신을 잡는다는 이야기로 흘러갈 거라
무서운 거 1도 못 보는 저는 겁을 많이 먹었었는데요
15세도 아니고 12세 관람가다 보니까 무서운 장면은 거의 없어요
귀신 얼굴, 눈이 좀 기괴한데 그건 적응만 하면 괜찮고
오히려 사람 손가락 잘리는 게 여러 번 나와서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솔직히 영화 시작하고 20분? 정도까지
무서운 분위기가 계속 연출돼서 나갈까 진짜 고민했는데
오히려 그 이후가 괜찮더라고요 왜지?
범천이 인간들에 여기저기 빙의해 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유치해 해보이다가도 또 재미있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천박사를 공격하는 게 재미있고요
천박사는 하나도 안 다치고 다 막아내는 게 또 웃기더라고요
미스터리, 판타지, 퇴마, 스릴러 등의 장르를 가지고 있지만
일단 이동휘 님이 껴 있다는 건
코미디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
코미디 3분의 1, 판타지 3분의 1, 스릴러 3분의 1 같아요
아마 추석 연휴 개봉할 영화들 중에서
캐릭터, 스토리, 연출 삼박자가 가장 잘 맞는 영화 아닐까 싶은데요
귀신을 못 보지만 기가 막힌 칼을 가지고 있는 천박사와
귀신 들린 동생을 구하고 싶은 귀신 보는 유경을 붙임으로 인해
캐릭터가 가야 할 길이 확실해졌고
범천이 결국 설경에 봉인될 거라는 걸 시청자 모두 알고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봉인될지를 기대하는 거잖아요?
98분간 CG가 유치하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유일하게 엔딩에서 설경이 열리고 닫히는 거긴 최고였던 거 같아요
약간 디즈니 거울 나라의 앨리스 재질?
그에 반해 연출은 사알짝 유치했지만,,,
윤병희 박경혜 배우님께서 유치하지 않게
범천의 옆에서 잘 끌어 주신 것 같아요
솔직히 박경혜 님 손가락 잘리기 전 열연이 다 살림 . . .
박소이 배우 원래 여기 잘하는 건 알았지만
귀신 들린 연기 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눈빛이 정말 무섭고 말하는 게 귀에 착착 붙더라고요
진짜 대박적임......
내로라하는 대배우들 사이에서
박소이 배우 연기가 제일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짱짱
기생충 부부, 조이현 배우, 박정민 배우
그리고 블랙핑크 지수 님까지
다양한 분들이 카메오로 나오셔서 더욱 즐길거리가 풍부했습니다
특히 박정민, 지수 나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요
박정민 님의 신들린 연기와 지수 님의 신들린 미모......
*스토리: 5/5점
*연출: 5/5점
*영상미: 3/5점
*OST: 1/5점
*연기: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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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걸음 더 앞으로! 로드 무비 5선
어느덧 2024년도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 여는데 ‘여행’만큼 적절한 것이 없죠.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내딜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로드 무비를 함께 보고 싶어 준비했습니다.
그럼 같이 떠나볼까요!
줄거리
‘라이프’ 잡지사에서 16년째 근무 중인 월터 미티.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상상’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꿈꾸는 그에게 폐간을 앞둔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을 찾아오는 미션이 생긴다.
평생 국내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월터는 문제의 사진을 찾아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등을 넘나들며 평소 자신의 상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어드벤처를 시작한다.
누구보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월터, 그 누구도 겪은 적 없는 특별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줄거리
대학 강사인 가장 리차드(그렉 키니어)는 본인의 절대무패 9단계 이론을 팔려고 엄청나게 시도하고 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런 남편을 경멸하는 엄마 쉐릴(토니 콜레트)은 이주째 닭날개 튀김을 저녁으로 내놓고 있어 할아버지의 화를 사고 있다.
헤로인 복용으로 최근에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앨런 아킨)는 15살 손자에게 섹스가 무조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전투 조종사가 될 때까지 가족과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들 드웨인(폴 다노)은 9개월째 자신의 의사를 노트에 적어 전달한다. 이 콩가루 집안에 얹혀살게 된 외삼촌 프랭크(스티브 카렐)는 게이 애인한테 차인 후에 자살을 기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방금 퇴원한 프로스트 석학이다. 마지막으로 7살짜리 막내딸 올리브(애비게일 브레슬린)는 또래 아이보다 통통한(?) 몸매지만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하며 분주하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리브에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쟁쟁한 어린이 미인 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 출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고 딸아이의 소원을 위해 온 가족이 낡은 고물 버스를 타고 1박2일 동안의 무모한 여행 길에 오르게 된다. 좁은 버스 안에서 후버 가족의 비밀과 갈등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할아버지와 올리브가 열심히 준비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의 마지막 무대는 가족 모두를 그들이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과연 후버 가족에겐 무슨 일이 생긴 것 일까?
줄거리
매일 같이 불행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런던의 정신과 의사 ‘헥터’,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뭘까 궁금해진 그는 모든 걸 제쳐두고 훌쩍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상하이의 은행가,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아프리카의 마약 밀매상,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난 말기암 환자, 그리고 가슴 속에 간직해둔 LA의 첫사랑까지 ‘헥터’는 여행지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을 통해 그는 리스트를 완성해 나간다.
설레고 흥겹고 즐거운 그리고 때로는 위험천만하기까지 한 여행의 순간들,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찾아 떠난 정신과 의사의 버라이어티한 어드벤처가 시작된다!
줄거리
“때로는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나을 수도 있단다. 더구나 그것이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운명을 보는 마녀, 집채만 한 거인, 시간이 멈춘 유령마을까지… 믿을 수 없는 모험으로 가득한 에드워드 블룸의 이야기. 당신도 믿나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을 찾은 윌.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다 큰 아들에게 허풍 가득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아버지. 그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기상천외한 모험과 단 하나의 로맨스로 이어진다.
이제, 믿기 힘든 이야기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는데…
줄거리
가난한 삶, 폭력적인 아빠,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엄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려는 찰나, 유일한 삶의 희망이자 온몸을 다해 의지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인생을 포기한 셰릴 스트레이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파괴해가고…
그녀는 지난날의 슬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수 천 킬로미터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의 공간 PCT를 걷기로 결심한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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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PICK X WENDY ? 6.30 개봉! 영화 #웬디 를 보면 상금 100만 원이????
[웬디] 개봉 기념 씨네픽 특별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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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드보이 속 대사로 알아보는 복수의 섬뜩한 의미
뒤늦게 올드보이를 감상한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드보이가 도대체 왜 명작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복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지,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닮아있는지,
오늘은 영화 속 대사와 오이디푸스 신화를 빌려 올드보이를 이야기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엔딩 BGM : https://youtu.be/KlVcvBkk-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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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신 테르마이 로마이> 공식 예고편
《테르마이 로마이》가 넷플릭스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일본 만화대상 2010',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을 수상한 야마자키 마리의 걸작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가 넷플릭스 시리즈 《신 테르마이 로마이》란 이름으로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번 시리즈 구성에는 원작자 야마자키 마리도 직접 참여했는데. 왜 루치우스는 욕장 건축가가 되려 했던 것일까? 현대 일본뿐 아니라 에도 시대로도 시간 여행을 하는 그를 만나보자! 원작 만화에선 미처 그리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은 속편으로서 새롭게 제공될 시간여행 목욕탕 코미디. 목소리 출연: 츠다 켄지로 원작 만화: 야마자키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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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데드 보이 탐정단> 공식 예고편
데드 보이 탐정단을 소개한다. 절친이자 귀신인 에드윈과 찰스는 인간 세계 최고의 탐정이다. 사악한 마녀, 지옥, 죽음의 신 데스로부터 탈출하는 등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두 사람. 영매 크리스털과 그녀의 친구 니코의 도움을 받아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미스터리한 초자연적 사건들을 해결한다. 《데드 보이 탐정단》의 원작은 닐 게이먼의 인기 코믹 시리즈로, 이번 작품은 넷플릭스의 샌드맨 세계관을 새롭게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