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2025-02-17 21:17:41
미래의 누군가는 지금을 낭만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리뷰
낭만의 도시, 파리
파리를 향한 사람들의 동경과 사랑은 대단하다. 고풍스러운 샹젤리제 거리, 화려한 치장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베르사유 궁전, 세계 최고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에펠탑은 말이 더 필요할까.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 파리는 예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교류하던 문화의 장이었고 그 자체로 상징적인 낭만이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본격적으로 파리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고스란히 조명한다.
주인공 길은 낭만파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의 상업 작가임에도 소설을 쓰겠다며 때때로 약혼자의 속을 썩이는 남자. 그의 소설 속 과거의 골동품을 파는 노스탤지어 샵이 등장하듯, 그 역시 파리의 낭만을 사랑하고 과거의 황금기를 동경하는 남자다.
파리의 황금기는 1920년대였으며 현재의 파리는 그때만 못하다는 것. 그는 살아보지 않았던 그 시절의 황금기를 동경하고 또 열망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지금의 파리는 그 아름다웠던 과거보다 칙칙하고 낭만이 꺼진 도시다.
그랬던 그에게 자정마다 마법 같은 시간이 펼쳐진다. 그를 마중 나온 의문의 차가 그를 1920년대의 파리로 이끈 것. 그곳에서 자신이 동경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직접 조우하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등등.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고, 길은 어린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관광지로서의 유물을 넘어 그가 열망하던 파리의 시간이 눈앞에 재현된 것이다.
길이 찬양하던 대로 1920년대의 파리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밤길을 비추는 특유의 따뜻한 노란 조명,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인 시대를 풍미하는 예술가들, 때맞춰 흘러나오는 콜 포터의 재즈까지. 그는 점차 현재의 파리보다도 1920년대의 파리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덧없는 우리의 황금기
1920년대, 피카소의 연인이자 많은 예술가의 뮤즈였던 아드리아나에게 끌리는 길. 그가 약혼자 이네즈와 아드리아나 사이에 느끼는 혼란스러운 두 감정은 동시에 자신의 현재와 아름다운 과거 사이에의 혼란이기도 하다. 현재의 파리도 아름답지만, 길에게 있어 1920년대의 파리는 그야말로 가슴 떨리는 환상의 시대였기에.
그러나 아득한 과거를 향한 환상은 비단 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길이 그토록 바라는 1920년대에 살아 숨쉬는 아드리아나. 그러나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살아가는 1920년의 현재보다도 고갱, 드가 등 화가가 활동하던 1890년대의 파리를 갈망한다.
극 중 이네즈의 친구 폴은 ‘과거에 대한 향수는 고통스러운 현재에 대한 부정’이라고 말하며 이상적인 과거를 동경하는 길의 태도를 ‘황금시대의 오류’라는 개념으로 꼬집는다. 즉 현재의 고통은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재는 불완전하며, 과거는 완결된 이야기이니까. 되돌아보면 그 시기가 아름다웠던 것만 같고, 그것이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난 날들을 그리워하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더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현재가 지닌 가치는 가려져 불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길과 아드리아나는 또 한 번 자정의 시간 여행을 통해 1890년대의 파리로 넘어 가지만 이들의 선택은 극명하게 갈린다. 그 시기가 파리의 가장 빛나는 때라고 여기던 아드리아나는 과거에 남고, 그 모습을 본 길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멈추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 길은 1920년대를,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를, 그리고 1890년대의 사람들은 르네상스를 동경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황금기를 향한 동경. 과거는 때로 과거라는 이유만으로, 완결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자정을 넘어 새로운 아침으로
할리우드 상업 작가로는 소위 ‘잘 나가는’ 축에 속하는 길이지만, 그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던 소설을 처음으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우려와 창작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어쩌면 쉬운 길을 두고 고집을 부리다 완성한 소설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테다. 남에게 평가를 맡기지 않던 길이지만, 그의 우상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구한다. 헤밍웨이는 이미 완결된 그의 일생 속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갖춘 저자이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아직 소설 한 편 제대로 완성하지 않는 자신은 그저 보잘것없는 소설 지망생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과거의 위상이란 때로는 훌륭한 스승이면서도 현재의 위상을 저평가하는 독이 된다. 과거를 향한 동경의 연쇄를 끊고 빠져나온 길. 완결된 과거의 환상에 젖어 머무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기로 택한 그에게는 이전과는 달라진 현재가 기다리고 있다.
파리의 낭만과 영광은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양한 흐름으로 이어져가고 있다. 약혼자와의 비틀린 관계를 정리한 길은 비 오는 파리 거리 한가운데서 새로운 인연을 찾는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이다. 현재는 언제나 미완의 상태에서 이어지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쩌면 완성된 길의 소설은 잘 풀리지 않아 뼈아픈 실패를 맛볼지도 모른다. 생각과 달리 파리에서의 생활은 편치 않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인연과는 또 다른 불화로 다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미학은 그 불확실성을 뚫고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변화와 새로움에 있다. 켜켜이 쌓아 올린 현재는 또다시 누군가가 그리워할 그 시절의 황금기로 완결될 테니.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경험하지 않은 아름다운 과거에 대해 동경하고 또 열망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나의 현재도 누군가의 황금기일 수 있음을. 그러니 살아가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나아가자.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낭만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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