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속도
줄거리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며 일본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오제 국립공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이 통제되는 이곳에는 산장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봇카'들이 있다.
그들은 지게에 높은 짐을 쌓아올리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걸어나간다.
24년차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와 9년차 봇카 '이시타카', 두 사람이 걸어가는 '행복의 속도'는 과연 얼마일까?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숨은 의미 찾기
"속도"
영화는 봇카를 바라보며 속도에 주목한다. 당연해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봇카라는 직업을 통해 관심을 갖는 키워드는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추며 그야말로 입체적인 시각을 통해 '봇카'라는 직업을 우리네 보편적인 삶의 궤도에 올려 놓는다.
24년차 베테랑 봇카인 이가라시.
영화는 이가라시의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칭얼거리는 둘째 아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첫째 아들의 만화영화, 주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아내. 복작복작하고 정신 사나운 와중에도 가족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밥을 먹는다. 마치 제멋대로인 구성원 각자의 시간들이 식탁이라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은하수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가라시의 가족은 각자만의 고유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봇카를 하는 이가라시는 산장에 짐을 가져다주고 홀가분한 어깨로 오제를 내려올 때면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는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일을 끝내면 밭에 콩을 심고, 거실에 앉아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첫째 아들은 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고,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은 형의 리모콘을 빼앗아 엄마 주변을 맴돈다. 이렇듯 그들에겐 각자가 살아가는 루틴이 있고, 그것은 도무지 합치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한데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있어 각자의 시간이란 결코 침범당해서는 안 되는 존중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침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벽을 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첫째 아들과 함께 자신이 물건을 가져다주는 산장에 묵으며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온 가족이 가을길 산책을 나서서 잠자리를 잡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추억이라는 케이블 선으로 공유하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가족이 있다.
한편 9년차 봇카인 이시타카가 있다.
그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로서 봇카라는 직업을 널리 홍보하고자 애쓴다. 봇카 일이 없는 날이면 도시로 나가 관광업체와 미팅을 하는 등, 그의 일상은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일까, 그의 가정은 보다 이시타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항상 앞치마를 하고 밥상을 차리느라 바쁘고, 아이는 냉찜질을 하고 파스를 바르는 아빠 곁에 붙어서 하루를 보낸다.
이시타카는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남들에게 권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사실 그의 나이대를 생각했을 때,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들을 떠올려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도시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던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왜 봇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으므로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도심의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천천히 가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게에 주로 음식을 지는 이가라시와 달리, 이시타카는 가스통 같은 물건을 지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가족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아이, 집안을 돌보느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아내. 무릎과 발목은 점점 아파오는데 봇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젊은 이시타카로서는 어떻게든 봇카를 알리는 일에 미래가 걸려있다.
그는 봇카를 홍보하며 '도심의 속도에서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몸소 실천하고자 자신도 오제에 정착했지만, 자신 스스로도 여전히 도시의 무자비한 속도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런닝머신에서 뛰다가 막 땅으로 내려온 사람같이 빠른 걸음을 걷는다. 그것이 이시타카의 발걸음을 클로즈업했을 때, 이가라시보다 불안정한 이유다.
이들의 '시간'에 대한 구성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부모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시타카는 오랜만에 내려간 부모님의 집에서 잔소리를 듣기 바쁘다. 몸이 상하면 어쩌니, 회사원이 더 안정적이지 않겠니, 아내는 너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잖니... 이시타카와 그의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기보단, 그들 가족이 시간을 채워가는 방식이 불만스러운 듯 하다.
어쩌면 이시타카가 더욱 봇카를 알리는데 힘쓰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전 세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 더더욱 본인의 직업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띄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그에 반해 이가라시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다. 아무도 걷지 않은 아름다운 겨울의 오제를 보며 감탄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아들. 함께 눈싸움하는 며느리와 손주들. 더불어 어머니의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자랑처럼 벽에 걸린 아들의 사진까지. 이시타카와 달리 이가라시는 이전 세대로부터 자신의 시간을 존중받았기에, 인정받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봇카를 할 때, 더 틀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이가라시가 제설작업을 할 때 만난, 지금은 봇카를 은퇴한 선배는 이가라시에게 말한다. 자신들이 미안하다고, 자신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 봇카가 사라져서 남은 사람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미련한 사과다. 물론 이전 세대가 노력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짊어질 짐을 덜어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 때 제대로 된 틀을 잡아놨다고 해도 지금 봇카가 많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만의 속도가 있다.
헬기 회사의 경영 상황이 악화돼서 철수하면 봇카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있는 봇카들이 계속 짐을 나르는 이유는 무얼까.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봇카의 자식들을 바라볼 수 있다. 봇카의 자식들은 봇카가 될까? 그건 모른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자녀들이 도시로 내려갈지, 오제에 남을지는 본인들이 선택할 몫이다.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의 길에 결코 관여해서는 안 된다. 타임머신이 발명됐다고 해서 역사를 바꿔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현재냐, 미래냐에 있다.
이가라시에게 속도는 그가 딱 24년간 유지하고 있는 그 속도를 말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결국 자신에게 딱 알맞은 속도를 찾아낸다. 유독 이가라시 가족이 나올 때면 스크린에 자연경관이 가득하다. 이는 이 가족이 자연의 속도, 즉 계절의 흐름에 발맞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곧 행복임을 뜻한다. 그러니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그저 현재를 살아간다. 행복이 움직이지 않고 늘 발밑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가라시 가족에게 있어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에 비해 이시타카의 속도란, 조금 더 복잡하고 단계적이다. 그의 행복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나눠져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가라시를 보다가 이시타카를 보면 초조하고 급박한 마음이 든다. 이시타카가 원하는 행복은 앞서가고 있고, 이시타카는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결코 이시타카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걸음의 속도를 높이지만, 그가 지금 디디고 있는 땅에도 현재의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시타카에게 '위로'가 아닌 '격려'를 던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는 이시타카를 이가라시가 지켜보는 것이었다. 짤막한 이 장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가라시는 계속 휘청거리는 이시타카를 도와주지는 않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일어날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기다린다. 그가 일어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그러므로 이시타카가 미래를 위해 걸어가는 것은 이시타카 나름의 속도이다. 행복이 어떤 명확한 물체로 존재하지 않듯이 속도도 마찬가지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속도는 우리가 멈춰있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한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문구다. 백 명의 사람 앞에는 백 개의 길이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이 짊어질 무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 그 모든 것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 위를 걸어간다고 좌절하지 말자. 어쩌면 그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길일지도 모를 테니까.
그들은 왜 오제로 갔을까
감상평
"보통 베테랑 봇카는 몇 kg이나 매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관광객은 자연경관을 설명하는 이가라시에게 묻는다. 영화에서 이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르게 보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묵직한 무게감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들이 왜 오제에서 봇카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쩌다가 이런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들이 걸어가는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더불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 역시 속도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우리네 인생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롯이 하나의 메세지만을 던지는,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