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심2025-02-24 15:36:44
경계를 넘어 진화하는 인간 신체에 대한 명상
<미래의 범죄들>
인체는 매우 창의적이라서 항상 새로운 걸 만들어내죠. 다음 세대에 무엇이 남는 지 보려는 것 같아요.
인간의 신체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감염의 위험도 사라진 멀지 않은 미래. 예술가 ‘사울’과 그의 파트너 ‘카프리스’는 몸에 생겨나는 새로운 장기들에 문신을 새기고, 그것을 적출하는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다. 인간의 신체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가속 진화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울은 전직 외과의인 카프리스의 도움을 받아 계속 자라나는 몸 안의 장기들을 제거해나가고 있다. 그에게 장기 적출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자 거부다. 하지만 계속되는 몸의 변화와 적출 수술로 인해 그는 제대로 된 음식 섭취는 물론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동료 예술가의 공연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사울은 ‘랭’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어린 아들의 시체를 해부하는 공연을 진행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사울과 카프리스는 어린아이의 시체 해부라는 일에 윤리적 죄책감과 우려를 나타내면서도 새로운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한편 랭은 장기를 변형 및 이식해 플라스틱을 인류의 주식으로 삼고자 하는 운동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 전 세계에 포진된 그의 조직은 일반적인 음식 대신 산업폐기물 등을 원료로 한 합성 플라스틱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가 사울에게 해부를 부탁한 8살 아들 ‘브라켄’은 기적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태어난 ‘신인류’로, 랭은 사울과 카프리스에게 이러한 신인류의 내부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을 요청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의 배를 갈라 들여다본 내부에는 특별한 소화기관이 아니라 문신이 새겨지고 여기저기 꿰메진 장기들만이 있다. 그리고 아이의 오염된 장기의 배후에는 인간 신체의 변화, 즉 진화의 흐름을 부정하고픈 거대 권력의 ‘정상성’에 대한 고집이 존재한다.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피부 밑의 세계를 직접 열어 볼 수 있게 되면서, 영화 속 미래의 사람들은 가학적인 신체 훼손에 열광한다. 이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피부 아래를 깊숙히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열광하는 피부 밑의 세계에 ‘의미’란 없다. 그곳에는 오염되고 변형된 피투성이의 장기들뿐이며, 예술가는 애써 이것들에 알량한 의미를 붙여보려 한다. 고통이 없어진 세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영혼과 미덕의 가치에 대한 감각마저 무뎌진다. 사울이 참가하는 ‘내면의 아름다움 선발대회’ 역시 인격이나 마음의 도덕이 아니라, 단순히 몸 안의 장기들의 생김새와 배열을 평가하는 대회라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변화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에 따른 상실 역시 불가피하다.
해부 쇼가 끝난 뒤에도 사울은 여전히 음식을 씹어 삼키고 말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아침 음식을 삼킬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합성 플라스틱 바를 섭취해 보기를 선택하고, 마침내 자신도 계속된 몸의 변형 끝에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인류로 거듭났음을 확인한다. 플라스틱 바를 씹어 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사울의 얼굴이 흑백으로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장면은 변화한 자신의 몸에 대한 절망을, 혹은 인류의 진화를 직접 체험한 이의 환희를 의미할 것이다.
영화의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8년 만의 복귀작이자 20년 만에 다시 택한 바디호러 장르인 이 영화를 두고 “인류의 진화에 대한 명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변형되고 훼손된 인간의 신체를 꾸준히 다루어 왔고, 그의 영화 속에서 인간의 몸은 정상성의 범주를 교란하며 부서지고 절단되고 뒤틀린 채 관객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선사했다. <미래의 범죄들>은 크로넨버그가 지금껏 구축해 온 세계관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신체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정상성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자아가 자신의 신체의 경계를 확립하기 위해 비자아로서 배척한 것들(피, 체액, 적출된 장기 등), 즉 비체(abject)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스크린에 비추면서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질서와 체계를 가로지르고, 끝내 그것들을 수용하면서 인간 신체의 변화를 암시한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과도기적 상태에 놓인 인간이 경계선을 넘어 진화하는 변태變態의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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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월호? 아직도 세월호!
8★/10★
조금은 이상하고 뒤늦은 슬픔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서울 어딘가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날 눈물 흘리기 전까지 나는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의심하기 바빴다. 세월호를 슬퍼하는 모든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때였지만 내 안에는 뿌리 깊은 패배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죽음을 슬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박근혜와 20대를 보낸 내게는 그들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권위 국가가 상수였고 그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늘 변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편안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세월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섣불리 슬퍼했다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추모집회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접속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게 슬픔을 견뎌왔을 뿐이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는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슬픔을 고립시키려는 모든 것과 단절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애도하며 공통감각으로서의 슬픔을 되찾았다. 세월호는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통해 개별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사라진 생명을 잊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변화를 요청할 수 있음을, 누군가를 잊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거나 낙후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바람의 세월〉이 보여주듯, 이 깨달음은 지난 10년간 번번이 제도권 정치와 진실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딸 문지성 양을 세월호 참사로 잃은 뒤 카메라를 든 문종택 공동 감독은 지난 10년의 세월, 3,654일 동안 세월호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은 5,000여 개, 분량은 50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 긴 시간은 대체로 참사 유가족과 그들의 슬픔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번번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는 과정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유족과 시민의 염원을 이뤄줄 듯하던 문재인 정권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 포괄적 진실 규명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 참사 후 유가족이 처음 환하게 웃은 건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그마저도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유가족은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결국 배반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법과 정치의 문제와 접속시킬지에 관해 많은 물음을 남긴다. 법조인, 정치인이 기존 법 체제 안에서 유족과 시민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노력(특검, 특조위 등)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적인 슬픔에 담긴 커다란 물음과 가능성이 법 기득권과 정파적 당리당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 정의는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세월호 관련 법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영화에 절망과 분노의 순간만 담기지는 않았다. 종종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슬픔을 느낀 건 배상‧보상을 통한 정부의 가족 분열 획책, 유가족을 향한 모욕을 담은 장면만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 등교를 응원하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국회에서 유가족 앞을 막고 선 젊은 경찰이 흐느끼며 울먹이는 장면에서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추모 공간을 꿋꿋이 지키며 싸움을 이어가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이 5.18 민주화 운동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너졌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추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는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견뎌내야만 했던 야만적 시간을 영화가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시간을 유족의 시선으로 말하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뉴스로 사건을 접한다. 즉 누군가 한 번 매개해 가공한 상태로만 어떤 사건을 접한다. 기자가 유가족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유가족처럼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인 채 글 쓰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의견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입혀주기 일쑤인 기계적 중립이 더해진다면, 나아가 기계적 중립마저도 외면하고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한 〈바람의 세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중립을 가장한 차가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절절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은 만큼, 정제되고 정돈하여 매개하지 않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족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보다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며 감정의 공적 기능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람의 세월〉에는 ‘아직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아직도!’라고 답할 힘이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앞에 과거의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슬픔에 기반한 공적이고 정의로운 연결감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 영화에서 큰 위로와 연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가 되레 위로받고 나왔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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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오징어 게임 (Squid game, 2021)
개봉일 : 2021.09.17 (넷플릭스 공개)
감독 : 황동혁
출연 : 이정재, 박해수, 오영수, 위하준, 정호연, 허성태, 아누팜 트리파티, 김주령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까지. 매번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황동혁 감독의 신작 <오징어 게임>이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채 삶의 끝에 서있는 456명의 참가자와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금 456억. 수많은 참가자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굶거나 빚쟁이에게 찔려 죽느니 목숨 걸고 인생 한번 바꿔보자며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한 사람당 1억. 최후의 1인에겐 456억. 누가 이런 서바이벌을 벌였는진 알 수 없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돈다발에 “이건 진짜다.”라는 믿음을 얻는다. 옆에 누워있는 참가자는 믿을 수 없지만 돈만큼은 착실하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믿지 못할 경쟁자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공격성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죽는 게 나만 아니면 되니까. 생판 모르는 이의 목숨 vs 추가되는 1억 + 나의 생존 중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당연 후자가 아닐까.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2008년에 구상하고 2009년에 쓴 이야기다. 당시 일본 서바이벌 물인 <라이어 게임>, <배틀 로얄>과 같은 작품들을 보며 서바이벌 물의 요소를 한국적으로 접목해 내기 위해 고민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오징어 게임>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약간의 각색이 더해지긴 했지만 이런 소재를 10여 년 전에 이미 모두 구상해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쉬웠다. 그 당시에 바로 제작이 됐다면 지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사이에 영화 <헝거게임>이나 웹툰 <머니게임>처럼 돈과 명예를 건 서바이벌 물들이 지나간 후라 서바이벌 물 자체의 신선함은 조금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오징어 게임>은 아이들의 게임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다른 서바이벌물들과 차별화를 둔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게임 참여자들은 서로를 의지하다가도 한순간에 의심하고 배신하고 결국엔 서로를 해하게 된다.’는 서바이벌 물 특유의 심리적 공포는 똑같이 존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다른 서바이벌 물들과 다르게 조금 더 단순하고 귀여운 게임을 반복한다. 어릴 적 골목에서 친구들과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들 말이다. 9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엔 총 6종류의 추억의 게임이 등장하는데,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전부 언급하지 않겠다.
이 시리즈의 차별점이자 가장 큰 매력은 낯설고 아기자기한 세트장과 디테일한 요소들이다. 강박증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 만큼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각진 물건들과 진짜 같은데 가짜 같은 공간들이 담고 있는 무게감, 그리고 눈에 딱 들어오는 일꾼들의 핑크색 슈트와 선물 상자처럼 포장된 관들. 기계처럼 움직이는 일꾼들이 만들어내는 동작의 흐름들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특히 만족스러웠다. 내용은 아름답지 않지만 눈에 담긴 세트장은 빈틈없이 마음에 들었다.
서바이벌 물 특유의 설정들과 게임의 일부로 인해 앞서 나온 여러 작품들과 비교되며 표절 논란을 함께 안고 가고 있지만 작품 자체가 완전한 표절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장르적 특성과 플래그, 일부 장면과 소재를 모두 독창적, 독보적으로 구성하기엔 이미 서바이벌 장르가 쌓아온 이미지와 개념,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라는 틀이 있기에 앞선 작품들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기보단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간단한 룰로 이뤄진 추억의 게임들을 돈과 목숨을 건 피 튀기는 생존 게임의 주제로 이용하며 어릴 적 우리의 모습,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의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끌어올린다. 어릴 땐 친구들과 골목에서 웃으며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인생 한번 뒤집어보겠다고 피 흘리고 절규하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씁쓸하고 슬플 뿐이다. 그때는 술래가 되거나 게임에서 져도 딱밤 한방이나 인디언 밥 한 번이면 패자 벌칙으로 충분했는데 이 게임에서 탈락하면 무조건 죽는다. 탈락한 자는 죽는다는 게임 특성상 아무래도 잔인한 장면들이 다소 많이 등장하긴 한다. 총으로 사람을 쏘거나.. 사람의 신체가 망가진다거나. 많이 고어한 편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면 거부감이 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게임 속 약육강식의 법칙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초대장을 받고 자신의 손으로 참가를 결정한다.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갔던 참가자들은 현실에 떠밀려 대부분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최후의 1인이 내가 될 수도 있다며 확률을 계산하고,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이기심과 폭력성을 여과 없이 내보인다.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무리가 생기고, 권력을 잡는 힘센 무리가, 나쁜 무리가, 그에 대응하는 착한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기 위해 어떤 행동까지 벌일 수 있는지. 추악하고 추잡한 본능의 단면을 제대로 훔쳐본 기분이었다. 근데 웃긴 건 왠지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선 충분히 그들처럼 행동했을지도..
게임의 참가자들은 게임장 입소에 앞서 똑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는다. 이들은 게임장의 위치도 모르고 당장 다음에 펼쳐질 게임 종목도 알 수 없고, 옆에 서있는 참가자의 이름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을 컨트롤하는 사람들은 참가자들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학력, 특이사항을 포함해 이들 인생의 대부분을 알고 참가자들 머리 위에서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가면에 그려진 도형과 가면의 종류에 따라 철저한 계급제로 운영되는 오징어 게임이란 작은 사회에서 참가자들은 얼굴과 몸을 속절없이 노출한 채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 이 게임에선 가면에 그려진 도형의 각이 많을수록, (네모>세모>동그라미), 상급자의 개념인 듯하다. *
끝나지 않는 게임에 대한 피로도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무력한 참가자의 모습이 우리 모습과,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게임이 우리 사회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같이 살자”고 말할 여유도, 그런 약속을 지킬 여력도 없이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지쳐버린 우리들. 그리고 465명 중에 1등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1인을 가리기 위해 자비 없이 반복되는 게임들. 이 게임은 지옥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일부분을 아주 크게 확대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일부 후기들에선 반복되는 잔인한 장면들, 다소 느리게 느껴지는 전개에 대한 아쉬움을 볼 수 있었는데, 6번의 게임을 지나다 보면 다소 피로감이 몰려오는 건 사실이다. 단순한 게임이지만 믿었던 이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결국엔 1명만이 남아야 한다는 룰 아래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긴장감과 허탈함의 반복이 주는 감정 소모가 굉장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예상은 했지만 진짜 싫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생존 게임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함께 지쳐간 기분이었다.
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어릴 때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하던 게임들은 해가 질 때쯤, 엄마의 “얘들아, 밥 먹어~”라는 말과 함께 끝났는데, 고립된 섬 안에서 펼쳐지는 생존 게임에 참여한 이들에겐 게임을 중지시켜줄 사람이 없다. 주최자들은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걸었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에 쌓인 돈을 포기하지 못한다. 말려줄 사람도, 욕심을 포기할 사람도 없다.
한낮에 시작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밤처럼 어두운 세트장에서 치러진 징검다리까지,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가는데 생존에 대한 긴장감을 놓을 틈이 없다. 게임 주최자들은 여러 극한의 상황들을 연출하며 참가자들을 몰아가고, 차후엔 제발 극단적인 선택을 하라며 부추기기까지 한다.
게임 안의 인물들
돈과 생존이 달린 게임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변화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주인공 기훈과 상우, 새벽이 그 변화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새터민 새벽은 아무것도 없이 동생과 덩그러니 남겨진 세상에서 엄마를 데려올 돈을 모으기 위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새벽은 아무도 믿지 못한다. 게임의 초반, 새벽은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으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기훈에게 마음을 열고 마지막 순간엔 기훈에게 동생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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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는 <오징어 게임>의 최고 브레인이다. 서울대 수석 입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는 정형화된 지략가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생존에 있어 가장 계산적인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인물은 상우였다. 상우는 처음 게임에서 쫓겨나왔을 때 알리에게 차비를 빌려주거나 달고나 게임 직전 우산을 고른 기훈에게 게임 종류를 말해줘야 할지. 같은 양심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믿은 알리를 배신하고, 부상을 입은 새벽을 찌르고 끝내 마지막 게임에선 기훈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는 보통 선하게 설정되는 주인공(기훈)의 편에 함께하면서도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 게임에서 상우는 기훈에게 우승을 양보하며 죽음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기훈에 대한 믿음, 사과의 의미 50%와 허공에 돈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결단 50%가 합쳐진 일부 계산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훈은 약삭빠르기보단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가족도, 동료도, 어머니도, 내 인생도 챙기고 싶었기에 무엇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그는 엉망이 된 인생을 되돌리기 위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다. 그는 약자인 1번 일남과 혼자인 새벽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게임 안에서 경쟁자가 된 상우에게도 옛 추억을 얘기하며 적대감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는다.
좋게 말하자면 살육 게임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선인.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오지라퍼. 그런 상우가 변하게 된 건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상우가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인 순간부터였다.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칼을 집은 상우를 경계하던 기훈은 새벽의 죽음과 함께 방어와 공생이 아닌 공격을 선택하게 된다. 6번째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공수를 결정하라는 질문에 ‘공격’이라 답하는 기훈의 대사로 그의 확고한 심경 변화를 느낄 수 있다.
1화의 시작,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9화에선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생존을 건 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골목을 뛰놀고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기훈과 상우가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된 걸까. 문득 슬퍼지는 장면이었다. 기훈과 상우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만 마지막 순간엔 다시 떠오른 추억과 기훈의 결단으로 둘의 사이가 잠시나마 회복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너무 많이 변해버린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지영의 말대로 “6.25이후 최대의 비극”같은 게임이었다.
게임 밖의 인물들
<오징어 게임>은 잔인하다. 자의로 참가하긴 했지만 어쨌든 돈과 생존을 필사적으로 바라는 참가자들을 마치 게임 말처럼 게임판 위에 올려두고 관찰하고, 가볍게 죽인다. 참가자들은 게임 내에서 서로의 이름과 추억을 나누며 나름의 동료애와 우정을 쌓아가지만 주최자들은 극적인 게임 연출을 위해 그 심리마저도 이용한다. 아침이 지나고 해가 져갈 때쯤,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될 때쯤 주최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1:1 게임을 붙여 참가자들의 작은 위로와 희망마저 빼앗는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건 게임에 함께 참여한 일남의 존재다. 구슬치기 게임을 하며 양심의 가책과 일남을 잃은 슬픔에 절어있던 기훈을 농락하듯 게임이 끝난 후 1년, 일남은 다시 기훈에게 카드를 보낸다. 일남이 게임에 참가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더 재밌을 수가 없지.”
그저 인생의 재밌는 것이 없어 참여했을 뿐, 기훈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남을 지키기 위해 진심을 다했는데, 일남은 그저 재미 때문에 게임을 열고, 게임에 참가한다. 되짚어보면 일남은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임에도 큰 걱정 없이 게임을 해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할 땐 걱정 없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선두로 뛰어나갔고, 구슬치기 게임에선 미련이 없다는 듯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한다. 그리고 참가자 간 큰 싸움이 벌어지던 날 밤. 일남이 높은 침대에 올라가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라고 소리치자 프론트맨은 이내 스페셜 게임의 중지를 선언한다.
일남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숨이 달린 게임의 승리를 기훈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 그가 무섭다고 소리치자 상황이 종료되었던 것은 일남은 게임에서 지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기 때문에, 통제 못할 상황에서 일남이 생명을 잃는 걸 방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6화 깐부 에피소드에서 일남이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하며 두 사람 사이의 믿음과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에 울컥하긴 했으나 차후에 일남이 보여준 그 행동이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결국 양심을 잃어버린 기훈의 모습에 대한 만족도를 구슬로 표현한 것일 뿐, 그 구슬 안에 담긴 진심이 무엇이었을지.. 더 이상 일남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일남은 기훈을 가장 우습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오징어 게임>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게임에 참가하거나 게임을 진행한다.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게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인물은 준호다. 경찰인 준호는 실종된 형이 남긴 명함과 기훈의 증언을 듣고 게임장 내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가장 용감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다.
준호는 주최자, 참가자, 외부인의 삼각 구도를 만들어 이야기의 흐름을 팽팽히 당겨낸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하나도 파헤치지 못한 오징어 게임의 비밀과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고 새로운 궁금증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후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준호의 생존 여부가 기훈에게 가장 큰 힘 또는 변곡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주최자들을 제외하고 그 해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하거나 죽는 장면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이 유일하니 말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지킨 주인공
주최자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이고 탈락시키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이기심과 공격성이다. 기훈은 게임 내내 동료라 생각되는 인물들을 챙겼으며 마지막 라운드에서도 상우를 살리기 위해 게임을 중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이 끝나고 상금을 받았음에도 죄책감과 여러 감정들로 인해 여전히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남은 남다른 우승자 기훈을 불러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마지막 게임을 제안한다. 하지만 기훈은 매번 일남과 주최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인간성을 지키고 일남과의 게임에서도 승리한다. 그는 인간들의 밑바닥을 훑으며 즐거워하던 주최자들에게 커다란 한방을 먹이고 이 게임의 진정한 승자가 된다.
이 게임은 정말 평등한 걸까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오징어 게임>은 반복적으로 평등을 주장한다. 이들은 밖에선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위치에 놓고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며 참가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건 전혀 평등한 게임이 아니다. 참가자와 주최자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참가자들은 생존이 걸린 게임에서 본능적으로 서로를 해치고 죽지 않기 위해 숨는다. 목숨을 건 무한 경쟁을 끝내는 방법은 생명이 다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주최자들은 이 게임이 결국 평등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가자들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을 하나의 내깃거리, 구경거리쯤으로 소비한다. 애초에 각자 다른 신체능력과 지능, 게임에 대한 경험치를 가진 400여 명의 사람에게 똑같은 게임을 제안하는 게 어떻게 평등할 수 있을까. 주최자로서 편의를 확보한 일남, 뽑기 게임에서 라이터를 사용한 미녀와 덕수, 일남 덕분에 게임을 통과한 기훈, 장기 적출로 미리 게임을 알았던 참가자 등.. 열심히 포장했지만 결국 평등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만약 456억을 얻을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꽉 잡겠는가?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일확천금의 커다란 기회라면 그걸 놓쳤을 땐 그만큼 잃는 게 많을 테니, 큰 도박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말 내일 죽을 수도, 내일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또 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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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고 하면 힘낼 수 있나요
진짜 포기하고 싶다. 아니 포기해야겠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좌절감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력을 무지막지하게 들여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삶이란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메이플스토리의 데미안과 스우를 잡는 것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쉬워지는데 삶은 그런 게 없어 잔인하다. 난 근본적으로 사랑받기엔 못돼 쳐 먹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당분간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 모든 것이 싫다. 무엇이든 할 맘이 안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포기하면 뭐 어쩔 건데? 엄마, 아빠한테 내 정신적인 고통을 줄줄 늘어놓으면 어떤 지점이 달라지나? 사실 선생님에게 최근의 내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기에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똑같은 하루의 반복일 것이다. 몸이 고장 난 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뭔갈 사고 싶은 강박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맞다. 나는 지친 것 같다. 유럽에 갔다 와도 지친 게 해소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나의 정신적 탈진은 아마 영원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면 1년 동안 지치는 타이밍이 한 번도 안 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어물쩡 넘긴 나 자신이 싫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지금 닳고 닳았다. 요즘 나는 삶의 동기부여가 단 1%도 남지 않았다. 난 남들에게 위로해주는 법은 알았지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는 법이라곤 단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사랑도 다 무섭다. <굿 윌 헌팅>과 <그린 북>이 어쩐지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도 많은데 요즘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는 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돈이라기엔 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상상과 희망도 재미가 없는 오늘 난 천천히 가는 버스에 기대 잡생각을 하고 있다.
<체리 향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영화다. 나의 인생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트럭을 운전하는 주인공. 어쩐지 표정에서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이 사람은 갑자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태운다. 군인을 태운 주인공 바디. 바디는 군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땅굴에 묻힐 테니 그 조력자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한다. 군인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 손님으로 신학도를 태운 바디. 같은 부탁을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죽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바디는 세 번째 손님을 찾아 나선다.
세 번째 손님은 나비를 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치료비가 급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 노인은 주인공과 차를 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나 역시 죽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코 끝에 스친 체리 향에서 왔죠. 소소한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 바디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예 말을 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바디에게 변화가 있긴 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깨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웃으며 바디의 근심 걱정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인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서 바디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바디는 다시 무덤 아래에 누웠다. 생각이 바뀐 게 없는듯한 바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의 요청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다.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무언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정의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에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바디는 죽을 곳에 다시 누웠다. 그의 생각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난 인생을 얻는 동기부여의 힘이 갑자기 어느 날 번쩍하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본다. 한참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살 때 느낀 게 있다. '힘 내'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힘을 내? 힘을 낸다는 게 무슨 뜻이지? 힘 내면 내가 이 뭐 같은 일상을 이겨낼 수 있나? 당연히 이 반응이 '와닿지 않았다'란 말을 자격지심에 빠져 거칠게 하면 나오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하는 이에게 상처 줄 생각 단 1도 없지만 큰 골자가 되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그 말을 하는 이는 내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일 테지. 난 살짝 다르다. (그렇다고 힘 내!라는 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겪는 비극은 나를 다시 공격할 것이고, 난 같은 방식으로 또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는 모든 걸 웃어넘겨 행복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조금의 변화만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려 깊다. 바디의 인생이 무조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부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을 극복했다고 해서 비슷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행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나? 아닐 것이다. 삶은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극복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의 교만일 수도 있다. 큰 힘을 줘가며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이유로 인생에 환기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같다. 환기가 안되기 때문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또 힘 내!라는 말에 힘을 내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 곪았다. 모두가 심하게 깊게 파여서 단순히 끌어올리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기.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기. 영원한 이별. 이런 삶을 가로지르는 실패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와 우울함은 천둥번개 치듯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지워버린다? 지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감독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간단하다.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목적에서 진 인물이 다시 이겨내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외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외로움인지. 권태인지. 뭔가를 이겨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게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나를 속였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20대를 관통하는 동기부여보다 더 얻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둔 인간이었고 그 관점에서는 사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이런 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데 또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은 모든 걸 던져버리고 쉬은 게 맞긴 하다. 당장 이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정산 못 받은 돈. 가지 못한 여행지. 공익근무지에 들어오는 바나나우유.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나이키와 협업해서 나오는 새로운 스니커즈.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왠지 모르게 사실이 아닐 거라는 기대감까지. 나는 아직도 바라는 것이 많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무너져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삶의 터널을 훌쩍 지나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로 살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많이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들에 실패해 지금은 괴롭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 덕이었다. 이를 위해 계속 같은 것만 하겠지. 지겹게. 그러나 삶은 원래 지겨운 것이 맞다. 근데 또 지겨워서 좋은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소한 무언가가 있다면 하루를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그래. 사랑받는 인생 다 좋은데. 이것 역시 나에게 중요한 거 맞는데. 돈 많이 벌어서 나 좋은 거 엄마 아빠 멋있는 거 사는 거 다 좋은데. 사실 나는 어느 날 맡은 체리 향기와 같은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미 하나 만드려고 일을 벌이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다. 난 감독이 삶의 이 지점에 대해 논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찾지 못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삶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닐걸. 의외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소한 무언가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를 바뀌게 하고, 서서히 좋아지게 만들며, 또 살아 숨 쉬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매일마다 감상이 다른 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다들 지겨울 것이다.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고 우울감은 하루마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까 오래 살자. 힘은 되도록이면 내지 말자.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위해 살자. 그러려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고, 남들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한번 사는 인생 과연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통받으며 살더라도 오래오래 살자. 언젠가 만날 체리 향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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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년에게 돌 던질 자 누구인가.
이 글은 2023.05.03일 개봉 예정인 영화 [클로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오(에덴 담브린)와 레미(구스타브 드와엘)의 인생은 서로의 모습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성벽과도 같았다.
둘만이 할 수 있는 가상의 전쟁놀이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해 달아나고 숨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꽃이 가득한 들판을 숨이 헐떡일 때까지 달음박질치기도 했다.
견고한 성벽 안의 두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은 내달리고 온 날의 밤이면 잠 못 이룬 채 속살거리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셔야만 했다.
그런 레미를 위해 레오는 노래를 불렀다.
무리에서 떨어진 오리와 도마뱀의 노래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두 생명체이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듯한 레오의 노래를 들으며. 레미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치 두 소년의 모습도 영원히 그러하기를 바라는 꿈을 꾸면서.
하지만 누가 와서 두들겨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둘 만의 성은. 또래 친구들의 눈길 몇 번에 주저 없이 금 가기 시작했다. 성벽 밖에 선 채로 레오와 레미의 보호막을 와르르 무너지게 한 친구들의 얼굴이 무너진 성 안에서 보이던 순간. 레미는 늘 곁에 있던 레오에게 손을 뻗었지만. 레오는 성큼성큼 걸어가 친구들의 손을 잡고 멀리 떠나고 있었다.
레미는 깨달았다.
오리와 도마뱀은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도마뱀;살기 위해 꼬리를 잘라야 하는.
레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마뱀의 그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이 없어, 시시각각 변하는 한 아이의 감정을 얼굴 표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그것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레오를 향한 다각화된 마음이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들은 모조리 진심이었고, 레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감정 앞에 솔직한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레오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손을 놓고 자꾸 저 멀리 떠나가려는 듯했다. 레오는 더 이상 가상의 적군들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보려는 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레오가 성벽 밖으로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긴 그 무렵부터, 레미는 함께 달리는 레오의 옆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축구, 다음엔 아이스하키. 그리고 영원히.
레오는 효과적으로 레미를 멀리했고. 그렇게 레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엔 배가 아픈 것만 같았다. 레오와 멀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도 배가 아프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레미는 배가 아닌 가슴이 아픈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의 근원지는 몸과 가까우면서도 멀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존재했으며. 실존하지 않길 바랐지만 생생하게 존재하는 생전 처음 느낀 이 고통에 레미가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마뱀은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고 했다.
하지만 레미에게 레오는 꼬리 정도가 아니었고. 새로운 꼬리도 레미에게는 필요 없었다. 레오는 레미에게 모든 것이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널뛰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오리의 곁을 떠나기로 한 도마뱀은 주저 없이, 레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길을 선택했다. 영원히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생각했을 때. 레미는 다시 한번 배가 아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에게 둘러댈 때는 배와 가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지만.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오리;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발짓을 해야만 하는.
성 외곽이 무너지고,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친구들과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이미, 그것도 꽤나 멀어 보였지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순간. 레오는 레미의 손을 뿌리쳤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레미의 슬프고 상처받은 모습 정도는 기꺼이 나중에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집단 속에서 효과적으로 섞이고 난 뒤에는.
레오의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히 무리에 섞여 있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의 갈퀴 달린 발은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물을 움켜쥐며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레미와 처음 다툰 그날도. 점점 더 자신의 마음속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기를. 아니 숨기기 편해지는 레미를 향한 마음을 보면서. 레오는 괜히 레미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레오는 나중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무리에 속하고 나면. 그때는 레미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필사적인 발짓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애써 외면한 채. 그마저도 나중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레오는 얼굴에서 모든 감정을 지워버리고는 열심히 갈퀴질을 했다.
그러나 레오에게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못했다.
변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속죄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히 레오의 인생에서 레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문득 자신이 레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왜 하필 두 도마뱀도, 두 오리도 아닌, 도마뱀과 오리였을까.
왜 같은 종에 속하는 두 마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레오는 이미 레미와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레미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알게 되자. 그제야 레오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미는 배가 아프다고 했었다.
레오도 지금 만큼은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 싶었겠지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아픈 곳은 배가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시선;그리고 동일화
영화 속의 소년들은 시종일관 달린다.
때론 그 수단이 자전거이기도 하고, 자동차일 때도 있으며 달리기일 때도 있다. 레오와 레미는 그 어떤 배경을 두고서도 앞으로만 달릴 뿐. 절대 시선을 뒤로 주지 않는다. 허투루 낭비되어 공허함을 좇는 시선이 없다.
특히 레오의 시선은 레미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로 정면보다는 측면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아무런 표정, 감정도 없는 레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길 때마다 과연 레오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문득 레오를 바라보는 이 카메라의 앵글이 레미의 시선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미가 평생을 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생 후반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레오의 옆얼굴. 레미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잊히지 않고 존재감이 가득한 이유도 아마 이런 앵글 처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는 도마뱀과 오리는 처음엔 너무도 당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오가 눈물을 터뜨리는 말미에 가면 그 경계마저도 희미해진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했던 레미의 모습이 오리 같기도 하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꼬리정도는 뭐.라는 생각으로 레미를 밀어내는 레오의 모습은 도마뱀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달랐으며. 이로 말미암아 절대 넘을 수 없던 차이가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로의 처지가 완벽히 달랐음을 레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레미와 웃으며 상상 속의 적군들에게서 도망쳤던 꽃이 만개한 들판에서. 시종일관 앞만 보던 레오가 단 한 번 뒤돌아 보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라는 꼬리를 잘라내기 싫어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선택을 한 레미가 문득 생각난 듯. 레오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이 기꺼이 잘라낸 꼬리의 흔적을 슬며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었던. 혹은 계속 회피해 왔던 자신의 아픔과 레미의 아픔을 함께 이해한다는 듯이.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뒤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카메라의 앵글로 대변되는 레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며 결국 레미에게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면이자 뼈아픈 성장의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음을 알리는 순간을 이보다 고급스럽게 표현한 영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화장실 문을 보여준 채 머무는 단 몇 초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도 정확한 정보와 복잡한 감정을 한 아름 던져주었다.
느린 전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런 섬세함을 단 한숨도 놓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마다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그에 상응하는 숫자만큼의 상처를 영화 내내 마음속에 남겼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경험 속에서도 화면에서 눈을 감히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영화는 아름답고도 슬펐다.
과연 레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도 마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씨네랩으로 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의 TMI]
1. 독일어 공부는 잘하고 있습니다.
2. 공부하느라+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와서 다 내려놓고 잘 쉬었습니다.
3. 매우 많이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로즈 #씨네랩 #루카스돈트 #에덴담브린 #구스타브드와엘 #에빌리드켄 #레아드루케 #영화리뷰어 #munalogi #최신영화 #영화시사회 #브런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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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피커 인터뷰] 프로덕션 대표 / 영화, 그리고 나_2
Q. 안소회 감독의 인생 영화는?
A. 제일 많이 본 영화가 하나비라는 영화였는데 그것들을 그걸 말을 해야 하는지 그 인생 영화의 기준이 요즘 좀 모호해지고 있는 것 같고요.
사실은 지금까지도 근데 인생 영화가 나한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영화다라고 정의를 한다면 하나비라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뭔가 영화에서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사나 뭐 연기라든지 여타 이런 것들로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지로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는 것들을 좀 처음 알게 됐었던 영화인 것 같습니다.
한합이라는 영화가 중간에 실사 이미지는 아닌데 그 그림이 이렇게 나와요.
그 화면을 오프닝 시퀀스에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몸은 동물이고 얼굴은 꽃인 그런 이미지들이 쭉 나와요.
처음 볼 때는 그게 뭔지 모르겠었는데 그 영화를 거의 한 9번 10번은 봤던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서 끝을 보고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그 이미지를 보면 또 느껴지는 게 있더라고요.저게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들을 되게 모순적이지만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비라는 제목도 되게 인상이 깊었던 것 같고요.Q. 좋은 연출이라고 생각하는 영화는?
A. <연애의 온도>라는 영화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제가 사실 막 사람들이 되게 좋은 영화는 맞지만 그 영화가 뭔가 정말 작품성이 있다 막 그렇게 평가를 많이들 하지 않잖아요.
그 영화를 근데 저도 처음에 학교를 다닐 때 연출이 잘 된 영화다 그러면 뭔가 정말 좋은 이미지가 나와야 하고 그 사람만의 색깔 작가주의가 뚜렷하게 보여야 하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들어 생각하는 정말 좋은 영화는 그 영화를 보고 되게 내 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연애 온도라는 영화가 저한테 그랬던 영화고 그렇게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연출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연애의 온도>가 연출이 되게 잘 된 영화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Q. 영화 연출할 때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A. 좀 고집이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자기가 딱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면 사실 때로는 비굴한 순간들이 있고 때로는 억지 같은 순간들이 있잖아 있겠지만 자기만의 확신을 갖고 끌고 갈 수 있는 밀고 갈 수 있는 고집이 좀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고요.
처음에는 저도 리더십이 있어야 되나 영화 감독은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을 하면 그것들은 뭐 PD님들이나 조 감독님들이 알아서 잘 굴려주시는 거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들 꿋꿋이 하는 게 좀 더 좋은 감독이지 않을까 그리고 책임을 져야 되는 자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본인이 밀고 가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그렇게 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또 하나의 덕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Q.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영상이란?
A. 목적에 부합하는 영상이 가장 좋은 영상인 것 같아요. 영화도 마찬가지고 영상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들은 목적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화라고 하면 내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여야겠다가 될 수도 있고 영상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영상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생각할 때 좋은 영상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상이라고 생각을 하고 제가 항상 어디 가서 메일이 됐든 만나 뵙든 저희 회사 소개를 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문구가 마음을 담은 영상을 제작하는 프로덕션이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누군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들이 마음이 담겨야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영상이라고 하면 만드는 사람들이 마음을 담고 그 마음을 담은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영상이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Q. 영화를 꿈꾸는 친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
A. 저는 개인적으로 본 이제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뭔가 딱 나는 이것만 해야 돼라는 것들을 정해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그게 나는 무조건 영화만 할 거야 나는 무조건 드라마만 할 거야. 아니 나는 뮤직비디오만 할 거기 때문에 이건 안 봐도 돼.
그런 시대는 좀 지난 게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냥 즐거운 것들을 계속하다 보면 이게 좀 더 맞는 것 같다 정도는 나오는 것 같거든요. 근데 저도 아직 그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는 상태지만 뭔가 그때부터 나는 연출이니까 연출만 해야지 촬영만 해야지 녹음만 해야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냥 다 열어놓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이 영상을 보고 있거나 아니면 입시를 준비한다는 친구들은 그래도 또래 다른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영화를 좋아하고 영상을 좋아하는 친구들일 테니까 뭔가 자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부터 이렇게 딱 제한하고 정해놓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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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하러 온 파멸
브랜든 프레이저의 뛰어난 연기로 주목받고 있는 영화 <더 웨일>의 서사는 지극히 단순하다. 동성 연인의 죽음 후 자제력을 잃고 272kg의 거구가 된 찰리(브랜든 프레이저 분)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딸 엘리(세이디 싱크 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영화의 공간 변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주된 서사는 찰리의 집 내부에서 진행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고, 그렇기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상당 부분을 기대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연인 브랜든 프레이저 이외에도 딸 엘리를 연기한 세이디 싱크,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토마스를 연기한 타이 심킨스와 찰리의 거의 유일한 친구 리즈 역을 맡은 홍 차우마저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다. 소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배우들의 연기가 스크린을 넘쳐 흐를 듯이 관객을 위협하는데 덕분에 관객은 모든 등장인물에 이입할 여지를 획득한다.
올해 남우주연상 후보들 모두 하나같이 쟁쟁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개인적으로 아직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람하지 못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애프터썬>의 폴 메스칼에 한 표를 던진다). <미이라> 시리즈 이후 개인적인 사건들로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해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지지를 얻어낸 측면이 우선 크다. 거기다 남우주연상 한 부문에만 후보를 냈을 만큼 강하지만 작은 영화 <애프터썬>과는 달리(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인 감독 샬롯 웰스는 바로 이 신인이라는 점 때문에 시상식의 피해자가 되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감독의 이름을 얻고 상대적으로 홍보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적인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브랜든 프레이저는 도저히 이입할 수 없을 만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관객의 공감과 응원을 이끌어 내는 난제를 해결해 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 낸다.
찰리라는 인물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찰리는 스스로 파멸을 가져온 인물이지 타인의 연민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다. 동성 연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가족을 버리고 떠난 데다 연인의 죽음을 핑계로 폭식을 일삼아 스스로를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친구 리즈조차 찰리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비밀마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데, 이런 찰리는 기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아도 관객의 입장에서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찰리가 돈을 줄테니 가끔 방문해달라는 부탁에 응하는 차가운 엘리도 사정을 알고 보면 외려 찰리보다도 딱한 인물이다. 엘리가 찰리를 역겹다고 하는 건 단순히 찰리의 외모 때문이 아니며 이는 관객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엘리의 대사로 직접 언급된다. 보다 호리호리했던 찰리의 모습이 간간이 드러나는 바닷가 플래시백 장면에서조차 엘리와 찰리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엘리와는 달리 찰리는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데, 이는 찰리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엘리의 삶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찰리는 엘리의 삶의 일부가 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경제적인 부양을 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엘리에겐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찰리의 자기 파괴적인 면모는 영화 초반보다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찰리가 거구가 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초반에는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샌드위치를 먹다가 질식할 뻔한 찰리의 모습에 얼마간 관객이 연민의 시선을 보낼 만한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리즈의 걱정과 계속되는 경고에도 피자를 두 판씩 주문해 먹어치우고 병원을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관객은 찰리에게서 서서히 정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끝까지 찰리가 스스로 일어나 엘리에게 다가가길 응원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섬세한 연기에 기댄 결과물이다. 때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상처받은 아이인지 사이코패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엘리를 향한 지속적인 애정을 드러내며, 경계할 법도 한 의문의 방문객 토마스에게도 친절하지만 리즈의 말은 결코 듣지 않는 모순적인 인물 찰리는 브랜든 프레이저를 통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학생들의 에세이를 서둘러 채점해야겠다던 찰리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수업을 하다 말고 노트북을 던져 버리기도 한다. 이런 세심한 감정선을 포착해 낸 브랜든 프레이저는 특수 분장을 뚫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침마저 연기해낸다.
<더 웨일>에서 구원은 파멸을 통해 다가온다. 모순적이지만 응원하게 되는 주인공 찰리를 제외하면 특히 엘리와 토마스가 이에 해당된다. 돈은 둘째치고 낙제를 면하기 위해 찰리에게 에세이 대필을 부탁한 엘리는 결국 찰리의 농간 아닌 농간으로 낙제를 당한다. 하지만 찰리가 엘리에게 건넨 그 낙제 에세이는 결국 엘리의 구원으로 이어지며, 엘리의 구원은 찰리의 구원으로도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엘리는 그 파멸 속으로 아버지를 함께 이끌고 들어가려 하지만 결국엔 그 파멸이 본인과 찰리, 그리고 토마스라는 외부인마저 구해낸다. 의도치 않게 엘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힌 토마스 또한 스스로 막장까지 내달렸던 캐릭터다. 하지만 엘리의 농간 덕에 구원의 길이 열리고 토마스는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는 점에서 <더 웨일>은 파멸이 구원을 이끄는 모순적인 서사 구조를 띤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구원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시도들은 거의 대부분(어쩌면 전부) 실패한다. 엘리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토마스는 이것을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로 여기고 찰리를 구원하려 든다. 하지만 찰리가 토마스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찰리가 구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리즈가 찰리의 유일한 친구인 이유는 찰리를 구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말실수를 하게 된 토마스는 자신의 시혜적인 태도에 있는 문제점을 끝까지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찰리는 무엇보다도 솔직함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토마스와 엘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토마스는 찰리가 밀어붙일 때까지 찰리의 외양이 역겹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는 처음부터 찰리에게 역겹다는 말을 쏟아내며 발화하는 것과 동시에 sns를 통해 찰리에게 상처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가 찰리를 상처줄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대단히 솔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제발 솔직한 글을 써달라 호소하는 찰리에게 솔직함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기에, 이를 갖추고 있는 엘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찰리에게 상처줄 수 없다.
구원을 원하지 않았던, 구원받기보다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지옥에 처박히길 원했던 찰리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와중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저 사랑하는 딸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것뿐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 찰리도 엘리도 스스로가 아닌 서로를 구원하려 했고, 이는 단순히 부녀지간을 뛰어넘는 인간 간의 신뢰와 애정에 기반한다. <더 웨일>이 단순하면서 복잡한 이유는 이렇듯 파멸과 구원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이 찰리의 한 걸음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한 걸음이 단순히 찰리의 무게뿐 아니라 인생을 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엘리는 찰리가 다가오길 바라면서도 결코 먼저 다가가지 않을 것이기에, 찰리를 구원하는 건 결국 찰리 자신이며 이것이야말로 관객을 전율시키는 메세지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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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이 깨어난다!
마도문의 제자 ‘아청’은 사부의 명으로 당문의 장문에게 서신을 전달하려 길을 떠난다.
허나 당문을 비롯한 강호의 각 무림 장문들이 원인 모를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고
그 원인이 불양수의 음모임을 알게 된 ‘아청’은 창술의 ‘복풍’, 상인 ‘강약신’등 동료들과 함께
강호의 평화를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