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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2025-03-03 18:46:10

사실은 죽도록 살고 싶었어요

영화 <미키17> 리뷰



한국 관객으로서 숱하게 봐온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장면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영화. <설국열차>로 이미 놀라움을 안긴 바 있지만 더 커다란 스케일, 행성 단위의 SF로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에서는 순간 번뜩이는 장면 가운데서 봉준호 감독이 쌓아온 노하우의 정수가 돋보인다. 할리우드식 SF의 흥행 구도를 반영하는 플롯과 봉준호 감독의 개성이 섞여 새로운 익숙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망해버린 마카롱 가게, 이후 사채업자에게 당할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지구를 떠나 개척지 니플하임행성으로 향한 미키. 그러나 번듯한 기술도 자격도 없는 그가 지원한 익스펜더블은 그가 두려워 도망친 죽음을 숱하게 반복하는 직업이었다.

뭐 어때, 다시 복제될 거잖아? 말 그대로 실험용 쥐가 되어 구르고 또 구르는 미키. 방사능, 유독 가스, 바이러스 실험에 이르기까지 복제인간이라는 명목 하나로 그는 죽고 또 죽는다. 니플하임 행성에서 단 한 명 있는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그 행성 가운데 유일하지만 누구보다 유일하지 않은 존재다.

 

삶이 고귀하고 살인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 꺼지면 되살릴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삶의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살인 행위는 그 자체로 끔찍한 죄악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난 삶의 연속성을 가지는 자가 바로 익스펜더블이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기억은 이어져 새로운 몸으로 프린트된다. 마치 인형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프린트되는 미키. 그는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이자 대체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멀티플 사건은 반복되는 죽음에 나름 적응하며 체념하던 미키에게 다시금 살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워준다. 죽은 목숨인 줄 알았으나 원주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을 받아 생존한 미키. 그 사실을 모른 채 본부에서 18번째 미키가 복제되며 미키가 두 명이 되는 멀티플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또 다른 내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서 미키는 연속하는 나가 아닌 분리된 나’로서 변화된 속성을 띠게 된다. 즉 미키17 그 다음 미키18이 아닌, 미키17과 미키18이 된 것. 이들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 그러자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대체품의 죽음이 아닌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의 죽음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다면 실험 약의 부작용 다음에는 그냥 죽여 달라고 했을 미키이지만, 숨을 헐떡이며 죽기 싫다고 외친다. 고유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자 마샬은 누구보다도 그 대체품을 유용하게 소모하는 순혈주의자다. 그가 개척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이상향은 과학 기술을 활용해 태어난 불량 식품 같은 인간이 아닌 순수한 번식을 통해 태어나는 인간이다. 저녁 식사에서 여성 캐릭터 카이를 향해 건강한 가임기 여성이라며 예찬하는 마샬 부부. 카이는 묻는다, 자신이 자궁으로 보이냐고.

 

결국 지도자 마샬 부부의 눈에 그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음미한 후 먹어 치운 뒤 또다시 구매하면 그만일 뿐인 소스인 것이다. 익스펜더블의 목숨은 비싼 카페트보다 하찮고, 새로운 행성에서 인류의 정착을 위해 가임기 여성은 번식을 위해 힘써야 할 자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온갖 과학의 수혜는 누리면서도 그 과학으로 탄생한 복제인간은 혐오하고 순혈 인간을 유용한 장기로만 칭송하는 그들 지도자들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명백한 적대 세력이자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반면 니플하임 행성에 거주하는 생명체 크리퍼는 작은 구성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인간 공동체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집단이다. 극중 쉽게 쓰다 버려지는 미키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작은 베이비 크리퍼 하나를 위해 온 구성원 전체가 그를 구하기 위해 응답한다. 인간의 이기로 인해 인질로 잡힌 베이비 크리퍼, 그리고 그 울음 소리에 하나로 모여 응집하는 크리퍼 무리는 자연스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오무의 행진을 연상케 하며 외형 또한 흡사하다.

 

어떤 존재든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짧은 생각으로 폭정을 일삼다 가장 하찮게 여기던 존재인 익스펜더블에게 죽임을 당하는 마샬, 그리고 작은 생명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구해낸 원주 생명체 크리퍼. 그들 집단의 대립과 결말은 명확하고 알기 쉽게 두 갈림길로 나뉜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던 기존 필모그래피의 결말을 기대했다면 다소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은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미키가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 영화에서 불가피하게 고려해야 했을 신중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키의 악몽 속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이 영화의 결말은 비로소 완성된다. 악몽 속 미키18의 희생이 무색하게 새롭게 프린트되고 있는 마샬. 영화는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과 함께 엄중한 경고를 들이민다. 과학 기술과 마비된 윤리의식 아래 마샬과 같은 지도자는 프린트로 찍어내듯 지금도, 그다음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해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공교롭게 영화를 관람하면서도 현실의 많은 사회적 이슈가 오버랩되는 만큼, <미키17>SF적 상상력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휴머니즘이자 사회를 향한 경고다.

 

작성자 . 헤엄

출처 . https://blog.naver.com/uy1278/22378245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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