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3-05 17:57:42
한국형 오컬트 그거 어떻게 싫어하는데
한국형 오컬트 붐은 왔다!

한국형 오컬트 붐은 이미 왔다!
새로운 한국형 오컬트 작품을 기다리며 정주행 가봅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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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나를 모른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데 속은 완벽하게 곪아 있다. 27살, 젊고 탄탄한 몸과 피부, 좋은 학벌. 남부럽지 않은 월가에서 일하고 집도 삐까뻔쩍하다. 얼마나 자기 관리가 철저한지 매일 아침에 피부에 팩을 하고 열심히 운동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모른다. 인간이지만 혐오와 분노 빼고는 별다른 감정이 없다. 서로의 명함, 입은 옷, 들리는 식당이 자신의 모든 것인양 뽐내고 비교한다. 내 명함보다 잘 빠진 명함을 보거나 내가 예약 못하는 인기많은 식당을 누가 예약했다고 하면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점점 멈출 수가 없어서 티가 날 정도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나는 썩어빠졌다고. 나는 사람을 죽였다고. 게다가 즐긴다고.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는다. 놀랍지도 않은 듯한 눈동자로 그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고.
이 영화를 단순한 싸이코패스영화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주변 사람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케이스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패트릭 베이트먼. 사이코패스 영화를 보면 볼 수록 주인공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다. 어느 정도냐면 어지간한 살인이나 괴팍한 장면들에 무덤덤하고, 살인 전에 신이 난 그의 미소와 율동이 귀엽게 느껴지고 있다. 아마 그와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혹시 그에 비해 나는 용기가 없거나, 죄책감이 심한 것 정도는 아닐까.
영화를 관통하는 한마디는 초반과 후반에 나온다. 중요한 건 마지막 한마디다. 마스크팩을 벗으며 그는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Inside doesn't matter. 안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모두들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름도, 대화도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가지는 건 역시나 그의 겉모습이다. 탄탄한 몸매, 잘 태닝한 피부, 명품 스타일의 옷과 소품들. 아무도 그에게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보고 싶었다든지 묻지 않는다. 시체가 든 가방을 보며 '워후, 멋진 걸'.하는 말에 '응 장 폴 고티에꺼야.' 라는 심드렁한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없다. 하긴 뭐 태반이 약에 쩔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다.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아메리칸 사이코에 워너비 도르시아(Dorsia)가 있다면, 현실에선 요즘 뜨는 인스타 맛집이 있을까. 우리도 봐왔지 않는가. 음식을 제대로 먹고 즐기기보다 사진찍고 그곳에 갔다왔다고 자랑하는 것이 지나쳐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누가 입은 옷, 쓴 화장품들을 찾으며 더 예쁘고 멋있어지는데 고민을 하며 시간을 잔뜩 보내기도 한다. 자기 삶이 어떻게 보이는지 푹 빠져 건사하기 바쁘다보니 다른 사람의 말은 영화처럼 한 귀로 흘려듣게 되기도 한다. 듣고 있으면서 듣고 있지 않을 때도 많다.
패트릭의 내면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다. 그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월급루팡처럼 십자말풀이에는 뼈와 살, 가슴, 피 같은 그의 머릿속 초유의 관심사를 적고 음악을 듣고 있다. 그러나 대체 그런 건 누가 신경쓰겠는가. 그의 부사장 지위가 중요할 뿐이다. 그나마 조금 가까운 약혼녀는 묻는다. 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 일 하는거야? 그의 답은 우리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 맞지 않아도 맞춰서 살아보려고 한다는 거다. 그의 모든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것이다. 하버드 경영학과도, 어쩌면 클럽에서 하는 코카인, 머리스타일도 그냥 남들이 다 하는거라 그들과 맞추려고 시작한 것 아닐까. 그에게 자유나 개성이란 건 없다. 우리는 주인공인 패트릭을 보지만 사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는 어느 월가의 젊은 금수저 한량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고,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 얘기했다. 우습게도 그가 가장 행복해보이는 순간은 이 모든 일련의 살인(혹은 그의 망상)을 고백했을 때이다. 왜 그렇게 기뻤을까. 늘 패트릭을 얼간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난 일을 저질렀고, 드디어 한 순간이나마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인정과 관심이다. 자신이 아파하면 남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고, 비정상적인 일을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었던 것이다.
살인은 그가 생각하는 개성이자 새로운 힘의 표출방법이다. 패트릭은 똑똑하게 이 세계를 알고 있다. 화가 나면 뒷골목의 약자들을 찾아간다. 남들 앞에선 오, 우리는 노숙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입바른 소리를 내뱉는 그는 가짜다. 더럽고 냄새나고 무능력한 노숙자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인다. 특이하게 자신의 동료를 한 명 죽인다. 그의 행동 중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만큼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만 했다. 그의 자존심을 온갖 방법으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도 꾸준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멋진 명함을 갖고 있고 식당 예약은 더 잘 하고, 게다가 그의 진짜 이름을 들먹이며 멍청하고 한심한 녀석이라고 욕한다. 더 이상 그를 더 모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그는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과격하다. 뒷골목의 여자들을 학대한다. 자신이 이렇게 능력있고 탄탄한 체력을 갖고 있다는 자기애에 도취되어 거울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카메라까지 동원하는 남자라니. 특히 금발의 여자에게 엄청난 스크래치라도 입은 것인지 취향이 확고하다. 그가 만나는 여자는 모두 금발이다. 약혼녀, 내연녀 관계의 코트니, 비서 진, 에스코트 걸들까지.
이상한 점은 남자들처럼 그냥 죽이지 않고 여성의 경우 성적으로 유린하고 죽인다는 점이다. 힘과 권력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모든 여성은 그에겐 힘이나 지위든 어느 면에서나 밀리기 마련이다. 이건 그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의 동료들과의 대화에선 세상에 성격좋은 여자는 없다는 결론이 난다. 자신들의 온갖 성적 취향을 맞춰주고 멍청하지 않은 그런 여자는 이데아라나. 게다가 똑똑하고 성격좋은 여자는 없단다. 오 있댔지, 못생긴 여자. 그나마 약혼녀와 내연녀는 죽이려는 충동도 없고, 건드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건 그가 새삼스레 일말의 보루가 있는게 아니다. 그쪽은 건들면 골치 아픈 걸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과도 연루되어 있고, 숨기기도 쉽지 않다. 그들의 친구가 그의 친구들이니까. 비서나 에스코트걸들이야 돈이나 많이 찔러주거나 소리 소문 없이 없애버리기 어렵지 않으니까.
그의 살인에는 이상하게도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살인이라는 체력적 소모가 심한 노동에 필요한 노동요라도 되듯, 마치 이 상황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미끼처럼 혹은 음악 마니아처럼 그는 온갖 명곡들을 자체 bgm으로 틀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 곡을, 그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는 좋은 머리로 그럴싸한 평론을 외워서 읊조리고 있다. 외우느라 힘들었겠네, 정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는 생기있는 눈빛이나 감탄사보다는 기술적이고 덤덤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실제로 살인을 하기 위한 신나는 몸동작과는 대조적이다. 사실상 그의 개성을 표출한다는 살인마저도 다른 이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신경쓰는 식당의 요리라도 되는 양 살인 앞에서 고상한 말들을 늘어놓는 꼬락서니라니.
그가 실제로 사람들을 죽였는가, 죽이지 않았는가는 영화를 볼 수록 아리송하다. 그는 정신과 약을 먹고 있고 그가 죽였다고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자판기에는 고양이를 넣어주세요 같은 말도 안 되는 광경도 펼쳐진다. 그가 시체를 숨기는 은신처로 썼던 폴 알렌의 집은 다시 찾아가보니 구조도 다를 뿐더러 시체도 없다. 영화 <블랙 스완>에 나오듯 그의 내면이 불어일으킨 환상일 수도 있다. 착하고 억눌린 백조에서 경쟁자를 찔러 죽이고 흑조로 재탄생하던 니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가 찌른 것은 자신이었고 누가 찔렸든간에 그녀는 자신은 완벽했다며 기뻐했다. 패트릭은 그의 넘치는 자신의 몸 사랑을 생각하면 자해를 했을 가능성도 적다. 또한 자신이 죽인(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게 그의 환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영화의 입장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오히려 무서웠던 건 마지막 독백 때문이었다. 불러도 답이 오지 않는 이 상황에 모든 걸 초월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 뭔가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를 그 눈빛.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고, 폭로하고 싶어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고작 그의 비서 진이 그가 끄적인 낙서로 알았을 뿐이다. 그는 길티 플레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관리의 1인자처럼 착실해보였던 그가 사실 엄청 비틀렸고 못된 짓을 했다는 걸,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맞춰살지 않고 내 멋대로 산다는 걸, 들킬까봐 두려우면서도 어서 알아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그에게 불안한 매력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그가 알고 있듯, 그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설사 그것이 들킨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어차피 세상에서 죽어있는 존재이다. 그것이 영원히 그가 벗어나지 못하는 덫이다. 그렇게 살아있다고 소리쳐봐도 모든 것은 다른 삶의 소음에 묻힌다.
상상해보자. '패트릭 베이트먼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다같이 멈칫했다가 심드렁하고 예측가능하게 말을 돌리지 않을까. '아, 그 얼간이 녀석이요. 멍청한 짓은 다하고 다녔는데.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혔다가 인생 종친 하버드 녀석이죠', 하거나 '흠, 저녁은 어디서 먹지. 딱히 땡기는 곳은 없는데, 도르시아?'라고 하거나, '자자, 새로 산 명함이야. 어때? '아니, 내 꺼 좀 봐.' 하며 어깨에 힘주고 자랑하고 있겠지. 역설적으로 그가 홀대했던 내연녀 코트니나 비서 진 정도만 말문을 잃은 채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들이 그를 걱정해주면 믿지 않았다.
그렇다. 영화 < 아메리칸 사이코 >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선혈이 낭자한 살인이 아니다. 수많은 말이 오가도 진실과 내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익숙한 외로움. 남다를 것 없는 일상의 변하지 않을 단절감. 딱히 아메리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보편적인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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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틴 코미디로 그냥 넘어가기엔 좀 그렇지
난 인기가 있는 사람일까? 내 뒤에 있는 아빠는 인기가 많다. 사진작가로서 잘 나간다. '매사에 겸손해라'라고 하긴 했지만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방송 출연도 하고 책도 나오지. 사실 아빠가 부럽다. 나도 내가 미래에 직장을 갖고 싶은 분야에서 전문가 대접받고 싶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이런저런 경험치도 많이 쌓았다. 뭐 26살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경험과 공부들이 미래의 성공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그냥 별 볼일 없는 20대 중반의 평범한 사람이다. 공부할 것 많은데 오늘 4시에 일어났으며 한 일이라곤 이 글을 쓰는 것 빼곤 없다.
가끔 저 인스타그램 안의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부럽다. 나도 이 노예생활 끝나고 좋은 직장 가져서 저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인기가 많으려면 뭐가 필요할까? 나도 저 사람들처럼 무언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내 이름 아래에 '인기 많다'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느닷없이 이불 킥을 유발하는 20대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으으. 과연 나는 관심받기 위해 어떤 미친 짓까지 했단 말인가. 홍상수의 영화 몇 편이 생각나며 이 모습이 과연 나와 다른 점이 있을까 싶어 픽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지만 나의 흑역사는 어마 장장하니 오답노트가 필요하다. 37살, 미국의 어느 곳에서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갱신 중인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이런 우리에게 자기의 흑역사를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생중계하고 싶다고 한다. 넷플릭스로 가보자.
20년이 사라졌다
호주에서 전학 온 10대 여학생 스테프. 스테프는 새로운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고 싶다. 뭔가 열심히 연구하는 스테프. 그녀는 인기가 많아지고 싶었다. 고등학교 4학년이 된 그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내 치어리더 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내 원했던 목표들이 점점 이뤄지는 걸 확인하는 스테프. 인싸가 되기 위해 보내왔던 것들이 효과가 있어 나름 뿌듯하다. 스테프의 행보에 화룡정점을 찍는 것은 역시 섹시한 남자 친구다. 블레인을 점찍어 놨었던 스테프. 역시 인생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게 맞다. 스테프는 블레인과의 연애에 성공한다. 그렇게 원하는 것들이 다 만족됐던 10대. 학교 치어리더 팀 단장이었던 스테프는 자신감 풀 충전의 상태로 치어리더 공연을 나선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났다. 받아주는 사람 없이 뒤쪽으로 떨어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20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스테프. 17살이었던 그녀가 37살의 몸을 갖게 되었다. 살도 찌고, 운동능력도 떨어졌다. 예뻤던 10대 시절은 이제 없다. 스테프에겐 꿈이 있었고 목표도 있었다. 졸업식의 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스테프. 상큼 발랄한 꿈과 희망이 사라졌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법도 했지만 그녀에게 포기할 수 없던 것이 있었다. 스테프는 친구 마샤가 다니던 학교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점을 이용해서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영화는 몸은 37살이지만 정신연령은 17살인 스테프의 학교 생활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아
영화는 편하다. 이 영화는 편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다. 어려운 메타포도 없고 긴박한 서스펜스도 없다. 톡톡 튀는 주인공의 매력과 코미디가 함께 있어 보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또 후반부를 넘어가면 묵직한 메시지까지 안고 있다. 주인공은 내적 성장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삶의 교훈까지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쉽게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던지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좀 뻔뻔한 느낌이었다. 이 뻔뻔함이 능글맞아서 장점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쉬운 영화의 특성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다.
2002년과 2022년 사이의 시간 차를 묘사한 거 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비판은 충분히 유효타로도 작용했다. 예를 들어 스테프의 입에서 '게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유머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어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어 '미안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장면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뭐 그리 불편한 게 많아?'라며 흔히 말하는 '불편러'를 비판하고 싶었던 의도는 좋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반대의 시각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학교 안의 어떤 단체에 대해 특정 셀럽이 혐오 집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은 영화에서 나름의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사람들의 움직임의 허상도 꼬집었으니 영화가 풍자하고 싶었던 것들은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모호하게 퉁 치는듯한 이야기
영화는 구멍이 많다. 37살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닌다? 아무리 교장이 친구라도 해도 설정에 대한 큰 구멍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친구가 교장이라고 37살이 고등학교 생활을 재개한다고 하면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영화의 만듦새를 지나치게 따지는 건 살짝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개연성, 핍진성, 현실성을 따진다고 했을 때 내가 최근에 재미있게 봤던 <닥트 스트레인지 2>나 <범죄도시 2>도 말이 안 될 것이다. 마 석도 같은 괴물 형사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마법사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 설정의 현실성 문제는 또 다른 부분의 단점을 낳는다. 20년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던 인물이 며칠 만에 치어리더 팀의 수장이 되어 춤을 춘다. 최소한의 재활훈련도 없이 이 사람은 모든 일들에 무리가 없다. 또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스테프의 혼수상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부분일 것이다. 이 범인의 존재가 굉장히 쉽게 드러난다. 그런데 쉽게 드러나기만 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줬던 문제 해결 방식은 솔직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 입장이라면 그렇게 안 했다. 또한 극에서 한 모녀관계가 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모녀다. 모녀로서의 유대감을 묘사도 없이 '그냥 그래야만 한다' 식으로 어물쩡 넘어간다.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들 성격 묘사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이 주위 사람들의 성격은 주인공의 개과천선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중요할 것이다. 친구들에 감정 이입해서 대신 말해주는 사이다가 터져야 극에 집중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이 착하다. 후반부의 강한 임팩트를 위해 인물이 희생된 것이다. 이런 단점들을 품고 있다 보니 극의 메시지에 강하게 집중이 안 된다. 끝에 하고 싶은 말을 빡 하기 위해서만 이뤄지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이야기했듯 단점이 많은 영화지만 장점도 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메시지는 나에게도 적용된다. 아직도 인간관계의 부담감을 느끼는 나. 나름 학습해야 했던 관계에 대해서 10대 때 놀았으니 이 대가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가끔 인스타그램의 누군가들이 부럽다. 내 짝은 누굴까?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못 받을까? 난 누군가에게 진심이지만 그 사람은 나에게 이 마음이 아닐 것 같다.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영화는 힘 있는 메시지를 보낸다. 극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긴 하나 어렵지는 않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감동이 분명히 있긴 할 것이다. 후반부 어떤 인물의 입에서도 나오듯 현실은 인스타그램 밖에 있다.
또 주인공을 맡은 레벨 윌슨의 열연이 돋보인다. 레벨 윌슨은 미국에서 유명한 개그우먼이자 여배우라고 한다. 코미디/로맨틱 코미디 장르 장인으로 유명한 그녀. 연기라는 주종목을 살린 탁월한 열연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또 인스타그램 인기의 허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적절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좀 많은 게 희생된 것 같긴 하지만 나 같은 유사 아웃사이더들에게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이외에 이런 코미디 요소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무난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안무 짠 배우들이 고생 많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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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스트레인지2> 대혼돈이 아니라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는 멀티버스를 암시하는 듯한 꿈의 내용을 걱정하면서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끝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은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곱씹던 중, 괴생명체가 급습하자 '웡(베네딕트 웡)'과 함께 전투를 벌인 그는 전투 도중 꿈에 등장했던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멀티버스가 실재하며 멀티버스를 넘나들 수 있는 아메리카의 능력을 뺏는 존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닥터 스트레인지는 과거의 전우이자 마법에 통달한 또 다른 히어로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완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완다로부터 아메리카를 지키기 위해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싸움에 나선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2016년에 나온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으로, 멀티버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개봉하는 첫 MCU 영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닥터 스트레인지 2>를 기대하는 시선과 분위기는 특히 '멀티버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개봉 전 수많은 팬들은 <노 웨이 홈>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도 특급 '카메오'를 선보일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멀티버스에 방점이 찍힌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스칼렛 위치의 추적을 피해 아메리칸 차베즈를 보호한다'는 핵심 플롯에 충실하다. 즉 이 작품 속 멀티버스는 그저 공간적 배경이고, 카메오는 말 그대로 카메오에 불과하며 단지 멀티버스를 오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 대신 <닥터 스트레인지 2>는 부제인 멀티버스에 붙은 대혼돈, 정확히 말하면 '광기(madness)'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광기를 마주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한 두 가지 광기
그렇다면 영화 속 그 광기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스칼렛 위치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었던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누렸던 완다 막시모프. 그녀는 자신의 환상이 파괴되고 연인이었던 비전에 이어 그 아이들마저 잃는다. 이후 어둠의 마법서인 다크 홀드에 의해 타락한 그녀는 쌍둥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는 광기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우주의 쌍둥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가정을 완성하는 꿈을 꾸고, 이를 위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능력을 지닌 아메리카 차베즈를 사로잡아 그녀의 힘을 빼앗으려 든다. 이는 세계와 우주의 수호자인 닥터 스트레인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자 위협이며, 따라서 스칼렛 위치는 누가 보더라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해야 할 위협적인 광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가 직면한 광기는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의 내부에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꿈이다. 흔히 꿈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깨어 있는 동안 자아나 의식이 미처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 경험이나 불안감,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무의식이 형상화한 것이 꿈이다. 영화는 이러한 꿈의 특성을 멀티버스와 결부시킨다. 영화에서의 꿈은 멀티버스 속 자신을 볼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은 결국 본인 내면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멀티버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여러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는 여행은 닥터 스트레인지 본인이 애써 누르고 억압하고 있던 무의식에 속한 본인 모습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멀티버스 여정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세계에서 그가 잊으려던 크리스틴과의 추억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광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결과물이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을 정당화하고,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며, 사랑하는 이를 차지하려고 세계를 파괴하는 스트레인지를 마주한다. 당장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참석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과 대사를 보면 다른 우주 속 본인이 될 가능성이 은연중에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 모험은 완다의 광기를 마주하는 여정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의 광기를 대면하고 그 광기가 자신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 여정이다. 그러다 보니 작중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완다가 더 능동적으로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녀의 광기는 이미 드러나 있는 상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것은 아직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모습만 다를 뿐 결국 공통적으로 광기를 품고 있는 두 주역의 초반부 대화에 유달리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 역시 사뭇 의미심장하다.
거울로서의 멀티버스
이에 더해 멀티버스는 두 광기가 해소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멀티버스는 단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나'를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는 행위는 거울에 반사된 '나'의 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거울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거울을 보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외관이나 정체성을 재고하고 반성할 기회를 잡는 일이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상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언제나 좌우가 바뀌어 있으며, 거울의 표면에 따라서 형태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또 다른 주체를 만난다. 이때 '나'에게 그 주체는 하나의 대상이고, 그 주체의 입장에서도 '나'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 속 자신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는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이 거울을 두고 평행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는 멀티버스가 바로 그 거울이다.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본인이 내재한 광기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그들이 먼저 간 길을 따르면서도 또 다르게 걷는다. 전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희생을 감수하거나 금지된 규칙을 깨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1편에서 그는 금지된 타임 스톤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는 더 큰 계획을 위해 타노스에게 타임 스톤을 내주며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했다.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의 스트레인지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택하거나 어둠의 마법에 기댔는데도 실패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목격한 스트레인지는 이전과 다르다. 독선적인 성격을 잠재우고 다른 이들을 믿으며, 좋은 결과는 물론 옳은 과정도 같이 추구한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독단이라는 광기가 낳았던 죄책감과 그로 인한 행복의 부재로부터 탈피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소서러 슈프림인 웡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유머스러운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러나지 않은 광기를 통제하며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같은 맥락에서 보면 멀티버스를 건너오는 완다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에도 다른 의미가 있다.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외에 꿈에서 멀티버스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멀티버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자 동시에 거울이다. 즉, 그녀의 여정은 단지 아메리카 차베즈를 쫓는 것이 아니라, 스칼렛 위치라는 정체성 밑에 가려진 나머지 더 이상 현실의 자기 모습이 아닌 완다의 의식을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리는 여정인 것이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완다가 처한 상황을 대조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카마르 타지에 진입하려던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에 의해 미러 디멘션에 갇힌다. 그는 완다를 수많은 거울로 가득한 방에 가두어 놓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스칼렛 위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려 하나 이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반면 후반부에 스칼렛 위치는 멀티버스의 완다를 마주 본다. 멀티버스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타락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깨닫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이는 완다가 사용하는 다크 홀드의 대척점에 있는 '비샨티의 책'이 맥거핀으로 활용되는 이유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 품고 있는 광기를 어떻게 직시하고, 수용하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빙의하는 흑마법 '드림 워킹'을 시전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를 게 없지만, 그보다는 마법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부제를 '광기의 멀티버스'가 아니라 '대혼돈의 멀티버스'로 번역한 선택은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한 의도와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부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날의 검인 광기의 멀티버스
이처럼 광기로 가득 찬 내면을 여행하는 통로이자,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인 멀티버스. 다만 멀티버스의 활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우선 완다의 광기를 강조시킨 결과 자칫 올드할 수 있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호러 영화적 요소가 MCU에 잘 녹아든 것은 장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일행을 쫓는 터널 장면이나 프로페서 X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점프 스케어를 동원해 완다의 집착이나 광기를 살려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스칼렛 위치의 압도적인 힘을 잘 묘사한 이 장면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멸되는 공포감인 코스믹 호러를 부각하는데, 이 대목이 MCU의 클리셰를 비틀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간 MCU의 빌런들은 제모 남작이나 미스테리오, 알렉산더 피어스와 같은 반전형 빌런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광기로 가득한 완다는 초반부터 빌런으로 등장해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해 버린다.
다만 멀티버스와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가 평면적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는 못한다. 작중 멀티버스가 본질적으로 수단과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만 해도 그녀의 과거사가 잠시 모습을 비추지만, 그녀의 역할은 두 주연의 내면을 살피는 멀티버스를 여는 데 한정된다. 그래서 그녀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묘사되며, 본격적인 서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들 역시 같은 이유로 등장할 때의 임팩트에 비해 초라하게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노 웨이 홈>과 달리 본 작에서는 카메오가 단순한 일회성 팬 서비스로 낭비되는 듯한 인상이 강한 것이다. 또 멀티버스 속 인물들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그간 영웅의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중시했던 MCU의 접근법과는 괴리가 있다. 달리 말해 '광기의 멀티버스'만으로 호러 영화와 MCU의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호러물 클리셰대로 안일하게 방심한 인물들이 단숨에 죽는 전개가 남발되거나,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가 적지 않은 것은 미흡한 봉합의 또 다른 증거나 다름없다.
한편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단독 영화로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상징하는 액션이라면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화려하고 기하하적인 공간 왜곡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연출이 완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마블은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의 성장을 위해 제각기 묠니르, 슈트, 방패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다만 이후 더 강력한 능력이나 무기를 획득해 히어로 영화다운 액션을 보여준 것과 세 히어로와 달리,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는 그러한 외적인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이는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연출이 주제와 메시지를 잘 살려낸 것과 무관하게 히어로 영화로서 실망스러운 측면이다.
또한 디즈니+의 독점 드라마인 <완다비전>과의 연계가 매우 강해 진입 장벽이 높아진 점도 지적될 만하다.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을 고려하면, 완다의 성장과 변화를 깊게 다룬 <완다비전>의 내용을 모를 경우 2시간의 러닝타임은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마블 영화가 마주할 문제이기에, MCU로서는 적잖은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결국 광기에 물든 두 히어로의 이야기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기대한 바에 따라 장단점과 만족도가 극단으로 갈릴, MCU 페이즈 4의 또 다른 문제작으로 막을 내린다.
A(Acceptable, 무난함)
멀티버스 파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한 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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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리들리 스콧, 세련되었지만 아쉽다
'라쇼몽 효과', <라스트 듀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인 <라쇼몽>은 새로운 영화 기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른바 라쇼몽 효과라고 불리는 기법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는 군상극을 기본 골자로 하여 사용됩니다. 통일되지 않은 여러 관점으로 사건을 각각 바라보고 있기에 각 관점별로 그 사건을 설명하고 묘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곡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여러 화자가 각자의 왜곡된 시선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점차 그 사건의 진상과 사실에 다가갑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기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밝혀지는 진상과 예상치 못했던 요소 또는 반전의 등장 등 분명히 동일한 이야기임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 기법의 의미를 알고 있거나, 혹은 <라쇼몽>을 감상한 상태이면 <라스트 듀얼> 또한 라쇼몽 효과를 사용한 군상극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의 그것은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카루주, 르 그리, 그리고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이란 제목으로 크게 세 장으로 나뉜 <라스트 듀얼> 역시 결투 재판을 진행하게 된, 세 등장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때 카루주와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라쇼몽 효과에 따른 각자의 관점의 차이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하연에 참석한 두 친구가 화해를 하는 시퀀스에서 카루주가 술자일 때에는 본인이 먼저 손을 내밀면서 화해의 말을 건네고 르 그리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반대로 르 그리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네고 카루주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 외에도 르 그리와 마르그리트 간의 입맞춤을 두고, 1장에서는 화해의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행위로 묘사하는 데 그칩니다. 하지만 2장에서는 르 그리의 마르그리트에 대한 연모를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등 연출에서도 둘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장 간에 존재하는 차이들로 인해 관객들은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직접 추리를 벌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스펜스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됩니다.
군상극과 라쇼몽 효과, 그리고 <라스트 듀얼>
1장과 2장까지는 정석과 같이 흘러가고 있다.
마르그리트의 '진실', 장르적 재미는 반감되지만 괜히 거장이 아닌
하지만, 3장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에 이르고 나면 이전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앞선 두 장과 달리 3장이 시작할 때 '진실'이란 단어만이 화면에 오래 남아있음으로써 3장의 이야기가 진실, 혹은 진실을 넘어선 사실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쇼몽 효과를 활용할 때 어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사실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실을 확정 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각 화자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의 곳곳에 메타포로 숨겨놓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러한 단서들을 찾아내고 추리함으로써 군상극이란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재미를 적극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은 3장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밝혀버림으로써, 두 장에 걸친 추리와 추측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장르적 재미를 감소시키고 클라이맥스는 허무해집니다.
다만 3장의 방향을 이렇게 설정한 데에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에는 아직 약자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방의 일환으로 소위 '미투'로 일컬어지는 운동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이 명백히 존재하고 가장 극심하던 시기인 야만적인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투쟁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의 등장인물을 자신의 영화에 자주 등장시킨 리들리 스콧의 특성상 이러한 급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하는 듯한 전개는 노골적으로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놀랍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렇게 노골적이고 명백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전파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라쇼몽>과 같이 진실이란 존재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주장하는 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본인이 쟁취해 낸 게 아닌 결투 재판을 통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르그리트가 주장하고 있는 진실 또한 본인의 관점이 적용되었기에 남성들에 비해서는 사실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왜곡이 존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진실이란 무엇인지·진실이 어떻게 성립되는지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는 점을 통해, 괜히 리들리 스콧에게 거장이란 명칭이 붙여진 게 아니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물론, 3장의 시작에서 '진실'이란 단어를 오래 노출시키는 노골적인 연출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주입시키는 행위는 더 훌륭하고 완벽해질 수 있었던 <라스트 듀얼>의 만듦새를 제 손으로 깎아먹은 행태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란 주제로 급 드리프트 시킨 3장, 그럼에도 진실이란 존재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감독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꼭 페미니즘을 썼어야 했나?
비주얼리스트, 그리고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배우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장기를 논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극의 상황별로 적절하고 어울리는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다시 말해 리들리 스콧은 비주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의 일환으로, 리들리 스콧의 사극 영화 중에서 극한에 가깝게 고증을 따라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라스트 듀얼> 또한 철저한 고증으로 이뤄진 영화입니다. 판타지 풍이 아닌 실제 중세 시대의 복식을 비롯해, 화살은 갑옷을 종잇장처럼 관통하지 않으며 튕겨나갈 때에는 언제든지 튕겨나갑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체인 메일을 손에 휘감아 적의 얼굴을 향해 수없이 내려치는 장면이라든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두 기사의 결투 또한 아름답게 그려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만큼 처절하고 묵직하고 차갑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때 <라스트 듀얼>은 진실에 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철저한 고증을 통해 감독이 진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라스트 듀얼>이 지닌 강점 중의 하나로, 배우들의 섬세하고 뛰어난 연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보여주지만 그 사건의 화자가 모두 다르기에 모든 상황이 동일하게 비칠 수는 없으며, 동일하게 비친다면 결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라스트 듀얼>의 배우들 모두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르 그리가 마르그리트를 무작정 찾아와 강간하는 씬에서, 2장과 3장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묘하게 유사하면서도 명백히 다르게 그려냈습니다. 2장에서 르 그리의 고백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마르그리트는 형식적으로 저항하며 그녀도 즐기는 듯이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3장에서 진행되는 대사는 2장과 다를 바가 없지만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르 그리의 고백에서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이 뜬금없고 어색함 가득한 고백이었으며, 마르그리트는 진심으로 저항하며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띄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씬 외에도 1장과 2장이 시작하는, 강을 건너 적을 향해 달려가는 시퀀스가 있습니다. 둘은 동일한 상황을 비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의 표정은 1장과 2장에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묘사해 낸, 배우들의 명연기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습니다. 번외로, 조디 코머는 <프리 가이>와 동일한 배우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정말 아름답게 등장했습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단연코 <라스트 듀얼>의 백미. 그리고 비주얼리스트 리들리 스콧의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철저한 고증은 영화의 주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지?
1장과 2장을 거치면서, 영화가 빌드 업해 나가는 양상은 정말 좋았고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하지만 3장의 도입부가 쌓아올린 빌드 업을 스스로 무너뜨린 느낌입니다. 분명히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김이 팍 새 버렸고, 흥미 또한 떨어졌습니다. <라스트 듀얼>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아쉬운 영화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치명적인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좋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 영화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
본인 결정은 본인이 해야죠.
결과도 본인이 책임지는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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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콥스키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
6★/10★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여자가 음악원에 가는 것보다는 시집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이 말의 대상인 미래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면, 그의 말은 틀렸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결혼할 여자에게 자신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으며, 결혼하더라도 형제 관계처럼 지내야 할 거라고 거듭 확인시키는 남자다. 결혼식 당일 성당 앞, 남루한 차림의 어느 ‘미친 여자’가 설레는 마음의 신부에게 절대 그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남자다.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신부에게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남자다. 남성에게만 다정하고 그들과만 시간을 보내는 남자다.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한 돈의 융통이 어려워지자 그 돈만 믿고 있었다며 윽박지르는 남자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남자다. 독수공방에 지친 아내가 침대로 다가오자 경멸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목을 졸라버리는 남자다. 마침내는 너의 집착 때문에 더는 창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재능 보존’을 위해 아내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남자다. 친구들을 앞세워 아내의 존재가 ‘신경 쇠약’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며 ‘태양’인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지 말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그의 아내,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남편의 재능을 추앙한다. 아니, 숭배한다. 적극적인 구애 편지로 처음 미래의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남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자신의 지참금 규모를 어필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적극적‧자발적으로 자신을 남자에게 상납한다. 그녀의 ‘과잉’은 구애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 때문에 자기 재능이 좀먹고 있다고 모욕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는데도 단호하게 이혼 서류 서명을 거부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숙한 아내’였던 것도 아니다. 내내 남편에게 외면받고 별거하는 동안 육체적 관계만 나누던 남자를 따로 두었고,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아이는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진 후 유년기에 사망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 아내라는 지위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종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신은 나와 못 헤어져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이 증오, 경멸, 멸시 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로 되돌아오더라도 남편에게 두려움, 소름 끼침 등을 줄 수 있다면 어쨌든 남편과 함께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녀는 남자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이 되기로 결심했고 죽을 때까지 그 결심을 삶으로 살아냈다.남자의 이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여자의 이름은 안토니나 밀류코바.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고 후자는 종종 동성애자인 남편에게 과하게 집착한, 천재 남성 곁에 으레 존재하기 마련인 ‘악처’ 정도로 종종 회자된다. 안토니나가 ‘천재 남편’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뒷받침하고 그의 ‘사생활’ 스캔들까지 두루 관리해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감정도 사랑보다는 집착에 훨씬 가까웠다. 여러 모로 안토니나는 동시대 관객에게 ‘교훈’을 줄 위치에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실제로 영화는 왜 지금 다시 안토니나와 그녀가 차이콥스키와 맺은 관계를 다시 조명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기괴한 관계에서 우리는 이중 위계를 거스르는 한 여인의 편집증적 의지를 엿볼 수 있고,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안토니나는 음악가를 꿈꿨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 유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시대적 한계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콥스키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남성이었기에 재능을 펼치는 데 제약도 없었다. 그저 동성애 ‘추문’을 방지해줄 아내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가 실패한 건 바로 이 역할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남편에게 바친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태양’인 차이콥스키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집착적 애착은 예술‧젠더의 위계를 거슬러 남편에게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안토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신혼 초의 안토니나가 빨간 산호 목걸이를 차고 차이콥스키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차이콥스키는 산호가 진짜냐고 묻는다. 안토니나는 부끄러운 듯 혹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일부 진짜 산호가 섞여 있다고 답한다. 차이콥스키는 ‘내 아내가 가짜 산호 목걸이를 차다니!’라고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웃어넘긴다. (차이콥스키에게는 그저 ‘가짜’이기만 했지만) 진짜와 가짜가 섞인 안토니나의 산호 목걸이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혼재임을 가늠케 한다. 그녀는 정말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대리 충족하는 수단으로 그의 아내 지위를 욕망한 걸까? 숱하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끝까지 지킨 데서 정말 행복을 느꼈을까? 상대를 절망시키고 넌덜머리 나게 하는 집착을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할 이 물음은 우리가 연인에게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뒤흔든다. 당신은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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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일일시호일
나의 취미는 영화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차를 마시는 취미도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다도를 하진 않는다. 물론 다도를 하시는 선생님께 배워보기도 하였지만 다도는 격식이 굉장히 강조되는 행위라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도 행위에서 내가 할만하다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는 편이다. 그래서 제대로 다도를 배우거나 다도 자체에 큰 열정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차를 취미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차 자체가 가진 맛을 좋아해 차를 최소 하루에 한 잔은 먹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커피 한 잔, 차 한 잔은 꼭 마신다. 그래서 올해에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차를 테마로 한 중국 여행'을 드디어 실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이 돌아서 자스민부터, 백차, 운남 홍차 등 여러 홍차를 대량구매하고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예술이라고도 평가되는 다도에 관심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차와 함께 하는 차생활자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차에 꽂힌 것은 어머니의 취미 생활이 다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집에 차가 넘쳐났고, 자연스럽게 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일일시호일'이 개봉한 이후, 어머니가 참여하고 계시는 차 모임에서 이 영화가 꽤나 핫한 대화주제였던 듯했다. 그래서 한 번 보라는 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봐보았다. 일본의 명배우 키키 키린 배우가 출연했던 점도 영화를 보게 된 어필 포인트였다. 그래서 보았고,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그런데 그 지루함이 나쁘지 않았다. 차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내 길을 간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취미인 만큼 무조건 빠르게 세상에 발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지점이 오로지 차를 주제로 했다는 것이 느껴졌고, 차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주제로 한 영화는 세상사의 기준에서 지루함이 디폴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노리코는 처음 다도를 시작했던 미치코와는 다른 곡선의 인생을 산다. 속도로 치면 미치코는 빨리 가는 편이고, 노리코는 느긋한 편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인생 경험을 일찍 하는 미치코를 보며 노리코는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관성적으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사람마다 가는 속도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나이대에 꼭 해야만 경험치는 따로 있지 않다. 내가 20대에 하는 경험을 누군가는 30대에도 할 수 있고, 70대가 되서야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블로그에 나돌아다니는 글들 중에서 '20대에 꼭 해야 할 인생 경험 리스트' 같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하는 듯한 글들은 잘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처한 위치와 감정이 다른데, 인생 경험을 나이에 국한하는 것은 좀 젠체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20대에 이런 경험 하지 않으면 너 후회할 걸'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 아닌 가 싶은 것이, 20대에 그걸 하지 않아 후회하더라도 후회한 이후에 해도 크게 늦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한해서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치코는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고, 노리코는 자신의 성향과 성향에 맞는 선택을 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리코의 삶을 더 추구하긴 한다. 느리더라도, 나의 길을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노리코가 차를 마시며 비를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름에는 녹차를 먹고, 겨울에는 홍차, 보이차 같은 발효차를 많이 마신다. '오늘 날씨에는 이런 차를 먹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도 영화가 말하고자 한 '일일시호일'을 충족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차를 마시면서 나의 과거를 관조하되, 심하게 몰두하지 않지는 않고,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삶, 그것이 일일시호일이 아닐까. 내 자신을 내가 평가해본다면, 나는 트렌드에 별 관심이 없고, 내가 관심이 없는 부분에서는 무식할 정도로 잘 모른다. 그래서 주위에 친구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것에 우울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혼자 잘 노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취미가 차 마시기라는 것만으로도 꽤나 당연한 수순인가 싶다가도 차를 마시는 것을 습관화한 덕분에 '나다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휩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차 마심으로써 이런 나의 모습이 고착된 것 같다. 이것이 아집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수 밖에 없겠지, 그것이 나의 과제일 듯 하다. 마치 노리코가 차를 꾸준히 하다보니, 차를 가르쳐볼 기회를 얻어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듯, 나도 차를 계속 하다보면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노리코를 보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뜨끔했던 지점이 있다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정제된 몸짓 속에서 정갈한 마음으로 차를 하시는 분들이 나오시는데, 나는 다도라는 장르에서 그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보고 격식도 없이 차를 마시는 무식한 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격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격식을 제대로, 반복학습 해가면서 배우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급하게, 속성을 배운 자의 무지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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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3] (브런치작가/영화리뷰/결말X) 아이를 잃은 부부가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
1월초 그녀의 조각들 이라는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 되었습니다.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그 상실감을 어떤 태도로 극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에요.
바네사 커비가 출산 과정의 비극을 겪은 마사로 나오는데, 연기가 굉장히 좋습니다.
이 영화는 바네사 커비의 영화입니다.
지난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죠. 그저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로만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텐데
그런 선입견을 보기 좋게 날려보리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 초반 30분정도 출산 과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그 출산 과정에 대해 관객들에게 직접 보고 판단해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죠.
영화는 그 초반이후 주인공들이 상실감을 대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며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마지막 마사의 법정 발언 장면은 그렇게 전달된 내용이 감정적으로 발산되는 장면입니다.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Rabbitgumi 채널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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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스트 도터> 어워즈 예고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올리비아 콜맨 주연 [로스트 도터] 어워즈 예고편 최초 공개! 전 세계 37관왕 베니스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 아카데미시상식 각색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 "이 영화는 대단한 업적이다" 극찬에 극찬을 이어가는 걸작 [로스트 도터] 7월 14일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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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위쳐 : 블러드 오리진> 쿠키 티저 예고편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는 법. 새로운 프리퀄 시리즈 《위쳐: 블러드 오리진》으로 대륙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만나보자. 《위쳐》의 작중 시대보다 1200년 앞선 엘프 세계가 배경인 작품으로, 잊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초의 프로토타입 위쳐의 탄생, 그리고 괴물, 인간, 엘프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핵심 시점인 '천구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다루는 《위쳐: 블러드 오리진》은 2022년에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