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3-06 12:38:38
변화의 바람에 몸을 맡기다.
영화 [콘클라베] 리뷰
이 글은 영화 [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 단절, 내부의 적.
사진 출처:다음 영화
차세대 교황 프로듀스 101을 진행하는 동안, 단장인 로렌스(랄프 파인스)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성당에 갇혀 있게 된다. 공명정대한 결과를 위해 엄격한 과정을 견뎌내는 추기경들의 여정이 사뭇 답답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하며 사명감마저 느껴진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견고해야 할 설정인 이 "단절"은 (물론 제목 자체에서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굳게 닫힌 문으로 대변되고, 물 샐 틈 하나 없이 모조리 굳게 닫혀 있다 못해 봉인까지 되어 있는 문들을 보고 있자면, 알게 모르게 인물들이 겪고 있을 긴장감이 얼마나 클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은 외부와의 단절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내가 고립되거나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회의들은 거의 모두 밀실(?)에서 이뤄지는 반면 로렌스가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복도에서 이뤄지는 것 또한 그러하고. 비밀을 가진 후보들과의 진실게임(?)이나 서거한 교황의 숨겨둔 진실을 파헤치는 일도 모두 방으로 침입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영향을 받을 만한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 등 뒤로 세상을 가린 채 문을 쾅하고 닫았건만. 진정 자신들이 조심했어야 할 것들은 그 안에 함께 있는 추기경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목을 옥죄며 천천히 함께 썩어가고 있었지만. 로렌스마저도 그 냄새가 자신들의 갇힌 세계에 퍼질 때까지 알지 못했다.
냄새를 감지한 된 순간부터 로렌스의 귀에는 누군가 문을 쾅쾅 쳐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에 갇힌 자신들인지. 아니면 밖에 있는 자신들인지는 알 수 없었으리라.
다수와 소수, 차별을 그리는 법
사진 출처:다음 영화
또한 영화는 다수와 소수로 대변할 수 있는 메시지를, 아름다움이라는 치사한(?)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주로 인물들의 배치, 움직임의 방향, 혹은 의복으로 이뤄진다. 이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전해지는 메시지 덕에 영화를 보는 동안 그들의 입장차이, 의견의 일치 정도 등을 헷갈리지 않게 습득하고 따라갈 수 있다.(오히려 여러 버전으로 불리는 이름이 더 헷갈릴 지경)
이 아름다운 선물을 보는데서 오는 기쁨이 매우 커서, 종잡을 수 없는 추기경들 사이의 암투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틈이 충분히 생긴다. 마치 크게 내뱉은 심호흡 후에 다시 잠수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와중에도 직업병이 도져버린 내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차별 혹은 구별을 볼 수 있는 장면을 말하라 한다면, 가만히 서 있는 추기경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수녀들의 모습을 비출 때 라고 할 것이다.
마치 적혈구와 백혈구 사이를 조심해서 돌아다니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낼 수 없는 수녀들의 처지도. 단 한 번의 눈길도 그들에게 주지 않는 추기경들의 모습도. 그러면서도 정적임과 동적임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움직임도. 이 영화가 말하려는 점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그 장면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 신(Scene)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 이 모든 폭발의 시작.
사진 출처:다음 영화
폭동에 의해 이 완벽하다 생각했던 밀실(?)에 틈이 생기고 난 후. 가장 먼저 이곳으로 넘어온 것은 다름 아닌 바람조각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로렌스는 크고 견고한 문으로 성추문이나 매점매석 같은 큰 것들만 막아내면. 교황이 될 자를 쉽게 고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썩은 냄새들을 품에 안고 유유히 등을 보이고 멀어지면서 그에게 큰 물음을 던졌다.
자격. 그리고 변화를 대하는 마음가짐.
극 중 로렌스는 콘클라베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괴로워했다. 공적인 임무는 물론이고 자신이 성직자로서 가진 의심까지 안은 채 그 어떤 인물보다도 쓸쓸하며 갇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작은 공기의 날갯짓 덕에,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 대해 단언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로렌스는 묘하게 안정되고 편안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분명 불청객이라 생각했을 바람이었지만. 그 덕에 자신이야 말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콘클라베 안에서 두꺼운 문을 부수고 나올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거북이를 고이 풀어(?) 주고, 수녀들에게도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서. 로렌스의 성직자 생활이 다시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확신을 의심하는 과정에 언제나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제목인 콘클라베(Conclave)는 라틴어로 (열쇠로) 잠글 수 있는, 혹은 잠근 방을 의미한다.
[이 글의 TMI]
1. 어제 산 타는 바람에 몸살 나서 오늘 하체 못함.
2. 이틀만 회사 나가면 이번 주 끝!!
3. 당근 5킬로 샀음. 라페 가즈악!!
#콘클라베 #영화리뷰 #최신영화 #랄프파인즈 #에드바르트베르거 #영화리뷰어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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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선형적 세계로의 첫걸음
* 스포일러 주의
* 지극히 개인적인, 횡설수설한 감상
1. '사피어-워프 가설'https://pixabay.com/images/id-1418613/
'사피어-워프 가설'이란 사람은 그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한다는 가설이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눈(雪)'은 지구 어디에서나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출처: 표준국어대사전)'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것을 함박눈, 싸리눈, 진눈깨비 등으로 정의내릴 때, 에스키모인들은 수십가지의 다양한 단어로 표현한다. 비슷하게, 인간이 볼 수 있는 '색(色)'의 스펙트럼은 동일하지만, 영어에서 각각 green과 blue라고 칭하는 범주의 색들을 한국어에서는 이 범주의 색을 '푸른색' 하나로 통칭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신호등의 녹색불을 파란불이라고도 하고, 초록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언제나 green light지, blue light가 아니다. 즉,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에 언어가 관장하는 것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이 아직까지 '가설'에 불과하기는 하지만(인간의 인지 능력을 직접적으로 측정할 길이 아직까지는 확고하게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언어 현상에서 이런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체험하곤 한다.
이 가설은 작중 인물인 루이스가 헵타포드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근원적인 밑바탕이 된다.
2. 인간과 외계인의 소통 방식은?인간과 전혀 다른 삶과 사고 방식을 가졌을 외계인들과 어떻게 소통을 할까?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를 한다면, 외계인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언어학자답게 가장 단순하지만 성실한 방법으로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바로 우리의 언어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 사피어-워프 가설에 기반하여 생각하자면, 이는 즉 인간의 사고방식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인간이 헵타포드'어'를 학습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선형적이라면 헵타포드어는 비선형적이다. 일련의 원으로 그려진 그들의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다. 작중에서 이안은 이들 헵타포드들이 수초만에 이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경이로워하는데, 이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모습을 드러나듯, 헵타포드들의 '비선형적인 시간'에 기인한다. 인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로 규정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므로, 인간에게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동시다발적이며 즉각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헵타포드 어는 또한 비음성적이다.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왜 음성(소리)과 유리되어 있는걸까? 그것은 아마 음성이라는 것은 선형적 시간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는 언제나 처음과 끝이 있다. 그러나 문자는 동시적이다. 인간의 문자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헵타포드어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한 눈에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별다른 도구 없이도 그러한 문자를 자유롭게 쓰고 지울 수 있으니 음성은 그들에게 그다지 필요한 언어수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헵타포드들은 대체 왜, 인류에게 왔는가.
3. 새로운 언어의 힘: 불안정함의 극복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애봇과 코스텔로는 '인류에게 '무기'를 전해주러 왔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무기란, 인간이 사로잡혀 있는 선형적 시간의 틀을 깬 새로운 언어를 전수하는 것.
언어를 전수받는 것이 왜 무기가 될 수 있나?
루이스는 헵타포드어를 익히면서 끊임없이 잔상을 본다. 영화 속에서는 마치 회상을 하는 것처럼 보여지던 장면들은 사실 루이스가 앞으로 겪을 일들이다. 즉, 헵타포드어를 학습함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어떤 초월적인 시간관념을 가지게 된 것. 코스텔로는 이러한 전수가 3000년 후의 미래에 인류가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렵다. 헵타포드어를 배운 것은 루이스 개인이 아닌가. 심지어 루이스는 본인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눈치다. 다수가 아닌 개인이 배운 언어가 과연 인류 전체라는 거대한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단편적 장면들을 살펴보면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yes가 될 것이다. 섕 장군과의 만남에서의 휘장, 헵타포드어 책을 낸 장면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는 루이스가 결국 헵타포드어를 완전히 해독해내고, 이런 성과를 통해 헵타포드어를 인류에게 전수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자, 다시 헵타포드어가 어떤 무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헵타포드어를 인류에게 전수한다는 건, 인류가 헵타포드어를 배운다는 것은 인류가 선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비선형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모든 인류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알고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봇과 코스텔로가 말하듯, 인류는 헵타포드들을 돕게 될 것이다.
왜? 지구 상에 떠있는 미확인 비행물체에 그토록 벌벌 떨며 저희들끼리 다투었던 인류가 과연? 이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크린 너머의 인류는 어떤 미지의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진다.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왜냐고? 그들이 대체 뭐하는 존재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12개의 서로 다른 국가들이 서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얼마간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전세계는 혼돈에 빠지지 않았던가.
이렇듯 불확실성은 인류에게 공포와 절망, 그리고 혼란을 야기한다.
선형적인 삶에 놓여있다는 것은 미래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눈을 가리고 돌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은 일이다. 두려운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헵타포드어의 전수는 인류가 가진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이미 예정된 삶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절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딸이 죽음을 맞이할 것, 남편은 끝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와는 결국 이혼할 것이라는 것 등의 사실을 미리 알아버리는 것처럼 미래는 때론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루이스는 기어코 그녀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피하지 못해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래의 한켠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딸과 남편이 있고, 그녀는 그러한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이러한 운명에 대한 순응은 루이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토록 독불장군처럼 굴던 섕이 단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을 바꾼 것이 그러하다. 선형적인 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던 불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작품이 보내는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인류는 헵타포드어를 익힐 것이고, 우리가 본디 가지고 있던 시간적 흐름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의 사고를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용과 포용이라는 것 또한 싹트리라. 헵타포드가 3000년 후에 인류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알지 못함에서 오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안을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무척 불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미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칼뱅의 예정설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자의 돌을 접한 연금술사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삶을 살았다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집트의 미라, 한국의 조상신 숭배 등)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산다는건 어떤 느낌일까?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선형적 세계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거대한 불가사의 앞에서 인류는 한 없이 작고 초라하며, 나약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루이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헵타포드어를 해독해내고,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루이스가 지구 반대편의 중국까지 전화를 건 것, 이안이 루이스의 해독을 돕는 것, 루이스가 헵타포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자 발벗고 나서는 것. 그러한 소통의 장면들이 그를 보여준다.
어쩌면 헵타포드들은 인류에게 있는 어떤 '씨앗'같은 걸 본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그들의 접촉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화점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중 나오는 '논제로섬 게임'이라는 개념은 루이스왈, 윈윈(win-win), 협력 등과 유의어인데, 이는 결국 이 작품이 소통에 대해 가지는 개념과 일치한다. 소통은 어떠한 이득을 갈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와 애봇, 코스텔로가 서로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자 했던 태도와 그를 통해 서로의 사고를 이해하고 알아가게 된 일련의 과정들은 소통이란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쯤에서 작품의 제목을 다시 돌아보자. 'Arrival'. 이는 도입, 또는 도착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다. 시작과 끝. 말하자면, 낯선 외계 생명의 방문은 ufo의 도착이자,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재미있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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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온 분질 패밀리의 화려한 액션
삶에서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나 처음 태어나서 가장 믿어야 하는 존재는 부모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정성껏 보호하고 키워낸다. 그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여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부모 이외에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된다. 형제자매나 친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분야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그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신뢰에 금이 가는 상황도 생긴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사이가 멀어져 서로 등을 지고 심지어는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둔다. 일종의 가족으로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진짜 가족처럼 자주 만나고 교류하면서 서로 도움을 준다. 서로 다투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정말 서로에게 소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다시 관계는 회복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마치 새로운 가족처럼 변해간다. 특히 근래 들어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조금씩 옅어지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살거나 일하는 것 같은 상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철저히 개인화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유사 가족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도미닉과 주변 인물들이 만드는 분노 패밀리의 이야기, <분노의 질주>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는 기본적으로 도미닉(빈 디젤)을 중심으로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친구들이 일종의 유사 가족화 되어가는 이야기다. 2001년 롭 코헨 감독이 연출한 <분노의 질주> 1편은 도미닉과 여동생 미아(조나다 브루스터), 브라이언(폴 워커)의 이야기는 액션이라기보다는 범죄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자동차 레이스 장면으로 유명해진 영화는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한 3편 (분노의 질주: 도쿄 드리프트>로 완전히 시리즈가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분노의 질주: 디 오리지널>이 2009년에 개봉하였고 흥행성적도 괜찮았기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이후 이어지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점점 더 스케일이 커져 완전한 액션 블럭버스터로 탈바꿈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야기의 시작은 도미닉 토레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앞선 시리즈는 사실 도미닉과 브라이언이 추축이었으나, 브라이언을 연기한 배우 폴 워커의 사망으로 더욱 도미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또한 시리즈가 일종의 팀업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조사하는 식으로 진행되면서 팀을 이루는 사람들은 시리즈 내에서 가장 믿을만한 인물들로 구성되어야 했고 그래서 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은 일종의 도미닉 패밀리가 되어갔다. 이렇게 시리즈가 팀업을 통한 작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건 시리즈 5편인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 때부터다. 하이스트 형식으로 진행된 영화는 각기 맡은 역할에 맞춰 불가능해 보이는 금고를 탈취하는 과정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그때 형성된 그 형식은 시리즈 최신작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서사가 특이한 건, 죽었던 인물들을 다시 살려 돌아오게 한다거나 직전 시리즈에서 악당이었던 인물이 다음에는 도미닉 패밀리를 돕는 인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번 새로운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은 도미닉의 친동생 제이콥(존 시나)이다. 그는 또 다른 악당 사이퍼(샤를리스 테론)와 함께 세계 어느 곳이든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탈취해 가져가려고 한다. 이들을 막기 위해 나서는 것은 도미닉과 그의 동료들이다. 이번 영화에서 서사를 책임지는 것은 도미닉과 제이콥의 과거사로 인해 발생한 서로에 대한 오해와 증오다. 어찌 보면 도미닉 패밀리가 새로운 등장인물과 대립하고 결국에는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의 중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영화 안에서도 대척점의 인물들은 철저히 대립하고 싸우다가도 어느 순간 화해를 해내고 만다. 이것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정서이고, 이것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번 영화에서는 과거 시리즈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설정되었던 한(성강)도 다시 출연한다. 시리즈 3편의 주인공이었던 숀(루카스 블랙)도 다시 등장하고, 그 외에 시리즈에서 한 번이라도 등장했던 로만(타이레스 깁슨), 램지(나탈리 엠마뉴엘), 레티(미셀 로드리게즈)와 스핀오프 시리즈인 <홉스 앤 쇼>에 등장했던 막달레나(헬렌 미렌) 도 다시 등장하여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들이 재등장하여 자동차 추격신을 벌이고 각자 역할에 맞춰 활약하는 모습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각 인물들의 관계가 동력이 되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화려한 액션
이 시리즈가 보여주는 서사에서 가족은 각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가족이나 아끼는 사람을 잃은 이후 그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캐릭터는 그 인물이 악당이든 아니든 굉장한 힘을 보여준다. 마치 그 감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액션 장면에는 큰 자동차 엔진음이 포함되어 있고, 현실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조금은 황당한 액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금고를 털고, 탱크나 핵잠수함과 대결을 벌이는 시리즈는 이번엔 자석을 이용해 사물을 움직이고, 심지어 우주까지 간다.
액션이 중심이 되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아무래도 서사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부분 인물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인물들의 감정이 최고조로 이를 때, 이야기의 액션으로 이어져 그것을 보는 관객들의 마음마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블럭버스터 액션 영화로 변화된 이 시리즈가 내세우는 전략은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서사에 대한 평가 비중을 줄이고 단순히 액션과 감정으로만 영화를 평가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꽤 영리한 방법을 쓰고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은 시리즈 9편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스틴 린 감독은 3편부터 6편까지 시리즈의 연출을 맡았었고, 7편은 제임스 완, 8편은 F게리 그레이 감독이 연출했었다. 그리고 이번 9편은 다시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있다. 저스틴 린 감독은 시리즈 전체의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능하고 자동차를 이용해 팀업을 구성하여 펼쳐지는 액션 장면을 연출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는 모든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것을 액션까지 연결하여 예상을 뛰어넘는 박진감을 선사한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에도 여러 가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찡한 감동까지 전달한다.
시리즈는 한 편의 영화가 끝날 때 늘 등장인물들을 모아놓고 일종의 가족 모임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빈 디젤이 연기한 도미닉과 팀업을 이루었던 모든 팀원들이 한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대가족과 같은 모습이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그 마지막 식탁에서의 모습처럼 유사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것은 그래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치 현대 가족 개념이 변화해나가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가 내세우는 가족은 완전히 타인이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2편을 제외하고 전 시리즈에 등장하고 있는 배우 빈 디젤은 이 프랜차이즈의 진정한 스타다. 그가 연기와 제작까지 맡고 있는 이 시리즈는 공식적으로 두 편이 남았으며 드웨인 존슨과 제이슨 스타뎀이 등장하는 스핀오프 시리즈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빈 디젤을 중심으로 모인 배우들도 유사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봉 후 5일 동안 100만 관객을 넘어선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코로나가 강타한 극장가를 살릴 수 있는 첫 블럭버스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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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스트리트 댄스라는 열정에 대한 헌사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킵 스텝핑(Keep Stepping)
Australia/2022/95min/루크 코니시 감독 작품
스트리트 댄서 문화를 담은 영화 〈킵 스텝핑〉은 세 인물의 서사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루마니아 출신의 브레이크 댄서 파트리샤, 칠레-뉴질랜드(사모아)인 부모를 둔 팝핀 댄서 개비, 스트리트 댄스 대회 ‘디스트럭티브 스텝스(Destructive steps)’를 조직한 한인 출신 조가 주인공이다.
셋 모두에게 춤은 치유와 열정의 계기였다. 파트리샤는 서른셋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낯선 나라에서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춤 연습을 이어간다. 개비는 남들과 다른 피부색과 체형으로 위축된 적이 있고, 조 역시 백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스트리트 댄스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의 불리한 조건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춤에 진심인 구성원을 보듬고 춤 실력으로만 사람들을 평가한다. 즉 춤에 쏟는 열정을 순수히 보상받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도달 불가능한 욕망을 양산하여 개인에게 좌절을 안기지만 스트리트 댄스 신(scene)은 누군가의 욕망과 노력을 착취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금지만 당하지만 댄스 배틀에서 주어진 45초의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한 댄서의 말이 이를 증언한다.
파트리샤와 개비는 모두 오랫동안 춤을 출 수 있을지,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불안해하며 고민한다. 춤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고민이 있다. 파트리샤는 윈드밀 기술을 익히는 것, 개비는 사모아 전통 춤을 팝핀과 결합해 자신만의 춤을 선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조는 자신을 키워준 스트리트 댄서 친구들과 커뮤니티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적자를 내면서도 대회를 꾸려왔다.
‘무용’해 보이는 것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자신만의 길을 닦아 나가는 자들이 뿜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이 현실에서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사그라들 때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처음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태도가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를 ‘실패’를 하찮게 만든다. 누군가가 부여한 욕망이 아닌 자기 내면에서 솟은 욕망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이 비슷한 상황의 많은 이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 연대로 다가가리라 확신한다.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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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2021)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2021)
감독: 요아킴 트리에
출연: 레나테 레인스베, 안데스 다니엘슨 리 등
장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국가: 노르웨이
상영시간: 121분
개봉일: 2022.08.25
사랑을 통해 찾아가는 진정한 내 모습
서른을 앞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는 의대생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사진작가에서 작가 지망생으로 직업을 수시로 바꾸고, 진로의 변화에 따라 만나는 애인도 함께 바뀐다. 유명한 만화가 '악셀(안데스 다니엘슨 리)'과 안정적인 연애를 하는 듯하지만 커리어를 쌓아 사회적 위치를 확보한 그와 달리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자신의 상황에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다. 이후 우연히 파티장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를 만나 편안하고 유쾌한 시간들을 보내지만 여전히 모호하기만 한 정체성과 장래가 다시 한 번 '율리에'를 괴롭힌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자신이 꿈꾸는 것 모두를 찾을 수 있을까?
과감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감각적인 로맨스 영화의 탄생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마치 단편 모음집처럼 여러 개의 플롯으로 쪼갠 구성, 과감한 쇼트와 독특한 연출 방식을 통해 혼란이 깃든 '율리에'의 심리로 몰입을 이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처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각각의 부제가 있는 14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음에도 줄거리가 뚝뚝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챕터별 구성 때문에 내용을 질질 끄는 구간이 없고, 호흡이 빠르기 때문에 지루함이 없고 라디오에서 각기 다른 연애 사연을 듣는 것처럼 모든 챕터가 흥미롭다.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율리에' 혼자만이 '에이빈드'를 향해 뛰어가는 장면이라던가 약에 취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신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것 등 로맨스 장르의 작품을 풀어내는 방식도 매우 신선하다. 대중영화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도시 '오슬로'를 배경으로 해 길가에서 달리는 장면마저도 로맨틱하게 그려지며 섹슈얼한 장면마저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표현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 표현을 요하는 '율리에'로 분한 '레나테 ㄷ레인스베'와 '악셀'이라는 사람이 실존하는 것처럼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 '안데스 다니엘슨 리' 두 배우의 열연이 이끄는 힘도 강렬하다. 심도 있는 이야기와 감각적인 장면들, 뛰어난 배우들이 만나 '나'와 '사랑'을 주제로 한 감각적인 작품을 완성도 있게 그렸다.
사랑은 거들 뿐, 골치아픈 자기탐색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보통의 범주에 속한 로코 무비는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란 본디 사랑으로 맺어진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리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 '율리에'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이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단순히 로맨스적인 측면만을 고려하면 율리에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악셀'은 율리에의 꿈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남자였으며 '에이빈드'는 다정하고 헌신적인 애인이었다. 율리에는 부족함 없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은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았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어진 남녀의 관계 속에 자신의 이름으로 온전히 설 수 있는 위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서른을 앞둔 사회초년생이지만 40대 중반의 남자친구 '악셀'은 인지도와 커리어를 모두 갖춘 인기 만화가다. 율리에는 그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진로를 바꾸기만 하고, 아르바이트생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그와 비교하며 마치 자신이 인생의 조연인 것처럼 느꼈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회적 위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에이빈드'를 만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율리에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남자였지만 서로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사랑만으로 그녀의 갈망을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결국 이 작품은 '율리에'가 뜨거운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딪히고 쓰러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핵심이다. 사랑은 단지 '나'를 찾는데 쓰이는 수단일 뿐이며 '율리에'는 두 남자와 사랑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을 만나 행복해 하고 아파하는 시간을 겪으며 자아를 조금씩 찾아나간다.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율리에'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를 바라본다면, 그의 모순적인 태도를 답답해하기 보다는 그녀와 헤어진 것과는 별개로 끝까지 성장을 응원하던 '악셀'처럼 율리에가 자아의 혼란과 내적 갈등을 이겨내기를 바라게 된다.
최악일지도 모르는 나, 누구에게나 있을 방황의 시간
극중 '악셀'은 '율리에'에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는 말을 한다. 그녀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이는 애인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원제에 대한 번역이 작품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데, 직역하면 '세상 최악의 인간'에 좀 더 가깝다. 번역된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여러 남자와 사랑을 하며 최악의 인간들을 경험하는 스토리가 예상되지만, 작품에서 말하는 최악의 인간은 결국 '율리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을 잘 썼다고 칭찬을 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를 원하긴 하는데 스스로도 알지 못해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 싶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에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 이러한 방황의 시기에 두 남자를 만나며 이별을 반복함으로써 사랑할 때 최악의 인간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은 변덕스럽고 모순적인 '율리에'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으며 관객에게도 이를 유도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저 이상을 향한 욕망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극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진로 결정에 대한 큰 고민을 하는 사회초년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상대방에게 최악의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악셀'과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거나 '에이빈드'의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가는 선택지를 고르는 게 바람직했을까? 인생에서 사랑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진정한 내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상대에게 최악의 인간이 되는 것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면, 설령 누군가 비난을 할지라도 본인을 위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같은 형태는 아닐 지라도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방황이기에 우리는 '율리에'를 욕하지 않고 기꺼이 공감하고 응원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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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언론 시사회에 초청 받아 작성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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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글은 영화 [애프터 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안드로이드, 혹은 복제인간의 영화적 "쓰임새"는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하나의 "인간"이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악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처단하기도 했고, 또는 인간을 공격하거나 나쁜 일을 벌이는 존재에 국한되기도 했다.
제3 인간으로 분류되는 그들은 모두 괴로움과 위태로움을 지닌 존재들로 종종 묘사되었고. 그들은 늘 사람이 되고 싶어 하거나 합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자신들의 인생에 있는 가장 큰 목표처럼 갖고 있었다.
영화 [애프터 양]은 이런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제3인간으로 분류된 그들의 존재가 합법이며 그로 인해 또 다른 갈등(?)에 접어든 안드로이드와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태 봐 왔던 액션이나 스릴러가 아닌. 이미 일상에 완벽하게 녹아든, 매일매일의 색을 닮은 양의 이야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에 대한 물음까지도 함께 던진다.
왜 사진 찍기를 망설였을까.;가족의 정의에 대한 질문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속에 나오는 가족은 유달리 "생물학적인 자신의 후손"과 "정상적인 4인"가족에 집착하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이상함의 극치를 달린다 해도 부족함이 없는 조립식 가족이다. 인종에 대한 크로스 오버는 물론. 입양아와 안드로이드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그래도 친숙하면 좋으련만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형태는 "정상"에 가까워 보이는 쪽은 별로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무언가를 연습하고, 서로를 타박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함께 무언가를 해 내는 집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이상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다양성, 혹은 넓은 포용력으로 대변될 수 있는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은 자신의 소속감에 대한 의문이 문득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가족이 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는 순간에도. 동생이 얼른 오라며 손짓을 하는 그 순간에도. 양의 모습은 선뜻 프레임 안으로 끼어들지 못해 주춤거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우두커니 서 있었던 이유가 자신이 가진 이 눈부신 가족에 대한 감사함을 갑자기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들이 이미 가족이고. 그 사실에 행복해한다는 걸 모든 가족 구성원의 표정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그 시대의 가족들을 이어주는 끈끈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양도 문득 그 순간을 머릿속의 한 공간을 기꺼이 털어 저장했던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별자리;혹은 진주
사진출처:다음 영화
성인이 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내가 크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을 때 상실감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게다가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 반복된 일상에 처할 때 걷잡을 수 없는 무기력함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영화 속이라 해도 그다지 크게 다르지는 않나 보다. 영화는 좋게 말하면 안정된 일상을, 나쁘게 말하면 지루함의 연속인 하루하루의 반복된 이벤트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장 난 양의 기억장치를 들여다보는 시점에 갔을 때. 영화는 우리의 인생이 불꽃놀이보다 화롯불에 가까움을 말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아닌 안드로이드 양의 저장 장치를 통해서.
양은 일상에서도 특별한 순간을 찾아내 자신의 삶을 지탱할 데이터로 삼았다. 물론 처음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빛의 부스러기에 불과했을 테지만. 양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부스러기들을 때론 뭉치고, 뿌리기도 하며 자신에게도 미지의 영역 같았던 저장 공간을 조금씩 채웠다. 그 결과 양의 모든 기억은 은은하지만 충분히 주변을 밝힐만한 별이 되어 빛나게 되었다.
양이 자신의 생에 존재한 모든 이벤트들을 스스로 다듬어 자신만의 별자리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제이크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에게는 지루함의 연속이었을 그 순간들도. 양에게는 그 하찮아 보이는 매일이 별의 재료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AI는 사람과 얼마나 다른가.;Ai는 정말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일까.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의 양은 애써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무던한 노력을 할 뿐이다.
충분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감정이라는 말로 퉁칠 수 있지만. 어쩌면 안드로이드에게는 시스템적 오류에 가까운 밀려오는 그 "무언가"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왔을 것이니까.
그러나 그 카오스 속에서도 양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거울을 바라보는 양을 보며, 문득 양만큼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은 자신이 고장 나서 더 이상의 "쓸모"가 없더라도 자신을 그리워해줄 가족이 있다고 믿었을 것만 같았다.
바람이 될 것이라며 슬프고 쓸쓸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동생도. 그 노래를 들으며 양의 빛나는 기억들을 생각하는 가족도. 그런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양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만. 양은 그들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 지그시 입꼬리를 올렸을 것이다. 그게 양에게는 행복.이라고 정의되고 기억하기를. 그 기억들을 모아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최근 많은 심적 변화와 카오스를 겪었다.
(마음속 지옥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 내 일상은 본업인 연구원으로의 업무를 비롯한 세컨드 프로젝트들로 가득 차서 단조롭다 못해 기계처럼 반복되는 삶의 중간에 있었고. 과연 이걸 해서 얼마나 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생각에 정말 오랫동안 지키려고 애써 왔던 수면 패턴이 완벽하게 박살 난 날들을 보냈다. 그마저도 울면서 잠에 드는 날이 많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러던 중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양은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는 순간을. 이 가족에 속해 있음을 느끼는 찰나들을 모두 자신의 머릿속(마음속이라고 믿고 싶지만)에 아름다운 별자리로 남겨놓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모두 빛나는 것으로 바꿔놓는 법을 터득한 사람(?) 이었다.
너무 익숙해져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일상에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고이 품었던 양의 마음에 많은 것을 느꼈다. 지금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아주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무언가 반복될 때 깊이가 생긴다 했다. 내가 맞이하게 될 그 무언가의 "깊이"가 어느 정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든 고뇌의 순간들도 마치 양이 그랬듯이 내 마음속에서도 별자리가 될 수 있는 날들을 기다려 보려 한다.
언젠가는 고뇌의 깊이만큼 빛나고 있을 내 별들을 보며 나도 그 순간을 계속이고 곱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 글의 TMI]
1. 여름 샌들 샀는데 발목 다침.
2. 햇빛 알레르기 약간 생겨서 피부과에 돈 갖다 바침.
3. 일주일에 글 하나씩 쓰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잘 모르겠다. 특히 요새.
4. 영화 [범죄 도시 2] 리뷰가 대박 나서 좀 얼떨떨한데. 진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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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랑한 과거는, 상상력이 만든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한 과거는, 상상력이 만든 환상일지도 모른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오프닝부터 관객을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나 역시도 그랬다. 파리의 아침부터 밤까지, 화창한 날씨부터, 흐린 날씨, 그 속에서 움직이는 파리지앵들의 모습까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짧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파리에 대한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는 1920년대 파리를 향한 또 다른 낭만을 가진 주인공 ‘길 펜더’와 그의 연인 ‘이네즈’가 함께 모네의 정원을 찾은 장면으로 이어지며 시작된다.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하는 길 펜더는 잘나가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이지만, 소설가라는 진짜 꿈을 간직한 채 글을 쓰고 있다. 어느 날 밤, 길은 우연히 골목길에 나타난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 오랫동안 존경하던 작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겨온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한다. 이후 길은 의상 디자인을 배우러 파리에 온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1920년대가 아닌 1890년대 ‘벨 에포크’ 시절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간 1890년대에서도 또 다른 인물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며 길 펜더는 과거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일 뿐이며 ‘황금시대’라는 것이 결국 상대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아드리아나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현재의 삶으로 돌아온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는 언제나 더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인 것처럼, 지나간 세대에 대한 동경은 우리의 ‘상상력’이 주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늦게 태어났을까’ 한탄하며 90년대 영화와 오아시스, 라디오헤드의 시대를 사랑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뒤섞이며 현재의 스스로를 부족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황금시대는 바로 지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내가 90년대를 동경하는 것처럼, 먼 훗날의 누군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동경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동경은 상대적인 것이고, 무의미한 비교에 지나지 않는다.
길의 여정은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가브리엘을 만나며 마무리된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 둘은 다리 위에서 만나게 되는데, 자정이 되었음에도 길은 예전처럼 과거를 향해 떠나지 않는다. 길은 지금 이곳, 현재에 머무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이야말로 결국 나만의 황금기를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길 펜더가 환상을 거두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듯, 나도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로 했다. 또한, 이 영화는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영화를 통해 파리 여행에 대한 꿈이 생겼고, 몇 년 전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배경이 되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 서서 그 순간을 재현해보며, '지금'이라는 시간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그 사이 사이에 낭만의 단편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황금시대가 아닐까? 과거를 쫓기보다 현실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채워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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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나병의 영화정보? ?영화 VIP 시사회란??
?씨나병의 영화정보? ⠀ ?첫번째 주제? ⠀ 영화 VIP 시사회가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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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75 킬링필드, 푸난> 메인 예고편
제42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충격의 역사 '1975 킬링필드, 푸난' 1월 27일 개봉! STORY 당신들은 다 빼앗아 갔어. 우리의 삶, 가족, 존엄성까지도" 1975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이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장악된다. 평범한 삶을 살던 '슈'의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길 위로 내몰리고 피난 중에 3살 아들 '소반'이 없어진다.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슈'에게 아들을 만날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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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메인 예고편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