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2025-03-09 13:18:14
숙명적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실존, <파닥파닥> 2편
영화 <파닥파닥> 리뷰 (2)
(*1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그 고등어가 재수 없는 이유
<장면 5>
“빨리 우리들처럼 죽은 척 해.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요.”
수조 속 물고기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가장하는 것이다. 살아있을수록, 더 싱싱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죽은 척하기.’ 그들은 배를 까뒤집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겨우겨우 삶을 부지한다. <장면 5>, 고등어의 1인칭 시점 카메라로 본 수조 속 물고기들의 생존법은 기괴하다. 고등어가 노래한 OST ‘악몽’의 가사 일부는 아래와 같다.
“그들이 나를 데려간 그곳엔
많은 이들이 죽어있었어, 아니 살아있었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 야스퍼스로 바라본 벗어날 수 없는 수조 안,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칠 죽음의 예고는 수조 안 생선들이 맞닥뜨린 한계상황이다. 죽음의 순간을 잠시 미루는 것에 불과한 ‘죽은 척하기’ 생존법으로는 그들을 둘러싼 한계상황을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 이 한계상황에서의 대처방식을 두고 고등어와 다른 수조 속 물고기들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야스퍼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수조 속 물고기들과 고등어가 추구하려는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장의 배고픔과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한 수조 속 물고기들. 이들의 생존법은 오히려 죽음을 안일하게 망각하는 회피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비(非)본래적인 삶에 그쳐 있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그 다음은요?”
이들에게는 다음이 없다. 잠깐 죽음을 피해봤자 그뿐. 그들은 여전히 수조라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에 머물러 있다.
반면 수조를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몸을 불사르는 고등어, 고등어에게 바다가 아닌 수조 속에서의 삶은 다른 의미로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에게 유리벽에 가로막혀 바다를 포기하고 죽은 척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파닥파닥’에서 고등어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다는 자유이자, 본래적 삶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실존 그 자체를 상징한다. 고등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본래적인 가치를 수조 속 물고기들에게도 계몽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계몽이라는 작업은 마음만큼 쉽지 않다. 당장 눈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인 물고기들에게 고등어는 언제나 붕 뜬소리만 해대는 눈엣가시다. 자꾸만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몰두하고 도전하려는 고등어의 모습이 다른 물고기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본래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만 매몰된 그들에게, 고등어가 본래적 삶의 가치를 계몽하려는 시도는 안주하고 있던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면 6>
그러나 이토록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희망찬 탈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말끔히 손질되어 접시에 오른 고등어. <장면 6>의 카메라 앵글은 인간의 시점에서 여러 밑반찬과 함께 식탁에 오른 고등어를 내려다보며 그가 더 이상 실존을 외치던 존재 ‘고등어’가 아닌, 그저 ‘고등어 회’라는 섭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의 정서를 심화시킨다. OST ‘용서해요’ 뮤지컬 시퀀스 직후, 음악 없이 식탁에 접시를 올리는 ‘달그락’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장면 6>은 직전의 시퀀스에서 고등어와 올드넙치가 죽음의 순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매정한 현실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인간의 기호와 즉흥적인 선택으로 뒤바뀐 올드넙치와 고등어의 생사의 갈림길. 장난삼아 그 입에 담배를 물리는 남자는 눈앞의 생선이 얼마나 자유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다 죽어버렸는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고등어의 죽음은 진정한 삶을 향한 실존의 추구가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숙명과 권력 아래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도 몸부림쳐야 삶이지
영화 ‘파닥파닥’은 횟집 수조 속 생선이라는 독특한 화자의 시선을 빌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불평등, 그리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죽음을 통해 영화 ‘파닥파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제 포기하고, 저항하지 말고, 늘 그랬듯 수조 속에서의 삶에 안주하라는 회유일까?
<장면 7> <장면 8>
여기서 영화의 마지막, 올드넙치의 탈출이 가지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올드넙치의 탈출에서 ‘모형 칼’은 중요한 모티프다. <장면 7>에서 인간 병사 장식품의 손에 들려 있던 모형 칼은 저항하는 고등어를 찌르며 상처 입힌다. 이는 인간의 막강한 권력이자, 실존의 추구를 좌절시키려는 불평등한 현실의 제약이다. 그러나 고등어의 몸에 박힌 칼은 이제껏 죽음을 회피하며 숨기에 급급했던 올드넙치에게로 전달된다. 탈출하기 직전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절망적인 상황, <장면 8>에서 올드넙치는 숨기고 있던 모형 칼을 인간을 향해 날리며 마침내 자유를 손에 얻는다. 고등어로부터 전해져 올드넙치를 바다로 이끌어준 모형 칼은 곧 자유를 향한 갈망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작은 모형 칼은 결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대단한 도구가 못 된다. 생선에게 인간은 언제나 압도적인 포식자이자 뒤집을 수 없는 서열. 그럼에도 그는 고등어로부터 이어진 그 칼을 인간에게 겨눔으로써 비로소 죽음의 수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인간과 생선의 서열이 뒤바뀌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저항을 통해 올드넙치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올드넙치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변화했다는 것이다.
“운명이 짓궂은 장난을 치네요, 바보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해낼 수 있어요…내가 항상 같이 할 테니.”
<장면 9> <장면 10>
OST ‘용서해요’의 뮤지컬 시퀀스 속. 좁은 정육면체에 갇혀 있던 <장면 9>에서 그것이 해체되며 자유로워지는 <장면 10>으로의 이행은, 비단 올드넙치뿐만 아니라 고등어 또한 탈출에서 정신적 주체로서 함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고등어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했으나, 결국 그 죽음이 누구보다 비관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에 매몰되었던 올드넙치를 변화시켰다. 올드넙치와 고등어는 정신적인 동반의 관계를 맺어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이어받은 올드넙치의 탈출은 고등어가 지향했던 실존적인 삶의 추구를 계승한다. 바다를 향해, 진정한 삶을 향해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그 과정 자체가 실존이다. 그 점에서 고등어는 이미 실존을 완수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개인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적인 숙명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외친다. 언뜻 비극적으로 보였던 고등어의 죽음은 올드넙치의 탈출을 통해 그 의지를 계승하며, 충분히 우리가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파닥파닥’은 단순한 의태어가 아니다. 온갖 불평등과 극복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삶을 소망하는 실존적인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