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2025-03-17 15:28:30
영화 <숨>은 무엇을 찍고 무엇을 말하는가
<숨>(2023)
영화 <숨>은 네 개의 이미지가 교차되며 시작한다. 타오르는 불과 드넓은 물(바다). 이제 막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떼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아기의 움직임과 이제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차갑게 식은 망자의 고정된 몸. 각각 생명력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교차하며 영화는 시작부터 삶과 죽음의 대비, 경계, 혹은 순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때 들리는 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이다. 이것은 생명력을 가득 머금은 소리 같기도 하고, 이제 막 그 호흡이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의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숨>은 그 시작에서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사이를 기필코 감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크게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노인과 장례지도사, 유품정리사. 폐지 줍는 노인의 주름진 몸과 느릿한 움직임은 이제 그는 삶의 시간을 대부분 정리하고 죽음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이 생활하는 집, 그가 잠에서 깨 일어나는 모습, 얼굴을 씻고 밥을 짓고 식사를 하는 모습, 하루에 천오백 원 남짓한 돈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는 모습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생’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늙고, 주름지고, 느리고 힘들어도 그는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고, 잠에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는 것은 전부 생의 유지를 위한 일이다.
아쉬운 것은 그 생의 유지를 위한 활동과 움직임을 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숨>은 유재철 장례지도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똑같다고 말한다. 그 장면의 앞뒤로 이 노인을 배치할 때 <숨>의 태도는 과연 그 내레이션과 일치하는지 묻고 싶다. 이를테면 영화의 중반부, 노인을 비추며 감독의 목소리는 이렇게 내레이션한다. 이 폐지 줍는 노인은 한때 성공한 사업가였다고. 이 내레이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과 공명하는 건 김새별 유품정리사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고독사한 누군가가 생전 받았던 장영실상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대단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좁은 방에서 사시다가 가셨을까, 하는 유품정리사의 혼잣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고 좁디 좁은 관에 들어가면 모두가 똑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가 과연 그 말과 동일한 태도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냐는 의문 때문이다. 좁은 관에 들어가는 건 다 똑같다는 그 말. 하지만 ‘대통령의 염장이’ 유재철 장례지도사가 인도하는 그 관은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가 찍는 관이다. 한때 장영실상을 받았으나 결국 좁은 집에서 고독사로 생을 마무리한 그의 죽음은 유품정리사의 말처럼 “관공서 컴퓨터 안에 이름 세 글자”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죽음이, 모두가 죽음 앞에서 똑같다는 영화 <숨>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숨>이 자신의 태도를 일관적으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
*씨네랩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다녀온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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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솔한 에세이, 자기 구원의 문을 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더 웨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불편한 영화다. 엄청난 거구의 찰리가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초반부 장면부터 그렇다. 자기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칼로리를 자랑하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에 밀어넣는 걸 보다보면 팝콘과 콜라를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베일을 하나 하나 벗기듯 찰리가 막무가내로 사는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면 그를 지켜보기가 더 어렵다.
그에게는 삶의 의지가 없다. 그는 1주일 안에 죽을 수 있는 걸 알고도 초콜릿과 피자, 치즈를 추가한 미트볼 샌드위치와 탄산 음료를 계속해서 먹는다. 그에게 폭식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식증에 걸렸던 연인을 돕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또 이는 동성애자였던 연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상에 분노하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깊은 자기 혐오에 빠진 채 자기 방에 틀어박힌 그의 모습은 거북하고, 보기 불편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웨일> 또 한 번 대런 아로노프스키다운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우울하다. 염세적인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적 가치나 상징을 부정적으로 활용하기로도 유명하다. 평범한 구원이나 행복 대신 인간의 모순과 광기를 보여주는 게 그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등장 인물을 인간을 환멸하는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영화 <노아>처럼. 얼핏 보기에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더 웨일>은 찰리와 토마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기혐오에 빠진 채 죽어가는 한 남성은 구원 받으려면 신을 믿으라는 전도사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다.
지옥, 현실을 부정한 대가
하지만 <더 웨일>은 예상했던 전개와 결말을 절묘하게 빗겨 나간다. 영화는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더 웨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구원의 길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단지 그 길이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찰리와 그의 주변 사람은 본인들이 만들어 낸 지옥에 빠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지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다 각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우선 찰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자기가 허락한 몇몇 사람(~~와 토마스)을 제외하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간다. 집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바깥 사람에게 자기 존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당장 본인은 대학 강사지만, 노트북 카메라를 가린 채 줌으로 강의한다. 매일 저녁 피자를 배달시키지만, 자기 안부를 물으며 걱정해주는 피자 배달부에게 단 한번도 자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새생명 선교회 소속 전도사 토마스는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다. 그는 새생명 선교회 소속이 아니다. 한때는 소속 전도사였으나,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선교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해서 찰리에게 전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교 방식이 전정으로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찰리를 간호하는 리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찰리가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찰리가 폭식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알면서도 부정한다. 음식을 한 번만 잘못 삼켜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찰리에게 리즈는 고칼로리 음식을 꾸준히 가져다 준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부정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한다. 찰리는 그의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에세이를 쓰라고 가르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 그럴듯한 명언도 빼고 오직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서 글을 쓰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속했던 교회에서 도망쳐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읽고, 신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찰리를 설득한다. 리즈의 태도도 모순이다. 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그의 자기 파괴적 행동을 돕다가도, 그가 치료 받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으려 한다며 크게 화낸다. 오랜만에 찰리를 만난 전처 메리도 찰리와 화해하는 듯 하다가 결국 다투고 만다. 자기가 엘리를 잘못 키운 것 같다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다며 찰리의 도움을 무시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다 상처로 가득하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구원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진솔한 에세이의 힘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지옥 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이 '진솔함'이다. 본인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진솔하게 쓰라고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찰리도 내심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엘리의 에세이를 애지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증거다. 그는 아프거나 힘겨울 때마다 소설 <모비 딕>을 비판하는 엘리의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에세이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사실 <모비 딕>은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고래에 대한 설명이 매우 길게 나올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많다. 또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는 주제를 다루기에 난해하다. 하지만 <모비 딕>이 형편없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점은 의식하지 않는 매우 솔직한 글이다. 바로 엘리의 에세이가 그렇다.
엘리는 <모비 딕>이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 자기 경험을 살려 소설을 읽어나간다. 그녀는 소설 속 고래를 찰리에 비유하고, 고래를 죽이고 싶어하는 애이햅의 입장에서 에세이를 써 내려간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기를 떠난 찰리에 대한 미움을 고래에 투영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엘리의 첫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찰리에게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시를 읽고 감상을 써보라는 이야기에, 엘리는 말도 안 되는 욕을 써놓는다. 찰리가 아빠로서 호소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그가 모은 전재산 14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찰리의 집에 와서 학교 숙제인 에세이를 쓸 때도 찰리가 추천한 시가 엉망이라고 욕한다. 또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심지어 SNS에 올려 그를 조롱한다.
하지만 찰리는 엘리를 다르게 본다. 이미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만의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엘리를 본다. 또 자기 행동 때문에 딸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도 안다. 그래서 그는 딸의 독한 말들을 듣고서 화를 내기는 커녕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한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진을 찍는 엘리의 행동을 두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사고뭉치 딸 엘리에게서, 찰리는 자신이 강조하던 '솔직함'의 미덕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엘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찰리는 앨런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솔직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솔직한 것, 자기만의 시선과 관점을 유지하는 게 삶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부성애가 아니다.
구원을 향해 내딛는 고통스러운 발걸음
하지만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에게 위안을 줄지언정 그를 구하지는 못했다. 찰리가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떳떳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실천에 옮기자니 찰리는 용기가 없다. 또 무섭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런다 한들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약함은 피자 배달부를 만났을 때 온전히 드러난다. 매일 같이 피자를 가져다 주던 배달부는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찰리가 궁금한 나머지 호기심에 가는 척하다가 피자를 받으러 나온 찰리를 목격한다. 그는 거구의 찰리를 마주한 후 혐오스러워하며 자리를 뜬다. 이에 찰리는 미친듯이 폭식한다. 배달부의 호기심이, 찰리에겐 크나큰 불행이었고, 그의 자기 혐오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적인 순간을 거치면서 찰리는 역으로 용기를 얻는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외부에 공개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솔직해질 수 있는 계기가 원치 않게 생긴 셈이다. 그래서 찰리는 노트북을 켜서 수강생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글을 쓰라며 욕설 섞인 메시지를 보낸다. 마지막 에세이 수업에서는 자신의 메시지대로 진정성 있는 글을 쓴 학생들을 칭찬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트북 카메라를 키고, 자기 모습을 공개한다.
마침내, 고래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찰리가 자기 모습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엘리다. 어느 날, 찰리가 잠자는 사이 토마스와 솔직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긴 엘리. 그녀는 자기가 교회 소속 전도사도 아니고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집에서 가출했다고 털어놓은 토마스의 이야기를 몰래 녹음한다. 또 SNS를 뒤진 끝에 그의 가족을 찾아내 연락한다. 그 결과 토마스는 마침내 가족에게 돌아간다.
혹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엘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속사정을 어렵게 털어놓은 친구를 신고한 셈이니까. 찰리는 다르다. 엘리의 에세이를 읽어 본 찰리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다. 자기에게 미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듯이, 엘리가 토마스에게도 동정심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이해한다. 또 솔직함이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상과 달리 가족과 빠르게 화해하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어서 행복해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더욱 확신한다. 그래서 찰리는 자기혐오의 끝을 찍은 뒤에 엘리에게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에세이를 읽을 때, 찰리는 마침내 깨달음과 확신을 실천에 옮긴다. 깊은 검은 화면에 스스로를 가뒀던 고래가 드디어 밝은 세상을 마주하고 일어나 걷는다. 그렇게 고래는 자기 혐오를 버리고 구원 받는다.
더 나아가 진솔함이라는 깨달음은 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준다. 자기에게 진솔해진다는 것은 곧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이는 타인에게 간섭하고, 구속하고, 원하는 바를 강제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리즈는 과거 찰리가 자기 오빠인 앨런을 도와주었듯이, 자기도 찰리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오빠 대신 애정을 쏟을 사람으로 찰리를 고른 셈이다. 동시에 자기 욕심을 직시하면서 찰리와 화해한다. 그녀는 찰리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가 병원비를 낼 수 있는 돈을 엘리에게 주겠다고 결정하자 크게 화를 낸 것이 모두 본인의 욕심과 바람 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이처럼 <더 웨일>은 찰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모든 이들이 문을 열고, 스스로 채운 족쇄를 마침내 풀어버리는 구원의 이야기다.
찰리의 집이 인상적인 이유
물론 <더 웨일>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자아 성찰의 이야기. 이는 누구에게나 익숙할만한 메시지다. 그러나 <더 웨일>의 진가는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은 찰리의 집 안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집이 매우 좁다보니 찰리의 거구와 대비를 이루면서 유달리 답답하고 음울하다. 덕분에 이 공간에 담긴 여러 의미가 잘 드러난다. 찰리를 감싸고 있는 죽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나 상처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해소 같기도 하다. 자기 밑바닥을 마주하면서 진실을 깨닫는 공간도 되기 때문이다.
촬영 방식 덕분에 공간적 특성은 더 잘 살아난다.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한 게 대표적이다. 가로로 좁은 화면비에서 좁은 공간과 거구의 몸은 전체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한다. 그 결과 공간의 분위기와 다층적인 의미는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협소한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때 클로즈업 컷은 대화의 흐름에 따른 각 인물의 감정선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인물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공간 미술, 촬영, 각본에 이르는 모든 영화적 선택을 최선의 결과로 엮어낸다. 찰리는 사실상 영화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혼자 힘으로 감정 굴곡이 심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러한 캐릭터가 버겁지 않고, 그의 심경 변화가 충분히 이해되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동성 성추행 피해, 과도한 스턴트 연기로 인한 혹사, 이혼과 같은 배우 본인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더 짙은 호소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는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 모습을 직시할 때, 비로소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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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VIEW] “영화에 발을 담그는 동시에 내가 딛는 모든 게 넓어지고 깊어지는 경험을 나누기 위해 계속 노력할 계획입니다. ” 크리에이터 '백록'님 인터뷰
이번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계신 ‘백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눠보았는데요!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백록님의 이야기를 만나 보시죠.
크리에이터님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씨네랩에서 백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현재 졸업 후에 영화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습니다.
필명은 혹시 어떻게 선정하시게 되신 거예요?
글을 써보자는 결심을 하고나서, 필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 이름 중 가장 좋아하는 성(‘백’)에 ‘록’을 붙여서 완성하게 되었어요. 외자에서 오는 느낌을 좋아하고, ‘록’이라는 단어에 녹색, 사슴, 영어의 ‘뒤흔들다(Rock)’ 등 제가 좋아하는 의미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쓰게 됐어요.
영화를 (복수)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많은 전공 중에,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으셨나요?
원래 영상 쪽에 관심이 계속 있었는데 전공을 하겠다는 확신까지는 없었어요.
대외 활동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하게 되면서, 여러 업무를 하다가 단편 영화 제작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영화’라는 분야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영화 전공 하시는 분들 보면 어떤 영화가 좋아서 전공을 했다 이런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계기가 되는 영화도 혹시 있나요?작품이 계기가 되지는 않았어요.
저에게 영화는 당연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는데, 직접 제작 과정을 경험하니까 그냥 그 자체가 재미있더라고요. 그렇게 관심이 이어져서 지금은 작품들도 많이 파고들면서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백록님의 추천 영화, <콜레트>(2018))
크리에이터로서 영화를 보고 긴 글로 리뷰를 남기시잖아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시나리오 작성과 전혀 다르죠. 어쩌다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처음은 사실 작년에 같이 영화 동아리를 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 영화를 보고 영화 얘기만 주구장창 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었어요.
별 기대 없이 간 첫 모임에서 6시간 넘게 영화 얘기만 하는데도 말이 안 끊기고 너무 재밌는 거예요. 지금까지 혼자 보면서 했던 생각들이 ‘대화’가 되니까 더 집중하게 되고, 영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그 경험이 아무래도 졸업하면서 끝나 버렸거든요.
또, 사실 말하면서 하는 건 즐겁지만 남기지 않으면 다 휘발되어 버리잖아요. 그게 살짝 아쉬워서 모임도 못하는 겸 이제 진짜 글로 한번 남겨보자 해서 처음 길게 남기기 시작한 작품이 <연소 일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그러면 처음 <연소 일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처음 쓴 글을 지금 보면 사실 정말 체계가 없는 날 것의 글이예요. 그때도 나름은 정돈해서 쓴다고 쓴 게 그거였거든요. 그런데 계속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어떤 목차로 써야 잘 나오는지, 쓰고 싶은 내용이 잘 잡히는지가 확실히 정돈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뭔가 포인트 한 두세 개 정도 잡아서 완전 구별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미장셴을 얘기할 거면 그것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포스터가 예뻤다든가 하면 그것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처럼요.
근데 그런 것들에 주목할 만한 공통된 소재들이 있는지가 보이면서, 다시 재정렬되는 식으로 발전한 것 같아요. 전보다 더 체계가 잡힌 글을 쓸 수 있게 된 거죠.여러 활동을 하다 보면 글을 쓰기 힘든 작품을 만날 때도 있잖아요. 그런 쓰기 어려운 글을 쓰는 노하우 같은 것들도 생겼을까요?
예전에 쓸 때는 그 작품에 대해서 모든 걸 적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한 편의 글을 쓸 때, 이 영화에서 담고 있는 것과 내가 느낀 것을 전부 다 담아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느낀 것을 전부 다 써버리면 글의 색깔이 하나로 안 잡히더라구요.
오히려 하나의 매력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리 나의 취향이 아니고, 뭔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글이 바로 잡히는 것 같아요.(한 부분에 집중해서! 다른 분들에게도 꿀팁이 될 수 있겠네요.)
때로는 글을 완성하면서 감상이 달라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보통은 첫 감상이 유지되는 것 같고요. 근데 예외적인 상황들이 전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영화에서 뭘 봐야 될지 모르겠다가 글로 이제 써야지 하고 정리하다 보면은 보이는 것들이 한 번씩 있거든요.
그게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도 그 중에 하나였어요. 제가 그거 시사회 그거를 글로 써야 되잖아요.처음에는 진짜 당황했어요. 제가 기대했던 하나를 보여주지 않는 영화로 끝나버려서. 내가 여기서 뭘 캐치해야 되는지 엄청 당황스러웠는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까 제목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제목에 집중하면서 내가 느꼈던 이상한 것들,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혹은 좋았던 부분들을 종합을 해보니까 좋은 감상으로 변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글이 술술 써졌던 기억이 있어요.
(백록님의 추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2013))
그럼, 20대인 백록님이 추천하고 싶은 비슷한 나이대에 계신 분들이 꼭 봐주셨으면 하는 영화가 있을까요? 아니면 영화를 전공하셨으니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이 꼭 봤으면 하는 영화나 영화에 대한 영화 같은 것도 좋아요!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작품 추천이면, 저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인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영화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는데, 최근에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거 듣다 보면 영화에 흥미가 생긴다라고 말을 해서 고민을 하다가 영화 한 편을 추천해 줬어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이었는데, 그 친구가 진짜 너무 좋게 봤거든요. 누구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또, 저만의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는데 거의 다 충족하는 작품이도 하구요.그 기준을 여쭤봐도 될까요? 어떤 면이 마음에 들어야 이 영화가 딱 좋다고 느껴지는지
일단,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보니까 영화 한 편을 구성하는 포인트가 많잖아요.
편집도 있고, 사운드도 있고, 이미지가 있고… 그 중에서 제게 제일 중요한 건 스토리 같아요. 스토리의 기승전결이 메시지랑 부합하는가 혹은 단순히 스토리로서의 완전함이 있는가가 기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미장센이 아름다운가,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가, 음향이 어떤지, 노래가 어떻게 잘 어울리는지같은 것까지 종합해서 평가하는 것 같아요.그러면, 잘 만들었다 하는 작품들 말고 그냥 지희 님 인생의 이정표 같은 작품이 있는지, 힘들거나 지치거나 할 때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새로운 관점인 것 같아요. 언제 보든 그러니까 어쨌든 다시 저로 돌아올 수 있는 영화를 말씀하시는거죠? (네 맞아요.) 저는 모든 그냥 영화라는 분야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저로 다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같고.
인생 영화는 사실 <오만과 편견>이에요. 글에도 적었지만 (씨네랩 챌린지 글을 작성한 적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아직도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랑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과 표현해내는 방식이 진짜 인상 깊었어요. 감정의 풍부함을 너무 잘 담아낸, 제가 볼 때마다 다시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또, 남들은 잘 모를 것 같지만 봤으면 좋겠는 작품 혹시 하나만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아무래도 제 본고장은 스릴러 공포 미스터리거든요.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부터 그 장르를 좋아했는데, 이 장르가 잘 만들어진 영화가 진짜 없거든요. 다섯 손가락을 꼽을 것 같은데, 그 중에 제가 추천할 수 있는 잘 만들어진 공포 영화가 <트라이앵글>이거든요. (처음 들어봐요.) 그쵸? 저도 직설적인 공포를 진짜 안 좋아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공포를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트라이앵글>은 진짜 두세 번 볼 때 더 완벽한 작품이에요. (나중에 찾아봐야겠어요.)(백록님 추천영화, <기담>(2007))
올해부터 씨네랩과 새롭게 함께하게 되었잖아요.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고, 또 크리에이터로 함께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씨네랩에 크리에이터 모집 공모가 떠서 보니, 일단 흥미가 갔었는데 알고보니 인스타그램 콘텐츠도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더라구요. .
그리고 (씨네랩에 올라오는)글 자체도 제가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랑 비슷한 지점이 있는 것 같아서 콘텐츠도 너무 좋았고요. 거기에 제가 글을 써보자 하고 마음먹은 시기랑 완전 맞물려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크리에이터라는 책임을 가지면 꾸준히 쓸 수 있잖아요. 크리에이터가 된 만큼 더 잘 써보자 하고 있고, 씨네랩 인스타에도 그렇게 한 피드를 채울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씨네랩 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활동이 있나요?
최근에 BIKY(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 기자로 글을 기고한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어요.
시사회를 보거나, 글을 써서 올라가는 것도 다 좋은 일이지만, 관객으로서 예전에 개인적으로 보러 간 적이 있던 BIKY를 또 다른 시선으로 경험해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던 것 같아요.
더 좋은 기회로 만나뵐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마지막으로 백록님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또 그걸 나누려는 마음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영화는 예술 중에서도 굉장히 영향력이 큰 분야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고, 그것을 아름답게 다시 표현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 모이는, 그러한 사람들의 궤적들이 저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에 발을 담그는 동시에 내가 딛는 모든 게 넓어지고 깊어지는 경험을 나누기 위해 계속 노력할 계획입니다.
언젠가, 백록님이 만든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때까지 씨네랩이 늘 응원하고 있겠습니다!백록님의 비슷한 나이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3편!
1.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위의 인터뷰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2. 지금 나이에 공감할 수 있는 영화, <콜레트>
: 20대 중반은 경계선에 서 있는 나이입니다. 한 발자국을 어디로, 얼마나, 어느 방향으로 뻗냐에 따라 길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나의 시간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결정하는 건 오로지 내 몫입니다.
영화 <콜레트>는 주인공의 일대기로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 상이한 선택에 따라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질 수도, 무한한 성장을 이루어 낼 수도 있음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그려냅니다. 수려한 이미지로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 속 내가 느끼는 감상을 통해 분명한 ‘나자신’을 뚜렷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20대 겁없을 때 보기 좋은 영화, <기담>
: 저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동시에 싫어합니다. 보통의 공포영화는 잔인하고, 징그럽고, 깜짝 놀래킬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제 취향을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쾌적한 공포, 아름다운 기괴함, 촘촘한 추리극’입니다. <기담>은 여느 작품들보다도 잔인하고 무섭지만, ‘아름다운 기괴함’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극중 엄마 귀신으로 유명한 것이 오히려 왜곡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작입니다. 몇몇 장면들만 겁없이 넘길 수 있다면, 각 등장인물의 사연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대사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작품을 관통하는 ‘쓸쓸함’을 여과없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백록님의 더 다양한 글을 만나보고 싶다면, 씨네랩 글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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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이것은 사랑 혹은 실패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잊는 것 같다. 가끔, 어쩌면 생각보다 더 자주.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인간사회에 포함되어 틀 안의 규칙을 배우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옳은 말과 행동엔 칭찬과 격려가, 어긋난 것들엔 꾸중과 질타를. 어린아이일 땐 ‘왜?’라는 물음을 일삼으며 그만의 이유를 찾아가지만, 언젠가부터 입 밖으로 물음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계기는 알 수 없으나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젓함, 성숙, 적응의 결과라고 여긴다. 사회에 있는 무수한 '어른'들이 그러하듯.
하지만 암묵 속에 묻힌 물음은 언젠가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규범과 정상성, 그 모든 것을 전복하려는 시도 또한. 혼란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다.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거다. 우리가 수용하는 옳음은 마치 송곳처럼 좁고 뾰족하기만 하다고. 송곳의 원래 의도는 무언가를 뚫거나 구멍을 내기 위함인데 우린 왜 그 도구 위에 발을 디디어 서고자 하느냐고. 그러면 다칠 텐데.
어느 누군가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송곳에 잘 적응해서 문제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송곳은 송곳이라서 살면서 한 번쯤은 삐끗할 일이 생긴다.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느낌,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 깊은 구덩이에 잘못 빠진 느낌. 내쳐지는 경험을 인간 모두가 경험한다는 건 참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상황은 다를지언정 괴로운 때의 감각은 아주 잘 아니까.
사람들에겐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론 똑같은 경험이 존재한다. 다만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고, 인정하려 들지 않고, 서로 다르다고 배척하기에 끝없는 경계를 만든 것이지. 이 영화를 보는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실험영화라고 한들 최소한 극영화의 틀은 갖춘 것인지, 레즈비언을 다뤘다고 할 수 있을지,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진 않은지. 취향이고 아니고의 관점에선 평이 갈리겠지만 스스로 되물어 볼 질문이 있지 않나.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찍은 거지?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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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 연출의 일부를 언급하지만,
영화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암전 된 화면에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그런데 러닝타임 내내 내레이션이 이어진다면? 낯설 게 자명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낯선 흐름들이 많아서, 장담컨대 대화는 없고 인물들의 내레이션만 나온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서야 깨달을 거다. 이처럼 비정형성을 띄고 있는 영화이긴 하나 '실험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선 지극히 전형적인 면모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 또한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어느 카테고리에서는 유별나도 또 다른 곳에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럼 결국, 차이랄 게 있나. 객체는 변함없다. 판단의 주체인 우리 개인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지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괴물이고, 마녀이고, 도깨비다.
영진과 재연이 서로를 꽁꽁 숨기며 살아야 하는 것, 함께 살 수 없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아니고. 대다수가 그들을 괴물과 마녀, 도깨비 같은 카테고리를 투과해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머릿수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견고하고도 암묵적인 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이 숨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사람이 이전보다 줄었다고 한들 그들은 여전히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으니까.
두 사람은 구체성을 지녔다. 영진, 이라는 이름과 재연, 이라는 이름. 그리고 둘의 외형으로. 흐릿하고 깨진 이미지들이 시각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해도 인물들이 지워질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끊임없이 발화한다. 자신을 주어로.
액자식 구성과 비슷하다고 할까. 주인공은 두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는 '겨우' 두 사람은 아니다. 이름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알 수 없어서 마치 비존재하는 것 같은 무수한 이들. 다소 남루한 모양새가 동정을 불러일으키질 않고 되레 기이함을 불러오는 이들. 그래. 마녀, 괴물, 도깨비. 그런 것들과 어울릴 것 같은 존재들. 이러한 비존재들은 아무리 모습을 드러내도 세상이 인지하기엔 턱없이 미미해서 구체적인 인물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모든 비존재를 대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건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이다. 일종의 환상이랄지. 모두가 비존재인 건 마찬가지인데 그중 몇몇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자유로이 드러내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어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을 일컫는 카테고리는 바뀌지 않았다. 정말, 이 둘이 자유로웠다면 낙원 찾기에 돌입할 리 없다.
낙원.
그건 어디인가. 유토피아의 다른 말이 아닌가. 상상하면 할수록 아득하게 멀어지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또 다른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주인공은 정체 모를 낙원을 향해 살던 곳을 떠나고 좌절한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꿈같은 공간은 말 그대로 꿈에 그쳤다. 이젠 어디로 향한단 말인가. 그는 습관처럼 어딘지도 모를 앞을 향하려 한다. 이미 거나하게 뒤통수를 맞아놓고도, 습관처럼.
하지만 낙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여길 벗어나 새로운 곳을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새롭게 무언가를 일구고 적응할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 게 분명하다.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곳으로. 그곳은 좋든 싫든 그가 여태껏 살아온 터전이고 집이니까. 낙원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선 몇 천 번의 부서짐을 만날 것이다. 굽이치는 물결이 부서지고, 다시 물결을 만들고, 순식간에 부서지고, 그럼에도 다시 물결을 이루듯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하나의 작은 원을 그리다 보면 또 다른 비존재가 모여들어 조금 더 큰 원을 그리고, 사회 안에 자연스럽게 속한 다른 이들도 손을 잡고. 끝나지 않을 물결이 요동친다.
바다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기엔 물결이 너무나도 큰 시점이 오면, 파도는 더 이상 부서질 일이 없겠지. 꿈에만 그리던 낙원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때를 기약하며 오늘도 파도는 망설임 없이 철썩대며 부딪힌다.
Schedule
2023. 04. 28 / 13:00 (2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3. 04. 30 / 13:30 (335) 메가박스 전주객사 6관
2023. 05. 02 / 21:00 (411) CGV전주고사 4관
2023. 05. 04 / 16:00 (822)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JIFF)- 2023.04.27(목) ~ 2023.05.0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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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3주차 두 번째 최신 씨네뉴스
📮 6월 3주차 두 번째 씨네뉴스가 도착했습니다!
📢CGV, 웹·앱 개편 위해 7월 7일 전국 극장 임시휴업?
CJ CGV는 7월 6일 밤부터 8일 오전까지
차세대 시스템 도입을 위한 웹사이트·앱 이전 작업을
진행 예정이며 임시 휴관일은 7월 7일 월요일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져졌는데요.
하루동안 전국 모든 상영관 운영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
임시 휴업은 영화계에 큰 변수가 될 수도 있겠네요…!
또 한 가지 반가운 소식!
첫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쥡니다.
영화 제작 공동체와 스턴트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여받는다고 하네요.
1981년 데뷔 이후 연기상 후보 세 번,
작품상 후보 한 번 지명됐지만 수상은 없었는데,
🗞️
❶ CGV, 웹·앱 개편 위해 7월 하루 전국 상영관 휴관
❷ ‘톰 크루즈, 생애 첫 오스카 트로피...‘아카데미 공로상’ 받는다
❸ 블룸하우스, ‘쏘우’ 프랜차이즈 권리인수, 제임스 완 복귀 전망
❹ 넷플릭스 시리즈 ’마인드헌터’, 영화 삼부작으로 부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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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X 콩 | 더 크고 화려하지만 특별함을 잃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질라와의 혈투를 끝낸 후 할로우 어스에 남은 콩은 새로운 집을 꾸리고, 사냥을 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공허하다. 그래서 그는 할로우 어스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자기 동족을 애타게 찾아 헤맨다. 한편, 지상 세계에서 동면을 취하던 고질라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나더니 원자력 발전소를 습격해 방사능을 충전하는 등 전투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느 날, 콩과 헤어지고 지상 세계에 남은 이위 족 소녀 '지아'(케일리 호틀)는 할로우 어스로부터 구조 신호를 받기 시작한다. 신호의 발신지를 할로우 어스에 내려간 '아일린'(레베카 홀)과 모나크는 이내 상황을 파악한다. 콩이 찾아낸 동족 스카 킹이 알고 보니 할로우 어스와 지상 세계를 모두 정복하려는 빌런인 것. 이에 콩과 인간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고질라와 팀을 이룰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몬스터버스의 고질병
2014년 가렛 에드워즈의 <고질라>를 시작으로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콩: 스컬 아일랜드>, <고질라 VS. 콩>까지 착실하게 성장한 몬스터버스. MCU를 비롯한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비해 작품이 나오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몬스터버스는 확실한 스타 괴수 둘, 고질라와 콩을 앞세워서 세계관을 키웠다. 작년에는 Apple TV+와 손잡고 드라마 <모나크: 레거시 오브 몬스터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몬스터버스는 인간 캐릭터의 비중과 스토리텔링 문제라는 비판을 거듭 피하지 못했다. 팬들은 괴수들의 싸움을 원한다. 그 싸움을 붙이는 역할은 인간이다. 하지만 정작 도시를 파괴하는 싸움에서 인간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자연히 스토리텔링은 산으로 간다. 그렇다고 인간의 비중을 키울 수도 없다. 자칫하면 변신 로봇의 싸움 대신 로봇 잡는 미군이 나오는 마이클 베이 표 <트랜스포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
몬스터버스의 신작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는 이 고질병을 없애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이 역력한 영화다. 고질라, 콩, 인간 세 파트로 플롯을 나눈 후 공통 모티브를 부여해 통일감을 부여했다. 또 이를 더욱 커지고 화려해진 액션과 세계관으로 포장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모순이 튀어나왔다는 것. 그 결과 <고질라 X 콩>은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버스의 고질병을 고치는 데 실패했다.
가족을 찾는 여정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이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한 치료제는 바로 '가족'과 '집'이다. 영화는 콩, 인간, 고질라의 서사 모두 가족과 집이라는 공통 모티브 하에서 하나로 엮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우선 전작의 끝에서 본래 자기 영역인 할로우 어스에 정착한 콩은 자기 종족을 찾으려는 탐색을 멈추지 않고, 우연히 스카 킹이 지배하는 동족의 왕국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는 인간 쪽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이위 족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콩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지아. 콩을 떠나보낸 후 아일린에게 입양된 그녀는 좀처럼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할로우 어스에서 전송된 전파 신호의 영향력 때문에 환상을 보며 더욱 괴로워한다. 영화는 그런 그녀가 할로우 어스에서 숨어 지내던 이위 족과 재회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각자의 집을 지켜라
가족을 찾은 콩과 지아는 이제 스카 킹을 막아야 한다. 이때 <고질라 X 콩>은 역사적으로 콩이 인간을, 고질라가 지상세계를 보호했다는 설정을 등장시킨다. 그 덕분에 고질라는 스카 킹과의 전투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다. 고질라가 원자력 발전소를 습격하고 다른 타이탄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에도 당위성이 부여된다. 그렇게 콩, 고질라, 인간은 각자의 집을 지키기 위해 팀으로 뭉친다.
물론 이 전개가 매끄럽지는 않다. 이위 족 마을을 찾아내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라 억지스럽고, 흥미롭지 않으니 극의 템포도 늘어진다. 이위 족 묘사는 바깥 세계를 대하는 서양인의 타자적 시선을 답습한 듯한 인상을 준다. 콩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고질라의 분량, 이유를 알기 어려운 모스라의 등장도 문제다. 하지만 전작들의 빈약한 스토리텔링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 자체는 헛되지 않아 보인다.
액션은 만족 3, 실망 7
이처럼 나름대로 착실히 쌓아 올린 토대 위에서 <고질라 X 콩>은 화끈한 액션을 통해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싸움을 묘사한다. 일단 인간이 철저히 조력자와 목격자 역할만 맡은 결과, 액션이 끊기지 않고 시원하게 이어진다. 또 초점을 철저히 괴수들의 전쟁에만 맞춘 덕분에 괴수들의 액션 분량도 상당하다. 후반부 30~40분 정도가 오로지 액션으로 가득한 수준이다. 콩과 고질라의 새 무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팀을 이룬 액션 시퀀스가 눈길을 끈다. 콩은 고질라와, 스카 킹은 시모와 편을 이뤄 혈투를 벌인다. 그간 몬스터버스 작품에서 클라이맥스가 1 대 1 내지는 2 대 1 구도로 이뤄진 것에 비해 경우의 수가 늘어난 셈이다. 어린 유인원 타이탄, 수코가 싸움에 참여하자 3 대 2 구도가 나오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본 작의 액션 구성이나 연출은 전작의 홍콩 시퀀스에 비해서도 더 다양해졌다.
그러나 실망도 적지 않다. 일단 빌런의 역할이 애매하다. 전작에서 메카고질라가 고질라와 콩을 혼자 상대한 것과 달리, 스카 킹은 콩을 상대하기도 벅차한다. 스카 킹의 조력자인 시모 역시 줄줄이 붙은 설정에 비해 고질라만큼의 강력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자연히 전투씬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느슨하다. 이에 더해 스크린이 박을 화면에서 고질라와 시모의 CG가 유독 어색한 나머지 몰입감이 깨지기도 한다.
정체성의 변화가 낳은 모순
이에 더해 특히 고질라의 액션은 이질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브롤터 해협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고, 두 발로 사막을 질주하며, 콩을 상대하면서 프로레슬링 기술을 보여주는 고질라의 모습은 지나치게 사람 같아 보인다. 전작들에서 묵직하고 위엄 있는 액션을 주로 선보였던 고질라와는 차이가 크다.
이는 <고질라 VS. 콩>부터 세계관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솔로 영화 두 편에서 고질라는 지구라는 자연의 힘 그 자체를 상징했다. 그 앞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고질라를 경외했다. 자연히 영화의 분위기도 무겁고, 진중했다.
반면에 이번 영화나 전작 속 고질라는 자연의 힘을 상징화한 존재보다는 하나의 인격체에 가깝다. 구체적으로는 지상과 할로우 어스의 균형을 보호하는 심판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질라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액션 연출과 분위기는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계관의 차원에서는 일관성이 약해지고, 관객 입장에서는 기대와 다른 묘사에 실망하기 쉽다.
세계관 확장이 능사는 아니야
결이 비슷한 문제가 또 있다. <고질라 X 콩>은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 할로우 어스를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정작 할로우 어스에서의 시퀀스는 지상에서의 장면보다 지루하다. 모든 생명체가 거대해진 할로우 어스 공간에서는 콩이든 고질라든 기대되는 스케일과 위압감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 콩이 괴수를 사냥하고 스카 킹의 본거지를 찾는 장면만 보더라도 몬스터버스보다는 <혹성탈출>에 가깝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당장 콜로세움에서 잠을 청하고, 프랑스의 원자력 발전소를 파괴하는 고질라의 모습만 모더라도 할로우 어스의 등장이 몬스터버스의 정체성과 매력 확립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콩과 고질라가 피라미드를 한 손으로 부수는 카이로에서의 액션 시퀀스도 다르지 않다.
결국 몬스터버스의 고질병을 해결하려는 야심 찬 포부와 달리 <고질라 X 콩>은 오히려 더 복합적인 문제만 안겨버린 모양새다. 내실을 다지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결과물이 썩 만족스럽지 않고, 더 크고 화려한 볼거리를 추구하다가 오히려 시리즈 고유의 매력마저 약해져 버렸으니까. 고질라와 콩의 화제성이 뒷받침한 몬스터버스의 미래가 우려되는 신작, <고질라 X 콩>이다.
Poor 형편없음
스케일과 완성도의 반비례는 몬스터버스의 기본 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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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허먼 J. 맹키위츠의 대답
넷플릭스 영화 〈맹크〉(2020)에 따르면, 전설이 된 영화 〈시민 케인〉(1941)은 각본가를 쥐어짜는 할리우드의 '착즙'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거대 영화사는 영화를 공산품처럼 만들고 싶어 하며, 각본가가 그 과정에 기계처럼 녹아들길 바랐다. 한편, 영화는 공산품인 동시에 정치적 선전물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영화사 대표가 상대 후보의 당선이 이주자 유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은 영화와 정치의 구린내 나는 결탁이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착취와 질 낮은 정치와의 결합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영화판에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비단 〈시민 케인〉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영화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보다 더 깊게 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블록버스터 영화, 상업 영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 영화는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가능케 해준다.
〈맹크〉는 이러한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대답이다. 영화사 대표 윌리의 말처럼, 각본가는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 불과하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는 자신이 춤을 추면 사람들이 오르간 연주자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없으면 오르간 연주자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오르간 연주자의 ‘주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정작 원숭이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은 오르간 연주자다. 자신에게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즉 권력과 돈 앞에서 예술가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 각본가 맹크에게 윌리가 건네는 이야기다. 요컨대, 오르간 연주자는 영화사 대표인 자신이고, 맹크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원숭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컷 ⓒ넷플릭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 우화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오르간 연주자가 원숭이를 먹이고 예쁘게 꾸미려면, 춤추는 원숭이에 기꺼이 돈을 내는 관객들이 필요하다. 오르간 연주로만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지만, 춤추는 원숭이가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연주에 돈을 낸다. 결국 오르간 연주자가 계속 오르간 연주자일 수 있는 이유는 원숭이의 존재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저서 《유행의 시대》에서 예술가를 관리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바뀌었음을 비판하긴 하지만, 예술 활동에 있어서 관리행정은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작가 정신’이란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가난한 자유’에서 나온다는 전통적인 예술론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게도 자율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의 조건과 크기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원숭이가 어떤 춤을 추는지에 따라 오르간 연주자의 수입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맹크〉는 〈시민 케인〉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원숭이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영화의 아이러니로 돌아와 보자. 자본이 없으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맡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영화가 구린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산업이 이어질 수 있는 건, 빛나는 영화가 드물게나마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오르간 연주자의 돈으로 밥을 먹는, 춤추는 원숭이 덕분이다. 원숭이의 생존은 연주자에게 달려있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 순간, 원숭이는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 오르간 연주자가 통제할 수 없는 춤을.
원숭이의 자율성이나마 존재하는 한, 빛나는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영화 산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아이러니에 대한 〈맹크〉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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