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3-20 22:06:44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이야기를 써나가기
영화 <그린 나이트>를 보고
<그린 나이트>는 언제 봐도 웃긴 영화다. 영화의 말미 일찍이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무력하게 웃고 만다. 누군가에게는 대서사시나 위대한 성장담으로 읽히는 이 영화를 n차 감상하면서도 매번 웃고 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뤄온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서야 찾아보려 한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험담이자 성장담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그리고 가웨인이 함께 모인다. 모습은 성인이나 아직은 어딘가 그들과 어우러지지 않는 가웨인의 모습. 아서왕은 모임에서 겉돌고 있는 가웨인에게 재밌는 얘기를 한 번 해보라하지만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다 한다. 그때 왕은 영웅담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이밍은 완벽하게 좋고 나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투를 신청하러 온 녹색 기사. 결투에 응할 자를 찾는 녹색 기사에게 대적하는 자는 가웨인이다. 1년 후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라는 주의에도 불구하고 가웨인은 ‘용감하게‘ 녹색 기사의 목을 친다.
그렇게 영웅담은 만들어진다. 인형극으로 재현되고 입소문으로 도는 그의 이야기. ‘소년’에서 ‘남자’, 그리고 ‘기사’가 된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그는 녹색 기사와 다시 대적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 모험은 무척이나 이상한 양태를 띠고 있다. 무언가를 얻는 모험이 아닌, 계속 잃고 잃는 모험. 사실 결말마저 정해져있다. 그는 머리를 잃기 위해, 즉 죽음을 위해 모험을 떠난 것이다.
모험의 과정에서 그는 무엇을 잃는가. 먼저 어머니가 준 사랑의 증표를 잃는다. 그가 떠나기 전 어머니는 그를 지켜줄 물건이라며 녹색 허리띠를 건네준다. 그러나 모험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 무리를 만난 가웨인은 무력하게 그것을 빼앗긴다. 연이어 연인이 건넨 사랑의 증표마저 그는 쉽게 잃는다. 이렇게 잃고 잃는 모험 속에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가웨인을 살린 성주는 묻는다. “이렇게 맞서싸워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이 질문에 가웨인은 질문으로 답한다. “명예요?” 가웨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길을 간다.
모든 여정에 목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떠나는 모험에 목적이 없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녹색 기사를 다시 조우한 가웨인이 숨기고 숨겨온 두려움을 분출했을 때, 웃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 같다. ‘기사’로서의 임무를 다하려는 가웨인은 결국 인간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기사됨‘과 ’남자됨(남성성)‘의 이상향은 인간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인가. 그의 연인 에셀이 말했듯 어리석은 남자들은 꼭 그러다 죽고 만다.
사실 단순히 우습기 짝이 없다고 말하기엔 현재까지도 남성들은 소위 말하는 ‘맨박스’라는 것에 갇혀 산다. 사회학자 래윈 코널은 ‘패권적 남성성’을 한 사회가 이상적인 남성에게 가지는 기대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회적 기대에 있는 힘껏 부응하려는 남성만이 그 사회에서 ‘남성’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사회적 기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그런 조건을 거부하는 남성은 ‘남자로서 불합격인 존재‘가 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남성성‘을 정립하기 위해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라면~“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지금도 말해지며, 그것은 남성들의 인간성과 유약함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드는 제약이 된다. 감독은 그런 스테레오타입들의 우스움을 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녹색 기사를 다시금 조우한 뒤 그가 어떤 성장을 거두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사 하나 없이 이어지는 모종의 압도적인 플래쉬 포워드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가웨인. 그렇게 그는 허울뿐이 ’영웅‘이 되어 돌아갔을 때의 허망한 결말을 떠올리고,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가웨인의 모습은 결의에 차있는 동시에 절망이 느껴진다. 이때, 영화의 초반부 별것도 아닌 일에 아이처럼 웃으며 연인과 장난을 치던 가웨인의 행복한 모습이 겹쳐보였다. 기사가 되고 남자가 되어 남들이 말하는 성장을 거두기 위해 행복을 잃는다면, 그런 성장은 안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한 여자 아이가 등장하여 왕관을 착용한다. 그 순간 최근 관람한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한 청년은 우연히 만난 여자 아이에게 영웅담을 들려준다. 병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상상은 영화적으로 재현되며 시공간을 오간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히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설정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마다 개입하여 이야기의 방향성을 바꾸어놓는다. 이것은 영화의 말미에 아이가 말하듯, ’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강자가 아닌 약자가 중심이 된다 하여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틀에 매이지 않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논한다면, 세상은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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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함으로부터의 구원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더 웨일> 줄거리
처음 시작부터 강렬하다. 우연히 들른 집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찰리의 모습을 본 토마스에게 찰리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 글이 도대체 뭐길래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응급조치가 아닌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일까?
자신의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가 도착하고 나서야 진정된 찰리에게 토마스가 왜 이 글을 읽어달라고 했는지 물었을 때 그 의문이 해결된다.
'이것을 들으며 죽고 싶었다.' 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여기서 죽음을 목도에 둔 찰리를 발견한 토마스를 살펴보자. 토마스는 왜 연고도 없는 찰리의 집 문을 두드린 걸까?
그는 새생명 교단의 선교사이다. 집들을 방문하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려는 다르게 말하면 타인을 '구원'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찰리라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면서도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에세이 하나를 읽어달라고 하는 인물이 말이다. 그래서 찰리는 그를 '구원'해주기로 한다.
하지만 구원에 회의적인 찰리의 태도뿐만 아니라 찰리의 친구인 리즈는 새생명 교단에 적대적이까지 해 그의 구원은 순탄치 않다.
그들의 태도는 언뜻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 같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사연이 있다.
리즈의 오빠이자 찰리의 연인이었던 이는 새생명 교단에 속해 있었지만 내쳐졌고 결국 끝은 죽음이었다. 이런 상황을 봤을 때 오히려 토마스를 반기는 찰리가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리즈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토마스는 계속해서 찰리를 찾아오고, 찰리는 친절하지만 선을 긋는 듯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토마스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찰리의 딸, 엘리이다. 찰리에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인 엘리의 등장은 곧 그에게 ‘구원’이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을 자아내게 만든다.
엘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찰리를 증오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엘리가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찰리는 에세이를 쓸 때 솔직함을 강조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리즈는 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토마스는 사실 교단의 돈을 훔치고 도망친 자신의 의견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모순 투성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솔직함을 가지고 있는 엘리는 파란을 가져온다.
엘리는 끊임없이 찰리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부분을 건드렸고, 종국에는 찰리를 비롯한 리즈, 메리(리즈의 엄마), 토마스까지 파멸로 이끈다. 아니, 이끄는 듯하다.
엘리에 의해 찰리와 다시 만난 메리는 찰리에게 숨기던 엘리의 탈선을 들켜버린다. 또한 리즈는 자신을 속이고 엘리를 위한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엘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토마스의 말을 녹음해 토마스의 부모님과 교단에 보낸다. 이런 행동은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메리는 찰리와의 대면을 통해, 리즈는 실망하여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또 토마스가 흥분한 듯 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도리어 엘리의 솔직한 행동이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찰리의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엘리의 행동을 시작으로 찰리는 각종 외부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온몸으로 받게 된다. 자신이 자주 시키던 피자집의 배달원의 놀라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토마스가 자신에게 구원을 내리기 위해 찰리의 사랑을 부정하다 끝내 숨겨놨던 찰리에 대한 혐오감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자기혐오를 터뜨려 버린다. 자신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지나가는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던 심성을 가진 이었다. 즉, 찰리는 다들 악마라고 하는 엘리의 행동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엘리의 솔직함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이 됐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자신 역시 남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도리어 솔직함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은 찰리는 엘리에게 계속해서 그가 완벽하다 말해주고, 끝끝내 엘리가 읽어주는 엘리 자신이 쓴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들으며 자기혐오를 버리고 엘리에게 직접 걸어감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 영화 속 찰리는 '모비딕' 속 에이허브 선장이 되기도 하고 모비딕이 되기도 한다.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심에 불타는 것처럼 자신(모비딕)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국 엘리가 지신의 에세이 속에서 불쌍하다 평했던 에이허브 선장(찰리)은 결국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모비딕(찰리)에 대한 혐오를 버리며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다. <더 웨일>은 결국 구원은 누구에게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솔직함에서 나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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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사랑 이후 식어버리는 사랑과 이끌림에 대해서 보여주는 영화!
프랑스 파리, 13구의 높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 대만계 프랑스인 에밀리는 파리대학교 정치학부를 나왔지만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카미유라는 흑인 남자가 룸메이트를 찾고 있다면서 다가온다. 첫 만남부터 강렬히 끌렸는지 격렬하게 섹스를 한다. 카미유의 정체는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둘은 같이 사랑을 나누며 지내지만 카미유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으며 에밀리의 집으로 들어와 잠자리를 나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후로 둘의 사이는 멀어지고 헤어진다. 한편 노라라는 여자는 파리대학교 2학년 법학과 학생이다. 그녀는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금색 가발을 쓰고 클럽 파티에 참가하지만 야한 방송을 하는 BJ와 닮았다는 이유로 어느새 소문이 빠르게 퍼져 놀림감이 되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다. 이 사건이 지나 시간이 흐른 후에 에밀리는 부동산 중개 일을 찾으러 간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놀랍게도 에밀리의 전 애인이었던 카미유였다. 둘은 같은 일을 하며 사랑에 빠지지만 마음의 상처가 큰 에밀리는 성관계를 피하려고 하는데...
사랑에 금세 빠지는 '금사빠'들이
보면 좋을 야한 영화!
만남에 강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금방 식어버리기도 하는 게 사랑이란 말인가?
불꽃처럼 강렬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
첫 만남부터 강렬한 사랑을 나눈 에밀리와 카미유는 어느샌가 식어버린 사랑을 하게 된다. 사실 카미유가 바람둥이였으며 그런 모습에 분노한 에밀리였기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강한 이끌림도 없어진다. 이 둘은 헤어지면서 전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려 각자의 길을 간다. 사실은 에밀리도 다른 남자들을 찾으며 원나잇을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듯이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와 섹스를 하고 마약을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카미유는 자신의 직장 여자 동료와 섹스를 하고 있었으며 신음 소리가 너무나 커서인지 귀를 막는다. 룸메이트였던 카미유가 떠나자 에밀리는 중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며 원나잇을 목적으로 하는 남자들과 만난다. 시간이 지나고 카미유 또한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마음속에 상처를 담아둔 노라를 만나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은 헤어진다. 이들이 나눈 불꽃처럼 강렬한 사랑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보여주며 쾌락을 위해 하게 된 섹스는 오래가는 사랑이 아닌 잠시뿐인 사랑이란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강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사랑을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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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늘 먹던 딥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뭐라고 쓰지? 고민했다. 갑자기 지갑과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생각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은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전화기는 근처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여긴 없다. 내가 지금 앉은 책상이 유리로 된 책상이 있고 아래에 투명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손을 슬쩍 넣었다. 역시 없다. 뭐지? 갑자기 오싹해졌다. 가방에 있나? 가방에 손을 슬쩍 넣었더니 여기에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어쩌지. 근처의 가방을 다른 의자로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전화기와 지갑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놨고, 그 기계에 가려져서 못 찾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인 것 같아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갑자기 상상에 빠졌다. 만약 누가 훔쳐간 거라면? 지금 앉아있는 자리 위치상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나를 굳이 찾아오는 게 아닌 한 내 걸 가져가기는 어렵다. 그래도 만약에 어린, 한 7살쯤 되는 애가 내 걸 훔쳐갔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생각난다. 소매치기 같은 범죄가 어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쁜 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경찰서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리다고 봐주고 이런 것 없이 처벌받게 했을 것 같다. 그게 그 애한테도 좋은 거고. 나 자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하지. 나는 저 애의 도둑질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에 뉴스를 볼 때에도 이어진다. 내가 강박장애가 있어도 돈을 훔치고 싶은 강박에 시달렸던 적은 없다. 비슷한 느낌으로 '저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다. 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소년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년원 제도가 그렇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도덕관념과 나이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런 나에게, 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넷플릭스가 드라마 한 편을 가져왔다. 과연 소년범죄의 해답이 강한 처벌에만 있을까. 넷플릭스로 가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한 판사가 있다. 이 판사는 소년범죄에서 일하는 판사다. 판사는 연화 지방법원이란 곳에 발령받는다. 판사는 자기의 후임을 확인한다. 마음 따뜻해 보이는 남자 판사와 아래 직원들이 있다. 근무 첫날. 소년범죄 전과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식당의 손님이 지갑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판사는 전부터 표현하고 있던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며, 일행이었던 한 여자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적당히 타이르고 이해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아이의 도둑질을 들춰내 망신을 준다.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런 사람이다. 온정도, 따뜻함도 없는 그런 법관이다.
드라마는 이 심 판사에 대한 인물 제시를 베이스로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이 것이다. 토막살인사건, 고등학교 시험지 유출 사건, 집단성폭행 등을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 소년범죄의 이면을 다룬다. 아.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부 소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소년범센터도 드라마에 담겨있다. 그러니까 소년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자가 얼마나 잔혹하냐가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물론 폭력 수위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소년범죄가 어떻게 일어나고, 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처분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로 나서는지도 묘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소년범을 싫어한 것 같다. 강박장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묘사 하나만으로도 무슨 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살인귀가 된다는 식의 인식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이 그런 폭력적인 수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폭력성과 내면의 아픔이 무조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리다고, 정신질환자라고 봐주고 이런 게 좀 맘에 안 들었다. 나 역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 가령 나 역시 '시험지 유출 범죄'에 노출될 뻔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 절대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게 맞고 피해자는 엄벌에 처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를 위시한 명문대 지상주의를 만든 쪽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범죄에 기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다. 나 역시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던 사람일까 봐. 그런 마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지금의 10대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미친 세상에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년심판은 이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응당한 처벌만을 핵심 키워드로 삼지 않는다. 나름의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두세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소년법을 소재로 다뤘습니다. 소년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폭력의 수위를 미화해 무조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년범 센터를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중간에 센터장과 10대 아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1) 아이들이 먼저 심한 말과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2) 센터장의 폭언과 푸대접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대립하는데, 이 경우를 둘 다 상황 극화시켜 제시한다. 난 이게 분명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연출자가 일단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이 두 가지 논쟁에서 '어느 게 옳은가'를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실제로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 좀 화가 났다. 이렇게 한쪽의 시선만을 제시하는 연출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에 집단성 범죄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 성범죄 용의자가 피해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신이 있는데, 아이패드에다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범죄자들의 악성을 묘사하는 데는 가감이 없었고 이들의 범죄행각에 처벌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무조건 미화하는 듯한 태도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
4. 폭력의 수위는 어떠한가요?
성범죄 묘사가 있다. 또 학교폭력 묘사가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10대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묘사는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쓸데없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이러지는 않다. 적당히 화나고 적당히 거부감이 있다.
5.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3번에서 쓴 부분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균형감각이다. 드라마는 쉽게 편을 들지 않는다. 즉 무작정 소년들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쓰지 않았다. 이와 반대급부로 무조건적인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들에게 과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교화의 효과가 어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녹아내리며 탄탄한 극본의 힘을 보여준다.
다른 장점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우다. 소년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화가 여전히 날만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이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해서 사려 깊은 묘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도 않고 외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거부감이 들어 화가 나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떠난 이들에게 억지 신파를 주입시키지 않고도 감정이입을 하게 해 주니 난 이 정도면 좋은 시각으로 이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주인공 심은석의 입체성은 어느 정도 생각하기 쉬웠지만 차태석-나근희-강원중 캐릭터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분들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적으로 극을 위해 희생당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존재 이유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심은석 역은 김혜수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또 입에 욕을 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김무열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선했다. 또 이성민 배우는 찐 50대 가장의 잔소리 톤이 나와서 놀랐다. 그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정은 배우다. 이정은 배우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분의 다른 특성에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조연진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알 염혜란-이상희-이석형-유재명-이봄-심 달기 등 짱짱한 배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덧붙인다.
6. 이해가 어려운 작품은 아닌가요?
아니오.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7.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드라마에서 이성민 배우가 맡은 강원중이 이런 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법이 아냐. 시스템이지." 또 이정은 배우가 맡은 나근희 역이 이런 대사를 한다. "소년법은 스피드예요." 이 두 가지 대사는 상충한다. (드라마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사려 깊은 성찰 없이 교화 명령을 내리거나 강한 처벌을 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게 능사일까? 교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많은 것을 염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극 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다른 나라에서의 예를 들며 소년범죄의 강한 처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또 징역 15년 받고 다시 사회에 나온 전과자가 다른 범죄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나?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의 대물림과 범죄자들에게 냉담한 시선이 또 다른 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내는 분노 이면에 깔려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소년범죄자는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절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이기도 하고, 어리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교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있는 부모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적절한 교육이 없다고 누구는 범죄 저지르기가 쉽다면 그게 100% 그들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이 두 가지의 처지가 절대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설득력 있게. 말과 글로는 이렇게나 쉽지만 시각이 트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탁월한 깊이로 관객들에게 도움을 준다.
뉴스로 접하는 강력범죄는 전체 소년 범죄 중 1% 정도라고 해요. 그런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심은석 역의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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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만 반드시 도착하는 진심.
이 글은 영화 [시라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늘 자격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과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묻고 또 묻는다.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끝없는 공방의 법정에 하루에도 몇천번을 출석해보지만.판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고개 숙인 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처참한 형벌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에게도 이런 마음의 지옥은 존재했다.
록산.
시라노의 남루한 외모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를 부끄럽게 했다.
마음을 담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시라노를,배심원인 조 라이트 감독은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하다.
이미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랑의 표현에 정통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이번 영화 [시라노]에서도 마음껏 발산했다.
사랑을 닮은 음악으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가면, 꼭두각시.;언제나 가짜는 매력이 없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을 비춘다.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가장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록산(헤일리 베넷)의 사랑을 위해 가면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캘빈 해리스 주니어)은 시라노(피터 딘클리지)의 글 솜씨라는 가면을 빌려 쓰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통해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을 전달한다.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혹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게 해주는 가면이기에 두 남자는 이 가짜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를. 그래서 록산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록산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원했다. 그녀는 편지에 빼곡히 적힌 자신을 향한 미문을 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녀의 이 마음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사랑이 허울뿐임을. 시라노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대사를 읊는 것에 급급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아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의 존재감은 딱 거기까지다. 꼭두각시인데다 가면까지 쓴. 꼭두각시는 그렇게도 매력이 없기에,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대사의 전달력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 크리스티앙의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될 수록, 시라노의 눈빛과 마음을 담은 그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며. 그 진가는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사랑 앞에선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전달되는 것임을.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조 라이트 감독에게 특기가 있다면?;상실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모든 감독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특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 라이트 감독의 그것은 아마 상실과 단절, 혹은 닿을 수 없음에 대해 표현하는 능력일 것이다.
감독은 늘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절벽 앞에서 절규하기보다 절제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기를 선택했고. 이 모든 절제 미는 영화 속의 대사나 배우들의 눈빛(연기)에서 증폭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배우들이 결국은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다.
관객들은 배우의 눈빛을 보며 이 복잡하고 생략된 마음 덩어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자신의 감정 그릇에 담긴 모두를 쏟아붓듯이 사용해야만 한다. 관객마저도 마음의 상실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때. 영화는 다시 사랑의 애틋함과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쓰라릴 것만 같던 마음을 꽉꽉 채운다.
영화 [시라노]가 뮤지컬 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춤이 승무(僧舞)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배우들의 춤사위는 사랑의 아픔으로 공허해진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하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이 록산을 해할까 싶어, 허공을 통해 뻗는 손길들 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려, 몇 번이고 이를 깨물어야만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본능에 가깝고 날이 서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음의 모든 벽이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해진다.
가슴에 담은 진심의 무게를 그 어떤 형태의 좌절 앞에서도 전달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능력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편지의 역할.;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자격.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실질적으로) 시라노가 록산에게 쓰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라는 말 외엔 그 어떤 합당한 말도 어울리지 않을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편지를 써야만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속에 너무 오래 묵혀놓아 이끼가 끼어버린 진심을 돌아봐야 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종이를 채우기 위해. 숱한 단어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마음속으로 골라내는 시간 역시 가져야 했다. 한참이고 고르고 또 고르다가. 상대를 생각하며 까맣게 타들어가 힘 없이 풀썩 내려앉은 감정의 숯검댕이들 중 하나를 겨우 손에 골라 쥐고서.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꾹꾹 써내렸다.
편지는 자신의 마음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큼의 파급력을 지녔지만,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전해야 할 진심이 단 하나임을 편지의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크리스티앙만큼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록산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은 셈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심을 육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에. 록산과 물리적으로 멀어져 전쟁터로 간 지금, 크리스티앙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닿을 리 만무하다. 단 한발로 크리스티앙을 영원히 잠들게 한 총성이 록산에게 더 잘 와닿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사실 영화에서 진심을 상징하는 편지가 달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치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어톤먼트]에서부터 닿지 않고 왜곡되었던 진실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비록 영화의 말미이긴 하지만 와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진실을 내뱉는 순간. 나는 마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진실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이랬노라고.
결국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뒤집어내 록산에게 바친 시라노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리고 시라노는. 어쩌면 감독까지도 고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결말이었다.
마치면서
내게 이번 영화는 [어톤먼트]의 변주 정도로 느껴졌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공식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장치들도 제법 보인다. (물론 원작을 읽은 자의 슈퍼 오지랖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라노]는 마치 감독이 호스트가 된 티타임과 같았다.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내내 마음 안에서 감독이 직접 고른 차가 천천히 향과 색을 내며 짙어져 갔다. 차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고. 호스트가 내어온 모든 장면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가 정성껏 우려준 차 한 잔은 집으로 가는 추운 날씨에 홀짝이기에 딱 알맞았으니. 다음 티타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 글의 TMI]
1. 피터 딘클리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임.
2. 그의 연기를 거론하기도 입 아파서 뺀 것임.
3. 원작도 재미있음.
4. 리뷰 잘 안 써져서 여섯 번 갈아엎음.
카카오뷰도 있어요+_+
#시라노 #조라이트 #피터딘클리지 #헤일리베넷 #켈빈해리슨주니어 #영화리뷰 #최신영화 #영화추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영화리뷰어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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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욱한 안갯속을 부유하는 눅진한 에로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구소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성의 사망 사건을 담당한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탕웨이)'를 만난 후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중국인이라서 말이 서툴기는 하나,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하는 등 서래가 남편의 사망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단순한 유가족이 아닌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된 서래. 그러나 해준은 사건 당일 서래의 알리바이를 파악하고, 잠복수사를 통해 그녀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며, 그녀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후 그녀에게 더욱 빠져든다. 반면에 해준의 관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서래는 그를 이용하는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좀처럼 속을 알려 주지 않는다. 이렇게 진심과 의심 사이를 오가는 두 남녀의 관계는 조금씩 불이 붙는다. 서래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보통 직선적이고 직설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곤 했다.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정인 복수심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복수가 주제가 아니어도 다르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장편 작품인 <아가씨>는 그녀들의 사랑을 가슴에 날아와 꽂히듯 강렬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선사한 영화 <헤어질 결심>은 다르다. '헤어질 결심'이란 제목만 봐도 그렇다. 제목만 놓고 보면 도통 헤어지겠다는 것이지, 헤어진 것인지, 헤어지는 중인 전지 그 의미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 영화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 없는 드레스만큼이나, 바다에 핸드폰을 던지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사진만큼이나, 영화는 눅진하고 갑갑한 안갯속을 헤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불륜 멜로는 해준과 서래 사이의 에로스를 맞춰나가는 묘미로 가득하다.
<헤어질 결심>은 모호하다. 영화의 장르와 구조부터 그렇다. 얼핏 보기에는 스릴러 혹은 범죄 영화이나, 정작 서래의 신분이 유가족이 아닌 용의자로 바뀌는 순간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진한 멜로로 급변한다.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누아르 영화와 진한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줄을 타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실제로 해준과 서래의 대화는 취조이면서 동시에 소개팅처럼도 보인다. 서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대해 정보를 알려주고, 서로에게 한 발짝씩 더 나아간다.
서래를 감시하는 해준의 시선도 그렇다. 그는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그녀를 감시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지켜보는 것은 범죄 용의점이 아니다. 그는 그녀가 슬퍼하거나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을 걱정하고, 홀로 드라마를 보다가 잠드는 상황을 동정하며, 그녀가 간병인으로서 할머니를 극진히 간병하는 모습에 빠져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관음적인 시선이고, 또 한편으로는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겨누는 듯 보이기도 한다. 서래 역시 범죄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해준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취조실에서 고급 초밥을 함께 나눠먹는 둘의 모습에서는 형사와 용의자 간의 관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의 다른 장치들도 둘의 관계를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는다. 언어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중국인인 서래는 기본적인 한국어만 구사하기에 일상어가 아닌 '유일한'과 같은 어휘는 '단일한'이라고 말하며,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중국어로 말하고, 그들은 진정으로 소통이 필요할 때 스마트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 화자인 서래의 말이 번역기를 거치면 부자연스러운 남성의 목소리로 변환되듯, 그들의 소통도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마찬가지로 취조실 안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서로 다른 공간에 가둔다.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이라 해도 꼭 한 명을 창문에 반사시키거나 모니터 안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면서 둘 사이의 연속성을 깬다. 이러한 어긋남은 서래가 범죄 혐의를 벗기 위해 해준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지, 또 후자라면 그들의 사랑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두고 의심을 거듭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호함은 1막 이후 2막에서도 유지된다. 녹색과 파란색을 오가는 서래의 드레스와 도시를 감싼 안개는 여전히 사랑하는지, 이별한 건지, 단념한 건지 알 수 없는 두 남녀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정훈희의 노래 '안개'도 분위기를 고조한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가사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또 막상 벗어나자니 그렇게 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을 안개에 빗대고 있다. 덕분에 안개가 자욱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형사와 용의자이자 동시에 남자와 여자인 둘의 눅진한 이야기는 좀처럼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결심>이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히 해준과 서래의 관계를 헷갈리게 만들면서도 박찬욱 감독다운 방식으로 관객을 그들의 눅진한 멜로 속에 초대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 중심에는 에로스가 있다. 사실 폭력성 외에 박찬욱 감독을 대표하는 특징이라면 전작인 <아가씨>에서 보듯이 섹슈얼리티를 꼽을 수 있을 텐데, <헤어질 결심>에서는 성애적 요소가 명시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야하게 보이는 대목들은 적잖이 있다. 서래의 DNA를 채취하는 장면부터 그녀가 양치하고 흡연하고 손에 붙 밴드를 입으로 부는 장면들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계속해서 서래의 입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면 입과 관련된 성은 성애의 첫 단계(구강기)를 의미한다. 이를 고려하면 해준과 서래가 에로스적 관계로 얽혀 들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에로스적 욕동은 다른 방식으로도 표출된다. 해준과 서래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부족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모습에서도 입은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서래의 집을 감시하는 해준은 그녀가 좀처럼 밥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매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하는 그녀를 걱정하는 해준. 이에 그는 취조실에서 비싼 초밥을 사주고, 중국식 볶음밥을 요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한다. 한편 해준은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서래를 감시할 때 그는 승용차 안에 누워 있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을 잔다. 또 관계가 진전되어가면서 서래는 해준의 수면을 도와주며, 해준이 잠들 때까지 자신과 호흡을 일치시키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이때 영화는 아이스크림과 초밥을 먹는 서래의 입,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두 사람의 입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에로스적 관계는 왜 이들이 제각기 붕괴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에로스적 욕동이 가족을 이루고 사회와 문명을 이루는 기반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적 질서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할 수 있고, 개개인도 에로스를 탐닉하면 본인이 문명과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면에서 에로스적 욕동은 인간에게 내재된 자기 파괴적인 욕망인 타나토스(죽음)적 욕동과 쌍을 이루기도 한다. 해준은 서래가 남편 사체 사진을 보겠다고 말할 때 동질감을 품고, 그래서 그녀에 대한 수사는 유리하게 진행된다. 이는 죽은 자(남편)의 시선으로 망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질 이를 응시하는 카메라 시점이 독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그들을 의무로 규정된 사회적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창구이자, 동시에 깊어질수록 그들을 파괴하는 부메랑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해준은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내와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던 중 서래를 떠올린다. 애정 없는 관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구해낼 방법을 찾는 데 성공한다. 또 그녀의 도움을 받아 오랜 기간 추적하던 범인을 잡는 데 성공하면서 경찰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데도 성공한다. 한편 서래에게도 해준과의 사랑이 진전되는 것은 자신의 이니셜을 그녀에게 새겨놓을 정도로 소유욕이 강했던 남편과의 강압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그들의 욕구는 커질수록 그들에게 또 다른 압력을 강한다. 프시케를 곤경에 빠뜨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화살에 찔려버린 에로스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 서래를 사랑한 해준은 경찰로서 하면 안 될 실수를 범하고, 성실한 경찰인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범죄자인 그녀의 죄를 밝히면 안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서래도 마찬가지다. 해준이 자신을 포기하려 하자 오히려 더 사랑에 빠져버린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그를 쫓을 정도로, 경찰인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헤어질 결심>은 내용이나 연출적 특징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인 영화이고, 그래서 여운이 짙은 작품이기도 하다. 서래의 범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범죄와 얽힌 에로스적 관계는 해준과 서래 모두를 마지막까지 위협해 온다. 그러자 그들은 자의와 타의가 혼재된 채로 불륜이라는 범주 안에 머무르기를 택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보호하며, 결국 이는 강렬한 신파로 향한다. 많은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이 사랑의 타이밍은 언제나 엇갈리기 마련이고, 상대를 소유하려 하기보다는 놓아줄 때 진정으로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 하니 당신이 나를 떠나네”라는 대사에 온전히 담겨 있다.
심지어 <헤어질 결심>의 신파는 뻔하지만 식상하지 않다. 1부와 2부, 산과 바다로 나뉘는 영화의 구성 덕분이다. 영화는 두 개로 쪼개져서 해준의 서래에 대한 사랑과 서래의 해준에 대한 사랑을 각기 맛보게 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사랑의 엇갈림마저도 하나의 영화적 장치로 활용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앞부분에서는 서래의 살인사건을 미결로 놔두어야 하는 해준의 사랑을, 뒷부분에서는 자신의 살인 사건을 미결로 만들어야 하는 서래의 사랑을 풀어낸다. 두 개의 미결 사건은 하나의 영화가 되어 그들의 관계를, 엇갈리고 빗나간 사랑까지도 서사적 완결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대조적인 장소나 소재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구소산 정상에서는 남편을 떠밀어 살해하지만 호미산에서는 해준을 뒤에서 안아주는 서래. 서래가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증거를 담은 핸드폰을 건네는 해준과 그 핸드폰 대신 본인을 바다에 던져 증거를 인멸하는 서래. 그래서 <헤어질 결심>의 신파는 오히려 매력적이다.
단지 138분이라는 적지 않은 러닝타임에서 기인한 느슨함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이다. 영화는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사실 분기점에서 영화는 이미 절정에 다다르는 듯 느껴진다. 자신의 본심과 진실을 깨달은 해준이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어떤 말보다 격렬한 사랑 고백을 한 순간 영화는 거의 끝에 도달한 듯 보인다. 1막에 꽤나 긴 분량이 주어졌기에 더욱 그렇다. 그 결과 산을 테마로 한 1막이 끝나고 바다를 테마로 하는 2막이 다시 시작될 때, 후일담처럼 느껴지는 2막에서 이야기가 다시 한번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영화의 템포는 다소 느슨해지는 인상이 남는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밝힌 대로, 그리고 전작인 <아가씨>처럼 1막을 '산', 2막을 '바다'라고 자막으로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다만 영화 자체가 안개에 싸인 듯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짜인 모호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아쉬움조차도 <헤어질 결심>의 질감과 감정선을 더 완벽하게 만드는 듯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로남불이라는 명제에 담긴 감정을 완벽에 가깝게 영화적으로 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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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1980년대 한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감독: 정이삭
프로듀서: 크리스티나 오,디디 가드너,제레미 클라이너
출연진: 스티븐 연,한예리,앨런 김,노엘 조,윤여정
시놉시스
제이콥과 모니카는 아들인 데이빗과 딸인 앤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로 이사 오게 된다. 제이콥은 아내인 모니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행에서 무리하게 대출금을 끌어당겨 아칸소에 있는 농지를 사들였고 그곳에서 큰 농장을 만들려는 목표를 세운다. 모니카에게 있어 불편한 건 자신의 아들 데이빗이 심장병을 앓고 있어 병원까지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바퀴 달린 허름한 트레일러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반면에 데이빗은 아버지인 제이콥의 말을 잘 따르고 씩씩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자 데이빗과 앤은 내심 불편해한다. 그건 바로 자신들이 기대했던 할머니와의 모습과는 딴판이라는 것이다. 데이빗은 할머니인 순자에게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연 데이빗과 앤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어떤 존재이게 될까?
데이빗이 기대한 순자의 모습은 쿠키를 구워주고 욕설을 쓰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깨부순 순자는 손자인 데이빗에게 화투를 선물하고 험한 말을 쓰며 쓴 한약을 먹인다. 그래서 데이빗은 오히려 순자가 오는 걸 반대했고 아빠인 제이콥과 엄마인 모니카가 더 싸우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손자인 데이빗을 무척 아낀다는 걸 몸소 표현해 줬고 데이빗은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순자가 뇌졸중에 걸리고 난 후에 조금은 알게 된다.
한편 제이콥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오직 한국 품종의 씨드로만 고집했고 가족들이 물이 안 나와 불편한데도 상수도에 있는 물을 농사에다 무리하게 썼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적인 목표를 펼치려고 하는 제이콥과 달리 모니카는 가족을 위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걸 원했기에 둘의 사이는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어 미국으로 이민 온 제이콥과 모니카는 서로에게 도움이 돼주려고 했으나 무리한 빚을 안고 살아왔고 먹고살기 위해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을 해왔다. 빡빡한 한국 이민자의 삶은 쉽지가 않았고 아메리칸 드림은 힘들어진다.
이 영화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한 한국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삶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병아리를 감별할 때 수컷 병아리는 폐기하고 암컷 병아리는 쓰일 데가 많아 폐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면서 데이빗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쓸모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
영화 미나리를 보고서 필자는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쓸모 있다는 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매긴 걸까? 병아리를 감별하는 것처럼 사람도 감별되어 폐기되거나 쓸모 있게 되는 존재로 전략하고 만다. 오늘날에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사는 거는 과연 쓸모의 여지일지 생각해 봐야 된다.
병아리를 감별해 쓸모 있는 것과 폐기되는 것이 있다는 게 나름 놀라기도 했다.
2023. 10.06 (금) 20:00 영화의전당 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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