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5-11 23:30:54
강렬한 사랑 이후 식어버리는 사랑과 이끌림에 대해서 보여주는 영화!
<파리, 13구> 영화 시사회 후기
프랑스 파리, 13구의 높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 대만계 프랑스인 에밀리는 파리대학교 정치학부를 나왔지만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카미유라는 흑인 남자가 룸메이트를 찾고 있다면서 다가온다. 첫 만남부터 강렬히 끌렸는지 격렬하게 섹스를 한다. 카미유의 정체는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둘은 같이 사랑을 나누며 지내지만 카미유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으며 에밀리의 집으로 들어와 잠자리를 나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후로 둘의 사이는 멀어지고 헤어진다. 한편 노라라는 여자는 파리대학교 2학년 법학과 학생이다. 그녀는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금색 가발을 쓰고 클럽 파티에 참가하지만 야한 방송을 하는 BJ와 닮았다는 이유로 어느새 소문이 빠르게 퍼져 놀림감이 되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다. 이 사건이 지나 시간이 흐른 후에 에밀리는 부동산 중개 일을 찾으러 간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놀랍게도 에밀리의 전 애인이었던 카미유였다. 둘은 같은 일을 하며 사랑에 빠지지만 마음의 상처가 큰 에밀리는 성관계를 피하려고 하는데...
사랑에 금세 빠지는 '금사빠'들이
보면 좋을 야한 영화!
만남에 강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금방 식어버리기도 하는 게 사랑이란 말인가?
불꽃처럼 강렬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
첫 만남부터 강렬한 사랑을 나눈 에밀리와 카미유는 어느샌가 식어버린 사랑을 하게 된다. 사실 카미유가 바람둥이였으며 그런 모습에 분노한 에밀리였기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강한 이끌림도 없어진다. 이 둘은 헤어지면서 전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려 각자의 길을 간다. 사실은 에밀리도 다른 남자들을 찾으며 원나잇을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듯이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와 섹스를 하고 마약을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카미유는 자신의 직장 여자 동료와 섹스를 하고 있었으며 신음 소리가 너무나 커서인지 귀를 막는다. 룸메이트였던 카미유가 떠나자 에밀리는 중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며 원나잇을 목적으로 하는 남자들과 만난다. 시간이 지나고 카미유 또한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마음속에 상처를 담아둔 노라를 만나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은 헤어진다. 이들이 나눈 불꽃처럼 강렬한 사랑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보여주며 쾌락을 위해 하게 된 섹스는 오래가는 사랑이 아닌 잠시뿐인 사랑이란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강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사랑을 해버린다.
Relative contents
-
- 뿌리 없는 존재들의 콘크리트
SYNOPSIS.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어느 날.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더 자신의 설계에 집착하던 ‘라즐로’.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에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결국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데...
발 디딜 곳 없는, 소속이 불분명한 삶의 연대기 트라우마가 예술로 승화된다!
POINT.
✔️ 영화의 배경이 된 1950년대 영화처럼 비스타비전 화면비를 자랑하고, 오프닝과 엔딩에서 평소와 다른 결로 흐르는 크레디트를 볼 수 있습니다.
✔️ 서막-1막-인터미션-2막-에필로그의 구성. 215분의 긴 러닝타임이지만 인터미션까지 찬찬히 바라보게 합니다.
✔️ 거기에는 이 영화의 걸출한 음악이 일조합니다.
✔️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 납득이 가는 수상입니다. 비록 발음이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AI의 도움을 받았다는 논란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말이에요.
✔️ 영화 바깥 작금의 미국과 유대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더욱 공허하게 아름다운 영화로 느껴집니다.
소설 <GV 빌런 고태경>에는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8년에 걸쳐 공들여 만든, 기적이 아닐 리 없는 이 영화를 보며 건축업자의 딸은 생각했다. "모든 (미)완성된 건축도 기적이구나..." 라즐로 토스 같은 예술적인 건축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래서 가능했던) 그간 그가 지어올린 모든 건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절로 갖게 됐다. 영화도 건축도, 누군가의 설계도에서 시작하지만 그 설계도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과 자본이 연결되어 있는 작업이고, 중간에 좌초되기도 쉬운 만큼 어렵사리 완성된다. 그렇다면 대놓고 건축의 도식에 맞추어 쌓아 올린 이 영화는, 어쩌면 이중의 기적이 아닐까.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분한 한 남자가 배에서 내린다. 바우하우스 출신에, 내로라 하는 프로젝트를 몇 개나 진행한 걸출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 그가 미국에 당도하는 순간은 어둡고 축축하고 어지럽다. 웅장한 관악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서곡'을 따라,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그리고 편지 속 에르제벳의 목소리가 해설처럼 덧붙인다. "None are more hopelessly enslaved than those who falsely believe they are free." 자유롭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라는. 그렇다면 이 "자유의 나라"는 정말 자유의 나라인가.
뿌리 없는 존재들은 자유로운가
이내 그는 흩날린다. 뿌리 없는 이름과 있지도 않은 아들과 (그들 입장에서) 이교의 아내까지 맞아들여 '미국식' 가족을 꾸린 사촌의 가게 구석 창고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려다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말만 듣고 쫓겨난 일터에서... 자유의 나라는 라즐로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라즐로의 작업물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명성을 얻게 된 서재 주인 밴 뷰런이 라즐로를 찾아오고, 객관적인 그의 상황은 상승세를 탄다. 그러나 라즐로를 잘 아는 에르제벳이 금방 간파하듯, 그는 일 안에서 미쳐가고 있다. 더 정확히는 일 때문이라기보다 일을 수단 삼아 "그를 벌레 보듯 하는" 나라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막연한 희망 속에서 미국에 갓 도착했을 때보다,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는 지금 더더욱. 뒤집힌 땅에서 뿌리가 자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뿌리가 없다는 건 뭘까. 영화에서 공교롭게도 엄마 잃은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엄마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는 대놓고 엄마 잃은 존재 셋이 나온다. 어머니와의 일화를 라즐로에게 이야기하는 밴 뷰런, 어머니 없이 숙모 에르제벳과 함께 여기까지 온 조피아, 그리고 고든의 어린 아들. 이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뿌리 없는 삶에 응전한다.
#1. 밴 뷰런: 뿌리 대신 이파리로
밴 뷰런은 부실한 뿌리를 풍성한 이파리로 승부 보려는 존재다. 이파리처럼 돈을 뿌려대며 자본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다. 다만 그는 돈 외의 다른 수단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가 라즐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뒤에 나올 장면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스스로가 여성 혐오자임을 알지 못하는 여성 혐오자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지금 아주 미쳐 있네 저러다 잘하면 키스하겠네... 싶을 만큼 라즐로를 가까이하고 애정을 퍼붓는 듯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라즐로와 작업물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뒤엉킨 자기애에 가까운 마음으로 보여서였다.
라즐로에게 찬사를 늘어놓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쉽게 탓하는, 투박하고 (부정적 의미로) 감정적인 반응. 라즐로에게 범죄를 저지를 때 내뱉는 문장을 보면 라즐로라는 개인보다 상대를 집단화해 기괴한 일반화하는 비약. 여성과 깊은 관계이고 싶은 마음과, 그 깊이까지 차곡차곡 도달하기에는 게으른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의) 여성 탓이라고 손쉽게 문제를 전가하는 일부 남성들과 같은 태도다. 생각해 보면 (상처가 있다는 점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조부모를 대한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건축을 향한 태도는 최악이다. 애당초 기획을 해놓고 중간에 돈 때문에 엎을 거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요 이 양반아. 마구 이파리를처럼 돈을 날리지만 잘 날리는 것 같지도 않다.
#2. 조피아: 뿌리 끝까지 어떻게든
반면 조피아는 그 없는 뿌리에 천착하며, 뿌리 끝을 찾아 어떻게든 떠나는 존재이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조피아의 첫 대사는 이스라엘로 가겠다는 선언이며, 반신불수의 몸이 된 라즐로를 대신해 그의 건축물을 해설하는 엔딩에서의 확신에 찬 대사들 또한 라즐로의 건축을 유대인의 정체성 안에 꽁꽁 묶어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실제 라즐로의 삶은 아주 경건한 유대인의 삶도 아니었으며 (그는 유대인 예배당에 계속 나가기는 하지만 그의 삶이 신앙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여러 번 창부를 찾고, 의료적 도움 이상으로 약물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완으로 남은 콘크리트 건축물 또한 밴 뷰런의 자본과 라즐로의 실력 그리고 뿌리 없이 흩날린 시절의 상처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공허하게 지어진 건축물은 조피아의 해설 속에서 유대인의 정체성 하나만으로 뭉뚱그려져 거의 황금 궁전처럼 힘차게 묘사된다.
#이파리와 뿌리 끝의 우로보로스
이런 둘의 태도는 얼핏 반대처럼 보이지만, 뿌리 끝과 이파리는 의외로 마치 우로보로스의 머리와 꼬리처럼 결착된다. 마치 자본 만능주의가 팽배한 미국 그리고 시오니즘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의 결착처럼. 이는 영화 바깥에서 "미국이 가자지구를 가질 권리가 있다"며, 가자지구를 장악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 다음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네타냐후는 웃고 있었다. 이 발언으로 인해 사람들은 가자지구의 (가뜩이나 불안했던) 휴전 가능성을 더욱 낮게 점치기 시작했고, 실제로 휴전 두 달 남짓 만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공습을 재개했다. 4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역시나 "트럼프가 여지를 주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공교로운 지점은 이곳이다. 영화는 한 사회의 토착민 사이에서 벌레 취급을 받은 이민자가 또 우뚝 서서 체제를 찬양하는 모습을 이어 붙임으로써 결착된 폭력의 고리를 포착하고자 한다. 미국 사회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고 폭력을 경험한 (듯한) 조피아가 시오니즘을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밴 뷰런'이라는 이름도 네덜란드계 이름 즉 이민자의 후손일 수밖에 없는 이름임을 깨닫게 된다. (미국의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의 이름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 폭력의 고리에서 미끄러진 존재들이 있다. 역시나 엄마 없는 존재들이다.
#3. 라즐로 토스: 사라진 뿌리
약간의 비약을 가하자면,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결혼식 사진에는 엄마로 추정할 수 있는 나이대의 여성이 전혀 없다. 라즐로는 폭력의 고리에서 미끄러진 정도가 아니라, 그 고리에 납작하게 깔린다. 그가 밴 뷰런에게 폭력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경로로 반신불수가 되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채로 그는 조피아의 해석에 꽁꽁 묶이고 있다. 한번은 예술가라고 치켜세우다 유대인/이민자라고 후려치는 폭력에, 또 한번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정체성 아래 종속시키는 폭력에.
내게 이 지점은 단순히 예술과 자본의 역학 관계에서 예술이 자본의 질투를 받아 꺾였다는 느낌이라기보다, 자본과 시오니즘에 결탁된 폭력의 고리가 사람을 얼마나 잔혹하게 짓밟는지를 보여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건축물이 사라지지 않아 좋다던 그는 정작 콘크리트 덩어리만 공허하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부재를 바라보는 존재는 어디에
영화의 주요 인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은 고든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품에 안겨 거리의 음식을 먹거나 때론 그마저 먹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아빠의 추측과 달리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아빠가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다지 내색하지 않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음에도 돈과 산업재해 사이 휘청거리던 밴 뷰런의 건축지, 건축가의 자부심과 계산에 번번이 부딪히는 '벌레' 대우에 날카로워진 라즐로의 건축지와 달리, 고든의 아들에게 건축지는 이따금 아빠가 건축용 차를 태워주기도 한 즐거운 곳이었다.
고든의 아들은 아주 작게 지나가는 인물이다. 라즐로와 에르제벳, 밴 뷰런 같은 인물들마저 결말을 앞두고 제각각 황급히 사라져 버린 이 영화의 결말부에 고든의 아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상상하게 된다. 그는 영화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사라진 뿌리의 자리를 기억하며 고요하게 살아남아 자라 갈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다시 영화 바깥을 보자. 미국의 자본 만능주의와 시오니즘이 선으로 연결된 자리, 가자지구를 보자. 그곳에 있으나 영화 속에는 부재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그들 또한 뿌리를 빼앗겨 흩날리고 있으나, 고든의 아들처럼 미약한 존재감으로 보도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서, 세상이 투명하게 여기는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이들은 과연 계속 뿌리를 고요하게 지켜보며 살아남아 자라 갈 수 있을까. 이번 가자지구 공습으로 인한 400여 명의 사망자 중 170여 명이 어린이라고 한다.
감독은 시오니즘과 미국 자본주의를 묶어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 그런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비판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충분히 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부재로 도형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지점 또한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자꾸 공교롭다는 표현을 쓰게 된다. 미국과 유대인을 묶는 것은 서막-1장-인터미션-2막-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도식만큼이나 과하게 심플한 것이 아닌지. 뿌리 없는 존재들의 공허한 콘크리트 같은, 아름답지만 공허한 기분이 드는 영화였다.
2천여 년 전, 사람들 앞에서 콧대를 높이고 있던 고위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던진 일갈을 떠올린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이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웅장한 콘크리트 회벽에는 너무 많은 뼈가 투영되어 보인다.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이자, 어쩐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
- 생의 마지막 일주일,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6★/10★
영화 〈더 웨일〉, 그중에서도 주연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1999년에 첫 개봉해 2008년까지 세 편이나 이어진 〈미이라〉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으며 훤칠한 외모와 액션으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액션신을 촬영하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혼 후 거액의 위자료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장이었던 필립 버크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생긴 PTSD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합성하여 제작한, 넋이 나간 표정과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 눈의 그의 사진은 ‘모든 걸 포기한 남자’라는 이름의 밈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요컨대 브렌든 프레이저는 새로운 돌파, 즉 ‘구원’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런 그가 〈더 웨일〉에서 찰리 역을 맡았다. 찰리는 대학에서 에세이 과목을 지도하는 강사다. 그는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데 화면을 켠 학생들과 달리 홀로 카메라를 켜지 않는다. 찰리가 272킬로그램의 거구이기 때문이다.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보조 기구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찰리는 자신의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강의 시간에 검은 화면만 띄워놓는다.
찰리와 그의 삶이 이렇게 망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결혼해 엘리라는 이름의 딸을 낳고 키우던 중 딸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떠났다. 동성 제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딸 역시 사랑했지만 그 당시의 찰리에게는 연인과의 사랑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걸 버리고 선택한 애인은 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찰리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죄책감, 불안, 수치, 좌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찰리는 이를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먹었다. 영화에는 섭식 장애로서의 폭식증과 그 위태로운 과정‧결과를 적확하게 포착한 장면이 종종 나온다. 폭식할수록 몸 상태는 안 좋아지고, 그러면 폭식을 초래한 부정적인 감정은 더 증폭된다. 이는 또다시 폭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찰리는 이 악순환을 멈출 수 없다. 그에게 폭식은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괴로움을 즉각적으로 달래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찰리의 몸 상태는 일주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상태까지 악화된다. 찰리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 이는 그가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다.
학교에서 낙제될 위기인 딸 엘리가 찾아오는 건 바로 이때다. 아빠인 찰리를 유독 잘 따랐던 그녀는 버림받았다는 상처로 괴로워했고, 지금은 엄마조차 ‘악’이라 부를 정도로 까칠하고 반항적인 청소년으로 자랐다.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 손을 내민다.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 그가 사랑하는 딸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찰리의 죽은 연인의 동생이자 물심양면으로 찰리를 돌보고 간호하는 리즈, 종말론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교하는 청년 토마스의 서사가 더해진다. 찰리, 엘리, 리즈, 토마스는 모두 나름의 이유로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사람들, 즉 누구보다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서로밖에 없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갖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구원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서로 간의 뒤얽힘에서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이처럼 〈더 웨일〉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구원의 길을 집요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에세이 강사인 찰리가 늘 강조하던 ‘진실성’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아픔을 놀랍도록 섬세하고 강렬하게 풀어내던 영화는 구원의 내용에서는 그만큼의 성취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론 구원의 문제에는 당연히 명확한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구원이 어려운지, 무엇이 구원을 가로막는지를 질문할 수는 있다. 영화의 결말, 찰리는 끝내 구원에 도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갈구한 구원이 과연 찰리와 그 주변인 모두를 보듬을 만큼, 찰리가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지을 만큼, 무엇보다 영화에서 찰리가 내내 강조한 ‘진실성’을 온전히 담아낼 만큼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더 웨일〉은 감동적인 영화다. 생의 막다른 길에 몰려 절망하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환기하고, 그런 사람들끼리도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의 서사와 영화의 서사가 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위로와 희망의 불씨를 전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어느 평범한 보통 청춘의 끝자락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을 지나 피부에 와닿는 쌀쌀한 바람이 계절이 변한 초입임을 알려주는 지금, 짠하지만 않은 아주 평범한 보통의 청춘들이 만나 서로가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2022년 한국 독립 영화 창밖은 겨울 리뷰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내려온 석우와 같은 회사 여직원 영애가 우연한 기회로 동행하면서 쌓아가는 일종의 로맨틱 드라마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서 얻는 웃음과 상처, 미련이라는 단어로 얼룩진 청춘의 흔적을 바라보게 되는 기분 좋은 설렘이 유지되는 한 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편안한 힐링을 느끼시리라 생각되네요.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창밖은 겨울 정보
뭐 사실은 버리고 싶은데 잃어버린 척 하려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꿈에 대한 미련과 상처를 얻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버스기사로 일하는 석우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터미널 의자에서 우연히 고장난 MP3를 줍습니다. 유실물 보관소에 이를 맡기려 하면서 누군가 잃어버린 분실물이라고 믿고 싶은 자신과 달리 내다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담당 직원 영애와 만납니다. 그리고 보관소가 직원 휴게실로 바뀐다는 소식에 그 MP3를 몰래 받아 함께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두 사람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When Winter Comes│감독·각본: 이상진
출연진: 곽민규, 한선화, 이정비, 목규리 외 多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4분
국가: 한국│등급: 12세 관람가
제작: 끼리끼리필름│배급: 영화사 진진
개봉일: 2022년 11월 24일
# 창밖은 겨울 후기
청춘들을 통해 보는 따스한 일상
서울에서 20대를 보내며 영화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의 자신을 투영한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이상진 감독의 말처럼 로케이션 장소부터 고향 진해를 배경으로 청춘의 끝자락에 꿈과 현실에 대한 고민, 미련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외적으로 멜로/로맨스 장르의 외피를 두르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미약하게 이어지고 실제로는 두 주연이 서로의 사연을 꺼내어 천천히 돌이켜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MP3라는 분실물은 지금은 포기했지만 한때 꿈꾸었던 청사진을 보여주는 듯 분실물과 쓰레기 사이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그저 놓고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묘하게 이어지는 두 주인공의 인연과 함께하는 일상은 과거의 상처, 미련을 보다듬어 추운 계절을 지나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는 봄처럼 그들이 성장하며 나아갈 발판이 되어 왠지 모를 포근함과 따스함으로 잔잔한 웃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행복과 성장을 통해 자아를 되찾는 모양새가 아마도 많은 분들이 ‘패터슨’을 떠올리는 이유인 듯합니다.
곽민규 X 한선화, 따뜻한 케미
과거의 기억이 준 상처에서 도망치듯 귀향한 버스기사 공석우 역의 곽민규는 여느 청춘과 별반 차이 없이 평범하지만 무언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쳇바퀴를 도는 듯한 햄스터 같은 느낌을 전합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꿈의 조각을 스스로 분리수거하며 다시금 인생이란 퍼즐의 조각을 맞춰보려 힘겹게 살아가는 안타까움마저 녹여내죠. 물론, 소심하고 생각도 많아 답답함에 분통 터지는 인물이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지나쳐버린 누군가의 청춘, 자극적이지 않은 따스한 그의 연기에 마치 공 기사처럼 돌고, 돌아, 또 도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MBC 주말 드라마 ‘장미빛 연인들’로 떼내며 ‘술꾼도시여자들’로 연기자 전향 이후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 한선화는 부산 출신답게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맛깔나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브라운관에 비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그가 2020년 ‘영화의 거리’를 시작으로 최근 ‘교토에서 온 편지’까지 배우로서 드라마와 180도 다른 색깔을 보여줍니다. 털털하고 숨김없는 직설적인 영애를 맡아 눈치 없는 석우를 말없이 지켜보며 따뜻한 케미를 발산해 주죠. 소소한 웃음, 흐뭇함마저 전해지는 두 배우의 청정한 연기는 극의 분위기를 살리기에 더없이 좋아서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돌고 돌아 다시 오기까지
잃어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믿고 싶은 존재, 이미 알고 있고 잊고 있던 선택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간 계절에 대한 미련처럼 남아있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재정비해 현재를 마주하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진해를 선택한 것은 감독의 고향이라는 점도 있지만, 모두가 서울로 떠나버린 한적함이 묻어나는 배경에서 우리가 잊고 지낸 여러 가지의 모습을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지나가고 있는 계절은 잡지 못한 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미련이 남는 것처럼 아쉬움과 상처가 있던 과거의 기억을 잡고 싶었던 평범한 청춘들의 모습은 잠시나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평범한 삶 속에 놓고 놓쳤던 선택의 순간, 꽤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될 듯하네요. :)
한 줄 평 : 미련과 후회를 돌고 돌아 현재를 마주하기까지
-
- 이런 판타지를 보려고 이런 클리셰를 본다.
이 영화는 클리셰가 참 많고 내용이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 찾아보게 되는 맛이 있다. 노인이라면 대단히 참견이 많을 것이라는 젊은이들의 고정관념도 어른들의 참견만큼이나 큰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벤 휘태커는 은퇴 후 시간이 너무 많아진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래서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능하고 싶어 시니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이에 합격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그의 복장은 지나치게 클래식하지만 내공이 느껴진다. 그의 캐릭터가 호평받은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그는 남에게 참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매너있게 챙겨줄 뿐이다. 하지만 나이어린 상사인 줄스는 그의 호의가 불편한데, 그녀에겐 그의 호의가 그저 꼰대의 참견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나를 돌아본다. 어른들에겐 호의가 나에게 참견으로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뼘 자라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분들의 호의는 오지랖이 아니라 정말 호의였음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내가 과민반응을 했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줄스는 상사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벤을 대하니 벤의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듯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벤이 끝까지 그녀를 존중으로서 대하니 그녀는 오히려 그에게 의지한다. 나는 젠더갈등도 문제지만 세대갈등이 더 와닿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갈등이 만연한 이유는 젊은이의 과도한 편견과 기성세대의 과도한 오지랖이 원인이라고 본다, 한쪽만의 문제라면 오히려 피하거나 문제를 인지시켜 개선시킬수라도 있지만 (개선이 가능하다면 그 상대는 굉장히 착한 편일 것이다) 두쪽다 문제라면 그 관계는 어서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줄스도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는 영리한 여성이고 벤도 자신의 삶의 지혜를 뽐내지 않고 남을 위한 매너로 쓰니 둘 다 선순환의 관계를 유지할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이 곧 유연함이고 그 유연함은 나이와 상관없다.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며 나이를 볼모로 대접만 받으려는 어른도, 그런 어른들은 무조건적 꼰대로 몰며 어른들에게 인격체로서 대접해달라고 요구하는 젊은이들도 유연하지 못한 것이다. 뭐든지 대접을 받겠다고 요구하는 쪽이 유연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벤도, 줄스도 판타지일지 모른다. 이런 관계로 실제로 있으면 좋겠지만 결국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면 이들의 유연함을 롤모델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조금은 충만하고 윤택하지 않을까. 젊은이는 기성 세대에게서 클래식을 배우고 기성 세대는 젊은이에게 시대의 감각을 배울 수 있는 선순환의 관계가 많아지기를, 나부터 그런 인간이고 싶다.
-
-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리뷰
사랑을 단념해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둘의 차이는 전 연인이 살아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당연히 살아온 시간과 환경이 다르니 다른 점은 더없이 많겠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둘은 그저 ‘이상한 사람’ 일뿐이다. 한 명은 새벽에 결혼식 비디오를 찾다가 난동을 피우기도 하며,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손님이 있는 저녁 식사 자리마저 순식간에 망쳐놓는 재주를 지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팻(브래들리 쿠퍼)은 이별의 계기가 썩 좋지 못했음에도 자신과 그가 천생연분이었다는 사실을 신봉한다. 접근금지 처분을 빠르게 극복해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재결합하여 서로를 완전케 할 사랑에 다시 빠질 수 있으리라 철썩같이 믿는다. 그렇다면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어떤가? 그는 사별한 남편을 잃은 후 느낀 허망함과 우울에 자신을 세상에 내던졌던 나날을 느리게 갈무리하는 중이다.
사실, 영화의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 만큼 결론은 뻔하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여러 굴곡을 겪을 테고, 서로가 자신에게 완벽한 짝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끝날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포용하는 과정은 그들이 겪은 상실과 우울의 치유 여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이상異常: 보통과 다른
이상하지 않은 상태란 무엇일까?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전혀 없다는 걸 의미할까?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상태도 어떠한 의미에선 이상한 일일 테고, 누군가와 결별하는 것 역시 안전한 보통의 나날을 영위하는 이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러하므로 이상과 정상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경계가 있을지라도, 개개인의 세계관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태라 볼 수 있을 터다. 물론, 그의 아버지인 패트리치오(로버트 드 니로)가 전 재산을 거는 도박 행위 역시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단 걸 생각해보면, 사회가 관용을 베푸는 이상과 정상의 경계조차 뚜렷하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영화 초반의 가장 큰 문제는 팻의 이상행동이 타인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점이며 조울증으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을 쏟아부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대상에게 투여한 리비도를 회수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고. 또, 이 과정은 대개 순탄하지 않고, 현실 부정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과 같은 강력한 반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고.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에 대한 이론을 생각한다면 영화 초반의 팻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주민에게 팻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된 사랑을 어떻게든 붙여보려 하는 이상한 사람일지라도, 팻에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팻은 어머니 때문에 일찍 집에 돌아왔을 뿐, 여전히 주기적으로 의사를 봐야 하는 환자이며 여전히 전처 니키와의 완벽한 사랑이 가능하리라는 환상 속에 사는 남자니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흔히 떠올리는 '이상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극단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팻의 상실감 -혹은 상실에서 비롯된 우울이라는 일탈-을 이해하는 이는 극소수다. 팻의 어머니인 돌로레스(재키 위버)나 친구인 로니(존 오르티즈)는 친절하지만 사랑을 잃은 이가 유지하는 참담한 환상을 없애주진 못했다. 팻의 형인 제이크(셰어 위검)는 간만에 본 동생 앞에서 되려 우월감을 느끼기만 할 뿐이고, 아버지 패트리치오는 팻이 말썽을 피우지 않도록 집 안에 있을 것을 거듭 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상실한 사랑, 토미로부터 벗어나던 티파니는 팻에게 거침없이 다가간다. 댄스 대회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요청은 팻에게 이끌림을 느낀 티파니가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팻의 언어를 반복하며 유인한다. '니키를 위해서, ' '니키에게 당신이 더 좋아졌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면': 당신은 댄스대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어야만 해. 타인의 언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티파니는 팻의 손에서 니키가 읽는다는 책을 앗아가고 춤을 가르침으로써 팻에게 자신의 언어를 체화시키기까지 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이상理想: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티파니가 아마추어 댄서였던 것은 팻에게나, 티파니에게나 큰 행운이었다. 실제로 우울증을 개선하는 데에 신체활동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상에서 하지 않는 몸짓 언어를 개발시키는 과정에서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인지적 측면의 개발이 가능하다고 한다. 당장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팻은 주기적으로 티파니와 댄스 연습을 하며 거부감 없이 우울증을 치료했던 셈이다. 특히 초반에는 연습만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으나 체력적 요소 등으로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야만 했던 연습 초기엔 팻이 전처 니키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부분 역시 그가 상실한 대상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반면 티파니는 팻이라는 사람을 통해 토미라고 하는 옛 연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자신의 감정, 혹은 옛 연인에게 쏟아부었기에 이젠 오갈 길 없게 된 자신의 애정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춤이라는 예술이 비언어적 표현에 기반한 소통 행위라는 것과 티파니가 날 선 말을 잘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팻과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 춤보다 더 좋은 수단을 찾긴 쉽지 않았을 듯하다.이렇듯 팻과 티파니는 최초의 끌림이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연된 덕분에, 둘은 더욱 어울리는 한 쌍으로 거듭났다. 다만, 이데아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에, 현실을 사는 우리가 최선의 세상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이 영원토록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미와 티파니의 사랑 역시 한때엔 이상적이었을 테고 니키와 팻 역시 그림 같은 커플이었던 시절이 존재했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부에서 둘의 행복한 결합이 그려졌다 해도 이 아름답고도 이상적인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우리는 모른다. 치유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상대방이 단 하나뿐인 사람이었을지라도 다시금 세상에 나갔을 때, 둘의 심경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둘이라면 영화 필름 밖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게 되는 건 왜일까. 팻의 아버지가 말했듯 티파니가 팻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깊은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둘은 댄스 대회에서 다른 경연자처럼 규격화된 음악과 안무를 택하지 않는 과감함을 지닌 이들이며, 5점에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팻과 티파니 개인의 어떠한 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하자 긍정적인 시너지로 탈바꿈하였다. 타인 앞에서 굴하는 일이 없던 티파니에겐 팻이 비뚤어진 채로 서 있을 때 다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있었고, 완전한 사랑을 믿던 팻에겐 티파니가 거짓으로 써준 답장을 모른 척 눈감아주는 이해심이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로니 부부로 끝날 수 있었던 공동의 지인 역시 늘어나 단단하고도 따뜻한 안전망까지 넓어졌으니, 팻과 티파니는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리듬에 맞춰 '이상한' 사랑을 별 탈 없이 이어나갈 것만 같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세상에 나온 지도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다양한 변주로 관객을 기쁘게 하듯, '만남'이라고 뭉뚱그려지는 단어조차 유심히 살펴보면 동일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손쉽게 둘의 마주침을 허용하는 운명도 있겠으나 일정 거리 밖에서 서성이며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부단히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만남도 세상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꼭 그만큼, 누군가에겐 멀리서 애써 찾아오는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 티파니가 팻의 동선을 알기 위해 그의 집에 전화를 걸고 똑같이 달려 나간 것처럼.
그러니 필연적인 우울이 길어져 힘겨워도 그대, 가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찬란한 한 줄기 햇빛은 오로지 당신만을 만나기 위해 일억오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다시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을 찰나의 위로, 어쩌면 당신의 짐을 덜어내고 당신을 바꿔놓을 가능성조차 외면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도, 짧다.
-
- 깨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혈연관계가 만들어진다. 부모와 형제들과 맺은 관계는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조금씩 영향을 준다. 전통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일은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혈연, 자기 핏줄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기도 했다. 이런 혈연관계 아래에서는 각자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나눠서 하기도 하면서 각자는 가족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또 챙기면서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은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최근에는 1인 가구나 비혼 인구도 늘어나면서 더욱더 그 가족의 단위는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한 집에 산다거나 어떤 감정적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는 가족 아닌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대안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함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유사가족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브로커>는 주인공들이 일종의 유사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혈연관계가 시작되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아이는 서서히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다. <브로커>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해버린다. 아이 우성의 엄마인 소영(아이유)은 한 성당의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그리고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들은 아이를 돈 받고 파는 일종의 브로커다. 이 첫 장면이 지나가는 시점에 주요 등장인물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깨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같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파는 브로커인 상현과 동수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보인다. 그들은 아이를 구매할 구매자를 찾는데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구매자는 걸러낸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양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이 우성의 엄마 소영은 상현과 동수가 브로커임을 알게 된 이후 아이의 판매에 동참한다. 그렇게 더 까다롭게 아이를 키울 부모를 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아이의 울타리를 깨는 사람에서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주려는 사람들로 서서히 바뀌어나간다.
아이를 버린 엄마 소영은 미혼모다. 그만의 사정이 있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꽤 반항기 있는 말투와 센 화장이 그가 살아온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상현은 이혼남이다. 도박으로 인해 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고, 그 관계도 좋지 않다. 그리고 동수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져 자라온 인물이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인물이다. 이 세 인물은 삶에 어딘가 결핍이 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고, 이후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되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 인물 모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전혀 없거나 깨져버린 인물이다.
관계가 깨진 인물들이 아이를 위해 다시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이렇게 자신의 삶이 깨진 채 살아가고 있는 세 인물이 우성이라는 한 아이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고, 그 아이를 좋은 부모에게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세 인물이 이루지 못한 삶의 어떤 부분을 채워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아이의 삶이 자신들처럼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브로커 일을 꽤 오래 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상현이 큰 생각 없이 아이를 넘길 것만 같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에는 마음을 돌린다. 그리고 아이 우성의 부모를 택하는 과정 속에서 엄마 소영의 마음도 서서히 풀려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어나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영과 상현, 동수는 아이와 밀접한 위치에서 부모를 찾으려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외부인의 시선이 등장한다. 바로 형사 수진(배두나)과 이형사(이주영)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버려진 아이의 브로커 역할을 하는 상현과 동수를 수사해 왔다. 그들은 상현의 집 근처에 잠복하며 아이가 거래되는 순간을 이용해 상현과 동수를 잡으려고 하는 인물들이다. 특히나 수진은 외부에서 이들의 대화를 도청하거나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브로커 역할을 하는 이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들의 다른 모습을 본 이후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영화에서 수진의 역할은 외부자의 시선일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낙태와 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가’ 나 ‘낙태와 아이를 버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쁜가’ 같은 복잡 미묘한 사회적 문제들을 소영과 수진의 대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조금은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수진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소영, 상현, 동수 세 인물의 동선에 수진의 동선이 포함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도 하나로 연결되어 합쳐진다.
영화는 모든 인물이 결국 연결되고 가족처럼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겼다. 특히나 이야기 중 어떤 인물이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반복해서 내뱉는 말은 꽤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런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고 꼭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엄마나 아빠 역할을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성별에 상관없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성역할도 없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든 가족 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시선이 영화 <브로커>에 담겨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다. 먼저 브로커 상현 역할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그동안 보여줬던 송강호만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무심하지만 속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결국 모두의 아버지가 되어가는 인물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는 이번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지금까지 모든 송강호의 연기가 녹아있는 이번 연기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엄마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는 과거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인 지안과 비슷한 연기를 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고 아픔을 숨긴 채 날카롭게 반응하는 캐릭터이지만 조금씩 따뜻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센 반응을 보이는 인물인 소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수 역할을 맡은 배우 강동원도 그가 상처를 숨기고 부드러움을 보이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줬던 로맨스 캐릭터 연기를 이번에 같이 보여주면서 관객의 웃음을 부른다. 그리고 형사 수진 역을 맡은 배우 배두나도 그가 잘 보여주는 조금 딱딱해 보이고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른 따뜻한 선택을 하는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던지는 캐릭터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에서 비슷한 유사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다. 그는 소외된 계층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감독인데, 이번 <브로커>에서도 미혼모, 낙태, 고아, 아이 브로커 등의 문제를 한 영화에 녹아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기존에 그가 일본에서 만들었던 영화들에 비해 너무 부드럽고 얕게만 문제를 다루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감독이 한국 배우들을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던지고 있고, 각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연기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꽤 안정적인 영화를 완성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Rabbitgumi의 영화이야기 유료 뉴스레터에도 영화 <브로커>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https://rabbitgumi.stibee.com/
-
-
- 캡틴 마블이 자신의 후회를 만회할 수 있을까
?Rabbitgumi 입니다!
지난 주 영화 더 마블스가 개봉했습니다.
마블의 새로운 영화인데요.
사실 마블 팬들이라면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분위기는 이 영화가 개봉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개봉 후에도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설명없이 쉽게쉽게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소개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더욱 더 불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캡틴 마블의 후회되는 점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그마저도 공감할만한 요소가 없었어요.
박서준은 정말 지못미 입니다!! ㅠ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업데이트하고 있는 영화 에세이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아래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링크를 통해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브런치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
- 웨이브 <페리 메이슨> 공식 예고편
사설탐정 페리 메이슨은 어린 아기 찰리 도드슨의 납치 및 살해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
- 영화 <몬스터 아카데미> 메인 예고편
상위 1%의 천재들만 다니는 ‘크랜스턴 아카데미’ 그곳에 전학 온 괴짜 천재 소년 ‘대니’! 학교 최고의 엄친딸 ‘리즈’와 묘한 라이벌 신경전을 벌이며 아슬아슬한 학교생활을 이어간다. ‘대니’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발명에 도전하던 중 무심코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포털을 열게 되고,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학교를 뒤덮는데! 저세상 몬스터들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