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까기의 종이씹기2025-03-22 23:54:27
계란말이가 없는 평화와 행복의 세상을 꿈꾸며
영화 <미키 17> 리뷰
스포일러 주의!
<미키 17>은 마카롱 사업의 실패로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니플하임'이라는 외계 행성 이주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미키 반스의 사연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미키는 무턱대고 '익스펜더블'에 지원하지만 문제는 익스펜더블이 홀로 위험한 일을 도맡고 혹시나 죽게 되면 다시 프린트되는 일상을 반복하게 만드는 매우 비인간적인 직업이었다. 결국 미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보내지만 우연찮게 만난 나샤 배릿지와 연인이 되면서 그나마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17번째로 프린트된 미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아래 크레바스에 빠져 땅 아래 깊은 곳으로 추락한다. 당연히 여느 때처럼 죽을 줄 알았으나 니플하임의 원주민 '크리퍼'가 미키를 구조해 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미키는 겨우 본부에 도착하지만 이미 18번째 미키가 프린트되어 있는 상황. 두 명의 미키가 서로 조우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미키의 이야기를 그린 봉준호 감독의 SF 블랙코미디 영화다.
블랙코미디 버전 <아일랜드>로 시작해서 정치적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끝나는 영화. <미키 17>은 안타깝게도 봉준호 감독이 만든 여덟 편의 영화들 중 가장 아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쉬움이 많은 영화다. 초반에 설정을 줄줄 푸는 미키의 내레이션과 기자의 인터뷰는 대사가 너무 길고 장황해서 지루하다. 전반부에는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다룰 것처럼 하더니 후반부에 가면 그러한 문제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프린트된 인간도 인간인가?' '설령 합리적이라고 해도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옳은가?'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갈등을 벌인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질문들이 중반부에서 멈춰버린 채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커지는 스케일, 미키 17과 미키 18의 너무 빠른 갈등 해결, 후반으로 갈수록 정치 풍자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원인이다.
특히 후반부의 전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대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설정, 상황, 인물들까지 유사한 지점들이 너무나 많다. 크리처의 비슷한 디자인, 인간에게 고문을 받은 새끼 크리처, 그것에 분개하여 인간들을 향해 질주하는 크리처 종족들, 그리고 주인공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엔딩까지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적이 한번 있긴 했다. 바로 <옥자>다. 그러나 <옥자>는 스타일의 유사성 정도에 머물렀던 반면 <미키 17>은 표절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오마주가 지나쳐서 흥미로울 수 있는 영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니까, 마치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기 다른 영화처럼 보일 만큼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인물들도 문제가 있다. 나샤와 티모와 카이, 마샬 부부까지 대부분의 조연 캐릭터들이 다소 기능적으로 그려진다. 티모와 카이는 순간의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일 뿐, 영화가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면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금세 존재감을 잃는다. 마샬 부부 역시 정치 풍자를 제외하면 딱히 인상적인 행적을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퇴장한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미키 17>을 마냥 혹평만 하기에는 좋은 지점들이 너무 많다. 첫 번째로 좋았던 점은 시의성 있는 정치 풍자다. 마샬 부부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하루하루 수명을 갈아가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미키는 문자 그대로 죽어나가면서 마치 공무원처럼 생계를 위해 복무한다. 미키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괴롭히는 존재는 니플하임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이끄는 함장, 즉 대통령이다. 여기까지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흔히 봐왔던 노동 계급과 기득권의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기득권을 묘사하는 대목이 심상치 않다. 이 영화 속의 대통령은 케네스 마샬이다. 케네스는 무능하고 멍청한 데다 자신의 이익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뚱뚱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췄다.
그런 케네스의 곁에는 일파라는 아내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부부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가 대통령인 남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통제한다. 심지어 대머리 부하 캐릭터가 한 명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뿔테안경을 썼다. 봉준호 감독은 특정 누군가를 모티브로 삼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이렇게 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노골적인 상징성 때문에 <미키 17>은 2054년이라는 근미래를 다루지만 오히려 2022년부터 현재까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겨냥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는 권력자들을 대놓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칫 익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치 풍자가 현실과 만나니 굉장히 시의적절해졌다. (물론 촬영은 2022년 12월에 끝났기 때문에 완전히 의도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이 이렇게나 절묘하게 맞닿은 건 우연을 넘어선 무언가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좋았던 점은 이전의 봉준호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낙관주의다. 낙관주의는 자칫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비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결말부에 미키는 상상으로 추정되는 케네스와 일파의 부활을 목도한다. 다시 프린트된 케네스와 그었던 손목이 다시 회복되어 나타난 일파. 이는 마샬 부부로 대표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언제든지 사회를 이끄는 높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미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 설령 그 불안이 현실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것이라는, 그러한 따뜻한 메시지를 뭉클하게 남기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와 비슷하면서 상반되는 결말이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에 있다. 바로 <괴물>이다. <괴물>에서 어둠 속을 응시하던 강두는 시선을 거두고 소년과 함께 밥을 먹는다. 카메라는 이러한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어둠이 잠식한 공간 속 희미한 불빛에 의존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매점을 비추면서. 반면에 <미키 17>은 드넓은 대지 아래 빛을 받고 있는 미키에게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끝난다. <괴물>은 어둠이 다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지만 <미키 17>은 낙관적이고 뭉클한 희망을 준다. 마마 크리퍼가 말하는 평화, 미키가 말하는 행복,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들이지만 이제 그러한 것들이 없어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를 외치는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다. <미키 17>의 낙관주의는 그래서 좋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이 빼앗아간 당연한 것들을 다시 되찾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미키 17>은 가장 실망스러운 봉준호 영화인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봉준호 영화다. 그래서 실망을 했는데도 비판을 하기 망설여진다. 2022년부터 시작된 지난 정치 과정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불안에 떨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참담한 심정을 안은 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라는 단어와 멀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단어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작금의 현실을 유쾌하게 조롱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거기서 나온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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