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3-29 17:49:46
헤레틱'들'
<헤레틱>(2024)
<헤레틱(Heretic)>(2024,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씨네랩 크리에이터 활동으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
영화가 시작되면 절벽이 화면에 들어온다. 두 목소리가 들린다. 팩스턴과 반스가 매그넘 콘돔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일반 콘돔과 사이즈가 같대.’와 ‘내가 들었는데, 진짜로 크대.’의 주장이 별로 격렬하지 않게 충돌한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프레임은 점점 내려와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이어 그 아래 있는 매그넘 콘돔 광고판을 비춘다. 다음 컷에서 그들의 앞모습을 보여주기에 금세 잊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오프닝이다. 영화는 ‘얼만큼을 보여줄 것인가’를 통제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앞으로 줄곧 끌고 갈 논의의 틀을 맛보기로 들려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의심을 경험한 적이 있었을 반스와 주변의 말을 믿어만 온 팩스턴, 두 인물의 캐릭터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 또한 한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며 관객은 묻게 될지도 모른다, 종교는 매그넘 콘돔 광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myth(신화, 근거 없는 주장)인가?
모르몬교 방문 전도 중인 팩스턴과 반스는 ‘미스터 리드’의 외딴 집에 다다른다. 때마침 비바람이 몰아치고, 리드는 추위에 떠는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한다. 온화한 인상을 지닌 남자의 친절, 따뜻해 보이는 거실, 소울메이트 와이프까지 있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리드는 마실 것을 내오고 세 사람은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불편한 질문’을 하겠다며 유머러스하게 경고한 리드가 일부다처제라는 주제를 입에 올리며, 긴장은 점차 서늘하게 증폭된다. 인물들의 정면만을 클로즈업하던 카메라는 이즈음 리드의 뒷모습을 조명하며, 그가 감추고 있던 면을 꺼내보이기 시작한다는 신호를 준다. 음악과 느닷없는 정전, 클로즈업, 컷과 컷 사이 속도 조절 등 전통적 수단과 더불어, 세 사람이 줄곧 형식적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점이 <헤레틱> 전반부의 화면에 독특한 서스펜스를 불어넣는다. 떨림을 감추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팩스턴과 반스의 목적은 리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생존에 있다. 미세한 적의를 내뿜고 있지만 ‘불편할 것 없다’고 말하는 리드는 본론을 꺼내면서도 본심은 드러내지 않으며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완력보단 치밀한 계획을 사용하는 리드는 분명한 목적을 알려주지 않은 채 의미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 과할 정도로 양해를 구하고 상대방에게 귀기울인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대화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유도한다. 이런 특징들이 전형성에서 살짝 벗어난- ‘매력적인 빌런’을 구체화한다. 배우가 지닌 특유의 이미지는 걸림돌이 아닌 최고의 재료가 된다. 리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우며 유머에 사과를 곁들이는 영국 신사’의 공포스러운 변주다. 향초에 인쇄된 “블루베리 파이”를 반스가 목격하는 순간처럼, 휴 그랜트는 따스한 조명과 엔틱 소품이 으스스한 연출의 일환으로 뒤집히는 경계를 노련하게 탄다. 익숙한 배우에게서 낯익음과 낯섦을 동시에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두 모르몬교도가 순진한 희생양이 아니라는, 끊임없이 공간 구조와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며 머리를 굴린다는 점도 작품의 매력을 더한다. 반스는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리드의 논리에 있는 허점을 짚어낼 정도로 영리하고, 비교적 연약해 보였던 팩스턴도 만만치 않은 두뇌의 소유자다. 소피 대처와 클로이 이스트는 각 인물의 개성과 심리 변화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모르몬교의 가치관에 대한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관객은 위험에 처한 두 사람에게 이입해 그들의 탈출을 응원하며 함께 미로를 헤쳐나가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화면에 빠져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표면적 재미라면, 그 서사 내부에 자리한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기는 일은 숨겨진 재미다. ‘종교는 신화와 다르지 않다. 더 홀리즈-라디오헤드-라나 델 레이, 볼테르-스파이더맨과 같은 변형이며, 마케팅으로 신도를 늘리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사실 이미 정해둔 결론으로 이끄는 통제의 기술이다.’라는 가설은 음모론에 불과한가? 이 ‘가설’은 그럴듯하고 반스의 반박 또한 그렇다. <헤레틱>은 결국 모든 종교는 ‘이단heresy’이 아니냐는 아이디어를 던지고자 하는 것인가. 작가들이 리드에게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극단적인 묘사로 충격을 주며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영화의 의도일 수 있다는 뜻이다. 모르몬교의 방문 전도가 밀실 스릴러를 연출하기 위한 초기 설정, 수단일 것으로 짐작하고 관람했으나, 돌이키면 오히려 밀실 스릴러라는 포맷이 종교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던 듯하다. 여성들을 가두고 통제하는 리드는 빌런이다, 그런데… 그가 도출해낸 아이디어는 어떤가. 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행하는 범죄들에 정당화의 여지는 없으나, 그것은 역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져 온 폭력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는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유일한 생존자에게 거대한 의심을 안기며 끝난다. 리드의 의도대로 퍼즐을 푼 후 ‘컨트롤러’를 찌른 팩스턴은 도망쳐 나왔다가, 지하실로 통하는 쪽문을 열고 고민한다. 이 다음, 편집은 갑자기 툭 끊기고 팩스턴은 별안간 지하실 한가운데에 서서 리드에게 찔린다. 이것은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이 전의 일들은? “예언자”의 시체는 팩스턴이 그럴 것이라고 추리했기 때문에 거기 있었나? 반스가 리드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죽는 전개는 팩스턴의 바람인가? 창문에 갇혀 있던 나비가 탈출한 팩스턴의 손 끝에 앉았는가, 혹은 ‘죽으면 나비가 되어 사랑하는 이들의 손 끝에 앉겠다’던 그가 죽어가며 호접지몽을 꾸고 있는 것인가. <헤레틱>에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장하는 이들, 믿거나 믿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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