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4-28 19:49:56
마인크래프트 무비 | 게임 원작 영화의 전철을 답습하다
<마인크래프트 무비>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락실 게임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폐업 직전의 게임 샵 주인이 된 '개릿'(제이슨 모모아). 엄마를 잃고 동생 '헨리'(세바스찬 유진 헨슨)를 책임지고자 낯선 동네로 이사 온 '나탈리'(엠마 마이어스). 나탈리 남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부동산 중개업자 '던'(다니엘 브룩스). 이들은 개릿의 가게에서 헨리가 우연히 발견한 큐브의 빛을 따라가다가 폐광 속에 열린 포털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네모난 세상 '오버월드'에 도착한다.
밤이면 시작되는 좀비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며 오버월드에 적응하는 네 사람. 그들은 좀비와 싸우던 중 일찍이 오버월드에 도착한 '스티브'(잭 블랙)를 만나 현실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묻지만, 그는 지하 세계 ‘네더’를 다스리는 마법사 ‘말고샤’(레이첼 하우스)의 침공으로부터 먼저 오버월드를 구해야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답한다. 이에 네모난 세상에 빠진 다섯 '동글이'는 오버월드를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게임 원작 영화가 실패하는 이유
게임 원작 영화의 제작 소식이 들리면 게임 팬도, 영화 팬도 걱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쌔신 크리드>,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언차티드> 등 많은 게임 원작 영화가 완성도 관련해 혹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 그러면 왜 유독 게임 원작 영화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캐릭터 역할과 활용 방식의 차이를 안 짚고 넘어갈 수 없다.
영화 속 캐릭터는 스토리텔링의 주체다. 관객은 캐릭터와의 공통점을 찾아서 몰입하거나 그의 경험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 반응만 할 수 있다. 게임은 다르다. 게임의 캐릭터는 스토리텔링의 주역이자 '아바타'다. 관객과 달리 게임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또 다른 자아처럼 조작하고,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즉, 게임 플레이어에게 캐릭터는 감정 이입의 대상이자 직접 행위를 하는 주체다.
물론 게임 원작 영화는 본질적으로 관객에게 능동성을 부여할 수 없다. 대신 게임의 플레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며 게임을 하는 듯한 인상은 줄 수 있다. 문제는 이 차선책을 못 취하는 작품도 많다는 것. 일례로 <어쌔신 크리드>는 원작 게임의 핵심인 목표를 암살하는 과정보다는 캐릭터의 서사와 세계관 설정에 집중하면서 게임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지 못했다. 게임 특유의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도 마찬가지다. 사실 예고편을 보고 예상한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의외로 깊이가 있다. 마인크래프트를 플레이한 적 있거나 게임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각 캐릭터의 서사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바타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위한 장치로만 기능하다 보니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다른 게임 원작 영화처럼 낙제점을 피하지 못한다. 온갖 밈과 B급 유머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는 캐릭터
<마인크래프트 무비>의 깊이는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포기해야 하는 것이 늘어난다는 말과도 같다. 어릴 적 품었던 꿈이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은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맞춰 눈을 낮추고, 실망감을 억누르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주인공들도 같은 경험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 게임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 개릿. 하지만 계속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오락기 시장이 침체에 빠진 현재, 그는 폐업 직전의 게임 샵 사장일 뿐이다. 스티브 또한 광부라는 꿈을 접고 일반 기업 사무직으로 일한다. 나탈리 역시 부모님 없이 동생과 살기 위해 원치 않은 일자리를 위해 원치 않은 동네로 이사한다.
빌런이자 네다의 독재자인 말고샤도 마찬가지다. 말고샤가 타락한 계기는 다른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다. 댄서가 꿈이었던 그녀는 무대에서 철저히 조롱당한 나머지 꿈을 포기했다. 다만 그다음 행보가 달랐다. 꿈을 가슴 한편에 밀어 두고 현실을 수용한 주인공들과 달리 그녀는 꿈을 지니거나 창의적인 삶을 사람을 제거하거나 통제하려 들면서 자기 좌절감과 실망감을 외부에 투사했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말고샤를 제압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극단적인 절망과 타락 대신 다른 길도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려 한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과 실망을 딛고 일어서서 말고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각자의 방식으로 꿈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 주인공들처럼. 오버월드에서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게임을 출시한 개릿처럼. 또 격투기 재능을 발견해서 자기 진로로 삼은 나탈리처럼.
관객과 캐릭터의 접점
혹자는 <마인크래프트 무비>의 교훈이 다른 아동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교훈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가 다소 나이브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일리 있는 비판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바로 원작 게임의 출시 시점이다. 이를 영화의 교훈과 결부하면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과 함께 성장한 세대를 대변하는 영화로 의미가 확장되고, 깊어진다.
마인크래프트는 2011년에 정식 출시됐다. 청소년기에 마인크래프트를 처음 접했을 이용자들은 이제 20대 중후반, 취업 준비생이거나 사회 초년생이다. 달리 말해 그들 중 일부는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선택하거나, 자기 꿈과 잠재력을 만개하기보다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으 실패하는 한가운데에 있을 수 있다. 개릿, 스티브, 나탈리, 헨리와 던이 그러했듯이.
이처럼 마냥 밝지 않은 현실과 미래가 불안한 '어른이'들에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의 특징을 살린 격려를 건넨다. 마인크래프트는 게임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플랫폼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게임 내외적으로 이용자가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하면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 바로 이 특징이 <마인크래프트 무비>의 격려와도 직결된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오버월드에서 말고샤와 싸워서 이긴 뒤 꿈을 이룬 주인공들처럼 정해진 세상의 틀에 꺾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즉, 게임에서 발휘했던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잊지 말라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재충전시켜 주는 셈이다.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실사 영화도 아니라서 어중간하게 유치한데도 <마인크래프트 무비>에서 의외의 깊이감과 매력이 발견되는 이유다.
아바타 기능을 포기한 대가
관객이 공감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캐릭터는 분명 <마인크래프트 무비>의 장점이다. 전반적으로 유치한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문제는 그들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주인공들의 행적에서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의 묘미를 살렸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부족하기 때문. 즉, 캐릭터만 살리고 아바타는 포기한 나머지 게임 원작 영화라는 정체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일로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장면은 초반부와 후반부에만 집중되어 있다. 스티브가 오버월드에 해 설명해 주는 오프닝 시퀀스, 처음 오버월드에서 밤을 보내는 주인공들이 좀비를 피하려고 작은 성을 만드는 장면, 후반부에 말고샤의 군대와 전투를 치르기 위해 골룸과 무기를 만드는 장면이 전부다. 그 외에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관을 캐릭터가 돌아다니는, 일종의 게임 튜토리얼에 가까운 장면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다른 게임 원작 영화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많다. 말고샤의 군대가 포털을 열고 오버월드로 쳐들어오는 클라이맥스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에서 오크 군대가 포탈을 열고 인간 세상에 진입하는 장면을 똑 닮았다. 주요 아이템을 찾으러 여러 광산을 돌아다니는 장면도 <언차티드>와 유사하다. 그러니 마인크래프트라는 IP를 기대한 관객이 <마인크래프트 무비>를 보고 실망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밈과 유머의 한계
그렇다고 문제를 영화적 장치로 보완하지도 못했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포탈을 열 수 있는 아이템을 찾으려고 오버월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반부 전개는 평범한 트레저 헌터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처럼 목숨을 건 위기가 찾아오지도 않으니, 스릴과 서스펜스도 부족하다. 이처럼 예측가능한 위기와 탈출을 보다 보면 성인 관객 시점에서는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잭 블랙과 제이슨 모모아의 슬랩스틱과 b급 유머로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두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큰 도움은 못 된다. 북미에서는 밈화가 된 예고편 대사를 상영 도중에 따라 하는 관객으로 인해 폭력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을지 모르지만, 영화적으로 봤을 때는 과도한 유머가 흐름을 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 원작 영화의 징크스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1편 이후 제작이 취소된 선배들의 전철은 피할 것으로 보인다.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도 돌파할 것 같은 흥행 추세 덕분에 벌써 속편 제작을 논의 중이라는 뉴스가 들리고 있으니까. 만약 아바타를 포기한 과오를 바로잡고, 마인크래프트만의 특성을 부각할 수 있다면,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속편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Poor 형편없음
캐릭터만큼 아바타도 챙겼더라면
Relative contents
-
- 오지 않는 속편을 기다리며
다들 속편이 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영화가 하나쯤은 있지 않나요?
그중에서도 요청이 쇄도했던 <콘스탄틴>의 속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 많은 팬을 기쁘게 했는데요.
<콘스탄틴>처럼 다른 영화들도 하루빨리 속편이 제작되기를 바라며 콘텐츠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영화는 무엇인가요?
-
- 판의 미로(2006), 퍼스널 쇼퍼(2017)
떠나간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 <판의 미로>
<판의 미로>를 관람하면서 계속해서 던진 의문은 왜 이 영화는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 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가 끝날 때쯤 알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인민내각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마침내 스페인 내전을 승리로 끝낸 후인 1944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전은 끝났지만, 스페인 곳곳에선 여전히 인민내각을 지지하는 게릴라(partizan)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건, 인민내각을 지지하는 소수 게릴라 군과 그들을 무력으로 숙청하는 정부군의 갈등이 중심이 된다.
이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판의 미로>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동화속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한 현실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오필리아와 게릴라 군이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화속의 이야기를 좇는 인물이며, 영화의 또다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민 내각을 지지하고 자유와 주권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저항군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이상이다. 이들은 순수한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순수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참히 짓밟힌다. 영화 <판의 미로>의 플롯은 순수한 동화속의 세계와 비정한 현실의 세계를 오가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넓힌다. 이런 극명한 대조로 이상의 세계는 더없이 아름답고도 처연한 세계가 되고, 현실의 세계는 더없이 잔혹하고도 차가운 세계가 된다.
<판의 미로>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동화속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한 현실이다.
어머니의 곁으로
시각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판의 초상과 지하세계로 향하는 미로의 문은 염소의 뿔이 달린 전형적인 중세 유럽의 악마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형상이 동시에 자궁의 모양을 닮아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영화속에서도 자궁에 대한 비유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건 내 개인적인 판단이 아님) 자궁은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장소다. 하지만, <판의 미로>에서 그곳은 생명이 다시 돌아가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이 통로를 통해 고통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오필리아라는 점과, 메르세데스가 판의 이야기에 대꾸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비달이 판을 볼 수 없었던 것(그렇기에 그들은 미로를 지나가지 못할것이다 :¡NO PASARÁN!)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게릴라 저항군들은 판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점은, 오필리아가 미로를 통해 낙원에 닿을 수 있었듯이, 그들 또한 낙원에 닿을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셈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태어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앞서 말한 자궁의 모양을 닮은 이 상징적인 장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궁의 모양을 닮은 판의 미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판은 그 자신이 “산이고 숲이자 대지”라고 말했는데, 그런 판이 상징하는 것은 ‘생명’이다. 즉, 자궁의 모양을 닮은 판의 미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한 번도 본적없는 이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산이고 숲이자 대지인 그들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나의 부모를 공유하는 자식들이 모두 가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이 지구라는 부모에게부터 태어난 존재로서, 같은 피를 나눈 가족들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인다는 일의 무의미함과 논리적인 모순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화 <판의 미로>는 부정한 과거사에 대한 폭로와 반성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필리아가 세계의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과 그 여정을 통해서 순수한 이상을 품고 어딘가에서 스러져갔을 수많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때문에, <판의 미로>는 잔혹한 세계에 바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동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 <퍼스널 쇼퍼>
<퍼스널 쇼퍼>는 영매 모린이 자신의 쌍둥이 오빠 루이스의 죽음 이후 루이스의 영혼과 교감하기 위해 파리에 머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판의 미로>가 떠나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화라면, <퍼스널 쇼퍼>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와 개봉시기, 그리고 파리라는 장소를 두고 또 한번 파리 테러(2016)사건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봤다. 이 영화는 진지하게 좇아가면 보이는 것이 많은 영화다. 가령 영화가 끝나갈 때쯤 보이는 루이스의 희미한 실루엣도 놓치기 쉬운 결정적인 장면인데, 섬세한 시선으로 끈질기게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이고 많은 이야기가 해결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때문에 재밌게 봤다. (사별을 다룬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일지도 모르겠다만)
<퍼스널 쇼퍼>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선 <퍼스널 쇼퍼>를 지배하는 시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데, 영화에선 클린트에 대한 비평으로 “한 세기전에 그려진 작품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 한편, 루이스는 “사람을 꿰뚫어보고”, “죽음을 예감”하는 인물이며, 심령주의란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즉, 이 영화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3차원 너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이 영화의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이 시간성이 중요한 것은 영화의 해석과 관련된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 루이스의 집에서 모린이 마주한 제 3자의 영혼과 관련이 깊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쓰고, 다음 이야기를 해보자.
이 영화의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금기와 열망의 사이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 수 있다. 영화속에서는 사회적 금기와 자발적 금기가 나타나는테, 영화속에서 이 금기들은 모두 깨진다. 어떤 경우에는 굳이 깨야하는 금기인가 싶지만, 어떤 경우에는 깨야만 하는 금기가 맞구나 싶기도 하다. 가령, 우리의 가장 오래된 금기는 성서에 기록된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린은 키라의 퍼스널 쇼퍼로서 그녀의 물건을 대신 구매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당연히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키라의 물건은 온전히 키라의 것이다. 하지만, 모린은 키라의 옷을 입어보고 신발을 신는다.
금기를 깬 것이다. 이런 금기들은 굳이 깨야하는 금기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데, 모린이 키라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고 싶은 그녀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화속에서 다소 흐릿하게 보여지는 열망이다. 그리고, 이후 보여지는 자발적인 금기들의 경우는 보다 그 열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모린의 자위 장면은 쌍둥이 오빠가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육체적인 행복을 누리면 안된다는 모린의 자발적인 금기와 남겨진 사람의 금기를 깨는 장면이며, 루이스의 여자친구가 루이스가 떠난후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며 고백하는 장면도 그녀가 스스로 설정한 자발적인 금기를 깨는 장면이다.
모린이 키라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고 싶은 그녀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사회는 금기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적인 혼란을 막고자 했다. 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금기들 역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금기에 해당된다. 금기를 깨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선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는 것으로 다소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한 예로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은 금기를 어겼다는 이유로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금기를 깨는 행위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퍼스널 쇼퍼>에서 금기를 깨는 행위는 중요하다. <퍼스널 쇼퍼>에서 금기를 깨는 행위는 사회적 혼란과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애도와 추모라는 분위기와 자발적 죄의식의 질서에서 벗어나 다시 원래의 행복해질 권리를 찾기 위한 삶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 특히, 그 상실감으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식에 갇혀 행복해질 권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며, 그들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언제까지고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라(“죽은자가 산자를 보살핀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하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다. 따뜻한 메세지 못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는 괜찮은 작품으로 전체적인 만듦새가 좋은 영화라고 하겠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
- [SWIFF 데일리] 1950, 1995년. 레즈비언 로맨스의 두 계보
(왼)〈올리비아〉, 자클린 오드리 감독 작품, 1950, 프랑스, 7★/10★
(오)〈두 소녀가 사랑에 빠진 믿을 수 없는 진짜 이야기〉, 마리아 마젠티 감독 작품, 1995, 미국, 7★/10★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복원: 아카이브의 맹점들’이라는 제목의 세션이 열렸다. “최근 몇 년간 세계 각지의 내셔널 아카이브와 필름 파운데이션에서 복원된 여성 감독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표방한 세션이었다. 그중 〈리옹으로의 여행〉, 〈올리비아〉, 〈두 소녀가 사랑에 빠진 믿을 수 없는 진짜 이야기〉를 봤다. 첫 번째 영화는 역사에 중대한 공헌을 했으나 잊힌 여자를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좇는 작품이고, 나머지 두 작품은 레즈비언 로맨스‧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각각 1950년 프랑스, 1995년 미국에서 제작된 후자의 영화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영화제 홈페이지에 따르면, 〈올리비아〉를 연출한 자클린 오드리는 1950년대의 거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의 한 기숙학교다. 주인공 올리비아는 영국 기숙학교에 있다가 막 프랑스로 옮겨 온 참이다. 그녀가 영국과 프랑스의 기숙학교를 비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그는 교장 쥘리에게 영국 기숙사의 엄한 규율과 도덕적 규제가 숨 막혔다고, 그와 반대되는 이곳이 좋다고 말한다.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학교에서 규율과 도덕 없음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분출로 이어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올리비아가 새로 옮긴 기숙학교에는 교장 쥘리와 또 다른 선생님인 카라를 중심으로 한 두 세력 축이 있다. 쥘리와 카라는 묘한 경쟁관계에 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경쟁하는 이유는 학생들의 ‘인기’다. 그러나 '인기'는 레즈비언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올리비아를 유독 아끼는 카라는 올리비아가 쥘리에게 빠진 게 명백해지자 질투에 사로잡힌다. 카라를 연기한 시몬느 시몽 배우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인데, 그녀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늘 신경질적이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여성’ 캐릭터를 굉장히 인상적으로 연기해낸다. 질투에 빠진 카라의 존재로 인해 암시적으로 언급되는 쥘리와 올리비아의 로맨스도 한층 강렬해진다. 쥘리 방 바로 옆에 배정된 올리비아의 방, 우연한 스킨십에 뒤따르는 “열정이 넘치는구나!”라는 말, 올리비아와의 밀회 약속을 ‘망상’이었다고 철회하는 쥘리 등등…. 카라의 질투와 결부된 두 사람의 은밀한 로맨스는 성애적 장면 없이도 섹슈얼리티를 강렬히 그려낼 수 있음을 보인다.
영국에서 이 영화가 상영 금지되었다는 데서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위반하는 힘은 한층 더 강해지기도 한다. 파국적 사건 이후 비밀을 품은 우아함을 지닌 채 학교를 떠나는 쥘리와 더 이상 수동적으로 매달리지 않겠다는 올리비아의 표정도 압권이다. 남성/권력이 사건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뒷모습만으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대목은 쥘리, 올리비아, 카라 등 여성들이 구축한 내밀한 세계가 독립성‧자립성을 갖추었음을 보이기도 한다.
〈올리비아〉가 고상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세계를 엿보게 해준다면, 〈두 소녀가 사랑에 빠진 믿을 수 없는 진짜 이야기〉는 유쾌하고도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레즈비언 로맨스를 풀어낸다. “1990년대 퀴어 로맨스 영화의 정전과도 같은 영화”라는 평을 받는 영화답게, 영화에는 그 시대 레즈비언 하위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주인공 랜들 딘은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어머니와 헤어지고 레즈비언 애인과 함께 사는 이모네 집에서 지낸다. 딘에게 ‘다이크’라는 모욕이 일상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그 역시 전형적인(그래서 멋있는) 톰보이 미학을 체현한 레즈비언이다.
주유소 화장실에서 이성애 결혼을 한 여자와 몸을 섞으며 욕망을 충족하던 딘은 어느 날 자신과는 모든 게 정 반대인 한 여자를 만난다. 딘의 정체성은 노동자계급, 백인, 남성성, ‘문제아’ 등으로 구성된 데 반해 이비는 부유하고, 흑인이며, 이제 막 남성 애인과 헤어진 '이성애자'고, 모범생이다. 완벽하게 다른 둘은 금세 사랑에 빠지고 다름 앞에 놓인 금기들을 하나하나 헤쳐 나간다. 그리고 다름을 조율하는 동시에 유지하며 서로를 매혹의 대상으로 남겨두고 영원히 탐색할 것임을 약속한다.
모든 소란이 한 장소에 모여 폭발하듯 분출되는 영화의 유쾌한 결말에서 그 모든 소음이 상관없다는 듯 서로의 귀를 막아주고 생긋 웃는 딘과 이비의 얼굴은 〈올리비아〉가 창조한 세계와 닮은 데가 있다. 누가(특히 남성/권력) 뭐라 하든 그들 관계의 주인은 자신이며 그 주권을 빼앗기지 않은 채 앞으로도 여성을 욕망하는 여성으로 남겠다는 의지가 읽힌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영화에서 파생된 수많은 여성/퀴어 영화가 남성중심적‧이성애규범적 사회에서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순되는 점이나 틈’인 맹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계보는 세계가 변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
- 만두 맛집인데 뒷맛이 이상해요
어디선가 먹어본 익숙한 만둣국 맛이다. 조금 더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추가돼 신선함도 있다. 그런데 계속 곱씹다 보면 이상한 맛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저것 많은 요소들을 '가족'이라는 만두피로 몽땅 담아내 영화로 빚어서다. 양우석 감독의 신작 '대가족'에 대한 간략 평이다.
'대가족'은 스님이 된 아들 함문석(이승기) 때문에 대가 끊긴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에게 세상 본 적 없던 귀여운 손주들이 찾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기막힌 동거 생활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호인'과 '강철비' 시리즈 등 휴머니즘 성격이 강하고 묵직한 소재를 담은 작품을 선보여왔던 양우석 감독은 '대가족'을 통해 코미디 드라마 장르에 문을 두드렸다. 초반에 코미디, 후반에는 휴먼 드라마를 배치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한국적인 휴먼 코미디 콘셉트로 구성했다.
과거 한 사건을 계기로 서먹하게 지내는 무옥-문석 부자 앞에 짠한 아이들 민국(김시우)-민서(윤채나) 남매가 짠하고 나타난다. 문석의 생물학적 자식이라고 밝히자, 행복을 되찾은 아버지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아들 극과 극 반응을 보인다. 비슷한 장르와 스토리라인으로 흥행했던 영화 '과속스캔들'이나 일일 드라마에서 볼법한 전개다.
다소 뻔해 보이는 스토리라인에 신선함을 곁들여 줄 킥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바로 민국-민서 남매의 '출생의 비밀'. 알고 보니 함문석이 대학 시절 하게 된 정자기증으로 탄생한 아이들인 것. 심지어 함문석의 정자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이 400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숨에 '정자왕'으로 등극해 웃음을 유발한다. '대가족'은 이 황당무계한 사연을 코미디에 녹여내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저격한다.
정자기증을 무기 삼아 영화는 문석의 생물학적 자녀 찾기를 비롯해 함씨 부자간 이야기,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 엉킨 실타래들을 천천히 풀어간다. 그러면서 양우석 감독은 후반부에 '가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저출산 문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 대안 가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영화 제목인 '대가족'의 '대'가 큰 대(大)가 아닌 대할 대(對)를 쓰는 것이고, 영화 영어 제목을 'About Family'로 작명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화법이 장벽이다. 화두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 만큼 세련되게 풀어내야 하는데 투박하고, 후반부에는 너무 교훈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 예로, 함문석과 큰스님(이순재)이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간이나 보는 이들에 따라 교조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자기증을 활용한 코미디로 에너지를 올렸더니, 올드한 감성을 담은 신파로 맥을 끊는다. 지나친 플래시백과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2000년에 개봉한 영화들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니 빚은 만두의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후반부 구성과 연출이 호불호 갈리긴 하나, 배우들의 역량만큼은 인정할 부분이다. '한국판 스크루지 영감' 함무옥을 연기한 김윤석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주며 웃음을 전한다. 동시에 자타공인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핏줄에 집착하는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김성령, 박수영은 '대가족'에서 뻔한 맛을 진하고 깊은 맛으로 우려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민국-민서 남매로 분한 아역배우 김시우, 윤채나는 힐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치트키다.
★★☆
-
- 황폐한 인간의 엇갈리는 역사, 닮고도 다른 찬란한 외면
※영화 〈피닉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 칠흑 같은 밤 검문소를 지나는 차의 조수석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넬리가 앉아있다. 군인들은 레네의 만류에도 끝까지 붕대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다. 회유와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붕대 속 넬리의 얼굴을 본 군인은 사색이 되어 그제야 빗장을 열고 두 사람을 보내준다. 넬리를 포함한 그의 모든 가족이 죽은 줄만 알았던 레네는 재산을 대신 관리하던 중 생존한 넬리를 데려와 돌본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남편 조니를 찾아 도시를 헤매던 중 클럽 ‘피닉스’에서 잡일을 하는 그를 발견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었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진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 혹은 요하네스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넬리에게 아내인 척 연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넬리는 이를 수용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궤적에는 익숙한 몇 개의 발자국이 반복된다. 간절한 사랑은 누군가의 정처 없는 방황을 이끌고, 오인과 엇갈림, 배회의 이미지는 일관된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시간에 관한 우화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정중동의 서사가 진행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가는 영화의 생명력은 독일 영화의 부흥기를 이끄는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기꺼이 자신을 던져버릴 듯 간절한 사랑의 감정과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방 사이의 불협은 과거의 표면에서 배회하는 인간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한 공간에 들여놓으며 경계를 흐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역사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하고 과거의 인간으로 남은 군인들은 현존의 외형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영화에서 넬리가 처음 마주하는 이들이 과거의 흔적인 전쟁을 암시하는 군인인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넬리는 다르다. 영화 속 가장 연약한 존재에서 빛을 따라가 모든 경계와 고민을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그는 외면 外面을 외면한 채 과거의 역사와 사랑, 억압을 모두 껴안은 채 당당히 해방의 길로 나서는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박차고 나간다.
공포와 불신의 혼돈을 파고드는 악의 정체
인류를 혼돈에 빠뜨린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바라본 한나 아렌트는 희생자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집단 학살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악한 의도나 동기가 없었고, 단지 수직적인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의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일이므로 ‘잘못’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죽일 배짱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끔찍한 일을 막을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공무를 수행하는 하급 관료의 평범한 책임의식으로부터 끔찍한 살인이 벌어질 수 있다는 모순을 아렌트는 ‘생각 없음’으로 초래한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근대적 이성의 준칙으로 완성된 정언명령은 그 본래 목적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보편적 입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는 주어진 절차에 따라 집권당 총수가 되고, 헌법을 고쳤고, 법질서를 준수하며 20세기 가장 잔혹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해한 사람들은 기계적 순응과 제한된 선택지로 합리적인 악의 탄생을 함께 만들고 손뼉 쳤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감정적 인식도, 이성의 비판도 없이 주어진 절차에 맞으면서도 가장 바람직한 변수의 배열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 영화 속 넬리는 왜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을까. 남편 조니가 그의 재산을 획득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죽은 줄만 알았던 넬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정한 순위와 절차와 재산상 이득을 모두 취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아이러니는 최고 수준이라고 여겨졌던 근대 관료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만드는 공백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진리로 믿었던 우리의 근대적 이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를 만들 때도 그랬다. 타인의 적당한 고통과 불편으로 다수가 행복하다면 그 희생은 별 저항 없이 용인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악은 같은 인간을 향해 극악한 범죄와 살인이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폭격을 맞은 베를린의 거리는 어느 하나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의 나치즘에 휘말려 피해자와 가해자, 동조자와 방관자로 구분되었다.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박해와 인종주의적 차별은 시민들이 오늘의 생존을 위해 어제의 이웃을 신고하고, 이분법적 논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도록 만들었다. 영화는 전쟁 이후 독일 사회의 인간 단면을 멜로드라마의 형식에 녹여낸다. 〈피닉스〉의 의도적인 기억의 공백은 방관자와 공모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과정이 상처받은 신뢰로 터져 나온 공포를 극복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른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시민들은 모든 걸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얼굴을 되찾은 넬리를 마주 선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방관, 침묵, 동조를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얼버무리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도 피해받았음을 성토하고, 더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자리를 피한다. 그들은 나치의 통치에 얽힌 시대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잡혀가는 유대인을 묵인하며 신고하는 대신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했던 끔찍한 시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는 베를린의 전 시민에게 씌워진 비극이다. 적어도 공포를 당당히 대면하지 못하는 영화 속 사람들은 지배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이라는 과거로부터 능동적인 자기 형성을 이루지 못한다. 조니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잊고 과거의 영광에 남겨진 나치의 부역자와 피해자의 현현처럼 보이는 조니와 넬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넘어선다.
영화에서 전쟁의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넬리와 레네 뿐이다. 하지만 같은 유대인으로 둘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넬리는 끔찍한 수용소의 삶에서 겨우 벗어난 생존자다. 조니가 일반화된 대상으로서의 피해자성을 주장할 때 넬리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전달하며 과거의 기억을 딛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아간다. 하지만 레네는 박해를 피해 베를린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아남았다. 인간의 처참한 기억을 간직한 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 레네의 선택은 기억의 공백에 스미는 새로운 악의 탄생을 예고한다. 1945년 그는 유대인이라는 피해자 정체성을 늘 강조하면서도 넬리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유대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웠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빌미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학살과 억압을 되돌리는 미래의 결론은 위치만 바뀐 전쟁범죄의 반복이다. 전쟁이 초래한 불신의 벽에서 좌절하는 레네는 목표를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외출할 때마다 핸드백 안에 늘 권총을 지니던 레네는 평범한 악의 공포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주와 민족주의로 승화한다. 나치 정권과 그 부역자를 향한 강한 저항과 분노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던 레네는 타인과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했다. 누구든 아무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이렇게 또다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삶을 향해 걸어가는 찬란한 외면의 커튼콜
조니가 법의 허점을 악용해 과거의 배우자를 가장한 연극을 꾸미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이히만은 자신의 평안과 태만, 일상적 행위의 반복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렌트가 간과한 본질이 빠져있다. 그는 아이히만의 범죄사실을 사유 능력의 상실이라는 책임의 부재에도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죄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 학살에 능동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반유대주의 신념을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렌트가 보았던 법정 연극은 그를 속이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불가항력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있다.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제든 악은 모습을 감추고 서서히 몸집을 불릴 것이다. 넬리는 조니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며 거짓으로 조니가 원하는 넬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걸음걸이와 필체를 연습하고, 새로운 알리바이를 만들며, 기차에 내리고 지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만들고자 그 전날 다른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는 정성까지 들인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거짓은 커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유효하다. 영화는 외면의 교체와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보여주는 오인의 테마는 이름이나 얼굴과 같은 외적 표상을 부정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자기인식의 도달을 유도한다. 넬리는 집도의에게 자신의 원래 얼굴로 복원해 주기를 요청했지만, 의사는 아무리 똑같이 얼굴을 고치려고 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거절한다. 이미 영화는 덧씌워진 얼굴에 남겨진 시간을 망각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예고된 결말을 암시한다. 어떤 얼굴이든 그것이 시간의 궤도 안에 들어선 인간의 것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기억에 머무를 수 없다. 조니는 과거의 기억 속 넬리의 대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하여 이를 이용해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고자 한다. 겉치레의 변화만으로 타인과 제도를 속일 수는 있더라도 인간의 기억과 내면, 그 안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틀어지는 계획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니는 점차 과거의 넬리와 겹쳐 보이고 마는, 살아있는 넬리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다.
아이히만의 가짜 연극의 피해자가 된 아렌트처럼, 넬리 역시 조니가 제작하는 연극의 공동주연이 되어 그의 배역이 진정한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한다. 재산을 차지하려는 목적하에 그들은 연극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브레히트는 서사적 연극론에서 관객이 연극을 이해하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한다. 처음은 연극과 배우를 가장 가깝게 동일시하고, 다음은 관객과 배역을 냉정한 자세로 소외시키며, 마지막으로는 둘 사이의 통합적 인식의 발현으로 연극의 사회적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다. 〈피닉스〉는 연극의 변증법적 작품해석론을 달성한 넬리와, 그렇지 못한 조니를 나란히 세운 뒤 과연 인간은 역사를 딛고 넘어설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작지만 강력한 희망을 숨겨놓는다. 계획의 주 무대인 조니의 방은 한정된 공간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등장인물 간의 합으로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넬리 본인을 연기해야 하는 넬리는 조니의 상상 속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하며 조니의 상상 속 대상에 깊이 이입한다. 넬리의 인식이 바뀌는 순간은 남편이 자신을 고발하고 대신 풀려난 것이라는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면서 배역과 끊임없는 소외를 통해 대상과 조니,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둔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발견한 넬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시퀀스에서 스스로 무대와 관객을 만들어 ‘세 번째 연극’을 거행한다.
조니의 패착은 첫 단계를 의도적으로 건너뛰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 그는 처음부터 넬리의 재산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어차피 이만 달러 정도 주고 떠나보낼 생각이었을, 죽은 넬리를 연기하는 이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인 몰입을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관객에게는 저 여자는 넬리처럼 보여야 한다. 넬리는 대상화된 본인을 연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조니에게 자신이 그의 진짜 넬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조니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넬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지하면서도 그가 넬리가 아님을 애써 상기해야 하는 이상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몰입 없는 연극의 거리 두기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절대 조니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지막 순간, 이 연극에서 넬리는 처음으로 제작자의 자리에 선다. 조니의 극본대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벗어나, 조니가 지휘하던 연극의 지휘봉을 빼앗아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스투스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연극은 낯선 나와의 대면으로 역사를 직시하게 만든다. 넬리가 전하는 마지막 노래 ‘Speak Low’는 너무 빠른 순간을 한탄하다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한다. 넬리와 조니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멀어지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를 성실히 이겨냈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하기만 급급했다. 그리고 커튼콜의 시간은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넬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며 조니를 떠난다. 두렵고 낯선 나와의 대면은 지배적 담론에 고착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장면인 마지막 시퀀스는 배우로 하여금 무대 위의 말과 몸짓으로 스스로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반영적 메타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성경 속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신은 명확한 근거 대신 믿음이라는 무기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은 너무 신속하고, 예측할 수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악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어떤 의도도 없이 바꾼다. 욥은 끊임없이 내 삶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 질문한다. 하지만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라는 악이 존재한다. 전쟁 역시 그중 하나다. 인간이 증오와 분노로 같은 인간을 살해하는 끔찍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이 아픔을 남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선택 또한 레네의 단순한 실수로 우연히 만들어진다. 피아노를 치던 조니가 마침내 넬리를 알아보는 순간은 그의 노랫소리와 팔뚝의 일련번호, 겉으로 드러난 옷가지나 얼굴이 아닌 감춰져 있던 것들이었다. 자신과 타인,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를 아우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 예를 들자면 상대를 외면할 수 있는 넬리의 용기 같은 것들이 삶에 다가온다. 과거에 매여 현실을 외면한 채 주어진 삶을 바꿔보려 했던 조니에게는 절대 찾아올 수 없는 순간을, 넬리는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며 당당히 증명한다.
-
- [JIFF 데일리] 마음을 혹독한 겨울에서 따뜻한 봄으로 옮겨심는 일.
감독 및 출연진 감독 장준영 출연 장선 양말복 양나영 정미형 시놉시스 어디서나 애매한 나이의 평범한 서른 중반의 한 여자, ’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리뷰
한 사람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겨울나기>.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인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영화로실제 상영작이 공개되고 나서 기대되어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뭔가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다.이 영화는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담았으며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또, ‘겨울나기’라는 제목을 통해 등장인물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는 영화이다.연에게 있어서 겨울은 극복이 아닌 견뎌내야 하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특히 가족이라는 존재는 마음껏 애정을 담을 수 있지만 그만큼 미워하게 만든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관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그 생각은 연의 결혼관 마저 뒤집어 버린다.
가족에게도, 애인에게도 부담스럽다는 말을 듣게 되며 유독 연에게 혹독했던 겨울이 더욱 싸늘해진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겨울이 유독 연에게 혹독했던 것이 아니라 연이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겨울’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가 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며 ’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았다면 겨울나기가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애매한 ‘나’를 생각하면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한다.
주변의 속도에 맞춰나가지 못한다는 생각과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이 부딪혀 상상이상의 혼란을 불러온다.
그래서인지 어느샌가부터 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하곤 한다.
하지만 싫은 모습이든 좋은 모습이든 모두 나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다.
<겨울나기>는 자기혐오를 넘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따뜻한 영화이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당신에게 다가온 겨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점이 되는 ’엄마의 치매‘는 보는 내내 마음을 울멍이게 만들었다.주변인이나 당사자에게 있어서 더욱 가혹했던 치매라는 병은 어떤 것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어서 더욱 힘겹기 때문이다.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눈물 날 만큼 가여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그럼에도, 과거에 엄마가 선택을 했듯이 현재의 연이 선택을 해야 했다.떠나가는 세대들과 나아가는 세대라는 어떤 순환은 어떤 것보다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름답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좋은 작별’ 앞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른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한국 사회의 ‘현재‘는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가 충돌하며 다양한 갈등의 양상으로 펼쳐진다.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우리 사회의 자잘한 충돌을 담아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약간의 격차 후 거리를 좁혀가는 모습에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타인의 감정을 단언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다 알 수는 없다.그래서 사람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정체되어 있던 연은 불꽃을 기점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어떤 두려움 때문에 건네지 못했던 말들과 어떤 감정들이 희미해지던 중 연의 시간이 명확해지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어떤 위치에 서있을지 몰라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부담’스럽게 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마침내 용기 내어 말하고 진짜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진정한 겨울나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영화제 기간 2024.05.01 - 2024.05.10 겨울나기 상영 시간 2024.05.02 13:30 2024.05.05 17:30 2024.05.08 10:30
-
-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스커트를 하게 됩니다 [영화리뷰/결말포함]
-
SUBSCRIBE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
- [컴플리트 언노운] 끝장리뷰 | 밥 딜런의 두 가치 | 의문의 지점들
[컴플리트 언노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두 개의 정체성
Chapter 2 의문의 지점들
00:00 컴플리트 언노운
02:00 두개의 정체성
05:56 의문의 지점들
08:18 별점 및 한 줄 평
08:38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컴플리트언노운 #컴플리트언노운리뷰 #컴플리트언노운후기 #컴플리트언노운해석 #컴플리트언노운영화 #영화컴플리트언노운 #밥딜런 #제임스맨골드 #티모시샬라메 #ACompleteUnknown #ACompleteUnknownmovie #ACompleteUnknownreview #JamesMangold #TimotheeChalamet #에드워드노튼 #EdwardNorton
-
- 영화 <룸 넥스트 도어> 2차 예고편
제81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 수상작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틸다 스윈튼 X 줄리안 무어 황홀한 미장센으로 2차 예고편 공개!
-
- 영화 <티탄> 메인 예고편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와 조우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