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8 19:55:46
[JEONJU IFF 데일리] 달까지 가는 롤러코스터
영화 <외계 우주 정복자 환영> 리뷰
DIRECTOR. 안드레스 후라도
CAST. 안토니오 자르코
SYNOPSIS. 냉전의 긴장 속,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국경 지대 다리엔(Darién)에서 길을 잃은 우주 비행사들이 원주민들 때문에 놀라 깊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들이 목이 잘리거나 야생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외계 우주 정복자 환영>은 열대 생존 훈련에 사용된 프로파간다 아카이브와 관련 영화들을 재조립해 우주 정복이라는 미션에 새겨진 식민주의적 내러티브에 도전한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역사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상처의 조각들을 퀼트처럼 엮은 영화 같다는 것이었다. 파나마의 정글에서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뉴스 풋티지 영상을 보여준 다음 "원주민의 콜럼버스 발견은 그들에게 재앙이었다"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방향성을 명확히 해 준다.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달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야심을 식민지 혹은 제3세계 착취에 대한 야심과 대구를 이루도록 병치시켜, 조각조각 자르고 붙인 작품이다.
우선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어원으로 하는 국가명, 콜롬비아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많은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콜롬비아 또한 원주민들이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땅이었다. 천문학과 금 세공에 능했던 무이스카족의 이야기는 훗날 서양에 '엘도라도' 황금 도시의 전설로 전해진다. 그리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무렵, 스페인이 무이스카 왕국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수도인 보고타를 설립하면서 길고 긴 식민지배의 날들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 인구가 급감할 만큼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 게다가 현지 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묻어 온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에 면역이 없었으므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은 당시 식민지에서 엔코미엔다라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 파견한 통치자에게 토지와 주민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인데, 통치자는 노동력과 세금을 징발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보호와 기독교 개종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사실상 국가로서는 방임이었고, 통치자 입장에서는 현지 주민들을 쥐고 짜서 나오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착취적인 강제 노동과 폭력으로, 사실상 노예노동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괴롭고 지난한 역사 끝에 마침내 19세기,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을 주축으로, 콜롬비아 사람들은 독립을 이룩한다.

하지만 독립국이 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 사이를 미묘하게 오락가락하는 20세기가 시작된다.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영토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원했던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해 버린다. 추후 보상금을 지급하고, 군사와 외교 문제로 미국과 협력은 깊어진다. 남미에서 콜롬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반공" 동맹이었다. 그 결과 영화에서도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미국과 콜롬비아가 협력한다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우주를 향한 야욕은 패권에 대한 야욕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으므로,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 영웅들이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온 국가가 그들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질문이 나온다. 저개발 제3세계 국가로서, 우주에 수백만 달러를 태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우주비행사들은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없다."는 식의 정보값 0인 문장으로 대답한다. 할 말이 없었겠지.
그러나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정말 없는가? 애초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충격을 받고 이룩한 성과로, 달 착륙은 철저하게 정치경제적 계산이 깔린 프로젝트였다. 물론 우리가 달에서 무슨 광물을 캐다 사는 건 아니니까 "향후 몇 년간 인류가 얻는 것은 정보일 것"이라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수많은 산업이 창출되고 국방 전략 자산화를 했던 것, 소프트파워를 과시한 것을 고려하면 다양한 유무형 자산을 얻은 건 사실이다. 뭐랄까, 1945년에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내버려두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식민지배로 '돈'을 얻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식민지에 대한 착취는 언제나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있노라면 '달을 정복'하겠다던 옛 유럽인들의 상상도는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의 탐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 전 유럽이 상상한 '달 정복'의 풍경은 이렇다. '야만인'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꽃잎 위에 여성이 자고 있으며 (와중에 망원경까지 쓰고 보고 있다), 낯선 동물들과 새들이 많다. 이들은 큰 범선을 타고 달에 날아가, '야만인'들의 목에 밧줄을 두르고 채찍질을 하고, 동물들을 사냥해 배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 나비 요정 같은 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에서조차,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겠지. 하긴 우주비행사들도 '여성 우주인'이 있어서 안고 자면 좋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너네는 뭐가 그렇게 다 쉽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인디언'을 '발견'한지 20년 되었다고 그들의 '역사'를 쓰겠다더니, 그들은 '흥이 많고 호전적이다' 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이우아나'라는 동물을 육상동물로 분류할지 수상동물로 분류할지 고민하다가 멋대로 어느 한쪽에 귀속시킨다. 이 동물은 훗날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비행사들에게 먹이로 주어진다. 늘 이런 식이지. 신비화하는 동시에 그 신비를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것.

이우아나를 보며 일제 강점기 때 숱하게 사라진 우리 개 '동경이'를 떠올렸고, 회사를 차려 금을 채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구한말부터 우리도 겪은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낸 곳이 있다기에 병원이라도 지었나 했더니 거기서 '하이바나'를 했단다. 약초에서 기인하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것. '하이바나'가 샤먼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치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인간 사냥꾼', '금속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식으로 신비화되고, 철저하게 세팅된 자리에서 우주비행사가 이들을 만나는 자리를 '크로스-컬처'한 경험이라고 한다. 어떤 문화도 넘나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이 이제는 언어까지 반지르르하게 넘본다. 대책 없는 착취. 상대를 지속 가능하게 두지 않는 착취. 그게 식민지의 본질이다.

이 모든 야만은 지난 세기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듯, 이 영화는 시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듯한 옛날식 노이즈로 덮여 있다. 오래 전의 풋티지뿐 아니라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일정한 화면비 안에서 펼쳐지지도 않는다. 달 모양으로 둥근 화면만 한참 보여 주기도, 화면을 양분해 멜리에스의 영화 한 장면과 현실을 나란히 보이기도 한다.
각종 풋티지가 빠르게 전환되고 많은 부분이 텍스트 자막으로 처리되어 지나가다 보니, 배경 지식 없이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다. 느낌만으로 따라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앞에서 뿌린 ("갑자기 왜 이구아나?") 내용이 뒤에서 대구를 이루며 거두어질 때, 그리고 거기서 야만성의 편린이 드러날 때 한 번씩 가슴이 철렁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역시 마지막 풋티지일 것이다. 광고 문구처럼 빠르고 현란하게 지구가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 식민지배의 야만이 우리 모두의 것임이 피부로 와 닿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돛단배를 타고 달까지 도달한 순간,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롤러코스터임을 깨닫는다. 신기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30-05.09) 상영일정]
2025.05.02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05.03 17:00 CGV전주고사 8관
2025.05.07 20:30 CGV전주고사 8관
Relative contents
-
- 2022년 제74회 에미상 수상작은?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9월 12일, 방송계 최대의 시상식인 제74회 에미상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는데요.
과연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 작품상 - [석세션]
ⓒ IMDB
제74회 에미상에서는 [석세션]이 작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석세션]은 2018년부터 미국 HBO에서 방영 중인 블랙코미디 드라마로
상속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현재 시즌 3까지 나왔으며, 시즌 4는 방영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열연에 세련된 음악과 연출까지 더해져 지금까지 열린 에미상에서 13개 부문에 수상을 하였습니다.
코미디 작품상 - [테드 래소]
ⓒ IMDB
올해 코미디 작품상은 [테드 래소]가 수상하였습니다. [테드 래소]는 2020년부터 Apple TV+에서 방영 중인 스포츠 코미디 드라마로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식축구 코치 테드 래소가 영국의 충국팀 코치로 발탁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현재 시즌 2까지 나왔으며, 시즌 3는 방영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Apple TV+의 간판 드라마 중 하나이며, 특히 '착한 드라마'라는 점이 인기몰이에 가장 크게 기여했습니다.
리미티드/앤솔로지 작품상 - [화이트 로투스]
ⓒ IMDB
올해 리미티드/앤솔로지 작품상은 [화이트 로투스]가 수상하였습니다. [화이트 로투스]는 하와이 해변에 있는 초호화 호텔
'화이트 로투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현재 시즌 1까지 나왔으며,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89%로 높은 지수를 차지하였습니다.
경쟁 프로그램 작품상 - [리조스 왓치 아웃 포 더 빅 걸즈]
ⓒ IMDB
올해 경쟁 프로그램 작품상은 [리조스 왓치 아웃 포 더 빅 걸즈]가 수상하였습니다. [리조스 왓치 아웃 포 더 빅 걸즈]는
미국의 여성 힙합 가수 리조의 댄서가 되기 위해 13명의 여성이 경쟁을 하는 리얼리티 경쟁 프로그램입니다.
올해 에미상에서 경쟁 프로그램 작품상 이외 두 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였습니다.
드라마 남우주연상 - 이정재
ⓒ IMDB
올해 남우주연상은 이정재 배우가 수상을 했는데요. 에미상 주연 배우 부문에서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수상했으며,
이정재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실 국민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겠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올해 6월 13일 시즌 2 제작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드라마 여우주연상 - 젠데이아
ⓒ IMDB
올해 여우주연상은 [유포리아]의 젠데이아 배우가 수상을 했습니다. 젠데이아 배우는 2020년 에미상에서 [유포리아]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었는데 2022년 역시 동일한 작품으로 동일한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유포리아]는 이스라엘의 동명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HBO의 드라마입니다. 2022년 3월 기준, HBO 최다 시청 드라마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코미디 남우주연상 - 제이슨 서디키스
ⓒ IMDB
올해 여우주연상은 [테드 래소]의 제이슨 서디키스 배우가 수상을 했습니다. 제이슨 서디키스는 작가로 SNL에 채용되었지만,
즉흥연기가 뛰어나 2005년 크루 멤버로 발탁되게 됩니다. 8년간 SNL에서 활약한 후 SNL을 떠났습니다.
현재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테드 래소에서 주연으로 연기를 하며, 에미상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상식에서 수상하였습니다.
코미디 여우주연상 - 진 스마트
ⓒ IMDB
올해 여우주연상은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의 진 스마트 배우가 수상을 했습니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는 2021년부터 HBO Max에서 방영한 드라마로 현재 시즌 2까지 나왔습니다.
에미상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상식에서 총 38개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입니다.
감독상 - 황동혁
ⓒ IMDB
올해 감독상은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수상했습니다.
감독상에 비영어권 작품이 시상대에 오른 것은 최초이다.
황동혁 감독은 수상 소감과 함께 [오징어 게임 시즌 2]로 돌아올 것이라 밝혔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
- 인생을 되감기 하고 싶은 사람들
대니와 마이클 필리포 감독들은 이제 신뢰할 수 있는 공포영화 감독이 된 것 같다. 전 작품인 <톡투미>에 이어 <브링허백>으로 2연타를 치며 자신들만의 독보적인 호러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신선한 공포의 비쥬얼을 놓치지 않으면서 샐리 호킨스의 연기력에 도움을 받은 서정적인 감성 한스푼을 얹고 가는 공포영화, <브링허백>이다.
<브링허백> 줄거리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이복남매 파이퍼와 앤디. 두 사람은 오빠 앤디가 성인이 될 때까지 3개월간 위탁모 로라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로라는 첫만남부터 시각장애가 있는 파이퍼를 극별히 아끼는데, 앤디는 묘하게 자신을 배척하는 듯한 그녀가 불편하다. 게다가 마치 유령처럼 그녀의 집안을 돌아다니는 올리라는 소년의 존재 역시 수상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파이퍼는 자신에게 온 마음을 표현하는 로라에게 마치 엄마가 생긴 듯한 애정을 느끼고, 두 남매의 사이에는 조금씩 간극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자 로라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의식을 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죽은 딸의 영혼을 파이퍼의 몸에 되돌리는 것. 사실 로라에게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딸이 있었고, 자신의 딸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딸의 영혼을 옮겨줄 매개자(올리)와 딸과 닮은 아이(파이퍼)가 필요했기에 그녀는 15년차 사회복지사이자 위탁모 일을 하며 오랫동안 자신의 딸과 같은 또래의, 시각장애가 있는 아이를 기다려왔던 것.
로라의 의식이 준비되어갈 때쯤 앤디는 로라가 사촌이라고 말했던 '올리'가 실종된 소년 '코너'라는 것을 알아채고 로라로부터 파이퍼를 구하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브링허백>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세련된 공포
"이것은 컬트 영화가 아니다."
'잔혹하다'는 말은 이 영화에서 로라가 자신의 딸을 되찾아오기 위한 일종의 소환의식으로써 자행된 카니발리즘 장면만을 놓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의 운명에서 있어 가장 잔혹한 일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일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실수라면? 이보다 잔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비단 로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파이퍼와 앤디 역시 이 잔혹한 운명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서사의 출발점과는 별개로 이 공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출발한다. 로라는 딸을 잃었고, 파이퍼와 앤디는 아빠를 잃었다. 때로 믿을 수 없는 슬픔은, 믿을 수 없는(혹은 믿어선 안되는) 것을 믿게 만든다. 자책에 지친 자아는 빼앗긴 내것을 되찾아오겠다는 그릇 된 욕망으로 변하기도 한다. 영화상에에서 이 욕망과 로라를 이어주는 매개는 비디오 테이프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에는 영혼을 되돌리는 법을 시연하는 영상이 녹화되어 있다.
사실 조악한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악질 사이비 종교의 부활 시연 영상이나 3류 공포영화 같다. 그들은 산 사람을 목을 매달고 악마에 빙의된 듯한 한 사람이 오래 된 사체를 뜯어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방금 막 시체가 된 그에게 토사물을 뱉자 마치 영혼을 들이키기라도 한 것처럼 죽은 자는 살아나 가족과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검증할 수 없는 이 비디오 테이프가 딸을 잃어버린 시간 갇혀사는 로라에겐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이자 종교가 된다. 사실 화려한 종교의식이나 복잡한 주술, 소환 논리로 표현되는 컬트의 탄생에는 그런 것을 믿게 만드는 절박함이 먼저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공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사람은 더 무서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게 된다. 그걸 감당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주인공의 세계
복잡한 심리를 가진 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정말 말할 것도 없이 역동적이고 매혹적이었는데 (엔딩에 크게 마이너스 없이 납득되는 것도 그녀라서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연기를 뒷받침 해준 건 고립된 공간과 박제된 강아지, 더 이상한 일하지 않고 옛동료도 가족도 없이 오직 죽은 것들에 대한 추억만 쌓인 로라의 집이었다.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것은 순환을 의미하는 최소한의 장치 (비, 소환의 방식, 원을 그리는 동작, 집과 그 주변 숲 어느 정도를 포함한 동그란 주술원, VHS비디오)만으로 로라가 믿고 있는 세계를 정확히 표현해주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소환의식을 소재로 사용하는 보통의 컬트 영화처럼 관객을 설득시키기 위해 기타 주술사나 의식에 필요한 사람들은 전혀 등장시키지 않은 채, 그 빈 부분을 파이퍼를 원하는 로라의 절박함과 반대편에서 역시 파이퍼를 구하려는 앤디의 절박함을 그리는데 충실하길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소재의 잔학성(잔인하긴 합니다)을 넘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는 인상을 주는 데 성공한 셈이다. 로라의 집을 둘러싼 원형 진 역시 인상적이다. (집 밖의 원은 코너가 올리라는 캐리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의 정신을 잡아두는 울타리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아는 콤파스로 그린듯한 마법진이 아니라 삐뚤빼둘 겨우 연결된 저 원을 그리기 위해 자기 몸만한 페인트통을 들고 허리를 숙인 채 구불구불 어두운 숲속을 빙 둘러 가는 한 여자. 땀과 수풀이 범벅된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숨을 헐떡이며 걸어온 길을 확인하다 저 멀리 보이는 텅 빈 수영장을 보고 속절없이 또 무너지는, 자식을 잃은 짐승의 어미가 상상되지 않는가?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남은 것은 남겨진 자의 몫.
그러나 간절한 마음과 별개로, 프로 살인마나 교주가 아닌 그녀는 자신이 행하려는 의식에 서툴기 때문에 그녀가 유일하게 가진 희망인 비디오 테이프를 끝없이 돌려본다. 처음 그녀가 비디오 데크에 비디오를 넣어 돌려보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그 옛날 공포영화의 황금기에 히트를 쳤던 '링'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해서 어떤 오마주일까 했는데, 자꾸보다보니 그녀의 벗겨진 네일과 영상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행복했던 한 때, 그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던 때로 돌아간 그녀의 눈빛은 ' 되감기'라는 액션은 단순히 그녀가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딸과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하는 마음이 투영된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슬프게도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발사된 총알, 뱉어버린 말, 떠나버린 영혼, 죽음 같은 것들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브링허백>은 선언한대로 정서적인 부분에선 <컨저링>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애틋함이 겹쳐지는 순간도 있었다. 이상하게 서양영화를 보는데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예컨대, 로라의 방에 있는 장식장의 창호무늬나, 아이를 잃은 뒤 스스로를 자책하는 비이성적일 정도로 찐한 모성판타지 같은 것들이 말이다. 로라가 딸의 주검을 껴안고 물 속에 반쯤 잠겨 있는 엔딩은 샐리 호킨스의 전작인 <쉐이프오브워터>가 겹쳐지면서, 동시에 가족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해 주검과 함께 지냈다는 사회면의 기사를 떠오르게 했다. 아름다운 것과 그래선 안되는 것. 그것이 공존하고 있는 불편함을 <브링허백>은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렇다.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되기 전 자막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이것은 컬트 영화가 아니다. 먹으려는 존재와 몸 안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올리(실제로는 코너 버드)가 선 밖을 벗어나 고통을 느끼며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은 타인의 몸을 공간화 했다는 부분에서 <겟아웃>을 떠올리는 관객들도 있을 것 같다. 거기서 그쳤으면 아쉬웠을텐데 감독은 올리가 '인간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사물을 뜯어먹고 제 살을 뜯어 먹는 장면은 비슷비슷한 설정 속에서도 자기들만의 한 칼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필리포 감독들의 세계는 깊어지고 있는 중 같다.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 욕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오웬 윌슨 역 )은 낭만이 가득한 1920년대의 파리를 꿈꿨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피카소의 뮤즈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는 1920년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녀가 진정 원한 건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였다. ‘좋은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 파리는 전에 없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강렬한 색채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물랭루주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아름답게 물든 이 시대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의 신사 숙녀들이 넘쳤다. 문화가 꽃피우고 화려하기만 한 시절.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가 번지르르한 가면 뒤에 숨어 있던 화려함의 비밀을 폭로한다.
오디에른 지방 출신의 하녀 셀레스틴(레아 세이두 역).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하녀 일로 삶을 이어나가는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와 도도한 언행으로 여자들에게는 질투의 대상이 남자들에게는 욕망이 대상이 된다. 수많은 집을 거치며 사람에 대한 불신과 염증을 느낀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던 그녀의 새 일터는 노르망디 시골에 사는 부유한 랑레르 부부의 집.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랑레르 부인과 시도 때도 없이 추파를 던지는 랑레르 씨. 저를 반기지 않는 여자 요리사 마리안과 속을 알 수 없는 마부 조제프까지. 조용한 시골에 찾아온 발칙한 셀레스틴의 일상이 시작된다.
영화의 원작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는 ‘벨 에포크’ 시대 소설 장르의 변화를 이끈 옥타브 미르보의 작품. 권력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섰던 지식인 옥타브 미르보는 <쥘 신부>, <세바스티앵 로크> 등의 작품을 통해 금기시되었던 전쟁과 종교에 대한 내용을 담아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예술 비평가로도 활동하면서 로댕, 고흐, 모네 등의 예술가들을 세상에 알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에 맞서 싸워온 그의 대표작 <어느 하녀의 일기>는 당시 아름다운 겉모습과 달리 추악한 행위를 일삼았던 부르주아들의 실상을 하녀의 눈으로 드러냈다. 1946년에는 장 르느아르 감독을 통해, 1964년에는 루이스 브뉴엘 감독을 통해 이미 2번이나 리메이크되며 그 저력을 입증한 <어느 하녀의 일기>. 2015년 브누와 쟉꼬 감독의 손 끝에서 매력적인 레아 세이두로 다시 태어난 <어느 하녀의 일기>는 그들만의 색을 자랑한다.
기존 영화들이 보여주는 '하녀'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어느 하녀의 일기>. 어리고 예쁜 하녀와 그녀를 향한 성욕에 물든 부자 주인, 젊고 예쁜 하녀를 질투하는 안방마님까지 신선하지 않은 이미지들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배우의 힘 덕분이다. 이미 <페어웰, 마이 퀸>에서 브누와 쟉꼬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레아 세이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 역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하녀로 거듭났다. 몸은 굽혀도 마음은 굽히지 않는 도도한 태도와 상대를 교묘하게 비꼬는 예리한 언행, 귀족들에게 지지 않는 세련된 패션 감각과 우아한 몸짓의 이 하녀는 그저 순종적인 다른 하녀들과 차원이 다른 마력을 내뿜으며 스크린 밖 관객들까지 유혹한다.
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 어떤 내레이션도 없이 진행된다. 또한 원작 출판 당시 빈번한 플래시백과 과거 회상 형식으로 전통적 소설 장르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부분 역시 재현되고는 있지만 다소 짧고 빠른감이 있어 아쉬움을 안긴다. 대신 레아 세이두의 표정과 혼잣말, 몸짓이 그녀의 속마음을 완벽히 대변하고. 쉴 틈 없이 지나가는 셀레스틴의 일상 속에서는 그녀가 느끼는 피곤과 그녀 주위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호기심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19세기 고증에 정성을 기울인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어느 하녀의 일기>. 그 시대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 큰 저택과 안에 들어 있는 장식품들은 부유층이 누렸던 사치를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추악함은 그 악취를 숨기지 못하고. 셀레스틴을 향한 마수들은 금욕적인 척하며 뒤로는 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는데. 또다시 찾아온 평화의 시대. 과거 그 어느 시절보다 부유하고 다양화된 21세기에는 진짜 하녀들부터 기업과 국가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눈부신 발전 속에 숨겨진 이면을 폭로할 수많은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볼 날이 오길 기다린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지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JIFF 데일리] 세상이 뜯어내 버린 역사의 한 페이지
코파 1971(Copa 71)
레이첼 램지, 제임스 얼스킨
France | 2023 | 90min | DCP | Color/B&W | Documentary | 전체관람가 | Asian Premiere
기록적인 관중들이 지켜본 가운데 치러진 1971년 여자 축구 월드컵. 월드컵에 참가한 선구자들이 모여 50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을 바탕으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축구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여성 축구가 활발하던 와중인 1921년, “축구는 여성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다”며 여성의 축구장 사용을 금지하였고 ‘누구에게나 찬란한’ 스포츠인 축구는 그로부터 50년 동안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다.
<코파 1971>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니 세상이 우리에게 숨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TV 시리즈 [디스 이즈 풋볼](2019), 장편 <리버풀 FC: 엔드 오브 스톰>(2020) 등 다양한 스포츠 작품을 연출한 ‘레이첼 램지’, ‘제임스 얼스킨’ 감독 듀오의 신작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1991년,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여자 축구 월드컵에서 시작하여 비밀스러운 1971년의 기록 속으로 돌파해 나가는 영화는, 영화 속 대사처럼 보는 내내 “왜 이걸 몰랐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엘바, 영국의 캐롤, 이탈리아의 스키아보. 1971년 여자 축구 월드컵의 주역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50년을 기다린 ‘영웅’들의 서사를 들려주는 다큐멘터리는 이들이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핍박을 받으며 축구라는 꿈을 이어나갔는지를 들려준다.
1970년, 남자 축구 월드컵의 흥행으로 인하여 축구의 인기는 더욱 상승하고, 멕시코는 이 기세를 몰아 전략적으로 ‘여자 월드컵’을 개최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선수부터 협회 구성원까지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축구 업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흥행을 예감한 멕시코는 자국 미디어 그룹을 등에 업고 월드컵 경기장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과 아즈테카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여는 작업에 들어간다.
© 전주국제영화제
티켓을 팔아 수익을 내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정작 참가한 선수들에 대한 보상은커녕, 선수의 인권까지 고려되지 않았지만, 인생 처음으로 환호와 열기 속에 잔디를 밟은 선수들은 경기를 뛸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 전주국제영화제
입이 떡 벌어지는 프리킥 장면부터 선방까지 압도적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 개개인이 이 능력을 발판 삼아 축구로 성공한다거나, 이 월드컵으로 인하여 여자 축구의 역사가 바뀌었다거나 하는 스토리를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레전드 여자 축구 선수 ‘알렉스 모건’조차 이 월드컵의 존재를 몰랐으니 말이다.
“You don’t know then, but you will”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더 나아가 관심을 두게 하는 것.
다큐멘터리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코파 1971>은 여자 축구를 거부한 ‘영국’에서 절찬 상영중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그래서 1971년, 비공식 여자 축구 월드컵의 우승 국가는 어디였냐구요?
X월 X일 극장에서 확인해 보세요!
를 외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Adios.
월드시네마 - <코파 1971>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스케쥴
2024.05.02(목) 10:00 |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109)
2024.05.04(토) 20:30 | CGV전주고사 5관 (364) *GV
2024.05.06(월) 16:30 |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538)
씨네랩 에디터 Cammie
-
- <토베 얀손> 사랑이라는 그림에 눌러 담은 예술가의 삶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토베 얀손>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핀란드의 명망 높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히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토베 얀손(알마 포이스티)'은 주관이 뚜렷한 예술세계로 인해 아버지와 세상의 인정을 이끌어내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틈틈이 만화 캐릭터인 '무민'을 그리면서, 또 유부남 국회의원이자 애인인 '아토스(샨티 로니)'와 만나면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토베는 연극 연출가 '비비카(크리스타 코소넨)'로부터 삽화 의뢰를 받고, 두 예술가는 이내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비비카의 도움을 받아 시청 벽화를 그리며 인정받고 그녀와의 사랑 속에서 의도치 않게 무민의 세계관도 넓혀나가던 토베. 그러나 비비카가 돌연 파리로 떠나면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던 그녀의 사랑과 예술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 캐릭터들 중 빼놓으면 섭섭한 캐릭터인 무민은 국내에서도 전시회가 열리거나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이 진행되는 등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캐릭터의 유명세에 비해 북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트롤이 원형인 이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되었고, 창작자인 토베 얀손이 왜 이들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토베 얀손>은 196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으며, 핀란드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던 예술가 토베 얀손의 덜 알려진 이야기를 담담히, 다만 꾹꾹 눌러 담아 그려낸다.
자이다 베르그로트 감독은 토베 얀손을 두 개의 갈림길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우선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예술가의 인생에 주목한다. 핀란드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인 아버지 밑에서 예술가로 자라난 만큼 순수 회화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토베는 그림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남들이 보기에 그저 자연 풍광을 추상적으로 그린 듯 보이는 그림에는 상황과 때에 맞춰 달라지기도 하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담는다. 여성의 흡연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시기에 자신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예술가 지원금 선정 여부가 달린 중요한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한다.
반대로 틈틈이 그려오던 무민 만화에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지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서 그녀의 고통은 싹을 틔운다. 가족, 친구, 심지어 애인들마저 그런 그녀의 재능은 정작 만화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삶이 극적인 순간이나 전환점에 도달할 때마다 항상 무민을 그리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는 숲으로 도망가는 무민을 그린다. 비비안과 사랑을 속삭이던 행복함은 늘 붙어 다니면서 둘만 알 수 있는 언어로 대화하는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한편 이별의 아픔과 사랑의 상처는 겉으로는 늘 친절하지만 내면은 흉터로 가득한 캐릭터의 원형이 된다.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 높게 평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모습을 가장 잘 담아내는 것이 모두 어긋나다 보니 한 명의 예술가로서 토베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 작가, 화가, 각본가, 만화가 중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그녀의 내적 혼란을 보다 다양한 층위로 구성한다. 토베의 내적 고민과 외적 갈등을 다룬 에피소드를 하나씩 넘나들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이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불협화음을 그녀의 인간관계를 통해 외면화하며 그녀의 예술적 고뇌와 나머지 인생의 갈등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다. 그 결과 자칫 난해하거나 낯설 수 있던 그녀의 아픔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고뇌는 가족, 친구, 애인들과의 갈등을 통해 익숙한 감정으로 치환되고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새로운 초상화에 만족해하며 아토스에게 그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월세를 독촉하는 집주인과 본처에게 전화를 받고 자신을 떠나야 하는 애인이라는 현실을 마주한다. 시청 벽화를 그리게 되어 마침내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후에도 딸의 예술 세계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카메라는 사인회를 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토베와 순수 미술가로 성공을 거둔 절친들을 한 앵글에 담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토베는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아이들이 작가인 자신보다 캐릭터들을 더 사랑한다고 자조하고, 동시에 파리에 열리는 전시회에 와달라는 친구의 초청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범성애 성향을 지녔던 토베가 남자 연인인 아토스, 그리고 여자 연인인 비비안과 함께하는 순간은 특히 눈에 띈다. 두 연인이 토베와의 관계를 대하는 상이한 태도는 토베의 마음을 뒤집어 밖으로 꺼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차이는 토베에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러난다. 첫 번째 연인이었던 아토스는 결혼을 그 자체로 자신의 순수한 감정이 발산된 결과로 여기며, 그래서 그는 토베와의 결혼을 하나의 종착역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신중하다. 반면에 비비안에게 결혼은 자신의 열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발판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결혼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패막이고, 그래서 비비안은 토베와의 관계 역시 사랑의 흐름이 자유롭게 거쳐가는 간이역처럼 생각한다.
이는 토베가 그림과 만화에 상반된 가치를 부여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토스가 항상 토베와의 관계에서 진지하고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순간에도 일관된 애정을 표현한 것처럼 토베는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미술, 순수 회화를 향한 로망을 숨기지 못한다. 반면에 비비안이 사랑을 쉽게 생각하듯이, 토베는 무민과 만화에 그리 큰 애정을 주지 않는다.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계약이 끝나자마자 만화 연재를 포기하고, 동생이 만화를 대신 이어가는 것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토스와 비비안 사이에서 방황하듯 내심 그림과 만화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토록 복잡한 토베의 마음과 예술도 사랑도 뜻대로 되지 않는 그녀의 삶은 영리한 연출과 편집의 힘 덕분에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영화가 유사한 춤 장면을 반복해서 선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두 연인 사이에서 선택을 내린 순간 그녀는 혼자 춤춘다. 이때 카메라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의 어두운 얼굴에 주목하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는 모습을 포착한다. 흥미로운 것은 토베의 춤이 오프닝 장면에서 먼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토베의 춤은 좁게 보면 사랑의 아픔을, 길게 보면 그전까지 계속해서 보여준 한 예술가의 인생을 동시에 함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엔딩 크레디트에서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춤추는 실제 토베의 영상과 대조를 이루며 토베의 선택과 결단에 무게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편집은 토베 얀손의 삶에 녹아 있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결의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한 박자씩 느리게 화면을 전환시키면서 매 순간마다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그렇다고 해서 템포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그녀의 긴 생애 중 무민이 만들어지고 유명세를 얻게 되는 약 10년 간의 시간 안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보여주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풍부하고 구체적인 감정 묘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 텀이 길어지는 에피소드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그 결과 <토베 얀손>은 결코 모든 장면이 유기적으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끊어지는 둔탁한 지점의 매력이 그조차도 잊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스케치한 한 예술가, 더 나아가 한 인간의 삶과 고뇌
-
- 미셸 공드리, 이런 사람이었어?
몇 달 전, '미셸 공드리가 좋은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영화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쓴 글이었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미셸 공드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극 영화를 보았습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제작자와의 의견 충돌로 숙모 집으로 도망친 영화감독 '마크'의 이야기입니다. '마크'는 그곳에서 자신의 스태프들과 함께 영화를 더 창의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행하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는 법입니다. 게다가 그걸 미셸 공드리가 만들었다면?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공드리의 솔루션북>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2024년 8월 14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
The Book of Solution
Summary
영화감독 '마크'는 자신의 새로운 걸작이 제작자들 때문에 망할 위기에 처하자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 숙모가 있는 마을로 탈출한다. 머릿속에 쏟아지는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실행하기 시작하는 '마크'. 세계가 인정한 천재 감독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감독을 동시에 해내는 그는 영화의 완성이 늦어지자,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솔루션북’을 꺼낸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미셸 공드리
출연: 피에르 니네, 블랑슈 가르댕 외
자기 조롱을 잔뜩 묻혀 만든 캐릭터
미셸 공드리 다큐멘터리를 보고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미셸 공드리: 스스로 해라>는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와 10년간 함께한 조감독 출신 프랑소와 네메타 감독의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미셸 공드리를 향한 애정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프랑소와 네메타 감독이 담아낸 미셸 공드리를 보며, '장점이 많다, 창작을 사랑한다, 비상하다, 결단력이 있다, 귀엽다'라는 저만의 '미셸 공드리가 좋은 5가지 이유'를 추려내기도 했지요.
<미셸 공드리: 스스로 해라>가 주변인이 바라본 미셸 공드리를 담은 영화였다면, 이번 작품은 미셸 공드리 자신이 바라본 미셸 공드리를 담은 영화입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성격과 주변인이 생각하는 성격이 다르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누가 봐도 미셸 공드리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마크’는 누구보다 창작을 사랑하고, 비상하며, 결단력 있는 사람이긴 하나, 장점이 많고, 귀여운 사람인지는 영 아리송합니다.
미셸 공드리, 아니 ‘마크’는 기분대로 행동하고, 오만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속 좁은 인물입니다. 천재인 건 분명해 보이나, 그만의 예술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기행에 가깝죠.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녹음실을 예약해달라고 하지 않나, 기껏 만든 편집본은 죽어도 안 보겠다고 징징거리지 않나. 제가 ‘마크’의 스태프였다면, 언제나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겁니다. 아니, 이게 미셸 공드리의 본모습이라니요.
그런데 마음속에서 영화를 숙성하며 곰곰이 반추해 보니, 문득 이것만큼 대단한 시도가 없다는 생각에 미치더군요. 자기의 흠을 있는 그대로, 혹은 더 과장하여 드러내는 것. 저는 아무렇게나 끄적여도 상관없는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쓸 때도 과하게 자기 검열을 합니다. 혹시 나의 흠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얼마나 많은 되새김질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일기장에도 아무렇게나 마구 써대는 것을 쉬이 용납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차지 않는 걸 써내고 만들 바에야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걸 택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결함은 있는 건데 말입니다.
미셸 공드리는 ‘마크’를 “자기 조롱”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일인지 몇 개의 글을 썼다 지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 ⊙ ⊙
미셸 공드리가 못남을 드러낸 이유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마크‘가 자신만의 해결 방법으로 헤쳐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해결 방법들은 자신만의 ‘솔루션북’에 차곡차곡 쌓여가죠.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해결 방법들은 미셸 공드리의 실제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 적이 있는 원칙들입니다.
‘계획을 실행하라’, ‘하면서 배워라’, ‘남의 말을 듣지 마라’로 흘러가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해결 방법은 예상치 못하게도 ‘남의 말을 들어라’로 끝을 맺습니다. 미셸 공드리가 기분대로 행동하고, 오만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속 좁은 예술가의 기행에 서사를 부여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지점이지요. 기행을 부리는 사람이 ‘예술가’로서 박수받으려면 결국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러했다는 것이고요.
어쩌면 그는 자기 조롱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통해 ‘미셸 공드리’라는 이름에 쏟아지는 영광도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라며, 주변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미셸 공드리의 스태프였다면,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사직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 같습니다.
⊙ ⊙ ⊙
미셸 공드리가 자신을 투영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그만의 독특한 크리에이티브를 빼놓았을 리 없지요. <공드리의 솔루션북>에도 역시 내러티브에 에너지와 웃음을 더하는 참신한 영화적 장치들이 속속 들어 있습니다. 특히 좋았던 건, 부끄러워 땅굴 속에 숨어버리고 싶다는 은유적 표현을 냅다 현실에 구현해 버린 엔딩과 영화 중간에 삽입된 여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입니다. 미셸 공드리는 이름난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종이를 오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걸 즐긴다고 하지요. ‘마크’의 모습으로나마 그 과정과 결과를 볼 수 있어, 공드리 팬으로서 참 좋았습니다.
One-Liner
기발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지 기발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
-
-
- 왓챠 <사막의 왕> 티저 예고편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있어. 바로 평범한 삶이야.”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사막의 왕〉 티저 예고편 공개! 〈D.P.〉 김보통 작가와 왓챠의 만남! 〈사막의 왕〉은 12월 16일 왓챠에서 공개됩니다.
-
- 영화 <드라이브 인 타이페이> 59초 스피드 예고편
#계륜미 #루크에반스 #성강 #드라아브인타이페이#weekendintaipei #2025년대개봉 #뤽베송 #유로파코프 #Europacorp #카체이싱 #weekendintaipei #lukeevans #gweilunmei #sung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