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05 19:12:58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어요.” <브레이킹 아이스> 안소니 첸 감독 인터뷰 (3)
<브레이킹 아이스> 안소니 첸 인터뷰
2편에서 이어집니다.
씨네랩 | 한국과는 또 다른 인연이 있으신데요. 감독님의 단편 데뷔작인 <G-23>가 2005년 제3회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구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되어 뉴필름메이커상까지 수상하였죠. 당시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안소니 첸 | 그걸 언급해 주셔서 흥미롭네요. 아시다시피 서울, 그리고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는 제가 첫 상을 받은 곳이거든요. 그리고 정말 오래전 일이죠. 벌써 20년 전인 2005년 일입니다. 지금이 2025년이니까... 그때 제가 21살이었고, 한국에서 영화로 처음 상을 받은 거였어요. 그래서 제게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씨네랩 | 당시 상영 극장이었던 ‘시네코아’라는 극장은 이듬해인 2006년 폐관하였습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극장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싱가포르 혹은 현재 거주하고 계신 홍콩의 예술극장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시네마’의 의미도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시네마에 대해 물으신다면, 제게 시네마는 정말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제게 영화 제작은 매우 감성적인 경험입니다. 캐릭터들과 너무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거든요. 제 셋째 조감독 중 한 명이 있었는데, 제가 이틀 전에 제 영화를 다시 봤거든요. 그 친구가 오늘 저에게 긴 문자를 보냈는데, 말레이시아 사람이에요. 저희가 이틀 전에 싱가포르에서 작업을 마쳤고, 그는 지금 말레이시아 북부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문자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감독님께서 시네마를 정말 아끼는 거 알아요. 왜냐하면 감독님이 마침내 원하던 테이크, 원하던 장면을 얻을 때마다 감독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볼 수 있거든요.’
저는 영화를 만드는 게 굉장히 감성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포착할 때, 그냥 이야기나 대사, 아름다운 장면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저를 움직이게 하죠. 그게 배우의 연기든, 공간이든 마찬가지예요. 공간에도 감정이 있다고 느끼거든요. 풍경에도 감정이 있고요. 저는 매번 울게 됩니다. 가끔은 배우의 연기에 감동받고, 또 가끔은 그저 어떤 아름다움에 감동받기도 해요.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 촬영했던 게 기억나는데, 그때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워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시네마는 매우 감성적인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영화는 많은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고통과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의도했던 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느낄 때는 정말 아프죠.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깨달은 건, 어떤 면에서는 타협의 매개체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머릿속에서는 완벽함을 계속 찾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 가면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햇살이 가득한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갑자기 비가 온다 거나 하는 거죠. 어떤 날은 배우에게 아주 중요한 장면인데, 배우가 컨디션이 안 좋거나 그 감정을 제대로 살릴 수 없는 날도 있고요.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시네마는 자신이 원하는 그 위치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때로는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 완벽함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당신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이 영화가 저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눈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씨네랩 | 감독님이 재학하셨던 영국 국립영화텔레비전학교(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의 모토가 “우리의 엔딩크레딧은 이야기를 전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감독님 작품의 엔딩 크레딧에는 무엇을 담아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엔딩 크레딧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 거예요. 제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엔딩 크레딧은 제가 직접 만듭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모든 사람의 이름을 직접 타이핑하고 올리고 확인하고 그런 작업을 해요. 엔딩 크레딧에 대해 굉장히 강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는 정말이지 온 마을 사람들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예전에 후반작업 업체에 엔딩 크레딧을 맡기면, 라인 프로듀서든 누구든 항상 누군가의 이름이 틀리거나 철자가 잘못되거나 하는 일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표기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단편 영화를 만들던 시절부터 장편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 모든 이름 하나하나를 제가 직접 하거나 확인하고, 계속 수정하고 수정해서 제대로 올라갔는지 확인합니다.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한 번 올라가면 영원히 남는 거니까요.
이름이 틀렸다고 저에게 와서 말하는 스태프들을 많이 경험했는데, 최소한 이름을 제대로 기재하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제 예술이 영화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도 있습니다. 영화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니까요. 저는 제가 화가였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화가는 그냥 자기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것이고, 아시다시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캔버스를 사서 재료를 사서, 그냥 혼자 해결하고, 혼자 싸우는 거잖아요. 하지만 영화는, 아시다시피, 정말 많은 협업이 필요하고,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엔딩 크레딧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겁니다. “제가 엔딩 크레딧에 신경 쓰는 건 그것이 얼마나 예쁜가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이름을 제대로 기재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네, 저는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제 핸드폰 메모에 항상 도움을 주시거나 무언가를 빌려주신 분들의 이름을 적어둡니다. 1년 뒤에 크레딧을 만들 때 그분께 감사 인사를 잊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기재되도록 항상 확인합니다. 설령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도왔더라도요. 예를 들어, 촬영을 허락해준 카페라든가, 장소를 빌려준 곳이라든가, 소품을 빌려주거나, 저 강아지를 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요. 항상 이름을 치고,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적어둡니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씨네랩 |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안소니 첸 | 딱 한 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딱히 한국 관객들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젊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정말 힘든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훨씬 단순했던 세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비교할 것, 소음이 너무 많은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신체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2년 뒤면 잊어버리는데, 지금 사이버 괴롭힘은 한 번 올라가면 영원히 온라인에 남아요. 아시다시피, 상처를 지울 수도, 아무것도 지울 수가 없죠. 디지털화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젊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뭔가 ‘해 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멈추는 게 없으니까요. 과거에는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는 데 2일을 기다렸고, 그러고 나서 계속 작업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1분 안에 문자를 받으면 바로 작업하고 고쳐야 하고, 끝이 없죠.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정신 건강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걸 이해합니다. 마음이 쉴 시간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게 오늘날 젊은이로 산다는 것의 슬픈 점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 세대나 서너 세대 전과 비교하면 정말 다른 세상이었으니까요. 저는 정말 힘들고, 길을 잃고 외롭고 공허함을 느끼기 아주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이 그렇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어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말이죠.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해결책이 뭘까?’, ‘출구가 뭘까?’ 생각하지만, 어쩌면 답도 해결책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가장 좋은 건 ‘당신이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고통이나 불안감, 길을 잃은 듯한 그 모든 감정은 당신 한 사람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요.
인터뷰의 마지막,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청춘들에게 진심을 전한 안소니 첸 감독. 그가 팬데믹 기간 느낀 단절과 외로움을 바탕으로 그려낸 청춘의 모습과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담긴 <브레이킹 아이스>는 6월 4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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