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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DAY2025-06-23 20:22:24

28년 후 | 야심이 재미를 앞선 좀비 신화

<28년 후>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물학 무기 연구소에서 '분노 바이러스'가 유출되어 좀비가 생겨난 지 어언 28년. 영국 전역이 봉쇄된 가운데, 일부 생존자들이 모인 섬 ‘홀리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12살 소년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는 처음으로 본토로 나갈 준비를 한다. 아버지 '제이미'(에런 타일러존슨)와 함께 감염자를 사냥하는 일종의 성인식을 치를 자격을 얻었기 때문.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마주하면서도 끝끝내 첫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스파이크는 사냥 이후 여러 의문에 사로잡힌다. 본토에서 본 불은 무엇인지, 아버지는 의사 '켈슨'(랄프 파인즈)의 존재를 알면서도 왜 병에 걸린 엄마 '아일라'(조디 코머)의 치료를 그에게 안 맡겼는지, 아버지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지 등. 결국 스파이크는 켈슨에게 엄마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본토로 나서고, 낙오한 스웨덴 군인 '에리크'(에드빈 뤼딩) 등을 만나며 은폐된 진실을 발견한 끝에 자신의 성인식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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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야심을 받치지 못한 좀비물의 재미

 

2003년에 개봉한 <28일 후>는 문자 그대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좀비 영화 장르를 재창조했기 때문. 기존 좀비 영화 속 좀비는 주술로써 만들어졌고,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28일 후>이 보여준 좀비는 전혀 달랐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탄생했고, 사람보다 빠른 공포의 존재였다. 좀비 영화 중 가장 흥행 기록이 좋은 <월드 워 Z>나 <부산행> 속 좀비만 봐도 <28일 후>의 영향력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28일 후>가 남긴 발자국 덕분에 <28년 후>에는 엄청난 기대가 쏠렸다. <28일 후>의 속편인 <28주 후> 이후 18년 만에 나온 후속작이고, <28일 후>의 감독과 작가인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가 모두 복귀했으며, 심지어 새 트릴로지 중 첫 번째 작품이니까. <28년 후>는 좀비 등장 이후 28년이 지난 시간대를 다룬다.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다른 국가들이 브리튼 섬을 봉쇄한 가운데, 영국에 남은 생존자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안타깝게도 <28년 후>는 감독, 작가, 그리고 전작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확장되고 구체화한 세계관은 매력적이고, 디스토피아 사회를 배경으로 새로운 신화를 보여주려 한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의 기획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신화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인 재미와 관객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야심 찬 의도와 별개로 <28년 후>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관객이 외면하는 재미없는 신화는 실전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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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허상을 깨는 성인식

 

<28년 후>가 보여주는 미래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천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과거의 세계다. 인간이 자취를 감춘 브리튼 섬 본토에서는 사슴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뛰어다닌다. 사람들은 마치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작은 마을에서 사냥꾼과 농부 등으로 나뉘어 지낸다. 옷을 입지 않은 채 본능에 충실한 채로 사냥해서 먹고사는 감염자들의 모습은 시간을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이처럼 태초의 공간과 원시의 시대로 돌아간 상황에서 <28년 후>는 스파이크의 성인식을 풀어낸다. 본토에서 격리된 섬에서만 자란 소년은 처음으로 집과 가족 너머의 세상을 경험하며 성인으로 거듭난다. 성인식은 보통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가족의 품을 떠나서 홀로서기를 할 자질을 지녔음을 증명하고, 그간 몰랐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으며, 결국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성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파이크의 이야기는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충족한다. 우선 그는 갑작스럽게 공격당하거나 좀비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그는 겁먹고 얼어붙는 대신 훈련받은 대로 화살을 날리면서 사냥꾼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한다. 감염자들을 처음 마주했던 것처럼 가족의 진실도 처음으로 직시한다.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의 변명을 들으면서 스파이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취약성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스파이크는 가족의 품을 떠나서 섬을 떠나서 집을 떠나서 본토로 세상으로 향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자신을 속인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 처음 사냥할 때만 해도 스파이크에게는 세상의 전부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의 허상이 정작 그의 첫 사냥 성공을 축하하는 성인식 파티를 하는 동안 밝혀지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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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마지막 울타리

 

하지만 스파이크의 성인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기 때문. 그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로 결심한 계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스파이크는 아버지의 불륜뿐만 아니라 그가 숨겨 왔던 진실을 하나 더 알아낸다. 사냥을 떠나 하룻밤을 보낼 때 발견한 불의 주인이 의사 켈슨이고, 그가 수백 구의 생존자와 감염자 시체를 태우며 '뼈의 사원'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

 

 

 

이때 스파이크는 아버지가 들려준 사실을 본인이 보고 싶은 방향으로 믿어 버린다. 아버지는 시체를 굳이 모아서 전부 태우는 행위에 의문을 품었다고 말했지만, 그는 켈슨의 행위보다는 그가 의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일부러 켈슨의 존재를 숨겼다고 결론 내린다. 의사에게 데려가는 대신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를 일부러 방치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홀가분하게 살려는 목적이었다고.

 

 

 

결국 스파이크는 어머니를 데리고 섬을 떠나 켈슨에게 향한다. 아버지에 대한 편견, 의사라면 무조건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 하나에 매달린 채로.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진실을 취사선택하는 미숙함은 그의 여정 곳곳에서 드러난다. 야간 경계 중 좀비에게 물리기 직전까지 졸고 있는 그를 엄마가 구해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달리 말해 엄마를 향한 애착은 그의 성인식을 마지막까지 방해하는 울타리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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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식을 완성하는 '메멘토 모리'

 

이 울타리는 켈슨을 만나서야 무너진다. 스파이크의 눈을 가리고, 그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강박과 믿음이 비로소 깨진다. 스파이크의 변화는 그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초반부에 그는 당연히 죽어야 하는 존재와 절대 죽으면 안 되는 존재로 세계를 나누어서 바라본다. 아버지에게 배운 그대로다. 감염자들은 죽여야만 하는 사냥감일 뿐이고, 엄마는 절대 죽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 없는 본토에서 그의 맹신은 서서히 금이 간다. 임신한 감염자의 출산 과정을 목격하고, 태어난 아이가 빨간 눈을 지니지 않은 비감염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가르침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또 다른 믿음에도 균열이 생긴다. 가까스로 만난 켈슨에 따르면 어머니는 암에 걸렸고, 이미 전신에 암세포가 퍼졌으며,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

 

 

 

켈슨의 말을 못 믿던 스파이크는 자신이 시한부임을 오래전부터 느꼈다는 아일라의 고백을 들은 후에야 그간 부정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진실을 마침내 수용한다. 더 나아가 '메멘토 아모리스'(Memento Amoris), '사랑을 기억하라'라는 가르침도 실천에 옮긴다. 죽음을 기념하는 방법에 따라 죽음이 삶보다 가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니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면서 그는 비로소 어머니라는 울타리 너머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다.

 

 

 

이는 스파이크가 아버지와 함께 겪은 초반부 성인식과 대조되는 후반부 장면들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랑 동트는 하늘을 봤던 스파이크. 그는 이제 '뼈의 사원'에 안치된 엄마의 유골 옆에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한다. 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섬에 돌아왔던 것과 달리, 엄마의 이름을 붙여준 아기를 아버지에게 맡긴 채 다시 본토로 떠난다. 그렇게 스파이크는 진정으로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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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보일이 어레인지한 신화

 

이렇게 보면 <28년 후>는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가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간 잉글랜드를 배경 삼아 새롭게 구성한 신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스파이크의 성인식에서는 원형적인 신화소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일례로 스파이크와 부모님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나란히 누워있는 스파이크와 엄마 사이로 제이미가 끼어들고, 그 직후에 스파이크와 제이미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스파이크가 맞이한 결말도 오이디푸스의 최후와 비슷하다. 그들은 예정된 가족의 비극을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끝내 어머니를 잃은 후에 가족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같다. 그나마 스파이크는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잘못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고 남은 생을 죄책감 속에 살게 된 제이미 입장에서는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28년 후> 트릴로지를 평범한 장르물이 아니라 신화적 서사시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속편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명확하게 느껴진다. 영화가 '지미'(잭 오코넬)를 소개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그의 이름을 여러 복선을 통해 암시한다. 예를 들어 스파이크는 첫 사냥 도중 한 허름한 건물에 매달려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다. 살아서 매달린 채로 감염자에게 물리고 까마귀밥이 된 그의 몸에는 지미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지미는 감염자에게 쫓기던 스파이크를 구해주면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때 그의 외관이 흥미롭다. 금색 장발에 금 장신구로 치장한 스타일을 보다 보면 BBC의 간판 MC였으나 아동 성범죄자로 밝혀진 '지미 새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목에 걸린 역십자가 목걸이는 <28년 후> 트릴로지가 가족 신화에서 멈추지 않고 선과 악, 종교와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시리즈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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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좀비물의 충돌

 

문제는 <28년 후>가 신화를 들려주는 방식이 적절치 않다는 것.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들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유지며 회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메시지를 담아낸 이야기 그 자체가 흥미롭고 흡입력이 있었기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었기에 살아남았고, 살아남았기에 그 메시지와 함의도 보존되고 회자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의 신화는 정작 재미가 없다. 각 캐릭터를 그저 신화를 전개하는 도구로만 다룬 나머지 좀비 영화로서의 이야기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파이크가 엄마랑 본토로 떠나는 장면은 신화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이다. 반면에 좀비 영화로서는 부자연스럽다. 첫 사냥에서 죽을 고생을 한 뒤 자책하던 주인공이 별다른 고민 없이 다시 본토로 떠나는 전개는 그 자체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신화와 좀비 영화 간의 긴장은 스파이크가 기차 안에서 임신한 감염자를 발견하는 순간 정점에 다다른다. 신화적으로는 가족과 죽음의 의미를 고찰하는 계기이지만, 좀비 영화로서는 총부터 들이미는 군인 에리크에게 감정 이입할 수밖에 없다. 신생아가 좀비일지도 모르고, 출산 과정에서의 소음 때문에 다른 좀비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녀의 출산을 도와주는 스파이크 모자의 선택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으니까.

 

 

 

좀비로부터의 생존보다는 신화적 전개에만 필요한 장면이 반복된 결과 뼈의 사원에서 펼쳐지는 후반부 시퀀스는 물음표로 가득해진다. 시한부라 해도 엄마를 즉시 죽이고 화장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감염자의 출산을 돕다가 죽은 에리크의 해골을 사원에 안치하는 게 과연 적절한 위로일지 의아한 것. 결국 이처럼 이야기의 재미보다 기괴한 인상이 주목받는 순간, 대니 보일의 새 신화가 의도한 종교적 의미는 자연히 설득력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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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 실망이 큰 좀비 신화

 

사실 <28년 후>는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군화'를 활용한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군 보병들이 행군에서 영감을 얻은 '군화'는 소름 끼치고 옥죄어드는 심정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28년 후>는 이 시를 낭송하는 내레이션을 삽입하여 처음 사냥에 나서는 스파이크의 긴장감과 공포감으로 영화관을 가득 채운다.

 

 

 

아이폰으로 진행된 촬영과 FPS 게임을 보는 것처럼 화살에 맞는 순간 피가 렌즈에 튀고 정지된 화면 여러 개가 이어지는 연출도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살아가는 스파이크의 혼란스러움을 직관적으로 전달해 준다. 그러나 뛰어난 기술적 완성도와 특이점은 신화와 좀비물의 갈등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러한 <28년 후>의 만듦새에서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28일 후>와 비슷한 시기에 <새벽의 저주>로 좀비 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잭 스나이더가 20여 년 만에 제작, 연출한 넷플릭스 좀비 영화 <아미 오브 데드>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 감독 본인의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해 신화적 메타포를 적극 활용했다가 오랜만의 복귀로 높아진 기대감을 충족하지 못한 결과물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신기한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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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 형편없음

 

청중과 독자의 공감을 사지 못하는 신화는 실전되는 법

작성자 . KinoDAY

출처 . https://blog.naver.com/potter1113/22390909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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