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7-07 22:32:22
현실로 열리는 제안
<콘클라베>(2024)
<콘클라베(Conclave)>(2024, 에드워드 버거)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올해 3월에 완성한 글
“우리의 확신 사이에” 있는 것
의심을 선택한 사람들
로렌스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화면이 들어온다. 한밤중의 도로변, 굽은 등과 가방을 쥔 손이 보인다. 바쁜 걸음, 숨소리와 자동차의 소음은 불협화음을 이룬다. 엘리베이터에 이르자 카메라는 모자를 꽉 쥔 손을 클로즈업한다. 다다른 곳은 교황의 방, 로렌스는 교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 왔다. 엄숙한 추기경들의 표정에 얹히는 것은 긴박한 연주곡이다. 화면은 탁하고 어둡다. 교황의 반지를 가르거나 시신을 다루는 행위는 음악의 박자에 맞춰 짧은 클로즈업들로 흐른다. 랩핑된 채 흔들리는 시신 위로 타이틀이 오버랩된다. <콘클라베>의 오프닝은 각종 수단을 동원해 스릴러의 톤을 설정한다. “이제 교황의 자리는 공석”이라는 트랑블레의 발단 선언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로렌스의 얼굴은, 그중 이질적이다. 그에게 드리워진 이질감/어긋남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마리가 된다.
대부분 실질적 로멜리(영화의 로렌스)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을 <콘클라베>가 영상화하는 방법은 은유와 관찰이다. 카메라는 로렌스의 눈이 돼주기보단 그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와중 주위 배경과 인물을 우회한다. 로렌스가 자신의 의중과 콘클라베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짐작한다. “기도에 어려움을 겪는” 그는 잘 열리지 않는 지퍼백에 화풀이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잠들어 버린다. 내면의 불신과 불안은 그가 시선을 외부로 돌려 ‘사소해 보이는’ 것에 질문을 던지도록 돕는다. 추기경 단장인 로렌스는 어떤 면에서 자발적으로 고립된다. 그 신호들은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때만 나타나지 않는다. 로렌스의 연설이 끝나자 마치 그와 적대하듯 앉아 있는 추기경들의 군상이 효과음과 함께 내려앉는다. 아데예미나 트랑블레의 방에서 대화를 나눈 후, 영화는 방 구조를 이용해 안쪽에 있는 상대방을 가리고 문간에 선 로렌스만이 보이도록 촬영한 숏을 끼워넣는다. ‘편’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신 매초의 감각을 흡수해 유동하는 자, 로렌스에겐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사고할 시공간이 필요하다.
로렌스가 옷깃을 잡은 테데스코의 손을 뿌리치거나 베니테스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장면에서 프레임은 손이 보이지 않도록 잘려 있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닌 안면의 진동, (어느 쪽으로건)흔들리는 심리의 노출이다.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스릴러지만 효과적인 서스펜스와 쇼크 전달은 사실 주목적이 아니다. 영화는 비밀을 수면 위로 올려 사건으로 다루는 주체, 로렌스의 태도와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이 ‘주체’는 뚜렷한 욕망과 목표를 가지고 성큼성큼 걷는 대신 짙은 안개를 더듬으며 힘겹게 나아간다. 의심을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는 “조종사”(-벨리니), 그의 선택들은 확신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거리를 두는 자는 로렌스만이 아니다. 콘클라베의 선장이 태운 낯선 자- 영화는 추기경 떼숏을 촬영하며 첫 등장처럼 홀로 동떨어져 있는 베니테스를 놓치지 않는다. 의중 결정 추기경으로 막 로마에 도착한 그의 상황에 맞는 자연스러운 배치다. 허나 유력 후보를 논하거나 편을 갈라 선거운동을 하고 소문을 부풀리는 정치적 움직임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그의 이질성은 비자발성과 자발성을 모두 내포한다.
원작이 그러했듯 영화는 추기경들의 권력다툼과 뒤이어 드러나는 트랑블레의 비리를 중심에 두고 서스펜스를 구성하는 와중, 베니테스의 ‘컨디션’에 관한 정보를 복선으로 끼워 두었다. 지나가듯 꾸준히 언급되던 미스터리의 정체는 갈등이 전부 해소되었다고 여겨질 무렵 새로운 사건의 발단처럼 공개된다. 그러나 이 ‘갈등’/미스터리는 밝혀지더라도 해소되지 않는 것, 아니 해소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분열된 추기경들을 한데 모으는 영웅으로 보였던 그의 교황 선출은 기성 정치의 통합 성공보다는 그 해체의 시작이고 의도치 않은 반역이다. 로렌스가 확신을 지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베니테스는 그 자신의 말대로 “사람들의 확신 사이에 존재하는” 이다. 인터섹스인 그의 몸은 여성/남성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확신의 과학' 사이에 있다. 서구권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같은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기에 신체를 규범에 끼워 맞추는 수술도 받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아를 선호하는 문화권에서 태어나 남자아이로 길러졌기에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소외된 환경이 그가 비규범에 비규범이 얹힌(확신의 성별이분법과 종교의 확신-관습을 깨는) 형상이 되도록 이끈 것이다. 저도모르게 틈새의 몸이 된 그는 교회가 아닌 가치를 따라 종교인의 길을 걸으며 전쟁(:거듭된 확신의 극단적 결과) 피해 여성들을 도왔다. 그가 틈새를 어루만지는 데에 종교를 ‘사용해 온’ 과정에는 선택이 포함된다. 전 교황이 그를 대주교로 임명한 것 역시 선택이고 로렌스가 그를 선거인단에서 배제하지 않은 것도 작은 선택이다. 몸과 정체성, 사명에 관해 오랜 세월 끊임없이 고민/의심했고 끝에 “나는 신이 만드신 그대로”라고 여기게 되었다. 베니테스는 스스로를 ‘남성’/‘여성’으로 확언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낡고 거대한 가부장제”(-피터 스트로겐, [Deadline])를 유지해 온 가톨릭 교회 내에서 노동은 하지만 발언권은 없는 여성들의 지위를 재정립해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 <콘클라베>는, ‘여성과 남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아이디어까지 담고 있다.
모든 성sex과 모든 언어를 인식하는
바깥과 연결되는 정치
영화는 여러 언어들을 등장시키며 그것들이 평등하게 취급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테데스코는 일관되게 이탈리아어를 쓰며 라틴어 사용을 주장하고, 그와 로렌스의 대화는 영어도 섞이나 대개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다. 로렌스와 베니테스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지고, (아마도)나이지리아어는 아데예미와 샤누미가 방에서 언쟁할 때만 뭉개져 들릴 뿐이다. 그러나 로렌스의 연설은 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시작할 무렵 영어로 바뀐다. 베니테스의 식전기도와 연설은 영어로 주의를 환기한 후 스페인어로 전환된다. 그 전환과 함께 작품은 핵심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발화한다. 일부에게 맞춰 구성된 기준에서 탈락되고 소외된 것들을 복기해야 한다고 -자신의 제1언어first language로 먹고 마시지 못하는 이들을 상기시키고 수녀들의 노고를 기리는 베니테스를 통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서구의 식민지배가 앗아간 언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분열된 모든 언어는 들려야 한다. 베니테스가 마법같은 일치를 획득한 듯 보임에도, 원작에 적힌 투표 결과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영화에도 새 교황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거나 기꺼워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라틴어로 하나되기’ 식의 통합은 위험한 환상이다. 그의 ‘정체’가 알려진다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테다. 베니테스는 비난을 걱정하는 대신 “신이 주신 내 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서로 엇갈리고 충돌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계속해서 조율하며 새로운 가치를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할 일이 아닌가.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테데스코의 연설을 듣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벨리니처럼 손가락질하는 것보다는, 베니테스처럼 외부로 시야를 넓히며 설득을 시도하는 행위가, <콘클라베>가 지향하는 정치에 가깝지 않을까.
그 정치가 인식하고 요구하는 행위자는 발언권을 쥔 이들만이 아니다. 영화는 로렌스 외에 한 명의 관찰자-화자를 더했다. 아그네스다. 오프닝에서 첫 번째 시선인 로렌스가 소개된 후, 콘클라베 당일 아침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아그네스가 보여지며 두 번째 시선이 소개됐다. 로렌스에 비해 비중은 훨씬 적지만 그의 관점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와 더불어 가시화되는 바는 수녀들의 구체적인 노동이다. 로렌스가 실패한 복사를 아그네스가 해주는 장면은 묵언의 지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수녀들의 노동 없이는 추기경들의 ‘중요한 업무’ 수행도 불가능함을 상징한다. 앞서 샤누미와 로렌스가 대화하지 못하게 막았던 아그네스가 언성을 높여 트랑블레를 폭로하는 것 역시 로렌스에 대한 동의 이상을 의미한다. 베니테스의 식사 기도를 듣고 미소짓는 얼굴이나 로렌스의 연설을 듣는 얼굴, 교황의 방 문 봉인이 깨진 것을 보고 긴장하는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등, 영화는 아그네스의 마음이 움직이는 찰나에 주목했다. 그것들이 모여 ‘으레 그렇게 해 왔던 것’에 대한 의심으로 형상화된 순간, 목소리가 삭제되었던 존재가 침묵의 봉인을 깨는 장면을 <콘클라베>는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투표권이 없는 그의 선택은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
베니테스는 ‘예상 밖이지만 예정되어 있던’ 리더의 재목이나 초월한/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의 득표는 느닷없는 우연이나 종교적 계시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권력다툼으로 얼룩진 콘클라베를 지나는 동안- 목격하고 감각한 것들이 쌓이고 베니테스의 연설에 다다라 낳은 결과다. 신의 호통처럼 연출된 폭발은 추기경들을 바깥 세상과 연결되게 했다. 교회는(정치는) 전통에 매몰되고 바티칸에 밀폐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의 바람wind/hope을 느끼며 내일을 바라보고 현재를 어루만져야 한다.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추기경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무결’한 교황의 탄생은 검은 우산이 흰 우산이 되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허나 <콘클라베>는 잘 짜인 연극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가 살짝 바꾸고 추가한 엔딩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단 원작은, 교황으로 선출된 베니테스와 독대를 마친 로멜리에게서 시선을 빼앗는다. 전통의례를 거부하고 추기경들 각자와 악수하는 “인노켄티우스 14세”와, 그의 온화함에 경쟁자들이 안도하고 테데스코마저 떨떠름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전지적 작가가 묘사한다. 로멜리의 위치에선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멀리서 함성이 들려올 따름이다. 세밀하게 내면을 서술하며 아끼던 주인공을 그 지점에 내버려둔 채로, 로버트 해리스는 오말리가 연통에 불을 지피듯 독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려는 것 같았다.
영화는 또 하나의 확신이 깨진 로렌스의 성찰을 관찰한다. 눈물의 방을 나온 그는 멍하니 앉아 있다. 홀을 가로지르는 거북이 보인다. 거북을 들고 ‘밖으로 나간’ 로렌스의 귀에 거대한 함성이 들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가 덧붙인,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엔딩이 이어진다. 로렌스의 방, 침대에 앉아 있는 그는 홀가분하고 허탈해 보인다. 닫혀 있던 덧창이 올라가고 빛이 들어온다. 로렌스는 창밖을 내다본다. 수녀 셋이 문을 열고 나와 대화를 나누며 광장을 건너 화면을 나간다. 바티칸의 가장 ‘낮은’, 자주 비가시화되는 곳을 응시하며, 아래에서 위로 퍼져나가는 목소리를 로렌스는 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미래의 방향을 보여주고 거기 포함시키며, 영화는 관객에게 화면 바깥을 의식할 것을 주문한다. <콘클라베>의 끝에는 연극무대와 함께 닫히는 선명한 판타지보단 현실로 열리는 모호한 제안이 있다. (신을 믿든 아니든) 관객이 기억해야 할 것은 로렌스와 베니테스의 여정과 태도, 그리고 같은 쪽을 바라보는 듯했던 그들이 충돌했을 때 이루어지는 대화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로렌스의 태도다. 피터 스트로겐의 말대로 “양극화된 세계”[Deadline]다. <소셜 딜레마>(2020)가 우려했고 <시빌 워>(2023)가 상상-경고한 내전을 (분명 미국의 특수성이 있지만)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로 넘겨도 되는가. 이러한 시대에 의심의 태도를 제안하는, <콘클라베>는 소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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