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7-14 19:52:31
7월 2주차 <대사 한 줄, 영화 한 입>
<인터스텔라>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한 주의 시작을 여는
대사 한 줄🎞️, 영화 한 입🥠
안녕하세요, 씨네픽지기입니다 🐥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정말 유명한 대사죠. 이 작품을 보지 않은 분들도
이 대사만큼은 익숙하실 것 같아요.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입니다.
요즘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 소식을 들으며
한국에서는 외국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SF 장르가 크게 인기를 끌기 어려운 국내에서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
결국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우주를 관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수많은 명장면과 함께 좋은 대사들이 정말 많죠…
오늘 하루, 인터스텔라의 주인공들처럼 답을 찾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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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개봉 20일째인 11일 오전 누적 관객 수 7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천만 영화를 향해가고 있는 <서울의 봄>이 개봉 3주차에도 150만여 명의 주말 관객 수를 끌어모으며 식을 줄 모르는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편<노량: 죽음의 바다>가 오는 20일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요.
과연 오랜만에 붐비는 극장의 관객들을이어서 가져올수 있을까요?
개봉 3주 차를 맞이한 <서울의 봄>의 화력은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고 주말 관객 수 15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11일 누적관객 수 7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올해 두 번째 1000만 영화에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6일 날 개봉한 <3일의 휴가>, <나폴레옹>이 <서울의 봄>을 꺾지 못하면서 나란히
2,3위를 차지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북미 공개 첫 주에 매출액 1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일본에서 지난 7월 공개되어 약 754억원의 매출액을 벌어들였고, 국내에서는 지난 10월에
개봉하면서 199만명을 기록중입니다. 한편 영화 <트롤: 밴드 투게더>가 전 세계 13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를 꺾고 흥행 반전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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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이 추는 칼춤
강아지 한 마리 죽음으로 발생한 나비효과는 과연 어디까지 퍼지는가. <존 윅> 시리즈는 액션 장르의 고점을 갱신하는 액션 영화라고 치부한다. 후속 편이 나올수록 화려하고, 고도화되는 액션의 질은 고혹하기까지 하다. 검은 방탄 슈트를 입으며 적들을 피로 물들게 하는 모습이 마치 피어오른 붉은 꽃이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하게 한다. 바바야가, 존 윅, 조니, 조나단, 부기맨 등 별명도 참으로 많은 사신(死神) 존 윅이 추는 라스트댄스 <존윅 4>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 윅 4> 스틸컷
<존 윅 4>라는 제목이 다가오는 느낌은 <존 윅> 시리즈를 끝맺는 수미상관을 보여준다. 1편 제목이 <존 윅>이었던 반면, 후속작 2,3편은 각각 '리로드', '파라벨룸'이라는 부제가 있었다. 킬러들의 세계관에서 최고 회의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아무도 얻지 못할 자유를 통해 '헬렌'의 다정한 남편이 되고자 한다. <존 윅 4>는 <존 윅> 시리즈의 끝맺음이다. 애초에 영화가 끝맺음을 짓기 위해 흘러간다. 이들도 아무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사람을 죽이고, 최고 회의 간부를 몇 차례 죽인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도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 속에서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보여줄 수 있는 액션 장르를 있는 힘껏 선사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사막에서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과 마지막 플롯에서 케인(견자단)과 권총 한 자루로 자웅을 겨루는 일대일 장면은 웨스턴 장르에 자주 등장하는 액션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리고 <존 윅:파라벨룸>에서도 등장했던 동양 무술을 이번 영화에도 선보이는데, 오사카 콘티넨탈 호텔이라는 장소에 맞는 일본식 검술도 등장하여 동양 무술 액션에 폭을 넓혔다. 심지어, 이번 등장인물에 동양 무술영화의 대가인 '견자단'까지 등장하니 깊이까지 더한다. 배우 견자단이 맡고 있는 '케인'은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비슷하듯 비슷하지 않다. 케인(견자단)은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적들을 소탕한다. 칼과 총, 주먹으로 해결하는 케인이지만, 존 윅은 이번 편에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다. 특히, 쌍절곤을 활용한 액션이 기억이 남는데, 이소룡이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자 동양 무술의 폭을 넓혔다는 취지에 어울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윅> 시리즈는 장소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액션으로 활용할 줄 안다.
그러나 <존 윅:리로드>부터 장소의 특징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감과 조명이 가미된 장소에서 선보이는 액션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고도화된 액션 장면들은 오직 <존 윅>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미장센이 돼버렸다. 그러나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액션이 재미는 더하지만, 자칫 관객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존 윅 4>는 로테이션 액션 촬영에 더 비중을 중요시했다. 후반부 프랑스 시내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또 한 번 신선함을 선보인다. 프랑스 이름 모를 시내 내부와 개선문,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성당까지 가기 위한 222 계단 등에서 펼치는 액션은 장소 특징을 살린 것과 동시에 자연광이 비치는 풍경의 미학까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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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광 감독님이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웅남이 탄생
빠라바라빰~ 안녕하세요! 말봉 티비입니다! 유튜버 말봉.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초 하이텐션으로 방송을 이끄는 말봉. 구독자는 열 명 밖에 없다. 그래도 돈 벌어야지. 방송 진행을 멈추지 않는다. 짜자잔-! 이번 게스트는 나 웅 남! 이 말을 하자마자 어류를 입에 물고 웅남이가 튀어나왔다. 웅남이에게 멘트를 거는 말봉. 웅남이가 지 맘대로 대답하는 탓에 방송을 갑자기 마무리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얼핏 보면 무슨 주종관계 같은 느낌이지만 둘은 아무래도 친구다.
웅남이는 좀 특별한 존재다. 웅남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느 동굴에 있었는데, 곰 사이에 껴있는 아이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이름을 웅남이라고 정했다. 곰이 사람이 된 걸 아는 웅남이의 부모님. 곰이 사람이 됐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 몇 개 있다. 밥을 엄청나게 먹어야 한다. 그것만 있나? 겨울잠도 자야 한다. 근력을 비롯한 운동능력도 뛰어나다. 이런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경찰 일도 했던 웅남이. 곰이 사람이 됐기 때문에 경찰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별안간 사람 같지 않은 웅남이. 이 나웅남에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과연 웅남이는 흑막의 목표를 제지하고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시놉시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놉시스라는 것이 있다. 이 시놉시스는 관객을 어필할 수 있는 외모 같은 존재다(물론 포스터와 예고편도 '외모' 축에 속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쓸 수 있어야 이야기의 토대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이야기가 쭉 뻗는 직선 주로 가 아니었던 <타르>도 시놉시스를 쓸 수 있으니, 처음 두 문장으로 영화를 요약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야 영화의 기본적인 설득력이 임팩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요약이 좀 어렵다. 왜냐? 영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안 웃기는 유머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깔끔하게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퀄리티에 흠이 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글을 쓰는데 문장을 불필요하게 꼬아 쓰는 평론가들이 몇 있다. 아무리 영화 비평이라지만 글쓰기는 상대방과 소통하려고 하는 건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는 뭘 위해 글을 쓰는지 의문점이 든다. 이 영화는 마치 꼬아 쓴 비평문처럼 시퀀스마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 첨삭이 필요한 영화인 셈이다.
호평할 만한 구석도 있긴 해
뭐 영화 보면서 '여기에 힘을 줬네' 싶은 구석이 있다. 영화는 두 장르를 병치시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나웅남이 갖고 있는 가족 드라마와 이정학이 품고 있는 누아르다. 가족드라마적인 특성은 후에 설명하려고 하니 패스한다. 느와르의 장르 특성을 이끄는 데 있어 박성웅 배우는 장르 전문가답게 어떻게 해야 관객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지 잘 끌고 간다. <신세계>의 이중구 역 이후 코미디 영화 많이 나오시는 것 같은데 이 분은 그냥 느와르 하려고 태어나신 분 같았다. 공허한 표정과 이정학의 무력을 묘사하는 액션연기까지 그동안 우리가 알던 박성웅의 카리스마는 여기 다 있다. 또 박성웅 배우와 함께 힘을 합쳤던 최민수 배우 역시 연기가 좋았다. 분명 더 광기 어려야 할 인물의 카리스마가 터지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것이 배우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최민수 배우는 극의 긴장감을 혼자 보여주는 연기로 끌고 갔다는 점에서 호평할 만하다.
또 영화 중반부 찍고 넘어가는 이야기 전개가 있다. 이 이야기 전개를 활용한 방식은 좋은 평을 내릴 수 있다. 큰 틀을 잘 짰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나웅남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긴 설명을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어 그럼 그렇게 되는 것 아냐?' 싶다. 이 부분을 나름 딱딱 맞아떨어지게 회수하는 방식은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훌륭했다고 느낀 지점이다. 이 부분의 내적인 연결고리를, 사건 중심으로 영화를 재구성하면 알 수 있다는 점은 오랜 기간 동안 공들인 부분이 조금 느껴진다.
가학적인 캐릭터
영화를 보면서 캐릭터들에게 의문부호가 생겼던 지점이 굉장히 많았다. 우선 첫 번째. 웅남이의 친구 말봉이다. 말봉이는 유튜버다. 팔로워가 10명밖에 없지만 아무튼 유튜버다. 뭐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직업의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튜버라는 직업적 특색에 너무 심취해 있다. 비밀 작전을 하고 있다고 치면, 당연히 카메라를 꺼두는 게 옳다. 아니 초등학생도 그건 다 안다. 영화는 이 유튜브라는 소재를 미친 듯이 쓰고 싶었던 듯이 흐름을 끊을 정도로 남발한다.
또 웅남이와 주변인들의 관계는 가족드라마적인 특성에서 영화의 핵심이 된다. 모르겠다. 웅남이를 바보로 만들면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웅남이만 바보같이 행동하면 모르겠는데 말봉이가 웅남이를 대하는 방식은 불필요함과 동시에 가학적이라고 느꼈다. 웅남이와의 관계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 어떤 인물은 후반부에 수미상관처럼 재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웅남이의 리액션이 이해 안 가는 건 둘째치고 신을 구성하는 대사가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2003년이면 웃겼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고 동물취급하는 게 이 사람의 인물세팅과 조응하지 않는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이렇게 후반부 웅남이의 선택이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려면 인물 간의 유대감이 있어야 하는데 염혜란 배우가 밥 해주는 장면만 있으니 아쉬울 뿐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윤제문 배우가 맡은 캐릭터는 연출과 연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제문 배우가 지난 세월 동안 한국영화에서 보여준 얼굴은 무궁무진했다. 괴랄한 작품도 몇 편 나오셨지만 <마더>나 <아수라> <한산 : 용의 출현> 등등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다. 배우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연출은 무작정 화만 내라고 한다.
또 영화의 주인공인 웅남이에 대한 연출은 가장 아쉬운 캐릭터 설정으로 뽑을 수 있다. 웅남이는 곰의 운동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멀리서 작은 글씨도 다 보이고 근력도 세며 달리기도 빠르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핵심 과제들이, 이 곰 같은 피지컬로 해결할 수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어떤 때는 능력이 발휘되고 어떤 때는 또 안 되는 불규칙함은 영화의 통일성과 설득력을 깬다.
사족(들)
영화 초반부는 웅남이의 능력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곰이 사람이 됐다. 그럼 운동능력이 비정상적이겠지? 이 부분을 묘사하는 것은 좋았다. 편의점에서 뭐 하고. 싸울 때 뭐 하고. 근력이 세고 어쩌고 등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핵심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에 너무 길게 할당했다. 초반부에서 스타트를 이상하게 끊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차피 이럴 것 아닌가?' 정확히 그렇게 한다.
또 러닝타임 중반부에 웅남이가 작전을 위해 훈련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이 큰 코미디로 묘사된다. 여기에 들어갔던 인물들 대부분이 소모적이다. 우선 윤제문 배우를 위시로 한 경찰 쪽 캐릭터는 세 명이다. 여기서 윤제문 배우 옆에 있는 남자 경찰 캐릭터는 없어도 큰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훈련하는 교관들은 '개그 콘서트'에서 재현 개그로 쓸법한 걸 그대로 영화로 갖고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훈련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그것도 아니다. 작전 실행에 있어 영화의 핵심이 되어야 할 부분이 웃기지도 않은 채로 표류하는 것이다.
위의 문단과 연장선상의 측면에서 영화의 카메오들은 난잡해 보이는 러닝타임을 더 산만하게 만든다. 영화에 개그맨들 세 분 나온다. 첫 번째 개그맨은 '배우 개그'를 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그거 외에는 이 개그맨 분들이 인물 연출의 뒷심이 모자란 탓에 웃기지 않는다. 그냥 신인 배우 써서 맡았어도 이 캐릭터들을 소화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리고 쿠키영상 즈음에 등장하는 배우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솔직히 이 배우가 등장하는 모습도 의문점이 있으나, 필요한 섭외였나?라는 점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 장면이 있어서 시리즈물을 기획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도플갱어라는 소재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면을 굳이 넣은 거는 박성광 감독이나 박성웅 배우가 인맥이 넓다는 거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도전에 박수를
우리는 개그맨 박성광을 잘 알고 있다. '개그 콘서트'가 방영하던 당시 기라성 같은 동기, 선배, 후배들과 함께 개그계를 이끌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용감한 형제들'에도 나오지 않았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도 갖고 있다. 그래서 뭐 글쓴이 같은 20대들에게 박성광 감독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 확보가 되는 셈이다. 이게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 법 이런 건 없지 않나?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 중 뛰어난 역량을 가진 분들은 많다. <놉>의 조던 필, <돈 룩 업>의 아담 맥케이, <소나티네>의 기타노 타케시가 그렇다. 박성광 감독이 영화 퀄리티로 비판받을 수는 있어도 개그맨이라는 이유로 노력이 폄하되어선 안되지 않나 생각한다. 이는 수많은 선배 영화인들이 필모그래피로 증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비판받을 여지가 공-장히 많다. 그러나 박성광 감독이 더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콧대를 짓밟아주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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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 (2024)>는 고딕 호러의 충실한 재현과 더불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근원적 요소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는 원작의 상징성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불안과 병리적 공포를 직면하게 한다. 영화는 1차원적인 공포 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흡혈귀를 매개로 하는 존재론적 감염, 사회적 붕괴, 그리고 인간 정신의 부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1. 흡혈귀라는 질병: 육체의 병리와 정신적 감염
영화 속 올록 백작(빌 스카스가드)은 마치 현대 사회의 병리적 문제를 은유하는 존재로 보여진다. 그는 전통적인 드라큘라보다 더욱 기괴하고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등장하며, 그의 존재 자체가 마치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도시를 잠식해 간다. 영화는 흡혈귀의 피를 빠는 행위를 단순한 육체적 침해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정체성을 갉아먹는 감염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연출은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외부적 위협이 아니라, 욕망에 눈이 멀어 그것을 허용하는 우리 내부의 취약성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진다.
2. 사회적 병리: 붕괴하는 공동체와 고립된 개인
올록 백작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영화 속 공동체는 급격히 붕괴해간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고립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질병이나 공포가 확산될 때 나타나는 사회적 반응과 유사하다. 팬데믹 상황에서 목격한 신뢰의 붕괴, 가짜 뉴스로 인한 대중의 혼란, 그리고 극단적 개인주의의 심화가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묘사된다. 특히 주인공 엘렌(릴리 로즈 뎁)의 심리적 고립은 이러한 사회적 붕괴를 더욱 강조한다. 그녀는 남편 토마스(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이 새로운 공포를 마주하지만, 점점 더 자신의 내면에 갇혀버린다. 이는 공포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될 때 더욱 강력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3. 인간 정신의 부식: 공포는 우리를 어떻게 잠식하는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은 신체적으로만 병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점점 무너져간다. 공포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 인간 존재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올록 백작의 그림자가 마을을 덮어가듯,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에거스는 이를 음향 디자인, 어두운 색채 사용, 그리고 점진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변하는 카메라 앵글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공포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공포에 사로잡힐수록, 우리의 정신은 더욱 약해지고, 결국에는 자멸의 길로 나아간다.
4. 진짜 공포는 무엇인가?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 (2024)>는 우리가 무엇으로 인해 병들고,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호러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육체적 감염이 아니라, 공포와 불신, 그리고 개인의 고립과 욕망이야말로 우리를 병들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에거스의 영화는 우리가 공포를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묻는다. 우리는 공포를 피하려 애쓰기보다, 영화 속 엘렌의 선택과 같이 그것을 직시하고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올록 백작과 같은 존재는 언제든 우리의 정신을 잠식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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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 아메리카 4 | 반등했지만 비상하지는 못한 MCU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의 방패를 물려받고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난 '샘 윌슨'(앤서니 매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새로운 위험이 닥쳐온다. 소코비아 협정으로 어벤져스를 궁지에 몰았던 '로스'(해리슨 포드) 장군이 미국 대통령이 된 것. 로스는 인도양에 자리 잡은 티아무트 섬에서 채굴된 새로운 금속 아다만티움을 둘러싼 국제 분쟁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그 목으로 샘에게 어벤져스 재창설을 제안하며 협력을 요청한다.
하지만 둘은 쉽사리 손잡지 못한다. 백악관 테러의 배후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 2대 팔콘 '호아킨 토레스'(대니 라미레즈)와 함께 수사에 나선 샘은 이내 '리더'(팀 블레이크 넬슨)의 음모를 발견한다. 뇌에 스며든 헐크의 피 덕분에 초인적인 계산 능력을 얻은 그가 약속을 안 지킨 로스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것. 그 사이 티아무트 섬 분쟁은 전쟁으로 치닫고, 분노를 참지 못한 로스는 '레드 헐크'로 변할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MCU, 마침내 반등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루소 형제의 MCU 복귀 뉴스는 멀티버스 사가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자인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캐릭터를 못 살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퇴장한 주요 캐릭터의 후계자 중 자기만의 서사와 매력을 보여 경우는 많지 않았다. 자연히 이전 작품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3> 같은 인피니티 사가의 후속담에 관객들이 호응한 이유였다.
MCU만의 매력도 잃었다. MCU의 핵심은 시리즈 간의 연계였다. 한 영화 속 사건이 다른 영화에 영향을 끼치는 연쇄작용은 다른 프랜차이즈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쾌감이었다. 그런데 멀티버스 사가는 각자 자기 일을 해결하기 바쁜 영웅들만 비췄다. 토니 스타크처럼 시리즈를 오가는 구심점도, 인피니티 스톤이나 타노스 같은 궁극적인 목적지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데드풀과 울버린> 이후 약 8개월 만에 공개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이하 <캡틴 아메리카 4>)는 상술한 두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 샘 윌슨은 차별화된 매력과 상징성을 증명하며 성공적으로 재데뷔했다. 미국 대통령이 된 로스는 흩어진 MCU의 이야기 중 일부를 묶어냈다. 이에 힘입어 MCU도 마침내 반등의 기틀을 마련한 듯 보인다.
샘 윌슨의 증명
캡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자유',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자유'다. 1편 <퍼스트 어벤져>에서 스티브 로저스는 나치와 하이드라에 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영웅이었다. 2편 <윈터 솔져>에서는 모든 사람의 미래를 예측하는 알고리즘으로 전 세계를 통제하려 한 하이드라와 맞서 싸웠다. 3편 <시빌 워>에서도 미국 정부와 유엔, 동료 절반과 척을 지면서까지 어벤져스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즉, 스티브 로저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를 제외하면 정부 뜻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비록 이름은 누구보다도 미국 정부의 하수인처럼 느껴지지만, 그에게는 개개인의 자유가 최우선 가치였다.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도 개인이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부의 개입에는 일관되게 반대하는 슈퍼히어로였고, 정부에 소속되지 않은 어벤져스의 이상을 상징했다.
샘은 자신이 스티브의 신념과 이상을 계승했음을 증명해 낸다. 일례로 로스가 어벤져스 재창설을 부탁했을 때도 샘은 정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사야 브래들리(칼 럼블리)'를 무작정 백악관 테러 범인으로 몰아간 처사에 항의하는 의미였다. 샘이 리더의 음모를 알아채고, 전쟁을 막은 것 역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가 로스 대통령의 압력에 굴하는 대신 독자적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리더의 계략 때문에 의도치 않게 레드 헐크로 변한 로스를 샘이 저지하는 장면 또한 캡틴 아메리카로서의 자격을 증명한다. 샘은 레드 헐크 안에 있는 로스의 자유의지를 신뢰했다. 로스가 헐크에게 저지른 과오를 씻고, 딸 '베티'(리브 타일러)에게 속죄하려는 열망이 진심이라고 믿었기에 레드 헐크를 설득해 로스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이는 <윈터 솔져>에서 버키를 믿고 그에게 자기 목숨을 맡겼던 스티브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같게 또 다르게
그와 동시에 <캡틴 아메리카 4>는 '버키'(세바스찬 스탠)의 입을 빌려 샘 윌슨만의 상징성과 매력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옳다고 믿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스티브 로저스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윈터 솔져>에서 쉴드의 일반 요원들은 그의 연설에 용기를 얻어 하이드라와 총격전을 벌였다. 이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그보다 능력이 뛰어난 다른 히어들이 그의 지시를 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샘 윌슨은 다르다. 그는 혈청도 맞지 않았고,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니지도 못한 평범한 군인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티브를 도우며 옳다고 믿은 신념을 따르는 과정에서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더 나아가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났다. 즉, 그는 누구나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타고난 리더였던 스티브보다는 동반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달라진 액션 스타일은 두 캡틴 아메리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방패를 활용한 액션은 캡틴 아메리카로서의 공통점을 보여주지만, 더 아크로바틱 한 액션은 차이점을 암시한다. 대인 액션 시퀀스에서 샘은 스티브보다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스티브와 달리 힘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는 없기 때문. 슈퍼 솔저는 아니어도 스티브의 신념을 이어가려는 샘의 노력이 액션의 차이점에도 녹아있는 셈이다.
로스라는 연결고리
샘이 캡틴 아메리카의 자격을 증명하는 사이, 로스 대통령은 MCU의 유산을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의 플롯은 샘과 마찬가지로 증명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로스는 헐크에게 군대를 보내고, 어벤져스를 감옥에 보냈던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의 변화는 정치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지점에서 <캡틴 아메리카 4>는 서로 다른 시리즈가 유기적으로 연계되던 과거 MCU를 연상케 한다.
로스의 플롯 중 정치적 측면은 <이터널스>의 후폭풍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인도양의 섬이 되어버린 티아무트에서는 비브라늄보다 단단한 금속 아다만티움이 발견된다. 이에 로스는 일본, 인도, 프랑스 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티아무트 섬을 남극처럼 중립지대로 놔두고, 아다만티움을 지구촌이 공유하자는 것. 로스는 호전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백악관 테러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대화를 통해 조약을 체결하고자 애쓴다.
로스의 변화는 개인적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 4>는 <인크레더블 헐크>의 유산을 활용해 그의 부성애를 부각한다. 로스는 한때 브루스 배너의 연인이었던 딸 베티와의 화해를 염원하고 있으며, 그전에는 차마 죽을 수 없어서 리더에게 심장병 치료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과정에서 리더의 계략 때문에 레드 헐크로 폭주하기도 하지만, 그에 맞는 죗값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히어로로 변모할 가능성까지 보여준다.
즉, <캡틴 아메리카 4>는 인피니티 사가의 후일담이자 멀티버스 사가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마침내 MCU다운 영화를 보는 듯하고, 극 중 삽입된 여러 복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벤져스 재창설이라는 떡밥이 등장하고, 쿠키 영상에서 <어벤져스: 둠스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를 암시함에 따라 마침내 멀티버스 사가의 목적지가 보이기 때문. 마치 10여 년 전 MCU를 보는 듯한 향수를 자극하는 장치다.
양날의 검
그러나 로스를 전면에 내세운 선택은 양날의 검이다. 우선 진입장벽을 높인다. <캡틴 아메리카 4>는 <인크레더블 헐크>와 <팔콘과 윈터 솔져>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문제는 두 작품 모두 접근성이 낮다는 것. 전자는 MCU가 인기를 얻기 전인 2008년에 개봉했고, 후자는 디즈니+ 드라마이기 때문. 초반부에 뉴스 형식으로 정보가 제공되더라도 두 작품을 보지 않았으면 극 중 상황을 즉각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의 밀도도 낮춘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빌런과 히어로의 대립이 고조될 때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극대화된다. 그런데 샘과 리더는 각자의 이유로 로스와 갈등을 빚을 뿐, 정작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티아무트 섬에서 샘과 로스의 대립이 일단락된 순간, 영화는 긴장감이 꺾인다. 로스와 리더의 플롯이 남은 가운데, 샘의 역할이 애매해지는 것. 그 결과 레드 헐크와 샘의 충돌도 비록 눈은 즐겁지만, 뒷북처럼 느껴진다.
리더와 <시빌 워> 속 제모 남작을 비교해 보면 문제가 더 명확하다. 두 빌런은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며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가짜 미끼를 던져주고, 주인공끼리 싸우게 만든다. 그러나 리더와 달리 제모는 캡틴 아메리카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와 아이언맨을 분열시키는 전개는 복수라는 맥락 안에서 개연성이 있었고, 서스펜스를 끝까지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다. 정확히 <캡틴 아메리카 4>에서 빠진 스토리라인이다.
더 나아가 기시감도 극대화된다. 영화가 늘어짐과 동시에 지난 시리즈를 답습한 장면이 드러기 때문. 일례로 백악관에서 이사야가 도주하는 시퀀스의 연출과 타이밍은 <윈터 솔져>에서 버키가 닉 퓨리를 저격한 후 도주하는 장면을 빼닮았다. '사이드와인더'(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가 도로에서 샘을 급습하는 장면, 리더가 군사 기지 지하에 숨어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마주를 넘어서서 자가복제에 가까워 보인다.
비상까지는 부족한 한끗
그 외에도 <캡틴 아메리카 4>는 이전 시리즈에 비해 완성도가 한끗 부족한 순간이 적지 않다. 액션 연출이 대표적이다. 물론 확실한 장점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이 일본 해상자위대 및 세뇌된 미 해군과 펼치는 공중전에서는 최근 MCU에서 보지 못한 역동감이 느껴진다. 빠른 속도감과 레드윙을 활용한 신선한 연출 덕분이다. 레드 헐크도 <어벤져스> 1편과 2편에서 보여준 헐크의 위용만큼 파괴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인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라는 제목에 비하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대인 액션, 육박전 장면에서는 카메라 워크나 편집 속도가 한 템포씩 늦다 보니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박력이 덜 강조된다. 군사 기지 지하 복도에서 군인들과 샘, 호아킨, '루스'(쉬라 하스)가 한 데 뒤엉키는 액션 장면을 <윈터 솔져>나 <시빌 워>의 액션 시퀀스와 비교해 보면 부족함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숱한 재촬영의 여파도 가리지 못했다. 주요 캐릭터 중 일부는 중요성에 비해 분량이 적다. 일례로 로스의 안보 보좌관이자 레드룸 출신 블랙 위도우인 루스는 스티브-샘-나타샤처럼 샘, 호아킨과 팀을 이루는 데도 활약이 미미하다. 전개도 편의적이다. 레드 헐크가 샘에게 갑자기 설득되거나, 사이드와인더가 손쉽게 샘에게 협력하는 식이다. 기존 촬영분과 재촬영분을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후반부 전개를 섬세하게 다듬지 못한 흔적이다.
종합하면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새로운 <퍼스트 어벤져>에 가깝다. 기존 클리셰에 기대면서 완성도는 일부 포기하더라도, 세계관의 핵심 인물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며 시리즈와 유니버스의 기반을 다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달리 말하자면 반등에 성공했을 뿐, 아직 날아오르지는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결국 두 후속 타자, <썬더볼츠*>와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의 어깨가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날아오르기에는 아직 출력이 부족한 캡틴 아메리카와 M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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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몇몇 장면들과 질문들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2024, 브래디 코베)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
멀미하며 터널을 빠져나가는
<브루탈리스트>는 취조실에 갇혀 패닉한 조피아의 정면 얼굴로 시작해, 라즐로 토스 회고전에서 자신 있는 연설로 숙부와 숙모의 유산을 기리는 나이든 조피아의 정면 얼굴과 오프닝 오버랩으로 끝난다. 일종의 느슨한 액자로 다가오는 이 구성은 영화를 조피아가 쓴 라즐로의 전기처럼 바라보게도 한다. 조피아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설명하며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라는 문장을 강조한다. 바로 그 ‘과정’, 즉 라즐로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에 배반당하면서도 ‘고작 몇 미터의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서 듣게 되는 대사다. 텍스트만으로는 위험하게 들리는 이 문장 자체가 가치관이라기보단- 가치관이나 태도를 지키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과정’의 서술 방식은 집요하게 상세하되 목적지를 분명히 두고 있어 고통의 전시나 낭만화로 읽힐 위험을 피한다. 고난과 완성된 작품을 잇는 어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는 ‘그러한 맥락으로’에 가깝다.
액자 안의 두 번째 오프닝은 미국에 닿은 라즐로의 모습에 에르제벳의 편지가 보이스오버되는 시퀀스다. 비좁은 공간에서 막 잠에 깨어 부랴부랴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라즐로를 따라가는 롱테이크는 매초가 갑갑하고 초조하다. 편지가 화면을 빠져나가는 와중 라즐로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부드럽게 흐르는 내레이션-편지와 더디게 나아가는 인물, 그 ‘방향’은 서로 어긋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실제로는 아직 닿지 못한 에르제벳의 음성이 라즐로를 이끌며 함께 암흑을 벗어나는 듯한 연출이다. 라즐로는 마침내 야외로 나가 탁하고 환한 공허를 만난다. 무언가를 보고 환호하는 그는 화면 맨 하단에 몰려 있다. 이내 카메라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찍는다. 자유의 여신상, 다만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횡으로 돌아가 있다. 노골적인 만큼 효과적인 은유다.
이어 라즐로가 탄 차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타이틀과 크레딧이 겹치는데, 도로/차를 가로지르는 수평 방향으로 진행된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지럽다. 그 멀미의 감각으로 라즐로의 언어를 감히/조금이나마 알아들어 보기를 제안하는 것일까. 이를 비롯해 영화에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도로를 달리거나 터널을 지나는 숏이 몇 삽입되어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가로막히며 더디게 나아가는’ 감각이 있었다면 이 숏들에는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달리는’ 감각이 있다. 특히 에르제벳과 말다툼하며 어두운 도로를 운전하는 씬은 상징적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며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는 듯도 보였던 부부는 나란히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라즐로는 단 하나 헤로인에는 굴복했으나 자신을 유혹하고 내리누르는 나머지 것들은 거슬렀다. 그가 멀미하고 구역질하며 캄캄한 터널을 견디고 환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도운 것은 그 자신과 에르제벳 외 누구도 아니었다.
사라진 해리슨
오프닝 크레딧처럼, <브루탈리스트>에서는 솟아오르거나 나아가는 라즐로와 그를 방해하는 ‘미국적인 것’이 대립한다. 이미지와 언어/소리가 서로 불일치함으로써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해리슨 밴 뷰런이 라즐로를 연회에 초대해 설득하며 아름다운 일화와 명분을 늘어놓을 때, 화면에는 내기 포커를 치며 값비싼 술을 홀짝이는 파티 참가자-부자-들의 몽타주가 흐른다. 꼭 중세 유럽 귀족들마냥 예술가를 ‘후원’하며 제 소유물로 두려는 듯한 해리슨은 그들 중 하나이면서 홀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위선자, 겸손함과 우아함을 연기하다 실패하는 나르시시스트다. 화를 펄펄 내며 강렬하게 등장한 그의 퇴장은 모호하다. 실질적으로 ‘없다시피 한’ 그 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브루탈리스트>는 관람이 끝나자 마자 페이버릿 씬이 자동으로 생기는 종류의 영화였다. 거기엔 의외로 라즐로가 없었다.(애드리언 브로디가 담배를 무는 모든 씬은 논외로 한다.) 남편의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된 에르제벳은 보조기구를 짚고 천천히 해리슨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간다. 식탁에 둘러앉은 해리슨, 아들 해리, 딸 매기 등등. 에르제벳은 입구에 몰려 우뚝 선 채 해리슨을 폭로한다.(휠체어 이용/걷기를 에이블리즘에 오염된 의도로 구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작가가 상징을 드리우려 했다’기 보다는 ‘에르제벳에게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즐로 역시 엔딩에서는 휠체어에 타 있기도 하고. 영양실조로 하반신이 마비된 적이 있는 에르제벳은 휠체어에 앉아야 이동이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서 걸어 들어가기를 택한 까닭은, ‘내가 불편해지고 심지어는 위험해지더라도 저들을 내려다보거나 적어도 물리적으로 동등한 눈높이에 있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해리슨은 뒤늦게 부인하고 제발 저리듯 라즐로를 해고하겠다고 선언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해리는 과하게 분노하며 에르제벳을 질질 끌고 나가 내동댕이친다. 매기는 해리를 비난하지만, 그의 ‘순수한’(기계적인) 선의는 이 영화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숏은 끊어지지 않고, 카메라는 되돌아가 아버지를 찾는 해리를 따라 긴긴 계단을 오른다.(이 부분에서 조 알윈이 놀라웠다.) 해리는 좀 이상하다. 흥분해 있고, 화나 있고, 방금 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듯도 하고… 헌데 복합적인 격앙에 담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의 일부는 어쩐지 당황해 있고, 무언갈 감추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것도 같다. 그는 해리슨의 혐의가 사실임을 내심 짐작하거나 그 자신이 한 일을 돌이키고 있을 수도 있다.(조 알윈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DAZED]) 여기서 시간/편집 순으로 한참 전의 시퀀스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만취한 해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라즐로를 협박하며 조피아를 언급한다. 얼마 후 호숫가에 있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청한다. 두 사람을 그대로 고립시킨 채 영화는 호숫가의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해리슨, 매기, 에르제벳 등등.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에르제벳은 최선을 다해 웃고 적절히 반응한다. 어느 시점에 배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숲에서 걸어오는 해리와 조피아가 포착되는데, 클로즈업이 아닌 평이한 숏이다. 늘 그렇듯 말없는 조피아와 답지않게 조용한 해리에게서 읽히는 신호는 많지 않다. 해리는 술이 좀 깬 것 같다. 아까는 수영복 차림이던 조피아가 평상복을 입고 있고, 걸어오며 가디건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찰나를 우리는 계단을 오르는 해리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위계는 은근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해리슨은 저택에 없다. 해리와 매기는 사람을 모으고 개를 풀어 주변을 수색한다. 컴컴한 화면에 횃불만이 밝혀진 가운데 개들과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은 어쩐지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곧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에 다다른다. 영화는 빈 건물의 곳곳을 조명한다. 말소리들은 높은 천정과 차가운 벽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카메라는 라즐로가 설계한 ‘빛의 십자가’에 머문다. 그리고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라즐로 토스 회고전을 촬영한다. 밴 뷰런 일가는 재등장하지 않는다. 해리슨은 영화에서 증발했다. 이민자 예술가 라즐로의 경험과 유산, 일관된 태도, 그의 고난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체화한 ‘브루탈리즘’ 건축 예술은 역사에 남았고 기려진다. 그러나 그의 착취자, 미국인 억만장자 해리슨은 악인으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2
해소되었거나 되지 않은 질문들
- 관람 전 질문: AI 사용이 필요했는가? 연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 두 배우의 헝가리어는 훌륭했으나, 워낙 어려운 언어라 세밀한 리얼리티를 위해 녹음된 대사를 다듬는 데에 사용했다고 하던데… 두 인물이 ‘헝가리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하는 비헝가리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했다면 ‘양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헝가리어는 주로 편지 내레이팅에서 쓰였고, (내 생각이지만)헝가리인을 포함한 관객들이 그 완벽함에 감명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허나 워낙 민감한 이슈고… 이렇게 바운더리가 모호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수정’하기 시작하다 점점 배우 각자의 고유성을 침범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하며 판단을 유보중이다. 다만 제작진의 AI 사용 결정 ‘탓에’ 오스카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간다면 애드리언 브로디는 속이 좀 쓰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는 이미 연기상을 여럿 수상했고 BAFTA 수상 소감에선 사려깊게도 동료 후보들을 모두 호명했다.)
- 관람 후 질문: 영화는 은근히 시오니즘을 지향하고 있는가?
: 조피아는 ‘예루살렘 행’이 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듣고 “그럼 우린 유대인이 아닌 거니?”라고 혼란을 표했던 에르제벳은 후에 ‘여기선 살 수 없다’며 이스라엘로 가자고 말한다. 아마 브래디 코베도 영화에 대한 반응에 ‘시오니즘’이라는 화두가 등장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 같다. 그가 NYFCC 작품상을 수상하며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점령을 다룬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No Other Land>를 서포트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을 간접적 근거로 들 수도 있으나, 당연히 이야기 내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할 테다. 조피아의 단정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할까? <브루탈리스트> 주인공들이 (아마도 1950년대에) 이스라엘 행을 결정하는 바탕에는 막연한 희망과 동경보단 구체적인 좌절이 있다. ‘그나마 가능한 살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감독은 “캐릭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주위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DAZED])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각각 인정받는 프로 건축가/교수와 저명한 기자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서로 이별했다. 아메리카에서 라즐로의 드리밍은 지속적으로 제지당한다. 역시 고초를 겪은 조피아는 두 사람의 관찰자이기도 했다. 헝가리와 미국에서 그들은 ‘살 수가 없’다. 물론 그 ‘살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을 침범한다. 허나 적어도 이들 가족의 경우는 이미 ‘건국’된 이스라엘로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그래서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는 트루먼의 ‘이스라엘 국가 선포’ 연설이 보이스오버 되는 씬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거꾸로 자유의 여신상’으로 은유하며 허상과 위선 덩어리로 바라보는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대통령의 ‘승인’ 또한 무책임한 제스처이며 허상이라고 암시하는 것일까? 과해석일 수도 있다. (미국은 하얗고 가자지구‘도’ 미국의 것이며 ‘신이 주신 두 개의 성별’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백악관에 들어앉은 지금, <브루탈리스트>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묻는가?)
기념비적 연기들
아직도 <피아니스트>만이 자주 화자되나, 애드리언 브로디는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다만 때로 ‘도저히 모를’ 작품과 캐릭터를 택했기에 고유의 분위기와 퍼포먼스가 제대로 빛나지 못했을 뿐이다.(가끔은 그가 웨스 앤더슨 픽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대 배경과 캐릭터 설정에서 어쩔 수 없이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되었으나, <브루탈리스트> 작품 자체 만큼이나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라즐로는 큰소리를 낼 때 가장 취약해 보이고 가만히 미소 지을 때 가장 단단해 보인다. 압도하고 누르기보단 거센 바람에 바스러지며 꼿꼿이 상처받는 자. 연약하며 우아하고 엉망인 채로 고고한 존재감이라고 할까… 모조리 사랑하기는 힘든 인물이었으나 라즐로 토스는 <디태치먼트>의 헨리와 나란히, 내 ‘애드리언 브로디 최애 퍼포먼스’ 목록에 올랐다. 멋진 서재 리모델링을 보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드미트리마냥 열을 펄펄 내는 해리슨 앞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빼무는 라즐로-보십시오 이것이 애드리언 브로디 입니다. 그래, 늘 당신이 배우로서 좀 더 주목 받았으면 했었다.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굉장했다. 앉아있건 서있건 누워있건 화면 어디에 있건 중심이 되었다. 에르제벳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라즐로를 위한’ 역할로 남아 아쉽기는 했으나, 그는 이끌리기보다는 이끄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아닌 이해를 선행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였다. 남편이 빠르게 미는 휠체어나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에르제벳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지하고 질문하고 따지고 주장했다. 폐쇄적인 구석이 있는 라즐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성공했으며, 이내 남편의 대변자 자리에 위치했다. 헤로인을 맞고 사랑을 나누며 라즐로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되는 에르제벳은, 마치 남편의 내면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토스 부부의 베드신들은 기묘하고 불편하고 애처로우며 아름다운데, 육체의 하나됨을 넘어선 생각과 정서의 하나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편집도 편집이었고, 펠리시티 존스의 액션을 애드리언 브로디의 리액션이 받쳐주며 마디마디 환상적으로 맞물리는 연기 합이 대단했다.
+ 가이 피어스도 물론 훌륭했고, 라피 캐시디는 관심 배우 목록에 올렸고, 스테이시 마틴은 ‘아무것도 안 하는’ 역할을 맡았고, 기대했던 이삭 드 번콜은 애드리언 브로디와 공사장 컨셉 화보를 찍은 후 퇴장했고, 조 알윈은 내내 효과적으로 신경을 거스르다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에서 ‘뭔갈’ 해냈다.
* 참고 인터뷰
DAZED | Joe Alwyn and Brady Corbet on The Brutalist: ‘It’s very, very rad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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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에버 퍼스트 러브 -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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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배급사 [콘텐츠패밀리]와의 저작관 협의를 통해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작품 [포에버 퍼스트 러브]는 12월 9일 개봉하는 드라마, 로맨스 영화인데요!
여러분들은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맞춰가며 관계를 이어나간 적이 있나요?
오늘 이 두 남녀는 보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로맨스를 보여주며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무엇보다 어른들을 위한 솔직한 로맨스라는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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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제]리뷰:원작의 중요한 설정을 모두 갖다버린 리메이크작. 남는 건 배우의 얼굴 뿐(원작분석)ㅣ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해석
#조제#한지만#남주혁
원작보세요 여러분!음악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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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uu - Wind's Wr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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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Naoya Sakamata – Di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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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ense: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
????? ???????? : https://youtu.be/XWfdbDZM2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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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1차 예고편
MI6를 떠난 이후 '매들린'과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던 '제임스 본드'.
어느 날 CIA요원 '펠릭스'가 찾아와 선별적 DNA 공격이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생화학 무기 유출을 알린다.
위험에 처한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복귀하게 된 제임스 본드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MI6요원 '노미'를 만나고, 모든 사건의 배후에 운명으로 얽혀 있는 최악의 적 '사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위험천만한 위기 속, 감춰져 있던 비밀이 밝혀지면서 작전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데..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미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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