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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인2025-07-18 19:41:27

침입한 것을 묻혀가며 배설하기

<발코니의 여자들>(2024)

<발코니의 여자들(Les Femmes au balcon)>(2024, 노에미 메를랑)

* 영화의 장면과 결말 포함

 

<발코니의 여자들>에는 어지러운 클로즈업으로 가득하던 섹슈얼 코미디의 톤이 돌연 끊기는 순간이 있다. 어두운 화면, 정적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와 셔터음만 터지는 숏. 이 연출이 서늘하게 와닿으며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까닭은 단지 분위기 전환으로 고요한 쇼크를 주어서가 아니다. 실제와 흡사한, 누군가는 겪어 알고 있을 공포를 불러일으켜 관객을 단숨에 현실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영화 밖 현실, 구체적으론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고 현실에 닿으려 하는 영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과감하고 지저분하고 터무니없어지기’다. 로맨틱코미디에 범죄스릴러, 코미디호러까지 넘보며 이 영화는 일부러 온갖 분비물 속에서 나뒹군다.

엘리즈는 자주 방귀를 뀐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물론 그날 처음 보는 마냐니나 의사 앞에서도 가스를 내보낸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가스만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토하고, 임신중절 약을 먹고 낙태를 한다. 배우인 엘리즈에겐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요구되는 외형에 끼워맞춰야 하는 일이 자주 있다. 남편은 사랑을 속삭이며 시도때도 없이 성관계를 요구하지만, 매번 동의 없이 엘리즈의 몸을 만지고 콘돔을 끼우지 않고 삽입하는 그의 관심은 자신의 만족에만 있다. 엘리즈의 낙태는 그러한 원치 않는 관계에서 이루어진 임신을 중지하는 것, 그동안 몸에 강제로 주입되어 쌓인 것들을 해독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마침내 남편에게 쏟아내는 말과 루비와 나란히 의자 팔걸이 위에 앉아서 하는 자위, 꼭 맞는 드레스에 욱여넣었던 가슴을 내놓는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행위다.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캠걸” 루비는 언뜻 그러한 배출을 쉽게, 또 잘 하는 여자로 보인다. 과연 영화는 그가 라이브 방송 와중 오르가즘을 느껴 사정액을 내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다.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꾸미고 거리낌없이 전시하는 그의 자유로움이 직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은 그의 신체가 특정한 형태에 들어맞아서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신체는 캠을 끄고 있을 때조차 ‘언제든 구매가능한’ 상품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뱉고 내보내는 자로 그려졌던 루비의 입에는 곧 마냐니의 손가락이 들어온다. 루비는 자신의 몸에 폭력적으로 들어온 남자의 페니스를 뜯어버리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코피를 흘림으로써 들어온 것 일부를 내보낸다. 허나 이 주입과 배출은 일대일로 깔끔하게 교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침입한 손가락에 입이 막힌 루비의 얼굴이 사진으로 박제되었듯, 몸과 마음에 남은 흔적은 옅어질 수는 있어도 말끔히 지워질 수는 없다.

한 걸음 물러서 관찰하는 니콜에게 주입되는 것은 언어와 이야기들이다. 그는 이웃 여성 드니즈와 친구들이 겪은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는다. 그의 배설 역시 언어와 이야기, 소설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헌데 니콜이 보는 것엔 유령도 포함된다. 성범죄나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피해 여성들에 의해 살해당한 남자들의 유령. 이 트릭과 함께 영화의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가 니콜의 소설/상상의 재현인지가 모호해진다. 니콜이 유령을 보는 까닭은 이야기를 쓰는 자여서다. 관찰자이자 매개자, 화자인 그는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중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체다. 유령들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이 남자들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억울해서가 아니라 ‘억울하다고 착각’해서, 즉 범죄를 인정하지 않아서다. 이 법칙은 아마도 니콜이 정한다. 스토리텔링의 주도권이 사진작가 마냐니와 같은 가해 남성이 아닌 목격자 여성 니콜에게 있다는 점, 이것이 <발코니의 여자들>의 핵심이다. 여자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서 가정폭력범과 성폭행범은 죽는다, 아니 죽‘인’다. 여기서 무게는 ‘그 남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보단 ‘이 여자들이 더불어 꺼내고 뱉어냈다’는 것, 결과보단 행위 자체에 실린다. 영화는 그 배설과 발화의 힘을 더럽고 유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루비를 강간한 남자의 ‘인정’은 오로지 니콜에게만 보이는 일이(거나 니콜의 상상이)다. 하지만 영화는 니콜의 소설에 서술된 이 장면을 루비가 읽고 ‘좋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잠깐 되돌아가, 구독자들과 일종의 심리상담까지 해주었던 루비가 라이브 스크린 안에 지쳐 널브러져 있을 때 걱정하는 자는 한 명 뿐, 나머지는 루비에게 끊임없이 뭔갈 요구하며 지루해한다. 성폭행당한 사건에 관해 털어놓을 때 시청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루비는 계속해서 방송을 켜 놓는다. 관음하는 자들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섹시한’ 모습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모습, 해골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음산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도 루비 자신이어서다. 그런 루비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들은 화면 건너편에 있지 않다. 아무도 시청하지 않는 방송 화면 이쪽에 침범해 루비를 끌어안는 니콜과 엘리즈, 친구들이다.

케이크를 손에 묻혀가며 먹는 니콜, 흰 옷에 온통 피를 묻힌 엘리즈, 화분의 시원한 흙을 손에 묻히며 황홀해하는 엘리즈와 루비, 폭염의 날씨에서 그 모든 행위는 땀으로 젖은 채 이루어진다. 이곳에는 실내온도를 적당히 조절할 에어컨이 없다. 한계까지 뜨거워진 몸에서 솟아나는 땀을 여기저기 묻히고 씻어내는 수밖에. 이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짙은 땀으로 노폐물을 배출하는 일과 비슷하다. 노에미 메를랑은 관객에게 일단 범벅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 여자들이 당한 입막음은 겉을 감싸 압박하는 종류의 것보단 몸 안쪽으로 강제로 들어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에 가까웠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렇게 침입한 것들을 단숨에 깨끗하게 털어내거나 날려보내는 것이 아닌, 온몸에 묻혀가며 함께 쏟아내고 또 닦아내는 과정이다.

작성자 . 않인

출처 . https://brunch.co.kr/@yonnu2015/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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