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지2025-07-31 11:06:54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여자들
<발코니의 여자들>
40도가 넘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폭염은 정말로 이 여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나? 현기증 나는 한낮,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삽으로 내리친다. 폭염이라는 외부 조건은 분노의 기폭제로 작용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동안 아내가 너무 오랫동안 참기만 했다는 반증 아닐까. 숨이 턱턱 막히고 불쾌지수가 극에 달해야만 이 여자는 겨우 첫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너무 오랫동안 참아줬고, 이제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소설가 지망생 니콜, 캠 걸 루비, 무명 배우 엘리즈가 발코니 건너편에 사는 남자의 집에 초대받은 후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시작된다. 이는 마르세유의 폭염과 중첩되면서 세 여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데, 그로 인해 세 여자를 둘러싼 억압의 실체가 하나둘 선명하게 드러난다.
니콜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남성 유령들은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지만,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호소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 즉 여성의 사랑과 지지, 섹스 — 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미국의 철학자 케이트 만은 저서 <남성 특권>에서 이러한 남성들의 행동을 인셀의 특징으로 정의한다. 인셀은 ‘타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는 남성들이 가진 유해한 특권의식의 결정체’ 이며, ‘여성의 성적, 물질적, 재생산적, 감정적 노동을 그저 남성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받고 누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남성 개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는 가부장제의 남성 특권에서 기인한다.
캠 걸 루비가 맞닥뜨리는 것은 언제나 허용하지 않은 선을 넘어버리는 남자들의 폭력과 비난이다. 그들은 루비의 옷차림과 직업을 이유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언뜻 보기에 엘리즈에게 절절 매는 것 같은 남편 폴은 또 어떤가. 그는 엘리즈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며 통제하려 들고, 급기야 마르세유까지 찾아와서는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는 섹스를 엘리즈가 당연하게 제공해야 할 의무쯤으로 여긴다. 이 남자들은 맡겨놓은 듯 당연하게 여성의 애정과 헌신을 요구하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적대적으로 돌변하고,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들의 행동은 뿌리 깊은 남성 특권 문화 속 여성 혐오와 인셀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이 유해한 남성 특권의 세계 안에서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고함을 터뜨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를 참지 않는다. 그리고 셔츠를 풀어헤치고 마르세유의 밤거리를 행진한다. 더위?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셔츠를 풀어헤치면 그뿐. 이는 더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신체 통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간단한 것을 왜 우리는 하지 못하고 살까’ 하는 물음에 이르게 된다.
Relative contents
-
- 자유를 찾아 헤맬 너에게
나는 상당히 만화에 보수적인 편이었다. 10대 시절부터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 소위 대작들에 길들어져서인지. 새로운 만화를 알게 되더라도 한 권이라도 꺼내보지 못할망정, 사람들의 평가만 한참을 뒤적이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읽을 마음을 단념한다.
애니메이션은 더욱 심하다. 제대로 다 본 애니메이션이 한 편도 없고, 작가가 직접 그린 만화가 진짜라는 얄팍한 신념 때문일까. 혹은 위 대작들의 애니메이션이 썩 좋은 결과물이라 할 수 없어서 그럴까. 차차 하더라도 영화와 같은 롱폼을 한 번의 온전한 집중으로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 넷플릭스를 틀은 채 밥을 먹고 떠들며 시리즈물을 챙겨보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주위에서 <진격의 거인>을 꼭 보라는 말의 등쌀에 밀려서. 그리고 나의 행동들이 편견이 아닌 기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벼룬 듯 음침하게 시즌1 1화를 켰다. 결과는? 그 순간부터 결말까지 누워있어도, 앉아 있어도, 밥을 먹어도. <진격의 거인>을 봤다. 대작 앞에서 나는 그저 알량한 편식쟁이였고, 대작은 그런 나도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었다. 그러니 심장을 바칠 수밖에.
워낙 이야기가 방대하고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내용을 요약하지는 않고 몇 가지 주제에 대한 QnA 형식으로 본문을 이끌겠다. 무엇보다 시리즈 전체 리뷰가 아닌, 최종장 극장판인 <더 라스트 어택>의 리뷰인 만큼 이 이상의 이야기는 가능한 지양하도록 하겠다.
Q.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A.시리즈 전체를 통틀면 엘빈 스미스. 극장판 한정으로 지크. 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지만, 두 캐릭터의 사상은 극과 극이면서도 가장 맞닿는 지점이 있다. 엘빈은 대의를 위해 사익과 공익을 가리지 않고 불사르는 캐릭터이다. 거인에게 자신의 팔이 물렸을 때도, 날아오는 돌들을 향해 희생을 자처했을 때도. 어린 신병들에게 죽음을 강요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도. 그는 대의를 위해 전진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꿈을 포기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을 대의가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크는 정반대이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에게 상처를 받았고, 이는 아물지 못한 채 곪아 지크를 허무주의의 길로 빠지게 했다. 그렇게 본인의 사상을 위해, 그 믿음을 사실로 실현하기 위해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살인을 일으켰다.
가장 양극에 도달한 두 캐릭터이지만 믿음의 노예라는 점에서 비슷하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이라도 믿음의 족쇄에서 벗어난 그들에게 더욱 온정이 간다. 결국 세상에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사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세상에 온전히 대입하지 못하기에 집착이 생기고 상처는 곪는다.
Q. 결말에 대해
A.땅울림이 많은 비판을 받는 듯하다. 이는 선뜻 에렌이 인류의 80퍼센트를 죽이고 동료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관 속에서 좌표라는 개념이 있다. 2000년간 정해진 역사에서 에렌은 그 사실을 알고만 있을 뿐, 최종 결정권자가 아닌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인류의 80퍼센트가 죽는다는 운명에서 발버둥 친 에렌이지만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에렌이 동료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목숨은 부지해 줄 테니 막으러 올 테면 와봐라. 그들이 인류 대학살 속 겨우 건져낸 목숨을 스스로 걷어차게 한 힘이 무엇일까. 바로 자유의지이다.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목숨과 증오의 반격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목숨과 연쇄의 단절을 택할 것인가. 결국 그들은 후자를 택했고, 마치 이 모든 서사가 지금을 위해 존재했다는 듯이 마음을 다잡으며 에렌을 막았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가 누군가에게 자유를 선물한 채 세상을 떠난다는 스토리는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 철학적이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답이 없는 논제처럼. 극과 극은 서로를 낳고 대립하며, 그 과정을 어쩌면 역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Q.가장 좋았던 장면은?
A.지크가 아르민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아가는 장면. 이후 지크는 쿠사바와 제회해 묻어놓았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당신과 캐치볼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도 좋을 것 같다고. 결국에는 모든 원흉이었던 아버지도 용서한다. 탐구의 주체인 인간이 그저 번식의 부산물이면 행복 역시 부산물에 그칠 뿐이다. 사소하더라도 소중한 일상이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라는 깨달음은 왜 항상 한발씩 늦을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Q. 추천하는가?
A.올해 1분기에 본 모든 드라마, 영화, 만화를 통틀어서 가장 추천하는 작품. 나의 편견을 뽑아버린 건 시즌 1에서 이미 끝나버렸고,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전개되는 반전과 감동에는 깊이가 있었다. 물론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주요 캐릭터와 사건이 셀 수 없이 많으니, 작품을 보고 이 글을 이해하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안 봤더라면 꼭 보고, 한 번 봤으면 두 번 볼 것. 일단 나부터. 신조 사사게요.
-
- <용길이네 곱창집> -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용길이네 곱창집
(焼肉ドラゴン, Yakiniku Dragon)
개봉일 : 2020.03.12 (한국 기준)
감독 : 정의신
출연 : 김상호, 이정은, 마키 요코, 이노우에 마오, 오타니 료헤이, 오오이즈미 요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이 영화는 오늘 당장 손에 잡히는 희망이 없어 어쩌면 내일은 있을지 모르는, 내일의 희망을 잡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전쟁 직후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 쫓겨나듯 떠나온 용길과 영순은 낯선 땅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용길과 영순과 함께 떠나온 시즈카, 리카, 미카는 한 자매가 되고, 막내 토키오가 세상에 나온다. 이들은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고, 지금 밟고 있는 나라 땅에 살아가는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닌 사람들이다.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는 판자촌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내린다.
강한 태풍 한 번이면 날아갈 듯 연약해 보이는 작은 판잣집에서 함께 사계절을 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아껴가며 긴 세월을 버텨온 용길의 가족에게서 여러 발효 식품들의 냄새가 풍기는듯하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아주 진하게 묵어버린 된장과 고추장. 그런 것들의 냄새 말이다.
머리 위로 쉼 없이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건만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탈 비행기는 없는 현실이 슬프다. 하지만 슬퍼하고 주저앉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조건 부딪히고,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 용길은 그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힘을 쥐어짜본다. 나라를 위해 한쪽 팔을 바쳤건만, 돌아온 건 힘겨운 삶뿐이다.
다른 나라와 조금은 다른 시기이긴 하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를 보며 <용길이네 곱창집>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직 씨조차 뿌리지 못한 단단하고 낯선 타국 땅 위에 나와 나의 가족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의 모습이 서로 닮아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어디든.. 타국살이라는 것이 참 눈물 나는 일이란 걸 이만큼 자라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지지 않고 꿋꿋이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는 그들의 내일엔 아주 작은 희망이 움틀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용길이네 곱창집 시놉시스
1969년,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일본 오사카 공항 근처의 판자촌 동네. 그곳에 전쟁을 겪고 일본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좁디좁은 ‘용길이네 곱창집’ 한 켠에 모여 술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며 차별과 무시를 꿋꿋하게 버틴다. 가족이 있기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69년 봄, 노란 잎을 가진 꽃이 만개하고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우리는 용길이네 곱창집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고도성장이라는 특급열차를 탄 사회 속에서 아직 그대로 머물러있는 판자촌.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의 한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다. 머리 위로는 비행기가 지나고, 시끌시끌한 동네는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듯하다.
첫째 시즈카와 둘째 리카, 셋째 미카, 그리고 막내 토키오. 용길과 영순. 여러 복잡한 사연을 가진 이 여섯 명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고 있으며, 느리고 뒤처진 걸음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생을 살아간다.
시즈카는 다리를 절고, 리카는 사랑하지 않는 테츠오와 결혼을 하고, 미카는 유부남 하세가와와 사랑에 빠진다. 토키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그를 지켜보는 영순은 속이 터진다. 영순과 반대로 용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란 피우지 말라며 가족들을 토닥인다. “소란 피우지 마”, “난 한국 가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영순의 한마디와 함께 막을 내린다.
한국과 닮지 않은 듯 어딘가 닮은 나라. 일본. 혼인을 약속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닐리리아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함께 있는 일본인들도 한국인들과 닮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비슷한 나라라고 해도 어쨌든 타국은 타국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해 도망치듯 안착한 타국 땅. 용길은 가진 돈을 털어 땅을 사고 곱창집을 차린다. 그는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희망이 생길 거라 믿으며, 외롭게 남은 한 팔로 열심히 곱창을 굽는다. 그 땅이 국유지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시간이 지나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젠 나름 먹고살만해진 사람들을 위한 여유 공간의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판자촌이 원래 국유지였다며 그곳에 공원을 지을 것이니 빠른 시일 내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 돈을 주고 산 내 땅이지만 내 땅이 아닌 땅. 용길은 나도 돈을 주고 산 땅이라며 퇴거 명령에 불응한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돈도, 다시 터를 잡을 돈도 없다. 비행기 활주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지만 비행기와 가장 먼 사람들. 용길은 막내 토키오를 손수레에 태우고 활주로 옆길을 달린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가진 것 없는 무력한 이들이 할 수 있는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털썩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영순은 가족들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큰소리로 윽박을 지르고, 시즈카, 리카, 미카 또한 자신을 갈등하게 만드는 인물인 테츠오와 하세가와 부인에 대적해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토키오와 용길은 그러지 못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토키오는 아이들을 향해 제대로 된 말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현실을 이겨낼 무기가 없다면 마음껏 소리라도 질러봐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었던 토키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안타까웠다.
용길은 아들의 죽음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앞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토해낸다. “이 땅 가져가려면 내 팔 돌려줘.” 항상 담담하게 가족을 지켰던 아빠의 입에서 서러운 말들이 터져 나온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하는 순간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등지고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남았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갔고 팔을 잃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다시 잡은 삶의 희망조차 빼앗아가려고 한다. 내 땅, 내 가게, 내 생계. 원래부터 사고팔 수 있는 땅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엄연한 내 땅이었거늘. 용길에겐 이제 고향도, 새로운 희망도 보이지 않는듯하다.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
삶이 답답하고 팍팍하다. 토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를 피해 지붕에 올라간다. 용길은 그런 아들을 보며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라고 묻는다. 붉게 물드는 하늘은 굳이 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용길이 말한다. “기분 좋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정말 희망이 찾아올까? 내일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용길의 가족은 희망을 찾아 각자의 길로 떠난다.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던 판자촌은 철거 후 아름다운 공원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은 남김없이 쓸려나갈 것이고, 그 위엔 아주 깔끔하게 포장된 새것들의 냄새가 가득 차겠지. 흩어진 가족들은 각자의 터전을 구축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가끔은 가족을 잊고, 또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연 많은 한 가족의 추억이, 찢어지게 아팠던 순간들이 벚꽃잎 한 장 한 장에 담겨 휘날린다. 오늘을 살아가고 나면 내일은 희망이 있겠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다가올 희망을 그리며 오늘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일은 희망이 가득 쏟아져내렸으면 좋겠다.
-
-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 <더 메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더 메뉴 (2022)
감독: 마크 미로드
출연: 랄프 파인즈, 안야 테일러 조이, 니콜라스 홀트
장르: 스릴러
상영시간: 107분
개봉일: 2022.12.07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참가비만 1250달러, 하루에 오직 12명의 고객만을 대접하는 외딴 섬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호손’. 그곳을이끄는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스)’을 동경하던 미식가 ‘타일러(니콜라스 홀트)’는 연인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와 함께 은밀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초대받게 된다. ‘슬로윅’이 유명해지는데 일조한 음식 평론가, 레스토랑에는 크게 관심 없어 보이는 유명 배우, 호손의 단골손님과 사업가 친구 무리들 등 공통분모라고는 상류층이라는 것 밖에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특별한 코스 요리를 즐기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외딴 섬에서 함께 합숙하며 새벽부터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는 직원들은 ‘슬로윅’에게 충성을 바친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슬로윅’은 까탈스러운 고객들이 기대했던 음식들을 그만의 스토리와 함께 차례로 대접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음식을 즐기던 찰나 마치 하나의 쇼처럼 진행되는 코스 요리에는 섬뜩하거나 기이한 일들이 하나둘씩 동반되고, 레스토랑과 ‘슬로윅’ 셰프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순식간에 모두를 공포에 빠드린다.
시종일관 음침하고, 꺼림칙하며 극의 중반부부터는 소름이 돋는 순간의 연속이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천재 셰프라는 소재만으로 불쾌한 장면들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생생하게 연출할 줄이야. 아무리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유능한 셰프가 아니라면 맛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요리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자체적으로도 증명해주는 듯하다. 외딴 섬의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마치 ‘미드 소마’ 같은 광기 어린 스릴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퍽 신선했다. 하지만 맛이 궁금할 정도로 화려함을 수놓은 요리들과 호손 레스토랑의 셰프와 직원들이 조성하는 서스펜스는 극에 내포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도 했다.
호손 레스토랑의 음습한 코스 요리는 내면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감독과 ‘슬로윅’의 날카로운 일침과도 같다. 셰프는 자신의 음식을 맛보며 즐거워할 고객들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요리하지만,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소수의 상류층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야 하고 평론가들에게 깎이지 않기 위한 압박감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성공한 셰프의 요리를 맛보러 온 돈 많은 고객들은 계급상의 특별함에 한껏 취해 권력을 뽐내려 하고, 음식의 흠을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씹고 뜯으며 요리를 분석하려 든다. 일명 음식 평론가라는 사람은 자신의 글 몇 자에 문을 닫은 레스토랑이 수 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셰프는 어느덧 요리하는 걸 순수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렸다.
‘슬로윅’은 자신의 순수성을 무너뜨린 사람들에게 날릴 마지막 일갈을 준비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요리가 무엇인지도 기억도 못하면서 열 번도 넘게 방문한 단골 손님, 요리라고는 할 줄도 모르면서 음식을 분석하는데 혈안이 된 남자, 권세에 취해 있는 음식 평론가와 같은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 충분히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만족할 만한, 그리고 과오를 뼈저리게 느낄 만한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맛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반면 완벽한 코스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죽임까지도 불사하는 ‘슬로윅’의 요리는 하나의 예술을 감상하는 듯하며 계급론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은 그가 단지 그럴싸한 비주얼로 포장할 줄만 아는 스타 셰프가 아님을 뒷받침한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빈민들의 주식이었던 빵을 ‘보통(Common)’ 사람들이 아닌 손님들에겐 대접할 수 없다며 ‘빵 없는 곁들임’을 내놓고, 그 마저도 예술이라며 떠받드는 고객들의 태도는 실소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에도 언제나 변수가 발생하듯 ‘슬로윅’이 촘촘하게 짜 놓은 판에도 제멋대로 굴러가는 장기 말 하나가 상황을 뒤흔들어 놓는다. ‘타일러’가 데려온 ‘마고’는 원래 초대 받지 않았던 손님이고, 그에 대한 정보가 없던 ‘슬로윅’은 이 정체불명의 여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깐 곤혹스러워 한다. 확실히 ‘마고’는 식당에 초대받은 상류층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인물이다. 편하게 식사해야 할 공간을 긴장감과 섬뜩함으로 채우는 ‘슬로윅’에게 당당하게 불쾌함을 표출하고, 무지성으로 그를 추앙하는 ‘타일러’와 달리 원치 않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이런 ‘마고’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며 ‘슬로윅’은 그가 남들처럼 추악함으로 뒤덮인 인간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본다. 초대 받은 손님들의 운명은 이미 바뀔 수 없도록 정해져 있지만, 마치 생존게임 속 깍두기와도 같은 ‘마고’만큼은 유일하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키를 쥐고 있었다. ‘슬로윅’의 집에 몰래 잠입해 그의 과거를 들여다 본 ‘마고’는 영리하게도 정통 치즈버거를 주문하며 그의 상실된 순수성을 일깨운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법한 주문에 잠시 당황했던 ‘슬로윅’도 치즈버거를 만드는 동안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며 과거 순수하게 음식을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듯 하다. 고급진 코스 요리에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렸던 ‘마고’는 그제서야 허기짐을 달랠 수 있었고, 패스트푸드라 할지라도 음식을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 때문일까. 온갖 산해진미를 내놓았던 그 어떤 고급 코스 요리보다도 ‘마고’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던 치즈버거가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음식을 즐길 줄 모르고, 평가하고 분석하는데 꽂혀 있는 사람들을 향한 풍자는 곧 예술을 순수하게 즐기려 들지를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단지 가벼운 오락의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눈에 불을 켜고 흠집을 찾아내고 구조를 해체하여 분석하는데 열중하는 시네필들은 언제나 순수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태도로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돈을 내고 소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음식이건 영화이건 평가를 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다. 다만 분명 비평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고, 영화를 볼 줄 안다는 혹은 비싼 요리를 즐기며 서슴없이 유명 셰프의 음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과시 욕구를 누리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언저리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것도 이들이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가장 해로운 것 또한 그들이라는 모순적인 생태계를 거침 없이 돌려 깐다.
-
- 계속된 실패에도 다시 도전하기
삶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다.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고 다시 도전을 계속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목표를 포기하거나 수정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진행된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과제들이 주어지고 그것을 통해 각자는 레벨업을 하며 성장해 나간다. 책을 읽고,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자신 만의 지식을 습득하고 실제로 활용해 가면서 자기가 자기고 있는 힘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 모든 과정은 성장을 위한 작은 계단들이다.
너무나 흔하지만 '실패'라는 일은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실패를 맞이하면 대부분은 주저앉아 절망한다. 그렇게 포기를 택하면 ‘실패’를 인정하고 더 이상 전진하지 않게 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이 되는 선택이 바로 포기다. 만약 그것이 꼭 이루고 싶은 목표라면 사람들은 ‘실패’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표에게 다가가기 위해 가장 많이 택한 실패 극복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는 한 팀의 이야기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에는 실패를 거듭하는 한 팀이 나온다. 팀에 속한 에드긴(크리스 파인), 홀가(미셸 로드리게즈),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 그리고 도릭(소피아 릴리스)는 네버윈터의 영주인 포지(휴 그랜트)에 맞서 보물과 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에드긴을 중심으로 모인 이 팀에는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다. 리더인 에드긴은 과거에 성스러운 일을 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아내를 잃고 딸을 혼자 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에드긴은 수많은 실패를 하게 된다.
에드긴이 아내 없이 처음 맡은 임무인 육아에도 계속 실패하자, 우연히 그 광경을 본 홀가는 에드긴의 집에 같이 살며 남매 같은 사이가 되고 딸을 같이 키운다. 이후 에드긴과 홀가, 사이먼은 크고 작은 보물을 훔치며 생계를 유지한다. 아내를 살리기 위한 부활의 보물을 훔치기 위해 팀을 만들어 보물이 있는 장소에 가지만 그곳에서 에드긴과 홀가가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가장 큰 실패를 맞이한다. 몇 년 후 결국 감옥에서 다시 탈출하지만 이미 과거 동료였던 포지와 악의 위저드 소피나(데이지 헤드)가 에드긴의 딸을 볼모로 삼게 된다.
영화에는 에드긴의 팀이 포지의 보물과 에드긴의 딸을 구출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 팀은 막강한 위저드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게 되는데, 깊은 던전에 숨겨둔 투구를 찾거나 마법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등의 다양한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재미있는 건, 그 목표를 향해 선택하는 방법들에 확신이 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리더인 에드긴의 계획에 따라 가지만 멤버들은 늘 벽에 막힌다. 또한 각 인물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타고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는 홀가를 제외하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믿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 찾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젊은 위저드 사이먼이다. 그는 자신의 마법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가 동료들에게 하는 말들도 모두 자신 없는 말들 뿐이다. 그래도 그를 좀 더 도전할 수 있게 이끄는 건 실패 전문가 에드긴이다. 에드긴 역시 최고의 전사나 마법사가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딸을 빼앗기는 큰 실패를 계속 겪는 인물이다. 영화는 실패한 리더 에드긴이 자신의 최종 목표에 어떤 식으로 다가가는지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전달한다.
에드긴이 선택한 길은 쉽지 않은 길이다. 어쩌면 불가능해보이는 그의 계획은 당연하게도 계속 실패한다. 영화가 다루는 에드긴의 실패는 절망적이지 않다. 이건 영화의 분위기가 밝은 톤이라서이기도 하지만 실패를 대하는 에드긴의 태도가 많은 영향을 준다. 영화 중반까지 관객의 입장에서 에드긴과 그의 팀이 성공할 거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우리 앞에 꽤 많은 실패가 먼저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이루어갈 때 조금씩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후반부 에드긴이 팀원들에게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이 맞이하는 모험의 끝이 나쁘지 않을 거란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팀원들은 실패의 순간에 목표를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에드긴은 실패 이후 어떤 식으로 상황을 대할 것인지 알려준다. '포기'를 택하는 순간 실패는 현실이 된다. 하지만 '포기'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하면 그 목표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방법이 안되면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고, 그것마저 안되면 다시 처음 방법으로 시도해 본다. '포기'를 선택하지 않는 삶, 그 태도가 리더인 에드긴이 살아온 삶이다.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사실 큰 기대를 받지 않았던 영화다. 오랜만에 제작된 판타지 영화이고, 과거 2000년에 한 번 영화화된 적 있는 영화는 롤플레잉 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2000년에 개봉했던 <던전 드래곤>은 명배우 제레미 아이언즈가 주연을 맡았지만 인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했고 그저 그런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리메이크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꽤 잘 만들어진 오락 판타지 영화다.
무척 흥미로운 판타지 오락영화
과거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는 팀원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무엇보다 강력한 악의 위저드보다 부족해 보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서사가 흥미롭다. 주인공 에드긴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분위기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실패 전문가들이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뤄내는 과정이 경쾌한 호흡으로 이어진다.
에드긴 역을 맡은 크리스 파인은 과거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유쾌하지만 허술해 보이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잘하면서 잘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다. 여전사 홀가 역을 맡은 미셸 로드리게즈, 사이먼 역을 맡은 저스티스 스미스도 인상적이고, 무엇보다 도릭 역을 맡은 소피아 릴리스의 매력이 돋보인다. 사기꾼 포지 역을 맡은 휴 그랜트는 능글맞은 이기적인 배신자역에 무척 잘 어울린다. 영화에는 이런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뚱뚱한 드래곤이나 다양한 마법 위저드들이 등장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마치 마블 시리즈의 초창기 영화들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경쾌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다. 다양한 방향의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는 원작이 있기 때문에 흥행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다양한 시리즈로 다시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 삶에서 무수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에드긴과 그의 팀이 앞으로 어떤 실패를 겪고 또 극복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contents/230328224357485tc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contents/230327105144479ci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contents/230319231932411vt
-
- 케이팝 데몬 헌터스 | 안성재와 오징어 게임이라는 명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계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의 세 멤버 '루미'(아덴 조), '미라'(메이 홍), '조이'(유지영).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팀이기도 했다. 바로 혼령의 휘하에 있는 악령들을 퇴치하는 3인조 데몬 헌터들인 것. 그들은 악령들과 직접 싸우면서 그들을 퇴치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사랑을 받는 노래를 발매하면서 그 연대감으로써 마법 결계인 혼문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악령들로부터 보호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팀 안팎으로 위기가 닥다.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루미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을 계기로, 루미와 나머지 멤버 간의 갈등이 커면서 팀 활동이 멈춰버린 것. 이에 더해 '진우'(안효섭)를 필두로 악령들이 결성한 아이돌 그룹 '사자보이즈'가 헌트릭스의 인기와 팬들을 흡수하면서 혼문의 힘을 약화에 따라 저승 지배자 '귀마'(이병헌)도 마침내 이승세계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
<케데헌>과 <흑백요리사>의 공통점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에드워드 리 셰프가 참치 비빔밥 요리를 내놓은 순간이었다. 자신을 비빔 인간이라 소개한 설명도 인상적이었지만, 참치로 감싼 비빔밥에 대해 상반된 심사위원 평가가 더 눈길을 끌었다. 두 심사위원의 차이점은 요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하는 세대 간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종원의 호평은 전통적인 관점에 가깝다. 한국 문화는 아직 그 자체로 해외 소비자에게 소구력이 없으니 변형돼야 한다는 것. 안성재의 심사평은 정반대다. 그는 한국 식문화를 신뢰한다. 음식의 맛은 물론, 아니라 먹는 방식과 형태도 본모습으로 제공해도 외국인들에게 통한다고 확신한다. 그가 비벼 먹는 과정이 생략된 비빔밥을 혹평한 이유다. 그가 보기에 이 요리는 한국 음식 고유의 정체성을 이미 잃어버렸다.
왜 이제 와서 <흑백요리사> 이야기를 하냐고?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때문이다. 미국 영화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인데도 익숙한 노래, 설정, 배경, 소재로 가득한 광경은 안성재의 확신이 비단 한국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와 동시에 씁쓸한 뒷맛도 남긴다. 문화적 자신감과 성과가 그에 맞는 대우와 보상을 받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니까.
케이팝으로 감싼 디즈니
사실 <케데헌>의 뼈대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전체적인 구조는 기시감이 느껴지며, 특히 <겨울왕국>을 빼다 박은 듯하다. 각 캐릭터의 특징과 관계가 겹치기 때문이다. 헌트릭스 멤버들의 관계와 엘사-안나 자매의 애증이 대표적이다. 엘사는 언제나 장갑을 쓴 채로 얼음 마법을 사람들로부터 숨기기 위해 애쓴다. 안나는 언니가 자기를 피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답답하고 서운할 수밖에 없다.
헌트릭스 멤버 사이는 엘사-안나 자매와 비슷하다. 루미는 악령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서 악령의 문양을 피부에 지니고 있다. 그녀는 양어머니이자 선대 헌터인 '셀린'(김윤진)의 조언대로 헌터 활동 동안 문양을 항상 감추며 지낸다. 미라와 조이는 비밀을 숨기려는 루미를 걱정하면서도 그녀에게 불만을 품고, 이 거리감은 헌트릭스가 분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자연히 자매애와 팀워크가 회복되는 과정도 유사하다. 엘사가 능력을 당당히 사용해 여왕으로 복귀하고 안나와의 관계를 회복했듯이, 루미 또한 자기 정체성을 가리지 않을 때 비로소 팀도, 혼문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그 외에도 두 작품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듀엣곡이다. 듀엣곡을 부르는 주인공과 빌런의 관계가 다르게 발전할 여지가 있었지만, 결국 남자 주인공은 빌런의 길을 선택하니까.
그러다 보니 <케데헌>의 첫인상은 마치 디즈니의 뮤지컬 애니메이션 중에서 노래만 케이팝으로 바꾼 듯하다. 다만 극의 짜임새는 <겨울왕국>을 비롯해 평균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수준에 못 미친다. 루미에 비해 미라와 조이의 서사는 지나가는 컷으로 짧게 언급될 뿐이고, 황금 혼문을 완성하는 일에 회의를 느낀 루미가 돌연 마음을 바꾸는 전개도 과정이 생략된 나머지 매끄럽지 않다.
케이팝의 두 특징
그런데 <케데헌>은 포장지인 케이팝만으로 기시감을 가리는 데 성공한다. 자기 본모습을 숨기기 않는 루미처럼 케이팝만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선택이 주효했다. 흔히 외신에서 언급하는 케이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케이팝은 단순히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이라는 점. 화려한 색감, 감각적인 영상미, 칼군무, 한국적 정체성이 조화를 이룬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시대에 다수의 팬을 확보할 수 있는 무기였다.
둘째, 케이팝은 여러 앨범과 뮤직비디오, 웹툰 및 소설을 넘나들며 '세계관'을 구축한다는 것. 케이팝 노래를 듣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가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이는 세계관만의 설정을 가사에 녹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에스파(aespa)의 노래를 듣고 가사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가상세계 '광야(KWANGYA)'를 비롯해 '나비스(nævis)' 같은 설정과 각 멤버들의 능력까지 알아야만 했다.
세계관은 케이팝 그룹에 유입된 팬들을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한다. 팬들은 세계관 설정의 빈틈을 채우고, 뮤비디오와 가사 등을 통해 다음 스토리를 예측하며, 2차 창작물까지 만들어 내면서 세계관을 스스로 확장하는 주체적인 쾌감을 경험할 수 있다. 팬들은 소비자 이상의 '스토리텔러'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자기 그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즉, 케이팝은 보는 음악일 뿐만 아니라 만드는 음악인 셈이다.
케이팝만으로 충분해
<케데헌>은 케이팝의 특징을 영화의 구조와 구성으로까지 승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한 편의 영화이자, 마치 여러 뮤직비디오의 모음집 같다. 주크박스 뮤지컬이 노래 사이의 공백을 서사로 가렸듯이, <케데헌>은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뮤직비디오 사이 공백을 '데몬 헌터'의 서사와 설정으로써 채운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에스파 같은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를 연달아 보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이유다.
이에 더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이돌 그룹 내지는 세계관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케데헌>이라는 그룹 안에서 주요 캐릭터들은 마치 일종의 유닛처럼 활동하고, 그들의 서사는 자체 콘텐츠로 소비되면서 더 많은 2차 창작이 가능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것. 유튜브와 SNS에서 그들의 서사가 재생산되고, 영화뿐만 아니라 음원도 적극적으로 소비되는 추세는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케이팝의 정체성을 내세워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차별화하는 전략에서는 진정성도 느껴진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아도 세계관의 기본적인 토대 속에 케이팝의 역사도 녹여내고 있기 때문. 실제로 세대마다 3인조 여성 그룹 춤과 노래로써 청중의 유대감을 고조하고, 악령을 막아낼 장벽을 세우는 임무를 전승한다는 설정은 저고리 시스터즈, 김시스터즈, 세또래, S.E.S와 같은 그룹에 대한 오마주처럼 묘사된다.
케이팝과 전통문화의 연결고리
<케데헌>의 자신감은 극에 깊이를 더한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의 접점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지다. 일견 어색한 퇴마 아이돌이라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종교적인 측면을 배제한다면 무당은 마을과 지역, 더 나아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유대감을 고조하고 확인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굿이라는 의식 역시 목적을 떼고 보면 특수한 음악, 노래, 춤이 결합한 종합 예술로 봐도 억지는 아니다.
<케데헌>은 이 무당의 사회적 기능, 굿이라는 의식의 예술성에 주목한다. <검은 수녀들>이 무당과 수녀 간에 여성의 영성이라는 연결고리를 찾아냈듯이, <케데헌>은 무당과 아이돌 사이에서 사회성과 예술성이라는 유사점을 발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케데헌>은 현대적 이미지와 전통문화의 요소를 더해 신선한 이미지를 더할 수 있다.
별자리가 새겨진 사인검, 무당의 무구인 신칼, 가야의 곡도 등 한국인한테도 낯선 문화유산을 헌트릭스가 무기로 사용하는 묘사가 대표적이다. 한국 고유의 민담을 활용한 저승, 저승사자, 도깨비처럼 보이기도 하는 귀마와 같은 설정도 마찬가지다. 민화를 모티브로 한 호랑이와 까치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케데헌>은 중국, 일본과 분명히 다른 한국만의 멋과 이미지를 즐기는 묘미를 내국인과 외국인 가리지 않고 선사한다.
'한국'이면 충분해
철저히 한국적으로, 현대적인 문화와 전통문화를 모두 활용한 <케데헌>의 만듦새는 지난 10여 년간 급성장한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단적으로 방증한다. 지난 몇십 년간 한국 문화는 사실 중국과 일본 문화의 영향력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할리우드 영화만 보더라도 중국 문화는 <쿵푸 팬더>, <뮬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같은 작품에 녹아 있다. 아예 일본이 배경이 <더 울버린>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작품이 한국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더라도 이상하게 소비되는 경우도 잦았다. <블랙 팬서>에서는 부산이 배경인데도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한국어가 등장하기도 했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도 서울 시내를 홍콩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케이팝과 한국 문화 본모습만으로 충분하다는 <케데헌>의 자신감은 더 인상적이다. 소니라는 메이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만들고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작품도 한국적 미학으로 무장할 수 있으며, 그 작품이 소구력이 있다는 것을 당당히 증명했으니까. <흑백요리사> 속 안성재 셰프가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특유의 본질적인 미식 경험을 강조한 그의 심사평이 한국 문화 전 영역에 통용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케데헌>의 암
다만 <케데헌>의 자신감과 성취 이면에는 이른바 '국뽕'에 가려져서는 안 될 한계점도 명확하다. 바로 <케데헌>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넷플릭스와 소니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둔 배우, 성우, 가수, 프로듀서 등 수많은 아티스트의 노력이 더해진 결실이지만, <케데헌>이 거둔 열매는 구조상 결국 그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강력한 경고로 들리기도 한다. 아무리 한국 콘텐츠가 사랑받고 문화적 영향력이 강해져도, 정작 국내에서 <케데헌>과 같은 콘텐츠가 제작되고 성공할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버는 상황이 끊이지 않을 테니까. <오징어 게임> 시즌 1의 흥행 이후 OTT와의 수익 분배에 관해서 여러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고, 정부 차원의 노력이 있었는데도 아직 명확한 성과가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즉, <케데헌>은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다시 한번 증명함과 동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그 과실이 실질적으로 한국의 콘텐츠 산업계로 귀속시킬 구조와 환경의 필요성을 환기는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오징어 게임>, 제2의 <케데헌>이 등장해도 마냥 반길 일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과 열풍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한국인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퇴마 아이돌
-
- 넷플릭스 뮤지컬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NETFLIX, 22.12.25 공개)
감독: 데니스 켈리
출연: 알리사 위어, 엠마 톰슨 등
무려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고 해서 한 달 전부터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던 작품입니다.
1997년 개봉한 영화 '마틸다'와 내용 같고요, 거기에 뮤지컬을 추가했다고 생각하심 될 듯해요
근데 기대를 너무 많이 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지루하고 유치한 느낌이 많이 났답니다 ㅠㅠ
전체 관람가다 보니 아이들도 보기 쉽도록 단순하게 연출했겠지만,
아무래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거라며 과대 홍보를 하여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여 놨던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일반 영화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은 이야기 진행이랄까요?
사실 '마틸다'에서도 이야기가 너무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한 1인입니다만... 학대당하는 아이, 그러나 어딘가 천재성이 있는 아이, 입학하게 된 학교의 교장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 와중에 초능력을 부릴 수 있단 걸 알아챈다, 게다가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거둬 주기까지... 소재가 하나인 게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뒤엉켜 하나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이야기잖아요.
'마틸다'에서는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에서는 마틸다가 머릿속에 상상한 소설이 한 편 등장하는데요. 그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 허니 선생님이에요
임신한 채로 곡예를 부리던 엄마는 자신을 낳고 돌아가시고, 이모 손에 맡겨진 허니 선생님은 학대를 당하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의 아빠는 대응하려다가 아마도, 이모 손에 죽게 된 거 같고요. 그 이모가 바로 트런치불 교장!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과거가 있기에 마틸다를 거둬 주기로 한 건데요... 마틸다와 겹쳐지는 허니 선생님의 어린 시절 연출이 굉장히 슬프고 감동적이긴 했지만 사실 영화의 엔딩 치고 그닥 완벽해 보이진 않아요. 마틸다는 행복해졌지만, 시청자가 개운하진 않은...?
하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전 사실 이 모든 게 마틸다의 상상 같기도 합니다. 학대를 당하던 마틸다는 이미 죽었을지도요.
자신을 방임하는 부모에게 염색약, 본드 등으로 복수하는 것도 작고 힘 없는 마틸다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고요. 트런치불 교장이 있는 그 학교는 어쩌면 고아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마틸다와 달리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정작 트런치불 교장의 학대에 소리치는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아니, 그냥 그들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오로지 허니 선생님만이 교장의 학대를 막아 줄 뿐 이 모든 게 상상이라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초능력' 때문이겠죠. 그 초능력만 있었다면 마틸다는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지긋지긋한 트런치불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요.
엔딩쯤에서 아빠가 마틸다에게 '딸'이라고 하는데요 평생을 '아들'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야 딸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마틸다가 듣고 싶던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많이많이 기대한 것보다... 훠얼씬 실망했다는 게 저의 총평이랍니다 ㅠㅠ 노래를 듣는 맛은 있었지만 귀에 착 감기는 넘버는 없었고, 뮤지컬 '마틸다'로도 공연 중이기 때문에 그걸 한번 보고 싶다는 욕심은 생겼네요~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의사: ★
-
-
-
- 영화 <인트로덕션> 메인 예고편
1.
아들은 아버지가 불러서 한의원을 찾았다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환자들 때문에 바빴고
아들은 하루 종일을 기다려야 했다
2.
딸은 독일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러 갔다
어머니는 독일에 사는 옛 친구의 집에 딸이 묵게 하려고 같이 동행했다
친구 집에 묵게 된다면 방세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불러서 동해안의 횟집으로 찾아갔다
어머니는 나이 든 남자배우와 함께 있었다
그 배우는 오랜 전에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아갔을 때 만난 적 있는 사람이었다
-
- 영화 <기적> 티저 예고편
1988년 찻길 하나 없는 시골 마을,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 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동네에 간이역 만드는 게 단 하나의 꿈인 ‘준경’(박정민)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