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2025-04-07 01:37:05
파편화된 영혼을 이어붙이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컷> 리뷰
1) The fall
오프닝 시퀀스, 1920년대 흑백의 무성영화가 재생된다. 찰나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기차, 말, 다리 위에서 몸을 내던진 뒤 맞이하는 결말은 불구가 된 주인공 ‘로이’다. 할리우드 스타가 되고 싶었지만 엑스트라1에 그친 로이는 다리에 붕대를 감고 병실에 누워 있다. 우연히 오렌지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다친 어린아이, ‘알렉산드리아’와 마주하면서 두 추락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옛날 옛적의 로스앤젤레스 대서사시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눈을 감고 환상의 세계로 넘어갈 준비가 됐는지 묻는다. 그 순간, 로이의 영화 현장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녀의 상상으로 아버지, 얼음 장수, 의사, 환자, 간호사, 로이 등 주변 인물들이 무법자가 되어 엉성하게 서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쪽지가 지도로 등장하고, 그녀의 아버지처럼 복면 쓴 사내의 이가 벌어져 있다. 이야기 속 여섯 무법자 (오타뱅가, 인도인, 찰스 다윈, 루이지, 알렉산더 그리고 주술사)는 오디어스 총독을 죽이기 위해 바다, 사막, 초원을 지나 적을 무찌르고 약한 사람들을 구한다.
오디어스 총독을 증오하게 된 각자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로이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동시에 알렉산드리아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으나, 로이는 이를 간과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 채 로이의 입에 성체를 넣어주었고, 로이는 나쁜 희망으로 그녀를 이용하려 한다.
2) fall in movie
알렉산드리아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핑계로 모르핀을 구해주고 로이가 살아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한다. 현실에 못 이겨 무너지는 모습들로 로이가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로이를 위해 다시 모르핀을 찾던 알렉산드리아는 발을 헛디뎌 또 한 번 추락한다. 그녀의 추락 뒤에는 그들의 추락 이미지가 다시 재생된다. 알렉산드리아는 화난 사람들이 아빠를 죽이고 집을 태웠던 추락, 촬영 현장에서 로이가 무수히 추락했던 트라우마까지 고스란히 안고 떨어졌다.
로이는 그동안의 잘못(모르핀 심부름)을 반성하고 그녀에게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에게 추락이 전락은 아니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로이는 고군분투하던 전사들을 무력하게 죽음으로 몰아갔고 알렉산더까지 죽기 직전, 알렉산드리아는 직접 알렉산더가 되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드리아의 진심어린 애원으로 알렉산더가 가까스로 일어나 오디우스를 물리친 것이다. 알렉산더이자 로이의 의지가 발현되어 이야기는 끝내 전락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추락하고 조각난 로이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무법자들의 영혼들을 이어 붙이고 있다. 회복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모여 서로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껏 그들이 상상했던 이야기가 병원에서 상영될 때, 모두가 짓는 기분 좋은 웃음 또한 연결됨을 보여주고 있다. 퇴원 후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비디오를 하염없이 돌려보며 잘라진 컷들 사이에서 로이의 얼굴을 찾아낸 것처럼 영화는 파편화된 영혼을 이어 붙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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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설 | 공감과 청량으로 빚은 계절감 충만 로맨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손에 쥐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부모님 도시락 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용준’(홍경). 어느 날, 그는 배달 중 들린 수영장에서 완벽한 이상형 ‘여름’(노윤서)을 만난다.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의 훈련을 돕던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행운까지 따른 덕분에 용준과 여름은 친구가 된다.
입이 아닌 손으로만 말하는 여름과 더 가까워지고, 소중한 사이가 되고자 노력하는 용준. 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용준의 고백은 거절당한다.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용준과의 만남이 청각장애인 동생과 부모님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여름에게는 충격이자 부담이었기 때문. 하지만 용준은 희망을 놓지 않았고, 초여름이 깊어지면서 여름도 서서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20대라는 계절
어른들이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이들을 위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인생을 시계에 비유하는 것. 100세 인생 중 20대 중후반이면 이제 1/4 정도 지났을 뿐이니, 시계에서는 새벽 6시 언저리이고, 막 해가 뜨거나 뜨기 직전의 새벽일 뿐이라고. 그러니 설령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좌절스럽더라도 무너질 필요는 없다고. 간 호흡으로 인생을 보면서 내실을 다지고, 다음 기회를 노려도 충분하다고.
이 비유는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다. 마라톤 같은 달리기 경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더해도 된다. <다크 나이트> 중 하비 덴트의 대사처럼, 인생의 새벽인 20대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서 더 어두운 것이라고. 계절로 대신할 수도 있다. 20대는 사계절 중 이제 막 초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일 뿐이니 아직 열매를 수확할 가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1년을 마무리할 연말은 까마득하다고.
대만의 동명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청설>은 인생의 초여름, 20대 중반을 마주한 청춘들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정확히는 로맨스를 곁들였다. '우리의 여름을 들어달라'(Hear Me: Our Summer)는 의미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가 아니라 세 주인공이 각자의 여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이름이다. 특히 두 자매의 이름이 독특하다. 한국판 <청설>은 자매의 이름을 계절감 가득한 '여름'과 '가을'로 변경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 덕분에 세 주인공이 마주하는 인생의 초여름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름과 가을 자매의 이야기에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름과 가을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름의 인생은 철저히 가을이에게 맞춰져 있다. 동생이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뚫고, 함께 올림픽에 가는 게 그녀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서 여름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을이의 훈련비로 투자하고, 시간을 쪼개서 국제 수화를 배우러 다닌다. 영준과 썸을 타고,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려는 순간마다 그 관계를 망설이거나 끊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와의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오히려 다그치는 것.
여름이에게 영준과의 만남은 터닝 포인트다. 영준은 대학 졸업 후 하고 싶은 일이나 진로를 아직 찾지 못한 평범한 20대다. 그는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만난 여름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같이 인생의 목표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정작 여름은 충격에 빠진다. 올림픽 출전이 가을이의 목표일 뿐 자기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 깨닫고, 청각장애인인 부모님이나 동생과는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
여름의 깨달음은 메타적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열매라고 생각했던 가을이의 올림픽 출전이 자신의 '가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그렇게 여름이는 여름이 코 앞에 다가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가을, 새로운 인생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준과 여름의 로맨스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여름을 마주하고는 각자의 가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격려와 위로에 가깝다.
착한데, 착하기만 한 로맨스
물론 <청설>에는 대만 로맨스 영화에 기대하는 순간도 나온다. 사랑이 시작되는 풋풋함, 착한 풋사랑이 끝나는 아픔 등. 특히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활용한 전자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영준이 여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유독 살랑거린다. 수영장에서 번호를 따거나 커피를 같이 마실 때 말을 하는 대신 전부 수화만 사용하다 보니 설렘과 떨림이 손짓과 몸짓만큼 크게 보이니까.
여름이 영준에게 빠져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호감은 느끼지만 그를 친구로만 생각하던 여름. 하지만 기분 전환 차 놀러 간 클럽에서 그녀는 시나브로 그에게 스며든다. 영준이 이끄는 대로 손을 스피커에 대고, 음악을 듣는 대신 느끼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한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연다. 수영장에서 영준의 말이 아니라 그가 보낸 물결을 느낀 후에야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장면처럼 비슷한 순간이 반복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다만 착하고 순수한 로맨스가 빛이 바래는 순간도 있다. 여름과 영준의 관계를 위기에 빠트리는 전개가 부자연스럽기 때문. 특히 여름과 가을의 자취방에 불이 나는 시점부터의 진행은 다소 갑작스럽다. 물론 세 주연의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들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작위적인 전개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영화의 분위기는 끝내 불협화음을 내고 만다.
소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유독 부각되는 단점도 있다. 바로 영화가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청설>은 청각 장애인의 로맨스를 다루기에 독특한 작품이다. 소재를 강조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상술했듯이 청각 장애인들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면서 고정관념을 빗겨 나간다. 또 템포가 늘어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수화로 이뤄지는 대화를 가능한 끊지 않고 보여주려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하다. 여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긴 반전이 특히 문제다. 영화적 재미는 더할지는 몰라도, 여름과 영준의 감정선을 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제와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비장애인의 로맨스였다는 점에서 청각 장애는 그저 도구로만 소비된 셈이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 집단 배우나 캐릭터를 보여주기식으로만 활용하는 ‘토크니즘’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더 나아가 평면적인 청각 장애인 묘사도 구시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청설>은 모든 청각 장애인을 착한 사람, 배려받아야 할 사람, 약자들로만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가 장애인들이 사업체를 소유하거나 지역 어업 공동체를 이끄는 식으로 그려낸 것과 비교하면 <청설>은 깊이가 얕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배우라는 눈속임
그런데 <청설>은 최소한 보는 동안에는 위의 단점이 생각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바로 영화의 감성을 온전히 살린 배우들의 힘이다. 우선 홍경이 연기한 영준의 경우 사실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일반적이고 평이하니까. 하지만 그 인물을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홍경의 연기는 그가 주목받는 신예인 이유를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 잘못과 마음을 무심하게 고백하는 수영장 씬만 봐도 느낄 수 있다.
여름을 연기한 노윤서는 기시감이 없지 않다. <일타 스캔들> 등에서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 그러나 익숙하고 편안하게 캐릭터를 관찰할 수 있다 보니 사소한 동작 하나 놓치지 않는 표현력이 더 돋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례로 그녀는 수화를 할 때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은 입모양을 만들 때가 있다. 이러한 디테일은 여름이 사실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반전의 복선으로 이어지면서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김민주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이라는 캐릭터는 오로지 수화와 표정, 제스처만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대사가 단 한 마디도 없는 제한적인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혹시 모를 발성에서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돌다운 표정 연기와 제스처가 뛰어난 전달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부담감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한 가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바로 개봉일이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수능 특수를 노린 선택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와 분위기를 고려하면 최선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관객을 매료하기에는 생각보다 진중하니까. 또 계절감이 충만한 영화인 만큼 초여름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는 개봉시기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Poor 형편없음
배우와 감성, 분위기만 빛나는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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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 스프링스> 쪽빛 설탕물
<팜 스프링스>
로맨스 영화 안 본 지 참 오래됐습니다. 단순히 한두 달도 아니고 한 1년 넘게 안 봤던 거 같네요. 정확한 이유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마치 '내년 크리스마스는 커플로 보내야지'하는 다짐처럼 막연히 그냥 거리를 두게 된 지 오래였습니다.
글쎄요, 왜일까요? 그동안 너무 혼자 외롭게 지내다 보니 인생의 동반자에 대한 인식이 잠시 사라졌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흑
▲ 로맨스 영화 참 오랜만입니다.
그러던 며칠 전 '씨네랩'에서 주최하는 <팜 스프링스> 시사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 오랫동안 멈춰있던 사랑의 톱니바퀴가 조금씩 움직임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극장으로 발길을 향하게 되었네요.
▲ 뭔가 본능적으로 영화를 보러 가게 됐네요.
<팜 스프링스>의 시놉시스
캘리포니아의 사막도시 '팜 스프링스'의 리조트에선 '탈라'(카밀라 멘데스)와 '에이브'(테일러 후츨린)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을 배경으로 하루가 반복되는 타임루프 세계관에 남자 '나일스'(앤디 샘버그)가 갇힌지 오래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한 사고로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가 나일스의 시간대에 개입하면서 수천/수만 일 동안 같은 날을 살았던 나일스의 하루는 변화하게 되는데...
▲ 타임루프에 먼저/나중에 들어온 남녀의 이야기 <팜 스프링스>
★주의★
'영화의 주제와 특징'부분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 당하기 싫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부분까지
쭉 넘어가 주시길...
<팜 스프링스>의 주제와 특징
주인공과 몇몇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과 환경이 매일 반복되는 SF장르 '루프물'.
▲ 이제는 너무 익숙한 타임루프 로맨스 영화들
하루가 토씨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되풀이되다는 이 소재는 그동안 영화계에서 로맨스와 스릴러에 종종 섞이며 이제는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많이 들어봤겠지만
무한 타임루프예요대충 생각나는 로맨스 루프물만 봐도 <사랑의 블랙홀>(1993),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 <어바웃 타임>(2013) 등등 계속 생각나니까요.
▲ 영화는 우리의 상식을 한번 크게 꼬았습니다.
따라서 <팜 스프링스>는 아류작이라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각본을 한번 크게 꼬았습니다. 이미 남자는 루프안에 갇힌 지 수천일이 지난 올드비, 여자는 갓 들어오게 된 뉴비라는 설정이죠.
이런 독특한 설정을 중심으로 영화는 기묘하게 돌아갑니다. 처음부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뭔가 조금씩 이상했던 장면도 앞뒤가 짝짝 맞거든요. 예를 들어 나일스가 '미스티'(메레디스 하그너)랑 사랑을 나눌 때 지루라는 설정이나, 다들 정장인데 하와이안 셔츠만 입고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는 이유 같은 거 말이죠.
▲ 처음엔 이 누나가 주인공인 줄...
이 와중에 영화는 정말 가벼워도 이보다 더 가벼울 순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19금(R 등급) 판정받았던 이유를 잘 알 수 있듯이, 영화의 야한 코미디도 생각 이상이죠.
아실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코미디 영화는 가벼울수록 힘을 받습니다. 아예 무거운 생각은 다 내려놓고 즐기자는 마인드로 관객들에게 접근한 <팜 스프링스>의 전략은 대성공이네요.
▲ 가벼워도 너무나 가볍습니다.
물론 막판에 SF까지 끌어다 쓴 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을 겁니다. 세라가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면 아마 영화는 이 한편으로 안 끝났을 테니까요..
추가적으로 꽤나 애니메이션 성우로 유명한 앤디 샘버그의 연기력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점고,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10초 앤 해서웨이 크리스틴 밀리오티의 발굴도 이 영화의 큰 수확이네요.
▲ 덕분에 영화는 합격점을 충분히 넘었습니다.
<팜 스프링스>를 보고..
40도 무더위와 땡볕 속 사막을 거닐고 있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음식은 뭘까요? 아마 그 남자/여자에게 제일 맛있는 음식은 수십만 원짜리 스테이크가 아니라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 일 겁니다.
이처럼 <팜 스프링스>는 가볍지만 세련된 '쪽빛 설탕물' 같은 존재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뭐, 깊게 분석할 것도 별로 없는 단순한 영화인데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꽤나 큰 힘을 주거든요.
▲ 매우 얕지만 그래서 더 효과적인 <팜 스프링스>
<팜 스프링스>를 반복되는 인생에 지친, 추가로 사랑이 고픈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훗날 이런 영화가 또 나왔을 때는 연인이랑 같이 보러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부디 제 인생의 반쪽이 저의 내민 손을 잡아주길...
떠나는 게 두려운 거죠?
<팜 스프링스>
★★★★
쪽빛 설탕물** 본 콘텐츠는 블로거 '할리포레스트'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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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캡틴
더 캡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지만, 비이성, 광기의 시대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입장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안 필름'처럼 세르비아인 감독이 자기 나라에서 저지른 폭력을 포르노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헤롤트가 우연히 발견한 장교복을 입으면서, 제복의 힘에 경도되는 과정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헤롤트 일병은 탈영한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시기에 독일군 탈영병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전쟁 끝무렵이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여기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하나둘 탈영을 시도했다.
독일 헌병대에서는 이렇게 탈영한 군인을 잡아들이거나 즉결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헤롤트 일병의 실화가 발생한다. 헤롤트는 탈영을 하지만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막막하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군용 짚차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고, 그 안에 공군 대위의 제복과 군화를 비롯한 훈장 등 완벽한 세트를 발견한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헤롤트였지만, 이미 1년 정도 전방에서 전투에 참전했었고, 초반에는 매우 영웅적인 군인이어서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헤롤트가 어떤 이유에서 탈영을 한 것인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리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은 경력을 보면, 나름 배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헤롤트는 장교 군복을 차려 입고, 스스로 장교가 된 것으로 자기 최면 및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탈영병을 모아 '헤롤트 부대'를 만든다. 그는 후방을 다니며 마주치는 탈영병을 규합하고, 농가에서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며 다니는데, 탈영병을 추적하는 헌병대를 만나 위기에 놓이지만, 헤롤트는 자기가 '최고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며 위기를 넘긴다.
헌병대 대위와 함께 탈영병들이 잡혀 있는 임시수용소에 도착해 수용소장 쉬테의 환대를 받는다. 쉬테는 탈영병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데, 헤롤트가 쉬테에게 '총통의 특명'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탈영병들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친다.
헤롤트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공군 장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교가 되었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일병이었을 때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탈영병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롤트와 그의 부대가 탈영병 약 90여 명을 대공포로 살해한다. 탈영병이라 해도 같은 독일인이고,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임에 틀림없으며, 헤롤트 자신도 탈영병이었던 걸 생각하면, 헤롤트는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헤롤트가 갑자기 장교복을 입고, 장교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때 헤롤트의 본성이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전투를 통해 선량한 청년이었던 헤롤트가 점점 괴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헤롤트의 행위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독일군이 같은 독일군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나치의 폭력성, 전쟁광 히틀러와 독일군의 야만성을 풍자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헤롤트의 광기는 순박한 청년이 전쟁에서 미쳐가는 과정과 함께, 당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광기와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건은 뒤에서 발생한다. 탈영병들을 살해한 헤롤트와 그의 부대는 신고를 받고 들이닥치 육군헌병대에 체포된다. 헤롤트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며 그가 장교가 아닌, 일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헤롤트는 군사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은 장교사칭, 탈영병 학살의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려 하지만, 다른 장교가 헤롤트의 행동은 독일군인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행동이며, 독일이 전쟁에서 져도 나중에 독일군의 일부는 비밀 저항조직을 만들어 적들과 싸울 것이며, 이때 헤롤트 같은 군인이 필요한 인재라고 옹호한다.
독일의 군부는 연합군에 패배한 다음에도 어떻게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롤트 같은 인물을 독일군의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독일군부는 히틀러처럼 이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헤롤트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사히 탈출해 숲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헤롤트는 그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한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이 패하고, 헤롤트는 항구도시이자 해군주둔지인 빌헬름스 하펜으로 가서 굴뚝청소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가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마 늙어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1945년 5월에 빵을 훔치다 영국 해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단지 빵을 훔쳤다는 가벼운 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롤트는 자기가 군인이었을 때 저질렀던 장교사칭과 탈영병 학살까지 모두 밝혀졌고, 영국 해군은 헤롤트를 끌고 수용소가 있던 아셴도르퍼모어의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학살당한 장소에서 195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영국 해군은 헤롤트와 그의 부대원들을 검거했고, 모두 여섯 명이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헤롤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9일, 볼펜뷔텔 교도소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모두 참수되었다.
이때 헤롤트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 전쟁이 헤롤트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헤롤트의 내면에 있던 괴물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권력을 가진 자가 광기에 휩싸이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헤롤트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어리기만한 헤롤트는 그래서 더욱 쉽게 권력의 노예, 권력의 광기에 영혼을 빼앗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 전체가 이미 미쳐버렸고, 나치의 광기에 휩싸인 뒤여서 청년들의 생각도 그렇게 세뇌되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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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틱>, 그릇된 믿음
씨네랩, '헤레틱' 첫 시사회
3월 28일, 씨네랩에서 처음으로 초청돼 헤레틱 시사회에 갔다. 믿음관, 불신관 둘중 하나를 미리 택한 후 해당하는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보니 관별로 객석 추첨을 하고 선물을 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당첨은 되지 않았지만 시사회에서는 하는 이벤트도 경험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영화가 모두에게 공개되기 전이었다. 설레는 와중에 영화가 시작되었다.
믿음과 불신이 모여 만든 '착각'
영화에는 2명의 소녀와 1명의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몰몬교를 믿는 소녀들은 전도를 하기 위해 남자의 집에 방문하게 되고, 그와 몰몬교를 비롯한 신앙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남자는 성경을 기초로 하는 다양한 종교를 연구한 전력이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지식을 설파하며 소녀들이 믿는 종교의 정당성과 믿음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소녀들을 자신의 집에 가둔 채로.
스릴러 장르에 걸맞게 갇힌 공간에서 대답을 강요당하는 소녀들의 상황이 퍽 무섭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두 소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탈출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그의 논리의 오점을 지적하며 반박을 하기 시작한다. 설왕설래를 하는 동안 분명해지는 건 믿음과 불신의 참과 거짓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을 거쳐 건설된 그의 '착각' 뿐이다.
종교와 통제, '경계'의 차이
중년의 남자는 사이코적인 면모를 어김없이 뽐내며, 영화 안에서 극악무도한 짓을 일삼는다. 그는 '종교는 곧 통제'라는 깨달음을 얻은 자로, 전도를 하러온 신앙인들에게 그 깨달음을 강요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 방 안에서는 통제하는 그가 곧 절대자, 신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통제'라는 개념은 안과 밖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안과 밖, 그 경계가 없다. 성경을 덮는다고 신앙인들의 믿음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믿음과 불신 또한 그 경계를 분명히 알 수 없으며, 완전한 믿음과 불신이 없다는 것을 그 사이 스펙트럼에서 충돌하는 두 소녀와 남자가 증언한다. 종교의 참과 거짓을 알 수는 없지만, 종교와 통제가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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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나더 라운드> 디오니소스와 함께 술 마시며 춤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촉망받던 역사학도였으나 지금은 일상에 찌들어 무기력해진 고교 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 그는 각각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와 함께 한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흥미로운 심리학 가설을 듣는다.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정도를 채워주면 더욱 편안하고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 직접 실험에 나선 마르틴은 음주가 지루한 수업과 가족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후일담을 전해준다. 이에 네 친구는 언제나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하고, 밤 8시 이후엔 술에 손대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한 뒤 지루한 교사, 매력 없는 남편, 따분한 아빠에서 탈피하기 위한 본격적인 실험에 나선다.
현대 사회로 오면 올 수록 술에 대한 인식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술의 정(精)이여! 너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면 앞으로 너를 악마라고 부를 테다"라고 외친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2011년에 술은 세계보건기구(WHO) 선정 1급 발암물질이 되기도 했다. 특히 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구하기 쉽다는 접근성과 인간관계 형성을 위해 오래도록 쓰인 문화적 특징과 결부되어 사회적, 개인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해서인지 많은 창작물에서도 술은 흔히 파국을 불러오는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에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고, 지난 19일에 개봉한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결이 다소 다르다. 덴마크 대표 배우인 매즈 미켈슨과 토마스 빈터버그 감독이 <더 헌트> 이후 처음 합작한 이 영화의 종착역은 쌉싸름함 속에 달콤함이 깃든 다크 초콜릿처럼 마냥 행복하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약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술 내음이 가시지 않는 데도 말이다. 실제로 술이 등장하기 전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의 일상은 잿빛이다. 그러나 보드카·와인·샴페인 등이 등장하자 스크린에는 활기가 돌고, 색채가 살아난다. 왜 그럴까? 이는 <어나더 라운드>가 단지 술 문화 그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술을 매개로 흔히 간과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때 <어나더 라운드>는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신의 이름을 빌려 술을 둘러싼 네 친구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폴론은 시와 음악의 신이자, 빛의 신이고, 또 질서와 진리의 신이다. 이처럼 다양한 아폴론의 신격은 그의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통해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있다. 이 문구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로서 신들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알라는 격언으로, 인간의 본성적 한계를 강조한다. 달리 말해 아폴론은 한계와 한도를 통해 무질서에 맞서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관장하는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일정한 한도와 질서라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즉, 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그의 역할은 개인적으로는 몸을 훈련시키는 체육처럼 영혼을 갈고닦는 교육의 기능에 속하고, 더 넓게는 이성을 통해 세계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성적 목적을 갖는다.
실제로 영화는 이러한 아폴론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영화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학교인 것만 해도 그렇다. 학교라는 공간은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울대학교 정장에 'VERITAS LUX MEA', 곧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네 친구가 각각 역사, 체육, 심리학, 음악 등 그의 신격과 관련된 영역의 교사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질서와 진리를 강조하는 신의 가치가 지배적인 공간과 직업답게, 그 안에서 지내는 구성원들에게도 강력한 규칙과 규율이 적용된다. 제 몫을 다해내지 못하면 교사들은 면담을 통해 학부모들로부터 직접 컴플레인을 들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학업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학생은 졸업 대신 재수강을 반복해야 한다. 당연히 술의 존재 역시 학교에서는 언급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금기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질서가 확고한 공간 안에서 작중 구성원들은 행복해지는 대신 오히려 피폐해진다는 점이다. 교사라는 직업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교사는 그 무기력함이 가족 관계로 번지는 것마저 막아서지 못한다. 육아와 직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아버지는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토로한다. 졸업 시험에서 거듭 낙제를 경험했던 학생은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이며, 축구팀 내에 스며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한 어린아이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이러한 공통의 좌절감은 이들의 이야기가 단지 학교 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처럼 강력한 질서와 규율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되는 기반이 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술을 매개로 포도주의 신이자 축제, 광기, 야성의 신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를 불러온다. 디오니소스는 사람들을 산과 들로 이끌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하면서 열광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신이다. 그는 질서와 같은 이성적 틀이 사람들의 삶에 가하는 억압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춤과 노래의 인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감정이라는 삶의 생명력으로부터 반지성적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포도주로 상징되는 비이성적인 도취 상태로 사람들을 이끄는 신인 이유다.
그래서 <어나더 라운드> 속 술 역시 단순한 일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형화된 삶 속에서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진정으로 삶을 살아있게 하는 그 의지를 일깨우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마르틴이 술을 마신 이후로 크게 세 가지의 삶의 의지를 되찾는 과정을 그려낸다. 우선 인생에서 지나가 버린 젊음이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마치 젊은 적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한다. 다음으로는 그간 손 놓고 있었던 관계다. 아내와의 관계, 아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거나 오래간만에 가족 여행을 계획한다. 마지막은 잃어버렸던 열정이다. 수업 진도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시험 문제 출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마르틴. 그러나 그는 이제 실험적인 강의 방식을 통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과거의 본인이 품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열정을 전해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의 신격과 그 함의는 마르틴이 항구에서 술 마시며 춤추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대로 분출된다. 고대에 이루어지던 디오니소스 제의 중에는 “코레이아”(choreia)라고 불리던 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해당 장면이 바로 시, 음악, 무용의 원시적 융합 형태였던 코레이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코레이아가 춤추는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춤은 더욱 인상적이다. 매즈 미켈슨이 젊은 시절 기계체조를 배우고 무용수로 활동하던 경력을 발휘해 재즈 발레를 추는 사이, 무기력했던 마르틴의 삶에는 활력이 돌고, 그의 무채색 일상에는 빛이 들어오며, 그의 삶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간다. 술로 인해 인생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는 이처럼 아폴론의 가치에 눌려 있었던 디오니소스적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에 비로소 완결된다. 이는 영화 속 술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대신, 영화가 끝날 때 제목대로 “한 잔씩 더(Another Round)!”를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다.
물론 <어나더 라운드>가 마냥 술과 디오니소스가 대변하는 삶의 태도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네 친구의 실험은 그들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고, 그들은 술을 통제하지 못하며 온갖 사고를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굳이 점차 터부시 되는 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현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때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본성에 대한 합당한 배려가 결여될 경우,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제나 술과 같은 쉼터, 혹은 탈출구를 경시하지 않고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술과 술의 신의 이름으로 통찰하면서 <어나더 라운드>는 사회적,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길을 보여준다.
A(Acceptable, 무난함)
아폴론의 빛을 견디기 힘들 때면, 디오니소스와 함께 마시고 춤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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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화한 강형욱
"개의 가장 큰 단점은 인간을 믿는다는 거죠"
개는 늑대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지만, 유전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개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사랑하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잘 따르는 개체를 선별하고 키우고, 인간과 동일한 탄수화물 식단을 먹게 되면서 그렇게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절대 길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여우도 그런 방식으로 개처럼 사람을 잘 따르게 만든 사례가 방송에 나온 적도 있다.
뤽 베송의 영화 <도그맨>은 인간에게서 철저히 외면받고 개에게서 위로를 받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뤽 베송의 귀환이라고 해서 <존 윅>같이 개와 함께하는 엄청난 액션을 기대한다거나, 영화 초반의 모습으로 인해 <크루엘라> 혹은 <조커>와 비교하게 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 영화는 예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떤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는 한 백인 남성이 경찰에게 잡힌다. 그런데 그는 백여 마리의 개를 트럭에 싣고서, 피를 흘리며 여장을 하고 있는 기괴한 모습이다. 무언가 섬뜩한 느낌을 감지한 경찰은 총을 겨누며 내리라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피운다. 여장을 한 더글라스(케이럽 랜드리 존스)는 그렇게 유치장에 갇혀, 흑인 여성 의사인 에블린(조조 T. 깁스)과 심리 면담을 시작한다.
범죄자와의 면담을 통해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데드맨 워킹>이나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람이 범죄자라면, 그 범죄에 서사를 씌우게 되는 영화인가? 범죄자가 미화되는 영화인가? 혹은 광기의 탄생을 그린 영화인가? 하고 관객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꽤나 흥미로운 사람이다. 아주 신사적이고 당당하다. 그가 두 다리에 보호대를 차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대체 어떤 범죄를 저질렀으며 왜 이렇게나 자신만만한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에블린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폭력과 혐오의 신과 사도
더글라스는 투견을 하기 위해 개를 기르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따르는 형, 아버지에게 맞고 사는 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아버지의 폭력이 지배하는 가정 분위기는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돈다. 특히 아버지는 투견에게 먹이나 정을 주는 걸 극도로 꺼린다. 아버지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 정을 주는 더글라스를 개 우리에 가둔다. 형이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 어머니는 도망간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나빠보일 수 있지만, 더글라스가 가장 안 좋게, 위협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형이다. 아버지가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식을 개 우리에 몇 년이나 가두고 학대하는 인간 같지 않은 아버지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 나름의 정당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은 폭력을 즐기는 인간이었고, 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었으며 아버지의 폭력성을 존경했다. 아버지는 삐뚤어지긴 했어도 아들을 우리에 가두는 것을 나름 교육이라 여긴 반면 형은 그저 동생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거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아들을 총으로 쐈다는 생각에 멘탈이 붕괴된다. 그런 모습을 본 형은 아버지를 감싸고 또 동생에게 잘못을 돌린다. 이후 감옥에 가자마자 자살까지 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더글라스는 '그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그 집에서 폭력의 신이라면 형은 폭력의 사도인 셈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자처하는 숭배의 대상 그 자체가 자신을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종교를 만들고 제자들이 해당 존재를 신격화시켜 자신들의 세력과 종교를 만든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를 신격화하고 그의 철학을 정립한 것은 플라톤이었다. 예수를 신격화하고 행적이나 말을 기록한 것은 12사도였으며, 사실상 그리스도교를 정립한 것은 예수를 생전에 본 적이 없는 바울이다. 아버지라는 신은 폭력이라는 교리를 자신만의 합리성으로 행했지만, 형이라는 사도는 폭력이라는 힘에 취한 사도-추종자일 뿐이다. 더글라스가 갇힌 철창에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붙인 것이 그가 폭력의 신인 아버지의 사도역할을 한다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성경에서 개는 하등하거나 나쁜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가, 개 철창 안에서 더글라스가 본 시선으로는 뒤집히고 가려져 'DOG MAN'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형에게 개와 친한 더글라스는 교화해야 할 대상이며 형에겐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변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총맞은 일로 경찰에게 구조되고, 형은 감옥에 갔다. 감옥에 간 형이 출소하면 아버지의 죽음까지 몰아 동생을 죽이려 할 것이 자명했다. 더글라스가 형을 죽인 것은 복수였을 뿐 아니라, 혐오와 폭력에 대항하는 정당방위처럼 그려진다. 이 세상은 폭력과 혐오의 세상이고, 아버지는 폭력의 신이며 형은 폭력의 사도다. 더글라스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신에게 대항하는 적그리스도인 도그맨으로 다시 태어난다.
차별에 대항하는 법
아버지가 자살하고 형도 감옥에 가 있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더글라스는 이후 청소년 보호소에서 자라게 된다. 애매하게 하반신이 마비된 채, 그곳에서도 폭력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더글라스에게 교사인 샐마(그레이스 팔마)와 연극은 한줄기 빛이었다. 연극 속 세상은 자신을 무엇으로든 만들어줄 수 있었고, 그곳엔 폭력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차별이 가득했다. 장애인이자 보호소 출신인 더글라스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개를 돌보는 것이 가장 적성에 맞는 듯했지만 이마저도 국가에 의해 쫓겨난다. 현실은 약자에게 가혹하다. 결국 샐마에게 가졌던 연정마저 짓밟히고 나자, 자신도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더글라스가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했던 이들을 단죄하기 시작했다면 다른 영화 속 범죄자와 다름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갖지 않는다. 그에겐 그를 위로하는 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라는 말은 더글라스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는 백여 마리의 개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더글라스가 불행에서 벗어나 자신을 긍정하게 된 계기는 드랙퀸으로서 무대에 서게 된 후다. 드랙퀸은 화려하게 여장을 하고, 립싱크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며 무대를 만드는 크로스 드레서들을 말한다. 드랙퀸이 겉보기에는 트랜스젠더나 게이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하기도 하지만, 그냥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하기도 한다. 드랙퀸으로 유명한 공연은 <헤드윅>이 있고, 유명한 사람은 인어공주의 우르술라의 모티브였던 '디바인'이 있다. 연극을 하면서 남녀역할을 바꾸는 것에 거부감이 없던 더글라스는 드랙퀸의 무대에 푹 빠지게 된다. 그리고 드랙퀸들도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라, 더글라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줬다. 결국 그는 무대에 서며 불행에서 치유된다.
여기까지 오면, 더글라스 - 도그맨은 크루엘라나 조커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루엘라나 조커는 자신의 극악한 범죄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범죄자의 서사가 들어가 있다. 물론 상처 입은 영혼이라는 점은 비슷하나, 도그맨은 자신의 상처를 너무도 훌륭한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도그맨은 대체 어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길래, 기괴한 모습으로 피를 흘린 채 잡히고 정신감정을 받고 있는 걸까.
도그맨은 누구인가
누군가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개를 도그맨에게 데려온다. 도그맨은 그 유기견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을 듣는다. 이 지역의 악질적인 조직이 세탁소 아줌마를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도그맨은 마치 늘 이런 일이 있던 것처럼, 개들을 이용해 약자들을 보호해 준다. 그 모습이 꽤나 능숙하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라는 명목아래, 부잣집에서 개들을 이용해 몇 보석을 훔쳐낸다. 부의 재분배를 외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보석을 빨리 팔아치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도그맨 자신을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정당방위로 죽였다.
그리고 세탁소 아줌마를 보호하려고 폭력조직을 개로 위협한 일로, 조직이 도그맨을 죽이려고 찾아온다. 도그맨과 개들이 총을 든 조직과 상대하는 모습은 철저하게 준비되었다기 보단, 어설프고 처절하다. 도그맨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세탁소아줌마를 위해 이런 위험한 짓을 했었단 말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더글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더글라스 - 도그맨은 빌런도 안티히어로도 아니다. 그저 차별의 사회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한 장애인이었고, 자기를 따르는 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둑질을 좀 하거나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개로 보호해 주는 일이 전부였다. 도그맨은 자신이 형과 보험조사원을 살해한 것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인정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도그맨의 트럭이 쫓기며 경찰에게 잡히게 된 그 사건도, 사실은 조직이 총을 들고 쳐들어와서 대항한 것뿐이었다. 도그맨은 빌런이라기엔 너무 착하고, 안티히어로라기엔 너무 소박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도그맨을 크루엘라나 조커와 같다고 생각했을까? 영화 첫 장면에서 보여준 그 무시무시한 기운, 경찰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총을 겨누게 된 그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도그맨에게서 느껴지는 그 기괴함은, 사실 편견과 차별로 관객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가지는 편부 편모가정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된 사람에 대한 편견, 장애인에 대한 편견, 성소수자나 크로스 드레서, 드랙퀸에 대한 편견 등 말이다. 특히 그가 잡힌 사건은 그가 무시무시한 가해자라서가 아니라, 사실 피해자에 가까웠다. 경찰도 그걸 알고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으로 담배를 준다. 엄청나고 기괴한 무서운 범죄잔줄 알았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차별받는 소수자가 발버둥 치는 휴먼드라마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신-개-더글라스로 연결되는 기묘한 연출로 인해, 이것이 무언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개통령 혹은 개의 신
앞서 말했듯 개는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을 주면 금방 사람을 따른다. 사람을 따르고 애정을 가진 개는 굶주린 야생개보다 살의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 나오진 않았지만 더글라스의 아버지는 투견을 하기 위해 개들을 따로 훈련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방식은 달랐지만, 더글라스는 애정으로 개들과 소통했고 별다른 훈련이 없이도 원하는 행동을 개에게 부탁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10년 전, 동물농장에서 <천재견 호야>의 사연이 나온 적이 있다. 주인 아저씨가 별다른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사람처럼 부탁하는 것을 척척 잘 알아듣고 하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닫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가져오고, 말하지 않아도 일 끝나면 수건과 물을 가져오는 등,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천재견 테스트도 최상위권 점수를 받았다. 영화 <도그맨>에서 더글라스가 설탕이나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할 때 개들이 알아서 잘 가져오거나, 눈빛만으로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호야도 주인아저씨와의 교감과 사랑으로 그런 일이 가능했고, 더글라스도 개들을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개들을 함부로 다루는 집에서 자라, 개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된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개통령, 훈련사 강형욱이다. 강형욱은 개공장을 하는 집에서 자랐고,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으며 결국 개를 제대로 행복하게 키우는 일을 하며 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더글라스는 흑화한 강형욱이며, 흑화한 천재견 호야의 주인이다. 더글라스가 흑화했다고는 해도 소소한 동네 로빈훗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도그맨>은 단순히 상냥한 훈련사, 혹은 애정 어린 개주인을 넘어선다. 이미 자신이 개 철창에 갇혔을 때, 형이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달아주고 그것이 뒤집혀서 DOGMAN이 된 시점부터, 그는 적그리스도가 되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가 개를 얼마나 사랑으로 대하는지는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는다. <도그맨>에서 의아한 지점은 이 부분이다. 영화에서 개들이 묘사된 모습이 철저하게 훈련받은 군대처럼 보인다. CG가 아니라 진짜 개들을 훈련시켜 그런 장면들을 찍었다곤 하지만, 교감보단 명령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에서는 신에게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신과 인간은 대등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관계가 아니라, 신에게 순종하고 신이 하는 행동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큰 그림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래서 도그맨은 훈련사나 주인이 아니라, 개의 신인 것이다. 이렇게 신의 자유와 사랑을 순종으로 덧씌우는 것이 서양의 기독교서사에 자주 등장한다. 영화 중간중간, 더글라스는 스스로를 예수에 비유하는 행동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개 철창에서 손에 아버지가 쏜 총을 맞은 채 십자가 모양으로 쓰러진 더글라스는 그 일로 걷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버지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은 것인지 구원받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가 세상의 차별로부터 구원받아 드랙퀸으로 구원받는 모습은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연상시킨다. 가난한 더글라스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도둑질로 일으킨다. 또 조직이 기관총을 들고 쳐들어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그는 굳이 걸어가서 포도주를 마시며 최후의 만찬을 한다. 그저 동네 로빈훗에 불과한 사람이 이런 사건을 거치며, 더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변해간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기우일까?
그는 결국 개들을 이용해서 유치장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하나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걸어간다. 마치 십자가를 진 예수가 힘겹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 바로 옆 성당의 십자가 그림자가 비치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정확하게 자신을 맞추려고 발걸음을 조금씩 조절하며 신에게 외친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더글라스에게 드리운다.
기독교의 4대 복음서 중 하나인 <루가의 복음서>와 외경인 <야고보 복음서>에 따르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장면을 '성령이 내려오셔서 너에게 그림자를 덮을 것이다(한국번역: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천사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한국 성경에는 잘못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그림자가 드리운 것으로 표현했다. 이 장면은 '그림자 수태'라는 모티브가 되어, 마리아의 수태고지 장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면의 그림으로 많이 묘사된다.
더글라스는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의 신에게 대항하는 적그리스도로써 더 완전히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 그가 그림자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자기 연출은, 그림자로 드리워진 성령의 힘을 받아 더욱더 강한 도그맨이 되려는 의식이다. 단순히 오래 서있다가 쓰러졌다고 해서 더글라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더욱 강인하게, 동네 로빈 훗에서 진정한 개의 신 도그맨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불행이 있는 곳, 자신을 상담해 준 에블린에게 개를 보내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바로 자신이 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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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그맨>은 <크루엘라>나 <조커>, 혹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같은 빌런 서사 혹은 안티히어로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잔인하고 섬뜩한 장면이나 액션도 없고, 그의 수족이 된 개들은 CG가 아닌 실제 훈련받은 개들이라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전혀 무섭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개를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귀여운 개들은 천하무적이다. 끔찍한 인물인 줄 알았던 더글라스는 사실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다. 그런 것들이 영화의 좋은 메시지를 조금 흐린다고 생각한다. 과연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라면서. 오히려 마케팅에서 크루엘라나 조커 언급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렇더라도 날것으로 드러내는 뤽 베송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감각,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만들어낸 더글라스의 캐릭터는 살아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별것으로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그 별것은 사실 우리가 만들어 낸 차별과 혐오에서 나왔다고 귀에 대고 소리치는 힘 말이다.
*여담으로, 주인과 그렇게 사랑으로 교감했던 천재견 호야의 주인아저씨는 4년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년 <단짝>이라는 방송에서 주인아저씨의 아들이 호야를 아직도 키우고 있는 모습, 아저씨의 생전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나와 많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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