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8-06 12:38:05
씨네랩 크리에이터가 선택한 사랑에 관한 필름 🎞️
사랑
지난 8월 4일,
씨네랩에서 활동 중인 크리에이터분들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답니다.
그중, 하나의 키워드를 선택해 영화 큐레이션을 완성해 보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하나의 키워드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씨네랩 크리에이터들은 ‘사랑’을 주제로 어떤 영화들을 선택했는지 함께 만나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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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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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인생의 친구가 나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절교는 아니지
한적한 아일랜드의 어느 동네. 파우릭은 시골에 살고 있는 촌뜨기 아저씨다. 파우릭이 즐기는 인생의 재미 중 하나는 절친 콜름과 수다를 떠는 일이다. 아무 목적이 없는 대화가 원래 가장 재미있는 법이다. 결혼도 안 하고 직업이 엄청나게 좋은 편은 아닌 파우릭. 가족이라고는 여동생 한 명, 반려동물 당나귀 제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야말로 콜름이 유일한 인생의 낙인 셈이다. 오늘도 일과를 마치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콜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지? 위이잉 돌아가는 행복회로가 오늘도 그를 기쁘게 만든다.
콜름의 집에 도착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파우릭. 늘 하던 것처럼 창문을 쾅쾅 두드린다. 반갑게 웃어보는 파우릭. 본 척도 안 한다. 뭐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문제가 생긴 걸까? 파우릭의 근황이 궁금하다. 찜찜한 콜름. 비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의미 없는 수다를 떨었는데 냉담한 태도가 신경 쓰인다. 자주 갔던 술집에 가는 파우릭. 콜름 없이 혼자 온 지금 이 순간이 낯설기만 하다. 그렇게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파우릭이 들어온다. 따져 묻는 듯, 말을 거는 콜름. 몇 마디 대화가 온 끝에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고 아프다. “난 이제 네가 싫어졌어.” 그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갑자기 불이 붓기 시작한다.
싸우면서 크는 거야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장소에 깔려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와 누군가가 싸우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런 일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사실 어림없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요소에서 사람들끼리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 이후에 쨘하고 일어나는 결과. 이 세상 사람들은 '진짜 극혐인 사람'과 '좀 미안한 감이 있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좋은 기억으로 이별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인간관계를 전부 보여준다. 첫째. '진짜 극혐'인 사람으로 남는 이유를 보여준다. 영화가 인물 간의 밸런스를 잘 잡았다는 말과도 통한다.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할 때 멋이 없다고 느낄까? 여러분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이 통하는 지점이 하나 있을 텐데, 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주 개연성 있게 묘사했다. 왜 콜름이 파우릭을 싫어하게 됐을까? 합리적이다. 이 말을 한 후에 콜름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타우릭은 또 왜 그럴까? 합리적이다.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현실감이 있다. 원작자 겸 각본가인 마틴 맥도나가 창조한 이야기다. 당연히 인공적인 무언가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인물의 생동감을 살렸다는 점은 아주 좋은 강점으로 뽑을 수 있다. 진짜 눈치 더럽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 사람 편을 들기는 뭐 한, 우리 실생활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감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또 영화를 보면서 좋았다고 느끼는 부분은 통찰력이다. 마틴 맥도나라는 감독이 원래 이런 쪽에 능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더 그런 특징이 잘 발휘된 듯하다. 우선 전작 <킬러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킬러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였다. 킬러라고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업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떤 킬러는 무려 죄책감도 느낀다. 이 감정이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두고 인간사에서 최소한으로 적용되어야 할 윤리는 무엇인가? 에 대해 묻는 <킬러들의 도시>. 이번 작품인 <이니셰린의 벤시>에서는 마지막 끝마무리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고 난 다음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묻는 것이다. 또 글쓴이는 이 질문을 펼치는 과정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영화가 제시하는 두 사람 간의 일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 이 이유가 없는 것을 이렇게 색다른 방식으로, 마틴 맥도나의 화법으로 보여주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일랜드 내전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소재 중 하나는 전쟁이다. 영화의 어떤 장면마다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몇 개 나온다. 사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시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킬러들의 도시>나 <쓰리 빌보드>가 대략적인 시간을 명시하긴 했지만 다른 년도로 바꾸어도 이야기에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본 작은 몇몇 대사와 상황이 내전이 아니라면 아예 나올 수가 없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갖는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극에서 시간을 이 시점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아일랜드 내전이 묘하게 이야기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실제 아일랜드 내전에 대해 영화를 보고 나서 구체적으로 찾아보시길 바란다. 묘하게 이 영화와 어울리는 느낌이 있다.
무관은 서운해
지난 3월 13일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기록적인 7관왕을 달성하며 성과를 올렸다. 사실 영화가 개봉한 후에 아카데미가 열리는 건 비일비재하다. 이 덕에 이 영화를 늦게 봤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아카데미의 선택에 살짝 의문점이 들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좋았다. 이 배우의 주요 인물 4명 모두 다 아카데미의 픽을 받았다. 도미닉 역을 맡은 베리 키오건은 자기가 맡았던 배역에서 살짝 다른 롤을 맡았다. 미친놈 연기로는 폴 다노만큼이나 선 굵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배리 키오건. 밑도 끝도 없는 광기에서 착하지만 많이 모자란 연기까지 이제까지 했던 연기와는 살짝 다르다. 이 배역은 파우릭의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이 파우릭 서사에서 이야기의 발화점이 되는 역할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입체적인 측면까지 두드려졌던 이유는 베리 키오건의 연기력 덕분이다. 시오반 역의 케리 론돈과 연기 앙상블이 빛나는 부분과 후반부에 발생하는 사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묘한 차이로 관객에게 큰 인상을 주는 키오건의 섬세함이 두드러진다. 여동생 시오반 역을 맡은 캐리 론돈은 입체적인 배역을 맡았다. 각본이 괜히 맛집이 아니다. 마틴 맥도나가 촘촘히 설계한 그림 그 자체로 움직이는 이 영화. 시오반은 이런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을 사람들 앞에 감추는 연기를 해야 한다. 짧은 순간 인물들에게 갖는 어떤 감정을 얼굴로 소화했다. 그리고 시오반은 파우릭을 정말 의지하고, 둘도 없는 친구 겸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역할을 정말 잘 이해하듯 따뜻함과 까칠함 사이의 내면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두 주인공 콜름과 파우릭을 맡은 콜린 파렐과 브랜든 글리슨도 굉장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시상 레이스에서 브랜든 프레이저, 오스틴 버틀러와 함께 강력한 후보였던 콜린 파렐. 찐 시골뜨기로 시작해서 살기 어린 눈빛, 혼자가 됐다는 괴로움, 뭔가를 결심한 마음가짐까지 영화를 이끄는 주연으로서 맡은 큰 배역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 콜린 파렐의 연기는 스카이 콩콩 같은 퍼포먼스였다고 볼 수 있다. 뛰어오른 만큼 관성처럼 반응해야 하고, 이 리액션이 영화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으로 많은 걸 설명했다. 콜름 역을 맡은 브랜든 글리슨은 관객이 정을 주기 아까운 캐릭터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이기 때문이다. 또 콜름은 이 관계에 주도권을 쥔 사람으로서 주요한 터닝포인트마다 방점을 찍는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이 입체적인 감정변화를 소화하는 베테랑의 경험치가 돋보였다.
이런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지만 더 강점으로 작동하는 부분은 영화의 각본이다. 이 작품의 각본은 두 말할 것 없이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마틴 맥도나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이 지점에 있다. 사실 시놉시스만 읽으면 ‘그냥 나이 든 남자 둘이 싸우는 영화라서 진부할 것 같은데?’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단지 싸우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각본이 품고 있는 가장 큰 핵심은 질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과 아름다운 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때려박으면 뭔가 맛이 없을 영화의 모티브가 이 두 남자의 전쟁을 통해서 ‘난 이럴 거야’ 싶게 하는 것이 역시 21세기 셰익스피어 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그 콜름이 파우릭에게 하는 행동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이 영화가 특히 문학적으로 보인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든 맥도나의 능력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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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과 방 사이의 섬
온갖 유형 테스트가 범람하고 있다. 각종 심리테스트나 백문백답처럼 옛날 싸이월드에서 하던 것들이 여전히 0과 1의 세계에 돌아다니는 걸 보면 유행이 정말 돌고 도나 보다. 대부분은 시중에 돌아다니는 MBTI 테스트 변용이라 크게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가끔 해본다. 나도 뭐라고 언어화해본 적 없는 취향을 딱 표현하는 말을 찾아내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공유하면서 내가 아는 그들의 성향과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어서.
국내 유수의 영화제들도 ‘영화 취향 테스트’ 같은 걸 많이 하던데, 무의식 중의 취향을 확인하곤 한다. 지난 5월 전주에서 내 영화 고르는 기준에 ‘포스터’가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분위기.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느낌이 좋으면 일단 본다. 설령 시놉시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놉시스에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이나 장점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킬링 오브 투 러버스>도 포스터가 마음에 들었으나 시놉시스 읽고는 볼지 말 지 고민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동의하고 별거 중인 부부, 결혼과 육아로 단절된 꿈을 되찾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한 아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새로운 애인,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감정의 자기장. 음, K-드라마로 다수의 삼각관계 클리셰에 단련된 K-유교걸은 이런 오픈 릴레이션십의 쿨한 면면이 편치 않다고.
그래도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일단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점, 최근 <기생충>이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아트영화에서 손꼽히는 작품들을 계속 배급해온 북미 배급사 NEON에서 선택한 작품이라는 설명도 고민을 끝내는 데 일조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짧은 시 한 편의 전문을 떠올렸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내가 이 영화에서 본 건 오픈 릴레이션십 안에 놓인 세 사람의 쿨한 감정 놀음도 관능적인 육체 관계도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초라하고 보편적인 인간 감정,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과 그 실패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각자 마음의 방, 그리고 방과 방 사이 놓인 섬이었다.
영화는 기승전결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긴장의 한복판에서 대뜸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아내 니키와 그 연인 데릭에게 총을 겨누다가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한숨을 푹 쉬고는 창문으로 집을 빠져나와 달리는 남편 데이빗의 모습에서.
흐리고 눈 쌓인 회색 지면에서 데이빗은 달리고,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이 그 뒷모습을 따라간다. 흔히 생각하는 화성 악기의 느낌이 아니라, 일상의 소음들을 기묘하게 조합해 낸 느낌의 음악이다.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무너져가는 관계를 드러내고, 차 문 닫는 소리들이 총소리처럼 쾅쾅 울린다. ‘체호프의 총’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법칙을 뒤집는 총이라는 생각도 든다. 첫 시퀀스는 그렇게 영화 전체를 멋지게 끌고 가며 영화의 짜임새를 단단히 한다. 시작된 긴장감은 영화 내내 사람을 콱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음악과 함께 사람을 영화에 가둬놓은 건 화면 비율이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4:3 비율의 화면이었다. 사실 나는 화면 비율이나 사운드 등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4:3 화면비는 모를 수가 없다. 옛날 텔레비전 드라마 비율이었으니까. 극장에서는 무성영화 시절에나 쓰던 비율이었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지 한참이라, 이제 와이드 스크린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화면이 좁다고 인식된다.
영화 배경으로 보이는 들판은 너무나 광활하여, 적막하고 쓸쓸할 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데, 정작 인물들은 운전석에 꽉 끼어서 대화한다. 영화의 많은 순간 운전석에서 같은 각도로 잡히는 데이빗과, 모처럼 잡은 데이트를 자꾸 뚝뚝 끊는 것 같은 아내 니키. 타이트하게 잡힌 얼굴로, 운전석에 고정된 옆얼굴로, 피로한 표정으로, 눈을 보지 않은 채로 하는 대화. 좁은 화면 비 안에서 좁게 멈춰 나누는 대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교착 상태가 두 사람의 관계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안정감이라곤 없이 불편하고 어긋난 두 사람의 삐걱거리는 관계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데릭은 비집고 들어서려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세 연인의 감정싸움이다.
이 영화를 전형적인 감정싸움 이상으로 넘어가게 하는 데에는 아이들의 존재감도 한몫한다. 어떻게 저렇게 딱 그 나이 아이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지. 막내들의 옹알거리는 대화나 행동들, 사춘기에 맞아 엄마아빠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한 큰딸의 혼란스럽고 짜증 나는 마음 같은 것들이 그들의 대사와 표정에 너무나 잘 들어가 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온 공원에서, 로켓에 흥미를 보이다가도 잘 되지 않으니 토라지는 큰딸의 복잡한 마음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뒤돌아서는 누나를 보며 민망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아빠에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 동생의 뻘쭘해진 마음도.
아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보는 그 순간들이 이 영화의 파편 같은 관계들을 끌어모은다. 니키와 데이빗의 전사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두 사람과 아이들 사이 몇 마디 대사에서 성긴 추측이 가능하다. 서로를 사랑한다 하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아이를 넷 낳았고, 터울이 좀 있는 걸 보니 육아의 무한 굴레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힘들어 허덕이는 순간들이 있었을 테고… 그러다 보니 이 선택을 위해 기각되었던, 사랑에 비해 빛을 잃은 듯 보였던 다른 선택지들을 돌아볼 요량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동의하는 기이한 행태의 별거를 시작한 데까지. 그 후로도 시간이 점점 소용돌이치며 위태로워질 때까지.
일상의 소리들이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을 이뤄낸 것처럼, 불행은 그렇게 일상의 크고 작은 틈에서 쌓이는 것인지 모른다. 차 문 닫는 소리가 끝내 총소리에 이른 것처럼. 배려의 겉옷을 입은 그 마음은, 딱히 크게 누구 잘못도 아니었던 마음들은, 아이들만큼도 못했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을 이제 막 벗어난 아이만큼도 서로에게 이르지 못했다.
잘해보고 싶었던 마음들이 실패로 돌아갈 때, 이것이 최선이었나 돌아보게 될 때, 스스로가 초라해질 때, 구질구질한 마음들이 복잡하게 안을 메울 때, 차라리 지지부진한 관계에 깔끔하게 선을 긋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때. 더 잘해보려고 내린 선택이 회오리처럼 더 휘몰아쳐,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 삶의 문제를 녹이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긴장감에 휩싸여 보던 영화에서 한 줄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순간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넷이나 있는 부부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보인 마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화를 팩 내며 돌아가 버린 누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누나의 마음이 좋지 않음을 이해하고,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아진 아빠를 헤아려 “고마워요”라는 말로 어색한 공기를 뚫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소용돌이치며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가는 긴장감의 끝, 보는 내내 궁금했던 결말에서 툭 터지던 마음도 함께 생각한다.
나의 방을 벗어나 서로의 사이에 있는 섬으로 나아가는 것. 더없이 차가운 온도일 것만 같았던 이 ‘트랜스픽싱(transfixing; 두려움이나 경악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로맨스의 끝에 발견한 건 초라한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문을 여는 마음, 사랑이었다.
영화 킬링오브투러버스 X 케빈오 Oh My Sun 콜라보 뮤비. 쓸쓸한 배경과 조용한 사랑이 잘 묻어나 있어 좋았다.
*영화사 블루라벨픽쳐스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감상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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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체이탈자 / Spiritwalker, 2020
이제는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손이 가는 국내 영화들이 없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이 없는 것도 있지만 <기적>과 <보이스> 이후 극장에 개봉하는 규모 있는 한국 영화들의 휴전도 적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전주 <장르만 로맨스>가 <이터널스>를 꺾고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으나 그 격차는 1만 3000여명에 불과할 만큼 압도하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체이탈자>는 누적 관객수 165,050명(11.26 기준)으로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유체이탈자>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교통사고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모른 채 응급실에 실려옵니다.
그렇게, 기억 상실증으로 여겨질쯤 갑자기 주변의 환경들이 일그러지고 낯선 장소에 떨어집니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는 12시간마다 얼굴과 이름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이 "강이안"에 묶어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는 궁금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강이안"을 찾아야만 하는데...제목은 뭐가 빠졌다는데?
1. 다들 신선하다는데, 나는 익숙하다?
먼저, 영화 <유체이탈자>를 보고 온 이웃분들과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해당 작품은 신선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의 설정 때문인데요.
그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로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신선한 설정 때문이라 생각하겠지만, <유체이탈자>는 상당히 클래식한 영화입니다.
'클리셰'적인 소재를 신선하게 포장해 풀어낸 요망한 작품입니다.넋 나가듯이 보았다.
영화 <유체이탈자>의 가장 중요한 소재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은 결국, 나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근데, 몸은 저절로 반응하니 관객들과 주인공은 '이게 무슨 일인가?'싶다가도 자그마한 단서들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되묻게 합니다.
이미, <제이슨 본> 혹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루어낸 '기억을 잃은 특수 요원'으로 앞서 말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숨겨진 로망을 들춰내는데요.
이런 클래식한 감정을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라는 설정으로 풀어낸 것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2. 연기력이 받쳐줘야하는 소재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제목대로 23개의 인격체를 지닌 "케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유체이탈자>와 다르지만, 인격체를 교체하는 연출을 살펴보면 <23 아이덴티티>는 문을 열고 닫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줘 달라지는 타이밍을 보여주는데, 이외에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과 입 등의 신체 부위들을 깨진 거울 조각마다 가득히 채워 넣어 ' 23개의 인격체'들을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체이탈자>는 달라지는 캐릭터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을까요?연기력을 보여줘!
해당 작품에서는 "윤계상"분 혼자서, 이를 도맡아 다른 캐릭터들의 시점에서 달라지는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 중간마다 달라지는 그의 모습은 지켜보는 캐릭터들과 관객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체화시키는데요.
이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어려움도 겪겠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로망을 비롯하여 맞춰나가야 하는 이야기를 맞춰나갈 적극성을 키웁니다.
공통점이 없을 것만 같은 캐릭터들이 겹쳐지는 '미필적 고의'와 같은 접점은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기도 하고요.3. 더 고생했는데, 티가 안나네
앞서 <23 아이덴티티>에 비해서, <유체이탈자>가 보여준 "캐릭터의 교체"는 더 여려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무엇보다 <23 아이덴티티>의 경우. 온전히 "제임스 맥어보이"만의 영역이었다면, <유체이탈자>는 "윤계상"분과 여러 배우들이 같이 했는데요.
같이 했기에 좀 더 시너지를 기대했지만,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매번 달라지는 캐릭터, 그리고 합을 맞춰야 하는 상대역까지 이 모든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구심점을 잡아줘야 하는 "윤계상"분의 연기가 중요했는데, 이 점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나 문제는 이 점에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군데군데 아쉬움이 새어 나온다.
<23 아이덴티티>는 달라지는 인격의 차이를 "여자" 혹은 "아이"같은 특징이 잡히는 캐릭터들로 관객들에게 "저 배우 연기 잘한다"를 말하지 않아도 알게 만들었다면, 이번 <유체이탈자>는 이런 특징들이 잡히지 않을 만큼 밋밋했습니다.
그나마, "박실장"을 맡은 "박용우"분이 가장 뚜렷했는데 극 중 기억을 잃은 상황이라 이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어려운 방법을 택했지만, 결과는 쉬운 것보다 나오지 못한 것이죠.
여기에 이야기마저도 아쉽게 매듭을 짓고 말이죠.4. 경기의 성패는 마지막에 결정된다.
앞서 말했듯이 매번 달라지는 캐릭터들로 맞춰지는 단서들은 "수사"를 방불케 만듭니다.
그로 관객들은 스스로 <유체이탈자>의 조각을 맞춰나가 스스로 흥미를 붙여나갑니다.
물론, 그게 감독이 준비한 정답이 아닐지라도 재미를 붙이는 것은 틀리지 않을 텐데 문제는 좌르륵 펼쳐지는 "플래시백"입니다.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과거는 의도와 다르게, 딴 길로 샐지 모르는 친절일 수도 있겠지만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그래도, 액션만이 위로해 준다.
이렇게 아쉬움이 생기는 이야기를 뒤로한 채 보여주는 액션의 모습은 나쁘지 않습니다.
보여주는 구성이 이제는 기성품이 되어버린 <존 윅>의 "건푸"로 새로움은 없지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예 새로울 것이 아니라면, 익숙함을 날카롭게 벼려내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유체이탈자>의 액션은 요즘 트렌드에 맞게 잘 나왔다고 봅니다.
딱히, 월등한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킬링타임"을 하는 데는 부족함은 없는 작품인데 이렇게 평가절하를 하는 데는 앞서 보여준 '신선한(?)'설정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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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개봉 첫 날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있는 <서울의 봄>이 20만명을 돌파해다고 합니다.
좋은 스타트와 함께 높은 예매율을 자랑하고 있는데요. 혹평이 쏟아진 넷플릭스 공개작 <독전2>와는
상반된 평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주 씨네뉴스 같이 만나보실까요?
독전 평점 2점대 쏟아지는 혹평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독전 2>가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평점은 2점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한 설정
변경, 캐릭터성 붕괴, 메인 빌런의 연기력 등을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1위 오른 최수종 사극
KBS의 50주년 특별 기획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며 공개 직후부터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판타지 사극이 아닌 정통 사극이 글로벌 OTT에서 동시 배급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며 지난 14, 15일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서울의봄> 20만명 돌파, 예매율 1위
영화 <서울의 봄>이 공개 첫날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박스오피스를 장악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비트> <태양은 없다> <아수라>등을 만든 김성수 감독의 신작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뒤 같은 해 12월 12일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유작 영화 <괴물>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 제작 요청 당시 투병 중에 피아노 두 곡을 제출했고 사카모토의 이전 곡들을 사용하여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영화 <괴물>은 제76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오는 11월 29일 개봉 예정입니다
성수기 없는 영화관
영화계에서 ‘성수기 붕괴론’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설 연휴, 7월 말~ 8월 초, 추석 연휴 등이 그런 시기였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관객이 급감하고 영화 관람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흥행 순위 1~3위 영화는 비수기에 장기 흥행을 통해 성과를 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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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떤 '룸'에 갇혀 있나요?
2008년 요제프 프리츨 사건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소설 『룸』을 영화화 한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룸》(2015)
올드 닉은 17살 조이를 납치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금한 뒤 지속적으로 강간한다. 조이는 납치범의 아이인 잭을 낳게 된다. 7년 후 잭은 5살이 된다. 조이와 잭은 '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실제 사건보다는 아니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폭력적인 장면들은 절제되어 있다.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못 보는 사람이라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극을 이끌어 나간다. 스릴러지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불호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살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올드 닉에게 7년 동안 지속적인 강간과 폭력을 당한 조이는 아들 잭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성으로 극복한 시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이가 살기 위해서는 잭이 필요했고, 잭은 엄마가 필요했다. 그들은 '룸'에 홀로 남겨지지 않기 위한 서로의 버팀목이자 숨구멍이었다.
영화는 잭의 시선을 따라간다. 올드 닉이 오면 잭은 옷장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는다. 우리는 같이 숨죽여 조이의 고통을 가늠할 뿐이다. '룸'에서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 나가본 적 없는 잭에게 이 작은 방은 세상의 전부다. 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마침내 탈출을 결심하고 잭에게 현실을 말해준다. '룸' 이외의 세상을 모르는 잭은 진짜 세상을 부정하고 탈출 작전을 미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조이는 계획을 실행한다. 마침내 잭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진짜 나무, 진짜 고양이, 진짜 개, 엄마가 아닌 진짜 사람. 작고 더러운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으로 아이를 내보낸다. 조이는 그런 잭이 있었기에 닉에게 벗어날 수 있었다.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고, 세상을 만나게 해 주었다.
처음 세상을 만난 잭
세상을 만난 아이와 사회에 내던져진 엄마
조이와 잭의 탈출 작전은 영화의 약 절반 지점에서 성공한다. 감금과 폭력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뿐 아니라 이후의 상황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모진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행복하게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조이는 7년이라는 세월을 잃었다. 17살이었던 그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한 선행의 대가는 컸다.
'착한 아이'에서 '엄마'가 된 조이는 7년 전에 멈춰버린 자신의 방과 추억을 복잡한 감정으로 마주한다. 극적인 사건에 이끌리듯 구름 떼 같이 모여든 대중들과 언론은 이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터뷰어는 조이가 자살을 시도했는지, 잭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닉을 아빠로 인정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조이를 배려하지 않는다. 조이를 힘들게 한 건 닉뿐만이 아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시선, 그리고 응원조차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룸'에서는 살아남아 탈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났음에도 조이는 행복하지 않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조이는 주변의 도움을 거절하고 홀로 견딘다. 결국 조이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조이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그리고 잭은 다시 한번 조이의 죽음을 막아주게 된다.
"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주는 거야. 혼자서 강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누군가의 혼자됨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약자들의 연대
올드 닉은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먹고 잘 수 있는 건 다 내 덕분이니 감사하라. 직장을 잃어서 나도 힘들다'라고. 부부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지만 그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미친 소리가 없다. 영화 속 올드 닉은 잔인한 범죄자고 이들은 부부가 아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우리는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경제력으로 가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행위를 한다면 올드 닉과 다를게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정폭력은 영화 속 올드 닉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탈출에 성공한 잭을 구조한 두 명의 경찰관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진다. 여성인 파커 경관은 잭의 말을 기다려주고, 사건의 단서를 얻어 또 다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남성 경관은 광신교의 짓으로 치부하고 미아보호소에 보내자고 한다. 남자 경관은 불안정하고 횡설수설하는 어린 잭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일상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느끼는 경우가 적기 때문일까? 남자 경관은 잭을 보고도 범죄를 예상하지 못한다. 파커 경관과 남성의 차이는 여성이 모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강자가 아니기에 예민하고 직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도 '룸'에 작별 인사해야지."
'룸'에서 잭은 자신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아침마다 방의 물건들에게 인사하고, 쥐와 친구가 되고, 무엇보다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잭은 '룸'을 벗어나서도 종종 그곳을 그리워한다. 마지막으로 조이와 잭은 룸을 다시 마주한다. 잭은 테이블, 세면대 그리고 옷장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룸'에게 하는 작별 인사는 다음 문장을 위한 마침표와 같다. 끝내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룸'은 더 이상 공포로 걸어 잠겨 있지 않다. 원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룸'이 아니거든"
문은 열렸고, 어디로 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문은 누가 닫았는가. 문을 열자. 혼자서 버겁다면 누군가와 함께 어떻게든 그 문을 향해 나와 '룸'과 작별을 고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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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이들의 서툴지만 따뜻한 크리스마스 삼중주
- 바튼 아카데미 (The Holdovers, 2024)
외로운 이들의 서툴지만 따뜻한 크리스마스 삼중주
개봉일 : 2024.02.21.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코미디, 드라마
러닝타임 : 133분
감독 : 알렉산더 페인
출연 : 폴 지아마, 더바인 조, 도미닉 세사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마음의 고통과 눈(雪)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천둥, 번개와 함께 요란하게 내리거나 또는 적은 양이라 해도 난간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통에 자연히 인식하게 되는 비와 다르게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스스로 고개를 돌려 눈으로 담지 않는 이상 그것이 내리고, 쌓이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어렵다.
마음의 고통도 그렇다. 신체적인 고통은 마치 비처럼 내가 인식하려 하지 않아도 정직하게 밀려오지만 마음의 고통은 비교적 편하게 외면하고 부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 오래되어 꽁꽁 얼어버린 눈, 얼음처럼 긁어내기 아주 어렵고 크게 미끄러질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그 고통을 인정하고 긁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기꺼이 그것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바튼 아카데미>는 오래 방치되어 얼음처럼 단단해진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사는 세 사람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서로의 외로움을 긁어내고 또 그 위에 작은 불을 때며 그것을 녹여내는, 작은 기적의 순간을 담고 있는 영화다.
1970년, 부잣집 도련님들이 주로 다니는 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에 크리스마스 연휴가 찾아온다.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떠나고 학생과 동료들 모두 기피하는 고집불통 역사 선생님 폴과 가정 문제로 고민이 많은 문제아 털리, 아들을 잃고 혼자가 된 주방장 메리. 세 사람만이 넓은 학교에 남게 된다.
그 누구도 이 조합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으니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고 TV를 보고 대화를 한다. 그러다 어떠한 사건을 기점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서툴고 날카로웠던 말들은 점점 따끈하고 부드럽게 변하고 폴, 털리, 메리는 하나의 대안 가족이 되어 소박하고 소중한 크리스마스 연휴를 꾸며간다.
이야기 자체는 조금 투박하고 서툴지만 70년대 미국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그 시절 영화들이 담고 있는 특유의 빈티지한 느낌 덕분에 그것이 단점보단 영화 자체의 매력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작은 웃음 포인트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배우의 에너지가 극에 숨을 불어넣으며 보는 내내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한마디로 따뜻하고 행복해지는 영화. <바튼 아카데미>는 그런 영화였다.
단단한 얼음을, 오래 쌓인 외로움을 긁어내다
털리의 탈골 사고의 의미
폴은 어머니와 일찍 이별했고 어떠한 이유로 집을 나와 바튼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 빽이 두꺼운 룸메이트와 엮이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튼 아카데미로 돌아온다. 거기에 더해 트리메틸아민뇨증이라는 몸에서 악취가 나는 병을 앓게 되면서 그는 자연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폴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자신의 지식을 담은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지만 마음에 쌓인 아픔들은 그를 계속 주눅 들게 만든다.
털리는 이혼한 부모님과 양 아빠 사이에서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털리의 엄마, 양 아빠는 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딱 거기까지다. 엄마와 양 아빠는 털리의 학교생활이나 친아빠를 향한 그리움 대신 자신들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행동한다. 두 사람의 신혼여행을 이유로 홀로 학교에 남게된 털리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분노와 슬픔을 표출해 보지만 행복한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메리는 아들 커티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고군분투하며 어렵게 아들을 키웠다. 총명한 아들은 엄마의 치맛바람 없이 대학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모자라 제때 입학하지 못하고 징집된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지에서 사망하고 메리는 아들과의 추억이 있는 바튼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폴, 털리, 메리에겐 가족과 관련된 아픔이 있고 그것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아파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그 아픔으로 인해 틀어진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거나 피하면서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아픔과 눈이 두툼히 쌓여가던 겨울. 털리는 뜀틀을 넘다가 팔이 탈골되는 사고를 겪는다. 폴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는 털리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차 위에 쌓인 얼음과 눈을 벅벅 긁어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 덕분에 털리의 팔은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사건은 털리가 들어가선 안될 장소(체육관)에서 커다란 고통과 틀어진 신체를 마주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순서로 진행되는데, 이는 폴, 털리, 메리가 고통으로 틀어진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되돌려놓는 영화의 전체적인 순서와도 닮아있다.
털리는 출입 금지 장소인 체육관에 들어가 틀어진 팔과 큰 고통을 마주하는 장면은 폴, 털리, 메리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평소엔 접근하지 않았던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 자신의 외로움과 아픔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과 닮아있고, 폴이 털리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차 위에 쌓인 얼음을 긁어내던 행동은 폴, 털리, 메리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천천히 긁고 녹여내는 과정과 닮아있다. 그리고 폴 덕에 병원에 무사히 도착한 털리의 팔이 치료를 받고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은 폴, 털리, 메리가 마침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은 덜 외로운 일상을 누리게 되었다는 엔딩과 닮아있다.
이러한 이유에서일까 털리의 탈골 사건 이후 이야기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털리는 폴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폴은 털리를 위해 새로운 크리스마스 트리를, 메리는 두 사람을 위해 따뜻한 크리스마스 식사를 준비한다. 그렇게 한 걸음을 뗀 세 사람의 우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마음 깊이 쌓였던 아픔과 도로 위 눈들은 천천히 녹아간다.
새로운 크리스마스, 새로운 가족
크리스마스 트리와 체리쥬빌레의 의미
연휴가 시작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져나간 오후. 바튼 아카데미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인부들에 의해 다시 팔려나간다. 마치 이 장소에 남겨진 이들은 행복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자격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세상은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 트리를 가져가버린 인부들처럼 일찌감치 폴, 털리, 메리의 소중한 가족을 앗아가고 그들이 행복할 자격도 빼앗는다. 하지만 폴, 털리, 메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새로운 크리스마스와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학교에 남은 세 사람은 학교에서 구매한 트리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싱싱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함께 꾸미고,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가족과는 다르지만 충분하고 든든한 새로운 가족의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바튼 아카데미>는 특별한 우정을 넘어 대안 가족의 영역으로 뻗쳐나가는 이야기다. 폴, 털리, 메리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활활 불타는 체리쥬빌레는 이들의 대안 가족 관계를 상징한다. 보스턴으로 여행을 떠난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에 모인다. 폴은 털리를 위해 그가 관심을 보인 체리쥬빌레를 주문하지만 직원은 원칙을 고수하며 주문을 받아주지 않고 화가 난 세 사람은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포장한 체리와 아이스크림. 주머니 속 술을 이용해 그들만의 활활 불타는 야매 체리쥬빌레를 만든다.
체리, 아이스크림, 술. 세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후식 체리쥬빌레는 엄마, 아빠, 아들이라는 보통의 혈연관계 가족을 떠올리게 만든다. 역사 선생, 주방장, 학생인 세 사람은 이 보통의 가족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의 가족, 먹음직스러운 체리쥬빌레에 집착하지 않고 우리만의 가족, 우리만의 체리쥬빌레를 만든다.
영화의 초반부, 유난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어린 털리는 어른들을 거부하고 홀로 학교를 누비며 아이스크림과 술을 퍼먹었지만 나중엔 폴, 메리와 함께 만든 체리쥬빌레와 그들의 따뜻한 손길을 받아들이며 새해를 맞이한다.
국어사전에선 가족을 혈연, 결혼, 입양 등으로 맺어진 친족 관계의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바튼 아카데미>는 가족의 범위를 그보다 훨씬 넓게 펼쳐간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아픔을 나누고 외로움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그 또한 가족이라 할 수 있음을 친절히 보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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