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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까기의 종이씹기2025-08-08 13:18:03

감독과 작가의 폭주로 빚어낸 새로운 좀비 영화

영화 <28년 후> 리뷰

 

스포일러 있음!

 

 

<28년 후>는 분노 바이러스가 퍼지고 28년이 지난 후, 외부로부터 고립된 생존자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홀리 아일랜드'라는 섬을 비추며 시작한다. 홀리 아일랜드에는 14~15세 나이가 되면 감염자들이 바글거리는 영국 본토로 나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의례가 있는데, 모종의 이유로 아직 12세인 스파이크는 아버지 제이미와 함께 의례를 치르고 와야 하는 상황이 됐다. 본토로 나간 스파이크와 제이미. 그들은 별 문제 없이 본토에 다녀오는 듯했으나 '알파' 좀비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좀비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이야기를 그린 <28일 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스타일리시한 촬영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전반부는 대니 보일, 장르를 가지고 놀다가 어느 순간 작가의 인장을 강하게 박아 넣는 식의 후반부는 알렉스 가랜드의 작품으로 보인다. <28년 후>는 전반적으로 서사시의 특성을 띈다. 인물의 행동의 원리보다는 인물의 행동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구차한 설명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하겠다는 작품의 포부를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28년 후>는 감독 대니 보일과 각본가 알렉스 가랜드, 둘의 야심이 폭주해버린 영화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영화는 야심 차게 준비된 것들을 거침없이 펼쳐내기 위해 초고속의 진행을 선보인다. 어느 정도냐면, 스파이크가 그토록 의존하던 아버지에게 반항한 후 어머니와 본토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부분이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대목에서는 스파이크의 심리묘사가 거의 생략되었다. 여기에 메멘토 모리와 메멘토 아모리스, 새로 태어나는 생명, 뒤집어진 십자가 등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본작이 서사시에 기반을 둔 시작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얼핏 보면 장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그 안에 든 내용은 간단하다. <28년 후>는 좀비 영화인 동시에 소년의 성장 영화다. 이 영화를 성장물의 관점으로 요약한다면,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어머니의 품에서 안주하던 소년이 마침내 탯줄을 끊고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지점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장소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장소를 인간의 신체에 빗대었던 알렉스 가랜드의 전작 <멘>을 연상시킨다. 홀리 아일랜드는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자궁이고 섬과 본토를 이어주는 제방 길은 탯줄이다. 결말부에서 스파이크는 홀리 아일랜드에 들어가지 않고 본토에서의 삶을 택한다. 결국 이 작품은 겁 많은 사춘기 소년이 스스로 독립하게 되는 보편적인 성장담이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다가오는 독립의 순간을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더욱이나 그것을 좀비 장르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놀랐다.

 

 

장르 영화로도 주목할 지점이 많다. 시리즈의 1편 <28일 후>는 '달리는 좀비'는 좀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을 완전히 깨뜨린 파격적인 영화였다. <28년 후>는 그러한 영화의 속편답게 한술 더 떠 컬트적인 영역까지 넘본다. 오프닝 장면부터 독특하다. 영화는 좀비들을 피해 달아나는 지미 크리스탈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때 영화는 의아하게도 긴박한 음악이 아니라 흥겨운 음악을 삽입하여 장면과 맞지 않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생성한다. 이러한 연출은 에필로그 장면에서 다시 한번 반추된다. 지미가 좀비들에게 쫓기는 스파이크를 구해주기 위해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좀비들을 제압하는 장면에서는 뜬금없이 유쾌한 락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이런 기괴한 연출은 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대중성을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밀어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이 지미 크리스탈이란 인물에게 이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지미 크리스탈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은 지미 새빌이라는 아동 성범죄자다. 더욱이나 속편에서는 악역으로 쓰일 것임이 일찌감치 예고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지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여러 시도가 넘치는 <28년 후>라는 작품 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분위기를 띠도록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아찔한 점은 아동 성범죄자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를 스파이크라는 아동 옆에 붙여버렸다. 만약 이 장면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건 연출의 의도가 적중한 거다.

 

좀비들에 대한 묘사도 빼놓을 수 없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 영화들 중에서 좀비를 나체로까지 그리는 경우는 많이 없었다. 그러나 <28년 후>는 28년 후가 지났다는 시간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옷이 다 해지는 바람에 나체가 된 좀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예산 좀비 영화들 중 좀비들이 나체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린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진귀한 묘사다. 이러한 지점이 좀비를 더욱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독특한 효과를 가져온다. 작중에서 가장 활약한 좀비는 알파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좀비는 '슬로우 로우'라는 기어다니는 좀비다. 첫 등장부터 카메라를 슬로우 로우 등에 달아서 가뜩이나 기괴하게 꿀렁이는 움직임을 더욱 불쾌하게 담아내는 악취미적인 촬영이 강렬했고, 잠을 자고 있는 스파이크에게 느릿느릿 기어오는 모습은 천천히 다가오는 압박감을 선사한 초기 좀비 영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반갑다. 디자인도 <멘>에서 '출산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져온 것처럼 둘이 은근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여러모로 <멘>의 좀비 버전 같다.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28년 후>를 새로운 좀비 영화로 만들어 준 것은 후반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반부가 영화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좀비 영화에게 바라는 장르적 재미를 거의 배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전반부는 흠잡을 데가 없다. 스파이크 일행이 처음 원정을 나갈 때, 군화(Boot)가 낭송되면서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들과 교차 편집이 되는 장면은 단연 <28년 후> 최고의 명장면이다. 전쟁은 형태를 바꾼 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고, 지금 그 전쟁의 형태는 좀비와 인간의 싸움으로 변했다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담아냈다. 동시에 스파이크가 전쟁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에 제방 길에서 알파와의 추격전 역시 숨도 못 쉴 정도의 긴박감을 주는 훌륭한 장면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이렇게 극적이고 살 떨리는 장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당혹스럽게도 죽음과 생명에 대해 논하는 철학 영화로 돌변해버린다. 만약 좀비 장르 영화의 재미를 원했다면 이때부터는 지루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즉, 감상자의 기대에 따라 이 영화를 배신하는 졸작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

 

그럼에도 <28년 후>는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적어도 전반부 때문에라도 감상을 권하고 싶다. 미쳐버린 장면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오프닝 장면, 군화 장면, 알파의 첫 등장 장면, 제방 길에서의 알파와의 추격전까지,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 1시간가량 끊임없이 나온다. 철학적이고 컬트적인 후반부가 다소 걸리겠지만 장르적 변화만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새로운 스타일의 좀비 영화, 독특한 성장 영화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시리즈만큼이나 이 삼부작의 끝을 꼭 보고 싶다.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가 이 삼부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 1편은 야심의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8년 후>의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애타게 기다려본다.

 

별점: ★★★☆

작성자 . 콩까기의 종이씹기

출처 . https://blog.naver.com/seo910713/22396163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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