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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artist2025-08-11 01:54:39

어느 누가 욕망만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담대하게 담아낼 수 있는가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리뷰



 

우린 흔히 사랑을 양 당사자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뤄지는 경우를 생각하기에 단 방향성 감정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는다. 짝사랑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 욕망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대개 욕망이라는 단어를 불쾌하거나 불건전한 경우에 많이 사용하지만, 사랑만큼이나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이다. 수많은 영화가 감정에 대해 다루고, 그 감정들에 욕망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어떤 영화도 사람에 대한 욕망을 다른 감정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악한 인물이 가진 가치관 내지는 악한 정서 정도로 치부한다. 행복, 슬픔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수많은 영화가 다룬 만큼 욕망도 영화적으로 다루어질 차례가 되었다. 어쩌면 영화 <미세리코르디아>가 이를 해낸 것은 아닐까.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욕망에 대해 섬세하고도 담대하게 다룬다. 어떤 장면에서는 그 욕망으로 인해 웃기기도, 끔찍하기도 또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욕망이라는 하나의 감정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감독이 이토록 치밀하게 설계한 욕망을 관객에게 교훈이랍시고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저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그게 본인이 생각한 욕망의 의의를 본인답게 답하려는 듯 자기만의 독보적인 길을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대단하게 선보인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대도시에서 잠시 고향으로 온 제레미가 일련의 일들을 겪다 그만 고향 친구였던 뱅상을 몸다툼 끝에 죽이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재밌는 건 영화는 이 엄청난 일을 담담하게 연출했다는 점이다. '살인답게' 섬뜩한 음악을 깐다든지 피가 낭자한 상황을 연출한다든지 하는 것이 보통의 접근이다. 그러나 영화는 성인 간의 치열한 액션이 아닌 하찮은 소위 개싸움을 보여주며 끝내 벌어진 우발적 살인을 제시한다. 이후 해당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는 경찰들의 움직임과 뱅상의 어머니이자 제레미가 묵는 집의 주인인 마르틴의 움직임 등이 이어짐에도 이 또한 담담히 연출된다. 영화는 오히려 남겨진 이들의 욕망을 건드려가며 그 욕망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관찰한다. 하나의 사건, 제레미가 뱅상을 죽인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해 보이던 영화의 이야기가 범죄 스릴러 그리고 감정의 고찰까지 장르의 범위를 넓혀간다. 이와 같은 영화의 서사 구조는 인물 구조와도 닮아있다.

 

모든 이야기는 작중 주인공 제레미를 중심으로 치러진다. 인트로 또한 제레미가 짝사랑했던 남성이자 마을에서 명망 있던 제빵사의 장례식을 제레미가 방문으로 꾸며진다. 제레미는 동성애자로 추정되는데 제빵사였던 장피에르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친구였던 왈테르에게까지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제레미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욕망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레미는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욕망의 객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마을의 목사인 필리프는 눈치껏 뱅상을 죽인 범인이 제레미인 것을 알면서도 제레미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범행 사실을 묵인, 급기야 시체 유기까지 돕는다. 또한 마르틴도 제레미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는 인물이다.

 

나아가 배경도 구조의 궤를 같이한다. 영화의 주 배경을 구역별로 나눈다면 마르틴과 성당이 있는 한 구역과 숲 그리고 왈테르가 사는 구역, 총 3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제레미는 왈테르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듯 마르틴의 집에서 숲을 갔다가 왈테르의 집으로 향한다. 돌아올 때면 다시 숲을 지나쳐 마르틴의 집으로 향한다. 뱅상을 죽인 일마저 앞선 경로와 같으며 뱅상을 묻은 곳 역시 숲에서 영화의 극 후반 성당 근처 무덤으로 옮겨진다. 숲이라는 하나의 이동 공간이자 사건의 주 발생지이기도 한 배경을 중심으로 인물의 이동을 보여주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게 한다.

 

영화는 이처럼 하나의 인물, 하나의 중심 사건, 하나의 주 배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복잡하고도 체계적인 관계성을 풀어나가는데, 주목할 점은 이 모두 순환된다는 점이다. 욕망의 주체와 대상 또한 모두 단 방향성으로 뻗어있지 않다. 제레미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목사가 있다면 그때의 제레미는 그 대상에서 벗어나려 왈테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후 사건에서는 그 관계가 반전이 되기도 하는 등의 사건들이 벌어지며 순환의 구조를 취한다. 더불어 서사 또한 제빵사 장피에르를 관에 묻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면 그 끝은 그의 아들이었던 뱅상이 땅에 묻히는 것으로 일종의 수미상관 식 구조를 갖는다.

 

작품의 대표적인 식재료로 버섯이 등장한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도 그렇듯 실제 버섯은 유기물의 사체 혹은 썩은 무언가 위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와 숲속 버섯을 캐는 게 취미던 제레미는 뱅상을 묻은 자리 위로 피어난 버섯들을 황급히 따낸다. 영화 속 버섯은 영화가 가진 순환이라는 개념에 대한 표상이 아니었을까. 인물, 사건, 배경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순환이라면 그 인간이 만들어진 순환은 결국 죽음과 욕망으로 인해 탄생한 순환이 아닐까. 이와 대비되는 자연 순환의 표상인 버섯은 죽음으로 인해 탄생했지만, 욕망의 표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주 배경인 마을과 집 내부만큼이나 누군가의 차 내부 및 차창 밖 정경이 영화 속에 빈번히 등장한다. 영화는 오픈 크레딧과 함께 차창 밖 정경을 비추며 시작하는데 보통의 영화들보다 훨씬 길게 보여준다. 이후 해당 장면 속 시점이 제3자의 관점이 아닌 주인공 제레미의 관점이었음을 일러준다. 영화는 이후 차 내부 씬들에서도 그렇듯 차창 밖 정경을 보여주고 난 후 그 시점이 누구의 시점인지를 드러낸다. 그 예시로 제레미와 뱅상이 숲속으로 차를 타며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제레미를 혼쭐 내주려 한 뱅상의 관점은 요동을 치지 살인을 저지른 후 은폐를 위해 운전한 제레미의 관점은 되려 안정적인 것이 흥미롭다.

 

더불어 영화는 차 속 인물들의 각각의 감정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 함께한 인원들의 공통적인 감정까지도 담아낸다. 이때의 주 감정이 욕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의 방향성이 무조건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레미와 목사가 차량에 함께 탄 씬에서 카메라는 뒤에서 제레미의 어깨와 목사의 어깨 모두를 담아낸다. 제레미와 목사 모두 욕망을 가진 인물이지만 해당 장면 속 제레미는 시체 처리를 욕망하는 반면 목사는 제레미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드러낸다.

 

목사의 동성애, 유년기 고향 동성 친구에 대한 일방적 유혹, 죽은 아들의 살인마일지 모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감정. 모두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욕망의 표출이다. 보통의 시각 속 욕망은 옳지 못한 감정으로 그 엔딩은 욕망의 표출로 인한 인간의 말로(末路)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궤를 달리한다. 분명 저 멀리 삽으로 무언가 푸는 소리가 들림에도 마르틴은 제레미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고, 제레미는 같이 잘 수 있는지 그녀에게 묻는다. 뱅상이 제레미를 쫓고 헤치려 한 이유도 제레미가 마르틴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마르틴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듯 뱅상의 의혹을 제레미는 모두 부정하지만, 종반부에서 제레미가 먼저 마르틴에게 동침을 제안했고, 선뜻 스킨십했다. 영화는 마르틴과 제레미가 한 침대에서 손을 잡은 채 잠을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제레미의 알 수 없는 표정과 욕망의 방향으로 인해 보통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의 욕망은 불건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런 욕망마저도 사랑이었다. 마찬가지 사랑 때문에 목사는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눈감으며 시체 유기에는 버선발을 내던졌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레미라는 인물이 정말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양성애자인지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 속 그 누구도 말이나 행동으로 감정을 직접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린 영화 속 그들의 행동이 정말 사랑의 표현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욕망의 구분 점을 둔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원초적이면서도 모호한 그 감정을 욕망이라 정의한다. 쉽사리 이해하기 쉽지 않던 영화의 엔딩마저 욕망의 불확실성에 따른 마무리가 아니었을까.

 

작성자 . being artist

출처 . https://blog.naver.com/le_film_artiste_ho/22396606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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