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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5-08-11 07:48:07

우리는 로코를 보고 ‘평등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영화 〈나의 아픈, 사랑 이야기〉

브런치 글 이미지 1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영화에서 말괄량이는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말괄량이’의 사전적 정의가 “말이나 행동이 얌전하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여자’”이긴 하지만, 여하튼. 특히 대만 로코에서 그렇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여름날 우리〉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제 이 장르에서 말썽꾸러기는 남자다. 그리고 그의 옆엔 언제나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여성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공부엔 관심이 없고 장난기만 넘치는 철부지 고등학생 양쯔제가 어느 날 학교 내에서 소란에 휘말려 병원에 갔다가 암 판정을 받는다. 오진이다. 그러나 양쯔제는 자기가 암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고, 환자 행세를 하며 이를 편안한 학교생활을 위한 빌미로 삼는다. 그리고 또 다른 양쯔제가 있다. 이름은 같지만 성별은 다른, 모범생 반장이다. 선생님은 ‘여’쯔제에게 ‘남’쯔제를 잘 챙기라고 말하고, 여쯔제는 모범생답게 선생님의 부탁에 충실히 응한다. 문제는 남쯔제가 그녀의 관심과 돌봄을 간섭으로 느껴 귀찮아한다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꽁냥거림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여쯔제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남쯔제의 심경은 복잡해진다. 자신이 암 환자가 아니란 걸 언제 말해야 할까? 그러니 비밀은 남쯔제에게만 있지 않다. 사실 진짜 아픈 건 여쯔제다. 여쯔제가 남쯔제를 살뜰히 챙길 수 있었던 건 백혈병을 앓고 있어 아플 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몸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쯔제는 이 사실을 숨긴다. 굳이 ‘아픈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회복 기간 중인 여쯔제는 얼른 완치 판정을 받고 남쯔제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고 싶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아픈 척하는 건강한 사람과 건강한 척하는 아픈 사람.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청춘 로코의 멜로 호흡이 꽤 괜찮다. 이미 여러 성공작을 내놓은 바 있는 대만 로코 장르의 탄탄한 문법도 안정감을 더한다. 두 사람이 모든 걸 공유한 후 더한층 성숙해지며 사랑을 깊게 다지는 대목에서 감정을 증폭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영화의 결말이다. 여쯔제는 결국 백혈병이 재발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쯔제는 그녀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며 여쯔와의 관계를 통해 한층 성숙해진 채로 세상에 나아간다. 로코가 주로 여성 관객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평등한 사랑의 모델을 탐색하는 장르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남성 캐릭터의 성장 서사로 변모한 로코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혹 이러한 설정을 로코의 주요 관객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철부지’ 시절을 넘긴 진중하고 사려 깊은 남성의 출현을 요구하는 동시대적 욕망의 징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요즘 남성을 ‘철부지’ 정도로 부르는 건 현실을 너무 순화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여성들에게,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매개 삼아서라도 성장하는 남자의 존재는 어쩌면 귀할지도 모른다. 2025년 대만 영화 흥행 1위작이라는데, 이 영화가 한국에도 단단한 팬층을 둔 대만 로코 흥행 계보를 이어갈지 두고 볼 일이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로코를 보고 평등한 사랑에 관해 논의했으면 좋겠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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