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8-18 01:51:38
촉각으로 그려낸 고독의 세계
영화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를 보고
두 소년이 함께 춤을 춘다. 주인공 치히로와 그의 친구 나오야가 함께 추는 춤. 이들의 춤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정형화되지 않은 이들의 몸짓.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접촉’이다. 선생은 말한다. “움직이지 말고 파트너가 움직이게 하라”. 두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지도 몸을 맞대지도 않고 서로간의 호흡을 맞춰나간다.
그들의 춤만이 비접촉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접촉을 기피한다. 특히 주인공 치히로가 그렇다. 아버지를 잃고 이복형에게 맡겨진 치히로. 치히로는 형의 손장난조차 피하는 인물이다. 나오야와 함께 추는 춤으로 단련된 탓일까. 치히로는 비접촉에 능하다. 나오야의 여자친구 또한 나오야의 손길을 거부한다. 나오야는 평소와 같이 친밀함을 표하는 손길을 내밀지만, 이별을 결심한 그녀에게 그 손길은 불편한 침범이다. 원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거리를 지켜서라도 곁에 머물고 싶다는 나오야를 두고 그녀는 떠나간다.
그러나 실은 두 사람도 접촉을 원하는 인물들로 보인다. 영화의 중간 중간 치히로는 아스팔트 거리에 얼굴을 맞댄다. <아사코>의 한 장면이 스쳐간다. 아사코와 바쿠는 도로 한복판에 누워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본다. 두 사람에겐 서로가 있다. 그러나 치히로는 혼자다. 그래서 치히로는 손을 잡은 상대를 바라보는 대신 바닥에 안기듯 온몸을 접촉시킨다. 접촉을 기피하는 치히로의 기질은 이별에 대한 불안 때문인 것으로 유추된다. 이복형과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치히로는 자신이 당신들의 짐이 되는 것이 아니냐 직접적으로 묻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혼자가 된 치히로는 또다른 이별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없어야 더 행복하고 편하지 않겠냐는 말은 이별을 ‘당할’ 바에야 이별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치히로의 심리를 표현한다.
<아사코>가 다시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장면은 사실 바쿠가 아사코를 떠나가기 직전의 장면이다. 가장 당신과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 당신이 떠나가기도 한다. 어쩌면 그자리에 언제나 그대로 머무를 물성에 의존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조차 의문스럽다. 하마구치의 영화는 주로 3.11 동일본대지진의 영향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단단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땅조차 갈라지기도 한다.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나오야의 여자친구 또한 접촉을 원한다. 그 상대가 나오야가 아니었을 뿐. 치히로에게 관심을 품은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치히로의 입맞춤. 두 사람의 입맞춤은 특별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손을 상대의 입에 포개고 생채기를 내며 입을 맞춘다. 입가에 잔뜩 퍼진 각자의 피. 피는 시작에 불과하다. 치히로는 그녀의 입과 코를 막고 살해를 감행한다. 극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접촉을 회피해 온 치히로는 가장 상대와 밀접하게 접촉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죽인다. 총과 칼 같은 도구로는 느낄 수 없는 살해의 섬뜩한 감촉은 치히로의 손끝에 남는다. 접촉은 언제나 친밀함과 섬뜩함 사이에 존재한다. 감정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선을 넘는 접촉은 섬뜩함에 수렴될 뿐이다. 나오야의 여자친구가 행한 원치 않는 키스도, 그에 대응하여 치히로가 행한 살해도 섬뜩함에 수렴한다. 두 행위를 동등한 선에 놓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치히로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접촉한 이가 나오야였다는 사실은 유의미하다. 이별이 두려워 접촉을 포기한 이가 선택한 사람. 친밀한 접촉이 가능한 사이는 비접촉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치히로는 사람을 죽였고, 나오야는 이를 숨겨준다. 그렇게 죽음을 곁에 두고 두 사람은 마지막 춤을 춘다. 극중의 인물들도 극장의 관객들도 그 순간만은 숨을 죽였다. 언어도 접촉도 없는 순간에도 견고한 둘만의 세계에 우리는 멈춰선다. 감독이 컷을 외치듯 나오야는 만족스러운 춤사위가 끝나자 오케이를 외친다. 영화의 마무리는 어떤 선택과 단절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살을 맞대보아도 상대는 내가 아니고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영원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고 믿으며 손을 내밀 수 있을까. 비접촉의 세계를 그리는 이 영화는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고독을 표현해낸다. 치유되지도 해소되지도 않는 고독. 영화를 보며 오늘도 혼자인 나를 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