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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스포머 ONE | 너무 늦게 도착한 이야기의 시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이버트론 행성의 지하 광산에서 일하는 '오라이온 팩스'(크리스 헴스워스). 변신도 못 하는 하급 로봇이지만, 그는 오래전 사라진 에너존의 근원인 매트릭스를 찾아내려 한다. 사이버트론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 그 일환으로 오라이온 팩스는 둘도 없는 절친 'D-16'(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수다쟁이 로봇 'B-127'(키건 마이클 키), 카리스마 넘치는 '엘리타 원'(스칼렛 요한슨)과 함께 출입이 금지된 지상에 도달한다.
그들은 과거 '쿠인테슨'과의 전쟁 이후 지상에 잠들어 있던 프라임, '알파 트라이온'을 찾아내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잠재되어 있던 변신 능력을 얻는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는 함께 따라오는 법. 그들은 사이버트론의 구원자로서 군림하던 '센티널 프라임'이 사실 쿠인테슨과 손잡은 변절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오라이온 팩스와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신 능력과 힘을 살려 센티널과의 전쟁을 개시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고질병
<트랜스포머> 실사영화 시리즈. 10억 달러 돌파 작품을 두 편이나 배출했지만, 눈을 의심케 하는 화려한 CG만큼이나 허점투성이인 스토리텔링으로도 악명 높은 프랜차이즈였다. 특히 마이클 베이가 메가폰을 잡은 첫 5편이 유독 문제였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 5편 내내 싸웠지만, 정작 그들이 충돌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내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그들의 행성, 사이버트론을 구할 에너지원과 자원이 하필이면 지구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 이에 메가트론은 지구를 정복하고 인간을 노예로 부려서 행성을 구하려 하고, 옵티머스 프라임은 메가트론의 욕망을 저지한다. 하지만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옵티머스 프라임이 메가트론에 반대한다는 것만 보여줬을 뿐, 그가 메가트론을 저지하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리즈 내내 옵티머스 프라임의 행적은 다소 억지스럽다. '왜 그에게는 인간의 자유가 사이버트론보다 중요할까?' '대체 옵티머스 프라임에게 자유는 무슨 의미일까?' '인간이 그를 죽이려 하는 데도 그는 왜 인간을 도울까?'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보니 <트랜스포머> 시리즈만의 볼거리만으로는 관객들의 관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마침내 드러난 근본 원인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트랜스포머 ONE>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실사영화만 본 입장에서는 17년 만에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 갈등을 빚은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 둘도 없는 절친, 오라이온 팩스와 D-16는 사이버트론 사회의 최하위 계급이었다. 그들은 행성을 지탱하는 에너지원, 에너존을 채굴하는 광부 로봇으로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
<트랜스포머 ONE>은 그런 그들이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으로 거듭나고, 사이버트론의 영웅으로 알려진 센티넬 프라임의 실체를 깨달은 뒤 그에게 맞서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그토록 중시한 자유의 의미가 마침내 드러난다. 노예나 다름없었던 그와 동료들에게 자유는 추상적으로 선한 가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생명력 그 자체였던 것.
더 나아가 옵티머스 프라임에게 자유는 보편적인 가치였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센티넬 프라임 치하에서는 언제든 폐기될 수 있었던 로봇들이 대우받을 수 있는 원동력도 그들이 직접 쟁취한 자유로부터 나왔으니까. 따라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보기에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살아남아야 했고, 그가 보호해 줄 이유가 충분했다. 설령 그들이 그를 배신하고 공격하더라도.
흥미롭게도 메가트론에게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누구보다도 신뢰했고 경외했던 영웅, 센티넬 프라임에게 배신당한 그에게 생긴 자유의지는 복수와 동의어였다. 자기가 느낀 충격과 분노를 되돌려 줄 수 있는 힘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장에서 인간은 보호받을 이유가 없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표출하고 지켜낼 힘조차 없는 존재니까. 따라서 그는 옵티머스 프라임과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가치관과 신념의 차이를 보여준 덕분에 <트랜스포머 ONE>은 시리즈 중 가장 몰입도가 뛰어나다. <엑스맨> 시리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와도 유사하지만,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더 높다. 사실 두 영화는 유사점이 적지 않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라는 캐릭터의 관계성도, 두 절친이 적이 되고 각자의 팀을 모아 내전을 벌인다는 이야기도 모두 겹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인상은 사뭇 다르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두 주인공의 사연을 더 깊게 알 수 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반복하기에 신선함이 떨어진다. 그에 반해 <트랜스포머 ONE>은 17년 간의 공백을 마침내 채워 넣었기에 더 새롭고, 흥미롭다. 과거 실사 영화에 등장했던 범블비, 재즈, 스타스크림과 쇼크웨이브 같은 오토봇과 디셉티콘을 찾아내는 재미가 더해지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완성도만큼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미치지 못했다. 억지스러운 전개가 종종 보이기 때문. 특히 오라이온 팩스에 비해 D-16만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그가 메가트론으로 거듭나는 감정선의 변화는 작위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오라이온 팩스와 D-16가 전쟁 도중 실종된 프라임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손에 넣는 경위, 센티넬 프라임과 쿠인테슨의 관계를 알게 되는 과정 역시 다소 기능적으로 제시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단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머 ONE>의 몰입감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린 액션 연출이 평이하거나 작위적인 전개를 잊게 만든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실사 영화에 비해 연출과 표현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 <트랜스포머 ONE> 이 장점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공중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를 자주 등장시켜 360도로 움직이는 현란한 연출로 관객의 눈을 현혹한다.
또 트랜스포머다운 변신 기능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트랜스포머끼리의 레이스 경기 도중에 신체 일부만 차량으로 변하거나, 전투 도중 차량과 로봇 형태를 빠르게 오가는 식이다. 이는 실사 영화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실사 작품이 변신하는 과정 그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활용했다면, 애니메이션은 변신이라는 기능 자체를 마치 하나의 무기로써 활용하는 듯하다.
액션 외의 볼거리도 인상적이다. 항상 오프닝 시퀀스 배경으로만 잠시 스쳐 지나간 사이버트론의 전경을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대표적이다. 물론 애니메이션다운 장점은 그 자체로 단점이 될 여지도 충분하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만의 매력이 덜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전체적인 연출이 가볍고 빠르다 보니 실사 영화에서 맛볼 수 있었던 로봇다운 무게감은 느끼기 어렵다.
너무 늦게 도착한 근본
종합하면 <트랜스포머 ONE>은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 <트랜스포머> 1편 이후로 재미와 완성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리부트 이후로 흥행력도 관심도 예전 같지 않은 현 상황을 타개할 작품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실사 작품에 비해 애니메이션 작품의 소구력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트랜스포머 ONE>은 너무 늦게 도착한 듯 보인다. 탄탄한 이야기와 화려한 액션의 조합은 시리즈에 새 숨결을 불어넣기에 충분했지만, 실사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론조차 되지 않아서 파급력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근본은 마침내 되찾았지만, 조금만 일찍 도착하거나 실사 영화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되기에는 이미 한계가 명확한 시리즈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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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슬픈 결말, <프리가이>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가이>의 결말은 대단히 슬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까지도 유쾌함을 잃지 않다가 이토록 급하게 씁쓸함을 선사하는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프리가이>의 결말이 왜 철저한 새드엔딩인지 설명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장점부터 언급해보고 싶다. <프리가이>는 유명 배우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치고 놀랍도록 매니악하고 젊은 언어로 만들어졌다. 나이 든 관객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이 정도는 네가 이해할 것이라 믿어!’라는 듯이, 여러 게임의 설정, 아이템, 용어 등을 뒤섞어 놓으면서도 특별한 설명 없이 지나간다.
허나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확실하게 해 둔 덕으로, 영화는 매우 뚜렷한 컨셉을 얻게 되었다. 유머는 타율이 높고, 어색함 없는 CG와 빵빵한 사운드, 질척거리지 않는 전개로 지루해질 여지도 없이 오감만족을 선사한다. 확실히 재미있다.
<프리가이>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은근한 메시지까지 담으려 했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는 얼핏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하더라도 언제나 주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것. 단순한 교훈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인 것도 맞다. 코미디에도 최소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다만 그 메시지들이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불협하고, 심지어 불쾌함까지 전해준다면 어떨까.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리가이>는 여러 영화를 연상케 한다. 나열해보자면 <트루먼쇼>, <그녀>, <매트릭스>, <13층>, <주먹왕 랄프>,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작품들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프리가이>를 <트루먼쇼>와 비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의문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본인도 모르는 새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라는 점.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는 점(“Don't have a good day! Have a Great day”,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사랑하는 여인이 조력자로 등장한다는 점, 클라이막스에 바다를 건넌다는 점, 목숨을 걸고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탈출한다는 점 등. 공통점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왜 <트루먼쇼>가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과 달리 <프리가이>는 씁쓸한 결말의 영화가 되었을까.
두 영화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결국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유를 얻지만, <프리가이>에서 ‘가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도, 주체적인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만약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속편 <트루먼쇼2>를 통해 제2의 세트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영화를 기쁘게 반길까? 이 세상이 세트이며,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트루먼이 다시 한번 관음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그 모습에서 감동할 수 있을까? 트루먼이 아무리 행복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이’는 트루먼과 다르게 목숨을 건 도전 이후에도 ‘프리가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게임 속 관찰의 대상이다. 자신의 사랑을 창조주에게 양보했다. 사랑을 잃고 친구와 재회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가이’는 정작 직업마저 잃은 백수 광대로 남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한량으로 사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일까? 적어도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과 주제가 일치하려면, 가이는 누구의 간섭이나 관찰도 허용하지 않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다. 밀리와의 사랑 또한 이루어졌어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ai와 인간이 사랑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키스는 밀리와 동업자이자 좋은 친구로 자신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가야 했다. 마지막 커플의 키스신이 야동을 보다 들킨 것처럼 황급히 끝나버리는 이유는, 어긋난 결말을 깨달아버린 감독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빵이야 어떻게 만들었든 생크림을 잔뜩 발라놓으면 입에 넣고 씹을만하듯이 유쾌한 상상력의 오락영화 자체로 본다면 <프리가이>는 그럭저럭 탑승해볼 만한 어트랙션이다. 하지만 <프리가이>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면, 정교한 방식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재미와 의미를 양손에 쥐고 가는, 좋은 영화들의 사례를 많이 만나왔다. 그런 면에서 <프리가이>는 재미는 잡았지만 의미는 잡지 못한 반쪽짜리 영화라고 평할 수밖에 없겠다. 프리도 되지 못하고 가이도 되지 못한 프리가이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극장의 불이 켜질 때, 나에게 남은 것은 그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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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모든 것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의 원자핵을 쪼개 엄청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미국 물리학자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 정부 역시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로브스 대령'(맷 데이먼)을 책임자로 삼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인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고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과거 공산주의에 경도됐던 오펜하이머 이력이 재조명되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공격에 직면한다.
크리스포터 놀란 필모의 정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스크린에 옮겨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뤘다. 영화는 특히 그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정과 전후 수소폭탄 반대 운동을 펼친 뒷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오펜하이머>는 개봉 전부터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의 핵폭발 장면을 재현했다고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1달 전에 개봉한 영화 <바비>와 '바벤하이머' 밈으로 얽혀 이슈였고, 해외에서는 <바비>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아닌 유니버설 픽처스가 처음으로 놀란 영화를 단독 배급한 점도 화제였다.
사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3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작업은 어렵다. 원작 평전은 심지어 오펜하이머의 삶만 다루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사건과 정치인, 과학자의 이름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펜파이머>는 더욱 놀랍다. 놀란의 스타일, 기술, 직관, 통찰력이 한 데 모여 모순적인 물리학자의 일생을 긴장감 넘치게 재구성했기 때문. 달리 말해 <오펜하이머>는 영화감독 놀란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자폭탄 같은 영화
<오펜하이머>는 기본에 충실하다.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내면과 감정선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좌익 과학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지휘한 유능한 행정가. 자기 손으로 만든 신무기를 경계하는 야심 찬 정치인. 모순적인 세 인물이 한 사람이니 당연히 어색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마치 원자폭탄처럼 재구성한 놀란의 각본은 그의 내면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핵분열물질의 원자핵에 중성자가 충돌하면 원자핵은 분열되고, 더 많은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과 충돌해 새 핵분열이 발생한다. 원자폭탄은 이 연쇄반응에서 생긴 에너지를 활용한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트리니티 핵실험이라는 목표까지 거침없이 질주한다. 관객의 시선을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헌신하는 오펜하이머에게 집중시킨다. 그러고 나서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클라이맥스가 유발한 연쇄적인 폭발로 시선을 돌린다.
미국 정치권과 과학계는 수소폭탄 개발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계속해서 충돌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공격당한다. 놀란이 처음 1인칭으로 작성했다는 각본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트리니티 실험 전까지는 맨해튼 계획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이 주인공이 된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양심의 가책, 매카시즘과 스트로스에게 시달리는 고통 등 오펜하이머의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원자폭타과 같은 구조는 절제미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직후, 영화는 순간적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극장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진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개발했다는 기쁨에 심취하지 않는다. 인류가 다룰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힘을 손에 넣은 두려움이 정적 속 독백을 통해 전해진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오펜하이머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다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는 폭탄 폭발음과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원자폭탄으로 인한 흥분과 열광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 그가 받은 충격과 죄책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단번에 납득시킨다. 원자폭탄 희생자 시신을 오펜하이머가 밟는 환상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은 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날 때, 그의 선택 중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 없을 정도다.
양자역학의 인문학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논란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복권한 게 불과 반년 전 일이다. 영화는 이 모순적인 물리학자에게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준다.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그를 판단할 공간도 열어준다.
핵심은 컬러와 흑백의 전환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Fission(핵분열)'이라는 제목의 파트는 컬러로, 스트로스가 중심이 되는 'Fusion(핵융합)'이라는 이름의 장면은 흑백으로 묘사된다. 원자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수소 폭탄의 원리인 '핵융합'은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마치 양자역학의 인문학적 해석 같아 보인다. 양자 역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관측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전자나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중첩되어 있는 두 가지 상태는 관측을 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한 가지 성질로 표현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관점에서 주인공을 관측한다.
애국심이 투철한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자이고,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지만 반핵 운동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 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영화는 그의 시점에서 그 모순점을 이해시키고, 타인의 시점에서 그 역설과 중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비춘다. 인간이 그 자체로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렇기에 한 사람을 재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상기시킨다. 이는 제목에 걸맞은 접근법이다. 오펜하이머는 본래 양자 역학 연구자였으니까.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그래서일까? <오펜하이머>는 마치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같다. <소셜 네트워크> 역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모아놨기 때문. 저커버그의 시점과 동업자였던 윙클보스 형제 및 왈도 세브린의 시점을 충돌시킨다. 두 영화가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법도 흡사하다. <소셜 네트워크>는 법원 조정 과정으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로 서로 다른 시점의 충돌을 보여준다.
<소셜 네트워크>가 받은 찬사를 생각하면, <오펜하이머>는 작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량을 재증명하는 장이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놀란의 통찰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므로. 그간 놀란은 캐릭터를 플롯의 장치와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통찰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조연 캐릭터가 여전히 수단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놀란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
그러면서도 놀란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채를 잃지 않았다. <덩케르크>처럼 <오펜하이머>도 시간대가 세 개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에서 맨해튼 계획까지, 또 그 이후로 이어지는 시간대가 주 재료다. 1954년 원자력 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는 양념이다. 특히 두 시간대는 철저히 조각난 상태로 삽입된다. 주요 사건에 따라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형태로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시간을 비트는 연출과 구조는 주제의식과 긴밀히 연관된다. 오펜하이머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 붙임으로써 과학자의 책임을 논할 공론장을 연다. 통상적으로 과학자는 신기술의 개발자로만 인식된다. 그들의 역할은 기술을 만드는 데서 그친다고 여겨진다. 오펜하이머도 그랬다. 그는 원자폭탄의 오남용과 악영향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말한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가 바꾼 새로운 세상을 목도한 뒤로 그는 달라진다. 과학자에서 행정가, 정치인으로 변한다. 새 기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의 표현대로 이제 그는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가 되려 한다. 그는 사회 구조와 관계망 안에서 신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원자력을 평화롭게 이용할 체계를 만들지 못했고, 수소폭탄의 개발도 막지 못했으며, 자기 자신의 삶도 지키지 못했다. 대통령을 설득할 만큼 신중하지 못했고, 앙심을 품은 정치인을 꺾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마치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자기 미래는 지키지 못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성공했지만, 시스템 건설자가 되지 못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빛과 그림자를 가감 없이 들춘다.
SF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기 영화
이러한 맥락에서 <오펜하이머>는 외관과 달리 SF 영화 같은 면도 있다. 많은 SF 영화는 과학의 발달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로 가득하다. 달리 말해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나 다름없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SF 영화의 본질을 품고 있다. 영화는 만약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잊는다면,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현명한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손으로 전 세계를 초토시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설령 0에 가까운 확률이라 해도 인류가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정점은 멕시코에서 핵폭탄이 폭발한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지구를 불바다로 만드는 핵 미사일이 교차되는 결말이 정점이다. 오펜하이머와 놀란이 입을 모아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경고를 가득 담고 있으니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오펜하이머>는 테넷의 정신적 속편이자 프리퀄인 셈이다. <테넷>의 주된 플롯은 핵폭탄을 막는 미션이었고, 인류의 존속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전쟁이 시대적 배경이었으니까. 이는 SF 영화에 대한 관심을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준 놀란스러운 착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호불호가 심하게 나뉠 영화다. 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영화화한 만큼 밀도가 높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놀란의 꼼꼼한 각본이 반갑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맨해튼 계획 이전의 오펜하이머의 개인사나 초기 생애에 관련한 내용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도 낯선 영화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 대신 트리니티 실험을 기점으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 친절한 영화도 아니다. 1930~5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정치적, 국제적 이슈에 대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갈 길이 바쁜 만큼 상세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기대에 비해 시각적 임팩트가 약하다.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쾌감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그래도 배우 덕분에 진입장벽이 낮아지기는 한다. 우선 킬리언 머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놀란 사단 중 하나로만 알려졌던 그는 이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명배우들의 향연도 인상적이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데인 드한, 라미 말렉, 플로네스 퓨는 앙상블을 이루며 머피 뒤를 단단히 받쳐준다. 특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었다면 후반부는 힘이 빠져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몇몇 단점은 취향의 문제이지, 완성도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놀란이 의도한 방향성만 정확히 짚어 쫓아간다면 <오펜하이머>는 <인셉션>,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놀란이 그간 자기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스타일과 장점, 통찰력을 한데 모아 만든 폭탄 같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종합하면, 단언컨대, <오펜파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스터피스다.
Outstanding 특출함
원자폭탄 섬광과 굉음으로 빚어낸 프로메테우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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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듣는 영화'가 제천에 떴다! 국내 최초 한국 영화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현장 속으로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8월 12일, 한 주 내내 쏟아지던 빗방울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습니다. 제천 의림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으로 가득 찼죠.
화창해진 날씨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제천 의림지 야외무대를 찾았습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최초의 필름콘서트를 즐기기 위해서였는데요. 필름콘서트는 영화 상영과 동시에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연 형식입니다. 영화와 만난 콘서트는 전 세계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영화 음악을 선보이고 있죠.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한국 영화 음악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국내 최초로 한국 영화의 오리지날 필름콘서트를 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봄날은 간다’가 바로 그 위대한 첫걸음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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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역사적인 첫 공연을 위해 <봄날은 간다>의 음악을 만든 조성우 음악 감독과 서울그랜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재즈 아코디어니스트 제희가 무대에 올라섰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연주자들은 대형 스크린 아래에 마련된 무대에 하나둘씩 자리했는데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제 귀엔 악기를 조율하는 저마다의 소리마저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습니다.
영화 상영과 함께 시작된 그들의 연주는 순식간에 의림지를 거대한 영화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음향을 자랑한다는 여느 영화관도 이곳 ‘의림지 영화관’의 사운드를 따라올 순 없었죠.
연주자들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 집중하며 완벽한 필름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10초 안팎의 짧은 삽입곡까지도 모두 라이브로 소화해냈죠. 음악이 흘러나와야 할 정확한 순간에 연주하기 위해 수도 없이 ‘봄날을 간다’를 보았을 그들의 노고에 시도 때도 없이 깊은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게 영화를 감상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감상하고 나서야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곤 하죠. 음악은 관객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요소인데도 말이에요. 그러나 필름콘서트의 관객은 스크린 바로 아래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 덕분에 음악이 삽입되는 영화의 모든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음악의 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필름콘서트는 그야말로 ‘듣는 영화'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공연과 영화 속 배우의 말소리 및 현장음을 조화롭게 재생한 스태프들의 노력은 영화의 듣는 매력을 극대화하죠. 이런 면에서 영화 음향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운드 엔지니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봄날은 간다’가 국내 최초 오리지널 필름콘서트 작품으로 가장 적합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젊은 시절의 배우 유지태와 이영애를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정말 특별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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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영화 경험을 할 수 있는 한여름 밤의 필름콘서트는 8월 13일과 14일에도 이어집니다. 13일에는 젊은 거장 이지수 음악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 필름콘서트가, 14일에는 아카데미 수상자 존 윌리엄스 음악 감독의 ‘E.T’ 40주년 기념 필름콘서트가 개최되니 절대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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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핀쳐의 인장을 새긴 '킬러 패스밴더의 일일'
데이비드 핀처가 조용하지만 내내 큰 폭으로 진동하는 영화로 돌아왔다. 핀처의 신작 <더 킬러>에서는 <파이트 클럽>의 화려한 액션이, <세븐>만큼의 강렬한 서스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데이비드 핀쳐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의 개성이라는 듯 내내 스스로를 증명한다. <더 킬러>의 오프닝은 그 서막이다. 감독은 주인공이 목표 저격에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문 킬러의 일상으로도 장기를 보여줄 수 있어’라는 인상을 준다. 좋은 시작으로 쏘아 올린 이야기는 서서히 끓어올라 관객들을 잡아먹고 이내 후반부까지 질주한다.
이 킬러는 도통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다. 이런 그에게 심리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더 킬러’에게 보복하고 싶었던 불한당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주인공의 여자친구를 해친 것이다. 처음으로 감정을 끓어 올리는 주인공. 서서히 악당들을 해치워나간다. 이 과정을 묘사하는 데이비드 핀쳐의 연출법이 흥미롭다. ‘실행이 전부다’와 ‘공감은 약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이 반복은 주인공의 강박이 깨지지 않을까라는 서스펜스를 유발한다. 또한 시각적으로도 주인공과 악당들이 좁은 공간에서 대치하는 신을 연이어 보여주며 두 인물 사이의 장력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렇게 전문 직업인의 일상도 고유의 개성을 통해 보여주는 데이빗 핀쳐. 하지만 뭔가 나사가 빠진듯한 종교영화로서의 메타포가 아쉽고, 느슨한 이야기 마무리는 각본의 밀도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데이빗 핀쳐가 보여준 연출세계는 팬들이라면 충분히 좋아할 만 하다. 11월 10일 넷플릭스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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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드라마 | 미국 | 111분 | 2018
감독 션 베이커
최근 <아노라>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올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감독 션 베이커. 아노라 이전,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렸던 영화는 바로 2018년 연출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본 후 션 베이커 연출작은 믿고 찾아 보게 되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간만에 인상적인 영화를 봤다고 느꼈다. 배우들도 연출도 신선했으며 특유의 시각적 구성도 인상 깊었다.
내가 션 베이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준히 하면서 영화적인 연출 감각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적 특징을 꼽는다면 사회 계층 문제를 자주 다룬다는 것, 아름다운 색감을 쓴다는 것, 그리고 실험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황망한 이야기로 이토록 아름답게 스크린을 채울 수 있을까? 그 역설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면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를 경탄하게 된다.
- 커다란 대형마트와 그 앞을 지나가는 무니, 젠시, 스쿠티.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건 위 장면처럼 뒤 배경과 아이들의 대비를 사용한 샷이 많았다는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에 광각렌즈를 사용한 넓은 화각으로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이게 연출했다. 커다란 배경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소리치고 움직이니, 대비가 극명하다. 그들이 소리를 질러도 딱히 세상은 반응하지 않는다.
참 재밌는 영화다. 극의 초반에는 다큐멘터리 같은 호흡을 보인다. 샷의 길이도 길고, 넓다. 어떤 인물을 강조하기보다는 장소와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는다. 연출은 굉장히 담담하고 연기는 극히 사실적이지만 사건과 인물들은 굉장히 입체적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감독은 그 자극적인 인물과 사건이 지극히 현실적인 일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영화니까라고 생각하지? 근데 이거 지금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야. 니들이 모르는 세상엔 저런 일상이 있어." 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다큐멘터리처럼 서서히 하나씩 정보를 준다. 처음엔 장소, 그리고 그를 지키는 관리인 보비, 각각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헤일리와 무니의 삶에 몰입해있다.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나다가도 그들이 겪을 일들이 괴롭다. 나는 보비와 눈을 같이하는 기분이었다.
- 무니의 시선에 맞춰 쪼그려 앉은 보비. 그리고 무니에 맞춰진 카메라 앵글
보비는 가장 큰 맥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라고 본다. 사건에 중심에 있진 않지만 항상 그곳에 있고 관찰자로서 관객과 함께 한다. 중반부까지는 보비에 입장에 가장 몰입해 있다가 바로 뷔페 장면. 무니의 클로즈업과 연달아 나오는 헤일리의 클로즈업에 나는 헤일리와 무니의 마음 사이 어디쯤으로 몰입이 바뀌었다.
- 사랑스러운 무니의 정면 클로즈업
이 장면이 내가 느낀 영화의 첫 번째 정면 클로즈업이었다. 뒤 포커스를 날려서 촬영한 걸 보니 의도된 것 같다. 이때 관객은 처음으로 무니와 헤일리에게 눈을 마주치게 된다. 위태롭지만 사랑스러운 모녀를 보며 그들을 위한 삶은 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몰입하고 싶지 않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 장면 뒤부터 급격히 감정이입이 되었고, 무니가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무니를 바라보는 보비와 무너지는 헤일리, 도망치는 무니. 감정들이 소용 쳤다.
- 비슷한 사이즈이지만 전혀 다른 표정의 무니.
자신의 가족인 엄마와, 매직 캐슬을 잃게 된 무니는 진짜 아이가 되어버린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른들의 사정을 읽는다. 극 초반 자신은 어른들이 울 것 같을 때를 안다는 무니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감당하기 벅찬 일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아이처럼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포스터나 예고편과는 다르게 굉장히 담담하지만 슬픈 영화이다. 관객을 울리려고 끼워 맞춰 만든 신파극들과 비교되었다. 제작진이 울면서 만든 영화 같았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헤일리가 훔친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벌고 무니와 함께 장을 보고 카트를 가지고 차들 사이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사진을 찾고 싶었는데 못 찾아서 카트 사진으로 대체. 수많은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가운데 헬리가 밀어주는 카트에 탄 무니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무니는 가장 초라한 네바퀴 속에서 가장 행복해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헤일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악의 보호자이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무니랑 같이 물건을 팔기도 한다. 극 초반 자기는 그딴 짓은 절대 안 한다며 아무도 날 일하게 해주지 않는다던 헤일리는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했을까. 집도, 직업도 없는 그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안에서는 선과 악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션 베이커 영화를 보면 늘 그러하다. 이 영화를 통해 상을 받은 무니 역의 브루클린 프린스의 수상소감처럼 저건 현실이고 세상엔 수많은 헬리와 무니가 있다. 그들이 행복하기 위해 혹은 저런 일들이 사라지기 위해서 정부나 사회가 말하는 것이 정말 최선인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인 것 같다. 첫 연기였다던 배우들과 그들을 완벽히 디렉팅 한 션 베이커에게 박수를 보낸다. 좋은 영화를 봐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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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벌어 하루 살아도 행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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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폴리: 작은 갱들의 도시> 메인 예고편
마피아의 도시, 나폴리. 자연스레 마약 밀매 사업에 뛰어들게 된 십 대 소년 '니콜라'는 거침없는 행동으로 어른들에게도 밀리지 않으며 새로운 실세가 된다. 그러나 곧 다른 구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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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루엘라>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광기 어린 악녀이자 디즈니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빌런 ‘크루엘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