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9-21 23:45:13
[30th BIFF 데일리] 우리가 본 것이 어둠 뿐이라 해도
영화 <극장의 시간들> 리뷰
DIRECTOR. 이종필, 윤가은
CAST. 김대명, 고아성, 원슈타인, 이수경, 홍사빈, 김뜻돌
PROGRAM NOTE.
영화란 무엇인가. 극장은 어떤 의미인가. 두 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극장의 시간들>은 영화와 극장, 관객이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경로를 탐색한다.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는 침팬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매개로 영화의 안과 밖, 관객과 창작자 사이의 벽을 초현실적으로 넘나든다. “이야기가 아니고 함께했던 시간들이 남게 되더라고요”라는 영화 속 대사는 그 어떤 설명보다 더 정확하게 이 영화를 설명한다.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의 제작 현장을 담는다. “카메라가 있는데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할 수 있어?”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수많은 답변을 쏟아낸다. 현실과 화면이 어떻게 다른지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아이들의 말은 뜻밖의 방식으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단순한 장소로서의 극장이 아닌 영화와 관객 사이에 오가는 시간을 담아낸, 소박하기에 더 깊은 메타 영화다. (송경원)
갑자기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통령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분명 한국영화를 보실 것 같은데 과연 무엇을 택하시려나 궁금했는데 바로 이 작품이었다. 이종필/윤가은 두 감독, 김대명/고아성을 비롯한 믿음직한 배우진, 극장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이미 기대 만만이었던 작품을 더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 진흥을 위한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가 이 작품이라면, 과연 여기서 무엇을 보게 될까.
1시간 남짓의 영화는 두 편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 다른 색깔이지만 둘 다 산뜻하고 사랑스럽다. 게다가 이 두편 영화의 전후는 기차 소리 들리는 영사실로 감싸이는데, 기차의 도착으로 시작한 영화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묵묵히 영사실에서 일하는 모습은 관객 입장에서 어쩐지 조금 감동적이다. 저런 느낌으로 일하시는구나. 앉아있는 우리가 다 보이셨겠구나. 눈물 찔끔 닦을 때도, 짧게 웃음을 터뜨릴 때도 다 보이는 자리가 있구나. 영사 기사가 힘차게 영사기를 돌린 후에 타이틀이 나오는 구성은, 이 '극장의 시간들'이 많은 이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빚어진 끝에 관객에게 당도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은 황송한 기분이 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서서히, 그 밥상의 맛을 떠올리게 된다. OTT의 매력도 분명히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영화와 함께 두 시간을 갇혀 있다가 나올 때 영화의 여운이 명치에 남아 내려가지 않고 서걱거리는 감각, 그리고 서로 다른 감상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기쁨은 집에서 OTT를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설령 기억이 안 나도, 영화 보다 잘 잤어도,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도무지 기억이 일치하지 않아도, 영화를 오독하고 왜곡한다 해도... 아무튼 같이 보낸 시간인 것이다. 아마도 나는 내가 꿀물을 좋아하는 침팬지 때문에 울컥했다는 사실을 금방 잊겠지만, 부국제에서 좋은 영화를 하나 더 만났다는 감각은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침팬지>를 보고 나면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영화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침팬지야 잘 지내지? 우리 거기서 또 만나자.
윤가은 감독이 어린이들과 함께 만든 <자연스럽게>는 메타에 메타를 덧댄 영화지만, 수미상관을 이루는 아이의 동그란 표정만큼이나 단순하고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다. 생동감 있는 아이들의 시간은 연기 안팎을 오가며, 그들이 단순히 작품만을 위해 기능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고 이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임을 느끼게 한다.
중간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놀이터에서 뛰는 장면에서는, 꼭 마법 같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자리, 영화의 일부이자 또 동시에 한 사람인 이들의 모습을, 관객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거나 과장해서 보여지곤 하는 그 모습을 더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편을 보고 나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이 찡하게 다가온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시간에 대해 과도한 자부심이나 저자세 없이, 그저 담백한 애정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서 그렇다. 게다가 영화 전후를 감싸는 영사 기사들의 모습까지 더해 보면, 영화의 시작점과 끝점을 찍어 보여줌으로써 그 사이에 공들인 사람들의 존재감을 더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극적으로 느껴지는 역할들이 있다. 바로 관객석이다. 연극적으로 앉거나, 연기의 일환으로 앉는 관객의 자리는 유일하게 영화 제작자들이 채울 수 없는 자리다. 관객석 딱 그 한 자리만을 비워 둠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을 호명한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나고 사랑했던 추억을 돌아보라고, 앞으로도 여기서 만날 다정한 시간들을 그려보라고. 그리고 여기서 또 만나자고.
극장에서 보낸 시간으로 나는 조금씩 깨지고 뜯어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영화들로 조금씩 달라져서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까. 설령 우리가 본 게 어둠 뿐이라 해도, 그 어둠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본 것이 있다. 이 영화는 그 기억을 가슴 뛰는 설렘으로 되살려낸다. 이런 사랑스러운 호명에 응하지 않을 방법을 나는 모른다.
대통령이 왜 이 작품을 골랐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백날천날 영화관이 죽어간다고 위기론만 말하기도 지겨운 요즘, 더없이 산뜻하고 똑똑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한 편에 가슴 뛰어 본 모두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극장에서 만나자고, 티켓을 손에 들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상영을 기다리던 그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고 싶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19 16: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2025.09.20 17:0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2025.09.2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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