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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까2025-09-22 09:38:29

[30th BIFF 데일리] 찬란한 일상과 추억과 삶의 죽음

영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들을 보는데 유독 눈길이 가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일본 특유의 감성을 한 가득 담아낸 푸른 수영장의 이미지, 바로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이었습니다. 상영작 소개를 확인해 보니, 이 청량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이 철거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하더군요. 아아, 이 아름다운 공간을 철거한다니. 이 영화가 스크린에 올랐다는 건 이미지 속 수영장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었지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상실의 아픔을 잔뜩 느끼며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고, 또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Numakage Public Pool



Summary
도쿄 교외 사이타마 시에 위치한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은 52년간 도시 속의 ′바다’라 불리며 지역 주민들의 여름을 책임져왔다. 그러나 시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23년 여름 수영장을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Cast
감독: 오타 신고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다지만

마케팅에는 제품 수명주기(Product Life Cycle)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품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숙해졌다가 결국 사라진다는 개념이지요. 모든 생명은 결국 사그라든다는 진리만으로도 충분히 슬픈데, 생명이 없는 것들마저도 수명이 있다니 참 슬프지요. 그런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처럼 작은 땅덩이에서는 이러한 수명주기가 공간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좁은 땅에서 살아가려면 부수고 새로 짓는 일이 당연하게 반복되니까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역시 학교 건립을 위해 철거가 결정된 공간이었죠. 

인간은 수명 다하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과 슬픔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를 플롯의 장치로 사용해,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의 철거 과정을 죽음에 비유해 바라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이 이미 수명주기의 끝자락에 완전히 다다른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줄고, 수익도 감소하는 그런 시기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의 모습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철거를 앞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죠.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운영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한 마디로 안정적인 성숙기 단계에 있는 공간이 철거되는 셈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죽음에 내몰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마구 없애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아무리 땅이 좁고 공간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이 세상 모든 것에 수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래되었다고 반드시 낡고 쇠퇴한 것은 아니니까요. 

⊙ ⊙ ⊙

공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일상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주변으로 서서히 번져 나가듯, 죽음의 영향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죽음이 그러하듯, 공간의 죽음 또한 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쌓아온 기억이 켜켜이 담긴 공간이 사라지면 그 파장은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크게 울려 퍼집니다. 특히 그 공간이 누군가의 삶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때, 그 여파는 더욱 깊게 다가오지요. 

이를테면 어린이와 노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도심 속 수영장은 멀리 가지 않아도 물놀이를 즐길 기회를 주었습니다.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은 돈이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등한 공간이었지요. 도심 한가운데서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한편, 노인들에게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자 주기적으로 찾는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을 잃고, 패턴을 잃어버린 노인은 결국 빠르게 삶의 활력도 잃습니다. 여기에 영화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이 게이들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극영화적 설정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공간의 소멸은 곧 커뮤니티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공간은 일상의 거점이 됩니다. 그래서 공간은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없앨 공간이라면 애초에 함부로 지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일상의 거점이 되는 공간의 철거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영화 속 장면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 ⊙ ⊙

한 공간의 철거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지만, 이 영화에는 지루함이 없습니다. 죽음과 슬픔의 5단계를 활용한 플롯과 앞서 잠시 언급했던 극영화적 요소 덕분입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구분하기 어렵도록 슬며시 끼워 넣은 극영화적 요소는 영화에 웃음의 결을 얇게 덧입힙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마음이 아려왔지만, 이런 요소들 덕분에 저는 웃으며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을 보내줄 수 있었죠. 죽음과 슬픔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에 '해학'을 보태고 싶어지네요. 

Schedule in BIFF
2025.09.20(토) CGV센텀시티 2관 20:30
2025.09.22(월)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 19:30
2025.09.24(수) CGV센텀시티 3관 16:30


작성자 . 방자까

출처 . https://brunch.co.kr/@hreecord/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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