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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4 23:20:56

[30th BIFF 데일리] 근원적인 부조리의 통각

영화 <말리카> 리뷰

DIRECTOR. 나탈리아 유바로바 Natalia Uvarova

CAST. 이자벨라 캄피에바(Izabella Khampieva), 마레나 카르시에바(Marena Kharsieva)

PROGRAM NOTE.

이혼한 엄마와 함께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던 12세 소녀 말리카는 어느 날, 엄마의 연애 소식을 듣고 들이닥친 아빠로부터, 엄마가 재혼하면 말리카의 양육권이 아빠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엄마와 함께 여름을 보내기 위해 시골의 할머니 집으로 가게 된 말리카는, 대가족과 자연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엄마의 재혼이 현실화되면서, 말리카의 불안도 고조된다. 카자흐스탄의 잉구셰티아계 소수민족이면서 보수적인 이슬람교도인 말리카의 가족들에게, 여성의 재혼과 양육권 문제는 전적으로 남성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말리카의 실존적 불안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엄마의 무기력감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탈리아 유바로바 감독은 아름다운 영상미를 통해 말리카의 고난과 성장의 서사를 솜씨 좋게 풀어냈다. (박선영)

 

 

 

세상에는 참 다양한 문화와 규칙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어디에나 다양한 아름다움과 상처가 있으며, 다양한 부조리가 있다. 오늘의 주인공 말리카는 카자흐스탄에 사는 12살 소녀로, 우리로 치면 올리브영 같은 가게에 가서 친구들과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 바르기도 하고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몸을 흔드는, 전형적인 십 대 초반의 여자아이다. 부모님의 이혼 후 엄마와 둘이 사는 삶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이 생활이 곧 깨질 위험에 처했다는 것.

 

말리카가 사는 곳의 "무슬림 율법"은 이혼한 부부 중 여자 쪽이 재혼할 때 자식을 전 남편, 그러니까 아이 아빠 쪽으로 보내야 한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인지... 남자가 "탈라크(Talaq)"를 세 번 선언하면 이혼이 자동으로 성립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인도에서는 부당한 이혼이라고 판단해 몇 년 전 불법화되었다) 이런 율법은 또 처음 듣는다. 두 사람이 똑같이 결혼하고 똑같이 이혼했는데, 말리카의 아버지는 재혼해서 아이가 둘인데, 엄마는 연애 분위기만 풍겼는데도 행동거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딸을 빼앗기게 생겼다. 그 부조리에서 온 피로가 여름휴가를 앞당겨, 엄마와 말리카는 잠시 도시를 떠난다. 엄마의 고향이자 말리카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으로.

 

그곳은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이다. 한국인 대다수가 처음 들어 보았을 인구시(Ingush)라는 민족이다. 체첸과 공화국을 이루었다가 1992년 분리된 '인구시 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으로 존재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도 고통을 안겨주었던)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도 소수민족으로 일부 거주하고 있다. 말리카의 가족은 이런 케이스로 보인다.

 

 

 

사촌들과 친척들과 보내는 시간의 즐거움보다, 말리카는 기민하게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게 먼저다. 이 영화는 딸과 엄마의 관계선을 세밀한 필치로 포착해 담아냈다. 그런데 엄마는 연신 핸드폰에만 시선이 가 있고, 말리카와의 대화에도 영 건성이다. 마치 말리카의 엄마가 아니라 첫 연애를 시작한 큰언니 같은 모습이다. 결국 사랑을 갈구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말리카와, 말리카의 생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엄마의 남자친구 젤림을 사이에 두고, 엄마 로자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말리카는 적극적으로 엄마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젤림은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이제 관계를 끝내자고 이야기한다. 일하는 꽃집 사장이기도 해서 결혼과 업무 환경, 거주지까지 걸려 있는 젤림을 쉽게 놓을 수도 없고, 결혼하는 순간 전 남편에게 빼앗기게 될 말리카를 놓을 수도 없는 로자 개인의 딜레마가 커다랗고 무겁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은 로자와 말리카 사이의 딜레마다. 말리카의 행복은 로자가 행복을 포기할 때 가능하고, 로자의 행복은 말리카의 행복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 즉 이 딜레마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더 커다랗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이 내 사랑의 행복을 짓누르는 행태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 딜레마가 더 무거운 건, 둘이 같은 고통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행복이 걸린 결정을 두 사람이 내리는 게 아니라, 집안과 종교에서 수염 좀 만진다는 양반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 남성들의 판에 말리카의 아빠이자 로자의 전 남편인 사람은 손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당사자인 말리카와 로자는 밖에서 요리와 시중 그리고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결정권을 빼앗기는 괴로움을 같이 느끼고 있음에도, 나의 선택으로 상대의 행복이 훼손되고 결정권이 빼앗기는 상황에 놓여야 하는 것. 개인의 딜레마, 가장 사랑하는 엄마-딸 사이의 딜레마, 사회적 율법적 무게에서 오는 딜레마로 두 사람은 교착 상태에 다다른다. 그때부터 이 영화의 온전한 해피엔딩은 불가능해진다. 어떤 엔딩이어도 반쪽 짜리 혹은 그 이하의 행복밖에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해 보기도 하고, 상대와 본인의 행복을 태워 보기도 버려 보기도 가꿔 보기도 하면서... 부조리 앞에서 서로를 상처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겪는다. 게다가 영화에는 로자와 같은 딜레마에 처했고 제각각의 결정을 내린 여자들의 이야기가 배경처럼 여러 등장한다. 로자와 말리카가 처한 대치 상태를 겪은 엄마와 딸들이 이미 무수히 있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은 가질 수 없었을까?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대치시킴으로써, 이 영화는 이 대치의 근원, '율법'이라는 탈을 쓴 남성 권력의 부조리를 관객에게 확인시킨다. 서로의 생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결정권을 갖는 게 아니라, "율법"과 "남자다움"을 말할 뿐 둘의 삶에는 관심도 없는 이들이 결정권을 내리는 아이러니를 촘촘한 구조로 영리하게 포착한 영화다. 엄마와 딸의 관계, 사랑이 사랑을 상처 내는 영화로만 읽고 넘어가기엔, 이 영화가 날카롭게 제시한 부조리의 감각이 통렬하다. 햇볕에 빨갛게 탄 말리카의 피부처럼 서서히 덧씌워진 통각이 오래 남는 영화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21 20:2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2025.09.23 12: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2025.09.24 13: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7관

2025.09.25 17:30 CGV센텀시티 4관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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