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5-21 11:27:01
낙원의 밤
푸른바다가 넘실대는 건 제주도일까 내 마음일까
푸른바다가 넘실대는 건 제주도일까 내 마음일까
*스포 있음을 고지합니다*
처음 영화를 정주행 했을 때는 실은, 마지막 15분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렬함으로 무장된 마지막 15분의 반전 (?)이 마담 뺑덕의 이솜 배우를 떠올리는 전여빈 배우의 변신이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뭐가 이렇게 뻔해. 그리고 또 짠한건지. 영화는 물 흐르듯이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잘 흘러간다.
모든 걸 잔인하게 빼앗겨버린 소녀의 흑화.
어젯밤에 영화를 다시 한번 보았다. 꽤 오랫동안 몸이 아파서 한 달 여 동안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으스러지기 때문에. 친구가 영화를 보고 첫 몇 시퀀스들이 마치 단편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정말 그러했나 싶어서 초반 서너씬을 눈여겨 보니 과연, 주인공 엄태구 분을 위시로 한 초반은 '낙원'인 제주도로 가기 전까지 스피디하게 흘러간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가 없다. 태구의 시작과, 동기를 부여해주고, 주변 인물들을 속도감있게 표현해준다.
낮게 읊조리며 캐릭터를 표현한 이 날렵한 배우님 덕분에 한국어 자막을 켜고 다시 본 것도 영화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름답고 상징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초반의 엄태구를 표현한 가장 큰 상징물은 그의 몸을 휘감는 용의 문신. 그의 인생 전체를 깊게 지배하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조직을 상징하고 있었다.
복수를 하려고 했던 태구는 자신이 걸어가는 문이 지옥문이라는 걸 알았을까
영화는 한바탕 칼춤을 추고 제주도로 피신 보내지는 태구가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낙원의 밤 (Night in Paradise)라는 제목을 내비친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 펼쳐질 피비린내. 극명한 색의 대비 속에 감독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장면들을 연출했다.
중간의 여러가지 싸움 씬은 롱테이크가 많아서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전여빈이라는 배우가 '재연'으로 등장하고 나서 영화가 좀 더 입체적으로 살아났다는 느낌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주변 인물들의 개연성이 없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마 이사 역의 차승원의 연기도 나는 나쁘지 않았고, 양 사장 역의 박호산은 정말 한 대 쳐주고 싶을 만큼의 양아치로 보였으니까 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도, 넘쳐흐르는 피도, 어이없을 만큼 약육강식인 밥그릇 싸움도, 아무렇지 않은 살인도, 제주도의 풍경과 태구의 의리, 재연의 반전 속에 묻히는 기분이랄까.
‘낙원의 밤’ 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모든 걸 잃은 재연이 모든 걸 잃고 제주에 내려온 태구에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토로하는 장면.
감독이 그리고 싶어했을 세상에 온전히 둘 뿐인 그들.
그가 머물러 있었던 창문과, 술과, 담배
그리고 같은 공간 다른 시간 그녀가 있던 곳의 술과, 담배
그들이 함께 있었으나 함께이지 못했던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 (괜찮냐는 표현 이상의 것을 해주었다면..)
보니엔 클라이드 같았던 두 사람의 식후땡 장면
감독님의 복선이 드러난 두 사람의 뒷모습. 푸른 바다가 시리다.
마지막 15분의 압권을 연출하고, 클리셰의 절정으로 가지만 연기만큼은 독보적인 당신, 문득 노킹온 헤븐스 도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장면에서 떠올린 영화는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생을 다룬 라스트데이즈였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사실, 태구가 '담궈지던' 날 (아 이 표현 어쩔거야) 에 둘이 마주한 식탁에서의 물회를 소재로 자기 예전 이야기를 막 하던 태구의 모습. 담담하면서 짠하고 애틋한 모습으로 엄마와 누나를 생각하던 그의 모습. 재연이 그의 마음 속에 살짝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자기 어릴 때 이야기하면 상대 여자에게 관심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연애초보 1인
#한줄 요약 _(어딘가에 공모했음)_ 세상에 홀로 남겨진 두 사람이 물회화 함께 마주한 과거와 현재, 피투성이로 서로 보듬어 안은 미래 속에 제주 바다는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넘실댄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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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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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무대 밑에서 울리는 나쁜 아버지의 노래
아네트 (ANNETTE, 2021)
개봉일 : 2021.10.27.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아담 드라이버,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몬 헬버그
무너진 무대 밑에서 울리는 나쁜 아버지의 노래
<홀리 모터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등 지금 봐도 완벽히 마음에 들어차는 명작을 남긴 레오 까락스 감독의 신작이자 2021년 74회 칸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영화 <아네트>. 만일 이 영화를 딱 한 가지 단어로만 표현하라면 나는 '충격'이라는 단어를 고르겠다.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신선하다. 그리고 완벽히 어둡다. 영화를 검색했을 때 기본적으로 공개되는 시놉시스를 보면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영화에는 찬란한 빛과 아주 깊은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어둠이 공존한다.
신선하고 기이한 노래
예고편과 몇 개의 카피들을 보면 <아네트>를 역경에 맞서는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 또는 인생을 노래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앞서 큰 인기를 끌었던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 같은 음악 영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보고 라라랜드 같은 음악 영화를 기대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 감독님은 <홀리 모터스>의 감독이다. 이걸 잊어선 안됐다.
그는 항상 내 예상의 범주를 가뿐히 뛰어넘는, 혼돈 그 자체의 인물임을 잠시 망각했다. 하지만 충격은 잠시였고,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천국에 있다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담금질 당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 지금 뭘 본거지?”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왔지만, 웃기게도 그다음 말은 “개봉하면 무조건 다시 본다. 돈과 체력만 있으면 이틀에 한 번도 보겠어.”였다.
영화 속 인물들이 뿜어내는 복잡한 감정들과 신선하고 환상적인 연출은 기이하게 느껴질 만큼 새로운 모양의 파동을 일으키며 스크린을 압도한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밑바닥을 싹싹 긁어내며 너무도 현실적인 불쾌감을 쥐여주기도 하고, 그 위에 분노와 열망. 사랑, 열정, 이기심 등을 차곡차곡 쌓아 끝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이 폭발의 충격은 내 하루를 빈틈없이 점령했다.
영화의 그 어떤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었다. 정적인 대사가 거의 없다고 느껴졌을 만큼 꽤 많은 수의 노래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노래를 다시 듣자마자 해당 장면들이 대부분 기억날 만큼 이 영화는 나에겐 큰 충격이자 신선함이었다.
올해 극장에서 본 영화 중 Best3안에 들지 않을까. 예상 중이다. 물론 바로 다음날 듄을 관람했으며 남은 기간 동안 이터널스, 프렌치 디스패치, 킹스맨 등의 개봉이 기다리고 있지만.. 여전히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영화의 주제
레오 까락스 감독은 이 영화를 나쁜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고 언급했다. 나쁜 아버지, 이기적인 아버지. 하지만 그와 비례할 만큼 너무도 큰 열망을 갖고 있던 주인공 헨리. 헨리는 내가 서있던 무대 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나의 이름을 소개하고 다른 이들이 나의 이름을 외칠 날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다. 아주 높은 절벽 위에서 성취감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는 발을 헛디뎌 한순간에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인생이란 무대에 어둠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놀라울 만큼 신선한 연출과 자신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 사이에서 정확한 중심점을 잡는다. 연출은 연출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정해진 자리에 앉아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이뤄낸다.
더욱 깊어진 아담 드라이버의 목소리
거기에 헨리 역을 맡은 아담 드라이버와 안 역을 맡은 마리옹 꼬띠아르의 목소리와 이미지 조합 또한 훌륭하다. 대단한 배우들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두 배우의 목소리와 눈빛이 이렇게나 깊고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다.
<아네트>를 보고 온 날 밤, 잠들기 전까지 아담 드라이버만 생각났다. 헨리는 미운데.. 본체는 좋고.. 근데 본체의 멋짐은 유죄고.. 혼자 온갖 생각을 다했다. 내가 기대했던 선을 가뿐히 때려 부수다 못해 아예 가루로 갈아버리며, 내 기대 그 이상을 보여준 아담 드라이버에게 한 번 더 푹 담가져버렸다. 그가 얼마나 더 발전할지.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감이 차오른다.
언급하고 싶은 장면들은 참 많지만 일말의 스포조차 이 위에 쓰고 싶지 않다. 모르는 상태로 이 영화를 감상하고, 영화가 선사하는 충격과 감동에 온전히 빠져보시길 추천한다.
아네트 시놉시스
예술가들의 도시 LA,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 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서로 다른 높이에 서있는 헨리와 안
고상한 취미로 인정받는 오페라 무대에 서는 안과 가볍다고 여겨지는 스탠드 업 코미디쇼 무대에 서는 코미디언인 헨리.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헨리는 은근한 불안감과 의문을 가진다.
“그녀가 날 만나는 이유는.. 그건 잘 모르겠어.”
모두가 사랑할만한, 매일 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박수를 받는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와 그리 높지 않은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는 코미디언. 예술에 등급을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그맨과 오페라 가수를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완벽한 그녀가 왜 나를 만날까. 수많은 사람들과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왜 나와 눈을 맞추는 걸 선택하는 걸까. 안의 퇴근길에 헬멧을 쓰고 등장한 헨리는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카메라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썩 반기지 않는 눈치다.
심연에 빠지다
헨리는 말한다. “난 절대 심연을 바라보지 않지.”
심연을 겪어본 적도, 심연을 바라보려고 한 적도 없었던 인물이 한순간에 심연에 빠진다면? 그 공포와 떨림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서로의 사랑을 믿고 결혼을 선택한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안의 유명세 때문인지 사람들은 안과 헨리에게 끝없는 관심을 보냈고,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낳는다. 헨리는 이렇게 쭉 각자의 무대에 서서 각자의 인생을 이어가며, 집에선 아이의 부모로서 헌신하는, 그런 행복한 삶을 살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안과 헨리의 커리어의 높이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한다. 헨리의 쇼는 취소, 안의 공연은 매진.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헨리와 쉼 없이 상승하는 안. 헨리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절망과 끝없이 상승하는 안의 모습에 열등감을 느낀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헨리는 결국 역겨운 놈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무대 아래로 밀려나고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된다. 한 번도 빠져본 적 없었고, 마주할 생각도 용기도 없었던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울어진 별 헨리는 풀지 못한 욕망에 묻혀 타들어가다 끝내 미쳐버린다.
좋은 아버지이고 싶었던 나쁜 아버지. 그리고 꼭두각시
<아네트>는 또 다른 주인공, 헨리의 딸 아네트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표현한다. 시각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처음 아네트가 세상에 나온 순간, 적잖이 놀랐다. 아이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대체 무슨 의도인 건가 싶었다.
아네트는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헨리의 꼭두각시였다. 아네트가 빛을 받으면 노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는 망설임 없이 안의 친구였던 지휘자에게 찾아간다. 헨리는 안을 닮은 아네트의 목소리와 노래 실력을 기적이라 표현하면서, 그 기적을 이용해 자신이 풀지 못했던 무대에 대한 갈증을 풀어나간다.
헨리에겐 아네트의 목소리가 다시 무대 근처를 기웃거릴 수 있는 기적 같은 찬스였겠지만 아네트에게 그 목소리는 안이 남긴 저주 그 자체였다. 헨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스케줄에 지쳐 축 처진 작은 몸으로 또다시 노래하고,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네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쁘다.
아네트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땐 안아드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던 헨리였지만, 이젠 아네트를 안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 아네트는 엄마 안처럼 드높은 무대 위에서 노래한다. 그리고 그 무대는 마치 절벽처럼 위험해 보인다. 매일 밤 무대 위에서 죽었던 엄마처럼, 아네트도 무대위에서 서서히 지쳐간다. 아네트의 마지막 무대, 모니터 안에 비친 아네트의 모습과 헨리가 공연장 모니터를 통해 봤던 무대 위 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헨리는 자신을 ‘아이의 재능을 썩히지 않는’ 좋은 아버지라고 포장하지만, 실상은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나쁜 아버지였다.
사랑의 저주를 벗어난 꼭두각시
헨리와 안에게 사랑과 노래는 곧 인생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눈이 멀어 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때부터 사랑과 노래는 저주가 되어 아네트에게 스며든다. 무대와 노래, 유명세에 갈증을 느끼던 헨리에게 재능 있는 아이는 사랑의 대상이자 욕망을 이뤄줄 도구였다.
아네트를 향한 헨리의 감정은 처음엔 순수한 사랑이었지만, 심연을 만나며 거친 감정들로 더럽혀졌고, 사랑은 끝내 집착과 저주로 변한다. 말을 하기 시작한 후, 헨리의 죄를 공개한 아네트는 겨우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네트는 훌쩍 큰 모습으로 많이 변했다고 말하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헨리는 많이 변한 아네트를 보며, “심연을 보면 안 된다.”는 말을 남긴다. 결국 심연의 어두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식되어 버린 그는 사랑도, 사랑을 할 자격도 모두 잃고 만다.
아네트는 이제 헨리의 잘못된 사랑을 거부한다. 헨리가 욕심에 눈이 멀어 세계투어를 시킬 때쯤부터 아네트는 헨리의 손길과 뽀뽀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마지막 무대에 이르러선 헨리의 범죄 사실을 알리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난다.
심연을 두려워했던 자가 만든 결말
한순간의 명예를 좇던 예술가는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망가진다. 그리고 그가 섰던 과거의 무대 또한 다시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버렸다. 사랑했던 연인을 사랑이 아닌 분노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헨리는 사랑도, 사랑할 자격도, 꿈도 모두 잃는다.
남은 것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해서 그랬다는 변명으로 끝까지 버텨오던 그는 결국 깊은 심연으로 떨어진다. 가장 두려워했던 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이기적인 몸부림의 결말은 사랑했던 이의 상처와 가파른 추락이었다.
안이 죽은 후 생긴 헨리의 얼굴 상처는 그의 욕심이 짙어질수록 점점 진해졌고 결국엔 빨간 흉터가 되어 자리 잡는다. 되돌릴 수 없는 이 흉터처럼 사랑을 깨고 저주를 만들어낸 그의 선택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결말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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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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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다.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 나도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노래처럼 내가 요절할 천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상, 랭보, 모짜르트, 에곤 쉴레처럼. 어쩌면 나도,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나도 사실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일지 모르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이제 요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젊지도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기가 막히게 똑똑하지도,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내가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참 쉽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듣고 자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반드시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남들 만큼 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지겨운 레토릭이 아직까지도 반복되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내가 실망스럽다가, 때로는 남들보다 못한 내가 서러워 남들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싶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 싶을 때, 우리가 찾는 건 바로 기적.
나 빼고 다 특별한 세상
엔칸토는 이민자 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평화로운 마을의 중심에는 마드리갈 가족이 있는데, 마드리갈 가족은 모두 한 가지씩 특별한 마법을 쓸 줄 안다. 딱 한 사람, 미라벨만 빼고.
미라벨은 힘이 세서 무엇이든 들 수 있는 루이자, 꽃을 피워내는 이사벨라,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돌로레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카밀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페파 이모, 음식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해주는 엄마, 그리고 마법은 못 쓰지만 마드리갈 가족과 결혼한 친인척들과 함께 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문이 열리고 방이 생기는데, 왠일인지 미라벨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미라벨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 가족에게 새로 마법을 받게 될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라벨과 아기방에서 같이 지내던 안토니오다. 안토니오가 문을 열자 넓고 넓은 자연이 펼쳐진다.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생긴 것. 미라벨은 침울해진다.
그때 미라벨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집(까시타)이 갈라지며 흔들린다.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할머니 알마는 미라벨이 마법을 받은 안토니오를 시샘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렇게 미라벨은 모두가 특별한 세상에서 소외된다.
배척의 기억
까시타가 흔들린 뒤 미라벨은 루이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캐치한다. 사실 루이자는 사실 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언제나 불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자의 능력은 은유적이며 수많은 K-장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이다. 예쁜 꽃을 피워내며 뭇 마을 남성들의 이상형, '완벽한 여성' 이미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사벨라도 루이자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실망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알마가 처음 엔칸토에 들어와 살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알마와 남편 페드로는 전쟁 때문에 세쌍둥이 아기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선다. 어쩌면 첫 번째 배척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은 이민자이고, 본토에서 쫓겨나는 신세이니 이미 수차례 배척받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적군에게 쫓기는 이들은 가시적이고 확실한 배척을 경험한다.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알마에게 마법의 힘이 생긴 것은 힘이 있는 자를 쉽게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터. 알마는 이 힘을 마을(이민자들이 모여 사는)에 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 마음도 처음에는 선의였으나 점차 강박적으로 바뀐다. 안토니오가 동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자 '이 능력을 어떻게 쓸지'부터 생각하니 말이다.
마을의 운명이 마드리갈 가족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배척받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마을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가족을 위하여'라는 알마의 집착은 능력을 가진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내려온다.
거시적으로는 국가적인 배척에 대한 공포이지만 미시적으로는 가족 내 배척에 대한 공포이다. 힘들어도 마을의 궂은 일을 다 해내는 루이자, 언제나 웃으며 꽃을 피워주어야 하는 이사벨라, 맑은 날을 유지하기 위해 기분을 통제해야 하는 페파 등 모두가 그렇다. 마법 능력이 없는 미라벨은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배척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기 딱 좋은, 약간 정신이 나간 모양새의 브루노.
브루노에 대해 말하면 안 돼
브루노는 마드리갈 가족의 유일한 우환이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는데도 마드리갈 가족은 쾌활해 보인다. 비결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는 것. 프로이트 식으로 보면 '억압'한다. 아예 모르는 척 해버리면 편하다.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브루노는 가족 내에서 잊힌(이라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브루노의 능력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신내림 같다. 신내림이 과학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병을 앓을 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고,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적으로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 같다는 의미이다. 엔칸토의 배경이 남미의 어느 지역이니 카톨릭 문화에서는 악마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람이 있는 가정은 배척당하기 쉽다.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은 가족 내에서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장애인 시위의 정당성이 도마에 올랐다. 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느냐는 비난이 난무했다. 그동안 장애인 집회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게들 원하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격한 시위는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우리나라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브루노는 자발적으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브루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거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로,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다.
마법은 못 써도 궁금한 건 많은 미라벨은 가족들 몰래 브루노의 방에 간다. 수많은 계단과 무시무시한 동굴을 헤쳐 나간 뒤 발견한 환영 속에서는 무너져내리는 까시타와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브루노 역시 까시따가 무너지는 환영을 봤다. 미라벨의 말이 묵살당하듯 그 누구도 브루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정신 나간 형제이고 미라벨은 재능 없는 자식이다.
우리가 찾았던 기적
미라벨은 까시타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한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고, 브루노와 함께.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두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이 마법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자아를 깨달아갈수록 까시타는 위태로워진다.
결국 브루노의 예언은 이루어진다. 까시타는 무너지고, 가족들은 마법의 힘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미라벨은 집을 나간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못나고 부족한, 가족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자신 때문에.
마드리갈 가족은 엔칸토를 이끌어갔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마법이 그들의 모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동안 마드리갈 가족의 신세를 져 왔던 엔칸토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합심하여 마드리갈 가족의 집을 짓는다. 루이자의 괴력을 쓰지도, 이사벨라가 예쁜 꽃으로 집을 꾸미지도 않고 그저 서로의 힘으로. 더 이상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집이 다 지어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이 열린다.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미라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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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수많은 실패들을 해 왔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실패 그 자체이기 보다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싶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거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기다렸던 기적이 무엇이었을까. 로또 당첨이었나.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지금 무사히 살아있고 내일도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사실이 기적인가 싶다. 순순히 열려 주지 않았던 문을 미라벨이 스스로 여는 것이 기적이고, 특별한 능력이 있든 없든 환대하는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아서,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모든 보통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다.
관람 포인트
스토리나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OST가 당신의 마음을 훔칠 것이다. 루이자가 힙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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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과 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뜬다. 더 일찍 일어나고 싶었지만 12시에 일어나는 삶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아빠한테 ‘아빠, 오늘은 좋은 크리스마스예요’라고 다시 누운 기억만 난다. 그리고 동시에 백수 생활 6개월 차. 빈도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 당시 속은 무진장 쓰렸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까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다시 어학부터 따야 뭐라도 하겠지? 그러나 하고 싶은 공부, 그러니까 인적성과 ncs만 파고 있으니 나도 변덕이 심한 편이다. 왜 필요할 때 필요한 걸 안 하는 걸까? 공부하는 일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뭐든 재미를 붙였다는 것이 희망적이다. 확실히 난 내일이 기다려진다. 그 자그마한 성취감이 쌓이는 쾌감이 어마무시하다. 그전 날 내가 뭘 했던 뭐든 해나가는 과정이 좋았다.
나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불안함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하다못해 유느님도 ‘말하는 대로’라는 음원을 낸 적 있는걸. 그리고 내가 봐왔던 수많은 영상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시기가 불안하다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 내 주위의 누군가도 서류광탈은 아프다고 말한 적 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그냥 정해진 무언가가 있거니-하고? 그동안 많은 걸 깨왔다고 생각했지만 여기가 내 한계일까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하지만 이런 속상한 상황에도 뭔가 즐거운 건 있을 거라 믿는다. 아무튼 내일은 확실히 기다려진다고.
이런 나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아무튼 크리스마스다. 전날 닭강정이 먹고 싶어 아무 데나 가서 결제했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고 오징어 맛 나는 과자만 양의 절반이었다. 적어도 6천 원 닭강정과 10500원어치가 양이 비슷하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도저히 그 오징어 맛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엄마 몰래 쓰레기 봉지에다 갔다 놨다. 이 생각을 하다 갑자기 지금 내가 현재 있는 카페와 내 방 안이 생각난다. 카페는 깔끔한 반면 내 방안은 뭔가 물건이 많았다. 책상부터 시작해 거울, 옷까지 듬성듬성 삐져나온 물건들이 갑자기 보기 싫어진다. 아. 집 가면 방부터 치워야지. 새 해가 머지않았는데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할 일들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노량> 쓴 것도 좀 고치자. 내일은 레이저 제모가 있다고. 아니야. 영어 단어부터 외울까? 하루라도 빨리 어학을 치워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생각이다. 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걸까? 사실 먹고살기만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나는 기자인지 평론가인지 모를 영화 글을 쓰는 게 재미있다고. 그냥 기자로 살아도 힘든 판에 영화기자로 살면 일단 경쟁률에 못 이길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살기로 한다. 그리고 영화 글을 쓸 수 있는 온오프상의 지면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 브런치가 나에게 영예로운 무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수익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재미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있는 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내가 있는 이 카페의 사장님이 음료를 다시 채워주셨다. 한 3년쯤 된 것 같다. 자주 가던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고, 젊은 여자 사장님이 운영하고 있는 곳은 오랜만이었다. 애정을 쏟는 곳에 자주 방문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그리고 정들게 되면 상대도 나에게 정을 쌓는다. 그 쌓은 정은 이후 사람 하는 행동을 결정한다. 20대 초 자주 가던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고 채울 것이 없어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 나를 ‘아들!’이라 부른 카페 사장님도 있었지만 내가 활동하는 시간대(?)와 영업시간이 맞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완벽하게 빈자리를 채우는 걸 무의식 중에 바랬던 나. 조금 모자라보여도 마음 둘 곳을 원했다. 하지만 20대 초 추억이 서려있는 곳만큼의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다행이다. 어릴 때 가던 곳은 사장님이 멋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 아는 사장님은 성격이 정말 좋으시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물론 이 분도 멋있는 분일 것이다). 그래도 내 시간과 맞는 영업시간이 있다는 점에 만족해야겠지. 어릴 때 가던 곳이랑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이스티와 초코라테 맛집이라는 점이다. 초등학생 입맛인 나에게 적합한 곳이다. 아. 이런 내 입맛을 충족시키는 식당도 현재의 카페 근처에 있다. 지금이야 돈 없는 불쌍한 애다. 하지만 한 때 점심으로 ‘초리’ 가서 난반정식 먹고 여기서 공부하면서 카페로 딱 하루를 마무리하면 그 무엇이 부럽지 않았다. 이 식당도 생각해 보면 사장님과 나 사이의 3의 인물 덕에 알게 된 곳이다. 누군가에게 준 애정 덕에 새로운 장소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맛있는 생각을 하다 문득 집에 갈 시간이 됐다는 걸 체감한다. 오늘은 12월 말. 연말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쌓은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는 ‘난 사람 구경을 재밌어한다는 점이다. 연말에 행복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 카페 안에도 몇 커플이 보인다. 좋겠다! 나도 새로운 해에는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딱 체감되는 것이 있다. 바로 해가 바뀌며 소망이 달라진 것이다. 사랑을 찾으면 좋겠지만 딱히 없어도 뭐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진다면 문득 두려워질 것이다. 영화를 못 보고. 글을 못 쓰고. 가끔 책 못 읽고. 처음 가 본 서울독립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 영원히 갈 수 없다면 아득해진다. 언젠가 사랑을 찾을 거야!라는 희미해지는 희망도 나를 살게 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정말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올해 1월에 내가 쓴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분을 우연히 본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네이버 검색에서 찾았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런 반응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 아직까지도 기쁘다. 이런 경험을 하니 다시 목표를 재조준하게 됐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내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의지하게 만든다면 더없이 행복할 거라는 바람이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내 사랑도 언젠가 찾을 것이다. 내 운명 같은 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약해지긴 했어도 내가 원하는 사랑은 아직까지 내 마음 안에 남아있다.
나에 대한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혼자 하다가 다시 내 시선에 집중한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뒤에 알콩달콩 다투는 커플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신발, 그러니까 컨버스를 신고 있었다. 셀카도 찍고 장난도 치면서 방긋 웃고 있다.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저 두 사람도 오늘을 추억하며 행복해할까? 부러운 마음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바로 옆자리다. 두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둘은 친구인 것 같았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여행 온 것 같다. 대놓고 쳐다보면 좀 그렇잖아? 에어팟을 빼고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또 흘깃 쳐다본다. 제주 사투리 억양 자체가 없다. 야. 여기 근처에 뭐가 있다는데?(그 ‘뭐’를 비롯한 여러 단어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여기 한 번 가보자. 야. 내일 우리 여기 가보는 건 어때? 나 여기에서 뭐 사서 가려고. 두 사람은 세상 즐거워 보였다. 제주 여행 좋지. 내가 서울 가서 느끼는 기분을 저 사람들은 느끼는 것 아냐? 그 여행을 서로 사랑하는 친구와 온다면 기쁨이 두 배가 될 것이다. 금세 잘 들리지 않았던 단어 몇 개를 상상한다. 두 친구 중 한 명은 근처 굿즈샵에 가서 선물을 사서 주변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은 것 아닐까? 어릴 땐 몰랐지만 선물은 필시 주는 사람이 더 기쁜 일이다. 새삼 드는 생각. 여행은 이렇게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든다. 동시에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은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매일 있다. 나에겐 아직 그런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이 사랑이 없는 삶이, 또 떠나간 나의 모습이 얼마나 텅 비었을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깊게 배웠던 것 중 하나. 상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생기는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싫었다. 왜 다들 울어야만 하고. 왜 다들 그렇게 사라져야 하는 걸까. 사라지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닭강정의 맛. 같이 치킨 먹는 엄마. 언젠가 만날 내 운명 같은 사랑. 영화와 글쓰기.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와 김혜리의 필름클럽. 우상과 친구들. 이 카페 사장님. 하나하나 찍는 쿠폰들. 내 소망과 꿈까지. 나의 세상을 이루는 무언가가 사라진다면 이내 곧 나머지도 없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다. 이동진 평론가님과 김혜리 기자님이 사라진다면 나의 영화와 글쓰기에 큰 공백이 생길 것이다. 영화와 글쓰기가 사라진다면 나의 감성적인 면모가 어느 정도는 텅 빌 것이다. 닭강정의 맛이 사라진다면 이 카페에서 마실 초코라테의 향을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언젠가 만날 사람들에게 ‘미안했어’라고 말할 일 자체가 사라진다면 언젠가 만날 새로운 사랑도 나의 어리숙함에 도망칠 것이다. 집 안에 혼자 남는 삶이야 뭐 두말할 필요 없다. 이렇게 나의 인생의 많은 것들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난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느덧 싫어하는 것들에 별로 관심을 안 두기 때문인지 이제 생각을 어느 정도는 던 것 같다. 내 주위의 것들이 날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 이 머릿속을 맴돈다. 왜 다들 죽는 걸까. 죽지 않을 순 없는 걸까. 영원히 남아있을 수는 없을까.
<너와 나>는 존재와 상실에 관한 영화다. 세미(박혜수)는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하다. 학교에서 자다가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둘도 없는 단짝친구 하은(김시은)이 죽었다. 뺨에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닦는 세미. 담임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서 조퇴를 신청한다. 될 턱이 없다. 호기롭게 자율학습을 째는 세미. 집에 잠깐 들른 후, 하은이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세미와 하은. 사실 세미에겐 비밀이 있다. 하은이를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언젠가 세미는 하은이에게 널 정말 사랑한다고, 뭐든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려고 한다. 수학여행에 간다면 이 고백이 쉽겠지? 하지만 하은이에겐 사건이 있다. 바로 최근에 자전거에 치여 다리를 다친 데다 가정형편이 충분하지 않아 여행비를 댈 수 없던 것이다. 다급한 세미. 고백도 하고 싶고. 다른 친구들이랑도 지내고 싶고. 수학여행도 가고 싶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너(하은)와 함께 행복하는 것’이었다.
이 <너와 나>는 이 세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존재와 상실에 대해 탐구한다. 네가 없는 세상, 그 나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세미가 없는 빈자리를 보여주거나 하은이가 없는 빈자리를 보여준다. 하은이가 먹던 사과를 세미가 바라본다던가, 주인 잃은 강아지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내보이는 것이 그렇다. 이 존재와 상실을 연이어 보여준 목적은 두 사람의 사랑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없는 빈자리를 쫓아간다(특히 세미를 중심으로 하은이의 빈자리를 탐구한다). 동시에 세상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 서로에 대한 절실함이 모아지는 지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두 소녀가 서로의 빈자리를 체감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 수도 없는 영화를 봤다. 영화 글을 쓰는 것이 삶의 재미 중 하나였던 나. 당연히 영화와 관련된 이런저런 추억이 있다. 2023년 상반기엔 <바빌론>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보고 싶었던 서울독립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후반기에 있다. <너와 나>를 보고 운 기억이다. 난생 안 해본 굿즈 수집이라는 것도 해보고, 티켓을 6번이나 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와 관련된 장소에 가봤다. 수많은 ‘사랑해’를 보면서 먼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누군가 있다 떠나간 자리가 이렇게 황량하고 외로운 것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뽑는 단연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다. <헤어질 결심>과 <소설가의 영화>, <기생충>과 <버닝>만큼의 뛰어난 터치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누군가의 마음에 남기 충분하다. 지나치게 많은 빛의 양. 이기적인 세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하은.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며 ‘사랑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밖의 많은 사람들도 2014년의 4월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잊고 살았던 나. 내가 사랑을 찾아 헤매던 날이 참 더없이 소중했다는 걸 체감한다. 동시에 이 시간 동안 사랑할 일이 많았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거구나. 내가 없는 세상. 그리고 당신이 없는 세상은 이렇게 우울한 것 투성이구나.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이거 정말 큰 의미였다. 이거 하나라도 없으면 이 세상이 무너진다는 의미였다.
난 이 글을 구성함과 동시에 읽어주는 많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온갖 눈물로 가득 찰 것이다. 흐릿한 하늘로 변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맴돌 것이다. 여러분 덕에 생긴 행복한 기억이 우울함으로 변할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어떤 것들이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당신이 줄 사랑이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떠나간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 있는 것들에 따뜻한 것들을 줘야 한다. 그래야 먼저 보낸 이들이 그렇게라도 살아 숨 쉬어 우리들의 마음을 듣고 있을 테니까. 기억공간을 나서면서 느꼈다. 이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었다는 예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올 한 해, 아니 그전부터 이 사회를 떠나간 이들에게 기억하겠다는 말을 전할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 <너와 나>를 만든 스태프들과 감독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김시은, 박혜수 두 배우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각자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언젠가 당신들이 이 글을 읽어 내가 인정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리고, 2014년 4월 우리 곁을 떠난 이들과 또 2023년 이 사회에 있다 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하겠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고생 많으셨다. 새로운 해가 왔다. 다들 힘내자. 사라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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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억 2천만불짜리 특색없는 SF 가족영화
굿 한 번 해야 하나!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와 궁합이 너무 안 좋다. 전작 <그레이 맨>도, 이번 작품인 <일렉트릭 스테이트>도 하나같이 이들이 연출한게 맞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특히 3억 2천만불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번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1990년대 미국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남과 북이냐고? 인간 vs 로봇이다. 인간을 위해 봉사하던 로봇이 자유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것. 하지만 전쟁의 승자는 인간이 되고, 패한 로봇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추방 구역 ‘일렉트릭 스테이트’에 모여 산다. 한편, 교통사고로 부모와 남동생을 잃은 미셸(밀리 보비 브라운)은 목적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동그란 얼굴의 노란 로봇 ‘코즈모’가 그녀를 찾아온다. 인간 세계에서 로봇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법범행위. 본의 아니게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행하게 되고, 괴짜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로봇 동료 허먼과 함께 일렉트릭 스테이트로 들어가게 된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시몬 스톨렌하그의 동명의 그래픽노블을 영상화 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이버펑크 장르인 원작의 세계관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우울하고 공허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작은 로봇과의 여정을 통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건 첨단 기술 사회가 무너진 황폐한 모습이다. 전쟁 이후 방치된 로봇 잔해, TV 대신 가상현실 기술인 뉴로캐스터에 의존하는 사람들 등 어쩌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될 지 모르는 모습을 그린다.
루소 형제에게 이 원작 세계관은 흥미로웠을 터. 감독은 기본 원형과 주요 소재는 가져오되, 영화적 재미를 위해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들을 대거 투입한다. 무엇보다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를 살짝 업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하는데, CG와 모션캡쳐로 구현한 다양한 종류의 로봇들과 흡사 만담군처럼 보이는 키츠와 허먼 콤비가 그 요소다.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레트로 로봇들의 향연 그 자체로 시선을 모으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통해 증명한 크리스 프랫의 실없는 농담은 어느 정도 들을만 하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극 중 세계관은 매력적이지만 새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SF 장르 영화에서 숱하게 봤던 요소들이 자꾸 겹치는 건 물론, 인간 캐릭터들의 매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미셸과 키츠는 물론 빌런 들도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 너무나 예상 가능한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들의 연기 문제라기 보다는 가족 타깃 취향에 맞추다 보니 생긴 문제로 보인다. 액션 수위 조절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캐릭터와 로봇들의 이야기와 매력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예상 가능한 지점까지만 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후반부 대규모 액션도 그렇고 적절히 순화하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온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제작비의 향방만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극 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영화는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연결과 접촉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 장애물이 뉴로캐스터로 나오는데, 영화 속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이 장비에 의존한채 살아간다. 두려움에 휩싸여 전자 기기에 의존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은 더 외롭고 고립되어 가는데, 이는 SNS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판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더불어 로봇과 인간의 대결은 흑인과 백인, 이민자와 미국인의 대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영화 취향에 너무 맞춘 탓일지 이런 현실적인 메시지는 너무 가볍게만 담긴다.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의 협업은 잠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제작비를 최대한 적절히 배치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제작비는 너무 과해보인다. 부족한 완성도가 계속 눈에 밟힌다.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2.0 / 5.0
한줄평: 너무 과한 제작비, 너무 부족한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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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과 행운은 동전 앞 뒷면 차이
루비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농인이라 듣고 말하지 못하는 가족들 대신 일도 도와야 하고, 생선 냄새 난다는 친구들의 따돌림도 견뎌내야 한다. 그런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인생에도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학교 음악 선생님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아 그녀를 버클리 음대에 보낼 목적으로 개인 과외를 시켜준 것이다. 답답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을 간신히 지탱해주던 음악, 그 음악이 그녀의 암울한 삶을 구원시켜 줄 수 있을까?
1. 소리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
루비는 가족과 대화할 수 없다. 그녀의 가족은 농인이기 때문이다. 수어로 대화를 하긴 하지만 집 안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렇게 안팎으로 외로운 루비는 음악을 벗삼아 살아간다. 가족들은 그녀가 아무리 크게 소리지르며 노래를 불러도 모르기에.
하지만 가족들은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렇게 참석한 딸의 음악회에서 그들은 한없이 연기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딸이 노래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소리는 무음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적절한 타이밍에 박수를 치지만 그들 가족만은 모두의 눈치를 보고 한 템포 늦게 박수를 쳐야 한다. 루비의 듀엣 무대씬 중에서 루비의 노래가 음소거되는 연출을 통해 그들의 무음만 가득한 세상에 대해 체감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루비가 열심히 연습한 노래를 못 듣는 것보다 가족들이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감정적인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루비의 아빠가 루비에게 한 번 더 노래를 부르게 하고서는 그녀의 성대를 만지며, 노래를 느끼는 장면에서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비로소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이었다.
2. 독립은 서로를 강하게 만든다
가족은 우애있게 언제나 함께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족 간에도 적당한 거리는 필요하다. 인간은 평생 가족만을 위해 살아갈 순 없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까지 희생하는 것은 폭력에 굴복하는 것과 같은 패배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정도껏이어야 가족과의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비가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선택한 것은 루비 본인을 위해서도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루비가 없는 삶도 익숙해져야 그들도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것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을 도맡아 희생할 순 없는 일이다. 가족들 앞에서 더 냉정해져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오래 지키려면 언제나 그들이 영원토록 함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떠날 시기를 잘 정해야 한다.
3. 총평
장애를 가진 이들을 잘 이해하고 만드는 영화가 많아져서 기분이 너무 좋다. 코다라는 제목은 농인 가족에서 태어난 청 인 자녀라는 뜻이던데, 루비가 가족을 위해 오디션장에서 수화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코다라는 사실은 그 그녀가 가려야 할 맹점이 아니라 되려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청인 뿐만 아니라 농인 팬덤까지 구축할 만한 예술 인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은 나쁜 일만 주지 않는다. 동전을 뒤집으면, 불운은 어느 순간 운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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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의 차원을 넘어서라
인간은 몇 차원에 살고 있을까? 또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얼만한 크기일까? 인간은 우주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받은 류츠신의 <삼체>. 요새는 SF소재를 단순하게 미래에 대한 상상력, 혹은 판타지 수준에서 채용하는 소설과 영화들이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차원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주고, 1,2,3부로 이어지면서 그 차원의 세계는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무한히 위로 올라가 버린다. 차원의 깊이가 우주만큼 깊고 넓어, 책을 다 읽고 다시 지구의 작은 집에 앉아있는 나를 인식하면 한없이 작아진 나를 느끼게 된다. <삼체>는 '삼체문제' 그 자체보다, 우주의 다차원을 다루며 차원과 차원사이에 일어나는 일, 고차원과 저차원의 인식, 차원끼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삼체문제'는 그저 다차원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면 <삼체>에서 보여주는 '삼체문제'란 무엇이며, 차원이란 무엇인가?
삼체문제
삼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 물체를 말한다. '삼체문제'라는 것은 세 물체 간에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세 물체는 어떤 궤도운동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삼체문제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즉 이체에 가까운 세상인 지구에 살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이 압도적인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궤도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각각 행성의 위성들도 모성과 질량차이가 커서, 대부분 안정적으로 돌고 있다. 다만 지구의 위성인 달이 일반적인 위성보다 비정상적으로 커서 둘 궤도의 중심점이 지구 중심에서 좀 많이 비켜나 있기는 한데, 역시나 안정적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평면적인 공전궤도면을 따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사는 태양계의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크기 두 개인 쌍태양이라면, 행성들의 움직임은 이보다 더 복잡한 면을 그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태양이 쌍성이 아니라 세 개여서 삼체가 된다면, 그 세 태양의 움직임은 계산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 이체세상에 살고 있다면, 삼체세상은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인 셈이다. 더군다나 4체, 5체, 다체로 가게 되면 아예 궤도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양성자와 전자 한 개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원자인 수소 말고, 전자가 하나 더 늘어난 그 이후 원자부터는 궤도모델을 만들 수 없는 것도 그 이유다.
<삼체>에 나오는 삼체인들의 항성은 지구에서 대략 4광년 떨어진, 가장 가까운 항성들인 센타우르스의 알파성을 모티브로 했다. 알파성은 하나의 별인 줄 알았지만 관측결과 2개의 항성으로 된 쌍성계이고, 조금 더 태양과 가까운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적색왜성이다. 이 세별은 서로 중력의 영향을 받는 삼연성계이다. 이 삼연성계에 생물이 사는 행성이 있다면, 거기에 사는 생명의 우주관은 우리와 아주 다를 것이다.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일정하게 도는 달과 태양 때문에 하늘을 평면적인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하는 '천구'개념이 있었지만, 삼체운동을 하는 항성들이 하늘을 돌고 있다면 하늘을 처음부터 3차원 입체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구의 인간은 독특한 음양론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태양과 달의 크기가 우연히도 정확히 같아 보이기 때문에 생긴 철학이다. 이런 행성은 아마 삼체성계만큼 엄청나게 드물 것이다.
삼체의 궤도를 표현한 애니메이션. 너무 불규칙한 데다 항상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삼체문제가 아예 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상황에서의 해는 밝혀졌다. 위는 동일한 질량, 각운동량이 없는 상황에서의 해 중 하나인 8자 모양의 해.
인식의 한계차원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입체. 우리는 흔히 인간은 3차원, 시간까지 더해서 4차원을 우리의 차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크기에 대한 제한적 차원이다. 우리는 인간세상이 입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적인 위치에서 보면 거대한 지구라는 행성표면에 붙어살고 있는 2차원 생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차원을 진정한 3차원으로 한 단계 높여주는 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지구를 넘어서서 태양계도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점도 벗어나지 못하는 0차원의 존재인 셈이다.
인간보다 거대한 차원이 아니라 작은 차원은 어떨까? '그래핀'은 탄소원자 한 겹의 배열로 이루어진 2차원 물질이다. 인간이 볼 때 그것은 2차원이다. 하지만 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원자 속 에는 양성자와 전자가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그보다 더 작게 들어가면 초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11차원이라고 하고, 여분의 차원은 작게 말려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작은 차원들, 혹은 더 큰 차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지구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일 뿐이다.
차원에 대한 소설은 1884년 에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2차원 정사각형이 1차원과 3차원으로 갈 때의 묘사가 훌륭하다. <플랫 랜드>에 나온 바에 의하면, 2차원 생물은 상대방을 위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선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중간에 3차원 구가 나타나면, 선이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는 구의 단면만을 인식한다. 이 흥미로운 차원 간 세계의 설정은 <삼체> 전체에 깔려있다.
또한 인간이 지동설이 검증하는 과정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해 큰 교훈을 준다. 처음 지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에서는 무작정 천동설을 믿고 탄압한 게 아니다. 당시 신부들은 가장 머리가 좋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돈다면, 반대편에 있을 때 별들의 위치가 달라져서 연주시차가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인간의 관측기술로는 연주시차를 측정할 수 없었고, 별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결국 지동설이 연주시차로 검증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망원경과 천체관측기구가 발달하고 나서다. 위에서 언급한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계여서 연주시차가 가장 큰 센타우르스의 알파성 연주시차는 2/10000도이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전혀 관측할 수 없다.
최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한 가장 큰 과학적 성과는 중력파의 검증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은 공간의 휘게 만드는데, 이것이 곧 중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량에 변화가 생기면 그 시공간의 휘어짐이 빛의 속도로 파동처럼 전달되는데, 그것이 중력파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휘어짐은 중력 변화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서, 이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한 장치 LIGO를 만들기 전까지 측정한다는 것은 꿈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시로 중력파를 검출하고 있고, 소설 <삼체>에는 나중에 중력파를 통신기술로 이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중력파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우리가 우주를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 한 차원 높은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주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른다. 우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으며, 인간이 관측한 100년 남짓한 데이터로 우주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과학들이 밑바닥부터 모두 허물어진다면, 우주의 별이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스크린이어서 마음대로 깜빡일 수 있다면, 오늘부터 1+1이 2가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벌레처럼 주저앉게 될 것이다. <삼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vs 소설
소설 <삼체>는 나왔을 때부터, 영상 매체로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다른 대하소설처럼 물량이 많고 이야기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글로 풀어서 썼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에 비하면 진행이 느리고 묘사가 많은 데다, 많은 부분을 이미 만들어진 클리셰를 거부하고 작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미래 세계를 새로 구축해 나간다. 요즘 SF작법으로 비유하자면 글 쓸 때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만들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이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가 있긴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1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중국인 위주로 흘러가는 1,2,3권의 주인공들을 '옥스퍼드 동기 과학자들'로 모두 한 곳에 모아놨다. 그중에도 주요 인물들은 중국인으로 유지하고, 3권의 주요 캐릭터인 토마스 웨이드가 다른 캐릭터들과 합쳐진 모습으로 등장해 매력을 뽐낸다. 게다가 소설대로 진행했으면 조금 느리고 지루할 수 있는 흐름을, 1,2,3부의 내용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빠른 전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은 많이 간략화했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쉽고, 전개가 빠르며, 거기에 '영국 이민자들의 서사'를 추가로 부여해 더 글로벌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축약해 버려서, 인류 전체가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나 캐릭터의 서사들은 많이 없어졌다. 특히 소설 2권의 주인공인 '뤄지'를 대체한 사울은 나중에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가벼운 캐릭터가 많이 아쉽다. 원래 사울의 역할은 우주 사회학 교수로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고, 상상력과 내면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그런 서사가 시즌 1 동안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설 3권의 주인공을 대체하는 진 청과 윌리엄 다우니의 서사만큼 쌓았으면 좋으련만.
드라마가 아직 시즌1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개나 주제, 철학까지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등장하는 몇 가지 과학기술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입자 가속기/카미오칸데
베라 예는 옥스퍼드 입자가속기에서 일하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뒤돌아 나가는데 금색 구슬이 가득 있는 거대한 구 모양의 공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이건 여러모로 전혀 맞지 않는 연출인데, 베라 예가 떨어져 죽는 곳은 카미오칸데라고 하는 일본의 중성미자 검출장치이기 때문이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고속으로 운동하게 만들어서 충돌시켜 중성미자 등 다양한 입자들을 검출해 연구하는 곳인데, 거대한 도넛처럼 생겼다. 카미오칸데는 일본에 있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다. 그냥 두 개가 같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중성미자를 만드는 장치와 우주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가 같이 있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그건 지하철 옆에 지진계를 설치한 것처럼 이상한 짓이다. 아마 제작진이 그냥 멋으로 넣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 입자물리연구소-세른이 나오는데 정문에 파괴의 신인 시바신 동상이 있는 것은 진짜다. 실제로는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때문에 입자가속기가 블랙홀을 만들어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유럽의 강입자가속기 CERN에 있는 시바신
입자 가속기는 입자를 충돌시켜 연구하는 곳인데, 유럽의 CERN처럼 도시만 한 것도 있지만 정말 다양한 크기의 입자가속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병원에도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원형 입자가속기가 한국 최초의 입자 가속기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입자로 PET촬영을 했었다. 입자가속기로 다양한 입자의 성질과 발견을 해왔고 쿼크나 힉스입자의 발견 등 아주 중요한 연구와 발견을 하는 장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실험결과가 누가 장난친 것처럼 모두 틀어진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헛된 것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마치,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는 주인을 본 칠면조가 지금까지의 논리로 '이 시간에 먹이를 주러 오는 사람'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했는데, 어느 날 먹이를 주는 줄 알았던 주인이 칠면조를 잡아 죽였고 그날은 추수감사절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자(智子, Sophon)
위에서 언급했듯, 초끈이론-M이론에서는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다른 차원들은 작게 말려있다. 그 차원을 2차원으로 모두 펼친 다음, 그곳을 컴퓨터로 만들어 넣고 다시 차원을 말아 넣어 양성자로 만든 것이 지자이다. 전자, 양성자와 같은 소립자가 지혜를 가졌다 해서 智(지혜 지) 자를 붙여 지자(智子)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영어이름인 sophon도 지혜를 뜻하는 sophia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고차원을 저차원에 펼치면 전개도가 되는데, 차원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 전개도의 모양도 아주 복잡해지며 펼쳤을 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만들어진 소립자 컴퓨터다. 이런 저차원 펼침, 고차원 말림, 차원과 차원이 만나는 것, 고차원이 저차원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삼체>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주요 소재다. 특히 지자가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고 다시 펼쳐졌던 양성자를 축소시키는데 그건 칼라비-야우 다양체의 모습이다. 칼라비-야우 다양체란 M이론의 대가인 에드워드 위튼이 말한 여분의 6차원을 시각화 한 형상이다.
6차원을 말아서 구현한 칼라비-야우 다양체
또한 지자는 쌍으로 만들어져, 양자 얽힘을 이용해 거리에 관계없이 4광년이나 떨어진 삼체 본대와 소통할 수 있다고 나온다. 이 부분이 과학 매니아들에게서도 오해받는 부분인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자 얽힘으로는 빛보다 빠른 통신을 할 수 없다. 얽혀있는 양자의 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얽힌 다른 양자의 상태가 반대로 나오는 것이 양자 얽힘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양자의 상태를 바꾼다고 해서 나머지가 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관찰을 시작할 때의 상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 양자 얽힘으로 무언가 통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진 작가의 상상력이다.
어떻게 이 지자는 사람의 눈에 카운트다운을 새기고, 별을 깜빡이게 만들고, 전 세계의 통신을 장악할 수 있을까? 지자는 양성자의 크기이므로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즉 어느 한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며 질량이 0에 가까우므로 광속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인간의 망막에서 별빛을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고, 카운트다운을 망막에 새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지금까진 전기로 하는 통신장치(스피커)가 필요하다.
혹여나 양자역학이 현대 물리학을 깨는 게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뿐이지, 수학적으로는 너무도 명확한 현대물리학이다. 현대 과학은 이미 양자역학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 때, 전자를 공유하는데 그것도 양자역학이다.
나노 섬유
나노 섬유는 나노미터 굵기의 섬유를 말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온 분야로, 지금은 탄소나 아라미드, 금속 등 다양한 소재로 나노 섬유를 만들고 연구하고 있다. 나노미터가 얼마나 가는 것인가 하면, DNA가 3 나노미터의 굵기이고 탄소 나노튜브는 1 나노미터이다. 현재 개발된 탄소 나노튜브등은 철의 100배의 강도를 가졌지만, 원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무언가를 자르기보단 전기전달효율이 높고 작은 곳에 배치해 만들 수 있어서 초소형 회로나 가볍고 강한 섬유를 만드는데 주력하는 물질이다. 강도가 강하면 다이아몬드도 자를 수 있지만, 잘 휘어지지 않아 끊어지기가 쉽다. 또 드라마 <삼체>의 하이라이트인 '나노 섬유로 적들을 동강내기'에 나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다. 배가 잘릴 것인지 섬유를 묶은 기둥이 먼저 잘릴 것인지도 여러 계산과 연구가 필요하다.
탄소 나노튜브는 2차원 물질인 그래핀을 말아서 만든다.
이 부분은 나노 섬유에 대한 과학도 과학이지만, 1차원 물질에 가까운 나노 섬유가 3차원 물질과 닿아서 파괴해 버리는 '차원의 맞닿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3차원 생물을 4차원의 생물이 들여다본다면, 3차원 생물이 2차원 생물을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지구인보다 고차원의 세상 - 삼체성계를 가진 곳에서 더 높은 차원의 과학을 가진 삼체인이 보기에, 비록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벌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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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체>는 소설의 긴 흐름을 흥미 있게 각색해 연출했지만, 그래도 시즌1이 다 가도록 외계인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아 의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지구가 멸망하려면 400년이나 남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삼체>의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다른 여타 이야기가 인간끼리 벌이던 함대전쟁을 빗대어 '외계인과의 전쟁'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동양에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순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우주가 팽창했다 수축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예원제는 그저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억하심정으로 삼체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삼체인 들은 자신들의 항성계를 떠나 지구에 살려고 오는 것이지만,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은 선이 아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아직까지는 꽤나 잘 각색했다 생각하고,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 않게, 동양철학을 놓치지 않고 다음 시즌을 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좌의 게임> OST를 만들었던 라민 자와디의 <삼체> 메인 테마를 들으며 삼체인들을 기다려볼까. <삼체> 답게 3박자에 화음을 엇갈리게 넣어놔서 삼체성계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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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번역할 때, 영어로 3-body라고 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인 Santi를 그대로 썼다. 단체를 만든 예원제가 중국인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공교롭게도 Santi는 산타클로스의 애칭인 santy와 발음이 같다. <삼체> 드라마에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비유로 중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한다.
*지자가 동양인에 사무라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智子이기 때문이다. 智子는 토모코라는 일본 여자이름이기도 하다. (영어로도 Sophia는 여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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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기에 있다 - 좋은 재료로 끓인 라면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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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4월 12일 개봉하는 작품
[나는 여기에 있다]의 개봉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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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폐를 찔린 후 장기 이식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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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끓는 형사 VS 폭주하는 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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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를 선물 받은 '마리아' 부부에게 닥친 예측할 수 없는 A24 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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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이스> 메인 예고편
부산 건설현장 직원들을 상대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보이스피싱 전화로 인해 딸의 병원비부터 아파트 중도금까지,
당일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같은 돈을 잃게 된다.
현장작업반장인 전직형사 서준(변요한)은 가족과 동료들의 돈 30억을 되찾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중국에 위치한 본거지 콜센터 잠입에 성공한 서준,
개인정보확보, 기획실 대본입고, 인출책 섭외, 환전소 작업, 대규모 콜센터까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스케일에 놀라고,
그곳에서 피해자들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기획실 총책 곽프로(김무열)를 드디어 마주한다.
그리고 그가 300억 규모의 새로운 총력전을 기획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상상이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실체!
끝까지 쫓아 반드시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