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1-07-13 17:41:58
<퐁네프의 연인들> -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The Lovers data-on The Bridge)
개봉일 : 1992.04.18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나에게 <퐁네프의 연인들>은 명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왠지 ‘그날의 기분’에 끌리지 않아 밀려버렸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한 개봉작이 아닌 이상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영화를 본 당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단 다가올 상실을 걱정하며 스스로 길거리에 나앉은 미셸과 길거리를 내 집 삼아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가는 노숙자 알렉스. 두 사람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만난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 다리 위.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미셸을 발견한다. 미셸은 알렉스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길거리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멀어버리기 전, 제대로 알렉스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수 중인 불완전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결핍으로 가득 찬 알렉스와 미셸. 두 사람은 가진 게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처지인 두 사람에게 남은 게 있겠는가. 돈도 직업도 지금 당장 만날 인연도 없는 (미셸은 자발적으로 버리고 나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니. 또 다른 노숙자 한스는 알렉스에게 묻는다. “네 주제에 사랑을?”
현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애, 즉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나를 가꿀 시간도 모자라서, 나를 건사하기도 벅차서. ‘가진 게 없어 연애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빠르게 포기하는데,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을 한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한다. 내가 상상하던 완전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분명 강렬한 빛깔의 로맨스였다. 퐁네프 다리 위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을, 알렉스의 물음에 미셸이 답을 내리던 그 순간을, 사랑을 잃을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퐁네프의 연인들 시놉시스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내 삶을 선택할 거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알렉스의 삶은 퐁네프 다리 위에 있다. 알렉스가 언제부터 그 다리 위에서 살아온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다듬은지 오랜 기간 지난듯한 몸. 그리고 자연스러운 절도 행위. 알렉스는 퐁네프 다리가 보수작업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다친 발을 이끌고 다시 다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성 미셸. 그녀는 육군 대령의 딸이다. 꽤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왔을 걸로 예상되는 그녀는 그림 작가였지만, 헤어진 연인 줄리앙에게서 받은 상처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떠밀려 길거리를 떠돈다.
미셸은 총과 함께 줄리앙에 대한 미련을 품고 퐁네프 다리에 누워있다. 그녀는 역사에서 우연히 줄리앙의 첼로 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뒤를 뒤쫓는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이 미셸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미셸의 뒤에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남자 알렉스가 있었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총과 함께 미련을 버린다. 7발은 미셸이 7발은 알렉스가.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의 행운을 위해. 알렉스와 미셸은 음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번갈아 총성을 울리며 함께 미련을 지워버린다. 그 날밤, 두 사람은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내일 아침 네가 날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은 세상. 온 도시가 잠든 후에 시작되는 둘만의 시간. 불면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팔. 이런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바람 부는 다리여도 상관없었고, 모래가 가득한 바닥은 포근한 매트리스가 되어 두 사람을 넉넉히 감싼다.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랑을 한다. 마치 갓 세상에 태어난 동물들이 첫 발걸음을 떼는, 본능을 따라가는 그 순간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엇도 알렉스와 미셸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
알렉스는 미셸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간절함은 지하철 역사를 헐떡이며 뛰게 만들었고 끝내 포스터가 들어있는 차와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 한 명을 불태우기에 이르지만, 미셸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이 갖고 있던 라디오는 선이 끊긴 채 방치되었고 알렉스는 미셸 몰래 숨겨뒀던 총으로 왼손 약지를 쏜다. 보통의 연인들은 왼손 약지에 껴둔 반지를 빼며 이별을 실감하는데, 알렉스는 커플링 대신 자신의 손을 쏘며 이별을 맞이한다.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였다면 의미 있는 물건 하나쯤은 남을만한데, 가진 것 없이 이뤄진 둘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방화와 과실치사로 복역하게 되고 2년쯤이 지난 후 미셸은 알렉스를 찾아온다. 시력을 회복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라, 잃었던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미셸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은 순간이 아닌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음을 그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했던 순간이, 모두가 잠든 후에 마음껏 도시를 누리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알렉스와 미셸은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퐁네프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두 사람을 받아준 화물선 위에서 다리 위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두 사람이 만일 다른 시간대에, 퐁네프 다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미셸이 절망감에 휩싸여 퐁네프 다리에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등을 뉠 수 있었던 퐁네프 다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겠지. 퐁네프에서 만난, 퐁네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퐁네프의 연인이 어쩌면 이 두 사람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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