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1-07-29 12:51:11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영화 〈우리, 둘〉 리뷰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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