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1-07-30 09:11:49
<모가디슈> 냉정함과 절제미로 써 내려간 생존기
<모가디슈>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남북한의 치열한 외교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의 '림용수(허준호)' 대사가 '태준기(구교환)' 참사관을 통해 남한의 외교행낭을 탈취해 소말리아 대통령과 남한 대사 '한신성(김윤석)' 간의 면담을 방해하자, 안기부 출신인 '강대진(조인성)' 참사관은 북한이 소말리아 반군에 무기를 판매한다는 증거를 확보해 북측을 압박한다. 이처럼 남북한 로비가 절정에 이르던 때에 소말리아는 돌연 내전에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한 대사와 강 참사관은 통신마저 끊긴 그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직원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림 대사를 필두로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남한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고, 남북한의 외교관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한 비공식적 협력에 나선다.
소말리아 내전 때문에 고립된 남한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함께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사건을 영화화한 <모가디슈>는 보는 맛이 살아있는 블록버스터다. 우선 류승완 감독답게 호쾌한 액션신이 눈에 띈다. 빠른 리듬감에 짧은 쇼트를 더한 대인 격투 장면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타격감을 전달하며, 긴장감을 가득 끌어올리는 카 체이싱 장면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소말리아 대신 모로코에서 이루어진 로케이션 촬영의 결과물은 시장이나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지나가는 동선과 카메라 워크, 그리고 수도인 모가디슈의 전경을 담은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블랙 팬서>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 같은 아프리카 고유의 리듬이 극대화된 음악도 보는 맛을 더해준다.
다만 <모가디슈>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냉정하고 절제된, 동시에 깊이 있는 드라마의 힘이다. 실제로 클리셰 범벅이 될 수 있는 사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캐치한 <모가디슈>의 드라마는 기존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영화는 소말리아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펼치는 외교전과 외교관들의 필사적인 탈출기를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다룬다. 여기까지만 보면 <모가디슈>는 <JSA 공동경비구역>부터 <의형제>, <고지전>, <공조> 등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숱하게 활용되었던 클리셰, 남북의 긴장관계를 상기시킨 후 동포의 이름으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한국영화의 전형적인 전개를 따라간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모가디슈>는 '생존'이라는 테마를 강조하며 변주를 준다. 이번만큼은 동포애가 남북이 협력하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 혼란 속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남한 측에서 공관이 반군의 습격을 받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가족들을 받아주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망명시켜서 실적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반대로 북측 역시 인도적 차원에서 보호를 호소하지만 동시에 여차하면 공관을 탈취하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이 동상이몽은 양측이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생존을 확신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깨진다.
또한 생존이라는 테마가 조성하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절제된 분위기 안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전후반부는 매끄럽게 연결된다. 외교전이 펼쳐지는 전반부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생존, 구체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남북한의 대립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남북한은 소말리아를 비롯해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신에게 UN 가입 찬성표를 던지게끔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였는데, 이는 국제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고 체재 경쟁을 주도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러닝 타임 내내 남북한의 외교관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이처럼 동포애라는 감성 대신 자국의 이득과 생존이라는 현실을 위해 움직이는 남북의 모습은 한 대사가 림 대사에게 진심으로 '외교'를 하자고 말하는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의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스탠스는 작중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자막의 존재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가디슈>는 북한말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자막을 삽입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이는 감독의 전작인 <베를린>에서 북한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 전체적으로는 북한과의 관계에 섣불리 감정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선을 그어버리는 드라마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북한말을 일반적인 외국어처럼 자막으로 처리한 이상 영화 내에서 북한은 단지 말이 조금 더 쉽게 통하고 약간의 특수성이 있는 외국, 그 이상 그 이하의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으레 기대할만한, 작중 남북한 인물이 동질성을 확인하는 장면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밤늦은 식사자리에서 남과 북의 직원들이 반찬을 나눠 먹고, 짧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탈리아 대사관을 찾은 한 대사와 강 참사관이 '북한 측 인원을 왜 받았을까'하고 후회할 때 문득 튀어나올 뿐이다. 이처럼 철저히 냉정하고 국제 외교적 현실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엔딩까지 유지된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기는 한다. 남북을 대변하는 한 대사, 강 참사관, 림 대사, 태 참사관 네 인물을 제외한 캐릭터들에게는 자유로이 움직일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둘 만한 인물이 부족하다. 하지만 침착하고 냉정한 영화의 전개와 끝맺음은 분명 결과적으로 실보다 득이 많은 선택이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남북 인물들의 이야기에 남는 긴 여운은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게 하고, 그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며, 역으로 드라마를 더 애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없는 눈물도 쥐어 짜내려는 신파나 국뽕이라고 부르는 일방적인 애국심 주입을 피한 <모가디슈>의 드라마는 심지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두 장면이 대표적이다. 대사관 건물 앞에서 시위대와 정부군이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 대사관은 '한국이 소말리아의 평화로운 친구이고, 서로의 이익을 언제든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음성 메시지를 전파한다. 또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 남북한 인원들을 사이에 두고 소말리아 반군과 정부군, 그리고 이탈리아 대사관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이 장면들은 제국주의 지배국, 피지배국의 독재정권, 그 독재정권에 로비를 벌이던 외국 정부, 그리고 피지배국의 실질적 주권자인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으로 "과연 이 사태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부당거래>나 <베테랑> 등에서 악역의 행태를 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 전체적 맥락 안에서 바라보던 류승완 감독의 장기가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적 맥락에서도 발휘된 결과다. 또한 이는 한국의 입장에서도 인상적인 질문이다. 남북 간의 특수 관계에서 벗어날 경우 제국주의 식민통치, 군사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하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과연 외교적으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한 번쯤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모가디슈>가 명시적으로 소말리아의 근대사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영국의 식민통치와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배력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가 남긴 과제와 현실을 직시하고 느끼는 데는 문제가 없으며, 이는 <모가디슈>의 드라마가 시청각적 쾌감에 앞서 주목받아야 할 또 다른 이유다.
사실 <부당거래>와 <베를린>을 거쳐 천만 영화인 <베테랑>으로 최고치에 올랐던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스크린 독점부터 역사 고증 부실 및 식민 사관 문제에 이르는 여러 이슈들로 인해 <군함도>가 비평과 흥행 양 측면에서 모두 실패를 맛본 게 결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가디슈>는 그의 변화와 반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장점에만 기대지 않았기에 이는 더욱 의미가 크다. 그간 류승완 감독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뛰어난 액션이라는 빛의 그림자에 다소 가려진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작품을 두고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블랙 호크 다운>과 같은 작품을 먼저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절제된 감정선을 살리고 실화의 긴장감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옮긴 <모가디슈>는 마치 <베를린>과 벤 에플렉의 <아르고>를 더한 듯 예상치 못한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고, 류승완 감독의 재기도 멋지게 장식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새로운 결정구를 장착해 돌아온 류승완 감독의 재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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